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커포티 선집 4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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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old Blood - 범죄심리 소설의 발전단계와 방향에 대한 개인적 질문들

 

 

 

 소설을 평하기 전, 먼저 내 기억 속 추리소설에 대한 편린 몇 조각을 꺼내보고자 한다. 군대를 제대하고서였다. 허리 디스크로 의병제대를 해서, 외할머니 댁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이미 외할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외삼촌들도 모두 도시로 상경해, 외할머님만 계시는 적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물론, 외할머니 밭일을 소일거리 삼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생각보다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님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거의 종일 한량처럼 누워서 책만 읽었다. 그중에서도 그때 가장 많이 읽었던 책들이 추리소설들이다. 딱히 읽을 만한 책들이 외할머니 댁에 없기도 했다. 그나마 외삼촌들의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들이 추리소설들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시드니 셀던 등등. 그리고 이전의 기억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코난 도일의 명탐정 설록 홈즈 이야기 정도? 이 때문인지 내 기억 속에 추리소설이라 하면, 그냥 시간을 때우는 정도의 용도쯤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사실, 처음에 이 글을 읽을 때엔 정말 진도가 나아가질 않았다. 굳이 내가 이런 소설을 읽어야 할까, 하는 생각에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거의 500페이지를 넘어가는 분량, 언제 다 읽을지 눈앞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첫 장 약 120페이지 분량의 ‘그들이 살아있던 마지막 날’을 넘어가자, 생각보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틀 만에 책을 다 읽었다. 사실, 앞으로 다가올 지겨움에 대한 지레짐작으로 첫 장이 거의 하루 걸린 셈이고, 나머지 장들은 매우 흥미로워서 하루 만에 다 읽은 셈이다. 왜냐하면 이 글이 읽으면 읽을수록 단순히 추리소설이 아닌, 아니 정확하게 추리소설이 아닌, 범죄심리학 소설로 내게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내게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 아닌 범죄심리학 소설로 읽힌 것일까? 저자인 트루먼 카포티 스스로 밝혔듯이 이 소설이 저널리즘 접근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아니면 이 소설이 픽션이 아닌 논픽션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일까? 사실, 두 가지 다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특수한 범죄라는 대상이란 논픽션을 소재로 소설이 접근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의 접근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소재를 재구성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구성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수많은 범죄의 프로파일 중 유독 형사나 탐정들의 추리력이 빛을 발하여 범인을 잡은 논픽션 소재를 저자가 찾아 골라서 소설적으로 재구성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소설은 그런 소재를 골라잡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그런 전형적 추리소설의 재구성에도 관심을 보이질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재구성이라 함은 사건의 주인공인 탐정이나 형사의 1인칭 시점으로 독자가 들어가, 범죄자의 단서를 찾아가는 형식의 추리소설 구성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항상 마지막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독자는 1인칭 주인공처럼 일반적인 추리력으로 범죄자의 단서를 찾아 확증하게 되지만, 소설은 그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추리소설은 일반적 독자의 추리력을 뛰어넘는 반전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추리란 세계의 매혹에 완전히 함몰하게 만드는 것이 그 역할이며 임무인 것이다. 물론, 근래 추리소설은 이런 고전적인 전형적 구조를 탈피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CSI수사대라든가, 기타 미드를 보더라도 이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범죄도 범죄자도 전형적이지 않을뿐더러, 때문에 그 수사방법과 과정도 단순한 추리로는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미드나 장르소설에도 역시 반전은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는 과학적인 수사방법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독자에게 또 다른 영역의 추리적 카타르시스를 대신 선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러한 현대적 장르의 추리소설 범주에도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엔 어떤 반전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어떤 과학적 수사의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건 자체의 해결도 거의 기막힌 행운에 의한 우연의 산물에 의해서 해결되고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심지어 이 소설에서는 사건 해결을 위한 복선조차도 거의 생략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그냥 사건의 나열과 기록 연대기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면 차라리 더 나을까? 하지만 다 읽고서, 개인적으로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떠올렸다. 그 때문인지 이 소설이 어쩌면 ‘죄와 벌’의 현대판 범죄심리 소설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모든 접근방식과 문체 그리고 소설의 주제마저도 전혀 다른 별개의 소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범죄심리학이란 관점에서 두 소설을 비교해서 읽어보는 것도 자못 흥미로울 것 같아, 지금부터는 두 소설을 비교하면서 이 소설에 대해서 평해보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라스콜리니코프란 젊은 청년이 한 노파를 살해하게 되면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범죄소설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약 700-8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의 긴긴 내용 가운데 팔 할이 범죄를 저지른 동기에 대한 아주 자잘하고 치졸한 자아성찰에 관한 이야기란 사실이다. 즉, 이 소설은 인간이 죄를 저질렀을 때 야기되는 여러 가지 심리적 문제와 본질적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는 다른 특별한 등장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로 주인공과 관련한 가족을 제외하고는 구원이라는 상징적 존재로서 소냐라는 등장인물, 그리고 재판과 관련된 인물들이 전부이다. 사실, 이 인물들마저도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인 고민을 위해 거의 배경적으로 저자가 끌어들인 인물들이라는 인상을 지우기가 힘들다. 즉, 이 소설은 순전히 인간의 범죄 심리의 근본과 양심에 관한 문제의 본질인 선과 악에 대해 질문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자체에서 이런 범죄적 인간의 유형들은 그에 따른 질문과 함께 점점 더 심화되고 진화해간다. 초기의 ‘죄와 벌’에서의 라스콜리니크프를 넘어서서,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는 ‘신’이란 상징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살인을 꿈꾸는 이반 표도로비치란 인물로, 그리고 ‘악령’에서는 이미 그러한 모든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 악마적 초인으로써 소녀를 아무런 양심 없이 강간하기까지 하는 스타브로긴이란 인물까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인간은 점차 도덕적인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거의 그 종국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모든 도덕이란 인간의 한계조건을 벗어난 인간들에게 있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딕이라 불리는 히콕, 그리고 페리 스미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딕이란 인물의 경우에는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고전에서도 주인공으로써 전면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지만, 그 주변인물로써 딕과 같은 인간 유형은 자주 등장해왔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추잡한 인간군상의 표상으로써, 그러하기에 우리 자신의 한 얼굴로써, 딕과 같은 인물은 종종 소설 속에서 그 기능을 충실해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페리 스미스와 같은 인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름의 도덕적 관점은 형성하고 있지만, 살인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없고, 그 동기마저 불분명한,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지옥에서 보낸 한 철'과 같은 악마적인 시를 쓴 랭보나 소녀의 강간에 대해 주로 다룬 듯한 '말도로르의 노래'를 쓴 로트레아몽처럼 미치광이 천재이거나 예술가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대중에 포함되는 우리이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미친놈이라고 낙인을 찍으면 되는 것일까? 이 둘 다 아니라면 대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까?

 

 

  'In Cold Blood'에서 작가는 페리 스미스를 다루면서, 중요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맥노튼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더럼 규칙'이다. 먼저, '맥노튼 법칙'이란 정신질환의 증후를 보이는 피고인 범죄자가 도덕적으로는 몰라도 법적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다면, 정신이상을 인정하지 않는 규칙이다. 반대로, '더럼 규칙'은 단순하게 피고가 저지른 불법 행위가 정신병이거나 정신적 손상의 산물이라면 형법적으로는 책임이 없다는 관점이다. 재판 과정에서 페리 스미스의 정신감정을 맡았던 존스 박사의 경우는 페리 스미스를 '더럼 규칙'의 관점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렇지만 판사와 다른 모든 배심원들은 페리 스미스를 '맥노튼 법칙'에 의해 규정짓고, 사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법칙 모두 더 이상 어떤 도덕적인 잣대나 양심적인 화두에 대해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우리 시대에 한 인간에 대한 판단은 더 이상 도덕적인 화두가 아니라, 매우 심리적이거나 법적인 문제로 이전했음을 이 글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글속에서 저자는 많은 부분 페리 스미스의 성장과정과 그에 따른 나름의 도덕적 가치관을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살인의 심리적 인과과정은 감춰져 있다. 그냥 갑자기 페리 스미스는 자기 삶에서 이제껏 누구보다 친절하게 대했던 느낌을 준 클러터 씨를 살해한다. 그것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물론, 글속에선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하나는 페리 스미스의 정신상태가 이중으로 분열되어, 살인하고 있는 자아와 생각하는 자아가 동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말만 많고 허세 가득한 겁쟁이 딕에게 진짜 사나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누군가에 의해 어설프게 심리가 분석되어져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설명 다 페리 스미스의 살인의 인과과정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설령 그렇게 설명이 된다하더라도, 이후에 등장하는 앤드루스와 같은 인물 유형에겐 이러한 두 가지 심리분석은 적용조차도 될 수가 없다. 평소에 모범생으로 살던 뚱뚱보 앤디(앤드루스의 애칭)가 자신의 부모형제를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하리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마치 파리를 죽이는 것과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것이 똑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앤디의 정신 상태에 대해 그 누가 쉽게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이 문제에 대해 정신분열의 문제로 돌려놓고, 모든 도덕적인 책임을 심리적 문제로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소설 속에선 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도덕 대신 법의 문제로 환치시킨다. 왜냐하면 '신'이란 절대적인 선 대신 다양한 선과 가치관을 인정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절대적인 도덕적인 잣대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도덕이란 문제는 이제 개인의 문제일 뿐, 더 이상 사회적 문제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일반적 함의가 담긴 도덕의 잣대를 법이란 틀에 담아 대신 활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페리 스미스와 앤드루스는 '맥노튼 법칙'과 '더럼 규칙'에 의해서 규정지어질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총체적인 삶의 자리를 다루고 고민하는 문학이란 자리에서도 이 규칙이 통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 질문은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질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본연적인 존재 성찰에 있어서 악의 문제는 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하기에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치열하게 다루어져야만 하며, 그에 따른 새로운 질문들이 끊임없이 야기되어야만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제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써 정착된 범죄심리란 장르의 소설이 거의 추리소설이란 틀로 고착화되는 경향은 다소 안타까운 현상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이런 장르의 거의 초기 형태라 말할 수 있는 이 글만 보아도 벌써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글보다는 더욱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통찰하고, 그 저변에 깔린 비인간성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아니 고민하는 소설들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비록 도덕의 잣대도 뭣도 다 사라진 시대라 할지라도, 그 화두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되새겨봐야 하는 것 아닐까? 아직도 나는 그런 소설들에 대한 기대의 끈들을, 미련들을 포기하지 못하고서, 이렇게 자꾸만 되물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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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야기 - 2015년 제3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숨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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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이야기 - 아프고 느린, 그래서 어쩌면 너무 오래된 접근방식에 대한 의문

 

 

  저자가 글속에서 밝힌 대로 뿌리라는 오브제가 지닌 한계 때문이었을까? 글속 화자의 남자친구의 뿌리에 대한 깊은 천착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처음 쓰일 때부터 일정부분 어느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예정된 부분이 있었다. 뿌리를 통째로 뽑힌 어느 한 인간의 자아성찰적인 고백과 그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뿌리 찾기, 이 글은 이렇게 두 남녀의 뿌리라는 존재 찾기의 작업을 실제적인 뿌리를 사용한 설치미술 이야기로 오롯하게 풀어내고 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글속 남자주인공이 거대하고 무거운 뿌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수십 개의 못을 박고, 촛농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처럼 아릿하고 느리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방식이 뿌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글을 읽는 내내 이러한 방식에 대해 구태의연하다고, 그래서 무언가 아쉽다고 나는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여기엔 내 개인적인 존재방식에 대한 다른 철학적 접근방식과 선입견이 작용한 점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 글을 온전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글을 내 나름대로 재구성해본 후, 읽는 동안 떠올렸던 내 개인의 뿌리의 접근방식과 대비하여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먼저, 글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저자의 뿌리를 묘사하는 세밀한 방식이었다. 마치 실제로 뿌리를 마주대하고 있는 착각이 일게끔 김 숨 작가는 뿌리에 대한 묘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던 부분은 거의 첫 서두에 나오는 복숭아나무 뿌리에 관한 묘사이다. 사람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모나리자의 얼굴 표정과 비교하면서, 복숭아나무 뿌리에 빗댄 인간 감정의 복잡성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을 처음부터 빠져들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자국 나아가, 포도나무 뿌리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천근성을 지닌 뿌리에 대해 접근한다. 천근성을 지닌 뿌리는 깊게 뿌리를 내리는 심근성의 뿌리와 달리 넓게 퍼지는 뿌리를 의미한다. 즉, 어떤 면에서 언제든지 쉽게 뽑힐 수 있는 존재의 불안정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 글속 화자와 그리고 그 남자친구와도 같이. 물론, 어떤 면에서 집요하게 뿌리에 집착하는 글속 주인공의 남자친구는 심근성의 뿌리의 특질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고아였기에, 태생부터 뿌리가 뽑혀진 인간이 지닌 안정에 대한 강박을 오히려 더 강조하여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즉,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글속 화자보다 오히려 훨씬 더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인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속 천근성의 특질을 지닌 포도나무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남자친구 그리고 글속 화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결국, 글속 화자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 때 종군위안부가 됨으로써 원치 않게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통째로 뽑힌 고모할머니의 손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손금은 남자친구의 포도나무 뿌리 작품에 ‘남귀덕’이란 고모할머니 이름으로 고스란히 되살아나, 그녀와 남자친구를 정신적으로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은 뿌리라는 오브제와 글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잘 맞물려진 구성과 의미를 갖춘 글로 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내 개인의 의문은 서두에도 밝혔지만, 그 접근방식에 있어서의 구태의연함이다. 즉, 또 다른 접근방식들에 대한 내 개인적 질문들이다.

 

 

  첫째로, 뿌리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읽는 동안 내 머리에 스친 생각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을 읽었을 때 알게 된 덩이식물의 뿌리에 관한 이야기였다. 덩이식물은 감자와 고구마와 같은 종류의 식물들로 나무들과 달리, 따로 줄기와 뿌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즉, 감자나 고무나 그 자체가 뿌리이면서 동시에 줄기이고 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 식물들의 또 다른 특징은 나무 한 그루에 뿌리 하나 줄기 하나라는 방식으로 따로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하는 나무와는 달리, 덩이라는 그 말 자체가 일컫듯이 뿌리가 수평적으로 엉켜 하나의 군집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식물들을 의미한다. 즉, 감자와 고구마는 뿌리 하나에 수십 개의 감자와 고구마들이 뒤엉켜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뿌리에 대한 개념은 깨지게 된다. 왜냐하면 뿌리가 더 이상 존재의 근원을 찾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표현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선 더 이상 뿌리에 대한 물음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덩이식물이라는 한정적인 존재방식의 이야기이기에, 극단적인 설정이다. 그렇지만 뿌리에 대한 천착을 저자가 글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면, 심근성과 천근성이란 뿌리라는 설정보다 더 근원적인 이런 접근방식에도 물음을 가져야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본다.

 

 

  두 번째는, 포도나무 뿌리라는 대상이었기에 글을 읽는 동안 떨쳐내기 힘들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들이었다. 무엇이냐면, 나무의 뿌리가 아닌 잘린 가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사실, 신학생이었기에 신학을 포기하는데 있어 나는 내 나름의 화두와 이유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내가 찾았던 것은 성서에서 나온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에서였다. 성서에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이기에 그 줄기에 접붙여지지 않은 가지는 말라비틀어질 것이라고, 그 때문에 잘려서 불태워질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길로 가기를 거부하는 이라면 과연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게 될까? 내 경우엔 줄기가 아닌, 말라비틀어지고 잘려서 불태워질 가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내 자신이 너무나도 말라비틀어져, 그 이유로 목마른 가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까닭으로 잘리는 가지는 나무 전체가 말라비틀어지지 않게끔 하는 희생의 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의 제물로 불타오르는 표징의 불꽃은 참 포도나무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생생한 증거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지극히 모순이고 역설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러한 자기 부인이라는 모순적인 자기 정체성의 논리로 자아를 구축한 내게 있어서, 뿌리에 대한 이 글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지점이 많았다. 왜 그토록 집요하게 뿌리에게만 집착한단 말인가? 잘리고 버려진 줄기와 가지는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란 말인가? 물론, 이 글이 처음부터 천근성이란 뿌리의 특질을 통해 쉽게 흔들리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쓴 글이기에, 이러한 물음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와 같이 너무나도 다른 물음의 전제를 지닌 인간에게 있어선, 이 글의 그러한 점들이 너무나 구태의연하게만 느껴졌다. 만약 폭을 조금 더 넓혀 나 같은 인간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거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자꾸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전체적으로 이 글에 대한 평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매우 잘 쓴 글이고, 잘 짜인 글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뿌리라는 문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무겁다. 그 이유로 늘 한 가지 방식으로 정형화되어 접근되어졌고, 질문이 던져져 왔다. 사실, 뿌리란 문제를 어떻게 쉬 가볍게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조금 더 다양한 방식과 물음들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그러한 방식이 글을 방만하고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하여, 어쩔 수 없이 정공법을 택했다면, 최소한 남녀 주인공의 다소 신파적인 설정은 피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뿌리의 문제로 재고해볼 수 있도록... 아니면 뿌리 오브제 그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하여, 자연스럽게 우리들이 우리 자신의 뿌리의 문제로 환기하여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은 어땠을까? 잘 쓴 글이고, 좋은 글이었기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아, 딴지 아닌 딴지를 자꾸 걸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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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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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 순수한 사랑의 원형에 대한 고찰

 

 

 

 한국 문학에 있어서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게 있어서, 박범신 작가의 ‘은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노년의 순수한 사랑에 대한 욕구에 대한 고민 앞에서 마치 내 자신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고, 때문에 나는 ‘은교’에 대한 품평을 쓰면서 내 사랑에 대한 갈망과 음심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거의 텍스트의 맥락과 관계도 없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이후 박범신 작가의 다른 작품을 특별히 찾아본 적은 없다. 어쩌면 이번 ‘소소한 풍경’의 경우에도, 모임에서 연말행사로 도서교환 이벤트를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제비뽑기로 ‘소소한 풍경’을 뽑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박범신 작가의 최근작인 이 책을 굳이 사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사실 언제나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들에 애당초 무관심한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박범신 작가의 경우는 ‘은교’에 대한 강렬한 기억 때문에, ‘소소한 풍경’이 제비뽑기로 뽑혔을 때 내심 만족스러운 기분이었고, 그 때문인지 쉽게 다가설 수가 있었다.

 

 

 처음 이야기는 소설가이자 전직교수였던 저자에게 옛 제자인 ㄱ으로부터 뜬금없이 온 전화통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웬 생뚱맞은 인사말인가? 거의 10년 만에 전화해서 이게 어디 꺼낼 법한 대화인가? 게다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라니? 너무 끔찍하여 상상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렇지만 저자는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이야기에 어떤 홀림을 느낀다.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는 곧 저자가 아닌, 저자의 제자 ㄱ으로 넘어간다.

 

 

 ㄱ은 저자인 소설가의 제자 중 특이한 제자였다. 저자가 기억하는 그녀의 소설 ‘우물’은 말 그대로 몽환의 덩어리였다. 때문에 합평 시간에 독설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소설에 대한 동기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단답형일 뿐, 도통 소통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소설을 쓰는 것보다는 젊은 시절 내내 한 남자에게만 골몰했다. 남자1이라는 존재, ㄱ에게 있어 남자1은 반짝이는 청춘의 모든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그와 그녀 자신만 남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불우했던 그녀의 유년시절의 기억인 오빠와 소녀시절의 기억인 아버지란 거대한 존재를 그녀는 그렇게 남자1을 통해 모두 상쇄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랑이 지속될 순 없는 법이다. 아니, 연애라는 관계에서 결혼이라는 독점과 소유욕이 지배하는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면, 젊은 날 믿었던 모든 사랑이라는 감정의 허울은 지워지고, 결국엔 남는 것은 상처뿐인지도 모른다. 최소한 ㄱ에게는 그랬다. 자신의 아버지와의 유년의 고리인 선인장을 남자1이 싫다고 말하는 순간, 그 모든 젊은 날의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어찌 그녀가 예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 믿었던 남자1이 자신을 그저 소유하고 독점하기 위해 안달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청춘의 찬란한 봄날 어떻게 미리 감지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남자1은 그녀가 꿈꾸던 모든 사랑을 짓밟고 능욕해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남자1과 ㄱ의 관계는 끝이 난다. 그렇게 남자1과 이혼하게 된 후 ㄱ은 다시 그녀의 유년의 장소였던, 오빠-아버지-어머니가 같은 절벽으로 떨어졌던, 그래서 도망쳤던, 구소소로 되돌아온다. 그곳은 그녀에게 있어선 오빠-아버지-어머니란 이름의 묘지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그곳으로 되돌아간 것일까? 그 묘지에서 스스로 옛집에 혼자 살면서 마치 스스로에게 유배라는 형벌이라도 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도리어 그러한 유배생활이, 그러한 그녀 스스로의 감금이, 혼자라는 그 삶이, 그녀는 왜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혼자 사니 참 좋다고. 하지만 그녀는 곧 동네 근방에서 물구나무를 하루 종일 서고 있는 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어느새 ㄱ은 ㄴ에게 물구나무서기론 죽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서 그녀는 말한다. 둘이 사니 더 좋다고. 왜일까? 그녀가 남자1에게서 받은 상처를 ㄴ에게서 받지 않게 되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미리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남자1과 함께 살면서 찔린 가시는 그녀 손가락을 꿰뚫고 들어가 영원히 각인될 상처가 되었지만, ㄴ에게는 그 가시가 속으로 감춰져 있었음을 어떻게 그녀는 감지할 수 있었을까? 그저 마치 모든 운명처럼, 예정처럼, 모두 우연에 기인한 탓일까? 아니면 서로를 향한 홀림이었을까? 결국, 둘은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ㄴ은 묘지 같은 그녀의 터전에 낙엽을 쓸고, 지붕을 수선한 후, 샘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달 동안 그 둘은 서로가 하나가 되는 깊은 관계를 갖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섹스란 말로 표현하기엔 너무나 그 언어가 갖는 의미가 너무 한정적이다. 아니, 그것에 대한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ㄱ은 스스로 ㄴ과의 그 행위를 하나의 ‘덩어리’라 규정짓는다. 그리고 그런 그 둘의 삶에 ㄷ이 어느 날 자기 몸채만한 큰 가방을 들고 찾아온다. ㄱ은 또 말한다. 셋이 사니 진짜 좋다고. 왜 그랬을까? ㄱ과 ㄴ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절정에 이르는 그 순간에 ㄷ이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을 왜 말리지 않았을까? 아니, 전혀 당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둘의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ㄷ을 그들의 품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ㄱ과 ㄴ 그 둘에게, ‘자기들끼리만, 너무해요!’란 ㄷ의 외침이 팡파르이고 종소리가 될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누군가 함께 향유하고 있는 도락에, 특히 성적인 도락에, 다른 누군가가 저와 같은 소리를 한다면, 그것은 외마디 비명이거나 혹 지탄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 외마디 비명에 놀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른 이를 쫓아내거나 소외시키지 않아 왔던가? 그런데 ㄱ과 ㄴ은 어떻게 ㄷ의 그 소리를 팡파르와 종소리와 같은 울림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하나가 되어 더 큰 원을 그리고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이것이 일반적인 현실에서 가능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의 그 다음 삶은 또 어떠했던가? 너무 행복해서 갑자기 어느 날 연탄가스로 함께 공동자살을 꿈꿨던 ㄷ, 그리고 어느 날 그 둘로부터 도망치려했던 ㄴ, 그리고 마지막 절정의 순간 날개를 달아 우물 속으로 추락해버린 ㄴ!!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ㄴ이 ㄱ의 집으로 들어와 샘을 파기 시작한 그 기점으로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ㄱ과 ㄴ이 ‘덩어리’가 되고, ㄷ이 또 다시 들어가 셋이 함께 ‘덩어리’가 되어, 마지막 절정으로 치닫기까지. ㄱ의 묘지에 샘이란 생명을 남겨두고서, 자신은 절정 가운데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샘으로 날아 들어간 ㄴ, 그렇지만 그 꼭짓점엔 ㄴ의 날개에 버튼을 눌러줄 ㄷ이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내 개인적으론 이곳에서 ㄷ의 노래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네.’ 이 노래가사처럼 평생 동안 심장에 남겨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겨울 그 셋이 함께 누린 열락의 세계는 이생이라는 생애에서는 죽음이라는 절정에 들어서지 않고서는 담보되지 않는 불가능이기 때문일까?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우물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ㄴ의 등을 ㄷ이 꼭 누르는 그 순간, 이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실상 끝나버린다. 그렇지만 데스마스크로 되살아난 ㄴ은 마치 불멸의 사랑의 증표처럼 남아, ㄱ과 ㄴ의 삶에 끝없이 솟아오르는 샘의 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해 본다.

 

 

  사실, 이야기를 나름 재구성해보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재구성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ㄱ의 관점에서 소설의 전반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에는 광주혁명에서 죽은 형과 아버지를 가슴 속에 가시로 숨긴 ㄴ의 이야기도 없고, 북한에서 어머니와 오빠와 넘어와 어린 나이에 중국인 사씨에게 능욕당하고 오빠를 뺏긴 ㄷ의 가시 이야기도 없다. 그렇지만 애초에 이 소설이 소설가 자신의 말대로 서사가 없는 소설을 지향했던 이유로 서사를 잡을 수 없는 까닭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서사를 중심으로 탄탄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소설이 아닌, ㄱ과 ㄴ, 그리고 ㄷ이 완전하게 합일되는 순간인, ㄴ이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그 순간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이다. 즉, 그 순간에 대한 묘사 그 자체로 완성을 구가하고자 쓴 소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하기에 처음에 다 읽고서 나는 무언가 아련하고 먹먹한데 그 감정을 표현할 길이 당최 없었다. 그리고 품평을 하기 위해 글의 서사를 떠올려보려 했을 때도 전혀 서사 자체가 떠오르지 않고, 그 절정의 장면만 떠올라, 다시 발췌독으로 ㄱ,ㄴ,ㄷ에 대한 개인적 서사를 다시 읽어야만 했다. 아니, 거의 다시 내용을 훑어야만 했다. 대체 왜일까? 왜 쉽사리 나는 처음에 읽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을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먹먹한 감동을 받았던 것일까? 그리고 왜 읽은 지 한 달도 채 안된 소설의 모든 서사를 깡그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오직 그 절정만을 기억하게 된 것일까? 지금 이 순간도 이 기묘한 현상을 설명하기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최대한 내 정직성을 담보로 한 내 마음속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지금부터 설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내 마음의 내밀한 소리를 듣기 전, 나는 이 소설이 분명 호불호가 분명하게 갈릴 거라는 예상을 가져본다. 사실, 줄거리를 재구성함에 있어서도 나는 내내 의문투성이이었다. 그래서 거의 내용의 재구성 전반이 질문형으로 되어있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적 품평 글쓰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많은 의문형과 질문형으로 줄거리 자체를 재구성할 정도는 아니다. 즉, 그만큼 내 개인에게도 이 소설의 지향점들은 도무지 와 닿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소설의 인과구성의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거의 깡그리 그 체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만큼 많은 우연과 몽환으로 점철되어져 있다. 게다가 사회 상식선에서 남자 한 명과 여자 둘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난감하다. 물론, 이보다 더한 성적인 실험을 하는 소설도 많이 봐왔기 때문에 이 행위 묘사 자체에 대한 도덕적인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이유로 정말 야하게 이 행위들을 묘사했다면, 나는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엔 저자 표현대로 단순히 섹스라고 표현되는 단어로 담기엔 한정적인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의 표현방식대로 일단 ‘덩어리’라고 하자. 그런데 그 ‘덩어리 됨’이 왜 둘에서 셋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둘에서 셋으로 확장이 되어 원이 되어간다면, 셋에서 넷, 넷에서 다섯으로 확장되어가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물론, 소설이 점점 그렇게 확장되어 가다보면, 가뜩이나 서사도 없는데, 점점 더 사공이 많아져 산으로 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 소설이 셋으로 확장된 관계가 넷에서 다섯으로 확장되어도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소설이라는 점을 굳이 상기시키고 싶어서였다. 즉, 이 소설은 관계에 대한 소설이란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 중에서도 아마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둘이 아닌 셋, 넷, 다섯으로 확장되어가는 덩어리 같은 사랑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소설 가운데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는 가시이다. 특히, 저자는 ㄱ,ㄴ,ㄷ, 이렇게 세 인물을 표현함에 있어서 가시를 안으로 숨긴 선인장 비유를 들고 있다. 그리고 굳이 상징성을 찾자면, ㄱ은 아버지-오빠-남자1로 이어지는 남자에 대한 가시, ㄴ은 광주혁명에서 비롯된 아버지-형이라는 가시, ㄷ은 북한에서 넘어왔다는 가시와 더불어 자신을 능욕한 것도 모자라 오빠를 공안에 팔아넘긴 중국인 사씨를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가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이 가시들이 이 소설에서 굳이 꼽자면 서사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뭐랄까? 가시들 자체는 어떤 면에서 진부한 면이 있다. 저자가 굳이 ㄱ이라는 축을 통해 (그 축이 아마도 남자로 대변되는 모든 폭력의 가시를 숨긴 우리를 대변하고 있으리라 추정해보지만 여하튼), ㄴ의 광주혁명의 가시와 ㄷ의 북한이라는 가시까지 하나로 덩어리져 품어보려 했다고 한정짓는다면, 이 소설은 그냥 일종의 풍유적 상징성을 지닌 사회소설로 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이 지점에 대해 내 개인이 부인하고 싶은 의도는 없다. 다만, 내 개인이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감에 있어서는 이면에 숨겨진 이러한 코드가 드러나기엔, 이 소설이 너무 소설의 절정의 한 순간 장면으로 집약되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냥 도무지 사회적 소설로 읽히지가 않았다. 실상, 내가 소설의 내용을 재구성하려 했을 때도 그 때문인지 ㄱ,ㄴ,ㄷ의 어떤 가시의 내용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가시가 안으로 숨겨져 있다는 강렬한 기억과 더불어, 그 가시들이 응축되었다 폭발되는 지점으로써, 날개로 돋아나는 장면인 ㄴ의 우물에서의 추락장면이 내내 떠올랐을 뿐이다. 왜 ㄴ은 우물 안에 떨어짐으로써 남겨진 ㄱ,ㄷ의 샘이 되어야만 했던 것일까? 왜 그 순간을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다른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셋으로 확장된 사랑이란 게 대체 이 세상에서 가능한 사랑이란 말인가?

 

 

  내 개인적으로 박범신 작가가 종교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사랑에 관해 둘이 아닌 셋이어야만 완벽한 사랑을 이루고, 그 중에서도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그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사상과 그리스도 사상에 입각하여 이 소설이 쓰였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하기에 그저 순수하게 문학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바라보고 싶다. 일단, 소설이라는 공간 하에서는 어떤 실험도 가능하다는, 그러하기에 어떤 사랑도 가능하다는,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가능성은 작가의 바람이며, 그 바람은 독자에게로 흘러들어가는 물줄기이며 샘물이라는, 이러한 관점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고 싶다. 그렇다면 내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저자는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늙음’의 미학이란 관점 하에서 사랑을 재해석하여, 욕망과 소유로부터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근원적인 사랑의 형태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둘이 아닌 셋, 넷으로 확장될 수 있는 ‘덩어리 되어감’의 사랑에 대해선 일정부분 수긍할 수 있다 치더라도, 왜 누군가의 희생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일까? 굳이, 사랑의 불멸에 대해 말하진 않더라도, 무언가 더 오래 지속 가능한 사랑에 대해 고찰할 필요는 없었을까? ‘자기들끼리만, 너무해!’란 소설 속 대사로 ‘사랑의 관계가 단순히 둘이란 법은 없다!’하고 팡파르와 종소리를 울린 것처럼, 사랑의 시간도 단순히 영속이거나 순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닌 다변적 사고로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은 없었을까? 꼭 순간으로 완성되는 사랑만이 심장 속에 남아 잊을 수 없는 걸까? 우리 생이란 한계 때문에? 하지만 이런 숱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나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침표가 없는 여운은 없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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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다시 돌아보는 신춘등단에 대한 갈망

 

 

  이번 신춘문예는 다른 시기와 남다른 점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거의 처음으로 본격적인 준비를 했다는 점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 때문에 그전엔 잘 보지도 않았던 각 신춘문예의 작품들도 다시 들춰보게 되고, 신춘문예의 스타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뒤져보아도 내 개인적 취향과 맞아 들어가는 신춘문예등단 글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이유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내 개인적인 코드가 일반 대중적 코드와 다소간의 거리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아울러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해야 할까? 작년에 대충 10편 정도의 중단편을 습작했지만, 대다수가 고름 짜기에 급급했던 작품이라, 딱히 낼만한 작품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엔 그냥 각 신문사에서 요구하는 단편 매수와 일치하는 작품들을 그냥 제출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사실, 신춘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엔 이번엔 나도 신춘 스타일에 맞는 글을 꼭 써보리라 다짐도 했건만, 결국 되돌이표 곡조가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결국, 내가 아직 내 자아를 온전히 다 걷어내지 못하고, 오만한 까닭일까? 아니면, 그저 실력이 안 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걸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읽으면서 대충 내 생각들을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서 나는 일단은 이번 신춘문예 각 작품들에 대한 내 개인적인 코멘트를 정리를 한 후, 다시 개인적 방향에 대해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한다.

 

  처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수족관’과 ‘아돌프와 알버트의 시간’을 읽고서, 내가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 뭐 그런 거였다. 이게 왜? 이런 작품들이 왜? 물론, 나는 지금 이 작품들이 내 개인의 작품보다 더 나쁘거나 안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나 뻔한 도식과 정형화된 공식이 소설 속에 눈에 보이게 드러남에도 뽑힌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이야기다. ‘아돌프와 알버트의 시간’의 경우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진지성은 눈에 보였다. 그렇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란 소재와 더불어, ‘특이 언어’에 대한 소재의 특이성을 제외하고는 내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정형화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심사평의 언어의 틈새에서 오는 다의적인 울림이라는 거창한 이야기가 당최 와 닿지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수족관’은 사실 처음엔 이야기에 몰입감이 있었다. 사건의 특이성이 주는 긴장감과 많은 대사들이 가독성을 높였을 거라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너무 허무한 느낌이었다. 이 역시 그냥 뻔한 하루의 일상을 그냥 다른 소재로 풀어낸 느낌밖에 달리 내겐 전해지지가 않았다. 만약 서두부터 어떤 감춰진 시적인 복선이 있는 상태에서 결말 부분의 아침 해가 솟아오르는 희망의 전초로써 반전이었다면 개인적으로 다르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많은 대사와 서사로 풀어간 이 글에서 마지막에 뜬금없는 시적인 반전은 어쩐지 내겐 작위적인 설정으로만 비춰졌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읽은 ‘얼룩, 주머니, 수염’은 읽는 내내 재미가 있긴 있었다. 무엇보다 작가가 캐릭터를 살리는데 재주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증과 성격장애를 동시에 가진 여주인공 그리고 선 연구원에서 선전부장 비슷한 걸 하고 있는 전직가수의 이야기들이 기묘하지만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빈티지, 복고라는 코드가 더해져 글이 마치 최근에 인기 있는 일본소설 같다는 인상도 받았다. 또, 이런 측면들 때문에 너무 많은 소재와 특이한 캐릭터에서 오는 개연성의 부재가 있을 법도 한데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아마 이는 글의 화자가 나름 중립을 지키려 노력을 했기 때문이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여주인공과 같은 내내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특이한 캐릭터가 주인공과 물리적 거리가 발생했을 때 이별하는 것도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종적인 느낌은 내가 항상 최근에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일본소설을 읽고 나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그래서 대체 뭐? 어쩌라고? 물론, 지금 이 어휘가 다소 과격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저 현상을 보여주고, 거기에서 오는 허무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나열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다시금 자문해본다. 그 이면에 무언가 다른 감동이나 깨달음이라는 가장 흔한 문학적인 공식은 논외로 치더라도, 최소한 허탈한 감정이 들게끔 만들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나중에 내용을 다시 떠올려본 적도, 또 떠올린다 해도 기억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글쓰기 방식은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네 번째로 읽은 작품은 문화일보의 ‘유령의 2층 침대’이다. 이 작품은 일단 읽을 때 매우 재밌었다. 이것은 아마도 내 개인적인 코드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가장 큰 영향일 것이다. 내면의 심리를 다루고, 거침없이 쏟아내는 방식, 그리고 좁은 공간에서 밀도 있게 풀어내는 방식... 뭐 대충 이런 거, 이런 종류의 소설을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물론, 이 글이 밀도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함구하고 싶다. 그러기엔 지면도 짧았고, 어떤 시적 형상화 작업도 없었고, 아니 너무 가감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 게 이 글의 매력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깔끔함이 있었다는 느낌도 있고, 속도 시원하고. 다만, 조금 더 지면이 할애되어 주인공의 더욱 내밀한 심리와 주인공의 콤플렉스 대상인 ‘휘’의 캐릭터가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어졌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신춘이라는 정형화된 틀에선 그것은 불가능하기에, 이 정도면 내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괜찮은 작품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지금부터는 내가 다소 제대로 이야기해 볼 작품인 ‘선긋기’와 ‘1교시 언어이해’에 대해 살펴보고 싶다. 일단, 두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두 작품이 한 사람에게서 나온 작품임에 개인적으로 나는 놀랐다. 사실은 처음에 ‘1교시 언어이해’를 먼저 읽었는데, 신선한 기법과 소재에도 노련하게 녹아있는 삶의 이야기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신춘에서 이런 작품도 나오네, 뭐 이런? 그리고 ‘선긋기’의 경우에는 읽기 전, 같은 작가 작품이지만 ‘1교시 언어이해’보다는 덜 하다는 평을 누군가에게서 듣고 읽었다. 그렇지만 읽는 내내 ‘어, 이건 뭐지? 역시, 뭔가 예사롭지 않은데.’하는 생각들을 내내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두 작품은 따로 뜯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먼저, ‘1교시 언어이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크게 세 가지 문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문제는 나름 만족하고 지내던 직장 내에서 주인공이 글속의 등장인물 중 ‘우애경’이란 캐릭터와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 갈등은 다소 미묘한 부분이 있다. 일단, 주인공은 직장 내에서 실무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 점에 대해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자긍심이 우애경이란 인물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히게 된다. 하지만 우애경이란 인물은 주인공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자긍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일단, 좋은 학벌과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학벌은 자신의 직속상사인 유부장과의 파벌을 형성한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두 번째 문제에서 발생하는 회사 내 컴퓨터의 야동 팝업 사건으로 인해 우애경은 역으로 그녀의 예쁜 외모에서 오는 타인과의 거리감을 좁히는데 성공한다. 즉, 직장 내에서 인맥과 관계란 측면에서 주인공보다 한 발짝 더 우위에 있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인해, 주인공은 회사 내에서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러한 고립감을 김소진의 소설 ‘개흘레꾼’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 개인적으로 다소 처음에 읽을 때 당혹스러웠다. 일단, 김소진의 ‘개흘레꾼’을 읽어보질 않아, 당최 소설 내에서 이야기하는 ‘테제’와 ‘안티테제’가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헤겔이 이야기하는 역사적 변증법인가하는 생각 정도를 했다. 하지만 글에 대해 분석해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김소진의 ‘개흘레꾼’을 그냥 안 읽고 넘어가기엔, 내 성격이 좋게 포장해서 너무 완벽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해야 할까? 결국, 그 까닭에 ‘개흘레꾼’을 읽게 되었고, 그것은 내 성격의 기인한 연유이든 어떻든 간에, 매우 옳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이 글의 경우 김소진의 ‘개흘레꾼’의 내용을 모르고선, 제대로 독해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 내에선 공지영의 ‘부활 무렵’이라든가, 흐와스코란 사람의 소설 이야기가 또 다른 중요한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키워드는 글 내에서 충분히 정보제공을 하고 있기에, 굳이 그 글을 찾아 읽어보지 않더라도, 대충 글을 독해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김소진의 ‘개흘레꾼’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일단, 정보제공도 충분치 않은데다, 글 전반부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사용되고 있다. 기실, 그렇기 때문에 글속에 등장하는 ‘테제’와 ‘안티테제’를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테제’와 ‘안티테제’는 헤겔이 말하는 역사적 변증법이 아닌, 자기 정체성에 관한 ‘테제’와 ‘안티테제’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면, 김소진의 ‘개흘레꾼’ 소설 내에서 등장하는 ‘내 아버지는 종놈이었다.’는 일제 강점 하라는 인식의 테제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아니면, ‘내 아버지는 남로당이었다’는 한반도 분단이라는 상황 하에 인식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하지만 김소진의 ‘개흘레꾼’의 주인공이 이도 저도 아니듯, 그리고 그 때문에 다소간의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처럼, 이 글속에서 주인공은 삶의 터전인 직장 내에서 자신의 ‘테제’와 ‘안티테제’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내내 고민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두 번째 문제에서 내내 우애경과 더불어 유부장과 갈등을 겪다, 그녀 자신이 그토록 찾던 자신만의 ‘테제’와 ‘안티테제’의 사이, 즉 김소진에게 있어선 ‘나의 아버지는 개흘레꾼이었다.’를 자신의 회사 대표이사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테제’와 ‘안티테제’란 사이가 정말 규정짓기 힘든 애매모호한 장소이기 때문일까? 우애경과 유부장에게 시달리면서도 혼자 회사에 남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녀를 격려하며 대표이사가 툭툭 치고 간 부분은 가슴도 옆구리도 아닌, 무언가 만져져서는 안 될 부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민감한 부분은 이 글의 세 번째 문제에서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애시당초, 대표이사는 주인공의 내면적인 갈등에도, 그리고 주인공이 피고름을 짜서 만들어내는 문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그녀의 몸에만 관심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결국, 회사 내에서 자신의 ‘테제’도 ‘안티테제’도,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테제와 안티테제 사이’, 자신이 진정으로 적을 둘 수 있는 어떤 곳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이라는 영영 결코 풀 수 없는 문제를 끝으로 남겨두며 쓸쓸하게 회사를 떠난다.

 

  일단, 이 글에 대해 칭찬하고 싶은 점은 가장 정형화된 기법을 탈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온전하게 삶의 원형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형식을 추구하는 경우, 형식이라는 탈피를 위해 무리수를 띄워, 일상의 삶과 멀어지게 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대중과도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글의 경우에는 다소간의 형식적인 파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하게 일상의 삶을 그려냈고, 단순히 그려낸 데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되돌아보게끔 만드는 울림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개인적으로 굳이 김소진의 ‘개흘레꾼’을 찾아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일반적인 대중이, 나와 같이 애초에 ‘개흘레꾼’을 몰랐던 대중이, 과연 이 소설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이것은 숨겨진 코드로 이해될 수는 있다. 글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 숨겨진 미덕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중의 입장에서 그러한 코드를 일부러 찾아 읽는 일은 흔하진 않다. 때문에 이러한 숨겨진 코드란 미덕이 역으로 글의 몰입감에 방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는 점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글에 일부러 김소진의 ‘개흘레꾼’ 이야기를 자잘하게 펼쳐 정보제공을 할 이유는 개인적으로 없었다고 믿어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이 소설이 역으로 ‘개흘레꾼’에게 삼켜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것은 어차피 ‘이 소설의 흐름은 이런 거고, 이렇게 흘러 갈 거야.’라고 스스로 밝히고 들어가는 작업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실 평론가의 몫이고, 독자의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소설 내에서 작가가 김소진의 ‘개흘레꾼’의 보다 정확한 정보제공을 했었다면, 이 소설은 이미 뻔히 예상되는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결론적으로 김소진의 ‘개흘레꾼’과 이 소설의 ‘테제’와 ‘안티테제’는 전혀 다르고, 그 때문에 이 소설 속에선 ‘테제와 안티테제 사이’마저도 부인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만약 너무 명확한 ‘개흘레꾼’에 대한 정보제공이 있었다면, 이러한 결론까지 이르는데 대한 여운이 분명히 약화되었으리라 예상해 본다. 때문에 이 글속에 ‘개흘레꾼’은 분명히 숨겨진 미덕의 코드이다. 다만, 독자의 혼란을 조금 더 배려하여, 다소간의 정보제공은 더 필요한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1교시 언어이해’의 저자였던 이은희 씨의 또 다른 작품 ‘선긋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사실, 이 글은 읽는 내내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었다. 일단, 문체 자체도 까칠한 고등학생 소녀의 심성이 그대로 묻어나있어, 읽는 내내 신경이 긁히고, 역함이 올라오는 걸 참아야 하는 감정을 주인공 화자와 함께 느껴야했다. 그만큼 사실 이 글은 문장과 문체의 힘이 강렬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익숙지 못한 독자들에겐 다소간의 불편한 시선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동시에 이 글 역시, ‘1교시 언어이해’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코드가 숨겨져 있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 무단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투척하는 7층 아줌마, 그리고 주인공 소녀가 그리는 그림들... 아니, 솔직히 나는 이것을 숨겨진 코드라 불려야 할지 모르겠다. 오히려 문학적인 은유에 가깝게 느꼈으니까. 하지만 저자의 강렬한 문장과 문체만큼 도드라진 이 은유들이 처음에 결코 쉽게 읽히진 않았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 대한 소녀의 애착과 부담어린 시선은 다소 진부해보이기도 했고, 7층에서 무단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투척하는 아주머니의 아들 이야기는 다소 뜬금없어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녀는 그녀 자신이 병적일 만큼 예민하고 순수하기에, 모두에게서 소외받고 있는 두 인물에 대한 고통을 자신도 모르게 내내 감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말 부분에 와서야 희미하게 드러난다. 소시지가 기도하는 모습의 그림으로 7층 아주머니의 아들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과 단순히 선을 그어 쌓아 올리는 그림으로 폐지를 리어카에 쌓아올리는 할머니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었는지, 그녀 스스로 얼마나 소외되고 있었는지, 그래서 그녀가 세상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인 그림을 통해 7층 아주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그녀 자신 스스로를 끌어안고 싶었음을, 글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 하는 노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무언가 소통하고픈 마음이 글속에 잘 전달되었기에 내 개인이 다시 숙고해보게 되지 않았나하고 다시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어차피 소통이란 그 자체가 쉽지 않다는 의미에서도 다소간의 어려운 이 은유를 통한 소통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는 생각도 덧붙여 보고 싶다.

 

  2015 신춘문예 등단 작품을 전체적으로 읽은 다음 내 개인이 느낀 바는 이러하다. 일단, 내 개인의 성향이 다소간의 대중적인 코드와 거리가 있다는 점을 다시금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자연 정형화된 신춘 스타일은 내가 쓸 수도 없고, 다가서기도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말로 잘 된 작품, 이은희 씨의 작품들을 보면서는 개인적으로 반성해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어차피 다소 관념적이고, 그 이유로 문학적으로 숨겨진 코드에 대해 미덕으로 보는 내 개인이라면, 그런 종류의 글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 덜 여문 까닭에 내 글들은 그러한 코드도 부족하고, 따라서 당연히 완성도도 떨어진다. 기왕 정파가 아닌 사파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적어도 정파 쪽에서도 인정받을 만한 비기가 있어야 될 텐데, 그렇지 못했던 점들에 대해 되새겨보게 된다. 아니, 나만의 그러한 비기를 앞으로 열심히 갈고 닦아야하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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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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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인 소설은 문학이라 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 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아마 군대를 갓 제대하고서 쯤이었을 것 같다. 대학 신문사에 있던 후배가 문학포럼에 초청을 받았는데, 같이 가자고 제의를 했다. 기성세대 작가인 최인훈, 최인호, 이성복 등을 비롯하여 비평가인 정과리, 당시 인기가 있던 성석제, 유하, 김영하 그리고 신경숙까지 총망라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자리를 갖는 포럼이라고 하였다. 당시 문학에 관해서 그리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문학을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때였기에 나는 흔쾌히 청을 수락하여, 후배와 함께 포럼에 참석하게 되었다. 약 40명의 가까운 작가들이 각자 문학에 관한 자기 생각들을 피력하였고, 때문에 포럼은 장장 3~4시간을 족히 넘어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소설만큼 재치 있게 언변을 펼치던 성석제도 아니었고, 무언가 그 시나 소설의 파격만큼 남달랐던 유하나 김영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말도 너무 못하고, 정말 작가가 맞는지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도 잘 못 드는 여류작가, 바로 신경숙이었다. 원래 여류작가들의 문체를 좋아하였던 나였기에 당시 신경숙의 소설도 두 세권쯤 읽기는 하였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내밀하고 정갈한 문체에 끌렸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작가 신경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그 문학포럼을 통해서였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부끄럽게 하여, 차마 말도 못 하게 만든 것일까? 그런데 어찌하여 그녀의 글속엔 그렇게 자잘자잘 할 말이 많은 건지.......

 

 

  그녀 소설이 누군가의 아류인지 혹은 비평가인 남편의 힘을 빌은 출세인지에 대해선 사실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늘 그녀의 소설 속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그녀 특유의 밖으로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상처이다. 여기 외딴방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녀는 그녀의 상처의 근원지인 쇠스랑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골이 지긋지긋한 소녀, 그래서 어서 서울에 있는 오빠가 서울로 데려가주기를 꿈꾸는 어떤 토속적인 동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소녀, 하지만 쇠스랑을 가장 신경이 밀집되어 있다는 발바닥으로 밟고서도 외마디도 지르지 않는 소녀... 그 쇠스랑을 그녀 집 앞 우물에 내던져버리고서, 이제는 어엿한 중견작가가 되어 살아가는 그녀에게 어느 날 뜻밖의 전화가 온다. ‘하계숙’이란 이름. 어쩌면 그녀에게 있어서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 그래서 소설로도 차마 내뱉을 수 없었던 상처들. 그런데 그 상처가 생생하게 살아서 말을 걸어온 것이다. 왜 나는 존재케 하지 않느냐고?

 

 

  한참 글쓰기에 골몰하던 때, 어느 날 낮에 선잠을 자고서 깨어났다. 그런데 꿈속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어떤 흐느낌만이 남아 내 속에서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를 존재케 해주세요.’ ‘제발, 나를 존재케 해주세요.’ 그 동안 글쓰기를 하나의 배설로써 치부하였던 나였기에, 그 흐느낌은 내게 어떤 공포와도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단 하룻밤의 정사를 꿈꾸고서 낳은 나의 그 사생아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어느 귀퉁이에 내던져 버리고선, 그것을 밀쳐낸 힘으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것들이 내게 자신의 존재를 들이민 것이다. 마치, 수년간 버려져 여기저기를 뒹굴다 어느 사창가 귀퉁이에 겨우 자리 잡은 어린창부가 내게, 내가 마치 자신의 아빠 같다며 달려드는 것처럼. 그리고 서툴렀던 첫 정사에서 들었던, 이런 식이면 임신할지도 모른다는, 어느 여자의 차가운 말이 군대에서 잠 못 드는 밤 연신 떠올랐던 것처럼. 만약, 그럴 리는 없지만 그 어린 창부가 그 정사에서 떼어낸 사생아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도대체 이제 와서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던 그 기억들을 일일이 되물어야 할 까닭이 무엇일까? 그리고 만약 되묻는다면 그것이 내게 있어 하나의 담장 너머의 흐릿한 꽃과 같은 상징으로 여겨지는 글쓰기가 가능할까? 그것은 소설도 그렇다고 수필도 아닌, 하나의 기억에 대한 왜곡이거나 곡해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글쓰기의 존재적인 물음을 회피하고서 글을 쓴다면 그것은 온통 거짓과 가식일 뿐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결국 글쓰기란 그 존재에 대한 응답이거나 대답일 것이다. 또한 그러하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고통스럽고, 그 고통으로 인한 생채기에 메스를 들이미는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깨질이 될지, 아니면 상처를 꿰매고 아물게 하는 작업이 될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다. 글이 끝나긴 전까진.

 

 

  소녀는 소녀의 원대로 서울로 오게 된다. 그리고 공장생활을 하며, 산업근로자를 위한 야간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당시, 노조 간에 갈등이 고조되던 80년대시기에 그녀가 학교를 다니기 위해선 노조를 탈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배반을 의미한다. 이제 열여섯 살 밖에 안 된 소녀에게 그러한 선택은 너무나 가혹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왜 서울에 올라왔던가?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시골에서는 나름 중산층이었던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서울에서 모든 부당한 대우와 삶을 감당해야 하는 여공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겨우 그것을 위해 그녀가 온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작가가 되기 위해서, 언젠가 이룰 그 막연한 꿈을 위해서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녀는 배신이란 각인을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 끔찍한 나날들, 그런 나날 가운데 그녀는 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희재 언니’ 무표정한 작은 얼굴, 무심한 작은 얼굴, 조용한 작은 얼굴... 햇볕같이 표정이 없는 무심한 얼굴, 그렇게 작고 희미한 존재... 어쩌면 그녀는 희재 언니를 통해 그녀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그렇게 힘겨웠던 나날들 그녀들은 ‘그럼’이란 게임을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곤 하였다.

 

 

 난 잠을 자겠어. 사흘 나흘 깨지 않고 푹 자겠어.

 ......그럼.

 동생이 학교 졸업하고 설마 대학 간다고는 안 하겠지, 안 그래?

 ......그럼.

 그래도 가겠다 하면 보내야겠지.

 .....그럼.

 모르는 소리. 이보다 더 일할 수는 없어. 하루는 24시간뿐이니까.

 ......그럼.

 난 이정밖에 할 수 없어.

 ......그럼.

 반장님이 내일쯤은 작업실에 환풍기를 달아주겠지?

 ......그럼.

 이 다음에 마당이 있는 이층집에서 살 수 있을까?

 ......그럼.

 

 

  그럼, 그럼, 그럼....... 마치 자신들의 희미한 존재에 의미를 겨우 부여하는 것처럼 들리는 공명. 그렇게 그녀들은 힘든 시간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럼’이란 게임을 통해 앞으로 더 좋아질 시간들을 함께 하고픈 바람을 노래하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허공에 희미하게 울리던 그 목소리는 결국 사라지게 되고, 우리가 함께 뜨겁게 불렀던 그 희망도, 그 기억도, 그 사람도 결국엔 사라져버리게 된다. ‘희재 언니’는 그렇게 어느 명절 날 시골에 내려가야 한다며 그녀에게 자신의 방을 잠거 줄 것을 부탁하고, 며칠 후 싸늘한 시신이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때 너무 어렸다. 공장에서의 삶도 버거운데 한 존재의 죽음을 감당하기엔 그녀는 너무도 어렸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도망치듯 그 외딴방을 빠져나온다. 다행히도 그녀에게는 든든한 큰오빠가 있다. 마치 그녀를 돌봐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그녀의 큰오빠 덕에 그녀는 무사히 그 시절 그 외딴방을 빠져나온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달라붙어 있는 한 무거운 존재의 그림자를 그녀가 지울 수 있을까? 그녀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 우물 속에 내던진 쇠스랑은 부식되어 우물을 시나브로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 속에서 그녀는 그녀의 희재 언니가 우물 속에 쇠스랑을 건져 올리는 상상을 통해 이야기를 갈무리하려 한다. 그렇지만 결국 그것이 그녀의 존재와 쇠스랑의 존재에 대한 너무 가벼운 대답임을 알기에 그녀는 쉬 글을 끝마치지 못하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 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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