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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세운 집 - 기호학으로 스캔한 추억의 한국시 32편
이어령 지음 / arte(아르테) / 2015년 9월
평점 :
일시품절
이어령의 언어로 세운 집은 모두 32편의 시가 다섯 파트로 나누어져 소개된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시험문제로 우리를 시험이라는 괄호 문제 속에서 주제를 찾아야 했고 소재를 골라야 하는 등 '끊임없이 괴롭히던' 아름다운 시들이라는 것이 문제다.
이 책에서 이어령은 이육사, 윤동주, 서정주, 김소월 등 암울했던 시절, 고난의 시절을 뚫고 나오는 빛나는 단어들을 모아 만든 시를 통해 삶의 한 날을 굵고도 짧게 그리고 진하고도 여리게 자연과 사람을 이야기한 시인들의 시들을 이어령 선생의 언어로 다시 해석된 시들이 모여 있는 책이다. 특히 이 책 후반부에서는 별도의 주석을 달아서 좀 더 깊이 있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저자 이어령은 시험지 답안을 채우는 시로만 공부했던 것을 그의 기호학으로 분석, 이념적인 정답을 제하고 다시 시를 깊이 들여다봐야 함을 강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학교 다니면서 답안지를 채우기 위한 문제로 민족, 통일 등 그들이 쏟아내놓은 가슴 깊은 시들을 단순하게도 그렇게 연결 짓고 해석을 하는 것으로 시를 배웠었다.
시를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전에 선을 보인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을 통해 시인은 시와 글쓰기에 대한 강의 내용을 소개했다. 이성복 시인은 '무한화서'에서 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드러내는 게 이이고, 부분을 떼어 내면 전체가 무너지는 게 시에요. 토씨 하나에도 희로애락이 실리게 하세요. 묻어나는 말, 번지는 말이 시에요. 시이거나 시 아니거나 어느 하나일 뿐, 시 비슷한 건 없어요."-36페이지, 이성복 시론, '무한화서' 중에서
이러한 그의 시에 대한 생각과 관점을 놓고 이번 이어령이 해석한 우리나라 대표시 32편을 보니 시가 새롭게 다가왔다. 무작정 국가, 나라, 민족을 연결해 해석하고 단정 지었던 것들에서 벗어나 시인의 삶과 사랑, 자연을 돌아보니 그 아름다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다시 해석됨으로 해서 바위에 갇혀 있던 단어들이 새롭게 빛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대체 우리는 뭐냐. 만해가 애써 찾아서 갈고 닦아낸 님이라는 그 귀중한 한국말, 열려 있는 말, 모든 계층과 그 영역을 횡단하는 말, 어느 대상에 가 붙든 그것을 끝없이 새롭게 변형시키고 심화시키는 말, 우리를 목마르게 하는 말, 침묵 속에서 노래를, 어둠 속에서 빛을 그리고 타다 남은 재를 다시 기름이 되게 하는 기적의 말, 그 입체적인 시의 말을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망치로 두들겨 펴서 납작하게 만들어놓았는가. 자유롭고 아름다운 한국말의 그 님을 정치와 종교의 울 안에 가두어 가축처럼 길들이려 했는가."-121페이지, '언어로 세운 집' 중에서
누구나 한 편 정도는 외우고 있을 법한 시, 그러나 어처구니 없이 해석하고 재단했던 시들은 단어와 단어 사이, 행과 행 사이를 통해서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을 세밀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본 저자의 노력과 집념으로 우리 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정쩡한 9월은 이제 가고 가을 빛 찬란한 그 한때가 올 것이다. 책 읽기 좋은 시간, 시 한편 써보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시간에 다시 만나는 이 대표적인 한국 시들이 잠자고 있던 영혼을 다시 들썩거려놓는다.
지친 하루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권해주고 싶다. 다시 보고, 다시 읽어야 할 한국 시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