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학과 성경 내러티브 - 실제 지침서
D. F. 톨미 지음, 이상규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내가 신학대학을 다니던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역사적인 성경해석 방법을 주로 배웠으나 신학대학원을 다니던 90년대 중반부터는 문학적인 성경해석 방법을 전공한 교수님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더니 최근에 구약학에서는 문학적 접근(트렘퍼 롱맨3세)으로, 신약학에서는 서사비평(마크 포웰)으로, 국내 학자 중에서 이 분야의 선구자인 이형원 교수는 문학비평으로, 뒤늦게 등장한 오덕호 교수는 문학-역사비평으로,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 성경해석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서사비평에 대한 번역 작업도 활발하여 신약학에서는 서사비평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요한복음 해부]와 [이야기 마태복음]이 번역되더니, 서사비평의 원조랄 수 있는 [이야기 마가]가 잇달아 소개되었고, 구약학에서는 구약성경을 문학적으로 분석한 [최신구약개론]과 본문에 대한 문학적 구조를 분석한 [구약의 문학적 구조]와 트렘퍼 롱맨의 초기작인 [문학적 성경해석]도 소개되었습니다.

이 책은 서사비평 개론서라는 측면에서 보면 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와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내용은 이 책이 어렵습니다. 만약 서사비평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신약성경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마크 포웰의 저작을 먼저 읽고, 개별 복음서를 보여주는 컬페퍼와 킹스베리와 로즈 등의 작품을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일반 문학계에서 고안한 서사비평을 무비판적으로 원용한 다른 작품과는 달리 신약성경 내러티브의 독특성을 탐색하였고(10-11쪽), 서사비평(Narrative Criticism)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모든 내러티브 본문에서 전형적인 특징이 발견된다는 전제로 서사학(Narratology)이란 용어를 선호하고 있으며(23-24쪽), 다른 작품은 관점(point of view)이란 개념을 사용하지만 내레이터가 바뀌거나 인지의 위치가 변하는 경우가 있어‘초점 맞추기’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51-52쪽) 저자의 말대로 구약성경의 3분의 1과 신약성경의 2분의 1이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13-14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서사학을 도입하여 성경을 읽는다면 그동안 간과했던 또 하나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 개론서로 힘찬 출발을 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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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0:1-10 나는 양의 문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24절기(태양의 위치를 기준으로 계절을 구분한)는 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4월을 예로 들면 4일은 청명(淸明)입니다. 청명이 되면 농사를 짓기 위해 논과 밭둑을 손질하고 못자리판을 만듭니다. 20일은 곡우(穀雨)입니다. 곡우가 되면 봄비가 내려 여러 가지 작물에 싹이 트고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나라는 농사를 지었으나 이스라엘은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백에서 수천 평의 농사를 지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십에서 수백 마리의 양을 쳤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가족모두 달라 들어 농사를 짓고 양을 쳤습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의 아내 라헬(창29:10)도 모세의 아내 십보라(출2:16)도 양을 쳤습니다.

농부나 목자나 해가 뜨면서부터 일이 시작됐습니다. 해가 뜨면 농부는 농기구를 챙겨서 논으로 나갑니다.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푸른 풀밭으로 나갔습니다. 농부는 해가 지기 전에 일해야 하기 때문에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땀 흘려 일합니다. 목자는 어디선가 들짐승이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양떼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습니다. 한참 일하다보면 목이 마릅니다. 농부는 그늘로 나가 막걸리로 목을 축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시냇가로 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합니다. 농부는 농기구를 챙기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목자는 배가 불룩해진 양떼를 이끌고 우릿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농부는 짚을 엮어서 초가집을 만들고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담을 쳤고 싸리나무로 대문을 만들었습니다. 목자는 동굴이나 아니면 공터에 돌이나 나뭇가지로 담을 두르고 담 위에 가시를 올려놓고 우릿간을 만들고 양떼가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만 문을 만들었습니다. 밤이 되면 농부는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목자는 담 밖을 어슬렁거리는 들짐승을 신경 써야 했고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단단히 지켜야 했습니다. 농부는 낮에는 다른 농부와 함께 일하다가도 밤에는 자기 집으로 가서 따로 잤으나, 목자는 낮에는 자기 구역에서 따로 풀을 뜯기다가도 밤에는 다른 목자의 양떼와 함께 재웠습니다.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서 야곱은 외삼촌의 양떼를 지키기 위해 낮에는 더위에 허덕였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다고 말씀합니다.(창31:40) 성경을 보면 목자가 양떼를 먹이고 지키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먹이시고 지키신다고 생각했습니다.(시23:1, 77:20, 79:13, 95:7, 100:3, 사40:11, 겔34:11-31)

이처럼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흔하게 보는 목자와 양과 우리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라기보다는 ‘알레고리’라고 해야 적절합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하나님입니다. 목자는 지팡이를 가지고 양떼들의 길을 인도하고 막대기로 들짐승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목자가 지팡이로 길을 인도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에 길을 인도해 주시고, 막대기로 보호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보호해 주십니다./

양떼는 교인들입니다. 양떼는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첫째, 양은 시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개와 고양이는 길을 잘 찾아가는데 양은 눈이 어두워서 길을 잘 찾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제비와 연어는 방향감각이 좋아 고향을 잘 찾아가는데 양은 길치라 집을 잘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양이 눈이 어둡듯이 우리는 눈앞의 일에만 급급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멀리 볼 수 있습니다. 장기로 말하면 우리는 최하수이고 하나님은 초고수입니다. 우리는 고집을 부리지 말고 우리의 인생 전체를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둘째, 양은 방어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슴도치는 몸을 웅크리면 가시가 돋아나고 스컹크는 가스를 배출하고 달아나는데 양은 들이받을 튼튼한 뿔도 없고 도망갈 빠른 발도 없습니다. 양이 무기력하듯이 우리는 마귀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그러나 목자는 막대기로 들짐승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목자를 떠나지 말고 양떼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양떼는 목자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양은 시력도 양하고 방어능력도 없지만 청각이 발달되었다고 합니다. 목자는 밤에 양떼들을 함께 재웠다가 아침에 따로 데리고 나갑니다. 양떼가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알아듣기 때문에 섞일 염려가 없었다고 합니다. 목자가 이름을 부르면 양떼는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 나갑니다. 목자가 위험하다고 소리치면 양떼는 위험을 감지하고 가던 길을 멈춥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도둑은 누구일까요? 목자는 어디선가 들짐승이나 도둑이 나타날까봐 낮에도 한눈을 팔지 못했고 밤에도 선잠을 자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속담에 ‘열 사람이 지켜도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고 목자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도 도둑을 막아내기 어려웠습니다. 목자가 돌이나 나뭇가지로 담을 두르고 담 위에 가시를 올려놓고 우릿간을 만들고 양떼들이 드나들만한 조그만 문을 만들고 입구를 단단히 지켰지만 도둑은 돌로 만든 담을 슬며시 넘어오거나 나뭇가지를 살며시 헤치고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도둑은 거짓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도둑이 우릿간을 뚫고 들어와 양떼를 훔쳐가듯이 지금 거짓 선지자가 교회로 침투하여 교인들을 빼내가고 있습니다. 도둑이 남의 양떼를 약탈하여 자신의 배를 불리려하듯이 지금 신천지 추수꾼들이 교인들을 빼내가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교인들을 빼가고 개척교회는 교회를 접수하려 합니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들어오듯이(요10:10) 이단들은 신앙생활 잘하는 교인들을 실족시키려고 들어옵니다. 이단문제 전문가에 의하면 우리 포항에도 이단들이 침투하여 포섭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단을 막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어디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제안하더라도 함부로 참석하면 곤란합니다. 이번 주 18일(금)에 포항중앙교회에서 [이단 사이비 대책 세미나]를 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10:7) 도둑은 담을 넘어오거나 헤치고 들어오지만 예수님은 문을 통해서 들어오십니다. 담을 통해 드나드는 양떼는 도둑에게 죽음을 당하지만 문을 통해 드나드는 양떼는 목자에게 꼴을 얻습니다.(10:9) 이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교인들은 잘못된 교리에 세뇌되어 결국은 신앙을 잃게 되지만 정통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교인들은 신앙이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짓 선지자를 통해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우리에게 멸망을 안겨줍니다. 비참하게 안겨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풍성하게 주십니다.(10:10) 우리는 담을 넘어오는 도둑에게 미혹되지 말고 문으로 드나드는 예수님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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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13-35 눈이 밝아져 알아보더니

주보에 나와 있는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엠마오의 그리스도]라는 그림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죠. 그림을 보면 어둡고 넓은 실내 한가운데에 식탁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림은 자연스럽게 중앙에 집중되네요. 그림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에서 만난 나그네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소년이 음식을 나르고 상이 차려지자 나그네는 감사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줍니다. 바로 그때 두 제자는 그 나그네가 예수님인 것을 알아봅니다. 왼쪽에 등을 보인 제자는 화들짝 놀라 손을 얼굴에 대고 있고, 오른쪽에 있는 제자는 몸을 뒤로 젖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네요. 소년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 예수님을 모르는 것 같네요.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아내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다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고 나서 그린 그림입니다. 인생의 풍파를 겪어서 그런지 그림의 깊이가 깊어졌다는 평가입니다. 이 그림에서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그림은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그림 그림입니다. 본문을 보면 두 명의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명은 글로바(24:18)였고 다른 한 명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두 제자는 슬픈 기색이었습니다.(17) 그것은 두 제자가 ‘선지자’로 여겼고(19),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던(21) 스승이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사형 판결을 받고 로마 군병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없이 붙잡혀 가셔서 허무하게 돌아가셨습니다. 두 제자는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새벽에 여 제자들이 무덤에 찾아가 보았는데 시신은 보이지 않고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여 남 제자들이 가보았더니 시신이 보이지 않아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뒤에서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두 제자는 그 사람이 예수님인지는 꿈에도 생가하지 못하고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낸 순례자인가 싶어 가던 길을 동행하였습니다. 지금 두 제자는 스승을 잃고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낙심한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셨듯이 우리가 힘들어 할 때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가정에 불화가 생겨 속상해 하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교회가 부흥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도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무슨 이야기를 나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톱뉴스를 듣지 못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18) 두 제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바랐는데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하였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지고 여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하고 다녀서 혼란스러워 하였습니다.(19-24)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다고 나무라셨습니다.(25)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신다고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말씀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창3장, 12장, 시22편, 69편, 110편, 사53상, 렘31장, 슥9장, 13장, 말3장)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구원할 ‘영광의 왕’이 아니라 백성들의 죄를 대신지고 돌아가실 ‘고난의 종’이었습니다. 그런지도 모르고 두 제자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출세하려고 따라다녔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실망했습니다. 두 제자는 우리처럼 이기적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출세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듯이 우리도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사회적 지위에 걸 맞는 교회는 저 교회야. 저 교회는 포항시장도 다닌다잖아.’, ‘내 사업을 위해서는 저 교회를 다녀야 해. 저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 교회는 포항공대 교수들도 다닌다지. 저 교회를 다녀야 내 수준도 덩달아 올라가겠네.’ 그러다 보니 개척교회는 이마트 옆에 있는 구멍가게처럼 사람이 떠나가고 대형교회는 사람이 몰려드는 지도 모릅니다. 두 제자가 출세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가 실망해서 집으로 돌아갔듯이 우리도 기도하고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키기 보다는 부흥된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두 제자가 고난을 외면하고 영광을 추구하였듯이 우리도 밥상을 차리기 보다는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눈물로 씨를 뿌려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거잖아요.(시126:5-6)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 성공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성경을 알지 못하는 두 제자를 나무라셨듯이 성경의 원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도 나무라십니다.

두 제자는 집에 도착하자 예수님에게 하룻밤 머물다 가시라고 초청하였습니다. 밤에 여행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그네를 환대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미천한 종을 시켜 예수님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볼에 입을 맞추고 포옹하였습니다. 거실에 식탁이 차려졌습니다. 떡(빵)과 포도주가 놓였습니다. 두 제자는 손님인 예수님을 중앙에 앉히고 양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통의 경우는 주인이 식탁을 주관하지만 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에게 주도권을 넘겼습니다. 예수님은 축복기도를 하시고 빵을 떼어주셨습니다. 그제 서야 두 제자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두 제자와 길에서 대화를 나누시고 빵을 떼어주신 분은 길을 가던 나그네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 제자들의 말처럼 정말로 살아나셨습니다. 두 제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길에서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웠습니다.(32) 예수님이 집에서 빵을 떼실 때 눈이 밝아졌습니다.(31)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씀의 전례’라고 말하고, 예수님이 빵을 떼신 것을 ‘성찬의 전례’라고 말하더군요.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었다 네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는 때와 장소는 미사라더군요.(다음카페 성복성당 오늘의 묵상) 미사를 통해 마음이 뜨거워졌고 영안이 열렸다는 거죠. 사실 개신교 예배학자들도 매주 예배시간마다 설교도 하고 성만찬도 하라고 강조합니다.(제임스 화이트, 로버트 웨버) 그러나 개신교의 보수적인 LABC를 보면 떡을 떼는 것이 성만찬이 아니라 식사라네요.(896쪽) 예수님과 식탁에서 교제를 나눌 때 영적인 눈이 떠졌다고 거죠. 어찌됐든 두 제자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고 떡을 떼며 영안이 열렸듯이 우리도 말씀을 들어야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만찬이든 식사든 주님과의 교제를 나눠야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두 제자가 알아보자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두 제자는 달라졌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돌아가 실망해서 그리고 자신들도 피해를 당할까봐 집으로 돌아갔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밤중에 강도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 즉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33) 두 제자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해 보니 11 제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가 말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이 집에서 떡을 떼셨다고 말하였습니다.(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두 제자를 바꾸어 놓았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도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예배를 드리면서 만나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만나고 교제를 통해 만나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마음이 뜨거워지고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두 제자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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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9-29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

환절기가 되면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몸에 걸리는 감기도 있지만 마음에 걸리는 감기도 있다고 합니다.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입니다. 몸의 감기가 누구나 걸릴 수 있듯이 마음의 감기도 누구나 걸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우울증 환자가 있었습니다. 디두모(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토마스)였습니다.

미국의 가정 의학 전문의 돈 콜버트 박사는 [감정치유]에서 우울증은 ‘우울증’과 ‘정서불안’과 ‘양극성 장애’의 세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몇 주 동안 우울증 증상이 다섯 가지 이상 나타나면 우울증이고, 두세 가지가 나타나면 정서장애라고 합니다. 여러분 슬프고 행복하지 않으며 기분이 낙담되었습니까? 체중이나 식욕이 심하게 감소되었습니까? 더 이상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껴집니까? 수면태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잠을 못자거나 잠에 빠졌습니까?) 만성적인 피로로 고생합니까? 집중력이 저하되었습니까? 움직임이 둔해졌습니까? 쉽게 흥분합니까? 회의주의에 빠졌습니까? 자살충동을 느낍니까? 두세 가지면 정서장애, 다섯 가지 이상이면 우울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마는 우울증 중에서 양극성 장애를 앓았습니다.(다른 말로 하면 조울증에 빠졌습니다.) 양극성 장애는 청룡열차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땅 밑으로 내려갔다 하듯이 기분이 아주 좋았다가 아주 나빠졌다 하는 증상입니다. 기분이 널뛰기를 하듯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증상입니다. 도마의 구체적인 증상을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11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인기를 누렸으나,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견제를 받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이 깨우러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하다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앞장섰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나 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기분이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좋은 일이 없는데도 갑자기 들뜨기도 합니다.

두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14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처는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장소라는 견해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인격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거처는 하늘나라도 되고 하나님 아버지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라고 낙담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장소도 모르고 가시는 방향도 모르자 기분이 침울해졌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나쁜 일이 없는데도 갑자가 가라앉기도 합니다.

세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20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사람 유다는 죄책감에 빠져 목을 매 자살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이 해코지를 당할까봐 문들을 닫아걸고 숨어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슬픔에 잠겨 바람을 쐬고 돌아다녔는지도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라고 불신하였습니다. 도마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부정적인 생각에 짓눌려 미래를 암울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서 손가락을 내밀어 손에 넣어보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요20:2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우울증 환자가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을 통해 엘리야 선지자가 낙담하여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역을 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천사를 보내서 떡과 물을 마시게 하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여주시고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냈습니다./ 시편 기자도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시편 42편 5절을 통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라고 질문하고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낙심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찬송하게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죽고 싶다던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해하던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던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달라졌습니다. 도마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마드라스 근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빨갛게 달아오른 쇠로 만든 접시에서 불 고문을 당한 후에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던져졌으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 속에서 타지 않았습니다. 원주민들은 도마의 허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도마가 순교한 산은 지금 성 도마 산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울증에 빠져 기분이 침울해 있습니까?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십니까? 전문가들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라고 말합니다. 교인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낙심한 마음에 희망의 태양이 솟아오릅니다. 불안한 마음에 평안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슬픈 마음에 기쁜 찬송이 들여옵니다. 시편 42편 5절을 읽어봅시다. “네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우리 교인들도 혹시 우울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나 한숨소리가 찬송소리로 변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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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1-10 그가 살아나셨느니라.

저는 부활절이 될 때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왜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자를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제외하고 성인 남자들의 숫자만 셌습니다.(마14:21)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알려주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믿겠지만 여자인 마리아에게 알려준다면 다른 제자들이 의심할 것이 뻔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을 터인데 베드로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습니다.(눅8:1-3) 일곱 귀신은 귀신 들린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귀신이 심하게 들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나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 주셔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소유를 팔아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지만(눅5:11) 마리아는 예수님을 섬겼습니다.(눅8:3) 따르는 것과 섬기는 것은 다릅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다녔다면 마리아는 교회 봉사를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여 제자였습니다. 여 제자 중에서도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여 제자들의 리더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첫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다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하였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칼을 들고 저항하였다가 대제사장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면 출세하려 했으나 붙잡혀 가시자 해코지를 당할까봐 도망가 버렸습니다.(눅23:44-56) 그러나 마리아는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릴 때 뼛조각이 자신의 살에 박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가시나무로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에 씌울 때 자신의 머리에 굵은 가시가 박히는 쓰라림을 받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 넘어지실 때 자신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넘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드는 고통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망치질을 할 때 자신의 팔목과 발목에 못이 박히는 끔찍함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 자신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지는 충격을 겪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에 자신도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냈을 때에 자신도 돌무덤에 매장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12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여 제자인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두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모든 것이 멈추어집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안식일까지 3시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다른 사람을 장사하지 않은 새 무덤에 매장하였습니다.(눅24:1-10) 안식 후 첫 날이 되었습니다. 12 제자들은 여전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숨었으나(요20:19) 마리아는 새벽같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세마포(수의) 사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향품을 바르는 것은 사랑과 헌신과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치 무덤에 꽃을 들고 가는 것과 비슷했습니다.(LABC 483쪽) 마리아는 어떻게 돌문을 열까를 걱정했습니다.(막16:3) 이스라엘의 무덤은 산허리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막았고 돌을 노끈으로 묶었고 빈 공간은 점토로 봉인했습니다. 마리아가 밀어서는 돌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무덤에 도착해 보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문을 굴려 놓고 위에 앉아 있었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너무 무서워서 기절해 있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고 알려주고, 시신을 눕혔던 자리를 보여주고, 다른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마리아는 기쁨에 겨워 다른 제자들에게 달음질해 가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 신하가 왕에게 복종의 표시로 엎드려 발을 붙잡듯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마리아에게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준 세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12 제자들보다 나았습니다. 12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리아는 섬겼고, 12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마리아는 떠나지 않았고, 12 제자들은 방안에 숨어 있었지만 마리아는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베드로가 아니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를 보면 하늘을 다스리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으로 내려와 인간세상을 다스렸습니다. 호랑이와 곰은 사람이 되고 싶어 환웅을 찾아 갔습니다.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스무 톨을 주면서 백일 동안 동굴 안에서 햇빛을 보지 않고 있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곰은 끝까지 견디어 여자가 되었습니다. 환웅은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분이 단군왕검입니다. 단군왕검은 고조선을 건국하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였습니다. 곰이 끝까지 견뎠기 때문에 여자가 될 수 있었고 마리아가 끝까지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듯이 우리들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참고 기다린다면 우리 창대교회가 부흥하는 날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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