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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지의 최전선
이어령.정형모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왜 우리는 변화를 이루지 못하는 걸까.
도전 정신은 어느 나라보다 강해서 안 되는 것들을 되게 만들었다. 한강의 기적도 만들고, 88 서울 올림픽도 치러냈고 2002년 월드컵 신화도 쓰지 않았나.
그런데 그런 선진 도약을 일구어냈던 우리,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건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만들기는 1등이었던 시대를 벗어나니 이제 고민에 빠져 있다. 이미 인터넷을 시작으로 콘텐츠와 소프트웨어 시대로 들어섰지만 그 안에 들어갈 이야기, 콘셉트, 아이디어를 풍성하게 담지 못한 것인가?
새로운 것을 꺼내는 데는 왜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는 걸까. 조상들이 물려준 훌륭한 지식과 경험을 왜 우리는 제대로 꺼내 쓰지는 못하는 걸까. 오히려 우리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의 것에서 멋을 찾고 지혜를 찾는 걸까. 우리는 왜.
없는 것을 가져다 하는 거시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는 우리가 앞으로 먹고 살아갈 것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왜? 우리는 우리 안에 갇혀 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움직임, 특히 정보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를 우리는 어느샌가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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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지의 최전선> 표지 일부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 이 책을 읽으면서 먼저 떠오른 생각이다. 잊어버리기 전에 먼저 써 본다.
이어령 교수는 젊은이들 못지않은 열정과 그가 이룩해 온 지식의 창고를 활용하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혹은 기억하지 못하는 저 서랍 끝에 있는 것까지 끌어와서 내밀어 놓았다. 그가 풀어낸 이야기들을 함께 들어보자.
이 교수는 이 책에서 1900년대의 변화를 이끈 사람과 사물, 과거의 것을 불러와 새것과 결합시키는 방법을 찾고, 서양의 것과 동양의 것, 그리고 우리의 것을 갖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보여주었다.
이 교수가 그간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 그가 걸어온 발자취 속에서 우리는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이 책을 통해서 느꼈다.
이 책은 중앙일보 <중앙선데이>의 정형모 기자(에디터)가 이어령 교수와 함께 떠난 지식의 여행기이다. 이 책은 '만리장성과 로마 가도'를 통한 동서양의 차이, '컨테이너와 해병대', '거시기와 머시기' 등 27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었으며 그 안에서 우리 삶에 영향을 끊임없이 미치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펼쳐가며 '지의 최전선'으로 이끈다.
우리가 걸어온,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길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두 사람이 함께 주고받은 대화는 편하게 읽히지만 대화의 내용은 결고 가볍지 않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건지도 모르고 경쟁이라는 사회에서 살면서 급하기만 했지 길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꼴이었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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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홈페이지 화면. 지난 2014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중앙선데이를 통해 정형모 기자와 이어령 교수가 나눈 대화가 소개되었고, 그들이 나눈 대화는 다시 책으로 재구성, 출간되었다. 신문 지면에서는 프롤로그를 포함 22회의 연재기사가 소개되었으며, 이번에 나온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에서는 모두 27회로 다시 새롭게 만들어졌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세상, 바로 디지로그 세상이다.
이어령 교수, 그가 예언한 세상이 아닌가.
그가 오래전에 자신의 책을 통해서 예견한 세상은 정신은 없고, 껍데기만 허울 좋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스토리가 있고, 생각이 담겨 있는 세상이었다.
이 번에 그는 다시 한 번 우리의 태도를 자극한다. 남들이 만들어 가는 미래를 바라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지식을 탐구하는 삶을 추구하라는 것, 그가 이 책을 통해서 일깨워주고자 하는 바 아닌가.
중국과 미국의 힘겨루기, 지도 상의 일본과 중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위치를 놓고 다투는 이어령과 정형모의 대화는 함께 그러한 시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전해 준다. 이 교수가 끊임없이 정 기자를 끌고 다는 형상이다.
혼란스럽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한 대화, 그러나 하나 둘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를 잡아갈 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명확하게 다가온다. 우리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동안 이미 다른 나라들은 지정학적 위치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총성을 계속 쏘아 올리고 있지 않았나. 때로는 무력을 동원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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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중인 이어령 교수.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명이 자본이다>, <젊음의 탄생>, <디지로그> 등 수많은 책을 저술한 그는 지금도 그의 서재에서 '일곱 마리 고양이'와 함께 검색과 사색으로 지의 최전선을 누비고 있다. (출처 : 유튜브 화면 캡처)
"그렇다. 동서 냉전 때 전쟁은 어디서 일어났는가. 유일하게 한국에서 진행되었다. 왜 하필 한반도일까. 극동과 극서 두 나라의 섬을 이어주는 유일한 곳이기 대문이다. 반도를 복원하지 않으면 이 세계의 움직임은 대륙화와 해양화의 끝없는 양극화 전쟁을 일으킬 뿐이라는 거다. 중대한 짐이 한반도의 어깨에 올려져 있다."
-71쪽 중에서
역사의 변화를 이끈 사람과 나라들을 통해서 우리 시대 앞에 놓인 변화를 이끌어갈 사람들은 누구인가 짚어보는 두 사람의 대화는 흥미롭다. 이 책의 공저자인 정형모 기자도 그러했지만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하고 느낌이 오는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통일을 통해서 뭔가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 표지 일부. 표지 카피에서 말해주 듯 이 책은 동서양의 지리적인 환경과 한반도의 위치 등을 다시 한 번 들여다봐야 함을 강조한다.
어느 특정 지역, 특정 국가만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회는 함께 누려야 한다. 그럴 때 더 큰 기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한국으로 밀려오는 기회, 우리는 어떻게 누리고 풀어갈 수 있을까.
말과 글 그 하찮은 몇 마디의 구절 속 엄청난 전쟁
"아시아란 말, 3000년 전 점토판에 찍혔던 단 세 글자 아수, 그 문자의 화석 속에 오늘 우리가 싸워야 할지의 최전선이 전개되고 있어. 그런데 진격의 나팔 소리도 없고 승리의 깃발도 없지. 함성을 지르고 공격해오는 적병도 보이지 않아. 조용하고 조용하다. 다만 우리의 가슴속, 머릿속에서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지. 남들은 육해공군의 군대가 있는 곳만을 전쟁터로 알지만 우리는 말과 글과 그 하찮은 몇 마디의 구절 속에서 엄청난 전쟁이 펼쳐지고 있음을 아는 거야."
-128쪽 중에서
급속하게 발전하는 현대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누리는 문화들을 우리는 이제 멈추어 한 번 돌아봐야 한다. 왜,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를 따져 물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앞으로 한 걸음 더 멀리 가면 된다. 늦더라도 그게 옳다. 디지로그 세상은 바로 그런 세상이다.
검색 만이 정답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사색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살자는 것이다. 검색은 하루를 살 수 있게 돕지만 사색은 평생을 살 수 있는 길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디지털 세상은 바로 우리 현실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 세상만이 전부는 아니다. 어떻게 이 둘을 엮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면 거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두 사람이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세상의 변화를 주도했던 인물들, 과학자와 개발자들 그들의 삶을 추적하여 그들이 이룩한 성과는 무엇이었으면 어떤 변화의 원인이 되었는가를 짚어본다. 정말 끝이 없다. 그래도 숨은 쉬어야 한다.
"둘숨과 날숨밖에 모르는 서구 사상을 좇아가다 보면 숨이 막히고 만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멈추는 순간,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들숨이 날숨으로 바뀌고 날숨이 들숨으로 변할 수 있다. 정치를 숨 쉬게 하라. 이념을 숨 쉬게 하라. 모든 사고와 경쟁을 숨 쉬게 하라"
-262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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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픽토그램. EXIT, 비상구 등 한글과 영문, 한자 등이 사라졌다.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에 등장하는 비상구 이야기('24-비상구와 안전문'). 사실 개인적으로도 비상구나 화장실 사인물의 비교를 해보려고 사진도 찍고 관심을 갖기는 했는데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이렇게 이 책에서 이 교수님의 지적 탐구 결과물 만큼 깊이 있게 이야기를 나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비상구'하는 한자는 왜 사라진 걸까.
이렇게 두 사람의 여행은 계속되고 결국 우리가 멈춰 바라봐야 할 것은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삶이라는 점에 도달한다. 우리의 문화, 그리고 인간의 삶을 향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다시 묻는다.
이 책의 끝에 도달해서 보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놓고 싸우는 일은 우습게 느껴진다. 좌나 우나. 어디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다른 것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음양은 싸움이 아니라 다툼이 아니라 조화가 아닌가. 창조가 아닌가.
마케팅 관련 책들에서 주로 꺼내는 이야기 중 하나는 게임의 룰을 바꾸라는 것이 있다. 혹자는 카테고리를 변경하라는 것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제품의 범주를 경쟁 제품 속으로 두지 말고 다른 것으로 포지션을 하여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강점을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있는 곳에서 싸울 때 승산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갖고 있는 강점 하나를 갖고 다른 곳에서 우위를 점한다면 그 게임은 누가 이길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강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축적해온 것들은 무엇이 있는가를 따져보자. 그리고 지금 변화의 바람이 우리에게는 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갖고 거기에 뛰어들 수 있을지 말이다.
밀려오는 변화의 흐름 속에서 기회를 잡아야지, 날려버리지 말자.
스물일곱 개의 이야기보따리는 복잡한 느낌도 들지만 그만큼 세상이 다양하게 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이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하나의 길로 모아진다. 바로 '지의 최전선'으로 가라는 것이다.
디지털의 시작, 그리고 3D 프린팅 기술이 선보이는 현재 상황 속에서 우리는 보고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현장에 적용해보는 노력부터 하자고 말한다. 하이퍼텍스트의 시대, 창조의 예술의 시대, 지의 최전선으로 가자. 조금 더 위험한 곳으로. 러시아와 인도가 손잡고, 러시아와 중국이 군사훈련을 하는 시대, 어제의 적이 친구로 변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만나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시 한 번 지금까지 읽고 정리한 부분을 되짚어보면서 이어령 선생의 지의 최전선을 찾아본다.
"나의 최전선은 말이고 생의 의미야. 말이 나오면 언어의 전선이 형성되거든. 그 말에 관심을 갖고 검색을 하다 보면 수억 개의 정보 중에서 우리 모두의 관심인 생명과 관계된 의미 있는 것들을 고를 수 있어. 관심, 관찰, 관계. 인문학을 문사철이라고 하지만 모든 지적 프로세서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종교든 정치든, 바로 그 세 가지야."
-185쪽 중에서
2016년, 내 앞에 놓인 길, 제대로 뚫어보자. 관심, 관찰, 관계로...... 지리 공부도 좀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도 물밀듯 밀려온다. 이어령 교수의 끊임없는 지적 탐구의 결과물을 이렇게 받는 것도 감사한 일이다. 연결하고, 때로는 버리고, 다시 이어 가며 움직여야 한다.
우리는 좀 더 많은 자극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