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3:18-22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성경에는 2,930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저는 그중에서 세례자 요한을 가장 좋아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듯이 저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2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였습니다.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자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렸습니다. 우리도 몇 주간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갈급해 지잖아요? 유대 백성들은 죄를 지적해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줄 선지자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때 요한이 등장했습니다.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고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의 설교는 잔잔한 물가에 떨어진 바위가 물을 뒤집어 놓듯이, 말씀에 굶주려 있던 유대 백성들의 영혼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요한은 ‘회개’를 설교했는데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언행심사’란 화살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과녁에 쏘았을 때 빗나가기 일쑤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유대 백성들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은 회개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려면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듯이, 요한은 오실 메시야를 맞이하기 위해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설교했습니다. 회개는 죄를 고백했다는 내적인 정결이라면 세례는 죄를 씻었다는 외적인 상징이었습니다.

요한은 회개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주문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무엇일까요? 요한은 유대 백성들에게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고 요구했습니다.(눅3:10-11) 유대 백성들은 옷을 한 벌 밖에 갖지 못했고, 오늘 먹을 양식도 부족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남는 것을 움켜쥐지 말고 나눠주는 겁니다./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눅3:13) 세리들은 로마제국에서 부과한 세금보다 과중하게 거둬들여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세리들을 매국노요 흡혈귀라고 증오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사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세금을 거두는 겁니다./ 군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고 요구했습니다.(눅3:14) 여기서 군인들은 로마 군인이 아니라 치안을 담당했던 유대 군인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경찰관입니다. 군인들은 권력을 악용해 백성들을 착취할 수 있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비록 부족할지라도 지금 받는 급료에 만족하는 겁니다. 결국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바른 삶을 가리킵니다. 신앙을 가졌으면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고 설교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분(예수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과 그분을 비교했습니다. 요한과 그분과는 능력이 달랐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겁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를 씻었다는 상징이었지만 그분의 성령세례와 불세례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체험이었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그분의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준비했습니다./ 요한과 그분과는 신분이 달랐습니다. 요한은 천한 종이었고 그분은 귀한 손님이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샌들을 신었는데, 날이 덥다 보니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고 사막이다 보니 먼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었습니다. 발이 지저분하고 더럽다 보니 신발은 종중에서도 천한 종이 들고 다녔는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겸손해 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보다 능력과 신분이 다른 그분이 오시면 무엇을 하실까요? 심판을 하십니다. 요한은 심판을 ‘나무뿌리에 놓여있는 도끼’와 ‘손에 들려있는 키’에 비유하였습니다. 농부가 도끼를 들고 과수원에 갑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그대로 두고,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버립니다.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는 땅만 버리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키를 들고 타작마당으로 갑니다. 키는 갈퀴인데 도리깨로 두드리고 나서 쭉정이를 골라내고 알곡을 남게 합니다. 콩을 두드릴 때를 생각하면 됩니다. 키질을 하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버립니다. 쭉정이는 불쏘시개로 적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곳간은 천국을 상징하고, 불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면 농부가 도끼로 좋은 열매 맺는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무를 나누듯이, 키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리듯이 의인과 악인을 가리십니다. 심판을 하십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유대 백성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죄를 씻었다는 상징이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도 죄를 지으셨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요8:46,고후5:21,히4:15,요일3:5)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개미에게 사과하려면 개미가 돼야 하듯이 사람들의 죄를 씻으려면 사람이 돼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지시기 위해 하늘보좌를 떠나 이 땅으로 내려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 죄인들처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강림하시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눅3:21-2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에게만 보였습니다.(마3:16) 하늘이 열렸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을 시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자 성령님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임하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도 보았고 요한도 보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심증은 가졌지만 물증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물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시고 성령님이 임하는 사람이 성령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요1:33)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자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도 들었고 요한도 들었고 백성들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식은 예수님의 신분선포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독생자입니다. 외아들입니다. 우리는 양자이고 예수님이 친자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자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임하셨고,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위격이지만 하나의 본질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람의 말로 설명하기 힘든 하나님의 신비입니다.(삼신론은 세분의 다른 하나님이 있다는 주장하고, 양태론은 하나님이 다른 역할을 한다고 주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세례를 받으시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낮추시자 하나님이 높이셨고, 예수님이 겸손하시자 하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교만하라고 부추기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겸손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상석에 앉으라고 유혹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석에 앉으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지만 사람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높이시는 기적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표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라(유20) 

 

제자훈련 과정 

<새가족 훈련(10주)> 유기성 목사,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제자훈련 1(40주)> 매일성경 순-묵상훈련 

                           유기성 목사, [예수님과의 행복한 동행]-신앙훈련 

                           주서택 목사, [마음에 숨은 속사람의 치유]-내적치유 

                           테리홀 교수, [성경 파노라마 & 성경 익스프레스]-성경개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요 1:1-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저는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책을 읽을 때는 항상 서문을 꼼꼼히 읽는 버릇이 있습니다. 서문 다시 말해 머리말에는 지은이가 책을 쓴 목적을 설명하고 책의 내용도 간추려서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서문은 조감도와 같아요. 우리가 건물의 조감도를 보면 이 건물을 어떻게 짓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서문을 읽어보면 이 책이 어떻게 전개되겠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18절까지는 요한복음의 서문입니다. 요한복음의 서문을 읽어보면 요한복음 21장이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서문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나와 있습니다. 여러 개가 나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특별히 중요한 몇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시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절-3절을 통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인데 유대적인 개념과 헬라적인 개념에서 로고스는 모두 시작과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말씀인데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은 다른 성경구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1장 15절을 통해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을 통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광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의 모습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고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자 사람이란 말씀에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오 빛이시다.
하나님은 1장 4절-5절을 통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생명은 헬라어로 ‘조에’인데 요한복음에서 생명은 육체적인 생명뿐만 영원한 생명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님이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4장 6절을 통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8장 12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생명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빛이 비춰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빛을 비추셨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주고 빛을 비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고 빛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둠에 머물다보니 죽음을 맞게 됩니다. 죽음은 헬라어로 ‘다나토스’인데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예수님을 구세주로 환영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요1:12) 권세는 권한이나 허가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둠에 머물러 죽음을 맞이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빛으로 나아와 생명을 얻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둠에 머물지 마시고 빛으로 나아와 생명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이시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하나님은 1장 14절을 통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자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자 사람이시라는 말씀은 다른 성경구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2장 9절을 통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7절을 통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으시지만 사람과 똑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유랑할 때 성막에 머무셨듯이 예수님은 사람이 되시어 자기 백성들 가운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을 가지셨습니다. 영광은 헬라어로 ‘세키나’인데 성막 안에서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시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았지만 예수님을 통해 은혜와 진리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었지만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려주셨습니다.(요1:18)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을까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신학 용어로 incarnation, 다시 말해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신비중의 신비인데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집에 성육신을 알기 쉽게 설명한 예화가 나오더라고요. 인도에서 사역하는 어떤 선교사님이 어떻게 하면 힌두교 인에게 복음을 전할까 고민하다 어느 날 함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실수로 개미집을 밟았습니다. 그 바람에 개미집이 부서졌고 수많은 개미들이 발에 밟혀서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힌두교 인이 안타까워하였습니다. "당신 때문에 수많은 개미들이 목숨을 잃었어요." 선교사님은 너무 미안해서 정중하게 사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고 저도 모르게 실수로 그랬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저 개미들에게 사과할 수 있을까요?" 힌두교 인이 정색을 했습니다. "당신이 개미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거든 죽어서 개미로 태어나야 할 거요." 힌두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윤회설을 믿잖아요? 그들의 사상에 의하면 개미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는 개미로 태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선교사님의 마음속에 성령님께서 주신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선교사님은 힌두교 인의 말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군요. 개미에게 사과하기 위해서 개미로 태어나야 하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들의 죄를 씻기 위해 짐승들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속죄의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고자 사람이 되셨던 것처럼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유 20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라.

사람은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자면 친해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장 35절을 통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조용한 장소에 가서 새벽 기도를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46절을 통해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마치고 나서 한적한 산에 올라가 저녁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도 기도하셨고 마치고 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저녁에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요 저녁을 닫는 자물쇠입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듯이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야하고, 우리가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오듯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큐티로 아침을 시작하고 가정 예배로 저녁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1-2절을 통해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13절을 통해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선택하기 전에 철야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금식 기도도 하셨고 철야 기도도 하셨습니다. 광야에서도 기도하셨고 산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순간에 누구를 의지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람은 잘해주면 좋아 하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면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즐거이 찬양해도 기뻐하시고 우리가 어려워서 호소해도 들어주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왜 하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로 특권을 활용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바쁩니다. 어떤 사람은 피곤해서 기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피곤하지요. 예수님도 바쁘시고 피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38절을 통해 배를 타고 가시다가 고물을 베개로 베고 주무실 만큼 피곤하셨지만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31절을 통해 음식을 드실 겨를도 없이 바쁘셨지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한가해서 기도하신 게 아니라 바쁘고 피곤한 가운데서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신앙인에게 교양 선택과목이 아니라 전공 필수과목이기 때문입니다. 교양 선택과목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지만 전공 필수과목은 반드시 이수해야 학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교인의 전공 필수과목인 기도를 생활화해야 천국시민이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피곤해도 바빠도 기도하다 보면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하셨는지 누가복음 5장 12-1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고쳐주자 수많은 무리가 자기 병도 고쳐달라고 몰려들었습니다. 무리들은 복음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병을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 병을 고치는 것은 고기를 잡는 방법을 모르면서 고기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당장은 도움이 되지만 나중에는 막막해집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사람에게 칭찬을 듣기 보다는 조용한 장소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병을 고쳐주는 일은 시급한 일이고, 기도를 하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시급한 일보다는 중요한 일을 먼저 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도를 중요시해야 예수님과 친해집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중요한 일은 뒤로 미루고 시급한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매일 정신없이 살다보니까 정작 기도할 시간은 없어지는 겁니다. 휴대폰도 사용하면 배터리를 충전해야 하고, LPG자동차도 운행하면 가스를 충전해야 하듯이, 교인도 세상에 살다보면 은혜가 소멸되기 때문에 기도로 재충전해야 합니다. 태아가 탯줄을 통해 엄마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는 기도라는 영적인 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파이프가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막히면 뚫어야 하듯이, 기도를 쉬었다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왜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가 몸이 피곤하면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해 감기에 걸리듯이 영혼이 피곤하면 마귀를 이기지 못해 시험을 당하게 됩니다. 감기에 걸리면 만사가 귀찮아지듯이, 시험을 당하면 교회가기가 싫어집니다. 우리 속담에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듯이 우리도 바쁠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에 성공해야 인생에도 성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내년도 우리교회 표어를 유다서 20절에서 영감을 얻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라.’ 고 정했습니다. 유다서 20절을 개역개정판으로 보면 ‘성령으로 기도하라’ 고 나와 있고, 새번역에는 ‘성령으로 기도하십시오.’ 로 나와 있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 로 나와 있고, 공동번역에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십시오.’ 라고 나와 있습니다. LABC에는 ‘성령의 능력과 힘으로 기도하라.’ 고 설명하더라고요. 저는 이것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라.’ 고 간추렸습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해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기도하려다 보니 너무 바쁘고 피곤하니까 기도를 쉬게 되고 또 기도하더라도 집중하기 어려운 겁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기도해야 기도에 몰입하게 되고 기도가 힘들지 않고 쉬워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몰입해서 기도해야 내 소원만 아뢰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통행입니다. 얕은 기도는 어린아이처럼 내 소원을 관철시키려고 떼쓰는 거지만 깊은 기도는 어른처럼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겁니다. 우리 내년에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성숙한 기도를 합시다.

이제 여러분에게 한 가지 기도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토니 존스 목사가 지은 [되찾은 영성]을 보면 어떤 청년이 오두막집을 구하고 노수도사를 찾아가 영적 스승이 되어달라고 간청합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3천 번씩 예수기도를 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횟수를 셀 수 있도록 매듭이 100개가 달려있는 기도 끈도 주었습니다. 청년은 처음에는 기도도 하고 숫자도 세다보니 고생스러웠지만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6천 번씩 예수기도를 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청년은 기도가 생활화되었습니다. 청년은 기도가 익숙해져서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해졌습니다. 노수도사는 하루에 1만 2천 번씩 기도하라고 일렀습니다. 청년의 혀는 감각을 잃었고 턱은 빠질 듯이 아팠습니다. 청년의 엄지손가락은 기도 끈을 만지느라 쓰라렸고 팔은 부어올랐습니다. 청년은 며칠이 지나자 예수기도가 호흡처럼 편해졌습니다. 청년은 예수기도로 눈을 떴고, 낮에는 예수기도로 감격했고, 밤에는 예수기도를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청년은 기도를 반복할 때마다 몸과 마음이 빛으로 충만했습니다. 청년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고 자신의 형제와 자매로 여겼습니다. 노수도사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청년은 러시아의 대초원을 떠돌며 만나는 사람에게 예수기도를 가르쳤고. 걷든지 쉬든지, 먹든지 자든지, 성찰하든지 노동하든지 예수기도를 암송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여행과 깨달음을 담은 [순례자의 길]을 남겼습니다. 기도의 핵심은 예수님을 닮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주셨습니다.(엡5:2)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엡5:1) 청년이 예수기도를 통해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기도를 하다보면 예수님을 닮을 수 있게 됩니다. 토니 존스 목사는 예수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맹인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7) 라고 기도했듯이, 숨을 들이쉬면서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 숨을 내쉬면서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라고 기도하라고 조언합니다. 예수기도는 정신을 집중하고 단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서 기도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러면 휴대폰의 배터리가 충전되듯이, LPG차에 가스가 충전되듯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져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 분입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이제는 해결됐다고 믿고 예수기도를 해봅시다. 그러면 문제도 해결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도 친해지고 우리의 몸과 영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질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눅 2:40-52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은 설날과 추석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고향을 방문해 부모님도 찾아뵙고 조상님들의 산소도 참배합니다. 우리나라는 조상을 숭배하는 나라죠. 이스라엘은 정반대입니다. 이스라엘 최대의 명절은 무교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출23:14-17)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시골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몰려온 순례 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볐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
예수님도 12살 되던 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눅2:41-42) 우리는 여기서 ‘유월절’이라는 절기와 ‘12살’이라는 나이를 주목해야 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인데 1주일간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무교절 명절을 지키고 8일째 되는 날에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유월절 명절을 지켰습니다. 무교절과 유월절은 이스라엘 3대 명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명절이었습니다. 다른 명절에는 혹시 안가더라도 무교절과 유월절에는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해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12살입니다. 이스라엘 나이로 아이에서 성인으로 가는 과도기였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20살을 성인으로 간주하는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13살을 성인으로 여겼습니다. 13살이 되면 성인이기 때문에 모든 율법을 준수해야 했고 명절에는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12살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2살은 ‘율법의 아들’이라고 하여 율법의 일부분을 준수했습니다. 성인 실습기간이었죠.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뿐만 아니라 유월절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입으로 하나님을 잘 믿어라 강요하지 않고 행동으로 하나님을 잘 믿도록 모범을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말이 하니라 행동을 보고 배운다고 하더라고요. 일본의 저널리스트인 가와키타 요시노리는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책을 통해 아들은 아버지의 제스처와 말투와 행동양식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외모뿐만 아니라 행동이나 말투까지 쏙 빼닮는다고 말합니다. 요시노리는 ‘아버지는 아빠가 아닌 아버지가 돼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아버지가 아들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다 보니 가정의 질서가 무너졌다고 안타가워하며 아버지와 아들은 ‘애정과 신뢰로 맺어진 상하관계가 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도 해야 하지만 가르치기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요셉과 마리아는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무셨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사나흘을 걸어 예루살렘에 도착해 칠일 간 무교절을 지키고 팔일 째는 유월절을 지키고 일행들과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때쯤 영혼은 충만했겠지만 몸은 파김치가 됐을 겁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고가기는 여간 위험하지 않았습니다. 도중에는 들짐승들도 있었지만 강도들이 순례 객들을 공격해 재산도 빼앗아 갔고 몸도 상하게 했습니다. 로마제국은 군대를 동원해 강도들을 토벌하려 했지만 험한 산중에 숨어있는 강도들을 색출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요즘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이 험한 산중에 숨어있는 탈레반 잔당들을 소탕하지 못하잖아요. 순례 객들은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간단한 무장을 하고 친척들이나 마을 사람들끼리 큰 무리를 이루어 다녔습니다. 순례 객들은 행렬의 선두에 여자들과 아이들은 앞장세우고 남자들은 뒤따랐습니다. 남자들이 앞장서면 여자들과 아이들은 뒤처지게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도 당연히 순례 행렬 중에 끼어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선두에 있는 마리아는 예수님이 12살이니까 남자들과 함께 있나보다 생각했고 후미에 있는 요셉은 예수님이 12살이니까 여자들과 함께 있겠거니 생각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렇게 하루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됐는데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봤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들짐승에 물려가지는 않았는지 강도들에게 잡혀가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뜰에 계셨다.
요셉과 마리아는 날이 새자마자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으로 가는데 하루를 보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데 또 하루를 보냈고 사흘 째 되는 날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기 위해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헤롯 성전산을 둘러보았고, 마카비 성전산을 찾아다녔고, 이방인의 뜰에 이르렀습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남쪽에는 왕의 행각이 있었고 동쪽에는 솔로몬의 행각이 있었습니다. 류모세 선교사는 왕의 행각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비즈니스도 하는 만남의 광장으로 친 로마 파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였다고 합니다. 동쪽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은 랍비들이 율법을 강론하는 종교 교육장으로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고 합니다.(성전이야기 6장)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어디서 찾았을까요? 당연히 솔로몬의 행각이겠죠. 예수님은 랍비들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궁금한 점을 묻기도 하였습니다.(눅2:46)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이에 비해 너무도 예리하게 질문하고 너무도 지혜롭게 대답을 하자 놀랐습니다.(눅2:47) 하나님은 누가복음 2장 40절을 통해 예수님은 지혜가 충만했고, 47절을 통해 예수님의 지혜를 놀라워했고, 52절을 통해 예수님의 지혜가 자라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지혜로웠습니다.

예수님은 신분과 사명을 밝히셨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무사한 것을 보고 안도하였고 랍비들과 토론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나무랐습니다.(눅2:48)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일행에 합류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성전에 머물러 있자 안도도 하였지만 화도 났습니다. 예수님은 태연히 대답했습니다.(눅2:49)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예수님은 부모님을 걱정시켜서 미안하기도 했지만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신의 신분이 누구이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밝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송아지가 소 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혜로우신 겁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사람보다 지혜로운데 하나님의 지혜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겁니다.(고전1:25)/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달리 번역하면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 다시 말해 죄인들을 구원하는 겁니다. 죄로 말미암아 벌어졌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복원하는 겁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사명이 어린 양처럼 속죄의 피를 흘리는 것이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눅2:50)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 나사렛으로 돌아가 부모님에게 순종하며 살았습니다.(눅2:51) 학자들은 예수님이 삼십 살쯤에 공생애를 시작했기 때문에(눅3:23) 아버지 요셉의 가업을 물려받아 목수로 지내며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셔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사셨고 예수님은 속죄양이시지만 사람의 일을 하시며 자기 백성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전까지 가족과 동행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자신의 신분이 누구이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며 세상 사람들과 동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의 사명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가 자신의 신분을 기억한다면 죄를 멀리하겠고 자신의 사명을 간직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사명을 기억하고 자신의 사명을 간직하여 세상에 동화되기보다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