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곱

 

 

매일 아침 눈곱 낀 얼굴을 봅니다

생애 눈곱이 아니 낀 적은 없습니다.

젊은 적 울어내지 못한 밤마다

응어리진 눈물들이 화석화되어

아침이면 가볍게 털어냈습니다.

질게 눌어붙지도 무르지도 않은

단단한 슬픔의 결정체일 거라고

언제나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지금도 눈물을 흘리는 건 아닙니다.

밤마다 울어낼 슬픔들도 울분들도

시간과 함께 묽게 희석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뿐입니다

대신 아침마다 무른 눈곱을 봅니다.

시간이 더 해가면 더 물러져

세면대에 눈물을 홍수처럼 쏟아내며

서럽게 울어낼 수 있을까요?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흐린 기억들을

그대들의 뒷모습을 그 긴 그림자를

영롱하게 흔들리는 물기 속에서

촉촉이 마주할 수 있을까요?

매일 아침 눈곱 낀 얼굴을 봅니다.

눈곱만큼도 중요치 않던 눈곱이 고여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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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된 시

 

 

꼭 한 번은 멈춰내는 것이

길을 가는 것이라고 배웠다.

다 뱉을 수 없는 것들이

말들이라면 가슴속에

꼭 품어두고서 고이

삭혀두는 것이라고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내는 것들이

너의 울어내지 못한 밤들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사생아처럼 불현듯 낳아진

너를 지우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낯선 길 위에

쓰레기처럼 내던져버린다.

그리고

단 한 밤도 지켜내지 못한

너의 숨결을 떼어낸 힘으로

다시는

멈출 수 없는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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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배반 2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가세요.

그러나 나는 내어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라도 가져가 주세요.

그러나 나는 만지면 아스러지고

이내 시들어 버린 답니다.

 

제발 나를 꺾어 주세요.

당신의 손끝에 물들어

다시는 피어나지 못할

꽃이 되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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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배반 1

 

 

길가에 꼭꼭 숨어 유난히 도드라진 꽃이란

모든 열망들로 가득 찬 버거운 손길들을

배반하고서 티 하나 남기우지 않도록 사그라져

하늘에 희미하게 흔들리는 별이 되어야만 합니다.

비록 다시금 별을 따다가 바치려는 모든 손길들이

별이 된 꽃을 꿈속에 가두어 놓고서

밤하늘의 빛깔을 앗아가 버리겠지만

꽃은 배반을 위하여

모든 손길들은 절망을 위하여

존재하는 법

.

.

.

 

오늘도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된 꽃 하나

희미하게 반짝이다 사라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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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온 연민

 

 

어두운 지하철 유리창 속

낯선 타인이란 존재인 당신의

어둠보다 깊은 눈가의 음영과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림자를

몰래 바라보며

당신의 음영과 그림자를

감싸주고 싶다고 낮게 읊조려봅니다.

그러나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음영과 그림자에 포근하게

감싸 안겨 잠들고 싶은

저의 강렬한 욕망을.

스무 살 적 루오의 거울 앞에 창부란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찌든 눈빛으로

거울을 바라보는 모습에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피카소의 산산이 갈라져 우는 여자와

뭉크의 빨갛고 하얀 소녀들에게서

견딜 수 없는 삶의 비극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귀를 자른 고흐와

어느 날 극장에서 소리 없이 죽어

기호가 되어버린 기형도에게서

삶을 배우고, 시를 배웠습니다.

어쩌면 저에겐 귀를 자르고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릴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밤 그토록

당신의 몸뚱이를 탐하며

당신에게서 위로를 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오의 거울 속의 창부를 닮은

당신에게서 저 그토록

깊은 연민이 되어

사랑을 갈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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