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5:1-8 나는 포도나무요

저는 울진에서 목회하는 동안 아이들이 출생할 때마다 과실수를 심었습니다. 아이들이 1월생이다 보니 얼었던 땅이 녹아가는 3월에 심으면 적당했습니다. 여호수아는 단감나무를, 에스라는 포도나무를, 디모데는 앵두나무를 심었습니다. 원로 장로님이 새순이 파릇파릇하게 올라온 포도나무 묘목을 갖다 주셔서 집 앞에 심었더니 줄기가 올라왔습니다. 권사님이 땅을 파고 지주를 설치해 주셔서 튼튼한 순을 하나 남겨두고 나머지는 따주었습니다. 2년째가 되니 원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왔습니다. 튼튼한 가지를 원가지로 삼아 철사위에 걸쳐놓고 나머지는 잘라주었습니다. 포도나무가 Y자형이 되었습니다. 3년째가 되니 원가지에서 가지가 뻗어 나왔습니다. 튼튼한 가지를 남겨놓고 곁가지를 짧게 잘라주었습니다. 가지에서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좁쌀만 한 연두색 포도 알이 맺혔습니다. 포도 알이 보라색으로 변하며 구슬 만하게 커졌습니다. 가장 진한 포도 알을 한 알 따서 입에 넣으면 머루 맛처럼 진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였습니다.(시80:8-16,사5:1-7,호10:1)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5절을 통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잘라버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포도나무는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낙엽이 떨어진 후부터 싹이 나오기 전까지 밑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저는 퇴비를 밑거름으로 주었습니다. 포도 알이 영글어 갈 때 덧거름을 주어야 포도 알이 굵어집니다. 저는 비료를 덧거름으로 주었습니다. 포도를 수확하고 나서 산모가 몸조리를 하듯이 가을 거름을 주어야 쇠약해진 나무가 회복됩니다. 저는 낙엽을 가을 거름으로 주었습니다. 포도나무에 거름을 주어야 쇠약해진 나무가 회복되고 포도 알이 굵어지듯이 교인들도 기도와 말씀으로 거름을 주어야 세상에서 살다 지친 영혼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거름을 주지 않으면 당도가 떨어지듯이 우리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맛을 내는 포도나무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기도와 말씀으로 거름을 주어 단맛을 내는 포도나무가 돼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는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겨울에 가지치기를 합니다. 영양분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전지가위로 가지를 잘라주었습니다. 포도나무는 겨울에 껍질을 벗겨줍니다.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갈라진 껍질을 벗겨주었습니다. 포도나무는 봄에 꽃이 피기 며칠 전에 순지르기를 합니다. 새 가지의 끝부분을 잘라주어 영양분이 포도 알에게로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도 순지르기를 하느라 손톱이 초록색으로 물들었습니다. 포도나무는 여름에 포도 알을 솎아줍니다. 포도 알이 굵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포도나무에 가지치기를 해야 영양분이 빠져나가지 않고 순지르기를 해야 포도 알이 굵어지듯이 교인들도 시간을 가지치기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똑같이 살다가는 신앙 생활할 수 없습니다. 포도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포도 알이 작아지듯이 우리도 우선순위를 정하지 않으면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신앙이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여러분은 포도 알이 굵어 상품 가치가 높은 포도나무입니까? 저와 여러분은 시간을 가지치기하여 값비싼 포도나무가 돼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는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나무는 뿌리에서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포도 잎에서 사람이 호흡을 하듯이 빛을 흡수하여 이산화탄소와 수분으로 유기화합물을 합성하여 줄기를 거쳐 가지를 지나 열매로 영양분이 집중됩니다.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아기에게 영양분이 옮겨가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5절을 통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가 연결되어 있어야 영양분이 가듯이 우리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5장 6절을 통해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면 얼마못가 죽어버리듯이 우리도 예수님과 단절된다면 영혼이 죽어버립니다. 저는 죽은 가지를 모아다 불쏘시개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영혼을 지옥 불에 던져버리십니다. 여러분은 포도나무와 연결되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돼야 하겠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에 두 명의 청년이 도박장을 찾아갔습니다. 도박장 바로 옆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청년이 우연히 교회 입구에 적혀있던 설교 제목을 보았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청년은 갑자기 죄 의식이 생겨서 다른 친구에게 교회에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다른 친구는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한 청년은 교회에 갔고 다른 청년은 도박장에 갔습니다. 교회에 간 청년은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도박장에 간 청년은 도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교회에 갔던 청년은 미합중국 제22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클리블랜드(Cleveland) 대통령입니다. 그는 제24대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박장에 갔던 청년은 어떻게 됐을까요? 도박장에 갔던 청년은 뇌물을 받고 감옥에 갇혀서 친구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습니다.[예수! 그를 만나다. 133-134쪽]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거름을 많이 주고, 가지치기를 잘해줘도,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에 연결됐느냐가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끈입니다.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과 우리가 연결되고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과 우리가 단절됩니다. 클리블랜드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됐기에 백악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듯이 우리도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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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0:11-18 나는 선한목자라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은 목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23:1,77:20,79:13,95:7,100:3,사40:11,겔34:11-31)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가 많이 내리는 서쪽의 농경지에서는 농사를 지었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동쪽의 광야에서는 목축을 하였습니다. 10월 초막절이 지나고 우기가 되어 풀이 파릇파릇 돋아나면 남자들은 양떼를 이끌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부터 풀을 뜯기기 시작하여 점차 집으로 가까이 오면 여자들이 넘겨받았습니다. 이삭의 아내 라헬(창29:10)도 모세의 아내 십보라(출2:16)도 양떼를 쳤습니다. 이때쯤 4월 유월절이 지나고 건기가 시작되는데 남자들은 밭으로 나가 보리와 밀을 추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도 치고 농사도 짓고 투잡(two job)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해가 뜨면 양떼를 이끌고 푸른 풀밭으로 나갔습니다. 양떼는 고개를 쳐 박고 부지런히 풀을 뜯었습니다. 목이 마르면 시냇물로 데려갔습니다. 양떼는 혀를 날름거리며 목을 축였습니다. 저녁이 되면 목자들은 양떼를 이끌고 우릿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목자들은 갑작스럽게 비가 쏟아지거나 들짐승이 나타나거나 도둑이 들어올까 봐 동굴을 우릿간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돌이나 나뭇가지로 담을 두르고 담 위에 가시를 올려놓고 임시로 우릿간을 만들었습니다. 목자들은 이마트 포항 이동점에 가보면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구석구석에 CCTV를 설치했듯이 낮에는 양떼를 풀어놓았기 때문에 들짐승이 물어갈까 봐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살폈고, 밤에는 도둑이 훔쳐갈까 봐 양떼를 우릿간에 몰아넣고 입구에서 선잠을 잤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양떼를 지키기 위해 낮에는 더위에 허덕였고 밤에는 추위에 떨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었다고 말했습니다.(창31:40) 이스라엘의 목자는 모두가 피하는 3D 업종이었습니다. 'Dangerous(위험한)','Difficult(어려운)', 'Dirty(지저분한)' 위험하고 어렵고 지저분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최하층 민에 속했습니다.

목자들은 한 사람 당 양 30에서 75마리를 돌볼 수 있었기 때문에 욥처럼 양이 칠천 마리나 되고(욥1:3) 나발처럼 양이 삼천 마리나 되는(삼상25:2) 주인들은 삯꾼 목자들을 고용했습니다. 양을 치기가 너무 힘들고 위험하고 지루하고 지겹다 보니 주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20%의 손실을 각오하고 삯꾼 목자들에게 양떼를 맡겼습니다. 삯꾼 목자들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애착을 가지고 양떼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삯꾼 목자들 때문에 목자를 거지나 도둑같이 멸시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목자는 목자인데 삯군 목자가 아니라 ‘선한 목자’이십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는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을까요?

첫째,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아십니다.(요10:14) 목자들은 밤이 되면 양떼를 한 우릿간에 집어넣고 교대로 문을 지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떼가 섞였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은 양떼를 향하여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양떼는 자기 목자의 휘파람 소리를 알아듣고 문밖으로 따라나섰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알고 양이 목자를 알듯이 하나님도 예수님을 아셨고 예수님도 하나님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마태복음 10장 31절을 통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두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의 기도 제목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서 4장 6절을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몰라 망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아시듯이 우리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의 문으로 드나듭니다.(요10:7,9) 우리나라 속담에 ‘열 사람이 지켜도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 고 합니다. 목자들이 교대로 입구를 지켜도 도둑을 막지 못했습니다. 도둑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구렁이가 담을 넘어오듯이 돌로 만든 담을 몰래 넘어오거나, 뱀이 나뭇가지 사이로 기어 다니듯이 나뭇가지 사이를 살며시 헤치고 들어왔습니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서 들어왔습니다.(요10:10) 그러나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요10:7) 양이 다니는 문입니다. 담을 통해 우릿간 밖으로 옮겨지는 양떼는 멸망을 받고 죽게 되지만 양의 문을 통해 우릿간으로 들어오는 양떼는 구원을 받고 들어오고 나가고 꼴을 얻습니다.(요10:9) 하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통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수많은 길 중에 하나의 길이 아니라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양이 문을 통해 드나들어야 살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풍성하게 주십니다.(요10:10)

셋째,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희생합니다.(요10:11,15,17,18) 삯꾼 목자는 양이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탈진하면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치하기 일쑤였습니다. 들짐승이 나타나면 막대기로 맞서 싸우지 않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도둑이 우릿간을 뚫고 들어오면 적당히 훔쳐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요10:11)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보다 양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상 17장을 통해 다윗은 아버지의 양떼를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나타나서 새끼 양을 물어 가면 뒤따라가서 사자와 곰을 쳐 죽이고 새끼를 구해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선한목자가 양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4번이나 말씀합니다.(요10:11,15,17,18) 이것이 선한 목자와 삯군 목자의 진정한 차이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5장 8절을 통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람은 혹시 있을지 모르지만 죄인을 위하여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5장 2절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희생하셨으니 우리도 서로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자녀가 철이 들면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듯이 교인도 신앙이 깊어지면 나를 아시고 나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시고 나를 위해 희생해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를 위해 헌신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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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36-49 너희는 증인이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을 리 없다. 

하나님은 베드로 후서 3장 8절을 통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루가 천 년처럼 길고 천 년이 하루처럼 짧다는 말이죠.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하루처럼 짧다고) 생각했으나 자꾸만 지연되자(천 년처럼 길어지자) 예수님의 재림이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궁금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이 보기에 길게 보여도-재림이 늦어져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짧다고-금방 재림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보낸 3년간은 화살이 날아가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으나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간은 슬로비디오를 보듯이 더디게 지나갔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죽으신지 사흘째 되는 날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새벽이 되자 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른다고 나가더니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말하더라고 알렸습니다.(눅24:6) 사도들은 여 제자들의 말을 허탄한 듯이 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다니 어처구니가 없다고 일축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고 시신은 없고 피에 젖은 세마포만 있더라며 이 어찌된 일이냐고 놀라워했습니다.(눅24:12)/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보다는 자신들의 앞날이 걱정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향후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사람 유다는 이미 목 메달아 죽었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러 제자들은 하나 둘씩 고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사도들은 밤이 깊도록 머리를 맞댔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다며 흥분해서 돌아왔습니다. 사도들은 새벽에는 여 제자들이 헛소리를 하더니 밤이 되자 베드로까지 미쳤다며 무시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엠마오 마을로 떠났던 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을 길에서 만났고 예수님과 식사까지 했다며 기뻐 날뛰었습니다.(눅24:35) 사도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마 귀신을 본 모양이라며 흘러 넘겼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한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또 한쪽은 아니다 귀신을 보았다며 옥신각신 다투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눅24:36) 문이 잠겨있었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들어오실 수 있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인사법을 따라 그들에게 평강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고 놀랍기도 했고 행여 귀신은 아닌 가 싶어 무섭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안심시키셨습니다.(눅24:38-39)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은 손과 발의 못자 국을 보여주었습니다. 귀신이라면 그림자만 있을 텐데 예수님은 살과 뼈도 있었고 못자 국도 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너무 기쁘기도 하였고 아직도 귀신은 아닌 가 의심을 떨쳐버리지도 못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음식을 찾으셨습니다.(눅24:41b)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그들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고 예수님은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귀신이라면 음식을 먹을 리 없었습니다./ 지금 그들 앞에 서신 분은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인사도 하셨고, 뼈와 살로 이루어진 몸도 보여 주셨고, 음식도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다시 살아나신 겁니다.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성경을 가르쳐 주시다.  

예수님은 살아계셨을 때에 종교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실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자 다시 한 번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서-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고 또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서 18장 15절부터 20절까지는 선지자로서의 메시야의 역할이 기록되었고,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은 메시야의 고난이 기록되었고, 시편 16편 9절부터 11절과 이사야서 53장 10절부터 11절까지는 메시야의 부활이 기록되었고, 이사야서 42장 6절과 49장 6절과 60장 3절에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들의 닫혔던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서 예언되었던 바로 그 메시야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사명을 주시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풀어주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증인은 보고 들은 사실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세계적인 설교학자인 토마스 롱 교수는 설교자는 증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알라딘 닉네임은 위트니스입니다. Preacher is Witness. 우리는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냥 증언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증언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성령님은 그들이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성령님은 능력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주는 열쇠입니다. 시동이 걸려야 차가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진공청소기를 작동시키는 전기입니다. 전기가 들어와야 청소기가 작동합니다. 성령님은 풍력발전소를 움직이는 바람입니다. 바람이 세게 불어야 전기를 생산합니다. 성령님은 수력발전소를 가동시키는 물입니다. 물이 강력하게 떨어져야 전기가 발생합니다. 성령님은 태양력발전소를 작동시키는 햇빛입니다. 햇빛이 강렬하게 비춰야 전기가 생성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임하셔야 허울뿐인 교인이 거듭난 교인으로 변화됩니다. 성령님은 교회 마당만 밟는 교인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임하셔야 능력을 받고 지금 있는 자리부터 시작해 지구촌 전체까지 나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습니다.(행2:1-4) 성령님은 지금도 오십니다. 우리도 성령님을 받아야 그들처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의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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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9일 주일 오후에 정선희 사모와 여호수아와 함께 심수명 목사님의 전인성숙 제자훈련을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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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24-29 나의 주님이시요

최근 강원지역에서 열흘 사이에 3건이나 동반자살 사건이 발생해 남녀 11명이 숨졌습니다. 이 사건은 서로 주소가 다른 사람들이, 렌터카를 빌려 강원도로 이동해, 연탄불을 피우고 출입문과 창문 틈을 테이프로 밀폐하고, 연탄가스에 중독돼 죽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경찰은 자살한 사람들이 인터넷 자살사이트에서 만났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조선일보 2009년 4월 17일) 자살한 사람들은 사회 경제적인 요인이나, 심리적인 내면적인 이유나, 발달심리학적 특성이나,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자살합니다.(이슈 & 논술 2.0 293호 인문계 31쪽)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다 자살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울증이 자살의 주원인입니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인데 우울증 환자들은 겨울을 전후해 자살을 많이 시도한다고 합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은 여자가 남자보다 4배나 더 시도하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4배나 더 죽는다고 합니다. 자살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4위입니다. 2007년 사망원인 통계를 보면 하루 평균 33명이 자살했습니다. 감기가 누구나 걸리듯이 크리스천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고 자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디두모(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토마스)가 우울증 환자였습니다.

미국의 가정 의학 전문의 돈 콜버트 박사는 [감정치유]에서 우울증은 우울증과 정서불안과 양극성 장애의 세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몇 주 동안 우울증 증상이 다섯 가지 이상 나타나면 우울증이고 두세 가지 나타나면 정서장애라고 합니다. 여러분 슬프고 행복하지 않으며 기분이 낙담되었습니까? 체중이나 식욕이 심하게 감소되었습니까? 더 이상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껴집니까? 수면태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잠을 못자거나 잠에 빠졌습니까?) 만성적인 피로로 고생합니까? 집중력이 저하되었습니까? 움직임이 둔해졌습니까? 쉽게 흥분합니까? 회의주의에 빠졌습니까? 자살충동을 느낍니까? 도마는 우울증 중에서 양극성 장애를 앓았습니다.(다른 말로 하면 조울증에 빠졌습니다.) 양극성 장애는 청룡열차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땅 밑으로 내려갔다 하듯이 기분이 아주 좋았다가 아주 나빠졌다 하는 증상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을 통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 백성들에게는 선지자라고 지지를 받았으나 남부인 예루살렘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잠재적인 위협세력으로 견제를 받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백성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킬까봐 미리부터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그 즈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이 깨우러 가겠다고 나서셨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하다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죽으러 가겠다며 앞장섰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나 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기분이 들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좋은 일이 없는데도 갑자기 들뜨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을 통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처는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장소라는 견해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인격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거처는 하늘나라도 되고 하나님 아버지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장소도 알 수 없고 어느 길로 가시는지 방향도 알 수 없다고 침울해졌습니다. 도마는 널뛰기를 하듯이 기분이 상승하기도 했고 하강하기도 했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나쁜 일이 없는데도 갑자가 가라앉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4절-29절을 통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사람 유다는 죄책감에 빠져 목을 매 자살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봐 문을 닫아걸고 숨었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숨어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인사하시고, 유령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해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슬픔에 잠겨 바람을 쐬고 돌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자 도마는 도저히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의 창 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부인했습니다. 도마는 회의주의에 빠졌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부정적인 사고가 마음에 가득 차서 미래를 암울하게 내다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셔서 손가락을 내밀어 손에 넣어보고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시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우울증 환자가 나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을 통해 엘리야 선지자는 낙담하여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역은 힘들고 목숨은 위태하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천사를 보내서 떡과 물을 주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여주시고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냈습니다. 시편 42편 5절을 통해 시편 기자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낙심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라고 조언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찬송하게 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죽고 싶다던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낙심하고 불안해하던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 희망을 두고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반복하던 도마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만난 후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알려졌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 마드라스 근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도마는 빨갛게 달아오른 쇠로 만든 접시에서 불 고문을 당한 후에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던져졌으나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불 속에서 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도마의 허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도마가 순교한 산은 지금 성 도마 산으로 불립니다. 인도 첸나이 공항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그 산 입구에 성 도마 순교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교회 내부는 천장은 아치형으로 생겼고 벽에는 12제자의 순교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앞에는 도마가 만든 돌 십자가상이 있고 그 옆에 도마의 뼛조각이 액자 안에 들어 있습니다. 성 도마 순교 기념 교회에서 차를 타고 15분 정도 가면 성 도마 무덤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성당입니다. 성당은 흰색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지하에 도마의 관과 뼛조각이 놓여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의 영향으로 우리나라 가야시대에 복음이 전해졌다고 알려졌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울증에 빠져 기분이 침울해 있습니까? 사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십니까? 전문가들은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라고 말합니다. 교인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낙심한 마음에 희망의 해가 솟아오릅니다. 불안한 마음에 평안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슬픈 마음에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 들여옵니다. 우리 다함께 시편 42편 5절을 읽어봅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 교인들도 혹시 우울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난다면 한숨소리가 찬송소리로 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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