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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화가에게 말 걸다
최병수.김진송 지음 / 현실문화 / 2006년 4월
평점 :
혹시 .tv 도메인을 이용해보신 분 있습니까?
일반인에겐 낯선 도메인이겠지만, 특성상 방송산업 분야에선 종종 쓰이는 도메인입니다.
저의 경우 지금 다니는 회사나, 그 전 회사나 다 TV 도메인을 대표 도메인으로 썼더랬죠.
가령 CNN같은 경우에도 대표 도메인은 닷컴을 쓰지만, cnn.tv 도메인도 함께 쓰이고 있어요.
.tv는 원래부터 일반 도메인으로 판매되던 대상은 아니었어요.
사실 국가 도메인이죠. .kr(한국), .jp(일본), .uk(영국)처럼요.
그런데 미국의 한 벤처회사가 그 나라랑 영구독점계약을 맺고 국가도메인을 통째로 사들인 거랍니다.
.tv라는 도메인이 낯선 건 이상으로 그 도메인이 유래된 나라가 낯설 겁니다.
투발루(Tuvalue)라고 들어보셨어요?
남태평양 호주 근처에 있는 아주 작은 섬나라에요.
영국의 식민지였고, 지금도 영국연방에 속해있고, 엘리자베스 2세가 그 나라의 국왕이죠.
인구수가 1만명이 조금 넘고, 면적이 26평방미터.
제가 사는 수원시 팔달구의 2배 정도 되는 크기의 섬에 인구수는 1/22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 감이 오세요?
저도 tv 도메인이 없었다면 투발루라는 나라 몰랐을 거에요.
그런데 책을 읽다가 불쑥 투발루 이야기가 튀어나와 깜짝 놀랐더랬지요.
알고 보니 그 섬은 해발고도가 3.5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는군요.
이대로 지구 온난화가 계속되어 해수면이 높아지면 100년 후에는 사라질 나라라네요. 글쎄.
그래서 목수 출신 화가인지, 목수 겸 화가인지, 화가를 빙자한 전업활동가인지 하는 최병수 씨는
투발루 공화국에 연도를 새긴 자유의 여신상을 세워놓고 해마다 물에 잠기는 양을 보여주겠다는 거에요.
사실 책 읽다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에요.
전 원래 최병수씨가 연세대 만화사랑 동아리 출신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 동아리가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 동아리의 긍지 중 하나가 "한열이를 살려내라" 걸개그림이었거든요.
알고 보니 최병수씨가 참여한 최초의 걸개그림이라지 뭐에요.
어째서 최병수씨 얘긴 쏙 빼먹고 들었을까 싶어 좀 속상하기도 했어요.
게다가 전 최병수씨도, 그의 작품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료집 표지로 익숙했던 '노동해방도'가, 91년을 가로지른 '장산곶매'와 강열사의 검은 휘장이,
그리고 '반전반핵도'가, '핵도끼'가, '우리는 당신들을 떠난다'가, '너의 몸이 꽃이 되어'가,
모두 모두 최병수 씨 작품이라는 거에요.
그러고 보면 대추리에서 제가 스쳐본 작품들도 역시 최병수 씨 작품이라죠. 역시 놀랄 일입니다.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는데
뜻밖에 산더미같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에 이야기가 꼬리를 무는 심정이 지금 제 느낌이에요.
뭐, 꼭 좋은 기억만 있는 건 아니죠.
가령 피라미드. 우리 과 학생회장 언니도 피라미드에 빠져 난리났었죠. 딱 그때 그시절에요.
하지만 추억어린 수다만 한바탕 털어놓고 뒤돌아 멀어지는 친구와 최병수씨는 근본부터 달라요.
혹자는 운동권의 위기니, 진보의 몰락이니, 떠들어대고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투발루에 세워질 자유의 여신상 꼴이나 우리 꼴이나 뭐가 다를까 싶어 저도 씁쓸했지만,
꿋꿋이 황소고집으로 사는 최병수씨 같은 선배도 있으니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우공이산, 셈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야말로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신념이나 결의 같은 거요.
책을 읽자마자 리뷰를 쓰기도 전에 옆지기에게 뺏겨 제 때 리뷰를 못 쓸까 조마조마했는데,
오랜만에 옆지기랑 같은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눌 수 있어 더 좋았던 책입니다.
우린 둘 다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어요.
먹물 벗고 초심으로 돌아가려면 목수일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하구요.
지난 몇 년 간 읽은 그 어떤 이론서보다도 힘이 되어주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