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란 말은 참 듣기 좋은 어감과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영‘을 발음하다가 ‘웅‘자가 발음될 때 무언가 하나가 날아가는, 비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표피적인 차원에서이고 진정한 『영웅』, 그 말 한 마디만 들어도 대단히 설레고 떨리고 그러한 긍정적인 긴장감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웅...
영웅이 사라진지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쩌면 영웅에 대한 향수nostalgia에 더 목 매는지도 모른다.
영웅의 이야기를 언급하면 우리는 현대의 Context라는 시대성을 떠나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세나 고대나 그런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되추적해야만 우린 우리의 영웅의 얼굴Mask을 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는, 현대는 영웅이 없기 때문not exist이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라는 기독교 사상가는
현대에 영웅주의,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다.


하나는 남을 헐뜯는 현대인들의 습관이다.


솔제니친은, 스탈린이 너무나 의심하기 좋아하는 인물이어서 ˝불신이 그의 세계관이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현대인들 모두다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서 의심의 대가들로 군림하고 불신의 습관들에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영웅주의는 자동적으로 의심받게 된다.

우리는 매스 미디어의 영향을 너무나 받아서 다들 뉴스앵커나 기자로 둔갑해 버렸다. 사소한 술자리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건과 환경과 삶에 대해 비판하고 비난하기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또 하나는, 실제로 영웅이 이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영웅적인 자질이 어떤 영예로운 성취와 연계되어 있었다.
진정한 성취나 업적을 이룩한 영웅의 자질-그것이 인격이든, 덕이든, 지혜이든, 예술이든, 스포츠든, 전쟁이든 간에-에 영예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매체, 멀티미디어가 유명세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한다. 즉, 진정한 위대함에 수반되는, 예를 들면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가진 힘, 전투능력, 사람에 대한 믿음, 아내와 자식에 대한 신앙,목숨을 내건 검투사로서의 싸움...이러한 것들이 없이도 순식간에 가공된 명성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영웅이 아닌 유명인사의 부류the famed로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 유명할 뿐이다.
매체는 그 사람의 인격과 다른 어떠한 위업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그의 외적인 이미지에 무게중심을 더 둔다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볼까 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는 영웅주의를 다룬 영화이다.


로마제국의 번성기의 한 인물, ‘막시무스‘라는 한 전쟁영웅(장군)이 제국의 황제인 시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왕권을 은연중에 승계 받지만 이를 안 시저의 아들 코모두스의 계락으로 막시무스는 죽음의 직전까지 갔다가 처절한 검투사의 노예생활로 전락하게 되고, 코모두스가 황제가 되는 대립구도는 영화의 흥미를 더 해준다.
영화에서는 막시무스의 인격, 전쟁능력, 리더쉽, 진정한 영웅의 자질, 황제의 자리에 욕심을 두기보다는 선왕(先王)의 뜻에 더 큰 대의(大義)를 두는 범상치 않은 자질,
그리고 볼거리-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에게 있어 최고의 관심-를 제공해준다. 스펙타클한 전쟁scene, 원형경기장에서의 결투scene...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이 리들리 스콧트Ridley Scott임을 기억하자.


군중심리...변덕스러움이 그들의 특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도 유대백성들의 군중심리가 한 몫을 한 것을 부인할래야 부인할 수가 없다. ‘글래디에이터‘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등장한다. 그 군중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고자하는 황제는 결국 막시무스와의 결투에 지고, 선은 악을 이긴다.
막시무스도 결국 유명을 달리하는데 그가 그토록 바랬던 아내와 아들이 있는 그 곳으로 가게 된 것이다.

마치 바람이 갈대밭을 만지작거리면서 부는 것처럼
막시무스가 갈대 숲을 손으로 헤치면서 움직이는 그 첫 장면과 마지막장면은 참 인상적이다.


영웅부재시대의 영웅주의의 아름다운 영화를 한 편 감상한 기분이 멋쩍다. 우리 시대는 과연 영웅이 존재할 수 있을지 회의의 미소만이 감돌뿐이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영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여론과 매체의 영향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만이 가진 진정한 소명the call-글레디에이터의 ‘막시무스‘처럼-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리라.

영웅이 되고자하는 사람이라면 여론에 먼저 무감각해지는 훈련을 해야할 것이다.여론은 절대 중립적이지 않다. 자본과 권력과 상업성에 의해 언제나 치우치는 것이 여론이다. 그 여론에 의존하지 않고 삶을 거닐 수 있는 조건은 오로지 ‘소명‘뿐 일 것이다.
그러한 자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고백처럼-윈스턴 처칠이 한 번은 동료 국회 의원의 악한 공격을 받는데도 왜 고통스러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존경한다면 그의 의견에 신경을 쓰겠지요.
그러나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자기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자신의 삶과 삶의 방향the call을 감당하리라.


˝내게는 단 한 분의 청중the audience of one밖에 없다.
네 앞에서는 내가 입증해야 할 것도,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


이 모토motto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에게 너무나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요즘 읽고있는 오스 기니스의 ‘소명the call‘이란 내용과 너무나 오버랩O.L이 되어서 책과 영화를 오락가락하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2007년에 적은 듯한데, 적절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일단 텍스트는 날 떠나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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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400년을 폭풍우의 시련과 자연재해의 충격에도 버터낸 거목이 딱정벌레떼의 공격으로 쓰러진다는 이야기이다.
천둥번개, 벼락, 태풍과 비바람의 기운에도 버텨낸 고목이 아주 작은 딱정벌레들의 공격으로 넘어져버렸다.
우리 인생에 있어 우리가 무너지는 것은 사소하고 하챦은 것들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나도 동감.
(나는 카네기의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서, 그냥 속독하지 않고, 메모하면서 정독했다. 너무 힘들었다. 몇 주는 읽었던 것 같다. 지금은 도저히 그렇게 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메모했던 기록들을 보면서 데일 카네기가 왜 데일 카네기인지를 알 수 있었다. 여러분, 아는가? 카네기는 첨에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는 것을! 자기가 쓴 소설이 형편없다는 소릴 듣고 그는 픽션작가가 아닌 넌픽션 작가로 진로를 변경했다는 것이다)


‘침대부터 정리하라‘
이 제목에서 우리는 ‘침대를 정리‘하는 것은 사소한 것인데, 하루 일과 중에 가장 먼저 ‘침대부터 정리하라‘고 한다. 그 말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 하챦고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군대에서의 경험 가운데 사담 후세인을 체포한 일화를 이야기한다. 그의 침대는 늘 정돈되지 않아 있었고, 그는 체포된 후에도 독재자의 권력의 힘이 아직도 존재하는 듯 행동했다는 이야기도 해 준다.


인생에 있어 사소한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하고 더 큰 것이다.
역으로 우리가 압도될만한 하며 크고 위험천만한 중요한 환난과 위기와 상처는 어쩌면 더 사소하고 덜 중요하다는 것.
그렇게 볼 수 있는 패러다임이 중요한 듯 하다.


낙하산 훈련 중에 충돌하여 군인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나,
키가 160 조금 더 되는 친구가 과연 네이비실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지만 그 친구가 훈련중에 1등을 했다.-토미 노리스의 이야기도,
사람을 판단할 때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심장의 크기‘로 판단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마틴 중위는 자전거사고로 훨체어신세를 35년 동안 졌다.
마틴은 저자의 네이비실 훈련교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고 이후 기량이 뛰어난 화가가 되었다.
네이비실훈련생들의 훈련후에 받는 을차례를 ‘서커스‘라고 한다.
하지만 그 ‘서커스‘는 훈련생들을 실패를 넘는 성공의 발판이 되게 했고, 훈련 중에 바다에 상어가 돌아다녔던 일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진흙이 목이 차 오르는 순간까지도 노래하며,
포기하고 싶은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도,
그 순간의 크기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통과 위기가 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관점과 철학!


인생의 무게중심을 역으로 두고 바로볼 수 있는 패러다임, 윌리엄 맥레이븐의 <침대부터 정리하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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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 서른 살 빈털터리 대학원생을 메이지대 교수로 만든 공부법 25
사이토 다카시 지음, 김효진 옮김 / 걷는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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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독서의 맛”을 조금 느끼고 있는 독자들에겐 비추이고, 초급독서가들에게는 도움이 될 듯 하나, 내겐 별 도움이 안 된다,
<혼자있는 시간의 힘>은 잘 읽었는데.

독서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동기부여차원의 책이다.

그래도 한줄 의미있는 구절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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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빌려 읽었다.
근데 대여한 책에 줄이 그어져있었다.
‘만인의 책에다 줄을 그으셨네!
어디다 써먹을려고 그랬나?’
순간 멈칫 멈추었다.


멈춘다는 게 뭘까?
멈춘다는 것은 일시정지(pause)의 의미도 있다. 멈춤, 휴식, 단말적인 어떤 힐링을 의미할 수 있겠다.


속세와 단절된 승려 혜민의 이야기는 단순한 멈춤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어떤 면에선 류시화의 <시로 납치하다>에서 소개된 앨리스 워커란 시인이 자기 시에서 말한 “자발적인 추방”의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혜민도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는가!


-자발적이다: 자기 스스로의 의지에서 의해,
-추방당한다: 믿고있던 세계와 세상으로부터 내침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는 것.


시대와 세대로부터의 자발적인 추방자가 된다면, 우리는 정신적인 혜안과 통찰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자발적인 추방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로부터, 제도와 시스템으로부터, 관계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나 자신의 자아로부터 처절하게 추방당하고 단절해 본 자만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소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자발적인 추방의 열매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 “자발적인 추방”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나 자신도 그런 용기는 없다. 삶이, 상황이 그렇게 나를 내치면 내가 그렇게 추방당하는 것이지! 자발적인 추방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잠깐 멈칫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깊은 멈추는 것은 인생의 큰 위기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그 무엇이 아닐까! 그래서 고통은 쓰지만 열매는 달다고...


제목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을 필요는 못 느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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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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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의 대가이다.
근데 이번 작품은 대단하고 훌륭하다.
추리도 가미되었지만, 판타스틱하면서도 인간적인 감동이 있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


‘나미야 잡화점’을 중심으로 얽히고 설킨 인물들, 세명의 도둑과 고스케의 이야기가 충격적이다.


<스포일러 有>


고스케는 비틀즈 매니야이다. 중학생.
하지만, 부유했던 아버지의 사업이 어음부도를 맞으면서 세가족은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고스케는 부모의 ‘야반도주행’에 대해 불편함과 불만을 느꼈다. 그는 사촌형이 물려준 비틀지의 LP판 50장을 소유하고 있다. 하지만 비틀즈 해체소식과 아울러 비틀즈의 영화 ‘let it be’를 관람하고서 영화해석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버린다. 자기마음도 심란하니 해석도 자기맘대로 내리는 것은 인간의 심리 구조이다.
카이사르가 그러했던가? 사람은 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어한다는 것, 고스케가 그러했다.


비틀즈도 거북스러웠다. 그는 결국 야뱐도주하기 전에 자기 친구에게 50장의 비틀즈 LP를 고작 만 엔에 다 팔아버린다. 자기가 그토록 숭배했던 비틀즈를 자기 인생에서 지운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맞물린 것이다. 야반도주하는 중에 고스케는 휴게소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도망친다.


‘일단 마음의 끈이 끊겨버리면 두 번 다시 이어지는 일은 없다...’(p.293)


고스케는 ‘후지카와 히로시’란 이름을 적어 손에 넣는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셈이다. 시간이 흘렀다. 고스케는 동네근처 ‘Fab4’라는 카페에서 자기가 앨범을 팔았던 친구 마에다의 동생이 경영하는 바의 마담에게서 부모님의 소식을 듣게 된다. 고스케의 부모는 동반자살하는데, 유서에 옆에 있지도 않은 아들 고스케도 함께 바다에 투신자살했다고 기록을 남긴다.


왜?


‘고스케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인지, 그들은 예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와구 고스케라는 이름은 쓰지 못할 터였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그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와쿠 고스케라는 인간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p.313)


사업이 부도나서 야반도주했던 부모가 아들을 잃어버렸다. 찾을 길이 없다. 찾을 수도 없다. 부모때문에 자식의 앞길을 막을 순 없는 노릇이고, 희망이었던 아들이 행방불명되자, 부모가 택한 것은 자살이었다. 그게 부모다. 여기서 독자인 나는 한 충격을 먹는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충고다.


‘온 가족이 같은 배에 타고 있기만 하면 함께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도 가능합니다.’(p.315)


자신이 도망치는 바람에 우리(고스케) 가족의 배는 갈 곳을 잃어버린 것이다. 가족은 이처럼 소중하다. 한 배를 탄 가족...아들의 부재는 부모의 가슴에 구멍을 뚫리게 했다. 가족은 어떻게든 한 배를 타고 간다면 희망이 있다. 하지만, 고스케는 그 배를 뛰쳐나와버렸다.


‘온 가족이 같은 배에 타고 있기만 하면 함께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도 가능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대단한 작가이다.


2017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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