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9-28 주의 길을 곧게 하라.

요한이 등장하였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세례자 요한을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세례 요한이라 부르지만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나옵니다. 세례를 주는 사람 요한이라는 뜻이죠. 제가 요한을 좋아하는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듯이, 저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자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렸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참석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갈급해 지잖아요? 유대 백성들은 죄를 지적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줄 선지자를 고대했습니다. 그때 요한이 유대 광야에 등장했습니다.(유대 광야는 사막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를 연상시켰습니다.(왕하1:8) 요한은 낙타털로 짠 거친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옷이 내려가지 않도록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메뚜기를 구워 먹고 광야에서 흔한 석청(야생 들꿀)을 채취해서 먹었습니다.(막1:6) /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 삼아 길에서 잠 잤습니다./ 요한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눈은 사막의 태양처럼 이글거렸고 입에서는 폭포수와 같은 말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설교하였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잔잔한 물가에 떨어진 바위가 물을 뒤집어 놓듯이, 말씀에 굶주려 있는 유대 백성들의 영혼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요한이 설교한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니요? 유대 백성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믿었지 행동으로는 떠나 살았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언행심사’란 화살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과녁에 쏘았을 때 자꾸만 빗나갔습니다.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과 생각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의 교인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행동으로는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세상에서는 맘몬(돈)을 할아버지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만 교인이지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가 C_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한이 유대 백성들에게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촉구했듯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회개하였고 종교지도자들은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유대 백성들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방과 요단 강 사방에서 요한에게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마3:5)(유대광야에서 요단강까지는 가깝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듯이, 요한은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인기 가수가 콘서트를 열면 팬들이 몰려들듯이, 요한이 설교하면 백성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요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요한이 백성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대항할까 봐 바짝 긴장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으려 하지 않고 요한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진상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오늘날도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교인은 은혜의 강물이 흐르지만, 말씀의 꼬투리를 잡는 교인은 영혼의 우물이 말라버립니다.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다.

진상조사단이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요1:19) 혹시 그리스도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숨기지 않고 대답했습니다.(요1:20)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야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메시야(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기독교는 그리스도교를 음이 같은 한자로 옮긴 말입니다.(가차)/ 진상조사단은 “그러면 엘리야냐?”고 물었습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으로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유대 백성들은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고 기대했습니다.(말4:5-6)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요1:21/) 진상조사단은 “네가 그 선지자냐?”고 물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입니다.(신18:15,18) 유대 백성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요1:21)/ 진상조사단은 그리스도냐,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 고 물었고, 요한은 그 때마다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요한의 인기는 60년대 록 그룹인 비틀즈를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면 유대 백성들은 신으로 떠받들 것이고 진상조사단은 굽실거릴지도 모릅니다. 요한이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 선지자로 의심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 단호하게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은 에베소서 2장 10절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시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표준새번역을 통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고, 공동번역을 통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씀합니다. LAB 주석을 보니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이라고 말하더군요. 나도 걸작품, 너도 걸작품. 이 구절은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보아야 하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고 자기비하를 한다면 하나님의 걸작품을 훼손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볼품없는 인간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것도 하나님의 걸작품을 손상시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이 독특하게 만드신 최고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알았다.

요한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선지지도 아니라고 하자 진상조사단이 짜증을 내며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 고 추궁했습니다.(요1:22) 진상조사단은 혹시 거짓 선지자가 아닌 가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요한은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하여 “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로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행차하기 전에 사자(messenger)가 앞서 가서 왕이 오신다고 알리고 오실 길을 평평하게 닦았다고 합니다. 그렇듯이 요한은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상을 회개시키려고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사명(mission)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도 모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도 압니다. 요한의 사명은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저의 사명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걸작품이란 자의식이 없을 때는 세상 사람들처럼 돈을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사는 데 관심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란 자의식을 가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벌고 써야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앞길을 열어주실 겁니다.

요한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기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했던 것처럼, 우리는 실수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알았기에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겠다고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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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8일(월)-9일(화) 오후 7시 30분에 이상춘 목사님(포항 백석교회)을 모시고 건강부흥집회를 가졌다. 첫째 날은 14명이 참석하고, 둘째 날은 20명이 참석하였다. 김태선 집사가 첫째 날과 둘째 날(아들 박준휘와 함께)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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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1-8 주의 길을 준비하라

요한이 등장하였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세례자 요한을 가장 좋아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세례 요한이라 부르지만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세례자 요한이라고 나옵니다. 세례를 주는 사람 요한이라는 뜻이죠. 제가 요한을 좋아하는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듯이, 저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자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렸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참석하지 않으면 영적으로 갈급해 지잖아요? 유대 백성들은 죄를 지적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줄 선지자를 고대했습니다. 그때 요한이 유대 광야에 등장했습니다.(유대 광야는 사막이라기보다는 사람이 살지 않는 외진 곳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를 연상시켰습니다.(왕하1:8) 요한은 낙타털로 짠 거친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옷이 내려가지 않도록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메뚜기를 구워 먹고 광야에서 흔한 석청(야생 들꿀)을 채취해서 먹었습니다.(막1:6) /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 삼아 길에서 잠 잤습니다./ 요한의 행색은 초라했지만 눈은 사막의 태양처럼 이글거렸고 입에서는 폭포수와 같은 말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설교하였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잔잔한 물가에 떨어진 바위가 물을 뒤집어 놓듯이, 말씀에 굶주려 있는 유대 백성들의 영혼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요한이 설교한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니요? 유대 백성들은 입으로 하나님을 믿었지 행동으로는 떠나 살았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언행심사’란 화살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과녁에 쏘았을 때 자꾸만 빗나갔습니다. 말과 행동과 마음가짐과 생각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떨까요? 오늘날의 교인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행동으로는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세상에서는 맘몬(돈)을 할아버지로 여기고 살아갑니다. 교회에서만 교인이지 세상에서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사회적 신인도가 C_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한이 유대 백성들에게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촉구했듯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고 설교하였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유대 백성들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요한에게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막1:5)(유대광야에서 요단강까지는 가깝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듯이, 요한은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서 세례를 받으려고 나왔습니다.(마3:7)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교활하고 가증스럽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유대 백성들이 회개했듯이 오늘날의 새 교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하지만,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세례를 받으려하였듯이 기존 교인들은 자기 신앙의 필터로 말씀을 걸러서 듣다보니 신앙이 정체되어 버렸습니다. 말씀을 편식하다보니 영양실조에 걸렸습니다. 신앙은 유기체와 같아서 자라지 않으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물은 흘러야지 고여 있으면 썩어버립니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들을 보십시오. 새 교인이 아니라 기존 교인들입니다. 목사님과 장로님입니다. 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고 선포하였습니다.(마3:8) 회개한 증거를 보여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입으로는 회개하고 행동으로는 회개한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요한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고 설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요한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고 설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분(예수 그리스도)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분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전령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행차하려면 전령이 앞서가서 길을 평평하게 닦았습니다. 그렇듯이 요한은 오실 그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상을 회개시키려 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과 그분을 비교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천한 종이고 오실 그분은 귀한 주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막1:7하) 천한 종은 주인의 신발 끈을 푸르고 발을 닦아주었지만, 요한은 오실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해 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조연이고 오실 그분이 주연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8) 요한은 회개의 물세례를 베풀었지만, 오실 그분은 구원의 성령과 불세례를 베푸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높여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유대 백성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요한이 회개하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대부분의 유대 백성들은 외면했습니다. 이제 그분이 다시 오십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면 심판을 하십니다. 요한은 심판을 ‘나무뿌리에 놓여있는 도끼’와 ‘손에 들고 있는 키’에 비유하였습니다.(마3:10-12) 농부가 도끼를 들고 과수원에 갑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그대로 두고,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버립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땅만 버리기 때문입니다./ 농부의 아내가 키를 들고 타작마당으로 갑니다. 키질을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리기 위해섭니다. 쭉정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곳간은 천국을 상징하고, 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농부가 도끼로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로 나누듯이, 농부의 아내가 키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듯이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잘라 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라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불에 태워 버릴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을 통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재림 불감증에 걸렸는지도 모릅니다. 안전 불감증에 걸리면 사고가 일어나듯이 재림 불감증에 걸리면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신랑을 신부처럼 정결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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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3:24-37 깨어 있어 기도하라.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재림하신다.)’는 말씀이 318번 나옵니다.(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네요.) 1년은 365일이죠. 주일은 52일이고 평일은 313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루에 한번 꼴로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만 말씀하셔도 믿을 텐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반드시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3절을 통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임신한 여자가 반드시 해산의 고통을 겪듯이 반드시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징조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3장 5절부터 23절까지 재림하실 징조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땅에서는 대환난이 일어납니다. 마가복음 13장 24-25절을 통해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환난이 지난 뒤에는 하늘에서는 대격변이 일어납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흔들립니다.(아마 지구가 태양계를 이탈하나 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이 재림하십니다.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모습은 눈으로도 보입니다.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듯이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에 휩싸여 재림하십니다.(구름은 예수님의 자가용인가 봅니다.) 예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선택하신 백성들을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모으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모습은 귀로도 들립니다. 대통령이 입장할 때 팡파르가 울려 퍼지듯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집니다.(살전4:16, 이 소리가 하나의 소리인지 세 가지 소리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실 징조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28-31절)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지 않고 잎과 열매가 동시에 맺히는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유월절이 있는 4월부터 초막절이 있는 10월까지 모두 다섯 번 열매를 맺습니다. 건기동안 열매를 맺죠. 처음에는 잎도 작고 열매도 작고 당도도 적다가 차차로 잎도 커지고 열매도 커지고 당도도 높아집니다. 무화과나무는 우기인 나머지 기간에는 가지가 앙상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아나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았습니다. 그렇듯이 예수님은 땅에서의 대환난과 하늘에서의 대격변이 일어나면 재림이 가까운 줄을 알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징조를 보여주고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시각을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시간을 알려 주신다면 우리는 실컷 놀다가 막차를 타려고 할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 자신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십니다.(32절) 예수님도 모르시는데 사람이 안다면 뭔가 잘못된 거겠죠.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절을 통해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알기 때문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둑이 갑자가 들어오듯이 갑자기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주인은 언제 도둑이 들지 모르기 때문에 늘 집단속을 해야 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다른 사본에는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재림하시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 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깨어 있는 거고 어떻게 하면 자고 있는 걸까요? 예수님은 문지기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34-37절) 어떤 주인이 타국(다른 나라)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무를 맡겼습니다. 주인은 문지기를 따로 불렀습니다. 문지기는 주인의 열쇠를 보관하였고 방문객을 관리하였고 다른 종들을 감독하였습니다. 문지기의 권한이 막강하다 보니 자유민 여성과 결혼하기도 하였습니다. 주인은 언제 올지 모르니 문지기에게 깨어 있어라 고 신신당부하였습니다. 주인이 저물 때에 올는지, 밤중에 올는지, 닭 울 때 올는지, 새벽에 올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유대인은 밤을 셋으로 나눴으나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이 하듯이 밤을 넷으로 나눴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인을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이고 문지기는 우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반드시 그리고 갑자기 재림하셔서 성도들이 깨어 있으면 어떠실까요? 흐뭇해하실 겁니다. 예수님은 깨어있는 성도들을 칭찬하시고 상을 주실 겁니다. 여러분이 주인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참을 가지고 들에 가보니 일꾼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다음에 그 사람을 일꾼으로 또 쓰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자고 있다면 어떠실까요? 탐탁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은 자고 있는 성도들을 꾸중하시고 벌을 내리실 겁니다. 여러분이 주인이라고 가정해 보십시오. 참을 주려고 들에 가보니 일꾼들이 농땡이를 치다가 주인이 오니 그제서 일하는 척 합니다. 주인의 마음이 탐탁지 않습니다. 다음에 그 사람을 쓰고 싶지 않아집니다.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충성하면 상주시고 싶고 불충하면 벌주시고 싶어질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깨어 있습니까? 아니면 자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목이 터져라 재림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재림불감증에 걸리지는 않았습니까? 재림불감증에 걸리면 언제 재림하실지 무감각해져서 맡겨주신 사명을 멀리하고 세상에 얽매입니다. 일꾼이 아무리 일했더라도 주인이 올 때 놀고 있으면 당황하게 되듯이 우리가 과거에 아무리 충성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놀고 있으면 난감해 집니다. 과거의 수고가 감안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사골 곰탕이 아닙니다. 사골 곰탕도 어지간히 우려야 국물 맛이 진하지 너무 우려내면 맛이 연해집니다. 여러분, 과거를 자랑하지 마시고 현재에 충실하십시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맡겨주신 직분을 충성으로 감당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늘나라에서는 이 땅에서의 삶보다 훨씬 더 부요해 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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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5:14-30 주인과 결산할 새

어떤 사람이 타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걸어가거나 말을 타고 여행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이 사람은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그 당시 부자는 전문적인 회계사에게 재산 관리를 맡겼습니다. 요즘도 재산관리사(Financial Planner)가 있잖아요. 그 당시 회계사는 자유민들 중에서도 있었고, 종들 중에서도 있었는데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종들 중에서 능력에 맞게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달란트는 원래 금과 은의 무게 단위였으나, 나중에는 화폐 단위가 되었습니다. 한 달란트는 대략 노동자의 15년 품삯이었습니다. 노동자의 일당을 \50,000으로 계산한다면 \273,750,000이 됩니다. 대략 3억 원이 됩니다. 이 사람은 어떤 종에게는 15억 원을, 어떤 종에게는 6억 원을, 어떤 종에게는 3억 원을 맡겼습니다. 이 사람은 종들을 믿었고 또 능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엄청난 돈을 맡겼습니다.

종들도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16절) 그 당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장사를 하거나,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장사를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17절) 그 당시는 돈보다 명예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종들은 주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아무튼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서 주인의 돈을 갑절로 불렸습니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를 하자니 손해를 볼 것 같고, 빌려주자니 떼일 것 같아,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습니다.(18절) 그 당시는 전쟁이 자주 터지고, 도둑이 들어오다 보니 땅을 파고 돈을 묻어두었습니다. 그러다 주인이 죽어 영원히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돈을 보관하는데 급급했습니다.

오랜 후에(얼마 뒤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종들을 불러 맡긴 돈과 남긴 돈에 대해 결산하였습니다.(19절)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보고합니다.(20절)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칭찬합니다.(21절)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자 더 큰 보상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느껴졌습니다./ 이번에는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보고합니다.(22절)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합니다.(23절)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주인은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자 보상으로 천국 잔치에 참석하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주인의 칭찬 한 마디에 그동안의 고생이 눈이 녹듯이 녹아 내렸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똑같이 칭찬해 주었습니다.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맡게 달란트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핑계를 댑니다.(24-25절)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은 재산 증식의 귀재라 원금을 잃으면 어쩌나 두려워하여 장사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아예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담그지 못했습니다. 주인이 얼굴을 붉히며 호통을 칩니다.((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주인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의 핑계를 일축했습니다. 그 당시 은행의 연이율은 25% 정도이었고, 사채의 연이율은 60% 정도 이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돈을 꾸어주기만 했더라도 상당한 이자를 받았을 겁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고리대금을 금지했으나(출 22:25, 레 25:36-37, 신 23:19-20) 이방인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수건에 싸서 묻어두었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렇게도 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원금을 잃으면 어떠하나 걱정한 것으로 보아 소심하였고, 돈을 수건에 싸서 묻어두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성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한 달란트만 남겼어도 칭찬받았을 텐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심판을 내립니다.(28-30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쫒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받아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남은 한 달란트를 주었고, 한 달란트 받아 땅에 묻어둔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았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주인은 충성한 종들에게는 보상을 해 주었고, 불충한 종에게는 심판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주인이 타국으로 가듯이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습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오듯이 예수님은 다시 돌아오십니다./ 종들은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종은 주인의 달란트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 주인 것입니다. 주인이 달라고 하면 내 것이라고 고집부리지 말고 내어 드려야 합니다./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입니다. 시간도 되고 물질도 되고 외모도 되고 재능도 되고 지식도 되고 건강도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많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작게 그 사람의 능력에 맞게 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왜 맡기셨을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달란트를 잘 활용하라고 맡기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하고 있습니까? 달란트를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에 묻어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인이 맡겨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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