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11-24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한계에 도달한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도와 묵묵히 집안일을 했으나, 둘째아들은 집안일은 고사하고 어떻게 하면 집을 떠날까를 궁리했습니다. 어느 날 둘째아들이 아버지에게 당돌하게 요구했습니다.(눅15:12)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재산을 상속했는데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한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버지도 물러 터졌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호되게 나무라지 않고 큰아들과 둘째아들에게 율법의 규정에 따라 유산을 분배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큰아들은 다른 아들보다 두 배의 유산을 상속받았습니다.(신21:17) 아들이 둘인 경우 큰아들은 3분의 2를, 둘째아들은 3분의 1을 물려받았습니다. 둘째아들은 며칠이 안 되어 유산을 처분하고 현금으로 바꾸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미리부터 집을 떠날 계획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수중에 돈이 들어오자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들떠서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썼습니다. 둘째아들이 돈을 쓰자 물고기가 먹이를 찾아 몰려들듯이 아첨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조폐공사 사장이라도 되는 듯이 돈을 흥청망청 썼습니다. 둘째아들이 기분을 내면낼수록 돈도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다 돈이 바닥이 났습니다. 둘째아들이 돈을 쓸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달라붙던 무리들도 돈이 떨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몰차게 떠나갔습니다. 돈 때문에 모인 사람은 돈 때문에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게 사람의 인심인가 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어 먹을거리가 떨어졌습니다. 둘째아들은 돈은 없지 배는 고프지 어쩔 수 없이 그 나라의 지주에게 몸을 의탁했습니다. 지주는 둘째 아들을 들로 보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만 이스라엘 사람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여겼습니다.(신14:8)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제물로도 드리지 않습니다. 돼지를 만지지도 않는 이스라엘 사람이 돼지를 친다는 것은 엄청난 굴욕이었습니다. 막장 인생도 이런 막장 인생은 없었습니다. 둘째아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돼지치기가 됐는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부족해 굶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둘째아들은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입니다. 둘째아들은 하나님을 떠난 불쌍한 인생을 가리킵니다. 둘째아들이 아버지에게 구속받기 싫어 집을 떠났듯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물을 떠난 물고기가 숨을 쉬려고 아가미를 헐떡거리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조만간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의 문제가 생깁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든지 아들이 속을 썩이든지 집안에 걱정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아니면 건강의 문제가 터집니다. 몸이 아프다 보니 그동안 안 먹고 안 입고 모은 돈을 고스란히 병원에다 갖다 바치게 됩니다. 둘째아들이 이 지경이 됐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둘째아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한계에 도달하면 정신을 차리게 된다.
둘째아들은 주린 배를 끌어안고 들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았습니다. 둘째아들은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해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둘째아들은 그제야 스스로 돌이켰습니다. 정신을 차렸습니다.(눅15:17-19)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둘째아들은 돈이 있을 때는 집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막장에 떨어지다 보니 꿈속에서 고향 집이 보였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일꾼이 여럿 있는데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러나 둘째아들은 돼지가 먹는 음식도 부족해 배를 곪기 일쑤였습니다. 둘째아들이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됐습니까?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었다면 부자 집 도련님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텐데 아버지에게 구속받지 않으려고 받은 복을 걷어찼기 때문입니다. 둘째아들은 배도 고프고 아버지께 사죄도 하기 위해서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집에 가면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써달라고 부탁할 요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따뜻하게 맞아주신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떠나보내고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좋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둘째아들은 삼시세끼를 거르지 않는지 걱정을 했습니다.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둘째아들은 편히 쉬는지 염려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떠나보내고 마을 입구에 나가 저 멀리 떨어진 지평선을 바라보는 게 하루일과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도 지평선을 바라보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힘겹게 걸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인가 싶어 가슴이 쿵쾅거렸습니다. 둘째아들은 명품으로 치장하고 큰 소리 치며 떠났는데 그 사람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있었고 몸이 불편한지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사람이 둘째아들이라고 직감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들이 먼저 사죄하면 아버지가 마지못해 용서해주는 게 관례인데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기고 사죄도 받지 않고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눅15:20) 둘째아들은 아버지가 일꾼으로 맞아주기만 해도 감사할 텐데 아버지가 마중까지 나오자 너무나 황송했습니다. 둘째아들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눅15:21)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둘째아들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도 불순종했고, 아버지가 살아 계신데도 유산을 달라고 무례를 저질러 도저히 아들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없다고 뉘우쳤습니다. 둘째아들이 아들이 아니라 일꾼으로 써 달라고 부탁할 틈도 없이 아버지가 종들에게 일렀습니다.(눅15:22-25)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둘째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라고 했습니다. 좋은 옷은 귀한 손님에게 내주는 옷입니다. 아버지는 가락지를 끼우라고 했습니다. 반지는 아들로서 맞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는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신발은 일꾼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표시입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이 진심으로 뉘우치자 다시 아들로 맞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들이 다시 살아나고 잃어버린 아들을 다시 되찾은 것이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고 지시했습니다. 살진 송아지는 들에서 풀을 먹으며 방목하지 않고 우리에서 곡식을 먹으며 자란 귀한 송아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말수가 적지만 속 깊은 정을 가지고 계시듯이 우리 영혼의 아버지도 멀리 떨어져 계신 것 같지만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로봇인양 리모컨으로 조종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자유의지를 선용하길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침반의 N극이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듯이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혹시 하나님을 떠났더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돌아오면 하나님 아버지는 버선발로 마중 나오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손을 잡고 따뜻한 안방으로 이끌고 들어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푸짐하게 잔치 상을 차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기 원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면 열렬히 환영하시고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 창대교회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환영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교회가 돼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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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7일에 소정이와 현정이의 어머니인 이정숙 성도가 2010년도 5번째로 등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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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3:1-9 회개하지 아니하면

2010년 1월 12일에 아이티에서 리히터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해 23만 여명이 숨진데 이어, 2월 27일에는 칠레 서쪽 태평양 연안에서 규모 8.8의 초대형 강진이 발생해 사망자가 800 여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3월 2일에 공군 F-5 전투기 2대가 추락해 조종사 3명이 순직한데 이어, 3월 3일에는 육군 헬기가 추락해 조종사 2명이 순직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인 어 대위는 만삭인 아내와 5살짜리 딸을 남겨 놓고 순직했고, 헬기 조종사인 박 준위는 4,200시간 무사고 조종사였는데 부인과 삼남매를 남겨두고 순직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사건 사고가 있었다.
오늘날만 이런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 사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인데 예수님이 살던 당시에 이스라엘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았듯이 로마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은 군인 출신인 ‘본디오 빌라도’였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제국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의 총독이다 보니 자존심도 상했고, 진급 가능성도 없다 보니 미래도 불투명했습니다. 빌라도는 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혹하게 통치했습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빌라도가 가혹하게 통치할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벌인 사람들을 열심당원이라고 하는데 열심당원들은 우리나라의 독립투사들이 만주에 거점을 두고 항일운동을 벌였듯이 이스라엘의 북부인 갈릴리에 본거지를 두고 로마제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암살하거나 로마 군인들을 살해했습니다. 빌라도는 눈에 가시 같은 열심당원들을 토벌하려고 별렀습니다. 그 즈음에 열심당원들 중 몇 명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성전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빌라도는 군대를 보내 열심당원들을 살해했습니다. 열심당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에 그들의 피가 틔었습니다. 짐승의 피와 사람의 피가 섞였습니다.(눅13:1)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반대하던 바리새인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죽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하다가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인부 열여덟 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당시는 엄청나게 큰 사고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독립운동을 벌이던 열심당원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적국을 도와 부역을 했기 때문에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이 겪는 고난은 개인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과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자기가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논리로 따진다면 아이티나 칠레에서 지진이 발생해 안타깝게 죽은 사람들도 그리고 전투기와 헬기가 추락해 아깝게 순직한 사람들도 자신들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그들이 죄를 지어 벌을 받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건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사고로 죽었다고 그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도 아니고, 살았다고 그 사람이 의로운 사람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고 의인이라고 죽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처럼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 있으니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3: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는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육체적으로도 죽을 수 있고 그것보다도 더 무섭게 영적으로도 죽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이 한 번 태어나 한 번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을 통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체적으로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육체적으로 한 번 죽고 영적으로도 또 한 번 죽게 됩니다. 영적인 죽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20장 15절을 통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죽음은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겁니다. 지옥 불에 던져지면 죽지도 않고 밤낮으로 괴로움을 당합니다.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두 번 태어나면 한 번만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까지나 기다려주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지금 당장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회개해야 하는 이유를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사람은 무화과나무가 삼 년이 됐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자 포도원 지기에게 찍어버리라고 지시했습니다.(눅13:7)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목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저도 과실수를 심었었는데 삼 년이 되니 열매를 맺더군요. 삼 년이 됐는데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파트 베란다에 화분을 만들고 고추 모종을 심었는데 여름이 됐는데도 고추가 열리지 않는다면 뽑아버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주인도 열매를 맺지 않고  땅만 버리니 차라리 찍어버리라고 지시했던 겁니다. 포도원 지기는 일 년만 더 기다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눅13:8-9)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를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포도원 지기는 일 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어떤 사람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입니다. 포도원은 세상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들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 말해 교인들이 죄를 짓는 겁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사람들이 세상을 악하게 더럽혔습니다. 주인은 더 이상은 볼 수 없어 무화과나무가 땅만 버리니 찍어버리라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교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어두운 세상에 동화되어가자 심판을 하시겠다고 나서신 겁니다. 그러자 포도원 지기가 말렸습니다. 포도원 지기는 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포도원 지기가 두루 파고 거름을 줄 테니 기다려달라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교인들을 회개시킬 테니 심판을 미루어 달라는 부탁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탁을 들으시고 심판을 유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전서 3장 9절을 통해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셔서 심판을 미루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기다리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임신한 여자가 해산의 고통을 겪듯이 반드시 재림하시고(살전5:3) 밤에 도둑이 들어오듯이 갑자기 재림하십니다.(살전5:2)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나면 늦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번 태어났으니 한 번만 죽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잠에서 깨어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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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9:28-36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중대한 결단을 내리기 전에 측근들을 이끌고 산행을 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 습관은 예수님에게 배웠나 봅니다. 예수님도 중요한 순간에 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사역을 마치고 유대 지방으로 가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핵심 제자들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눅9:28)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이 산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있는 헐몬 산이거나 아니면 갈릴리 지방에 있는 다볼 산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산이 어느 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특별한 장소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출24:12이하) 엘리야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왕상19:8이하) 시내 산과 호렙 산은 같은 산입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장광영 전 감독회장님도 산 기도를 하다 성령님을 체험하고 하산하는 길에 꼽추를 만났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 간절히 기도했더니 반듯하게 펴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성경에서의 산도 오늘날의 산도 하나님을 체험하는 장소입니다. 기도원을 보십시오. 대부분 산에 있잖아요? 요즘도 산에 올라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 덕분에 이 나라가 이 만큼이라도 사는 겁니다.

예수님이 산에 오르시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중요합니다.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셨습니다. 이 변화는 내면에서 시작된 외면의 변화였습니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원래의 모습인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하시자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고 말씀하고, 마태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났고 옷이 빛 같이 희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를 통해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 올 때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의 얼굴도 해 같이 빛났습니다. 다니엘서 7장 9절을 통해 하나님의 옷은 눈 같이 희다고 말씀했는데 예수님의 옷도 빛 같이 희어졌습니다. 옥시크린으로 빨래를 한 것보다 더 희었습니다. (저도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보았는데 옷이 빛 같이 희었습니다.) 그러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눅9:30) 여러분, 모세와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신다고 말씀했는데 그 선지자는 메시야입니다. 모세는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했고 그 메시야는 예수님입니다. 모세는 또한 하나님께서 묻어 주셨으나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신34:6)/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말라기 4장 5절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예언됐습니다. 그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엘리야는 또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2:11)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고 승천한 인물이지만 이들 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과 함께 대화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도 중요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눅9:31) 여기서 ‘별세하다.’는 ‘떠난다.’는 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애굽을 떠난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떠나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모세와 예수님이 다른 점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구원했지만 예수님은 열방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를 능가하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는 깊이 졸다가 아이가 어른들 이야기에 끼어들듯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에 끼어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제안했습니다.(눅9:33)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베드로는 장막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을 짓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했듯이,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베드로와 엘리야가 나타나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기념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영광이 있기 전에 고난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간과했습니다. 예수님은 며칠 전에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눅9:23)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면 자기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눈물로 씨를 뿌리지 않으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고 합니다. 밥상은 차리려 하지 않고 차려 놓은 밥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헌신은 하지 않고 축복을 받으려 합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기초공사가 부실해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고난이 있는 영광은 반석위에 지은 집처럼 기초공사가 튼튼해 비바람이 불어도 끄떡없습니다. 진도 7의 강진에도 끄떡없습니다. 여러분, 고난은 성장 통입니다. 과정입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 고난을 이기면 나중에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겁니다. 지금은 아주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질 겁니다.

하나님의 반응도 궁금합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제안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이 임하셨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구름 기둥으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출13;21),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도 구름으로 가득하게 임하셨습니다.(왕상8:10)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듯이, 호렙 산에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듯이, 산을 덮은 구름 속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말씀하셨습니다.(눅9:35)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예수님이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그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야가 오신다고 예언했던 모세와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한 엘리야와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조연이라면 예수님은 주연이고, 모세와 엘리야가 전령이라면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신분을 알려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들으라.’는 듣고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3장 22절을 통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고 신분만 알려주셨는데 9장 35절을 통해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고 신분도 알려주시고 순종도 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군지 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안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다시 오셔서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은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하와는 뱀의 말을 들었고 아담은 하와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피조물의 말을 들었기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구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게 되고 인생도 성공할 겁니다. 우리는 들어야 할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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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24일 40일 성경 파노라마 공개 강연을 시작하다. 낮 10시 30분에 5명이, 저녁 7시 30분에 1명이 참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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