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에 죄책감이 있다. 읽히려면 간결하고 정확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더군다나 프로도 아니라 누군가에게 끝까지 읽힌다는 욕심을 오래 전에 버렸다. 담아야 해서 좀 길다. 평소 쓰던 것보다 더 길다. 이 페이퍼는 좋아하는 작가의 단편 몇 편에 관한 얘기고, 오랜만에 찾아보니 밥 먹으면서 읽어도 시간이 모자랄 엄청난 양의 단편이 있더라는 것과, 이제부터는 일부러라도 종종 읽겠다는 다짐이자, 어쨌든 이런 생각으로 글이 시작되었다는 뭐 그런 얘기.

 

단막극을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다. 목적이 뚜렷했으나 단막극을 본다고 대본을 쓸 수 있을 리 없었고, 영화대본을 들여다본다고 시나리오가 뚝딱 써지는 것도 아니었고, 주구장창 연극을 봐도 희곡이 짠하고 나타날 리 없었다. 왜냐면 그것들은 고스란히 내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법인데 나에게는 하나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패션잡지 에디터가 되기 위해 수 십통의 이력서와 자소서를 우편과 멜로 뿌린 동기는 비로소 연락을 받고 뛸듯이 기뻐하며 간 면접자리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하도 간절히 이력서를 보내기에 얼굴이라도 꼭 한 번 보고 싶었어요. 궁금했거든요. 결과는 낙방. 간절한 것이 곧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서 만난 그는 나를 두고 '쓰잘데기 없는 학과'에 다닌다고도 했었다. 푸핫. 옆에 있던 건축학도 친구가 웃었고 공대를 나온 그도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래, 21세기에 글로만 먹고 살겠다는 건 얼마나 가시방석인가. 부모님에게 못할 짓인가. 자책하진 않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어쨌거나 글은 실재 혹은 실존과 비교하면 정말 안드로메다다. 이 왜곡 많은 (글자의)이미지가 나와 당신 사이에 저질러 놓은 섬은 또 얼마나 넓은가. 사랑한다는 고백이 날아가는 속도는 얼마나 덧없으며 또 불가능한가. 나는 수줍은 대신 말을 잘했다. 글이 되기도 전에 생각이 말로 먼저 튀어나왔다. 지금은 (반만 진심인데)말보다 글을 더 잘썼으면 좋겠다. 글보다는 말이 더 먹히니까 완전히 진심은 아니다. 확신이 들지 않는다. orz

 

어쨌거나 아주 오랜만의 한국문학. 밤새워 읽고 보고서를 작성하던 여러 밤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때의 숭고했던 자세는 앞으로 영영 없을 듯해서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 스물 셋 커피숍에서 데이트 약속을 기다리며 핫초코를 시켜놓고 전자사전을 펴 뜻을 찾아가며 읽던 <혼불>하며(과제였다), 온갖 문예지들 그리고 수상 단편들을 날마다 읽던 추억이 아련하다. 누리는 시간과 해야 할 일들이 당연히 내 것이 아니란 걸, 그땐 왜 몰랐을까.  

 

 

2011년 단 며칠, 부활한 TV문학관 속에 이 작품이 있었다. 광염+소나타=광기 어린 음악을 만드는 예술가 얘기다.

 

 

 

 

 

 

 

 

 

 

 

 

 

 

 

역시 C샤프 단음계로서, 제일곡은 뽑아 먹고, 아다지오에서 시작되는데,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 수평선 위로 넘어가려는 저녁 해, 이러한 온화한 것이 차차 스케르초로 들어가서는 소낙비, 풍랑, 번개질, 무서운 바람 소리, 우레질, 전복되는 배, 곤해서 물에 떨어지는 갈매기, 한번 뒤집어지면서 해일에 쓸려 나가는 동네 사람의 부르짖음-흥분에서 흥분, 광포에서 광포, 야성에서 야성, 온갖 공포와 포학한 광격이 눈앞에 어릿거리는데, 이 늙은 내가 그만 흥분에 못 견디어, 뜻하지 않고 '그만두어 달라'고 고함친 것만으로도 짐작하시겠지요.

 

이 대목은 어떻게 하면 알아들을 수 있지? 음대 갔었다면? C샤프 단음계에서부터 머리에 쥐나기 시작. 피아노를 들으며 이런 감상이 나올 수 있다면 글이 아니라 음악을 해야 마땅하다고 고개 끄덕끄덕. K선생도 좀 멋있는 사람 같다. 여튼 '성난 파도''피의 선율'은 백성수의 비상한 광기와 열정으로 '우연히' 지어진 곡조다. 방화와 살인. 무너져내리는 잿더미와 이름 없는 자를 갈갈이 찢는 것에서 이 세상 모든 영혼을 울리는 음보가 태어났다면, 천재 작곡가(음악가)가 났다고 칭송할 수 있을까. 김동인의 <광염소나타>는 천재성을 지닌 한 남자가 계통적 훈련 아닌 광기로 뽑아낸 음악으로 인해 짙은 예술성을 획득하지만 존재로서의 파멸을 촉진하며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예술품과 예술가의 반비례 관계를 포착하여 진정한 예술가의 위치를 묻는 동시에, 예술은 어디까지 타당화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의 방화는 어머니의 병환 중 지극히 가난해서 병원에 가지 못하자, 약국 카운터에 약사는 없고 돈이 올려져있는 것을 우연히 보고는 그 돈을 훔친 것이 발단이다. 주인에게 잡혀 감방에 6개월을 있을 때 어머니는 아들을 부르며 기어나와 거리에서 죽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외면했던 당시 주인집에 홧김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 성당에서 광기에 휩싸여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K선생의 눈에 띈다. K선생의 백성수 두둔은 사실상 용인될 수 없다. 어떤 가치로도 방화, 시체 강간, 살인 등을 용인할 수 없는 것이 오늘 날의 시각이기도 하지만, 그로인해 설명할 수 없는 흥분과 광기를 갖고 천재적 예술성을 발휘해 어떤 창작물을 만들었더라도, 심지어 살아숨쉬는 예술품을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이 예술품과 예술가를 동일시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가치판단 혹은 문제는 남는다. K선생은 윤리와 도덕의 잣대로 예술가의 천재적 기질을 억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미적 세계관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런 지독한 탐미주의는 자칫 시대/현실 동떨어짐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며,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거나, 꿈에서는 가능하더라도 현실에서는 절대 허용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희곡 시나리오 수업 중 쌤이 제일 많이 언급한 플롯은 공지영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윤대녕의 <천지간>이었다. 가장 많이 읽히는 본보기를 들었던 쌤과 하도 들어서 읽지 않아도 익숙한 느낌이 팽배한 나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독서 미완결 상태로 기억 속에 묻혀있는 두 편이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고 작품이 좋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 섬세한 결이 역시 좋아서 당시 무슨 얘길 하시며 어떤 식으로 언급됐었나 궁금했지만 저질 기억력이 그걸 알려줄 리가 없지. 시험공부의 후유증은 오래 남아 디오니소스(술의 신 바커스)를 위한 제천의식(종교적 행사)에서 시작되었다는 희곡(연극)의 기원만이 엄하게 떠오른다. 나는 연극이란 매체를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지리적 영향일 가능성이 없지 않고, 연극을 보러가면 언제나 좋았다. 살아 움직이는 배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과 호흡하는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늘 가슴뛰었다. 그러니까 이론을 기억하고 있는 건 당시 신나게 공부했었음을 반추하는 거라서, 오랜만에 연극관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작가의 자전적 경향이 강하게 표출된다. 사랑관도 그렇고, 문학에의 열정과 좌절 같은 것들이 그렇다. 하나하나 읽다 나도 모르게 전체를 읽었고, 표제작에 대해서만 말한다.

 

이미지도 없이 이름만 강요하는 것 같네요, 내가.. 어떻게 말이라는 것으로 그를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어느 날 킬리만자로의 눈 덮인 봉우리가 바라다보이는 한 사파리에서 야영 중 불현듯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돌아왔다는 그녀의 이력. 어떤 방랑과 초월, 실현에 대한 호기심이 그녀의 이국생활과 경력 그리고 다시 돌아온 지금을 궁금하게 했기에 찾아갔다. 원래는 1970년대 초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의 주모자였던 권오규란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대치되던 시절, 진리를 한 번 알아버린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벗어나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떠돈다. 이십대의 팔팔한 젊은이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 출소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방문을 두드리는 일련의 세월에 덕지덕지 묻은 상처는 아무리 벗기려 해도 지울 수가 없는 거였다. 아직, 여전히, 이 세상과 저 세상처럼 나와 당신 사이에는 벽이, 섬이 견고하게 둘러쳐진 것일까. 그 집엔 강아지가 있었거든.. 그 강아지는 하루 종일 연못가에 놓인 돌에 코를 박고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강아지가 왜저러느냐고 물었더니 이민자 화백이 대답하데. 강아지요? 아아.. 강아지는 명상을 하는 중이에요. (중략) 무슨 명상이오.. (중략) 글쎄요, 이런 거겠죠. 물속에 고기가 있네..

 

팔십년대의 아들딸들은 달랐다. 감옥에서 이십년 동안 그저 앉아 있던 권오규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난한 가방을 달랑 들고 그림공부를 하러 뉴욕으로 떠나는 이민자의 모습도 보였다. 비밀결사를 다 결성하기도 전에 체포되는 권오규. 그 무렵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민자.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인도를 맨발로 방랑하는 이민자. 감옥에서 일곱 걸음 걷다가 뒤돌아서서 다시 일곱 걸음 걷는 권오규. 아프리카의 눈 엎인 킬리만자로가 보이는 사파리에서 불현듯 그 무엇인가 깨닫는 이민자. 그래도 감옥에 앉아 있는 권오규. 지겹도록 이십년 동안 앉아만 있는 권오규. 무엇을 견디려고, 무엇을 기다리려고 그저 앉아 있는 권오규. 화염병을 들고 뛰던 강선배, 휴지뭉치를 들고 코를 풀며 따라가던 나..

 

여기, 시대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켰던 한 사람이 있다. 나는 누구보다 더 이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십대, 팔십년대가 무섭도록 감흥이 없을 만큼 나도 나이를 먹고 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소설집을 펴면 제일 처음으로 만나는 작품이다. 샤갈과 눈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초자연적 현상은 분위기를 지배한다. 눈이 내린다고 꼭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것인가. 상대적인 모멸감 때문이 아니라, 저마다 키워온 스스로의 환상에 기만당한 것 같다는 자괴감 때문에 우리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현실과 환상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다를 수 있는 것일까. 지난 연대 내내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 환상에 뜨겁게 사로잡혀 있었고, 이제 그것은 빈틈없이 깨져버린 것이었다. 라는 대사로 둘러처지는 연대라는 환상과 허무, 정치에의 혐오, 그것들은 무기인 듯 보였으나 무력감이었다. '이제는'이라는 회의론과 '그래도'라는 명분론 끝에 술 테이블을 뒤집는 싸움. 그날 그 말을 듣고 어째서 명분론 쪽에서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질 않았는지, 그 뒤로도 우리는 오랫동안 그 이유를 감지할 수 없었다. 명분론 쪽에 서 있던 당사자마저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으니까, 나머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기에 일종의 심리적 동조의식, 다시 말해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어쩔 수 없이 상반되는 견해를 취했지만, 명분론의 이면에도 역시 회의론적인 요소가 다분히 내재돼 있었으리라는 짐작만 어렴풋이 해나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당사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통해 분명한 사실로 확인되었다.

 

연대에는 이탈이 없어야 하나. 이 허무의 술자리가 파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 한 가지. 상실된 대화와 깊은 단절감. 이후 모임에서 계속되는 잡담 또 잡담 그리고 잡담. 의미없는 말만 통용되는 시간. 의미있는 말이 철저하게 통제당하는 공간. 거기에는 연대와 열정, 기대감과 설렘 따위는 없었다. 술자리에서 절반이 돌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남은 사람들에게는 결속감과 새로운 공감대와 은밀한 연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 여자를 만나 '샤갈의 마을'에 가게 된다.

 

'흩어졌다'는 결과보다 '흩어져가고 있다'는 과정 때문에 괴로운가. 결국은 '둘'도 남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지. 여자의 목소리가 슬프게 들려온다. 우린 모두 누구를 기다리고 누구와 자고 누구의 손을 잡고 그렇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존재인가 보다. 함께 있을 땐 고독을 꿈꾸고, 혼자일 땐 누군가와의 연대를 꿈꾸는.

 

 

 

 

 

 

 

 

 

 

 

 

 

 

 

<신라의 푸른 길>은 신경숙의 <부석사>가 그랬듯 문학기행을 떠나고 싶게 한다. 대학 때부터 경로와 목적을 적어내려간 기행노트가 몇 권이고, 그 중 아직 떠나지 못한 장소, 여전히 느끼지 못한 정취가 또 얼만지. 내가 절 탐방을 좋아하고, 불상도 좋아하고 탑도 좋아하고 고요를 좋아하고(애들 말에 의하면 내가 제일 말이 많다는데!) 무엇보다 얼마 전 친구들끼리 모였다가 나온 템플스테이는 로망인데, '새벽부터 일어나서' 부분에서 약간 좌절(침묵과 수양도 약간 힘들 것 같지만). 하지만 나는 이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보통사람이니 맘먹으면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닌데 언젠가,로 약속했지만 지금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임. 석굴암 본존불상 아미타불과 경주에서 강릉까지 가는 7번 국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와 같은 문장에서 시작부터 발이 푹 하고 빠지면 더이상 집중이 되지 않고 안절부절못한다. 경주에서 포항을 거쳐 강릉까지 바다를 끼고 가는 7번 국도. 우왓. 남쪽 항구도시에 사는 나는 이 국도가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전용도로 같다. 어릴 때 임진각 자유의 다리, 통일전망대 가면서 아빠가 달렸던 길과 몇 해 전 여름, 가는 길에 진탕 싸우긴 했어도 나름 신나게 떠났던 여행도 그 국도였나. 김연수의 소설 제목. 나는 운전을 못하니까 모른다.

 

내일은 일찍 움직여야 하고 차를 타고 이 책을 읽을까 한다. 내가 갈 길이 7번 국도도 아니고 여행가는 것도 답사가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해야 할 일을 든든히 챙겨서 차를 타는 기분이 기다려진달까. 어디 갈 땐 무거운 거 싫어서 책 잘 챙기지 않는데 이 책이 전자책에..전자책에.. 내일 할 일 만들어둔다고 페이퍼에 구멍을 만들었다. 뭐 가끔 이럴 때도 있어야 재밌지! 빈틈도 있고 구멍도 나고 앞뒤 말도 안맞고 간혹 그래야.. 그래서 안녕. 윤대녕 작가를 엄청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여기 이 책에 구멍을 내다니 다시 와서 이어쓰겠음. 꼬옥 쓰겠음.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은 겨우 찾았다. 이 작품집에 실린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은 비 오는 날의 삼거리에 서 있던 밝은 핑크빛 원피스를 입은 그녀로부터 시작한다. 그녀의 상처 그리고 나의 상처. 그녀는 재일 한국인 그리고 나는 그냥 한국인. 그녀가 내 눈에 띈 까닭도 어쩌면 그녀가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 내 행보에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적 시적 걷다 보면 시선마저 느긋해져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보아낼 수 있는 거니까. 그녀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 하고 있었고 나는 일부러 그녀 곁을 천천히 걸으며 질문해오길 기다리다 그녀를 안내한다. 다시 만날 줄 몰랐던 그녀와 몇 번 마주치고, 드러나는 그녀의 삶과 나의 삶, 그녀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아주 짧지만 강렬하다. 무엇에 대해? 카프카에 대해. 하지만 저지 코진스키를 언급하는 부분이 더 강렬하다.

 

유태인에 관한 거라면 나는 저지 코진스키의 <더 페인티드 버드>를 잊지 못한다. 매 장마다 소름이 끼치는 그 소설 9장에는, 집단학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알아버린 유태인들이 어린 자식들을 달리는 열차 밖으로 내던진다. 열차가 지나간 마을엔 바퀴에 찢긴 아이들의 사지가 건초 더미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요행히 목숨이 붙은 아이들은 가난한 마을 사람들한테 신발과 옷을 빼앗기고 얼어죽거나, 여자 아이일 경우엔 거기에다 강간까지 당한다.

 

자신에게 그 소설과 같은 내용의 쓰라린 고통만을 안겨주고 나중에는 정치적으로 억압하기까지 한 조국을 탈출해 저지 코진스키는 미국에서 전혀 새로운 언어로 소설을 썼다. 전혀 새로운 언어로. 그러나 선배 유태인인 카프카는, 프라하에 끝까지 웅크리고 앉아, 저 독일인의 언어로 <변신> <실종자> <심판> <성>과 같은 소설들을 써낼 수밖에 없었다.

 

재일 한국인 그녀와 유태인 저지 코진스키 혹은 카프카. 나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을 것 같다. 영토와 국토를 잃고 방황하는 그들의 상실과 절망과 소외감을 온전히는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는 내 것이라 믿고 살아가는 것만이 견딜 수 있는 일일 것 같다.

 

 

 

 

 

 

 

 

 

 

 

 

 

 

 

 

김인숙의 소설 중 <소현>이 시대와 문체를 통해 왜 그녀가 써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면(당시 나는 그 문체를 말투로 따라하면서 다녔음), <미칠 수 있겠니>는 발리라는 이국적 공간과 지진이라는 자연재해, 상처와 배신으로 얼룩진 사랑을 치유하려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내면을 슬프지만 절망적이지는 않게 그리려는 느낌을 주었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이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고, 과거와 현재가 버무려지는 느낌 또한 그랬다. 결과적으로 아주 애틋하고 완전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때로 아득해져서 손에서 놓아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었고, 좋았다. 여류 소설가들이 외국 체류나 여행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닌데다 나와 다르지도 않아서 좋았는데(물론 그들의 여행기는 별도로 하고)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니 반가운 기분(와락). <먼 길>은 작가가 1993년부터 1년 6개월을 시드니에서 보낸 경험을 살려 쓴 소설로 1995년 한국일보 작품상을 수상했다. 시기로 보면 거의 20년 전인데, 젊은이들의 방황과 정착이라는 코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 걸 보면, 사는 일의 본연적 고민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만은 않은 듯하다.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청년인 당신... 그래서 서글픈 기억... 나는 그것을 붙들고 있을 힘이 없습니다.. 로 요약되는, 한때, 당신을 사랑했었노라고.. 잊지 않는 이상 서글픔이 사라질 수도 없다는 서연의 편지로부터 시작한다. 누가 이, 절절한 기억 속 주인공일지 가슴이 콩닥거리며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포트 멕콰리로 떠나기로 한 날, 서연의 편지를 받았다는 이는 한영이다. 그리고 한영의 세상에는 낚싯배를 모는 형 한림과 명우가 있다. 8년 전 사랑했던 서연만이 없다. 명우를 처음 만난 날은 이해할 수 없다. 네가 아직도 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게 왜 희망처럼 여겨졌는지. 관계를 맺는 모든 일에 실패만을 거듭해왔던 지나간 내 삶이, 왜 그렇게 느닷없이 축복처럼 여겨졌는지... 라는 편지를 띄우고 그녀의 답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교민잡지사에서 한국인으로서 난민비자로 영주권을 취득한 명우를 취재하기로 한 건 그것이 도저히 통용될 수 없는 특수한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이민.. 이것을 끝내고 저것을 선택하는 일. 모든 것의 시작. 그들은 이 시작 앞에, 걸어가야 할 먼 길 앞에 흔들리고 좌절한다. 과거를 버리지 못하고 단절하지도 못한 채, 울컥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어야 하는 모든 것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 한영에게는 그 과거 속에 서연이 존재했다. 한림에게는 노래하지 못한 채 헛도는 자유와 그로인해 실패한 결혼생활이 그랬고, 명우에게는 학생 점거농성으로 받은 1년 반의 징역생활이 그랬다. 모두에게 신열같은 열병이 찾아오고 있었다. 이방인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서연의 그리움을 토로하는 한영에게 명우는 말한다. 사랑이란 건 비로소 그리움으로 확인되는 감정이 아니던가요. 자조적 웃음을 날리면서도 형(한림)의 방랑벽과 속박된 자유, 명우의 내가 헛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고백이 결코 아닙니다. 내 길은 헛되지 않았는데 내 삶이 헛되어졌다는 것, 그걸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라는 얼치기 고백에도 그만 마음이 사방으로 철렁하는 몰골이 되어버린 자신이 소외감에 몸서리친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생존의 행렬. 한영은 몰랐고 서연은 직관으로 알았던 바로 그것. 언젠가 세월이 뒤틀릴 것이라는 사실. 가족병력이 있던 서연과의 교제를 반대한 아버지를 당신이라 칭하며 맞섰지만, 미칠 것 같은 소유욕에도 불구하고 병신 자식의 아비가 되고싶지 않았던 비열함이 그를 이민자로 내몰았다. 서연 대신 창녀를 안으면서, 여자의 배에 지폐를 뿌려대면서도 잊지 않고 싶은 것,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집착했던 것, 비열함도 아니고 좌절도 아닌 어떤 신념과 계획. 한영은 그것을 다시 갖고 싶었다.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떠나자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풍선처럼 가볍게 살자고 말하던 그는 몰랐고 서연은 알았던 것. 그것.

 

상처를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그리하여 그 상처에 온 가슴이 전부 문대질 때까지, 끝끝내 버티는 것. 현주소에조차 온전히 머물지 못함을 아프게 상기하며 그가 내린 결론이라면 저마다의 이유로 남을 여기 이 자리, 현주소에 온전히 머무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 이 페이퍼의 박스글이나 색깔글은 모두 소설 속에서 가져온 인용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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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06-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아이님. 나 아이님을 아주 미치게 사랑하고 싶다, 이 한 마디만 하고 갈께요.

아이리시스 2012-06-03 21:53   좋아요 0 | URL
세상에, 너무 격하게 애정하는 댓글 쓰심 댈러웨이님 오해 삽니다ㅋㅋㅋ
제가 여기저기 사랑을 좀 많이 받긴 하지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돌아왔어요. 댈러웨이님 서재에 제 댓글 확인해요. 오랜만에 비밀이에요ㅋㅋㅋ

이진 2012-06-0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이님 디게 오랜만이다.
아이님 비밀은 뭘까. 아참 그리고 댈러웨이님보다 내가 더 아이님 사랑하는거 알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이님 단편 극도로 싫어한다며요, 언젠가 본적 있는거 같은데. 몰입하면 끝난다구 ㅎㅎㅎ 저도 그랬는데, 요샌 단편이 더 좋아요.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지만 간단하게 읽고 읽고 난 후의 그 짧지만 아릿한(?) 여운. 그런게 좋더라구요. 문장도 단편이 더 좋은거 같구.

내 친구도 <혼불> 도저히 읽을게 못된다고 해서 물어봤더니 옆에 사전두고 봐야한다고 ㅋㅋ

아이리시스 2012-06-03 23:10   좋아요 0 | URL
아악, 소이진님 보면 저 꼬마아이 얼굴 떠오르고 소이진님 겹쳐지고 그러면서 막 머리 쓰다듬고 싶어요.(나 나쁜누나 아님-.-) 또 사랑고백 받다니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아람~(지금 음표 찾을라고 다 해봤는데 어딨는지 모르겠음. 여튼 나는 노래중)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응응, 그래요! 난 예전에도 단편을 싫어했어요. 근데 그게 맞아요. 소이진님은 현명한 문학소년^^
국문과 수업 듣는데 시험 쳤었어요. 거기 나오는 어휘의 뜻. 나는 하나하나 읽으며 정리했는데(!) 그거 어휘집이 따로 있더라고요. 덕분에 책은 열심히 읽었는데 쪽지시험은 망했어요. 시험은 역시 꼼수와 요령이 있어야 해요(!!!) 수능 끝나면 소이진님도 꼭 읽어요.(응?) 수능치고나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사랑해요, 소이진님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잘자요.. 안녕.

티티카카 2012-06-04 14:37   좋아요 0 | URL
와우, 굉장히 귀여우시네요 ㅋㅋㅋ두 분 다!

저는 최명희 작가님이 원고를 쓸 때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같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더군요. 그저 읽기만 해도 힘든데 그런 깊고 무거운 책을 오랜 시간 풀어내려고 애썼던 작가님을 생각하니 끝없는 존경이...!

아이리시스 2012-06-04 16:19   좋아요 0 | URL
히히히 티티카카님 안녕?

소이진님이 귀여운 거예요ㅋㅋㅋ 진짜 귀엽^^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멋지다.. 사실 내용은 잘 기억도 안나는데 책 펴면 적어도 5권까지는 단어마다 뜻이 빽빽하게 적혀있어요. 며느리의 비애.. 저는 그것만 지독하게 떠올라요. 한 권씩 사서 읽었는데 어느새 10권을 사서 모았을 때 뿌듯한 느낌과.. 이제 저 책 다시 뺄 때 티티카카님도 함께 떠오를 것 같아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6-04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댓글 달러 왔어요..ㅎㅎㅎ 나 매일 서재에 들어와요. 그런데 맨날 빈 화면 앞에 두고 망설여요.
자꾸 말을 고르는거죠. 뭔가 막힘이 있나봐요. 내 안에.

7번 국도 말예요. 우리는 강원도에서 경주갈 때 그 길로 갔었어요. 진짜 좋았어요. 해가 지는게 아쉬울 정도로...
그리고 대학교 때 남동생하고 둘이서는 기차를 타고 그 해안선을 타고 내려갔었어요. 서울에서 출발해서 강릉에서 하루 묵고 부산에서 하루 묵는 그때 나름으론 꽤 먼 거리의 여행이었죠. 남동생 대학입학 기념 여행. (솔직히 걔는 뭐가 좋았겠어요. 누나랑 단 둘이..ㅋㅋㅋ)
그때 가 본 부산. 고분고분한 서울 말씨 쓰는 저와 남동생은 지하철 안에서도 남포동 떡볶이 집 안에서도 시선을 자주 받았던 기억이, 그래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막 나네요. 여행가고 싶다.

우리 7번 국도 중간 어디쯤에서 만나요. 지금 당장!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ㅋㅋㅋㅋㅋㅋㅋ
(막 이러면서 전 자러 갑니다. 언젠가는...)

아이리시스 2012-06-04 16:25   좋아요 0 | URL
그 길이 그 길 맞나봐요. 그럼 저는 그 국도에서 대판 싸운 기억이........ㅠㅠ 7번 국도.. 리스본 28번 트램 뭐 그런 기분이 들어서 좋아요. 김연수의 [7번 국도] 그 책 안 읽었는데 보고 싶어지네요. 책은커녕 윤대녕은커녕 차 타고 잠만 잤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계속 미완성일 것 같아요.

남동생과 여행이라니 저희는 상상할 수도 없는데요ㅋㅋㅋ 오, 고분고분한..그게 바로 제가 부러운 거예요! 서울 가면 저도 시선 자주 받는데ㅋㅋㅋ 다른 이유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7번 국도 중간에서 만나야 합니까?! 제가 운전 못하니까 데릴러 와요. 데릴러 와요! (막 이런다)ㅋㅋㅋ

댈러웨이 2012-06-04 21:04   좋아요 0 | URL
윤대녕은 커녕...요? --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ㅠ.ㅠ

아이리시스 2012-06-08 00:1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읽긴 읽었어요, 짧으니까요, 댈러웨이님ㅎㅎ
근데 별로 재미가 없..신라와 경주와 여자가 왔다갔다하다가 가버렸어요ㅠㅠ

2012-06-04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4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티티카카 2012-06-04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밤에 이 글을 쓰셨군요 :) 시간의 무게가 더해진 그 밤의 글이 저의 추억까지 환기하네요.
저도 단막극 참 좋아해요. 진부한 드라마들 사이에서 신인 작가만의 톡톡 튀는 전개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재미가 모두 날아가버렸어요. 말씀하신대로 무얼 보더라도 아웃풋이 있어야 하는데, 허무맹랑한 감정의 편린들만 남게되는 것 같아 일체 손을 못 대겠어요. 순수한 재미마저 잃어버린 건 아닐까 두렵기도 하구요ㅠ;;
파리에서 있었던 사연은 씁쓸하네요. 남들에게는 '쓰잘데기 없는 학과'라고 불려지는 데다 수많은 글쟁이들 앞에 한없이 무력해지게 만드는 학과!!

근데,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아이리시스가 무슨 뜻이죠? 검색해보니까 소설 제목으로 있네요? 아닌감? ㅎㅎ....

아이리시스 2012-06-04 16:31   좋아요 0 | URL
그게..그분 여동생도 같은 학과였어요. 그런데 잡지에디터여서 글과 여행 사이를 하염없이 방황하는 분. 아마 그래서였을 거예요. 잘 아니까! 아님 기분이 나빴겠죠..저도..^^

요즘도 단막극 하는데 자꾸 연속이에요, 4부작 8부작 이렇게요..

irisis 'i'과 'r'과 's'의 조합이 좋아서 창작해낸 거. 뜻은 없어요.하하. 티티카카님이 뜻 만들어주시길^^ 우왓, 소설을 발견하셨어요? 그건 무슨 뜻일까요?!

티티카카 2012-06-04 19:23   좋아요 0 | URL
http://en.wikipedia.org/wiki/The_Well_of_Echoes

소설 제목이 아니라 주인공 이름이었네요. 영어라 막눈이 도졌나보군요 줴길...ㅋ

아이리시스 2012-06-08 00:19   좋아요 0 | URL
위키피디아 가서 봤어요, 티티카카님. 아..두번째 주인공! 주인공의 라이벌이라는데요..저 해석했어요. 너무 신기했거든요. 나 처음 봤어(ㅋㅋㅋ)

2012-06-06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08 0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 융, 둘 사이에서 실험자 혹은 수제자로 활약했던 사비나 슈필라인의 이야기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성적 결핍과 연관시켜 모든 연구를 진행하고, 그의 제자 융은 처음에는 가담하지만 점점 그것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다른 요소의 힘을 깨닫게 되면서 연구에서 빠져나와 무의식 세계를 주장한다. 한편, 어릴 때 아버지의 학대로 피학적 성도착증을 가지고 있는 슈필라인은 이들의 연구대상자로 선정된 여자다. 철저하게 관찰, 분석 당하면서 우연찮게 아내가 있는 담당의사 융과 육체적 사랑(이라기엔 설명하기 불가능한 끌림)으로 발전하면서 아슬아슬한 관계의 끈을 이어간다. 내쳐지기도 하고 연구의 중점에서 영감을 주는 인물로 활약하다가 결국 아동정신분석의가 된다. 영화 속에서 그리는 이들의 갈등은 연구분석 그리고 프로이트와 융이 공유하거나 어긋나는 이론 그리고 둘 사이를 오가는 슈필라인의 대립이 전부다. 또 융의 평생 동반자 토니 볼프와 오토 그로스 박사도 나온다. 이들의 실제 삶을 얼마나 조명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실존 인물들 얘기를 풀어놓는 심리게임 영화라는 점에서, 모든 배우들의 수준 높은 연기와 함께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이후 대학 때 몇 권 샀던 프로이트를 읽으려고 찾긴 했는데 혼자 읽기만 하면서 소화시킬 양도 아니고 질도 아니고 해서 인터넷 서핑으로 이름 모를 이들의 보고서 겸 글들을 종종 읽었다. 프로이트는 상대적으로 융보다 훨씬 유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이론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왔음으로 그의 이론을 맹목적으로 공부하기에는 아쉬운 생각도 든다. 그가 꿈을 비롯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건 맞지만(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도), 그의 유명세 못지 않게 융의 연구도 유용하고 기발했다. 이건 찾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프로이트와 융의 저서를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실용적 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정신분석은 물론 여러 심리학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내게는 이게 좀 더 쉽고 유익할 것 같다. 이론은 조금씩 차근차근 공부하며 읽어나가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이 책을 보았다.

 

이 책은 내가 얼마나 나를 속이고 있는가, 지금 내가 아는 나는 과거의 나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이론과 사례를 들어 흥미롭게 다룬다. 표지가 끌리지 않아 걱정했는데 내용은 생각보다 탄탄하고 훨씬 좋다. 하루키의 <1Q84> 리뷰 얘기를 해보면, 나는 하루키의 소설을 참 많이 좋아했고, 당시에는 안 읽은 소설이 없을 정도로 전작했으며, 하루키가 보여주는 문학적 세계관은 늘 확고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리뷰를 쓸 수 있었다. 1984년과 1Q84년이 교차되는,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를 대비시켜 이곳에서의 나와 저곳에서의 나를 서로 다른 사람 즉 타인으로 봤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단 한 번도 같은 시공간에 있은 적이 없을 뿐더러,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에고(자아)인 셈이다. 이렇게 텍스트를 읽을 경우, 예를 들어, 그제의 나,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가 전부 달라진다. 각각의 '나'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를 만날 수 없으며, '나'를 찾아 헤매는 또다른 '나'의 노력은 헛수고이며, 이 게임은 계속되는 '나 속이기'일 뿐이다. 이름하여 에고 트릭. 이 책은 하루키와도, 1Q84와도, 프로이트와 융과도 전혀 관련없는 독자적인 책이지만 이런 배경지식과 개인적 기대치를 안은 채 읽었다.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우리가 접하는 엄청난 수의 영화들이 이미 에고 트릭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반전영화라고 하면 절반 정도는 에고와 에고, 나와 나의 싸움이다. 똑똑해진 관객은 쉽게 속아주지 않는다. 이 책에는 에고 트릭을 겪는 많은 예의 사람들이 나온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아주 커다란 것까지. 때로 삶과 생활 전부를 휘청거리게 하는 이런 것도 있다. 육체는 남자였지만 항상 여자였다고 말하는 어떤 남자는 여자가 되지 않고(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고도) 태어난 젠더에 순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스로는 물론 세상을 만족시킬 수 없었으니 한 순간도 떳떳하게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불행하다. 마음을 좀 확장시켜 보자. 그들을 인정한다고 하는 것 또한 역차별 발상이며 상관 없다고 하는 것은 더한 차별,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나와 상관 없을까. 만약 내 가족이라면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마냥 자유로울 수 있을까.

 

흔한 말, 나를 믿는다는 말은 자아 트릭에서 기인한다. 하루키의 문학을 관통하는 것 또한 굳이 얘기하자면 에고 트릭에서 시작된다. 늘 이 세상과 저 세상, 이쪽의 나와 저쪽의 나에 대해 얘기하고, 또 이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하루키의 문학적 키워드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 책에 하루키가 나오는 건 아닌데 자꾸만 연결시키고 있다. 누구도 누구의 한때를 다 알지는 못하는데, 그걸 알려는 연인들의 과거집착만큼 웃긴 게 없다. 이를테면 우린 각자의 자신에 대해서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고, 알지도 못하는 영역 밖의 존재니까. 자아에 대한 모든 것. <에고 트릭>을 설명하는 한 줄. 다양한 철학적 관점과 방법론으로 설명하는 이 책은 생긴 것 이상으로 많이 어렵고 난해하다.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의 주목적이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게 아니라, 현재의 인간성을 조명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자주들 한다. 이 주장이 옳다면,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통해 '인간성'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그런 세상을 상상해왔다는 사실만은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가타카>가 그리는 현실은 사람이 유전적으로 조작된 '적격자'와 자연 임신으로 태어나 열등한 '부적격자'로 나뉘는 세계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인간이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단순노동이나 지적 작업 등에 맞춰 선택적으로 길러지는 사회도 볼 수 있다. <타인머신>은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이 수천 년에 걸쳐 엘로이와 멀록이라는 두 종족으로 진화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매트릭스>에는 모든 경험이 알고 보면 가상현실인 인류도 등장한다. 그들의 실제 육체는 누에고치 같은 캡슐에 갇혀 있으며, 지능을 가진 기계들이 인체에서 발생되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있다.

 

이런 디스토피아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인간성이 고정불변일 필요가 없고, 이론적으로 인간 같은 피조물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pp.274-275)

 

무슨 말을 하는 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영화로 설명해주는 부분이 제일 쉽긴 하네. '자아'를 열두 가지 철학적 관점에서 고찰하다보니 한 단락 한 단락이 철학자 이름 투성이다. 쉬운 책이 아니라 적어도 기본적 철학지식을 요한다. 이 책에서처럼 자아는 환경과 기질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고 또 아예 달라지거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자아의 개념으로 봐도 둘은 큰 차이가 없게 된다. 현생과 사후 삶 또한 어떻게 생각하는 자아이냐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하지만 죽음에 관한 한, 정말로 끝일 때만 백퍼센트 확신한다. 육체와 자아에서 다중 자아, 사회적 자아, 성격과 자아, 사후의 생까지 나아가는 자아의 고찰이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분명한 것은 어떻게 변하든 한 사람의 존재로서 본질은 변함 없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소중히 하는 것과 나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자아가 어떤 경로로 확장되고 철학적 지평이 얼만큼 넓어져도 변할 수 없는 질량 불변의 진실이다. 

 

 

 

 

 

 

 

 

 

 

 

 

 

 

 

 

20대 초반 어정쩡한 독서가 약이 아니라 독이었음을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 호기심에 섣불리 손댔던 많은 철학서와 이론서들이 그때 그 도서관에서 안 좋은 추억으로 남아 발목 붙잡고 늘어진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지배의 쾌락과 복종의 쾌락으로 관심이 갔다면 사드와 로렌스를 읽으면 됐을텐데 파졸리니의 <살로소돔의 120일>도 충격적이고. 갑자기 예쁜 키이라 나이틀리의 나체열연이 생각나서 이 강렬한 영화 이미지를 이 책들이 깰 수 있을까 싶다. 예고편도 심의반려된 그 가학적 성행위가 나는 전혀 불편하지도 않더라. 욕망이, 그보다 더한 욕망이 세상천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인데. 솔직한 게 나쁜 게 아니라 억지스럽고 강요된 행위가 나쁜 것이다. 이성과 욕망으로 모든 것을 풀려던 이 위대한 철학 분석가들의 이론이 오늘날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가는 별도로 하고, 결론 없이 과정만 있는 이 영화가 프로이트와 융의 세계를 아주 잘 그려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의문과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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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6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7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5-1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상사를 인물들의 행적 중심으로 따라가면 참 재미있더군요.누군가를 열렬히 존경했다가 나중엔 실망해서 결별하는 경우를 보면 영화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프로이트와 융의 이야기가 그렇죠.한국사람들도 처음엔 프로이트의 매력에 빠지다가 이게 좀 이상한데...하고 의심할 때부턴 융에 관심을 갖는 이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리시스 2012-05-17 17:49   좋아요 0 | URL
융이 사비나를 사랑하게 되면서 프로이트가 틀렸다는 걸 깨닫는 게 영화스럽기는 해요. 둘째줄 셋째줄은 저도 내내 생각하고 동의하는 부분이에요^^ 상대적으로 융이 덜 알려져서 그렇지 프로이트만 대가는 아닌 듯 한데요.. 저는 지금껏 프로이트 이론이 아주아주아주 절대적인 줄로만 알고 지냈었어요ㅠㅠ

마녀고양이 2012-05-1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에고 트릭이라는 책 잼나겠네요....
프로이트, 융, 아들러, 안나 프로이트, 코헛, 위니컷.... 정신분석에서 뿌리가 나온 이론들을 읽으면
정말 머리가 핑핑 돌아가요. 창시자들은 참 머리가 좋았다는 생각과 함께 복잡하게 생각하길 좋아했나봐 싶기도 하고,
그래서 현실에 적용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하지만, 복잡한 우리 심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긴 하지요....

다들 천재들이예요, 천재... 아, 내 한계가 너무 분명하게 요즘 느껴져서, 그거 받아들이기 연습 중이예요, 헤.

아이리시스 2012-05-17 17:47   좋아요 0 | URL
네, 마고님께 필요한 책일까요? 심리학이 아니라 철학이라서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저는 딱 한 가지만 알겠어요. 제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만 잘난 사람은 없구나.. 철학자들은 제각각 본인들이 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론을 창시했지만 어느 것도 전복시키는 의견이 또 나온다는 점에서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제일 대단한 게 아닌가.. 이 복잡한 것들을 다 읽고 이해해야 하니까요..

천재는ㅠㅠ 아무리 어려운 것도 쓴 사람이 있는데 읽는 것 정도는 해야한다는 게 제 독서철칙인데 조금만 파고들면 포기하고 싶어져요. 시작도 못해요. 마고님 한계는 어떤 한계........ 없는 것 같은데요?ㅋㅋㅋ

cyrus 2012-05-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비나라는 여인은 진짜로 실제 인물인가요? 은근히 프로이트와 융과의 사제 관계가
픽션 주제로 사용되네요. <살인의 해석>이라는 소설도 그렇고요 ^^

위에 마고님이 말씀하셨지만 예전에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우연히 심리학 전공 강사님 말씀을 듣은 이후로부터는 막상 공부하려는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정말 프로이트, 융에서부터 요즘 심리학자들의 학문적 사상을 이해하는 데만 해도
학부생 시절 때 머리에 쥐가 났다면서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나네요 ^^;;

아이리시스 2012-05-17 17:43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실존인물 맞아요. 나오는 등장인물 모두 실존인물이에요. 볼 때는 좀 재밌고 네이버 평점도 제 생각보다 훨씬 높던데 저는 영화 자체가 그렇게까지 기발하거나 특별한 건 모르겠어요. 워낙 프로이트와 융에 대해 모르니까 좀 찾아볼 계기를 마련해준 것 빼고는요. 역시 시작은 관심으로, 완성은 전집으로..( '')

심리학 재밌을 것 같아요. 저는 뭘 가르쳐주는 것에 젬병이라서 선생님의 역할이 별로인데 심리학도 사람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비슷하게 느껴져요. 마고님처럼 한다면 재밌어 보이지만 쉽지 않은 것 같아요ㅠㅠ 노이에자이트님 말씀도 맞고요. 프로이트는 요즘 좀 특출나지 않죠. 반박이론이 훨 많고 의심살 수밖에 없는 말을 많이 하던데요..히히. 실상과 동떨어져 보면 재미있는 분야예요. 저는 무슨 '학'으로 끝나는 거 정말 싫어요. 쥐나요ㅠㅠ 행정학보다 행정법이 좋아요ㅋㅋㅋ (비교하는 거 봐라..)

맥거핀 2012-05-18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인저러스 메소드..저 영화 심히 평이 별로라서, 끙..그러고 있어요. 좀 다른 얘기인듯 한데, 인간의 학문에 대한 욕구라는 게 단순하게 지적인 측면에서 발현되는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프로이트와 융도 저 사비나라는 여자에 대한 어떤 감정(?)이 없었다면 그렇게 대가는 못 되었을듯..(인류사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순수한 지적동기 외에 때로는 정말 하찮은 이유 때문에 연구되고, 탄생한 것을 생각해보면요. 물론 프로이트와 융이 하찮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아이리시스 2012-05-19 00:10   좋아요 0 | URL
우리끼리 말인데 재미없어요, 맥거핀님. 평론가들 평이 별로인 건 이백프로 이해가 되고도 남아요. 학문에 대한 욕구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으로 접근해 독서를 하는 게 낫고, 프로이트와 융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본들, 대다수 책 한 권 안 보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요. 그런데 극영화의 재미까지 앗아가니, 다큐나 다름 없어요.하하하.(우리끼리만 해야 되는데 공개적으로 말한다-_- 근데 저는 이승기 보면서 <군주론> 읽는 여자잖아요ㅋㅋㅋ 얼마나 기특한 선택인지 요즘 <더킹 투하츠> 완전 울트라 캡숑 짱 재밌거든요!

맞아요. 결국 그들도 지적인 측면에서가 아니고 누군가를 반박하는 이론을 창시하기 위해서, 욕망에 의해 그 또한 전복되고요. 정말로 영화 속에서 프로이트가 이론만으로 자꾸 '성적 결핍과 욕망'을 융에게 설득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만. 근데 이런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좋기란 정말 힘들고 어려울 것 같긴 해요.

Shining 2012-05-1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맥거핀님처럼 이 영화, 혹평만 들어서 과연 보게 될지 모르겠어요_-; 하지만 코스모폴리스였던가요? 로버트 패틴슨과 함께 한 영화는 여전히 기대중입니다. 그런데 패틴슨이 잘 생긴 얼굴인가요? 전 정말 모르겠던데_- 근데 영화를 고르는 취향은 조금 예상(예상이래봤자 <트와일라잇>시리즈로 선입견이 생겼을 뿐이지만)외더군요, 이 배우.

그런데 아이님, 갑자기 생각난 건데 로만 폴란스키 뒤는 언제 하실 거에요?ㅎㅎ(놀라셨죠?^^)

아이리시스 2012-05-19 00:19   좋아요 0 | URL
저는 하이틴스러운 <트와일라잇>도 보다가 때려쳐서.. 워낙 그런 거 안 좋아해요. 노력을 몇 번이나 했는데 도저히 못보..( '') 영화가 취향이 아닌 경우 감독,배우는 별로 저한테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고요. <코스모폴리스>가 <데인저러스>랑 같은 감독인 거죠? 예전에 하정우가 고현정이랑 드라마 <히트> 하고난 후 뜨니까 그전보다 훨씬 많이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지위가 되었다던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원래 그 시리즈가 본인에게 그런 선택 아니었을까요?-_-;(그렇다고 하기엔 이전 필모그래피가 많이 후진데..)

저도저도 로만 폴란스키 세번째 비공개로 쓰기 시작한 그 페이퍼 로그인할 때마다 보면서 한숨 쉬어요.푸하하하. 이런 것조차 몰입과 지속이 불가능한 이런 인격이라니-_-
 

 

 

 

그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주에 심어둔 뿌리깊은 아픔처럼 유재하의 가사들이 딱 그랬다. 아무리 그리워해도 찾아갈 용기같은 것은 내지 못할 터였다. 그때마다 누구에게 얘기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걸레가 물을 머금는 것마냥 가만히 시간을 훔친 것도 여러 번. 추억? 음악? 어느 것이 어느 것 앞에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딱 한 번 우연히 만나도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종국에는 쿵하고 내려앉는 마음을 추어올리게 만들었다.「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다시 들은 건 나가수 2의 생방 두 번째 무대 김건모를 통해서였다. 노래는 곧, 유리에 내 모습을 비추며 어딘가로 가려했던, 신은 구두가 데려다줄 것으로 믿었던 모든 시간들을 폭풍처럼 몰고 오고 있었다. 김현식-유재하-김광석으로 이어지는 이 비련의 거인급 뮤지션들을 의도적으로 멀리해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존재는 그들의 태생이 아니기에, 제때 그들을 탐내며 살지는 못한 세월의 차이가 컸기에, 멀리할 수도 가까이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는데 이건 분명, 운명이었다.

 

 

 

 

 

 

 

 

 

 

 

 

 

 

붙들 수 없는 꿈의 조각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쳇바퀴 돌 듯 끝이 없는 방황에
오늘도 매달려 가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겉으론 감추며
한숨 섞인 말 한마디에 나만의 진실 담겨 있는 듯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엇갈림 속에 긴 잠에서 깨면
주위엔 아무도 없고
묻진 않아도 나는 알고 있는 곳
그 곳에 가려고 하네

근심 쌓인 순간들을 힘겹게 보내며
지워버린 그 기억들을 생각해 내곤 또 잊어버리고

이제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 가리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가사가 시네, 시. 다른 가사도 그랬지만 세어보니 스물 여섯의 첫 음반에 담긴 곡이므로 더더욱 시네, 시. 감수성이 말랑말랑 터질 것 같은 어느 때. 그 시절 그 때를 참지 못해 폭발시키는, 하지만 여전히 누르고 억제하는 어떤 것들이 이 곡에 숨어 있다. 1990년대의 20대를 영화 <건축학개론>이 그린다면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1980년대의 20대를 더 내밀하고 정교하게 불러내고 있다. 이 곡에서 나는 우리 엄마도 보고 우리 아빠도 본다. 그들이 찾던 꿈과 세상을 접한다. 그래, 순간이 쌓여 세월이 되어 여기까지 흘러흘러 온 것을. 비로소 다시 듣는 추억. 이 곡은 반드시 우리보다 훨씬 오래 된 먼지쌓인 추억을 들려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에 나는 너무 젊고, 젊음은 쌓여진 시간을 절대 이길 수가 없다. 훌쩍 나이들고 싶다고 썼었다. 정말이다.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들으며 온갖 만물이 활짝 깨어난다는 바로 그 봄을 견뎠다. 어디선가 이름모를 향을 묻힌 바람이 불어오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내가 가지 않아도 괜찮은 게 좋았다. 항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도 좋았다. 좋아서 아무에게도 말 못했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달려가 그곳에 가자고 말했다. 묻지 않아도 알고 있는 곳에, 함께. 이어폰을 나눠끼고 이 곡들을 들을 것이다. 배낭 매고 기차 타고 손 놓지 않은 채 깊은 산 속 계곡숲으로 놀러가던 어느 여름 오후처럼 이번에는 계획이 없었다. 살짝 건드리고 가는 공기가 바람이라는 걸 알려주는 이 하나 없는 쓸쓸한 여정일 터였다. 극한으로 몰고가지는 말라는 말에 더이상 가혹해지지는 않으련다.

 

머리가 멍멍해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 순간이 바로 사랑하는 순간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달려왔다. 혼자 착각해서 내게 위험이 닥친 줄 알았단다. 그러면 먼저 전화를 했어야지. 바보같아. 무슨 일이 생길 게 뭐가 있다는 거야. 어제는 웃었고 오늘은 비가 온다. 이 앨범들을 몇 번째 재생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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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1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이 유재하와 김광석을 듣는구나....중학교때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어요. 늘어져 소리가 이상해지면 또 하나를 사야했죠^^ 나도 그때 어렸어서 이 시들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그 시절의 냄새를 맡으며 그 시절을 살아냈던 위로의 노래들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립다....

아이리시스 2012-05-16 16:38   좋아요 0 | URL
그 정도 감성은 아니고.. 어쩌다가요, 현맘님.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으하하. 정말로 그럴 때가 있었죠. 저 중학교 때 룰라 엄청 좋아했는데.. 고영욱이.. 그러고보면 사람 좋았던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노래 정말 좋아요!

댈러웨이 2012-05-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동영상 보고 폭풍같은 회한이 밀려오던 참이였는데... 아, 태그가 저렇게 가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마지막 문단 읽으면서 미소를. 요즘의 아이님. ^^

아이리시스 2012-05-16 16:32   좋아요 0 | URL
결혼식이요, 6월이라서 코디를 벌써 하려고 해요, 푸하하. 동갑내기 사촌오빤데 저한테 들어올 압박 생각해서 이쁘게라도 하고 가야한다는 압박감이.. 이건 반농담인데,

정말정말 옷이 너무 이쁘더라고요. 욕심이 좀 많아서 눈을 안 돌리려고 하는데 봄옷은 정말로 봄바람 나라고, 카드값 폭탄을 부르는 것 같더라고요. 괜히 보고 왔어,,ㅠㅠㅠㅠ

2012-05-14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16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05-1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좋아라~ 아이리시스님^^
주말에 김건모가 저 노래를 골라 부를 때 너무 좋았어요.
그리곤 넣어뒀던 유재하 음반 찾아 계속 듣고 있어요. 부르면서요.ㅎㅎ
80년대를 보낸 20대^^ 훌쩍 나이들고 싶은가요?^^ 천천히 드셔도 돼요.
그래도 나중 느끼기엔 훌쩍 들었다싶으실 거에요. 적요한 봄밤이에요, 아이리시스님^^

아이리시스 2012-05-16 16:2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댓글이요, 봄노래처럼 폴폴 좋은 공기로 들려왔어요. 저 노래 1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건모 좋아한 적이 없는데 노래가 엄청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사실은 저는 나가수랑 불후의 명곡2 엄청 좋아해서 넋 놓고 맨날 봐요.하하하. 프레이야님 노래 듣고 싶다..아아..^^

또 재생시켜요, 유재하 음반. 근데 몰랐는데 왜 앨범이 통째로 다 곡이 좋아요? 으아,,
 

내가 아무리 아티스트를 동경한다고 해도, 예술가의 삶을 통째 욕심낸 적 많았어도, 자칭 예술애호가이긴 해도, 이 책은 궁극적으로 내 '과'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언제나 내 편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데 누가 내 편이 아닌지는 본능적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도 책도. 그리고 여기서 아니라는 건 어딘가에서 보지 않거나 어떤 촉매가 없었다면 혼자서는 알지 못하고 넘어갔을 책이라는 뜻이다. 내가 싫어하거나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차라리 과학책이 가깝지, 이 책을 들게 된 이유는 TV에서 하는 유일한 책 프로그램 <즐거운 책 읽기>를 우연히 봤는데 추천책으로 나오기에. 더불어 지난 방송에서 다룬 책들을 이리저리 뒤져 몇 권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당장 사서 읽기에는 읽던 책이 많았다.

 

 

 

 

 

 

 

 

 

 

 

 

 

 

여기서 말하는 '아티스트'는 아마 화가/소설가/시인/디자이너 등 프로들만을 일컫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구나 가슴 속에 품은 뜨거운 열망 한 조각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굳이 예술이라 이름 붙이지 않고도 창작과 열정을 통해 자신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를 갖게 하는 책이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엄청난 고뇌로 갖지도 못한 드로잉 실력으로 화가의 세계를 평정하겠다거나 독자적 시세계에 빠져 세상을 뒤집을 시를 써보이겠다 이런 꿈 애초부터 꾸지도 못한다. 어렵다. 내게 예술로서의 모든 것들은 먹고 이야기하고 자는 사이사이 일상을 비집고 들어와 무언가를 볼 때 좀 더 깊고 넓은 눈으로 '재밌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통로가 되어줄 뿐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양분하면 전자가 훨씬 큰 구성비율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하나를 하면 둘이 달려들고 둘을 하면 셋이 보여 결국 원망하거나 신세타령하다가 이것도 저것도 못한 채 주저앉기 십상인 게 내 삶이고 보통 사람의 삶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 중에는 같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이것도 해내고 저것도 해내면서 소소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 분명 있다. 나는 그들처럼 되고싶은 것이다. 이왕이면 책도 좀 읽고, 영화도 좀 보고, 사람들 얘기도 듣고, 여행도 하면서 골고루 관심 좀 가져보고 싶은 것이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샌델 교수는 셰익스피어와 심슨 가족 중 어느 쪽이 더 고차원적인 취미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학생이 심슨을 즐긴다고 말하면서도 반대로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을 더 고상한 취미로 꼽는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이 모든 현상들을 이론화하거나 철학자들의 입을 빌어 예를 들며 상세히 설명하지만 결국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은 나도 일상에서 한 번쯤 생각해봤던 것들이다.(우연찮게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면서 마이클 샌델을 읽었다, 뒷북치는 건 민망한데 그래도 요즘 인문학적 사고를 하려고 노력중이어서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후딱 읽었다, 쉽긴 쉬웠다, 그런데 일 년에 한두 권 책 사보는 사람에게도 쉬운 책인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이게 결론!) 그러면서 깨달았다. 일반인들의 모든 판단은 거의 직관적이고 본능적으로 내려진다는 걸. 어째서 심슨보다 셰익스피어냐 물으면 상대를 설득시킬 요령있는 답변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부터 내가 좀 속물적으로 느껴졌다. 어쨌든 심슨보다는 셰익스피어다!

 

 

 

 

 

 

 

 

 

 

 

 

 

 

 

아무도 어떻게 가는 길이 올바른 지를 알려주지 않는 것처럼, 숲을 보려는 노력 정도는 기울일 수 있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국은 내 능력치에서 보는 세상은 숲보다는 나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어느 책에서도 예술가가 되는 법이라든지 예술가로 성공하는 법 따위의 지름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앞서 예술의 길을 걸었던 어떤 사람에게서 그 길에 대한 이러저러한 얘기를 듣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내면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뭉클함을 예술적 열망이 아니라고 부인하기란 어렵다. 그래, 예술이든 정의든 찾아가는 길은 어렵고, 미로를 헤매다 돌아나오는 길을 찾아야 하는 유일한 사람은 나 뿐이야. 이런 쉬운 결론이 이 많은 페이지를 읽고나서야 비로소 나오다니.

 

 

나 요즘 이런 영화들을 감상하고 있다. <까미유 끌로델>이나 <클림트>, <아르테미시아>, <라 비 앙 로즈> 정도는 봤어도 이런 류의 전기영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의외로 봐야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아.. 만삭의 몸으로 모딜리아니의 뒤를 따라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던 잔느가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보다 더 아니, 세간에 알려진 게 몇 년 되지도 않은 헌신적 사랑의 대명사로 꼽히는 프랑스 여류화가. 모딜리아니의 아내로 더 알려지는 게 그녀에게는 행복한 일일 듯 싶다. 영화 평점이 엄청 높은데 상상만으로도 사랑이 눈부시다. 그녀는 어렸고 자기 또한 화가지망생이었는데 까미유와는 달랐다. 물론 모딜리아니도 로댕과 달랐을 것이다.(여자는 남자하기 나름) 아무리 사랑해도 배우자의 광기 어린 예술의 혼과 좌절을 나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빔 벤더스는 독일의 세계적 무용수 피나 보쉬의 춤을 실제인 것마냥 생생하게 카메라로 잡아낸다. 이렇게 얘기하는 나는 <블랙 스완>을 보기 전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탈리 포트만이 좀 부담스럽다. 페이스 자체는 좋아하는 상이 아닌데, 그래서인지 기대 되면서도 작품이 나올 때마다 자꾸 피해가는 듯. 그래도 <클로저>랑 <브이 포 벤데타> 때 좋았는데.

 

그녀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어록에 남아있을 정도니까 내가 들은 말은 아니다. 영화에 내 인생을 한정시키기엔, 이 세상엔 영화 이외의 것이 너무 많다. 나탈리 포트만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티스트 웨이가 꼭 이들처럼 대단한 인생을 살거나 대단한 작품을 남기거나 대단한 사랑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아프게 눈부신 이 모든 시간들을 가만히 앉아 폭풍감상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외부와 내부 에너지 모두가 달리는 느낌이다.

 

대체 뭐가 더 필요한 걸까. 잃어버린 게 뭘까. 비교적 상실감에는 무통증으로 지내고 싶은 편이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지금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원히 아티스트 웨이에 대해서는 나는 알 수 없는 걸까.

뭘 더 알아야 한다는 사실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너무 어렵다.

 

그리고 우연히 보게 된 천경자를 다룬 다큐를 보고, <스타 인생 극장>의 구혜선이 드로잉을 검사받는 수업시간을 보고, 한 송이 꽃 주위를 팔랑거리는 얼룩덜룩한 무늬의 나비를 보았다.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나비의 날갯짓을 보며 아직 보지 않은 두 작품을 떠올렸다. 어떤 상관관계가 작동했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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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10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얼렁 토끼드롭보고 소감을 남겨줘요.
난 어제 다봤는데 도저히 쓰려해도 쏟아지는 잠 때므네...
지금도 막 자려던 참! 아이님 굳밤 :---))

아이리시스 2012-05-10 18:55   좋아요 0 | URL
이름 뭐였지, 하여튼 귀여운 꼬마소녀 사랑하는 소이진님이 리뷰 써야죠^^
요즘 나는 오드리 햅번의 영화들을 감상하고 있어요. 감상이래봐야..( '')

소이진님 진짜 잠오는데 썼나 봐요ㅋㅋㅋ

비로그인 2012-05-10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저도 졸리네요. 해야할 일의 비율이 하고 싶은 일의 비율을 크게 압도한다는 건... 정말 원망스럽지만 현실이네요. 그래서 자꾸 늦게 자게 되나봐요. 어떻게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자야지 직성에 풀리거든요. 예술적 열망! 천재라고 불린 사람들은 과연 날때부터 그렇게 태어났을까요? 요새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천재들은 미래의 에너지까지 땡겨와서 화르르 불타오른 거라구요. 근데 오래 살면서 천재처럼 잘 해나가는 사람도 있으니 그저 낙담할뿐 ㅠ
또 내일 꾸벅꾸벅 졸텐데... 새벽시간을 도저히 포기 못하게써요 아이리시스님 ㅠㅠ

아이리시스 2012-05-10 18:58   좋아요 0 | URL
스무살 때부터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걸 알았고, 덕분에 졸업하고 출근해야할 때 날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뭐 죽으면 죽는 거고 이런 마인드로ㅋㅋㅋ 잘 살고 있어요. 수다쟁이님, 미쳐야 한다고 말했잖아요. 딱 수다쟁이님 나이에 감수성 돋는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거니까 잘 새겨들어야 해요!

오래 살면서 천재면 어딘지 모르게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아요? 꾸벅꾸벅 졸면서 오늘 하루도 잘 보냈습니까? 오늘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빌려왔나요? 진짜 궁금.

cyrus 2012-05-10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가들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이들의 사랑이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독특하면서도
정말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느낄 때가 있어요, 특히 로뎅과 까미유 스토리 같은 경우에는
까미유가 너무나 불쌍하더라고요, 까미유에게 남동생도 있었는데 그마저도 까미유를 정신이상자로
여기더군요. 그리고 모딜리아니와 잔느 에뷔테른 스토리는 미술가 사랑 이야이 중에 너무 비극적이면서도
슬픈거 같아요.

아이리시스 2012-05-10 19:01   좋아요 0 | URL
아.. 나는 막 뱃속의 아이 슬퍼서 못 그랬을 거 같고.. 혼자 키우는 것도 너무 겁났을 거예요. 이런 상황 자체가 비극적이에요ㅠㅠ 일반인들도 물론 가슴 아픈 사랑과 견디기 힘든 좌절,고독 같은 것들을 겪는 영화같은 삶이 있지만 예술가들은 사연 하나 없는 사랑이 없네요. 그래서 로댕과 까미유도 모딜리아니와 잔느도 너무 슬퍼요. 이제 너무나 유명해졌지만 그럴 수록 더 영화 같아요. 이미 영화지만..( '')

댈러웨이 2012-05-10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이런 페이퍼 고마워요. 이렇게 딱 한마디만 남겨요, 라고 오전에 댓글 달려다가 대문에 너무 크게 난 포스트라 도망갔어요.
이런 페이퍼 정말 고마워요. 이번엔, 소개해 주신 영화들에 꽂혔어요.

p.s. [젊은 예술가의 초상], 김종건 교수 역 /범우사 편 가지고 있는데, 글 흐름 유려하고, 역주, 책 읽기 좋은 편집 등 나무랄게 없다는. (번역이 좋다는 얘길 제가 어디서 들었겠죠? ^^) ([율리시스]/생각의 나무에서 펴낸 것도 김종건 교수 역이죠.) 뭐, 참고하시라는. ( ")

아이리시스 2012-05-10 19:05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이 신간인지 몰랐어요. 무서운.. 저 책도 그런 것 같은데. 여튼 큰 대문 거기 올라가면 주눅 들어요ㅠ 선별 좀 했으면 좋겠어요 엉엉ㅠ

댈러웨이님과 잘 어울리는 영화들 같아요. 느낌이요.. 영감에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에요^^

p.s. 아, 그렇군요. 잘 몰라서 그냥 깔맞춤으로 민음사 사려고 했어요. 번역 좋다고 소문나고 댈러웨이님이 참고하라면 당연히 참고해야죠! [율리시스]와 같군요! 둘 다 눈독들여야겠네요. 도서관을 이용해도 안 읽히고 사도 안 읽히는 [율리시스]겠지만 여튼 뭐 베개로 쓰든지 하겠죠. 고맙습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5-1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군요..ㅎㅎ
예술가는 정말 어려워요.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도 어려운데...ㅋㅋㅋ.
예술가들에게는, 혹은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에겐 가끔 '정의'보다 '도덕'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뭘까요? 전 제가 그림을 어렸을 때 그렸어도 그걸 이해 못했기에 지금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그 '과'가 아닌 것 같은. 근데 웃긴게 그걸 인정하면서도 일종의 소외감이나 상대적 빈곤감을 느낀다니까요. 마치 모짜르트를 질투했던 살리에르처럼.

아이리시스 2012-05-11 17:09   좋아요 0 | URL
현맘님이 그림/디자인 하시는 걸 저 꼭 보고 싶어요. 예술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다들 그런 걸 느끼지 않을까요? 일상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그 지점이 바로 예술가를 예술가답게 하는 신비전략이기도 하니까요. 평범한 삶보다는 비극적인 삶이 더 부각되고, 문창과에도 미대에서 음대에도 오로지 예술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몇 안되니까요. 제가 본 국문과 친구들이 누구나 어려운 책을 아주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요. 더 중요한 무언가가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엇일 때 그들은 진정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건가 봐요. 뮤지컬 모차르트가 여름에 시작하던데요. 문득 그거 현맘님이랑 보러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캐스팅이 뭐 좀.. 뮤지컬은 정말로 전문분야로 남겨둬야 하는데 요즘은 아이돌, 가수, 배우 인기에 기대 섣불리 캐스팅하는 게 많은 것 같아요. (하여튼 뭘 말만 시작하면 이야기가 산으로..-_-;)
 

 

 

 

시작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아니, 이승기와 하지원이 나오는 <더킹 투 하츠>였다. 형의 목숨을 앗아가고 여동생을 하반신 마비로 만든 악당에 대한 왕(이승기)의 대응을 체제론적으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때마침 <군주론>과 <국가론>은 군주제를 이해시켜줄 좋은 텍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왕(이승기)의 고민이지만 좋은 왕을 고를 수 있는 눈은 내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필수적 능력이라고도 생각했다. 때로 드라마는 호기심 많은 나를 새롭고 낯선 세상으로 안내한다. <패션왕>은 관심도 없던 <언터처블-1%의 우정>을 보게 만들었고, <타이타닉>이 재개봉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물론, 호기심 동한 나는 둘 다 보았다. 극중 정재혁(이제훈)이 VIP관에서 혼자(신세경과 같이) 보는 장면이 나온다. <타이타닉>의 갑판 위 키스는 15년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설렜다.

 

 

 

 

 

 

 

 

 

 

 

 

 

 

 

한때 르네상스 사조에 빠져 도서관에서 찾아읽던 로마, 그리스 왕정시대의 이탈리아를 다룬 저서들. 시간을 거슬러 고대, 중세 역사를 다룬 여러가지 책들을 겉핧기 식으로 닥치는 대로 접하면서 절반의 20대가 지나갔다. 그땐 도서관에 가까이 있었다. 체계를 갖추고 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면서 강제와 자율이 적절히 매치되어야 어느 한 분야라도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법인데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 사학과는 거리가 멀었고 매일 작품읽기와 해석, 매 학기마다 창작물 과제에 쫓기고 있었으니 어쩌면 인풋보다 아웃풋을 더 많이 요구하던 그때, 생애 가장 많은 지식에의 갈구를 느꼈던 것 같다. 요즘 기본적 고전(군주론, 국가론, 자본론이 현재 계획)과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한 시오노 나나미의 이탈리아를 다룬 저작들을 '다시' 읽고 있다. 걸음마 수준이다. 그나마 읽는다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여전히 시작이 반을 채워주기에 나는 반만 더 가면 된다.

 

메디치 가문에 대한 무궁한 꿈을 안고 피렌체에 갔다. 피렌체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는 그 작은 영광의 도시가 사방으로 캄캄해진 해저문 늦은 저녁이었다. 중앙역에서 한국에서 대충 몇 개 적어온 숙소로 전화를 걸었지만 예약자가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세상에, 말도 안 통하고 길도 모르고 해외도 처음인데 달랑 몇 개 있는 한국인 운영 게스트하우스가 우리를 거부하니, 세상에서 버려진 것처럼 절망스러웠다. 이 낯선 땅에서 누구를 어떻게 믿어야 하나.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소개에 소개를 거듭해 조선족 모녀(물론 내게는 할머니와 엄마뻘)의 작은 집에 이틀 묵었다. 돌아와서는 내가 그곳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여행 도중에 만난 피렌체는 반나절에 도시 전체를 돌아볼 정도로 작은 곳이었기에 이틀 이상 할애할 필요도 없어서 바로 로마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과거의 영광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중세의 도시 피렌체의 골목이 성큼 다가서는 생각만 해도 땀이 흥건해지는 밤이었다. 골목은 골목으로 통한다. 돌아올 때는 미켈란젤로 광장까지 가서 샌드위치 먹고 놀다가 숙소를 찾지 못해 기차를 놓칠 뻔 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골목이 수십 개는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익숙해지면 별 것 아니겠지만 이틀 만에 그곳에 통달하기란 어려웠다. 아르노 강의 베키오 다리, 단테와 베아트리체, 두오모에만 관심이 쏟아졌었다. 헤매던 길을 찾게 해준 건 묵던 게스트하우스 건물 1층에 있는 빵가게의 빵 냄새였다.

 

<군주론>은 15-16세기를 살았던 이탈리아 정치학자 마키아벨리에 의해 씌어졌다. 모두 동의할 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며, 배경지식이 뒷받침 되어야만 더 많은 것이 보인다. 분량이 짧고 어렵지 않지만 정신줄 놓고 읽었던 처음에 나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한 권 읽기 위해 몇 십 배의 자료와 책을 읽어야 하는 대표적 텍스트. 이번에는 어떤 상황에서의 마키아벨리는 그런 통찰을 할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는 중이다. 다음 번에는 그런 그를 비판하거나 더 좋은 대안을 찾아가며 스펙트럼을 넓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그간 당연시되던 정치와 종교의 유착을 비판하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인간은 본래 사악한 존재이므로 정치영역을 종교의 윤리적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이상적인 정치상일 뿐이라는 것), 당시 도시국가로 이뤄졌던 이탈리아의 도시 중 하나인 피렌체의 통치자(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치는 헌정 형식의 정치철학서를 썼다. 메디치 정부 하에서 공직에 입문하려는 목적으로 집필한 것으로 전해지는데(집필목적이 이처럼 정확했는지, 후세대가 중요한 정치철학서로 둔갑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치가는 필요에 따라 일체의 도덕적 구속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논란이 되며, 오늘 날 그를 권모술수에 능한 책략가로 굳혀지게 만들었다. 몇 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이론을 당시로 국한시켜 이해하는 것도, 오늘 날의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대상에 대한 판단은 일방향을 띠는 단순한 문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정치학 이론들이 이상적 정치공동체로만 지나치게 흘러간다고 생각한 그는 초점을 권력의 획득과 유지의 방안으로 돌리면서 정치가의 권력(힘과 능력)과 조직공동체를 중요하게 인식한 것이다.

 

"군주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잊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 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게 된다."

 

당시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로서 작은 도시들로 분열된 쪼개진 케익 같았고 마키아벨리는 이런 이탈리아의 분열된 상황을 좋지 않게 보고 비판하려 했던 걸로 보인다. 악을 행해서라도 선한 목적을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지만, 일단 선하고 안정된 사회제도(국가)가 뒷받침 되어야만 세분화된 정책의 정당성을 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자를 행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선(善)과 윤리를 잠시 내려놓고 달려가도 괜찮다는 의미는 옳기도 한 것이다. 그는 '불가피하게' 그럴 수도 있음을 인정한 것이지, 윤리를 아예 배제시켜야 한다는 극한의 의미가 아니었다. 또한 관용과 도덕 만으로 공화정을 묵인한다면 혼란한 이탈리아에 혼란함을 더 가중시킬 뿐이라고 했으며, 불가피한 경우에는 전제정치나 권모술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사회가 중요하긴 하지만 일단 분열된 도시국가들을 하나로 통솔하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새삼 피렌체 공화정의 메디치 가에 대해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만 얼마 전 미켈란젤로 관련 미술사 다큐를 보면서 또 한 번 당시 피렌체의 활짝 꽃피운 르네상스 문화를 동경한 후 읽은 책이라 자연스럽게 '군주'가 아니라 '번영'에 관심이 기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절차를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군주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 아닐까 싶다. 선의의 거짓말도 있고, 다수의 이해관계가 공존하는 한미 FTA 같은 상황도 있는데 나는 늘 그런 결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목적이 모든 악행을 타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다. 실제로도 악행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오늘 날의 도덕 아닌가. 당시 이탈리아의 혼란과 분열 사이에서 느낀 공화정에 대한 답답함을 마키아벨리만큼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답답함이 느껴지기는 한다. 도덕은 거쳐야 할 과정이지, 도덕이라는 절차에 얽매이면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가 없다. 모든 정당성을 일일이 검사받아야 한다면 특히 이해관계를 극복해야 하는 정치의 영역에서는 엄청난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래서 대사의 공관 불가침/문서 불가침/민형사 관할권으로부터의 자유(물론 예외도 있다!)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들은 해당국가에서 공적임무를 처리하는 동안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자격으로 이 모든 것들을 누린다. 한마디로 공적임무 처리기간 내에는 어떠한 개인적 잘못도 묻지 않는다. 도덕에 얽매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가장 큰 반증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책임은 또 다른 문제다. 선한 목적을 타당화시키기 위해 과정이나 절차를 불가피하게 묵인해준다고 치자. 행여 선한 목적이 변질되어 악한 결과로 나타났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마키아벨리의 이론에는 이 또한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었겠지만 오늘 날 이 문제는 단순히 넘어갈 수가 없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게 재밌다. 결론은 항상 엉뚱한 생각으로 가지만 내가 이들 시대에 태어났어도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라면서 자화자찬하면 더 재밌다. 아프리카를 버릴 만큼. 그래서 독서가 갑자기 옛날에 읽다만 이제 존재조차 옛날 이야기가 된 <로마인 이야기> 읽기로 건너뛰었다. 여러 권을 동시에 읽지만 관심사가 제일 깊은 책이 더 자주 손에 잡힐 수밖에 없다. 로마, 르네상스, 이탈리아가 내 로망의 정점을 찍는 단어들이긴 한데, 뭔가에 빠지기에 날이 점점 더워진다. 세상에, 더워더워더워더워더워. 날씨를 움직이는 건 군주가 할 수 없는 일일까. 쫌 해달라고 해보지. 미실처럼 하늘이시여, 하면서 제사라도.. 덥지 말라고, 쫌만 더우라고.. 이 책을 읽어서 이승기의 국가(?)가 이해되지는 않았다. 애초 독서의 시작이 불순했기 때문에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거겠지만. 뭐든 이런 식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끝까지 갈 수 있는 저질 의지력이라는 점은 반성한다. 내 몰입이 지속적이지 못한 건 프로이트식으로 볼 때 성적억압과 결핍 때문..( '') 다음 차례는 플라톤의 <국가론>인데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더 끌린다. 언젠가 찜해뒀던 거다. 그치만 아아, 진짜 생각만 해도 정신이 덥다. -_-;; 아이스크림 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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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마제국, 영광의 날들에 바치는 글
    from 너의 의미 2013-06-27 06:55 
    시오노 나나미의 <살로메 유모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원래는 읽다만 <로마인 이야기>를 끝까지 보려고 했지만 워낙 스펙타클한데다 길기도 길고 다양한 캐릭터의 복합적이고 연속적인 등장으로 심심할 틈 전혀 안 주는 이 책도 어쩔 수 없는 인문서이다보니, 한 눈 안 팔고 들입다 끝까지 팔 수는 없었다. 20대 초반에 읽으려던 것보다 확실히 편해지고 이해의 폭도 커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읽는대로 꿀꺽꿀꺽 소화가 잘 되는 건 아니었다.
  2. 딸기향 베네치아
    from 너의 의미 2013-06-27 06:56 
    세상에 단 하나, 혼자 떠나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은 소도시가 있다면 그건 베네치아다. 산타루치아역으로 통하는, 들어서자마자 짠 비릿내가 훅 끼쳐오는(나는 부산을 떠나본 적 없는 부산사람이라 다른 지방 사람들이 부산역에 내릴 때 그렇더라는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정말로 그랬는데 이건 과장이 아니라 그곳은 기차역 바로 앞이 바다니까 당연한 것이다) 리알토 다리와 바포레토와 곤돌라, 산 마르코 성당과 카사노바의 도시. 마지막으로 물의 도시
 
 
비로그인 2012-05-0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정말이지 무게감 넘치는 고전들이네요. 책장에 장식용으로 꽂아놓는 책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듯한 ㅋㅋ 아직까지 저의 독서는 취미생활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창작의 밑거름이 되고 지식의 재료가 되겠지만, 그래도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읽을 필요가 있겠어요. 저는 요새 도스도예프스끼를 읽는데 진도가 팍팍 안 나가서 (재미는 있는데 너무 두꺼워요!) 다른 책에 눈동냥하고 다시 돌아오고 문어다리 비슷한 형국이랍니다 ㅎㅎ 또 요새는 시집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소설보다 시가 더 좋다니까요! :)

아이스크림은 뭘로 사오셨어요? 저는 쿠앤크가 제일 좋아요. 제 동기는 서주 아이스바? 우유맛 나는 그게 최고라고 하더라구요. 제가 무슨 우유를 얼려서 먹어? 이랬더니, 아이스크림은 순수한 맛이 제일이라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그러대요. ( '').. 아, 저도 목이 타네요.

아이리시스 2012-05-08 00:04   좋아요 0 | URL
안 갔어요. 이제 가기엔 나는 소중하니까..( '') 밤 12시에 아이스크림 사러가는 여자는 좀.. 술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저는요, 스물한 살의 봄에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수다쟁이님이 더 멋진 것 같아요. 제 생각엔 목적의식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입맛에 맞는 것만 읽는 건 직업 생기고 진짜 취미생활일 때는 좋은 것 같은데 수다쟁이님은 어리고 또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까요.. 여러가지 의미에서.. 제가 지나고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아요. 시가 좋죠! 시세계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공감)

근데 저는 읽는 나도 즐기기 때문에 시보다는 지식이..( '') 지식보다는 내 글이..( '') 아, 진짜 막 이래요ㅋㅋㅋ 아이스크림은 요즘 월드콘 먹고 있는데, 그때그때 달라요. 더울 때는 수박바나 메로나, 호두마루도 좋고 저도 쿠앤크 좋아해요. 우유맛 나는 것도 좋고 아, 다 좋네ㅋㅋㅋ

마녀고양이 2012-05-0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마인이야기는 카이사르 읽고 멈춤 상태인데,,, ㅠㅠ,
아이리님은 군주론을 읽으셨나 보네요. 저는 정치 관련 서적은 멀~~리 하고 싶어져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희망이 별로 없다 머 이런 짜증이랄까. ^^

배고파요, 학교 다녀오니까 더 고파... ㅠㅠ.
아이리님 아이스크림 안 샀다구요? 에잇, 나랑 똑같은 시간대에 먹고, 함께 굴러다녀야하는데!

아이리시스 2012-05-08 00:40   좋아요 0 | URL
지금 마고님 서재에서 답글 없이 돌아오는 길임ㅋㅋㅋ 저는 아직 로마는 시작도 안하고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기 전이라던가 뭐라던가 1권 시작중인데요, 히히히(뭐냐, 이 읽은 척은_-) 멀리하고픈 마음 공감 백배! 오늘 재단에서 5월 3주기 기념행사 알림책자 날아와서요, 아까 잠깐 침울해서 또 눙무리ㅠㅠㅠ 나려고 했지만 울지는 않았어요. 어쩐지 서러워요. 좋은 봄날을 정치적으로 싸우면서 이렇게 보낸다는 게! 그러는 정치인들을 보는 게!!

이제 오셨어요? 완전 학구파 으하하 부러워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얼른 식사하세요! 아이스크림은 낼 꼭 한보따리 사다놓을 거예요!!! 저는 아이스크림 안먹어도 집에서 굴러다녀요. 걱정마세요! ㅋㅋㅋㅋㅋ

맥거핀 2012-05-0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은 정말 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시는 군요. 마키아벨리든 뭐든 간에 그 자체보다는 그 사상을 자기나름대로 대강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주장(혹은 정책)을 합리화하는 도구로서만 삼는 후세들이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랫동네는 날씨가 어떤가요? 여기는 왠지 꾸물꾸물하고 뭔가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날씨군요.^^;

아이리시스 2012-05-09 18:11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책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맥거핀님도 좋아해요. 와우. 사실은 철학이나 과학 같은 거 왜 그렇게 사상 싸움을 해대나, 그걸 우린 왜 읽고 아는 체 하고 연구하고 그러나 저는 항상 궁금했는데요. 누가 먼저 말했는데 내가 먼저 말한 척 하면 부끄러우니까 알기 위해서 그러는 건가.. 그들도 그 시대에서 보면 모두들 스스로 극복 못한 모순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게 뭐 대단하다고,가 제 생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건 대단한 거고 그래요.(뭐라는 거지..)

날씨 안 좋아요! 기분도 안 좋아요! 꾸물꾸물 흐리고 황사처럼 누런 세상인데요.으흐흐.

이진 2012-05-0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나 시험 끝났어요 :)
꺄아~ 시험끝나고 나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부둥켜안고는 방방 뛰며 소리를 질렀답니다. 시험이 끝나서도 있지만 내일이 학교 개교 기념일이라 하루 쉬거든요! 친구들은 시내로 놀러가는 계획을 모두 짜놨던데 저는 모자란 잠을 보충할겁니다. 푹 자야죠 푹.
나는 저런 책 못읽겠어요. 지금 나이에 못 읽는 건 당연한 거 맞죠? ㅎㅎㅎㅎ 그런데 서울 사는애들은 읽을텐데... 하면서도 안 읽고 있답니다. 그냥 소설도 이해하기 힘든걸요.

참, 전국 일등의 꿈은 물건너 갔습니다. 백점을 노렸던 사회와 국어는 각각 1문제 2문제씩 틀렸고(사회는 정말 만점이었는데 마킹실수... 하 듣고나서 엄청난 멘붕을 경험했습니다. 어차피 시험 내내 멘붕상태였지만요) 수학은 무려 ... 상상도 못할 1/5사태가..............................

아이리시스 2012-05-09 18:14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원래 시험은 사흘 정도 가는데 이틀 만에 끝났네요? 아.. 또 있는 건가.. 개교기념일 지나고! 그럼 오늘 쉬고 내일 또 시험 치는 건가? 으하하. 여튼 신나겠어요. 끝난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 생각나서 부러워요. 네, 지금 나이에 못 읽는 거 당연한 거.. 서울 사는 애들은 읽어요? 히히히. 서울 사는 애들도 안 읽어요! 걱정마요.푸하하.

참, 그래도 전국 이등은 할 수 있겠죠? 근데 사회랑 국어는 엄청 잘했네요. 김태희는 중학교 내내 올백을 맞았다고 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그렇지 않았겠죠?( '') 그러니까 안심해요. 수학은 그럼 20점인 거예요?ㅋㅋㅋ 미안.

에세르 2012-05-0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친구"에서 준석(유오성)이 상택(서태화)에게 하는 말이 결국 마키아 벨리가 했던 말이라는 것을 최근 어떤 글을 읽다가 깨달았습니다. " 타인을 손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에는 그 복수를 겁낼 필요가 없을 만큼 통렬하게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군주론)" 과연, "통치자가 민중을 이끌려면 존경의 대상이 되거나 공포의 대상이 되어라. 존경을 받기 어렵거든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라."라고 말한 마키아벨리답다고 느꼈습니다. 군주론에 대해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리시스 2012-05-09 18:18   좋아요 0 | URL
네! 에세르님 댓글 보면서 생각해보니까 저희 아빠도 예전에 다음 대통령 얘기하면서..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는 독재자를 뽑아야 한다고..( '') 마키아벨리다운 거였네요!!! 으하하. 이해는 되는데요, 집에 식구가 많은데 각자 다른 음식 먹겠다고 하면 통일시키기 어렵잖아요? 요리하는 엄마만 피곤해지고.그럴 때는 충분히 이해가 돼요!! 공포로 단결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그래도 좀 무섭긴 해요. 저도 평소에는 사람은 봐주고 잘해줄 수록 기어오르기 때문에(실제로 많이 당해봐서)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고 안되는 건 안되는 거란 걸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조직은 오죽할까요. 저는 인정에 끌리는 선택을 잘 하는 편인데도 머릿속으로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말도 그렇게 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많아요.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