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1-41 세상의 빛이로다.

포항 선린병원에 가면 현관에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선린병원측은 병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병원 관계자들은 그저 봉사할 따름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5장 26절을 통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십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치료자이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을 만나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시각장애인들은 안마로 생계를 꾸려갑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시각장애인들은 성전이나 시장 근처에서 구걸을 하여 먹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을 불쌍히 보시고 종기가 났을 때 침을 뱉어 밀가루를 고약을 붙여듯이 땅에 침을 뱉어 흙을 개어서 시각장애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띄어졌습니다. ‘실로암’은 히브리어 ‘실로아’를 헬라어로 옮긴 말입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실로암 연못은 히스기야 왕 당시에 예루살렘성 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 샘에서부터 지하 터널을 뚫어서 물을 끓어왔습니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실로암 연못에서 기혼 샘의 신선한 물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실로암 연못이 백성들의 목을 시원하게 축여주었듯이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예수님은 시각장애인의 눈을 시원하게 띄어주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의 이웃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눈을 뜬 것을 보고 그 사람이다 아니다 논란을 벌였습니다. 사람의 얼굴에 점을 빼느냐 그리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지는데 하물며 감겨진 눈이 떠졌으니 얼마나 달라졌겠습니까? 헷갈리겠죠.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내가 그 사람이라고 말하자 이웃들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고 물었습니다.(8-10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11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저 평범한 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 듣기는 하였지만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의 이웃들은 그 말이 미심쩍었는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됐는지 조사해 달라고 바리새인들(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데려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눈을 뜨게 된 경위를 질문하자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그 사람이 진흙을 눈에 발라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고 정죄하였고  또 다른 바리새인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고 변호하였습니다.(13-16절) 정죄한 측은 예수님이 진흙을 이겼고 눈에 발랐고 눈을 뜨게 했으니-일을 했으니 안식일을 어긴 것이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변호한 측은 죄인이 어떻게 표적을 일으키겠느냐-죄인이 아니라고 두둔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의견이 엇갈리자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선지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17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서 조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24절)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이 선지자가 아니라 죄인이라고 진술하도록 압력을 넣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고 증언했습니다.(32-33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29장 18절(35장 5절과 42장 7절)을 통해 메시야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율법을 아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으나 율법을 모르는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이 위협에 굴복하지 않자 유대교에서 출교시켰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장애를 고쳐주셨으나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에서 출교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아픔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치료자이신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35절) 인자는 에스겔서에서는 선지자를 인자라 불렀고(겔2:1), 다니엘서에서는 최후의 심판 후에 하늘로부터 와서 권능으로 세상을 다스릴 분이라고 묘사했습니다.(단7:13-14) 인자는 메시야라는 암시이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주여, 그가 누구 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36절) 주여는 당신은 주님이요 나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주여, 내가 믿나이다.”하고 절하였습니다.(37-38절)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예수님을 그저 한 사람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에서 구세주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빛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비추는 빛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체적으로 볼 수 있었지만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은 육체적으로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영적으로 비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듯이 지금도 세상은 빛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며 어둠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19절을 통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둠은 죄와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빛은 용서와 생명을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빛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2장 6절을 통해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서 49장 6절을 통해 “내가 또 너(여호와의 종)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천하 만민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을 떠서 주님의 바램을 충족시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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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4:5-42 친히 듣고 앎이라.

어제(2008년 2월 23일)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세 여자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띠었습니다. 방송인 허수경 씨는 두 번 이혼을 했지만 엄마가 되고 싶어서 남편 없이 시험관 아기를 임신하고 출산했다고 합니다.(남편 없이 아이를 가진 사람을 비혼모라고 하네요.) 허수경 씨는 결혼을 하지 않거나 했더라도 사별하거니 이혼으로 인해 여자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싱글맘이 되었습니다./ 연기자 최진실 씨는 아들과 딸의 성을 조씨에서 최씨로 변경해줄 것을 법원에 청구했다고 합니다. 가족관계법이 개정되어 최진실 씨처럼 엄마의 성으로 바꾸거나 재혼한 경우 새 아버지의 성으로 변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 연기자 신애라 씨는 몇 년 전 예은이를 입양한데 이어 지난 1월에 생후 100일 된 예진이를 입양했다고 합니다. 신애라 씨는 고아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는 우리나라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 여자의 선택에 관심을 가졌다면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여자의 선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여섯 시쯤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6절) 요한복음의 여섯 시는 우리나라 시간으로 정오입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사람을 찜통에 넣고 삶아버리는 시간이죠. 여자들은 찜통더위를 피해 아침과 저녁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여자들은 우물가에 모여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물가는 오늘날의 인터넷처럼 여론을 수집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배포했습니다. 우물가에서 찍히면 동네에서 매장됐습니다. 여자가 우물을 길러 나온 동네는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 마을이었습니다.(5절) 학자들은 가까이에도 우물이 있었으나 여자가 멀리까지 물을 길러왔다고 주장합니다.(LABC, 151쪽) 아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이었죠. 여자는 다른 여자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 정오 시간에, 그것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기를 기대하며 멀리 떨어진 우물로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여자는 대인기피증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남성 편력이 심했습니다. 여자는 다섯 번 결혼해서 다섯 번 이혼했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18절) 고대 세계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관직 교수는 여자가 여러 번 이혼했으나 또 다시 결혼한 것으로 보아 미모가 뛰어나지 않았나 추측했습니다.(이관직, 226쪽) 아무튼 여자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굶주린 사랑을 채우기 위해 여자는 이 남자 저 남자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나 목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오히려 갈증이 일어나듯이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남자들을 바꿔봤으나 여전히 만족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대답했고 예수님이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말씀한 걸로 보아 여자는 여섯 명의 남자들을 전전했지만 만족을 누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던 첫 번째 선택은 실패했습니다. 여자가 실패했듯이 우리도 전철을 밟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사람들은 연령대에 따라 주요한 관심사가 있는 것 같아요. 10대에서 20대는 이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시기는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30대에서 40대는 물질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시기는 어떻게 하면 대박을 터트릴까를 고민하는 것 같아요. 50대에서 60대는 명예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 시기는 감투를 준다면 사족을 못 쓰는 것 같아요. 여자가 남자를 전전했듯이 우리도 이성과 물질과 명예를 좇아 헤매고 있지는 않는지요? 여자가 여섯 명의 남자를 전전했으나 만족을 누리지 못했듯이 우리도 이성과 물질과 명예를 얻더라도 안식을 누리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 또 다른 선택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와 우물가에서 생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여자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실 줄을 안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절) 너에게 말하는 내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여자는 과거를 알아맞힌 사람이 누군가 궁금했는데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밝히시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하고 돌아다녔습니다.(28-29절)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동이를 버려두었습니다. 물동이는 귀중하고 유용한 물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여자의 관심은 물을 긷는데 있었습니다. 현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예수님을 알리는데 있었습니다. 전도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세상 부귀영화에 관심이 있었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를 궁리해야 합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대인기피증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니는 대인접촉증 전도사가 되었습니다. 치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상한 감정과 억압된 기억에 짓눌려 살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상처가 말끔히 녹아내려야 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자의 말을 듣고 호기심으로 구경나왔다가(30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고(39절)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41절) 여자가 예수님과 동네 사람들과의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여자가 예수님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던 두 번째 선택은 어땠을까요? 대 성공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여자에게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 줄 앎이라.”고 말했습니다(42절). 동네 사람들은 여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스스로 믿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남자들을 선택했을 때는 본인도 만족함이 없었으나 예수님을 선택했을 때는 동네 사람들까지도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0장 13절을 통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여섯 명의 남자를 전전했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혼혈인이라고 사회적인 차별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14절과 15절을 통해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데 구원을 받으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전파해야하고 전파하려면 보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보내야 전파하고 전파해야 듣고 들어야 믿고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외면하는 사마리아 수가 마을에 들어가신 것도, 대인기피증에 걸린 여자를 만나신 것도, 여자에게 메시야라고 알리신 것도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여 처음에는 우리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었더라도 나중에는 스스로 믿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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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 - 교회의 참된 소명은 무엇인가
마르바 던 지음, 노종문 옮김 / 복있는사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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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시사보도 프로그램인 '뉴스후'가 설날을 전후하여 한국교회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누리꾼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인터넷에 흙탕물을 튀기고 있고, 교계는 한국교회를 일방적으로 폄훼했다고 격앙하는가 하면 자성의 목소리도 내고 있다. 크리스천 언론인들은 조심스럽게 보도 태도를 문제 삼는다. 역사는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영웅도 만들고 역적도 만든다. 내가 보기에 MBC는 미디어의 권세를 악용하여 정치적 권세와 밀접한 한국교회에 공영방송이라는 경제적 권세를 지키려고 악마적 권세를 행사하고 있다. MBC처럼 악의적으로 한국교회를 흠집 내려는 언론사가 있는가 하면 마르바 던처럼 애정을 가지고 교회를 갱신하려는 선각자도 있다. 던은 예수님이 세상 권세를 물리치셨지만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오염됐다고 한탄한다. 목사님들은 어떻게 하면 이웃을 도울까를 논의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교세를 확장할까를 고민한다고 개탄한다. 던은 교회의 고유한 사명은 약함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약함이라는 주제가 널리 퍼져있다고 예증한다. 예수님은 영광의 메시야가 아니라 고난의 메시야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등등. 그러나 우리는 약함을 부끄러워하고 강함을 자랑스러워한다. 일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호화 생활을 하는 것도 미흡한 자녀에게 교회를 승계하는 것도 어쩌면 강함에서 나온 오만한 처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채찍을 드시지만 우리가 약하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능력을 펼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던 것도,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날라다주셨던 것도 약함을 통해 얻는 은혜이리라. 던은 지금은 전투중이라고 경각심을 불어넣는다. 마귀는 굶주린 사자처럼 우리를 노리고 있다. 우리는 혈과 육이 아니라 정사와 통치자들을 상대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 권세보다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전신갑주는 단순한 방어용 무기가 아니라 마귀를 축출하는 공격용 무기다. 우리는 전쟁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을 억지하기 위해 무장해야 한다.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우리는 강하다고 착각하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시지만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약하다고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하나님이 내주하실 때 우리는 내 배를 불리지 않고 이웃을 향해 다가가게 되고, 하나님이 내주하셔야만 우리는 바다를 오염시키는 적조가 아니라 세상을 정화시키는 황토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 안에서 강해지신다.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교인 숫자가 아니라 약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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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1-9 그의 말을 들으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 측근들을 이끌고 산행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중요한 일(갈릴리에서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일)을 앞두고 핵심 제자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마17:1) 성경학자들은 마태복음 16장 13절을 통해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계셨기 때문에 이 산이 헐몬 산이거나 아니면 갈릴리에 있는 다볼 산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사실 이 산이 어느 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산은 특별한 장소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출24:12이하)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왕상19:8이하) 시내 산과 호렙 산은 동일한 산입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장광영 전 감독회장님은 산 기도를 하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하산하는 길에 꼽추를 만나는데 간절히 기도했더니 나았다고 합니다. 오늘날도 산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기도원을 보십시오. 대부분 산에 있잖아요? 그러나 저를 비롯해서 갈수록 산 기도를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중요합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 같이 희어졌습니다.(17:2)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통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 올 때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얼굴이 해 같이 빛났습니다. 다니엘서 7장 9절을 통해 하나님의 옷은 눈 같이 희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옷이 빛 같이 희어졌습니다. (저도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는데 옷이 빛 같이 희었습니다.) 그러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고했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말라기 4장 5절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예언됐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14) 엘리야는 메시야의 오실 길을 준비한 선구자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 같이 희어져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베드로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는 아이가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듯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를 나누는데 끼어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중에 하나인 장막절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막을 짓듯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를 나눈 것을 기념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마17:4) 베드로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것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광이 있기 전에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간과했습니다.(마16:21) 오늘날도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고 합니다. 무임승차를 하려고 합니다.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모래위에 지은 성과 같지만 고난이 있는 영광은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고난은 성장통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교회는 지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나중에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아주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질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하나님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할 때에 빛난 구름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출13;21),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 구름으로 가득하게 임하셨습니다.(왕상8:10) 하나님은 시내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출19:9) 높은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세례자 요한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말씀하셨듯이, 높은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형되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으라는 듣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하시면 죄로 얼룩진 인간들은 두려워합니다.(단10:7-9)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두려워서 떠는 제자들을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마17:7) 예수님은 죄 지은 인간들을 대신해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구름도 사라졌고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고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까지 보고 들은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마17:9)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일 것이라고 짐작은 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메시야라고 확신하게 되었지만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신분을 감추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6장 13절 이하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생각했으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6) 베드로는 예수님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영광의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6장 21절을 통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실 고난의 메시야라고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메시야라고 설명해줘도 제자들은 영광의 메시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분을 감추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려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에게는 500명의 제자가 있었고(고전15:6), 70명의 제자도 있었고(눅10;1), 12명의 제자도 있었고(마10;1-4), 3명의 애제자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초대교회를 이끈 제자입니다.(행1:15), 야고보는 12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제자입니다.(행12:2) 그리고 요한은 가장 늦게 순교한 제자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9절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초대교회의 기둥이라고 증언합니다.(여기서 야고보는 12제자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크게 쓰시려고 높은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셔서 영광스럽게 변형된 모습도 보여주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도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크게 쓰시려고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정선희 사모님이 기적적으로 방송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크게 들어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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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
월터 부르그만 지음, 주승중.소을순 옮김 / 겨자씨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나는 저명한 구약학자가 펴낸 설교학 도서라 설교학자가 펴낸 도서와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이 책은 저자가 1989년 미국 예일대학교의 라이만 비처 설교학 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편집한 것이더군요. 필립스 브룩스의 [설교론 특강,1877]처럼 말이죠. 나는 설교자는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제목을 보고 새로운 설교학 운동을 반영한 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저자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는 오늘날의 시인이었다며 설교하기는 세상에 대한 시적인 해석 작업이라고 주장하네요. 유진 로우리가 수사학에서 시학으로의 전환을 역설했듯이 말이죠. 나는 저자가 설교를 위해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해주기를 바랬습니다. 저자는 설교자가 시인의 상상력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4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트렘퍼 롱맨3세가 구약의 시는 압축성과 평행법과 비유법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듯이 말이죠. 나는 산문 주도적인 설교에서 운문 중심적인 설교로의 전환을 역설한 총론에는 공감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설교자들이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는지 방법론의 제시가 미약해 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설교학 도서라기보다는 설교자를 위한 해석학 책이라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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