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는 많은 자손을 두셨고,
그 중 둘인가는 아기 때 저 세상으로 가고 일곱이 무사히 성인이 됐었다.
큰아버지는 아들을 보기 위해 3번인가 4번인가 결혼을 하셨고,
팔순잔치를 잘 치르고 집에서 낮잠주무듯 돌아가셨다.
둘째 큰아버지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집안의 기대주였으나,
육이오 전에 월북하여 80년대에 한참 이산가족찾기할 때 알아보니 60년대에 저세상에 가셨단다.
큰고모는 정이 많아 사촌과 조카까지 살뜰히 보살펴 모든 가족이 존경하는 유일한 분이셨고,
팔순을 얼마 앞두고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다 그래도 댁에 모신 채 돌아가셨다.
우리 아버지는 셋째셨는데 마지막 5년은 신장 투석을 하셨고,
요양병원에서 팔순을 넘기신 뒤 그 다음해 생일상을 받고 며칠 후 돌아가셨더랬다.
둘째고모 역시 정이 많은데 칭찬받는 큰고모와 달리 오지랍 넓고 말이 많다며 핀잔 받으시니,
두 분의 차이가 재미나게 여겨지다가도 고모의 말실수에 참 맘도 많이 상하곤 한다.
넷째 작은아버지 역시 대구사범학교에 가는 게 꿈이었으나 연좌제에 묶여 포기했더랬고,
지금은 조금씩 치매가 오고 있어 작은어머니 고생에 한숨이 나올 뿐이다.
지난주 돌아가신 막내 작은아버지는 평생을 아지아로 낮춰 불려지던 분으로,
교통사고로 5년이 넘게 전신불수로 입원해 계시다가 요양병원에서 자식들이 임종을 지켰다.
첫날 장례식장은 아지아 가족 외에는 조문객이 거의 없다시피해 사촌들과 하루종일 빈소를 지켰다.
성복제 치르는 날은 어찌나 눈이 많은지 가는 길도 고생이었고, 오는 길은 더 힘들었다.
발인하던 날은 쌓인 눈과 빙판길로도 모자라 55년만의 2월 북극추위가 몰아쳐
우리는 불경하게도 가는 날까지 속썩이는 아지아라며 농담 아닌 농소리를 지껄였다.
결혼식에 본 게 고작이었던 사촌 동서는 그 며칠을 함께 겪으며 꽤나 친밀감이 생겼다.
동서는 수시로 전화해 삼우제며 생신제며 49재 치르는 법을 묻고 있고,
난 그녀에게 제기 고르는 법까지 훈수를 두며 꽤나 마음을 쓰게 되었다.
이미 저 세상에 가 계신 우리 어머니는 내가 아지아 가족과 이렇게 결부된 걸 진저리치실 거고,
형제라면 껌뻑 죽던 우리 아버지는 못내 좋아라 하시고 있을 거다.
우연히도 아지아 삼우제 치르던 날 우리 삼형제는 저녁에 모여 양주 한 병을 다 비우고도 모자라
맥주캔을 연거푸 비우며,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로 긴 밤을 보냈다.
이제 아버지 형제 중에는 2명이 남았고, 어머니 형제들은 모두 아직 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이 모두 다 떠나면 지나간 은원은 모두 바람에 실려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