-
-
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인생을 만나다 ㅣ 내 인생의 사서四書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2월
평점 :
내가 중용을 다시 읽어야겠다 작심한 건 절대 이 책 때문이 아니다. 잃어버린 지평선을 다시 읽고 이 구절이 중용에서 나왔구나 뒤늦게 깨달은 부분이 있어 다시 읽어야겠다 결심한 것이다. 대학 시절 읽은 책은 너무 낡고 한자가 많아 골치가 아팠고, 이현주 목사의 대학중용 읽기는 다시 읽어도 좋았으나 내게 너무 먼 하나님 말씀들이 간혹 치우친 해석을 의심케 했다. 이 기회에 새로운 중용 책을 하나 장만하자 싶어 검색하다가 책 제목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난 이 책을 제목 때문에 고른 것이 아니다.
이현주 목사의 책을 내려놓자마자 이어 읽다 보니 비교해서 보게 된다. 다만 중용의 장대로 책을 쓴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주제를 뽑아 이리 저리 발췌하니 결국은 두 권 다 펼쳐놓고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며 읽어야 했다. 이현주 목사도 완역이 중심이 아니라 애 먹었는데 신 선생은 한 술 더 뜨시는구나 절로 한숨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용 독파가 목표가 아니라면 수이 읽히는 건 단연 이 책이라 추천하고 싶다. 특히 이현주 목사의 중용에서 TPO로 해석될 수 있었던 부분이 이 책에서는 보편성과 특수성에 따른 行이라 해석된 부분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執其兩端의 해석에 있어서도 한쪽을 0이고 다른 한쪽을 1이라 했을 때 중용은 0.5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0<x<1 사이를 오가는 자유로운 관점의 이동이라 풀이하니 절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것이다. 이현주 목사가 不偏不倚를 강조했다면 신 선생은 열린 사고를 강조한다 하겠다.
博學篤行에 대한 해석도 그 연장선상인데, 널리 배우는 것은 이것저것 두루 배운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우는 것에 대한 외연의 확장과 연계라 하겠다.
이현주 목사와 강조점이 다른 대목으로는 庸도 들 수 있다. 이현주 목사는 주희의 해석대로 平常也만을 짚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신 선생은 이정의 해석을 끌어들여 '치우치지 않는 것은 中이요, 바뀌지 않는 것이 庸이라는 걸 거듭 짚어주는 느낌이 있다. '자기주도적인 군자는 조화를 이루어 어디로 휩쓸리지도 않으니 굳세구나 꿋꿋함이여, 가운데 서서 기울이지 않으니 굳세구나 꿋꿋함이여, 나라에 원칙이 통할 때 가난한 날의 뜻을 버리지 않으니 굳세구나 꿋꿋함이여 나라에 원칙이 통하지 않을 때 죽게 되더라도 지조를 바꾸지 않으니 굳세구나 꿋꿋함이여' 감탄사를 가득 담은 해석이 때를 기다리는 대목을 더 꼽은 이 목사와 확실히 다르다. 死以不厭을 죽음을 불사하는 勇으로 손 꼽으니 그 기세가 참 거침없다. 이 목사가 때를 기다리는 군자는 부끄럽지 않다는 대목에 치중한다면, 신 선생은 행운을 도모하는 소인을 강조하니, 소인에 가까운 나로서는 신 선생의 해석에 마냥 쏠린다. 知恥近勇도 덧붙이니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용기에 가깝다는 말이 청량제와 같다.
군자의 도를 서민에게 증거하는 것에 이현주 목사는 제왕학의 관점에서 검증 방도의 하나로 해석한다면, 신 선생은 군주의 관점에서 도를 세우기 보다 그 영향을 받을 주위 사람들의 관점을 더 강조하는 거 같다. 이는 易地思之일 수도 있고, 생산자가 소비자의 관점을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나에 빗대면 사용자의 관점과 경험에서 UI를 기획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UX의 중요성이기도 하겠다.
중용에서 가장 어려운 誠의 대목에서는 이 목사가 안과 밖으로의 誠을 거듭 강조한다면, 신 선생은 內省不疚라 하여 안으로의 성찰을 좀 더 강조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신 선생이 밖으로의 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남에 있어서는 言顧行 行顧言과 愼獨을 잊지 않고 챙기시니 중용의 겉과 속을 다 이해하도록 어루만져 주신다.
사람을 성인, 대현, 하등으로 나눈 이 목사의 해석에 대해 신 선생은 왈가왈부한 적 없지만, 내 멋대로 이 목사가 틀리고 신 선생이 옳다고 필기한 대목에 밑줄을 쫙쫙 긋기도 했다. 生知, 學知, 因知를 깨달음의 깊이로, 安行, 利行, 勉强行으로 실천의 높이로 삼으니 타고나지 못한 어린 중생조차 문득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나를 위로해주는 글귀도 있었다. 이현주 목사도 공자의 입을 빌어 중용을 이루기 어렵다 말하긴 했지만, 白刃可蹈를 콕 짚어주며 중용을 지키는 것보다 서슬 푸른 칼날을 밟는 것이 더 쉽다 편들어주니 어찌 고맙지 않으랴.
다만 딱 하나 이 해석이 뭔가 갸우뚱한 대목이 있었는데 曲能有誠을 부분에 간절하면 진실해진다는 말이 썩 와닿지 않는다. 이 목사는 이 대목을 곡진하면 능히 誠하게 된다고 해석했는데, 부분보다 매사로 해석하는 게 더 맞지 않나 싶다.
내가 아예 이해를 못한 대목은 淡而不厭인데 중용의 미학에 대한 찬양이라기 보다 a를 하지만 b를 하지 않는다는 행동 양식으로 해석하는데 그 뜻이 사뭇 연결되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德幼如毛 또한 여전히 모르겠다. 덕은 새털처럼 가볍다니 그 무게가 가볍다는 뜻이 아니라 놓치기 쉽다는 어려움으로만 내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