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14-20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그리스어로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두개 있습니다. ‘카이로스'(kairos)와 '크로노스'(chronos)입니다. ‘카이로스'(kairos)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리키고, '크로노스'(chronos)는 흘러가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인 시간입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낮과 밤이 되는 시간이고, 지구가 공전하면서 태양과의 거리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크로노스입니다./ '카이로스'는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 속에 의미 있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크로노스로도 보낼 수 있고 카이로스로도 보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때가 찼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때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시간입니다.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계획을 펼치시는 시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신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오셔서 매일 모든 백성들을 통치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회개하라고 선포하였고(막1:4) 예수님도 회개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막1:15)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유대 백성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으면서도 손과 발로는 세상을 주님으로 떠받들고 살았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세상에 살 때는 물질을 할아버지로 여기고 살잖습니까?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이 우상이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이 복음이고, 예수님 자신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학생이나 부모는 배우고 싶은 선생을 골랐지만 예수님은 거꾸로 복음 전파를 도울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길이가 21킬로미터이고 넓이는 13킬로미터입니다. 하프처럼 생겼습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10여 종의 물고기가 서식하였고 호수 주변에 30여개 마을에서 300여척의 고기배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포스코가 포항을 먹여 살리듯이 갈릴리 사람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갈릴리 농부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이라 가난했지만 갈릴리 어부들은 그나마 먹고 살만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은 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새벽에 내다 팔았고 낮에는 그물을 손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그물을 던지는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막1:17)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당시 제자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요구는 나의 제자가 되라는 부름이었습니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계속해서 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아간다면 가족을 부양하며 살 수는 있겠지만 그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크로노스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아간다면 고생하며 살겠지만 그 시간은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입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막1:18)/ 예수님은 조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깁는 것을 보셨습니다.(막1:19)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도 부르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 세베대는 갈릴리에서도 손꼽히는 선주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선주인 아버지를 도와 고기를 잡는다면 잔잔한 물에서 고기를 잡듯이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순회 전도자인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면 거친 풍랑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모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를 도와 세상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간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동참한다면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시간을 흘러 보내기보다는 의미 있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선주인 아버지와 고기잡이를 돕는 품꾼들과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막1:20)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부르시자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라갔습니다.(막1:18,20)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했습니다. 시몬과 안드레와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았다면 이름도 없는 어부로 살다 죽었겠지만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다가 순교했기 때문에 교회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크로노스의 삶을 살지 않고 카이로스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나가 주님이 다시 오신다고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셔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는 우리의 죄를 심판하십니다. 시몬과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부름에 즉시 응답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즉시 따르겠습니까? 아니면 머뭇거리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9:62) 예수님은 우리도 즉시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도 고기를 잡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지 말고 사람을 낚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물질을 모으는데 흘려보내지 말고 예수님을 전하며 의미 있게 보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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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43-51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여러분은 어떻게 해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또 어떤 사람은 주변 사람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 제자가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장 35절에서 42절을 통해 안드레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다른 제자(아마 요한이었을 겁니다.)는 스승인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 하자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은 스승이 전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동생인 안드레가 ‘메시야를 만났다.’ 고 증거 하자 예수님을 만나보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동생이 전도하였습니다. 이들은 노방전도나, 축호전도나, 대중전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계전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까요? 1장 43절을 통해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빌립은 선선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은 학생이나 부모님이 선택했다고 합니다. 요즘도 부모님이 아이가 다닐 어린이집을 선택하잖아요? 선생님이 학생을 선택하는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가 크세노폰을 제자로 부른 경우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는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기 때문에 ‘따른다.’는 것은 ‘제자가 되라.’는 의미였습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인 벳새다 사람이었습니다.(요1:44)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빌립도 거부감이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 다니기가 그래도 쉽지만 없으면 교회 다니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나서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나다나엘은 다른 복음서에는 바돌로매로 나옵니다.(마10:3,막3:18,눅6:16) 나다나엘이 바돌로매입니다. 빌립이 확신을 가지고 나다나엘에게 말했습니다.(요1:45)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은 히브리어 성경의 처음 두 부분인 율법서(신18:15-18)와 예언서에서 말한 그이 다시 말해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했습니다. 빌립도 나다나엘도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메시야라는 말보다 나사렛이란 말에 귀가 거슬렸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메시야가 이스라엘의 남부인 유대 지방 베들레헴 마을에서 탄생한다고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미5:2) 나다나엘은 심드렁하게 대꾸했습니다.(요1:46상)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은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 지방에 있는 인구가 2천 명도 안 되는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에는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렛은 율법적으로 메시야와 상관없는 마을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의 지적이 옳았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과 논쟁하지 않고 한 마디만 덧붙였습니다.(요1:46하) “와서 보라.” come and see.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도를 하다 보면 논쟁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논쟁하기보다 피하는 게 좋습니다. 논쟁에 이겨도 논쟁에 져도 마음이 상합니다. 전도를 하려면 지혜가 필요합니다. 복음에 반항하는 사람에게는 슬그머니 피하고,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조심해서 다가가고,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담대하게 전하십시오. 씨를 뿌리면 금방 싹트지 않듯이 복음을 전해도 시간이 걸립니다. 씨가 땅 속에 묻히듯이 그 사람의 마음에 떨어지면 하나님이 물도 주시고 자라게도 하시고,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듯이 그 사람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아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그저 복음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십니다.




빌립이 확신을 가지고 전하자 나다나엘은 빌립을 따라 예수님에게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감탄하셨습니다.(요1:47)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은 간사했습니다. 형인 에서가 배고프다고 하자 붉은 죽을 주고 장자의 권리를 샀고, 에서가 사냥 간 틈에 변장을 하고 들어가 눈이 먼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기도를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거짓이 없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하고 물었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요1:48)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라 신실한 사람들은 잎이 커서 그늘이 넓게 드리운 무화과나무 아래서 성경을 묵상하였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앉다.’는 성경을 묵상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고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려고 감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해 주시고 우리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해 주시기 위해서 살펴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나를 아시는 예수님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전지하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요1:49)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시2:7) 이스라엘의 임금(시2:6,습3:15)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성 베드로 성당을 방문하면 그 규모에 입이 벌어지듯이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의 권능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그분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을 경험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인생의 문제는 예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알아본 것 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50-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구약성경에 나오는 야곱은 형인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중에 벧엘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닥다리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교통수단이었듯이 예수님은 땅에 사는 우리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교통수단이십니다. 하늘나라는 KTX로도 KAL로도 갈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요14:6)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을 체험해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우리도 빌립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주변 사람에게 전도를 하고,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을 만나서 구세주라고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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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4-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오늘은 주님의 수세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은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과를 비교하였습니다. 요한은 7절 상반 절을 통해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전파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전령이고 그리스도는 왕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행차하기 전에 사자(messenger)가 앞서 가서 왕이 오신다고 알리고 왕이 오실 구불구불한 길을 평평한 길로 닦았다고 합니다. 그렇듯이 요한은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영적이고 도덕적인 타락상을 회개시키려고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그 당시 요한의 인기는 60년대 록 그룹인 비틀즈를 능가할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면 유대 백성들이 신으로 떠받들 것이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한다면 거짓 선지자라고 의심받을 수도 있었지만 요한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령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정직이 돋보입니다./ 7절 하반 절을 통해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종이고 그리스도는 주인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당시 천한 종은 귀한 손님이 집에 오면 대야에 물을 담아 땀과 먼지로 얼룩진 더러운 발을 깨끗하게 닦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은 오실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해 하였습니다. 요한은 고귀한 제사장의 아들이었고, 예수님은 하찮은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요한은 육체적인 신분에 좌우되지 않고 영적인 질서에 따라 자신은 지극히 낮추고 그리스도는 철저히 높여드렸습니다. 요한의 겸손이 감동적입니다./ 8절을 통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은 물세례를 베풀고 그리스도는 성령세례를 베푸신다고 구분했습니다. 그 당시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물로 세례를 받았듯이 요한은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요한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베푼 물세례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다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침례였습니다. 세례 받을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옛 생활은 죽어서 없어지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푸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구원의 세례였습니다. 물세례는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우리 속으로 들어와 우리 몸이 성전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세례는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는 서약이지만 성령세례는 하나님이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로도 세례를 받고 성령님으로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물세례도 한번만 받으면 되고 성령세례도 한번만 받으면 됩니다. 성령세례는 여러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열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자신만이 느낄 수 있도록 잠잠하게 임하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하며 자신은 조연이고 예수님은 주연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스도라고 증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셨지만 목수로서의 개인적인 일을 떠나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 밖으로 나오시자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 보셨을 겁니다./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하늘의 갈라진 틈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의 세례식에 삼위 하나님이 등장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셨고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외아들이다.’ 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셔서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하나님께서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물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는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셨습니다. 우리는 물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확증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주님의 수세주일을 맞아 우리가 세례 받은 것을 재확인하는 예식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 받은 감격이 흐리해졌고, 세상에서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죄를 지어 새롭게 결단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 전야 예배 때에 세례식을 하고 회중들에게 세례수를 뿌리며 ‘여러분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시오.’ 라고 선언하였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미국 감리교회에서도 세례언약 재확인 예식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예식 선언

“몸은 하나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12-13:27).




신앙 고백(모두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된 이들이여, 세례는 우리가 죄로부터 씻김을 받는 표이며, 그리스도께 접붙임 되는 표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죄의 권세는 꺾이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고, 죄의 멍에로부터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세례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새롭게 함으로 그 자유와 그 구속을 기념합시다. 여러분들에게 권하노니 다시 한 번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우리에게 세례를 베푼 이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십시오.




1. 포기의 서약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를 의지하여 죄의 길에서 돌이키고, 세상의 악과 그 권세를 버리겠습니까? 예, 버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그를 주님과 구주로 모시고, 그의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겠습니까? 예, 의지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의 사랑을 나타내겠습니까? 예, 나타내겠습니다.




2. 신앙 고백




세례에 대한 감사기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목사님과도 함께하시길 원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오! 하나님, 세례 받았음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물에 잠김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 물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아 그의 부활에 동참했으며, 그 물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자 예수님께 기쁨으로 순종하여 믿음 안에서 그와 사귐을 기념합니다. 기도하오니 세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이 영원토록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살게 하소서. 삼위일체 되신 성부, 성자, 성령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양손을 펼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세례를 기억하고 감사하십시오. 아멘.




안수기도(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는다.)

오! 주님, 000를 성령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매일매일 그(그녀)에게 주님의 은혜와 은사를 더해 주십시오. 지혜와 명철의 영, 분별과 능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는 영, 주님 앞에서 기뻐하는 영을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려 주십시오. 아멘.




평화의 인사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목사님과도 함께하시길...

(옆에 있는 성도들과 인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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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창대교회 표어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으라.(행1:5)

교회색깔:보라(영광)

사명선언문 우리교회는 교육하고 선교하고 치유하는 교회입니다.(마4:23,9:35)


 

2009년 창대교회 목표


인원 : 3속 12가정 30교인

재정 : 결산 5천만 원

실천 : 153 운동 

        매일 1시간씩 기도하고 5장씩 성경읽고 매년 3명씩 전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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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의 서언(Prologue)입니다. 서언에는 요한복음의 전체 주제가 압축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가 나옵니다. 첫째, 예수님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려면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상반 절을 통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사람의 이성이나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가리키는데 헬라인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적인 원리이면서 우주를 생성한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리켰습니다. 유대인들은 지혜를 의인화했는데(잠8장) 지혜와 말씀과 율법을 동일시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로고스라고 말씀합니다. 로고스는 말씀이고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14절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1절 하반 절을 통해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입니다. 2절과 3절을 통해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18절을 통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고 말씀하셨고, 14장 9절 중반 절을 통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셨고, 20장 28절을 통해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주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본질이라는 교리를 채택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생명을 얻습니다. 4절 상반 절을 통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고, 5장 26절을 통해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라고 말씀하셨고, 10장 28절을 통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14장 6절을 통해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20장 31절을 통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인류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빛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빛을 비춰주십니다. 4절 하반 절에서 5절을 통해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하였고, 8장 12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였고, 9장 5절을 통해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의 빛이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빛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세례자 요한을 보내셔서 그 빛을 증언하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빛을 증언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은 참 빛입니다.(요1:9) 그러나 사람들은 사탄의 지배아래 있다 보니 그 빛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요1:10) 사람들은 눈이 멀어서 육체적인 맹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몰라서 영적인 맹인이 되었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것은 환영하는 것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사람의 행동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집니다. 인종적인 혈통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거듭남을 통해 주어집니다. 3장 3절과 5-6절을 통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물로 한 번 태어납니다. 육체적인 탄생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한 번 더 태어납니다. 영적인 탄생을 가리킵니다.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적으로 한번 태어나면 육체적으로 한번 죽고 영적으로 또 한 번 죽습니다. 불못에 던져집니다.(계20:14) 거기는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장소입니다.(계20:10) 그러나 두 번 태어나면 한번 죽습니다. 육체적으로 한번 죽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성육신하셨습니다. 18절을 통해 “아버지 품속에 잇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자리에서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는 것을 명예롭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14절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사람으로 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성막 안에 계시며 백성들과 함께 하셨듯이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주후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결합체라는 교리가 채택되었습니다.)  


일곱째,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34장 6절을 통해 “여호와라, 여호와라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인자와 진실은 은혜와 진리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과 공의를 강조하셨고 예수님을 통해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수여자였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계시하셨지만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은혜를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차가운 돌 판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을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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