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 - 칼뱅이 제네바의 독재자이자 학살자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팩트 체크 시리즈 1
정요한 지음 / 세움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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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났다
칼뱅은 기독교, 개혁주의의 토대를 놓은 필수적인 인물이다


독서를 하는 와중에 스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에서 이런 이야길 하는거다 칼뱅의 잔혹성, 폭력성, 권력성...그 책을 읽어볼 요량으로 <다른 의견을 말할 권리>를 구매했다. 츠바이크는 이전에 <에라스무스평전>으로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종교는 진실을 토대로 세워진다 아무리 칼뱅이라도, 기독교의 뿌리의 근저에는 그가 있다고 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 혹자는 칼뱅의 잔혹한 제네바 행태(?)에 대해 ‘칼빈의 신학은 yes, 그의 사역은 no’라고까지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과연?


그 때 이 책이 나왔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신학연구자이다 칼뱅은 프랑스출신, 츠바이크도 프랑스에서 살긴 살았던데...왜 이런 지적, 역사적인 균열의 틈이 생기는걸까?


저자는 원인을 “사료의 선택의 (우선순위)문제”였다고 한다 츠바이크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제롬 볼섹까지 거슬러간다 츠바이크는 제롬 볼섹의 자료들을 근거했을 것이다 근데 제롬 볼섹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칼빈의 예정설을 부인했고 종교개혁 자체를 부인한 인물이다 결국 그는 카톨릭으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에게서 무슨 칼빈의 좋은 이야길 듣겠는가? 여기서 오해의 틈이 생긴다


저자는 츠바이크가 1차 사료를 사용하지 않고, 2차, 3차 자료를 사용했기에 칼빈에 대한 오해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츠바이크의 저서는 전기소설군에 속한다 역사의 팩트가 아닌 상상력의 픽션이 가미된 거다 여기서 역사적인 균열, 팩트의 균열이 생긴다


또 하나, 칼빈이 정말 폭력적인 학살을 감행했나? 이다 신학이 권력이 될때 종교는 타락한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가 그런 헤게모니를 가지고 율법을 모르는, 신학을 모르는 자들을 ‘땅의 사람들’이라고 폄하하고 무시했다 그건 정말 ‘종교’이지 ‘참된 신앙’은 아닌 것이다 기독교가 개독교의 오명을 받는 것은 기독교가 종교의 냄새가 너무 나버렸기 때문이다 믿음의 냄새가 나야하는데(여기서 ‘종교’란 단어가 다시 부정적으로 쓰였다 양해해주시길).


저자는 시대배경적인 측면에서 칼빈이 제네바에서 그만한 권력의 위치에 있지 않았음을 밝힌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이 그 당시 제네바가 신정정치 제도라 생각하는데, 그 당시 제네바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칼빈은 제네바 사역 시절 거의 대부분 난민 신세로 살았고, 1559년에서야 제네바 시민권을 비로소 얻었다 그것도 공직에 나설 수 있는 피선거권은 없는 2등 시민권을 받았다 그리고 불과 5년 후인 1564년에 죽었다 그런 그가 공권력을 통해 학살자가 되었다? 그건 어불성설이다


제네바교회(칼빈)와 제네바 시의회는 명백히 다르다 당시 제네바는 혼란의 시기였고 칼빈을 이를 계도하기 위해 도덕적인 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오히려 칼빈의 개혁을 거부했고 심지어 밤에 칼빈의 집 근처에서 총질을 하거나 칼뱅의 이름을 자기 개이름으로 붙이기도 하고 개가 칼빈을 물게끔 했다


또한 칼빈이 속한 제네바교회의 최고 기관은 치리회이다 교인들의 잘못과 범죄를 질책하고 벌주는 기관이다 벌이라 해봐야 사법기관이 아니기에 ‘출교’, ‘수찬정지’ 이다 사람을 사형시키거나 고문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칼빈 자체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일례로, 삼위일체론을 부인한 세르베투스는 화형선고를 받는다 칼빈은 그 전날까지도 그를 찾아가 설득하고 회개를 권했다


칼빈을 흔히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고 한다 20대에 기독교의 고전인 <기독교강요>를 집대성했으니 그가 얼마나 공부광이었겠는가! 그것이 일평생 칼빈에게 다양한 병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게 교리적으로 강력한 인물이 자신에게 육체적인 연약함을 발견했다면, 그가 설사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해도 생명을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신앙은 인격과 같이 가는 것이다 종교와 신앙, 믿음은 인격과 같이 간다 예수님은 능력 따로 인격 따로 아니었다 그분의 삶 자체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인격’이었다 하나님을 육화한 성자 그리스도이셨다


만약 칼빈이 학살자였다면 그의 저서는 신뢰도가 떨어진다 삶은 신앙이고, 종교도 삶이기에. 우린 누군가에 대해, 무언가에 대해 위증해선 아니된다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거짓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종교는 가설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종교는 사실fact위에 세워질 때 영향력이 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사 족:

1.미루다 미루다 결국 이제야 리뷰를 썼는데, 이렇게 긴 글이 되어버렸다 책보다 덜 길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2.글을 쓰다 보니 칼뱅과 칼빈을 혼용했다 양해해주시길. 마침표도 생략한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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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로 살 것이냐?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이냐?


최고의 영적 거장들의 강의가 상쾌하다!
<이미-아직>의 긴장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천국 소망이 있다!
개인적으로 D.A.카슨의 “여호와 삼마!”가 여운이 길다!


빅데이터가 출현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천국이라는 이상왕국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제(premise)‘이 차이이다.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르다.
그 전제는 패러다임과 프레임을 구속하고 제한하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에서 스티븐 코비가 이야기한 지하철에서 이유도 없이 생떼를 부리는 어린 소년의 일화의 차원처럼 다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알고보니, 그 어린 소년은 지하철에 타기 전 자신의 엄마가 병원에서 죽었다는 현실을 감당할 수 가 없어서 그런 행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프레임, 패러다임은 결국 전제에서 출발되어진다.


땅중심의 세상에서 천국을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이다. 오늘날같이 인문학이 대세인 시대에, 저마다 합리적인 인문주의자가 되길 원하지, 하늘의 것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신기루 같은 신앙인, 종교인 된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어 보인다. 나는 후자의 부류의 한 사람이다. 혹시나 나의 글이 전제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종교는 왜 과학이 되려 하는가?”란 리처드 도킨스의 접근에 대해 나는 반대로 질문하고 싶다. “과학은 왜 종교가 되려 하는가?” 하지만, 현실은 지금 ‘과학이 종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과학은 검증된 것이고, 종교는 검증 불가하는 영적인 세계이니 더 할 것이다.


역사와 과학이 결합한 걸작,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과학이 인간의 생명까지도 정복할 수 있다, 생명의 길이까지도 늘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어느정도 과학은 생명연장과 장수에 기여를 했다. 하지만 과연 과학이 ‘길가메시의 프로젝트’인 인간의 불멸성, 영원성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런 시도와 접근이 나쁘진 않겠지만, 난 거기에 부정적이다. 사람이 한번 태어나면, 한번 죽는 것은 운명이다.


유발 노아 하라리가 그의 저작에서 그렇게 그로테스크하게 총체적인 역사를 기술하고 과학의 폭발적인 동행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현재의 지금에 유발 노아 하라리는 그 책의 마지막에서 물음표를 던진다.


‘우리의 기술은 카누에서 갤리선과 증기선을 거쳐 우주왕복선으로 발전해왔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이보더 더욱 나쁜 것은 인류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무책임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친구라고는 물리법칙 밖에 없는 상태로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면서 아무에게도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의 친구인 동물들과 주위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로지 자신의 안락함과 즐거움 이외에는 추구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p.588)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사피엔스는 대약진에 성공했다. <명견만리>에서 2030년이 되면 우리의 지식의 총량은 3일에 2배가 넘는 정보가 주어질 것이라 했다. 지식의 빅뱅이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인류의 대약진’이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윌리암 세익스피어의 <리어왕> 1막 4장에서,

˝아아, 나는 잠들었는가, 깨어 있는가
누구,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 라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이인화의 장편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없느냐?‘란 본질적인,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결국 사피엔스냐? 그리스도인이냐?의 질문은 인간의 ‘정체성‘(identity)의 문제로 귀결된다.

허먼 멜빌의 걸작, <필경사 바틀비>는 유명한 문장을 우리에게 남겼다.

˝(나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행동의 문제에 국한되었지만, 그 행동은 존재의 중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가?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지으며 살아가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컨텐츠나 스토리도, 죽음도, 그리고 영원한 목적지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편을 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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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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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 스포노출 위험 있으니 유의바람!

김연경이 나오는 배구시합경기를 잠깐 봤다.
키가 다들 쭉쭉빵빵이다.
키가 190인 선수들도 제법 있었다.

타란툴라,
-국적: 캐나다인
-성별: 여성
-키: 190이상
-특기: 철인7종경기가 가능한 초인적인 체력과 근력을 지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미스터리보다는 서스펜스가 강하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범인을 찾아가는 미스터리나 궁금증을 기대하면 별로다.
하지만, 게이고 특유의 스피드한 전개와 스토리, 타란툴라 넘 멋지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응징하는 무법녀!

게이고는 이 작품에서도 싸가지없는(?) 젊은세대들을 작품을 통해 응징한다.
강간을 서스름없이 저지르는 무법한, 폭주족도 그 대상이다.

범죄는 스포츠계에서도 예외가 아님을 고발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빨리 다 몰아읽고 산을 넘고 또 산을 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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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의 마지막 여정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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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호시노 미치오.
세계적인 야생사진 작가라고 한다. 내셔날 지오그래픽의 '알래스카'사진을 본 호시노 미치오. 그는 '알래스카'를 보고서 자신의 영혼의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리고 알래스카를 자신의 영혼의 고향으로 알고 살았다. 결국, 그는 그 '영혼의 고향'과도 같은 그 곳에서 불곰에게 습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보면 안전관리가 허술했던 사고사이지만, 알래스카를 열렬히 갈망하고 바랬던 그에겐 그것이 오히려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장 아름다운 마침표일 수도 있겠다 싶다.


호시노가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인디언과의 식사를 마친 후, '나는 당신들이 사는 방식을 존중합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렇게 사는 것 밖에 몰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문명의 이기와는 철저히 담을 쌓고 아니 그렇게 분리될 수 밖에 없는 알래스카의 주민들, 그리고 문명의 세계에서 건너와 그들을 바라본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 그의 글과 사진...


정유정의 소설 '28'을 이 책 읽기 하루 전날 읽었는데, 소설가 정유정도 호시노 미치오의 이야기를 하더군. 그리고 '늑대와 철학자'의 저자이야기도 하고. 평론가 정여울도 그 이야기를 하더라.


문득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영화가 있었다.
바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이다. 거기에 보면, 주인공 월터가 백호를 만나기 위해 눈덮힌 산꼭대기에서 기다리는 사진작가 오코넬(숀 펜)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사진작가는 백호가 나타났지만,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진은 도대체 언제 찍냐?”
“가끔 사진을 찍지 않을 때도 있다. 나 자신을 위해서.”
“그냥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지.”

그냥 백호를 만난 그 순간은 인공적인 이미지로 사진화하지 않는다. 그냥 그 순간을 자신의 눈동자로 찍기만 한다. 그리고 즐긴다. 자연을 거스리지 않는, 인공화시키지 않는 자연미? 암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때의 기억이 인상적이라 대충 더듬어 적어본다.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고래를 잡아서 마을주민들의 식량을 삼는 그 작업을 마친 후, 알래스카 주민들은 '내년에도 또 와'라고 하면서 고래턱뼈를 바다에 던진다고 한다. 그들은 빙하가 조금 녹아 바다가 '작은 바다'가 될때(그걸 '리드'라고 한다), 고래가 나타나 자신들을 먹여준다.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알래스카, 호치노 미치오는 그걸 동경했고, 그것을 사진에 담았다.


결국 마지막에 다른 이를 통해 전해 받은 그의 메모와 사진들이 편집자에 의해 유작으로 나오게 되었다. 글과 사진도 여운이 있는데, 호시노 미치오는 죽으면서도 이 유작으로 여운을 남겼다.


대학때, 외설작가로 알려진 D.H.Lawrence에 대해 강의를 들었다.
외설작품으로 알려져 당대에서는 금지처분까지 받았던 로렌스가 왜 그런 글을 썼단 말인가? 그때 비평수업시간이었는데, 내 가슴에 와닿았던 단어가 있었다. 바로 'Holy ghost'란 말이다. 'Holy Ghost'란 말은 기독교에선 '성령'(Holy spirit)이란 말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홀리고스트'는 말 그대로 '인간의 순수한 정신(영)'을 말한다. 만화영화 제목 '마음의 소리'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로렌스가 외설작가가 스스로 되고자 한 이유는 바로 "Holy Ghost"때문이었다. 금기시하고 터부시하는 당대의 문화에 딴지를 걸면서 도전장을 내민 로렌스의 'Holy Ghost'! 지금 시대라면, 로렌스는 다른 것을 가지고 딴지를 걸겠다 싶다.


로렌스 작가도, 영화 <월터의 현실은 상상이 된다>에서 나온 사진 작가 오코넬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만난 호치노 미치오도 자기만의 'Holy Ghost'를 찾아 산 것이다.

Written by KAR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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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일반판)
스미노 요루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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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이 소설을 살렸다!
이 말은 이 소설의 내용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소설은 고딩들의 로맨스 이야기이다.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소년의 4개월간에 걸친 사랑이야기이다.
로맨스 소설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목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가 이 소설을 더 특별하게 만든 것 같다.

제목이 소설의 8할 정도를 담당했다?
이 소설을 읽기전에는 ‘췌장을 먹고 싶다‘는 말이 무슨 미스터리물인가 싶었다.
하지만, ‘너의 췌장을 먹고 싶다‘는 이 말은 췌장에 관한 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아파하는 연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게 더 가슴아픈 것이다.
인터넷에 누가 좀비물이라 하던데...그러하기엔 이 소설이 너무 아름답고 가슴 아프다.

Written by karl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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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2018-05-18 14: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물 한살 군입대한 제 조카가 좋아하는 소설이랍니다! ^*^

카알벨루치 2018-05-18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 저도 스물 한살인가요? ㅎ반갑고 감사합니다

아트 2018-05-18 17: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도 나름 재미있게 봤던 소설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