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9-15 복음을 믿으라.

오늘 본문을 보면 세 개의 짧은 본문들이 연속해서 나옵니다. 첫 번째 본문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를 고백하고 정화시키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있어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도 예수님에게 죄가 없으시니 세례를 받지 말라고 말렸습니다.(마3:14) 그렇다면 왜 세례를 받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죄로 얼룩진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듯이,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로 물든 인간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님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시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막1:10-11)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예수님께서 인간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시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시각적 자료를 사용하셨는데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님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청각적 자료도 사용하셨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인시켜주셨습니다. 요한은 비둘기 같이 임하신 성령님을 통해 그리고 내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확인을 통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물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위격이지만 한 본체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에 앞서 세례를 받으셨듯이 우리도 교인이 되기 위해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요한의 세례와 오늘날의 세례는 다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고 오늘날의 세례는 교인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는 물세례를 통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하고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두 번째 본문은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나자 성령님이 곧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곧, 즉시라는 단어가 몇 차례 나옵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메마른 땅입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이죠. 낮에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밤에는 추위가 살을 에 입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입니다./ 그러나 이런 죽음의 땅에도 들짐승은 살아있습니다. 수퇘지, 재칼(야생 개), 여우, 늑대, 표범, 하이에나 같은 들짐승들이 밤이 되면 먹을거리를 찾아 헤매고 돌아다닙니다. 어디선가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머리가 쭈뼛해지고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소름이 쫙 끼치죠. 광야는 공포의 땅입니다./ 이런 땅에서 하루를 지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글거리는 태양에 노출되어 일사병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들짐승을 경계하느라 신경과민에 걸릴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런 광야에서 하루도 아니고 무려 40 일을 계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계신 게 아니라 금식하면서 계셨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계셨습니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쓰러뜨리려고 세 가지를 시험했습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응수하셨습니다./ 마귀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로 데려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마4:6)”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4;7)”고 거절하셨습니다./ 마귀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고 호통 치셨습니다. 사탄이 물러가자 천사들이 예수님을 시중들었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 육적으로도 회복시켜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어 영적으로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인간을 돕습니다.(히1:14)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듯이 우리를 쓰러뜨리려고 발악을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떡이 되게 하라고 육신의 정욕으로 유혹하고, 뛰어내리라고 이생의 자랑으로 유혹하고, 천하만국을 보여주고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했듯이(요일2:16) 물질에 약한 사람에게는 돈으로 유혹하고, 이성에 약한 사람에게는 여자로 유혹하고, 권력에 약한 사람에게는 감투로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예수님을 시중들었듯이, 천사들을 보내 우리들을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사자의 입을 봉하여 다니엘을 구하셨고(단6:22), 천사를 보내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풀어주었습니다.(행12:6-10)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시험을 주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고전10:13)

세 번째 본문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나서, 갈릴리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15) 예수님은 때가 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에는 카이로스의 시간과 크로노스의 시간이 있습니다. 여기서 때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통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오셔서 매일 모든 백성들을 통치하시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완성됩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였지만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떠나 살았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으면서도 손과 발로는 세상을 주님으로 떠받들고 살았습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세상에 살 때는 물질을 할아버지로 여기고 살잖습니까?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이 우상이고 우상을 섬기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도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이 복음이고 예수님 자신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새 생활을 시작하고, 시험을 극복하여 신앙이 성장하고, 우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막 9:2-9 그의 말을 들으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 측근들을 이끌고 산행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유대 지방에서 사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핵심 제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막9:2) 성경학자들은 마가복음 8장 27절을 통해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계셨기 때문에 이 산이 근처에 있는 헐몬 산이거나 아니면 갈릴리 지방에 있는 다볼 산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사실 이 산이 어느 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특별한 장소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출24:12이하)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왕상19:8이하) 시내 산과 호렙 산은 같은 산입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장광영 전 감독회장님은 산 기도를 하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하산하는 길에 꼽추를 만났는데 간절히 기도했더니 펴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오늘날도 산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기도원을 보십시오. 대부분 산에 있잖아요? 그러나 요즘은 산 기도를 많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중요합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변화는 내적인 변화에서 비롯한 외적인 변화입니다. 사람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광채가 났습니다.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습니다(막9:3)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고 옷이 빛 같이 희었다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통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 올 때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얼굴이 해 같이 빛났습니다. 다니엘서 7장 9절을 통해 하나님의 옷은 눈 같이 희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옷이 빛 같이 희어졌습니다. (저도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는데 옷이 빛 같이 희었습니다.) 그러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막9:4)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모세는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고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장사 했으나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신34:6)/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갔다고 알려졌습니다.(왕하2:11) 말라기 4장 5절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예언됐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14)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 같이 희어져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베드로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는 아이가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듯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에 끼어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중에 하나인 장막절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초막을 졌듯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기념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막9:5) 베드로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것을 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광이 있기 전에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간과했습니다.(막8:31) 오늘날도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밥을 차리려고 하지 않고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데 헌신하지 않고 부흥된 교회에서 유익을 누리려고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고난이 있는 영광이 반석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습니다. 고난은 성장 통입니다. 과정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어찌 보면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아주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질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고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베드로는 몹시 무서워서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고 말했습니다.(막9:6)

하나님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할 때에 빛난 구름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막9:7)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출13;21),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도 구름으로 가득하게 임하셨습니다.(왕상8:10) 하나님은 시내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출19:9) 높은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세례자 요한에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고 말씀하셨듯이, 높은 산에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형되셨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으라는 듣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마태복음 17장을 통해 제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하시면 죄로 얼룩진 인간들은 두려워합니다.(단10:7-9)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두려워서 떠는 제자들을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마17:7) 예수님은 죄를 지은 인간들을 대신해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구름도 사라졌고 모세와 엘리야도 사라졌고 예수님과 그들만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율법도 보내주셨고 선지자도 보내주셨지만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도 범했고 선지자도 죽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남았듯이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 4장 12절을 통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도 예언으로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입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1장 22절을 통해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고 사람은 몸의 지체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12장 2절을 통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는 돈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생의 소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 돼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통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막 1:40-45 깨끗함을 받으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은 암입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07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평균 671명이 죽었는데, 악성신생물(암)으로 185명(27.6%), 뇌혈관 질환으로 81명(12%), 심장 질환으로 59명(8.8%), 고의적자해(자살)로 34명(5%), 당뇨병으로 31명(4.6%), 운수사고 21명(3.1%)이 죽었습니다. 암은 전체 사망자의 4분의 1이 넘었습니다.

1.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질병은 무엇일까요? 나병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갗에 부스럼이나 뾰루지나 얼룩이 생기면 혹시 나병인가 싶어 제사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제사장은 피부를 살펴보고 나병이 아니면 ‘정하다.’고 선언하고, 나병이면 ‘부정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그것도 제사장이 진찰하다 보니 한센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고, 악성피부병도 나병으로 판정하였습니다. 나병으로 판정되면 입은 옷을 찢어버리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손가락으로 코밑수염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소리 질렀습니다.(레13:45-46) 나병에 걸리면 집에서도 쫓겨났고, 마을에서도 쫓겨났고, 회당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혼자 살거나 나병환자들끼리 무리를 지어 살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육체적으로도 고통 받았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고, 종교적으로도 버림받았습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무릎을 꿇고 간구하였습니다.(막1:40)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는데 이 환자가 예수님에게 찾아온 걸로 보아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엎드렸는데 이 환자가 예수님에게 엎드린 걸로 보아 아주 겸손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 환자는 예수님이 나병을 치유하실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환자는 용기도 있었고 겸손하기도 하였고 믿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12) 도전하는 자가 성취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살이 썩어 몸의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코가 문드러지고 손가락이 빠지고 심한 악취가 났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가까이 오지 말라고 욕설을 퍼붓고 돌멩이를 던질 텐데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7) 이런 마음을 손기철 장로님은 왕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막1:41)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병환자와 신체적으로 접촉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 나병환자는 감격하였습니다. 사랑은 만짐입니다.(Love is touching)/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고쳐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하는데 예수님은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런 기도를 손기철 장로님은 왕의 기도라고 합니다. 왕의 기도는 예수님 안에서 말씀대로 믿고 선포하고 행동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찌 보면 거지 기도입니다. 그러나 왕의 기도는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제를 향해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시자 나병은 곧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해 졌습니다. 곧은 갑자기 그리고 완전하게입니다. 나병환자는 순식간에 문드러진 코가 도드라졌고 빠졌던 손가락이 솟아났고 악취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나병환자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엄하게 경고하셨습니다.(막1:43-44)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나병이 나으면 제사장의 진단을 받고(레13:16-17), 산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바치고(레14:2-4), 제사장은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의 질그릇 안에서 잡고 피를 빼고 다른 새와 홍색 실과 백향목과 우슬초를 핏물에 찍어 나병환자에게 일곱 번 뿌리고 ‘정하다.’고 선언하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8일 후에 흠 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 등을 바쳤습니다.(레14:8) 이런 모든 과정을 마치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는 증명서를 발급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나병이 나았으니 집으로도 들어갈 수 있었고,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고, 회당에서 예배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육체적으로도 고치셨고. 사회적으로도 고치셨고, 종교적으로도 고치셨습니다. 그 사람은 완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하고 말씀하셨지만 그 사람은 예수님이 나병을 고쳐주셨다고 간증하고 다녔습니다.(막1:45) 그 사람이 떠들고 다녀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왔습니다. 

3.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치시면서 우리도 고치시기를 원하십니다. 나병환자가 육체적인 질병이 있었듯이 우리도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병환자가 이웃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듯이 우리도 이야기할 대상이 없어 외롭지는 않습니까? 나병환자가 회당에 갈 수 없어 종교적으로 버림받았듯이 우리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신 지 의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병환자가 용기 있게 찾아갔듯이 우리도 열일을 제처 놓고 예수님에게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마11:28)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됩니다. 문제를 들고 예수님에게 나오십시오./ 나병환자가 무릎을 꿇고 엎드렸듯이 우리도 겸손하게 나와 예수님께서 마음에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내 이야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십시오./ 나병환자가 고쳐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나를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육신의 질병도 고치시고 마음의 상처도 고쳐주십니다. 제사장이 나병을 정하다고 선언했듯이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되시어 여러분의 영육을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나병환자가 병을 고쳐주셨다고 많이 전파했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내 질병과 상처를 고쳐주셨다고 간증해야 합니다. 손기철 장로님은 간증하는 소리를 듣고도 질병이 낫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널리 전파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막 5:25-34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현대인들을 묘사할 때 ‘절망’과 ‘소외’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희망이 없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절망도 비극이지만 소외는 더 큰 비극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과 마음을 터놓을 대상이 없어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없어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처럼 절망감과 소외감 속에서 살아가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혈루증-하혈병’을 앓았습니다. 구약 율법에서는 여인이 피를 흘리는 7일 동안은 부정하였습니다.(레15:19-33) 이 기간 동안 이 여인과 접촉하는 사람들도 부정하였고 이 여인이 만진 물건들도 부정하였습니다. 이 여인과 접촉한 사람들은 옷을 빨아야 했고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옷을 빨고 몸을 씻으려면 여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피를 흘리는 여인은 아예 기피대상이었습니다. 이렇게 7일 동안 피를 흘려도 불편한데 이 여인은 한 두 달도 아니고 일 이 년도 아니고 무려 12년간이나 피를 흘렸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 여인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영양분이 피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도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부정해 질까봐 슬슬 피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회당에 나가 실컷 기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회당장이 부정한 여인이라고 출입을 금지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피를 흘려 육체적으로도 고통을 겪었고, 기피대상이 되어 사회적으로도 고통을 겪었고, 부정한 여인이라고 낙인찍혀 종교적으로도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 여인은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절망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갔습니다. 

 

이 여인은 하혈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수고를 다했습니다.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가 봤습니다.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어봤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사도 병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어떤 약도 효험이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의사를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약값을 치르느라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시간을 투자하고 물질을 투자했지만 병의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병도 병이었지만 치료받으러 다니느라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야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 여인이 포기하자 하나님이 일하셨습니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사람이 내려놓아야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린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을 유지인 회당장의 외동딸을 고치기 위해서 바쁘게 걸어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여인은 망설였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예수님을 놓칠지도 몰랐습니다. 여인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여인이 피가 흐른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길을 터주기는커녕 부정해진다고 접근하지 못하게 할 게 뻔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안수해주지 않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 같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사람들의 숲을 헤치고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려고 서로 밀치고 당기고 야단이었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틈을 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다면 아무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 여인이 게처럼 기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맥스 루케이도, 내 안에 계신 예수님, 56). 아무튼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옷자락을 살짝 만졌습니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흐르던 피가 즉시 멈추었습니다.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그으면 불꽃이 일어나듯이 사람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결합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인은 피가 멎은 줄 금세 알아챘습니다. 이제 여인은 사람들 틈을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여인이 뒷걸음치려는데 예수님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누가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밀치고 있는데 어떻게 아느냐며 투덜거렸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옷자락을 만졌는지 아시는 눈치였습니다.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앓던 하혈병이 즉시 나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워집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니까 죄를 저지르는 겁니다. 여인은 더 이상 속일 수 없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인은 피가 흐리고 있어 허락도 맞지 않고 옷자락을 만졌다고 고백했습니다.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피가 멈추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호통 치시지 않을까 덜컥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안심시켰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예수님은 여인을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여인은 그동안 몹쓸 병에 걸렸다고 집안에서 내쫓겼습니다. 어쩌면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감 속에서 절망하는 여인에게 딸이라고 친근하게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15장을 통해 방탕한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오자 아버지가 뛰어가서 아들을 껴안아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아들로서 환영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거지를 아들로서 맞아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는 부정한 여인을 딸이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버림받았더라도 예수님은 우리를 하늘나라 가족으로 맞아주십니다. 아들과 딸로 맞아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여인의 가족들은 재산을 탕진했다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사람들은 여인과 옷깃이라도 스칠까봐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한 여인이 옷자락을 만진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성냥개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성냥갑에 긋기를 바라십니다. 성냥개비가 성냥갑에 닿을 때 불이 붙듯이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결합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을 체험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평안히 가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유명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갔고 몸에 좋다는 약은 다 먹어봤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2년 동안이나 앓았던 고질병을 단숨에 고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도 손쉽게 해결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해보여도 예수님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하나님이 능력이 없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십시오. 문제가 해결될 겁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베로니카처럼 절망감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낙담하지는 않습니까? 소외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외롭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로 오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을 아들과 딸로 맞아주시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여러분에게 평안을 빌어 주실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막 1:21-28 새 교훈이로다.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 목사님은 리더십에는 다섯 가지 수준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직위’의 수준입니다. 단지 리더이기 때문에 싫어도 따르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승인’의 수준입니다. 리더를 좋아하고 신뢰하기 때문에 따르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생산’의 수준입니다. 리더가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따르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는 ‘인물계발’의 수준입니다. 리더가 사람을 키웠기 때문에 따르는 단계입니다./ 다섯 번째는 ‘인격’의 수준입니다. 리더가 존경을 받기 때문에 따르는 단계입니다./ 리더가 인격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다섯 번째 수준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다섯 번째 수준까지 도달한 리더일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몇 번째까지 도달한 리더일까요? 예수님은 다섯 번째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리더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람이 갖지 못한 하나님께서 주신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의 능력, 비범한 행동, 존재 자체가 갖는 힘 등에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밥 브리너와 레이 프리처드가 쓴 [예수님처럼 하라] 68쪽에서 인용하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3차례인 절기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매주 찾아오는 안식일에는 마을에 있는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회당에는 상주하는 랍비가 없었기 때문에 회당장은 마을을 방문한 선생에게 설교를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셨고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에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과 달리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막1:22) 서기관들은 나중에 랍비가 됐는데 무미건조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유명한 랍비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권위를 더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했는데도 능력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목사님들도 서기관들이 유명한 랍비의 가르침을 인용하듯이 유명한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느라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소홀히 합니다. 설교의 권위는 유명인사의 명언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4장 12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말은 육신은 찌를 수 있을지 모르나 영혼은 쪼갤 수 없습니다. 육신은 즐겁게 할지 모르나 영혼은 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귀를 즐겁게 하는 세상의 말보다 영혼을 살찌우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쫒아내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설교를 하시자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막1:23) 사탄은 타락한 천사이고 귀신은 사탄의 부하입니다. 귀신은 사람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을 조종합니다. 평범한 랍비가 왔을 때는 귀신도 잠잠했는데 비범한 랍비가 오시자 귀신이 요동했습니다. 영은 영으로 통합니다. 예수님도 영적인 분이시고 귀신도 영적인 존재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소리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말했는데 귀신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사탄의 왕국을 멸망시키러 오셨습니다. 귀신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말했는데 귀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회당에 참석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기만 했지만 귀신은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간결하고 단호하게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막1:25-26)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예수님은 귀신을 잠잠하라고 결박하셨고 나오라고 추방하셨습니다. 귀신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왔습니다.(막1:26)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도 물리치셨는데(막1:13) 사탄의 부하인 귀신은 손쉽게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을 다스릴 권능이 있으십니다. 사탄이 지금 아무리 발악하더라도 나중에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됩니다.(계20:10) 오늘날 연초가 되면 일부 교인들이 점쟁이에게 찾아간다고 합니다. 점쟁이는 귀신의 도움으로 점을 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듯이 용한 점쟁이는 교인을 알아봅니다. 예수님이 악한 귀신을 내쫓았는데 어떻게 점쟁이가 귀신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인생을 알 수 있겠습니까? 시간 낭비요 돈 낭비입니다. 하나님은 열왕기하 1장을 통해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병이 들자 신하들을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보내 병이 나을지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책망하셨습니다.(왕하1:3-4) 결국 아하시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죽고 말았습니다. 귀신은 예수님보다 열등한 존재입니다. 귀신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귀신에 미혹되지 말고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꾸짖으시자 귀신이 나오는 것을 보고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탄성을 질렀습니다.(막1:27) 그 당시 귀신을 쫓아낼 때는 귀신을 불쾌하게 하거나 겁나게 해서 쫓아냈다고 합니다. 귀신들린 사람의 코앞에 지독한 냄새가 나는 나무뿌리를 갖다 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신을 제압하기 위해 귀신보다 더 강력한 영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을 불쾌하게 하거나 귀신보다 강력한 영을 찾지 않고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말씀만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리고 능력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온누리교회 장로님 중에 손기철 장로님이 계십니다. 건국대 생명환경과학대학 학장입니다. 과학자입니다. 손 장로님이 매주 월요일 성남에 있는 선한목자교회에서 월요말씀치유집회를 인도합니다. 손 장로님의 집회를 통해 마음의 상처도 치유되고 육신의 질병도 치유된다고 합니다. 집회에 참석하기만 해도, 동영상을 보기만 해도, 휴대폰 기도를 받고서도 치유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휠체어를 타고 온 사람이 걸어서 나간다고 합니다. 손 장로님은 [기름 부으심]이란 책을 통해 구약의 선지자, 왕, 제사장은 기름 부으심을 받고 그 직분을 수행했다고 말합니다. 기름 부으심은 상징이요 실체는 성령님을 부어주심입니다.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면 성령님의 부어주심을 체험하면 누구든지 왕과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기름 부으심이 없는 것은 군인이 무기를 들지 않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벧전2:9)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악하여 말로하면 믿지 않습니다. 눈으로 보여줘야 믿습니다. 우리도 기름 부으심을 받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