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7:3-5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염불은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고 잿밥은 부처님 앞에 차려놓은 밥입니다. 이 속담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건성으로 하면서 자기에게 돌아올 이익에 마음을 쏟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열심은 없으면서 예수님을 통하여 출세하려고 욕심을 품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가룟 사람 유다입니다.

1.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지방 출신이었습니다. 유다는 유대 출신이었습니다. 수도권 출신이었습니다.(마10:4) 유다는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관직으로 이끌어줄 집안도 없었고 사업을 벌일 자금도 없었습니다. 유다는 남보다 큰 꿈과 좋은 머리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하면 출세할까 고민하였습니다. 요즘 같으면 고시 공부를 했을 텐데 말입니다. 유다가 꿈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나사렛에서 선지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선지자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꿈을 실현시켜줄 인물인지 알아보려고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했습니다. 당장 선거를 치른다면 대통령에 당선될 기세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번쩍이는 눈빛을 보고 제자로 채용했습니다. 유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처럼 기뻤습니다.

2. 다른 제자들은 직분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돈궤를 맡았습니다. 예수님은 세관공무원 출신을 제쳐두고 유다에게 돈궤를 맡겼습니다.(요12:6) 파격적인 발탁이었습니다. 유다는 어린아이가 엄마의 지갑을 털어 가듯이 예수님의 지갑을 털어가 뒷주머니를 찼습니다. 유다는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발을 닦을 때 화가 났습니다.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면 유다의 수입도 짭짤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요12:4-6) 유다는 푼돈은 그만 벌고 목돈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하루빨리 예루살렘에 입성하길 바랐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것이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국무총리가 될 것이고 돈궤를 맡은 유다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보다 재정을 총괄하는 장관이 재산을 불리기가 유리했습니다. 유다는 신분 상승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구름에 떠 있는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3. 그러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국정 청사진은 펼쳐 보이지 않고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는 처음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으나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말씀하시자 정말이지 싶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허무하게 돌아가신다면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다녀도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 꿈을 실현해 보려던 계획을 접고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유다는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마26:3-5)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제국과 결탁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예수님을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생각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만약 유다가 예수님을 버리고 종교지도자들의 편에 선다면 유다의 앞길이 열릴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유다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과 보낸 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의 ‘인간적인 정’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출세’를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유다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버리고 종교지도자들의 편의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유다는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사나이였습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반색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노예 한 사람의 가격인 은전 서른 냥을 셈하여 주었습니다.(마26:14-16) 유다는 터무니없이 적은 돈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눈치 빠른 종교지도자들은 서른 냥은 착수금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일이 끝나면 더 많은 돈과 함께 관직까지 내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거래는 성사되었습니다. 한쪽은 돈과 권력을 얻고, 다른 한쪽은 정적을 제거하고. 양쪽 다 최상의 거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4.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유다는 순간 뜨끔했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은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배신자가 누구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떠보았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유다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안다는 표정으로 유다를 바라보았습니다. 유다는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일을 늦추었다가는 발각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마26:17-25)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3명의 제자들만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유다는 재빨리 이 사실을 종교지도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군인들을 보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입을 맞추는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태연하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유다는 예수님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배신의 입맞춤이었습니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군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선히 붙잡혀 가셨습니다.(마26:47-56)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사형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시켰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공회를 열고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공회는 사형은 선고할 수 있었지만 집행은 로마제국의 총독이 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반역죄를 씌웠습니다. 유다는 그제 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종교지도자들은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달랐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종교지도자들은 쌀쌀맞게 응수했습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이용당했음을 깨달았습니다.(마27:3-4) 유다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유다의 허황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은전을 성전에 내동댕이치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유다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유다는 너무도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습니다.(마27:5) 유다는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나 비참하게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출세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친 덫에 자신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다면 유다처럼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설계해 주십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려면 힘들지만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을 열어주시면 지름길로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두 번 장담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철저히 회개하였고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잘못을 후회하였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포자기 하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도 베드로나 유다처럼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을 경우 부모가 속 썩이는 자녀가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바라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돌아오면 부모가 자녀를 용서하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로서 맞아주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자녀로서 맞아주십니다. 우리도 혹시 죄를 범했더라도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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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을 도와주는 야고보서 LAB 주석 시리즈
그랜트 오스본 지음, 박대영 옮김 / 성서유니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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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목회를 처음 시작하는 후배가 어떤 주석이 좋냐 고 묻기에 나는 매튜헨리와 바클레이는 고전적인 주석이고, 호크마와 그랜드는 종합적인 주석이고, NICNT와 WBC는 학문적인 주석이고, LABC는 실용적인 주석이라고 말했다. 랩 주석의 서론은 다른 주석처럼 방대하지 않으면서 꼭 필요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 배경, 저술시기, 청중, 메시지 등이다. 그러나 야고보의 저술시기를 예루살렘 공의회 이전(주후 49-50년)으로 잡고 배경을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로 추정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유대전쟁(66-70년) 이후로 잡는다./ 랩 주석의 주해는 다른 주석처럼 한 사람에 의한 주석이라기보다 편집자들의 노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주해는 원어에 대한 설명을 바탕으로 구절을 해석하였고 설교를 위한 적용이 곁들여있다. [부자를 편애하지 말라]는 문단속에 “여러분의 교회는 차별하는가?”는 질문이 도발적이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장점은 교수 노트다. 125쪽을 보면 믿음과 행함에 관한 야고보와 바울의 견해가 비교되어 있어 이해를 돕는다. 133쪽을 보면 아브라함의 12가지 시험이 나온다. 참조구절이 나오고 시험내용이 나오고 적용거리가 나온다. 설교를 위한 최고의 서비스다./ 랩 주석의 참고문헌은 다른 주석에 비하면 빈약하다. 원서가 1992년에 출판되다 보니 1995년에 나온 NICNT는 참고하지 못했다./ 랩 주석의 가격은 다른 주석에 비하면 저렴하다. 양장이 아니라 반양장이다. 표지는 연두색으로 촌스럽다. 차라리 원서처럼 자주색으로 하는 게 나을 뻔 했다./ 요즘 나는 다른 주석들을 처분하고 랩 주석을 중심으로 신약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랩 주석이 가이드가 되 주어 한결 수월하다. 당신도 미국 사람들이 남자 이름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James를 랩 주석을 통해 만나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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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전 - 하나님의 자기 주심의 선물
제임스 화이트 지음, 김운용 옮김 / 예배와설교아카데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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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성례전은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주시는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주심(God's self-giving)의 표현이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가장 최초의 성례전이시다.(에드워드 쉴레벡) 하나님의 자기 주심은 두 가지 수단을 통해서 표출된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기 주심을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성례전을 통해 자기 주심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게 하신다. 우리는 언어적 차원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말하고 행동적 차원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어루만진다. 성례전은 말씀과 행동으로 표현된다. 개신교는 세례와 성만찬을 성례전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세례는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이나 부모가 적절한 면담과 교육을 받은 후에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초대교회는 세례준비 기간이 3년 이상이었다고 한다. 유아세례는 부모의 신실성이 요구된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세례는 일회적은 사건이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갱신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강단에 세례반이나 세례조를 비치하여 기억을 회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세례는 언제나 예배 공동체 가운데서 공적인 사건으로 주어져야 한다. 세례는 특별한 절기에 주어져야 효과적이다. 초대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세례 교육을 시켜 부활 주일에 세례를 주었다.[예배의 역사] 세례의 상징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작은 세례기보다 직경 60cm 이상 되는 세례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약식 세례보다는 침례가 상징 가치가 높다.

저자는 성만찬이 너무 간헐적으로 시행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성만찬이 매주 중심적인 예식으로 시행되는 것이 예배 개혁의 우선순위라고 말한다. 성만찬은 말씀 봉독과 설교와 함께 주어져야 한다. 말씀과 성만찬이 결합해야 분명한 효과가 발생한다. 성만찬은 최고의 상징가치를 갖도록 집례 해야 한다. 성만찬 기도는 정해진 사람에 의해 드려져야 한다. 성만찬은 세례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베풀어져야 한다. 세례를 받지 않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고 성관계를 갖는 것보다 부적절하다고 말한다. 성만찬 상은 회중들이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야 한다. 떡과 포도주는 위조품이 아니라 실제 성물이어야 한다. 성만찬은 공동의 잔과 한 덩어리의 빵을 사용해야 의미가 있다. 공동의 잔을 돌려고 마시고 그 부분을 씻고 한 덩어리 빵을 떼는 의식이 회복되길 소망한다. 성만찬은 회중들이 성만찬 상으로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헨리 나우웬은 성체 성사가 예수님의 삶을 예시 한다고 말한다.[헨리 나우웬, 그의 살 그의 꿈] 내가 보기에 성만찬의 4중 행동은 예수님의 삶과 일치한다. 성만찬에서 떡을 취하듯이(taking)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떠나 이 땅으로 오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축사하듯이(blessing)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나오시는 예수님을 위해 축복기도를 하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듯이(breaking)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셨다. 성만찬에서 떡을 나누어 주듯이(giving)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셨다. 벤허를 보면 예수님의 고귀한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와 어머니와 여동생을 적셨을 때 나병이 낫던 것처럼 예수님의 피와 살은 우리의 신분을 마귀의 도구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었다. 저자의 바람처럼 설교와 성만찬이 매주 시행되어 하나님의 자기 주심을 귀로도 듣고 눈으로 보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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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현세적인 만족을 추구합니다. 인생을 즐기다 가려고 하죠. 그러나 성경은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육체적으로 한번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한번 죽고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져서 영적으로 또 한 번 죽게 된다고 말씀합니다.(계20:14) 불못은 죽지도 않으면서 영원토록 밤낮으로 괴로움을 당하는 곳입니다.(계20:10) 성경은 두 번째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두 번(거듭) 태어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5절을 통해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물은 육체적인 출생을 성령은 영적인 출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거듭 태어나게 되는 겁니다. 거듭난 사람은 육체적으로 한 번 죽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불못에 던져져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지만 두 번 태어난 사람은 깨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을 잠을 잔다고 표현합니다.(마9:24,막 5:39,요11:11-14,행 7:60,고전 15:51-52,살전4:13-17,벧후 3:4) 예수님은 나사로를 자다가 깨어난 사람의 시범 케이스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의 성인 남자들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매 년 세 차례씩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출23:14) 예수님도 12살 때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눅2:42)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동쪽으로 3Km 떨어진 베다니 마을에 들르셨습니다. 베다니 마을에는 언니인 마르다, 여동생인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이렇게 삼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오라버니’인 나사로가 오빠도 되고 남동생도 된다고 말합니다. 정황상 남동생으로 사료됩니다만 우리말 성경에 오라버니라고 나왔으니 오빠라고 여기겠습니다. 예수님이 방문하시면 천한 종이 대야에 물을 담아 발을 닦아주었습니다. 오빠인 나사로는 예수님의 머리에 감람유를 붓고 볼에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하고 귀한 손님으로 환영하였습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여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정신을 빼놓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삼남매는 예수님을 존경하였고 예수님도 삼남매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인 나사로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병들었으니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라며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나사로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라 시신이 빨리 부패하기 때문에 당일 장을 치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 중턱에 있는 석회암 바위를 파서 동굴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물로 깨끗이 씻기고 냄새가 나지 않도록 향유를 바르고 천으로 둘둘 감싸고 세마포 수의를 입혔습니다. 동굴 무덤은 맷돌같이 둥근 돌로 굴려서 막고 시루떡을 찔 때 김이 새지 않도록 밀가루로 붙이듯이 점토로 동굴 틈새를 봉인하였습니다. 일 년이 지나 살이 썩으면 무덤 문을 열고 들어가 뼈를 추려서 유골함에 넣고 무덤 벽에 있는 납골당에 넣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동안 조문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상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상가는 조문객들로 북적였고 큰소리로 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당을 받고 곡하는 사람들로 시끄러웠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오셨습니다.(요11: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삼일 동안 무덤 주위에 머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사로는 나흘이 지났기 때문에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동안 의지하며 살던 오빠가 갑자기 죽자 너무 운 나머지 눈이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조문을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니인 마르다가 예수님을 영접하며 아쉬움을 토로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11:21)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빠를 살려주시지 않아 못내 아쉬웠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위로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11:23)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마르다는 오빠가 나중에 살아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예수님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생인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도 아쉬움을 쏟아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11:32) 마리아도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는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우셨는지 아니면 믿음이 있으면서도 믿음이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서 우셨는지 알 수 없지만 예수님도 감정이 북받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11:35) 나사로의 무덤에 이르자 시신 썩는 냄새가 풍겼습니다.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썩는 냄새가 난다고 정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를 보시고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11:40) 물으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 이다.”하고 기도하시고,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셨습니다.(11:43)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동굴 무덤을 번갈아 바라봤습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손과 발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나사로는 중국 귀신인 강시가 손을 앞으로 내밀고 콩콩 뛰듯이 손과 발이 묶였기 때문에 깡충깡충 뛰면서 나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이르셨습니다.(11:44) 나사로의 흐물흐물하던 살결이 어느새 탱탱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첫째, 예수님이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귀로 들어서 얻은 지식은 30%, 눈으로 보고 얻은 지식은 50%, 손으로 만져 보고 얻은 지식은 80%가 기억된다고 합니다.(한국학교발명협회 발명의 길잡이 365일)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예수님이 부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나고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둘째, 예수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예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15:20)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죽음이 찾아왔지만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생명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셋째, 우리도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생명의 날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넷째, 영적으로 자고 있는 우리에게 깨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서 깨어나 도약의 날개를 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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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 : 그의 삶, 그의 꿈 - 세계영성의 거장 시리즈 01
마이클 오로린 지음, 마영례 옮김 / 가치창조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이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듯이 독자는 누구의 책을 읽느냐에 따라 세계관이 달라진다. 헨리 나우웬은 노인목회에 전념하던 나를 영성목회로 이끌어준 장본인이다. 나는 나우웬의 [예수님의 이름으로]를 읽으면서 예수님의 설교가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던 것처럼 그의 글은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느꼈다. 나는 온라인을 검색하며 그의 책을 탐독하였다. 그의 책은 대부분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다. 그의 글은 머리에서 나온 이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나온 묵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심리학자가 아니라 영성 가였다. 그의 책은 대부분 개인적이지만 꾸밈없는 고백이 돋보인다. 그의 글은 자신을 미화하는데 치중하지 않고 내면의 갈등을 털어놓기 때문이다. 그는 지킬박사가 아니라 하이드씨였다. 나는 드아드르 라누에의 [헨리 나우웬과 영성]을 읽으면서 나우웬의 일생과 영적세계를 알게 되었다. 라누에는 나우웬의 저서들에 나타난 그의 영적세계인 하나님과의 관계와 자신과의 관계와 타인과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나우웬에 대해 심층 분석한 책이다. 나는 나우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가 영성분야에 남긴 업적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삶이 궁금해졌다. 그의 책은 그의 삶을 통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나는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듯이 나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줄 책을 오랜만에 발견하였다. 나우웬의 멘티인 마이클 오로린이 멘토의 삶과 꿈을 다룬 책이었다. 오로린은 사진을 곁들여 나우웬의 일생을 연대기적으로 추적하였다. 오로린은 나우웬이 짧은 글을 썼듯이 많지 않은 분량으로 그의 인생역정을 그려냈다. 나우웬은 네이메겐 대학교에서 박사 논문이 거절되는 아픔을 겪었다. 나우웬은 예수님이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셨듯이 조국인 네덜란드보다 미국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오로린은 나우웬이 자신을 미화하지 않았듯이 그의 허물을 감추지 않았다. 나우웬은 어린 시절부터 심리적으로 불안하였고 자신을 탓하는 수치심이 있었다. 저자는 그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내 생각엔 업무 리더인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추론된다. 나우웬이 동성연애자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솔직담백한 그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를 색안경을 끼고 들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다고 그가 완벽하지 않고 허물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크게 들어 쓰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나님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을 통하여 죄로 얼룩진 세상에 희망의 밝은 빛을 비춰주신다. 아무튼 헨리 나우웬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사랑받는 저자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책은 가톨릭에서 출판한 것을 개신교에서 다시 출판하고 개신교에서 출판한 것을 다시 가톨릭에서 출판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가 가톨릭 신부였지만 개신교 대학교에서 가르쳤듯이 그의 책이 인기가 있더라도 중복해서 출판하는 것은 교회 일치운동을 역행하는 처사다. 이 책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인터넷 가톨릭서점 바오르딸>에 가면 마이클 오래플린의 [하느님의 연인 헨리 나웬]이란 책이 번역되었다. 목차가 다른 것을 보니 아닌지도 모른다. 책을 읽다보니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다. 번역자는 신학전공자가 아니라 그런지 전문용어 번역에 서툴렀다. 38쪽의 '학교의 교구 목사'는 ‘교목 신부’로 번역하는 것이 나았고, 53쪽부터 나오는 '바티칸 Ⅱ'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번역했어야 했다. 사실 이 정도는 전문용어도 아닌 일반용어가 아닌가? 이외에도 여러 군데서 아쉬움이 남았다. 출판사는 헨리 나우웬의 전기인만큼 부록으로 그의 연표와 작품을 수록하고 가능하면 번역 현황까지 소개했으면 좋을 뻔 했다. 출판사가 작은 수고를 하면 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그의 책이 더 많이 팔릴 것이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책부터 읽고 나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 좋을 듯싶다. 당신도 나우웬같이 작은 예수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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