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2 하나님이 주신 선물

여러분, 봄입니다. 베란다에 놓아둔 화분을 분갈이해주셨습니까? 안냐 플레미히가 지은 [실내화초 기르기]라는 책을 보니 화초가 자라기 시작하는 봄이 되면 화분이 비좁아지기 때문에 화초를 분갈이해주고 양분도 보충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먼저 화분을 뒤집어 화초를 빼내고 새 화분이 흙으로 된 화분이면 분갈이하기 1-2시간 전에 물을 담아 놓고 물이 잘 빠지고 공기도 잘 통하게 조각 2-3세 개를 화분 밑바닥에 있는 배수구멍을 덮어주고 흙과 비료를 섞어서 그 위를 얹고 그 위에 비료와 뿌리가 닿지 않도록 흙을 덮어주고 그 다음에 화초를 화분 중간에 놓고 흙을 덮어 꾹꾹 눌러주고 흙을 또 한 번 넣어주고 가장자리 흙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안쪽보다 1센티미터 정도 낮게 만들고 물이 흘러넘치도록 흠뻑 주라고 합니다.(40-41쪽)

화초는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행복하게 살듯이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7절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물을 다스리는 대리인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주인인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리인인 사람이 주인인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자녀가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것을 불효라고 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순종하기를 바라셨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졌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고통이 생겼고, 질병이 생겼고, 죽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3장 23절을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갈라졌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는데 사람이 불순종하자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화초가 흙을 떠난다면 죽게 되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죽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만 죽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갈라지자 아쉬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무언가 허전한 것을 느끼고 하나님께로 가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사람은 선하게 살면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줄 알고 어려운 이웃도 돕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학문을 탐구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졌습니다. 사람은 종교에 심취하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다고 믿고 고행을 하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죄에 빠진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행전 4장 12절을 통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있는데 사람이 자꾸 다른 길로 가자 안타까우셨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구조대원에게 몸을 맡겨야 하듯이 죄를 지은 사람은 헛된 수고를 버리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메울 누군가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누군가는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시려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조대원으로 보내셨습니다. 이제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거듭나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과거의 죄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지은 죄를 용서받게 됩니다. 거듭나는 것은 현재의 세상적인 사고방식에서 신앙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뀌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 사람의 가치관과는 다른 성경적인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영생은 미래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져 밤낮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지만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교제하게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에덴을 회복하게 됩니다. 에덴은 기쁨인데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베소서 1장 7절을 통해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나라는 피하면 혈육관계를 떠올리는데 이스라엘은 피하면 속죄를 떠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지으면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짐승의 피를 통해 사람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죄를 용서받았으면 다시는 죄를 저지르면 안 되는데 사람은 죄를 저지르고 짐승을 제물로 바치고를 반복했습니다. 속죄 제물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카드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5장 8절을 통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너무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주셨습니다. 혹시 의인을 위해서 죽을 사람이 있는지 모르지만 죄인을 위해서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인데도 우리를 대신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짐승의 피로도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는 우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짐승은 계속해서 속죄 제물로 드려야 하지만 예수님은 단한번의 속죄 제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신 걸로 그치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도 죽음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죽는다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한 번 태어난 사람은 육체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두 번 죽지만 거듭 태어난 사람은 육체적으로 한 번만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죽음을 이기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장 12절을 통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혈육을 중시하기 때문에 친자와 양자를 차별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친자인 예수님과 양자인 우리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대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화분갈이를 하는 것처럼 과거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됩니다. 과거의 나보다 행복한 내가 됩니다.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십시오.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고 여러분이 죽음을 이기게 되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원한다면 저를 따라하십시오. “사랑의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저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 인생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지금 제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제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게 도와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제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녀를 보살피듯이 여러분을 돌보실 겁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천국시민권은 미국시민권보다도 가치가 있습니다. 미국시민권은 이 땅에서만 통용되지만 천국시민권은 하늘나라에서까지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천국시민권을 받고 천국시민권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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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1:1-19 내 양을 먹이라.

세상 사람들은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기 때문에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은 사람도 다시 살아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는데 한 사람이 한 번만 목격했다면 거짓이라고 의심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여러 번에 걸쳐서 목격했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은 고대 설화에 나오는 믿을 수 없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분명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워낙 강하다 보니 교인들조차도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믿겠는데 예수님의 부활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다.
우리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부활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2번씩이나 똑똑하게 보여주셨는데도(요20:20,27)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신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을 친히 본 제자들조차 부활을 의심했는데 하물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성경 말씀만을 대해야하는 우리들이야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기 전처럼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호수 다시 말해 갈릴리 호수로 돌아갔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가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자 도미노가 무너지듯이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요21:3)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찌됐든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양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많이 잡았다면 의기양양했겠지만 허탕만 치지 기진맥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면 제자들이 빈 그물만 건지듯이 우리 인생도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인데 예수님을 떠나면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처럼 나무가 뿌리를 뽑힌 것처럼 허망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해 낙심해 있을 때 예수님이 새벽안개를 뚫고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잡았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날이 샐 무렵이라 어슴푸레하다 보니 누군지도 모르고 못 잡았다고 대꾸했습니다.(요21:5) 예수님은 제자들을 안타깝게 보시고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6) 제자들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분이 하신 말씀에 권세를 느꼈습니다. 고기는 원래 어둔 밤에 돌아다니다가 날이 새면 물 아래로 내려가는데 저분의 말씀에 권세가 있다 보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졌더니 물고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물에 걸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물이 너무 무거워 제자들이 들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저분의 말씀이 이성적으로는 그른 것 같았지만 저분의 말씀대로 따랐더니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신앙은 이성의 영역을 초월합니다. 이성적으로 믿기지 않더라도 신앙적으로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은 우리의 믿음을 연료로 삼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로켓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란 걸 직감했습니다. 누가복음 5장을 통해서 제자들이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배가 잠길 정도로 많이 잡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아마도 요한이 “주님이시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일하느라 벗었던 겉옷을 걸쳐 입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요21:7) 베드로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제자였습니다. 말이 앞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말만 한다고 싫어합니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불안해합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인 제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신중한 사람보다 과감한 사람을 크게 사용하십니다. 신앙은 전자계산기로 수지타산을 맞추고 믿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정해졌으면 코뿔소처럼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허물보다는 그 사람의 열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최고로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다.
다른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서 그물을 끌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물고기도 구워놓고 떡(밥)도 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12) 제자들은 새벽이슬을 맞으며 야간작업을 했기 때문에 몸이 눅눅했습니다. 예수님은 따뜻한 불을 피워놓고 제자들의 몸을 녹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기 때문에 허기가 졌습니다. 예수님은 물고기와 떡을 준비해 놓고 제자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시지 않고 밤새도록 헛수고를 한 제자들에게 숯불을 피워놓고 음식을 준비해 놓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잘못에는 관대하지만 남의 잘못에는 엄격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잘잘못을 탓하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도 가져오라고 하시고 떡과 물고기도 나눠주시며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듯이 물고기와 떡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정말로 부활하셨다고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유령이라면 음식을 먹을 수 없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육신과 영혼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음식을 드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을 돌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아침 식사를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21:15) 예수님은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는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으로 부르실 때도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요1:43)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처럼 다시 제자로 맞아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 하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16) 예수님은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근심을 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하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셨습니다.(요21:17)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 하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복음 18장을 통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자신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가(요13:37) 그 장담을 하루아침에 허물어 버리자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은 세터가 실수한 공격수에게 다시 한 번 공을 토스해 주듯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마음을 짓눌렀던 죄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3은 완전수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교회 지도자로 임명하셨고 교인들을 돌보라고 위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영혼이 자유로워지자 그제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사명은 아무나 감당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실 때 내 양을 잡아먹으라고 하시지 않고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인들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양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인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하신 주님부터 만나 신앙의 확신을 가져야 주님이 맡겨주신 교인들을 사랑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아직 미숙한 교인들을 돌보기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으로 키워 사명을 맡기셨듯이 우리도 신앙의 젖을 먹는 초신자들을 사랑으로 돌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기릴 바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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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9-29 믿는 자가 되라.

지금은 환절기입니다. 환절기가 되면 감기에 걸리는 사람이 많듯이 마음에도 감기가 걸린다고 합니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합니다. 누구나 몸의 감기에 걸리듯이 마음의 감기도 누구나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마음의 감기에 걸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두모(쌍둥이)라고 불리는 도마(토마스)였습니다.

미국의 가정 의학 전문의 돈 콜버트 박사는 [감정치유]에서 우울증은 ‘우울증’과 ‘정서불안’과 ‘양극성 장애’의 세 가지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몇 주 동안 우울증 증상이 다섯 가지 이상 나타나면 우울증이고, 두세 가지가 나타나면 정서장애라고 합니다. 여러분 슬프고 행복하지 않으며 기분이 낙담되었습니까? 체중이나 식욕이 심하게 감소되었습니까? 더 이상 사는 재미가 없다고 느껴집니까? 수면태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잠을 못자거나 잠에 빠졌습니까?) 만성적인 피로로 고생합니까? 집중력이 저하되었습니까? 움직임이 둔해졌습니까? 쉽게 흥분합니까? 회의주의에 빠졌습니까? 자살충동을 느낍니까? 두세 가지면 정서장애, 다섯 가지 이상이면 우울증일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는 우울증 중에서 양극성 장애를 앓았습니다.(다른 말로 하면 조울증에 빠졌습니다.) 청룡열차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땅 밑으로 내려갔다 하듯이 기분이 아주 좋았다가 아주 나빠졌다 하는 증상입니다. 기분이 널뛰기를 하는 증상입니다. 도마의 구체적인 증상을 찾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11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으나,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는 견제를 받았습니다. 로마제국과 결탁한 종교지도자들은 기득권을 지키려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이 깨우러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위험하다고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고 앞장섰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꼈으나 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기분이 들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좋은 일이 없는데도 갑자기 들뜨기도 합니다.

두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14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주간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처는 ‘하늘나라’를 가리키는 장소라는 견해도 있고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 인격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거처는 하늘나라도 되고 하나님 아버지도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다시 말해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는 길을 예비하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라고 낙담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장소도 모르고 가시는 방향도 모르자 기분이 침울해졌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기분이 나쁜 일이 없는데도 갑자가 가라앉기도 합니다.

세 번째 증상은 요한복음 20장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사람 유다는 죄책감에 빠져 목을 매 자살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이 해코지를 할까봐 문들을 닫아걸고 숨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인사를 하시고,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시며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시며 부활을 증언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성령을 받으라.’고 격려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는 슬픔에 잠겨 바람을 쐬러 돌아다녔는지도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말하자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라고 불신하였습니다. 도마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데 자기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부정적인 생각에 짓눌려 미래를 암담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며칠 후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도마의 손으로 예수님의 창자국을 만져보고 예수님이 유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요20:28)”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도마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과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우울증 환자가 나옵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을 통해 엘리야 선지자가 낙담하여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사역을 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천사를 보내서 떡과 물을 주시고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여주시고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음식을 먹어 기운을 차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냈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음식도 먹고 휴식도 취하고 격려도 받아야 낫는다고 합니다./ 시편 기자도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시편 42편 5절을 통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라고 질문하고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울증 환자는 음식과 휴식을 통해 몸도 회복하고 하나님을 통해 마음과 영혼이 회복돼야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사람은 육신과 영혼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면 영혼이 회복되고 영혼이 회복되면 육신도 회복됩니다. 죽고 싶다던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었듯이, 낙심하고 불안해하던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활력을 되찾았듯이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하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마음의 감기도 물리칠 수 있고 몸의 감기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중심은 마음입니다.(잠4:23)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해 집니다. 마음이 건강해 지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고 있다고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를 도우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고 믿어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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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1일 이진주와 호영의 엄마 엄희정 성도(2010-10)가 등록하다. 작년 대비 100% 부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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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20:1-18 내가 주를 보았다.

오늘은 기독교의 가장 큰 명절인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성탄절보다 큰 명절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보다 부활이 중요합니다. 저는 부활절이 될 때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왜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자를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다면 다른 제자들도 믿기가 수월했을 텐데 여자인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도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지만 수제자인 베드로가 아니라 여자인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그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리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가복음 8장 1절에서 3절을 통해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다고 말씀합니다. 일곱 귀신은 귀신 들린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귀신이 심하게 들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으나 예수님이 귀신을 쫒아내 주셔서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자와 함께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5장 11절을 통해 예수님의 핵심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8장 3절을 통해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는 예수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교회를 다녔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교회봉사를 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여자 제자들 중에서도 이름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첫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다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23장 44절에서 56절을 통해 예수님에게는 남자 제자가 12 명이 있었는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종교지도자들에게 붙잡혀 가게 하였고, 수제자인 베드로는 칼을 들고 저항하다가 대제사장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혀 가자 해코지를 당할까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여자 제자들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채찍으로 때릴 때 자신들도 쇳조각과 뼛조각이 살에 박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시다 넘어지실 때 자신들도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넘어져 팔꿈치와 무릎에 시퍼런 멍이 드는 상처를 겪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에게 망치질을 할 때 자신들도 팔목과 발목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느꼈고,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를 때 자신들도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지는 공포를 느꼈고,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지냈을 때에 자신들도 돌무덤에 매장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겼고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었을까요? 이것 말고도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24장 1절부터 12절까지를 통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돌아가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6시부터는 안식일이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에는 모든 것이 멈추어집니다. 형광등도 켤 수 없으니 장례식도 치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일 장을 치르기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은 서둘러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시신을 세마포로 싸고 다른 사람을 장사하지 않은 새 무덤에 매장하였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물로 닦고 기름을 바를 텐데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향품을 바르지 못했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마포(수의) 사이에 향품을 바르지 못해 안타까웠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안식일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새벽같이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산허리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만들었습니다.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서 막았고 돌을 노끈으로 묶었고 옛날 집에서 시루떡 찔 때 밀가루로 틈을 메우듯이 빈 공간을 점토로 봉인했습니다. 돌문이 단단하다 보니 여자들이 밀어 가지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무덤에 도착해보니 육중한 돌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습니다. 여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 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에 무덤을 도굴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무덤을 파헤치거나 시체를 가져가거나 무덤을 봉인한 돌문을 바꿔 놓거나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고 남자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10절을 통해 시신을 쌌던 세마포(수의)는 흩어져 있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개어져 있었습니다. 누에가 껍데기를 벗고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예수님은 세마포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셨습니다. 만약 도둑이 들어왔다면 시신은 그대로 두고 값비싼 세마포만 벗겨갔을 겁니다. 시신을 훼손하려고 들어왔다면 피로 범벅이 된 세마포를 벗기지 않고 통째로 옮겨갔을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신을 도둑질해 갈 수도 없었습니다. 산허리에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입구가 하나였고 그 입구를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경비병들이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했습니다. 시신이 도둑맞지 않은 게 분명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무덤을 들여다보고 돌아갔지만 요한복음 20장 11절을 통해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고 목 놓아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알려줄 수밖에 없었던 세 번째 이유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남자 제자들보다 나았습니다.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마리아는 섬겼고, 남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지만 마리아는 함께 했고, 남자 제자들은 무덤을 보고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빈 무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을 통해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학자들은 처음에는 500명의 제자가(고전15:6)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했으나 기도해도 성령님이 임하시지 않자 120명만 남았다고 추측합니다. 성령님은 마가의 다락방을 끝까지 떠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빈 무덤을 끝까지 떠나지 않은 마리아에게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상가교회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기다린다면 우리 창대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날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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