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날에 설움



봄날에 바람이 불어와

엷은 셔츠 사이로

시리게 스미어 든다.


햇발에 마주선

따스한 돌담에 기대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머금는다.


섞이지 못하고 한 가득

그렇게 시리도록

그렇게 따스하게


손 끝 하나 댄

그 한마디만으로도

터져버릴 듯

움츠려 눈물을 삼키우려다




2. 아스팔트에 핀 꽃



왜 이곳에 피어나

또 나를 슬프게 하는가?

찬연히 흐드러진

하이얀 꽃잎

붉게 젖어

썩어지는 그 자태

나는 보지 못했네.

바람을 기다리는가?

어느 하늘가에 닿아

검게 물들려

흔들리고만 있나?

차라리 내 발에 밟히어

짓뭉개 지려나?




3. 침묵의 이유



어느 무심한 돌담

여기저기 꽃송이 몇 개

어느새 피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또

슬퍼집니다.


이제 깊은 침묵에 잠겨

감은 두 눈 사이로

스며든 햇발에

나도 모르게

잠들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볼수록 그리운 존재입니다.

다가서면 두려운

내 마음 때문에

시가 되어버린 당신을 위해

바람이 세차게 불 그날까지

이제 다시 침묵에 잠기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촛불 켜는 밤



한량없이 비가 내리는 새벽녘이면

온종일 나른한 몸뚱이 흠뻑 적셔

거리를 나뒹굴며 환성을 내지르고 싶지만

축축이 젖은 옷가지를 빨며 눈물을 짜낼

어머니, 당신이 문득 생각이 나

어느 처마 밑에 힘없이 웅크려

비가 그치길 기다려봅니다.

그러나 어머니! 비가 너무 많이 내려요.

그리고 집은 너무 멀어 보이지가 않아요.

애매히 태우는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가지 못하고 젖어

바닥에 그대로 곤두박질치고 싶지만

다시 집나간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아직 불빛을 차단하지 않을

어머니, 당신이 문득 생각이 나

비 사이로 내달려봅니다.

그러나 어머니! 옷이 너무 많이 젖었어요.

그리고 너무 밝은 형광등이 무서워요.

서성이는 걸음으로 되돌아서며

어머니, 당신께 마지막 기도를 올려봅니다.


어머니! 비가 오는 날이면 촛불을 켜두세요.

무겁게 젖은 옷가지가

밤새 말라 불살라질 수 있도록

뚝뚝 떨구어지는 촛농이

당신의 눈물을 대신해 흘러내릴 수 있도록

어머니! 제발 마지막 촛불은 꺼뜨리지 말아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청춘



내내 맺혀있던 코를 푼다.

정액 같은 콧물이 물속에서

방황을 한다.

들끓어 오르는 가래침을 뱉는다.

정액 같은 점액질이 물속에서

침식해 간다.

-왜 정액 같은 그네들이 아름답지 않은가?

아직 한 번도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 

영롱한 빛깔은 누렇게 곪아 사라지는 

허공의 신비

한껏 물먹은 네 육체에 멍울처럼 스민

죽은 생명의 관음하는 

몸부림들

네 손에서 정액 냄새가 난다.  

네 입술은 언제나 하얗게

소름끼쳐 있다.

너를 입맞춘 이빨을 닦는다.

하얗게 뻐끔거리는 거품들에서

시린 향기가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푸라기타령



물에 빠질 때나 붙잩는

지푸라기라고 수월히들 여기지마소

꽃 피우는 데 벼 무르익는 데

시궁창 가새든 어데든

낄 때 안 낄 때 가리지 않고

마구 굴러먹는 잡것이지만

물에 빠져죽고 싶지 않고서야

꽃가지를 꺾어 들 순 없지 않것소

가파른 벼랑 우에서

장작개비 모냥 몰기 하나 없는

마른 나뭇가지에 매달려

질기게 버티고 있을라고 함 해보소

어느 누군들 물가에 빠지고 싶었것소

어느 누군들 벼랑 우에 매달려있고 싶었것소

어데 귀하디귀한 몸뎅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버선발로 곱게 강나루 건너

술 익는 마을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세월 좋은 나그네 팔자이것소.


물에 빠질 때나 붙잡는

지푸라기라고 수월히들 여기지 마소

낄 때 안 낄 때 가리지 않고

마구 굴러먹는 잡것이지만

징하게 질기게고롬 버티고 있을랑게

당신네들도 한 번 징하게 버텨보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중력의 은총



어딘가에서 떨어진 공허한 무게에 짓눌려

모두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마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떨어진다.

항문에 걸린 똥이 떨어진다.

아파트 옥상에서 중학생 소녀가 떨어진다.

비듬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진다.

꽃잎이 떨어진다. 단추가 떨어진다.

목이 떨어진다. 눈이 떨어진다.

귀가 떨어진다. 입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시를 쓰던 내 고개가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무언가 자꾸 떨어진다.

헐겁게 매달리지 못하고

애원하며 발버둥 치며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

.

.


모두 어디로 떨어지는 걸까?

다 떨어진 부대자루를 기워

길 위에 떨어진 돌멩이들을, 쓰레기들을

하나 가득 주워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