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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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내가 아직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 곧 다가올 20대가 가져다 줄 찬란한 자유를 동경하며 읽었던 <깊은 슬픔>의 세 주인공 은서와 완과 세를 잊지 못하는 이들에게 작가 스스로 청춘소설이라 칭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웬만해선 거부하기 힘든 반가운 선물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간되자마자 수많은 기사와 서평을 뱉어놓는 소위 ‘누구나 다 읽는’ 베스트셀러에 지레 거부감이 들만도 한데 마음과는 반대로 정신없이 읽어 내려간 지 사흘째,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한참을 앉아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상에 뛰어들던 바로 그 날부터 누구도 몰랐겠지만 청춘이라는 실체 없는 이름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끝없는 고민들이 이어졌다. 책을 읽은 후 따라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소심한 방황과 여름날의 열병이 혼자서만 좋았다.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절망스러웠지만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은 과거가 되어버린 윤과 명서의 현재보다 있는 힘껏 사랑하고 아파하다 스스로 소멸한 단이와 미루의 빛나는 현재가 더 부럽기까지 했다. 거기에 비하면 현재 내 청춘은 얼마나 보잘 것 없이 흘러가는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비겁한 나지만 그들처럼 예쁜 청춘으로 기억되고 싶은 소망까지 품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제야 겨우 이런 생각이 든다. 나도 훗날 나의 찬란한 청춘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다.  

언젠가 계절이 겨울 뿐이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했다. 저마다의 축축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거나 스스로를 가둬놓고 우울해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의 청춘은 온통 겨울 뿐인 것 같은데도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토록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을 보면. 나의 청춘은 그들과 많이 다르다. ‘나’를 고민하며 캠퍼스와 거리를 배회하지 않았고, 세상과의 소통에 특히 신경 쓰지도 않았다. 강의실이나 도서관은 학점과 토익에 열 올리는, 미래를 아주 잘 설계하고 있는 어디를 가든 비슷한 ‘나’들로만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의실 아니면 거리를 헤매야 할 만큼 갈 곳이 없지 않았고, 강의 첫날부터 크리스토프를 얘기하는 윤교수 같은 스승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을 정도의 자유는 언제나 주어졌었기 때문이다. 그걸 누리고 말고는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시대가 아니라 청춘이라면 윤과 단이 그리고 명서와 미루의 절망과 허무, 얼마 정도의 희망이 단지 그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해 비틀거리고, 세상을 다 짊어진 것 마냥 우울을 가장하는 것은. 단지 과거에는 책과 음악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다면 지금은 술로 모든 고민을 그저 제쳐두는 것 뿐. 지금의 청춘과 과거의 청춘, 딱 그만큼의 차이가 아닐까. 신경숙의 소설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동시에 지나친 감상주의로 치부하고 마는 것도 어쩌면 자신의 내면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후회스런 시간들에 대한 후유증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한 몸처럼 지냈지만 대학에 가게 되면서 떨어진 윤과 단이. 외동딸이면서 엄마를 잃은 윤은 낯선 도시에서 늘 외롭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한다. 사람은 어디서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알아보는 법일까. 윤교수의 강의에서 자신과 단이 같은 명서와 미루를 만나면서 질투, 시기가 뒤섞인 호기심을 품은 것이 인연의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이렇게 힘들었나 싶을 만큼 그들은 어렵게 서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함께하는 순간이 평생을 지탱하게 될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줄을 모른 채.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 자신보다 상대를 더 잘 알 것 같은 두 쌍의 커플. 사랑은 어렴풋하고 행복은 짧은 대신 이별은 아프고 길기만 하다. 윤을 향한 단이의 사랑은 옅게 그려졌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해서 단이의 죽음이 그저 에피소드일 수 없었다. 윤에게 단이는 자신의 전부이자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미루의 아픔은 또 어떤가. 언니를 향한 죄책감에 눌려 살아있는 내내 제대로 숨 한 번 쉬지 못했을 미루는 홀연히 사라진 끝에 끝내 세상과 이별을 고하지만 윤에게 있어 단이와 마찬가지로 명서에게 미루 또한 절대로 잊힐 수 없다. 남겨진 이는 사라진 이를 영원히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 형벌이 주어지는 것일까. 이들의 청춘은 왜 이토록 아프기만 할까. 행복의 순간이 지나면 그 행복을 각인시키려는 듯 어느새 불행이 찾아온다. 둘의 농도가 같다면 어째서 행복의 순간보다 절망의 순간이 더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일까. 소설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절망을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청춘의 찬란함이 반드시 절망에서만 오는 이유는.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내가 소설로 며칠 밤을 새워가며 아파하는 것이, 갖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매일 밤 기도하는 것이, 떨어질 것을 알면서 날아오르기를 시도하는 것이 청춘이었으면 좋겠다. 삶을 차곡차곡 살아낼 수 있는 날들이 줄어드는 만큼 내 청춘 또한 빛바래져가겠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추억할거리가 아주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게 희망이 됐든 절망이 됐든 추억의 농도가 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윤은 오랫동안 단이의 편지에 답장하지 못하다가 단이의 죽음 후 6개월 만에 예전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 미루가 식단을 기록하던 노트가 치열한 삶에 대한 미루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처럼 단이에게는 윤이 그랬을 것이다. 어쩌면 미루의 상처보다 그녀를 바라보는 명서의 마음이 훨씬 더 아팠을 것이다. 면회 온 윤을 안으려다 거절당한 후 단이의 절망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네 사람의 찬란한 시절을 지켜봤던 윤교수는 그들의 청춘을 사진 찍듯 그려낼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을지도. 팔 년 만에 걸려온 명서의 전화, 용건 또한 윤교수였다. 윤교수는 그들 모두였다. 각각 반쪽을 잃고 남겨진 윤과 명서가 서로를 품지 못한 채 헤어져야 했던 날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함께 있으면서 상처를 아물게 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고작 팔 년이면 희미해질 시간들인데도 불구하고. 한 때 죽음을 생각할 만큼 전부였는데도 시간이 흐르면 흐릿해지는 것이 슬펐다. 살아가는 것은 물 흐르는 것처럼 순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은 억울하다. 치열한 이 순간도, 전부라 믿는 이 시간들도 언젠가 허깨비처럼 사라질 거라는 사실이 두렵다. 그래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읽히는 것이다. 하지만 아픔을 조금이나마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되면 청춘을 좀 더 경쾌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우선 누군가를 아주 잘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로 한다. 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기로 한다. 때론 그저 견디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무엇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해보려고 한다. 인생에서 소중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 비단 청춘만 소중한 것이 아닐 테니 청춘이라 해서 과시할 것도 없다. 자신에게 소중하게 기억되는 순간이 바로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한 가지는 에밀리였다. 읽는 내내 애정을 쏟았는데 책을 덮은 후에도 고양이 에밀리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주인공들의 상처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에밀리. 다른 인물들은 아쉬운 대로 그저 가만히 묻어둘 수 있겠는데 에밀리는 어디선가 불쑥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하다못해 윤교수를 찾아가 왜 미루를 그대로 두었느냐고, 윤을 찾아가 단이를 왜 절망시켰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참겠는데, 에밀리를 보고 싶은 마음은 날이 지날수록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커지기만 한다. 아마 모두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그 시절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에밀리라서 그런가 보다. 소리를 듣지 못해서 온 세상을 자기 것으로만 채웠을 에밀리의 눈 속에 사랑스러웠던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가 모두 들어있을 것 같아서 그런가 보다. 에밀리에게 그들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미루의 언니가 사랑했던 그 사람과 단이의 억울한 사연을 사랑스러운 에밀리는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어깨에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을 하나 얹은 것처럼 몸이 무겁고 가슴이 아려온다. 늘 “내가 그쪽으로 갈까.”라는 말보다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더 많이 하며 지냈던 날들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다. 무엇보다 “오늘을 잊지 말자.”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 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윤과 단이, 명서와 미루가 함께 지냈던 며칠처럼 온전히 반짝이는 청춘을 지내고 싶다. 오래도록 잊혀질리 없겠지만 이제 그만 보내주려 한다. 결핍은 내 사전에 없다. 아련하고 예쁘게 기억되는 청춘을 보내고 싶지만 나는 다만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세상에만 살고 싶다. 그렇게만 마음을 주고받으며 이 혼란한 시간들을 걸어 나가고 싶다. 남자와 여자, 친구와 가족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지만 아끼고 사랑한다는 의미만은 명확한 아날로그식 청춘의 사랑법을 닮고 싶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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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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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사는 것과 왕의 아들로 사는 것 중 어느 삶이 더 고달프다 말할까. 하필이면 나라의 형세나 시국이 한치앞을 내다볼 수 없을만큼 위험천만한 때라면? 누구라도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권한을 갖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겠다. 어느 쪽이든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왕으로 살든 왕의 아들로 살든 그것은 짐이었을 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주인공이 되어야 마땅한 소외된 삶, 이라고 표현하면 그 의미가 전달될까. 그 중에 명과 청의 싸움에 적의 볼모로 끌려가 8년이란 세월을 보내며 나라의 패배와 굴욕, 비루함과 고독을 모두 끌어안고 살았던 소현이 있다. 어쩌면 소현은 왕의 아들 중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죄, 아비를 잘못 둔 죄. 그것이 과연 그의 죄라 할까. 그는 조선 16대 왕 인조의 첫째 아들이었다. 일찍이 세자로 책봉되었던 그는 시국이 평안했다면 당연히 인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지 못했고 그의 자식과 후손들 또한 줄줄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일이라지만 인조의 소현세자 독살설은 어떤 의미에서 영조와 사도세자보다 더 비극적이라 할 수 있다. 

인조반정을 기억하는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니 인조와 소현세자를 다룬 이야기를 꽤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왕실을 다루는 정통사극이 아닌 드라마 <최강칠우>나 <추노>에서도 인조와 소현세자가 등장한다. 열심히 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TV 속에서 한동안 인조시대가 펼쳐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요즘은 정통사극 <동이>가 우세하고 있으니 숙종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 아무튼 중립외교를 지향하는 똑똑한 광해군을 몰아내고 광해군과는 다른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하며 서인들의 압도적 지지로 왕의 자리에 오른 인조의 정책들을 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서인들 또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허수아비 왕으로 인조를 선택했으니 그것만 봐도 시대가 얼마나 험난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인숙의 소설 <소현>이 인조시대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상당부분 청에 잡혀간 소현에게 초점이 맞춰져 여기서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현이란 이름을 가졌던 자. 태어나자마자 당연히 세자의 자리에 올라갔던 이름. 인조의 아들이란 이유로 8년의 타국살이와 뼛속까지 시린 고독을 감내해야 했던 삶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이 소설이 바로 소현세자가 타국에서 보낸 마지막 2년을 밀도있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과 청, 그리고 명. 조선 중기 역사에서 세 나라의 관계는 인조시대를 정확히 설명한다. 전쟁의 패배 때문에 오랑캐의 왕 앞에 피를 철철 흘릴 때까지 땅바닥에 이마를 찧었다는 인조에게 비극은 자신의 굴복이 다가 아니었다. 명과 청의 전쟁에 대한 명목으로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의 볼모로 보내야 했다. 철저하고 처절한 패배.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무엇이 정의인지 아닌지를 아는 나이었기에 소현의 볼모살이는 봉림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무거운 침묵이었다. 굴복의 의미로 적국에게 바쳐진 입장에서 소현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적의 패배와 굴욕을 그다지도 바랐건만 적은 오랫동안 승리와 영광만을 보여주었다. 언젠가 조선이 우뚝 서는 날, 나 또한 우뚝 섰을 때 모든 것을 돌려주리라는 계산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조선으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등지면서 영원히 소현세자로 남는다. 청에 있는 소현세자의 모반을 의심하게 되는 인조, 소현이 마침내 조선에 돌아와 청의 문물을 수용할 것을 제안한 것에 분노한 인조가 그를 독살했다는 설, 소현의 조용하고 드러내지 않는 성격과 청에서의 오랜 볼모생활 탓에 고독과 스트레스가 병이 되어 죽었다는 설도 있는 것으로 안다. 진실이 어떤 것이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소설의 좋은 점은 철저히 소현이 되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가 소현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왕의 아들이 할 수 있었던 일과 해야 했을 일에 대해 생각해봤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아버지에게 누가 되지 않는 아들이 되려는 것과 적어도 겉으로는 내 나라 아닌 적의 승리를 기원해야 했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을 것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책을 덮는데 모두의 삶이 각자 서글펐다. 적국인 청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구도와 청의 수장인 도르곤의 인간적 고뇌가 언뜻 비치기도 해서 마음은 더 심란해졌다. 도르곤과 소현세자는 각자의 나라를 대표하는 수장이고 세자이지만 그들 또한 인간이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던 건 마찬가지였다. 세상과 시대의 어쩔 수 없음이 너무 헛헛해서 슬펐고, 떠날 때까지 울음 한 번 제대로 울지 못했을, 마음에 담긴 작은 생각조차 들킬까 염려돼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을 소현세자의 수많은 망설임과 침묵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비극적 삶을 살다 간 역사 속 인물 앞에 오늘의 우리는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하며, 어떤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까를 수없이 되묻는다. 울 수 없다. 우린 이 역사를 떠받치는 후손이며, 여전히 이 땅을 지키며 살아야 할 주인이기 때문이다. 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내가 선 바로 이 땅, 여기. 내 나라를 사랑하는 법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다. 소현세자가 낯선 땅에서 느꼈을 소외와 고독과 아픔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나라에 대한 소중한 마음과 고민들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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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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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고민을 언제부터 하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아마 나무랄 데라곤 전혀 없는 천재적인 음악성을 타고났으면서도 자신의 피부색과 뿌리가 한계가 된다고 믿은 나머지,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강도의 성형수술과 피부이식을 서른 번이나 했다는 마이클 잭슨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중학교 국어시간 이후가 아니었을까. 흑과 백 같은 이분법적 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라는 걸 전혀 몰랐던 나의 열여섯. 그러고 보니 필립 로스가 그리는 <휴먼 스테인>의 배경이 바로 내가 인간이라는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중학교 시절의 무렵이다.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집무실과 백악관 주차장 등지에서 스무 살을 갓 넘긴 여비서와 사랑을 나누며 세계가 떠들썩할 정도로 강도 높은 스캔들을 선물했던 바로 그 해는 주인공 콜먼이 일흔 하나의 나이에 서른넷의 포니아와 사랑을 나누던 때와 일치한다. 버크셔 산악지대의 오두막에서 세상과 결별한 채 글을 쓰는 네이선은 콜먼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한 사람, 콜먼의 친구이자 대변인 그리고 작가로 등장한다. 우린 네이선을 통해 콜먼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느낀다. 
 

콜먼은 은퇴한 대학교수다. 유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학장을 지낼 만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고, 학장으로서의 콜먼이 이룩한 업적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우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일로 자존감을 찾고 싶었던 콜먼이 자신의 강의 시간에 오래도록 출석하지 않는 학생들을 두고 유령들(spooks)이란 표현을 썼다가 하필 그 단어에 검둥이들이란 뜻이 있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려 온갖 비난을 당하고 쫓겨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아무리 호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함 때문에 항상 씩씩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내 아이리스를 잃게 되자 콜먼의 슬픔과 절망은 극에 달한다. 그를 절망의 수렁에서 구해준 이가 바로 서른넷의 포니아다. 그녀 또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계부에게 성희롱을 당한 상처로 집을 떠났다. 훗날 결혼하지만 남편 역시 베트남 전쟁의 상흔으로 끊임없이 포니아를 괴롭히는 등 녹록치 않은 삶을 산다. 그래서인지 콜먼과 포니아는 만남과 동시에 서로의 결핍과 상처를 알아본다. 성공한 유태인인 줄 알았던 콜먼이 사실은 마이클 잭슨과 같은 인종 정체성을 앓아온 점이나 똑똑한 포니아가 스스로 문맹인을 자처해 살아가는 점은 비록 충격이긴 하나 20세기 끝자락의 비극을 잘 나타내준다. 
 

그들의 사랑은 포니아 남편의 끈질긴 방해로 결국 파멸을 맞는다. 그것이 모두가 진정 원한 삶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원한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과거를 숨기거나 버려야만 나아갈 수 있었던 콜먼과 포니아가 사랑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콜먼과 포니아를 둘러싼 세상은 호락하지 않았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괄시는 흑인으로서 받는 멸시보다 오히려 나았고, 어린 딸이 당한 희롱을 친엄마조차 믿어주지 않는 현실을 견디려면 아는 것을 모른 체하며 살아가는 게 편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고립되었다. 콜먼과 포니아는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만든 건 세상이지만 세상은 그들을 상처 속에 살게 했다. 피부색을 바꾸고, 생김새를 고치고, 아는 것을 모른 체 한다 해서 달라지는 것이 세상은 아니건만, 마이클 잭슨이 그랬듯 콜먼과 포니아 또한 뾰족한 대안이 없던 탓이다. 화가 난다. 철이 든 순간부터 나는 나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나를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불편했다. 누가 어떻게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흑과 백, 로맨스와 불륜, 아름다움과 추함, 행복과 불행. 그런 것들만 인생인가. 성별, 나이, 학력, 통장잔고. 그런 것들만 나인가. 도대체 나를 나답게 하는 기준과 삶을 삶답게 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기준이 있다한들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자꾸만 세상이 어렵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나다. 또한 콜먼과 포니아처럼 살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살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해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 결심의 첫 번째 증거로 감히 콜먼과 포니아의 영원함을 옹호한다. 비록 비아그라를 복용해야 하고, 육체의 탐닉이라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분노이므로. 우린 누구나 어떤 것에 속해있는 동시에 어떤 것에도 속해있지 않다. 흑백논리나 편견, 선입견 같은 것들은 결국 오점으로 작용할뿐더러 아무데도 도움 되지 않는다. 일흔 한 살의 남자가 서른 네 살의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어디서,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와 타인이 다르다고 둘 중에 하나가 틀렸다는 억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마 그런 억측들이 이 세상을 만들었을 것이다.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나를 나답지 못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있는 그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것. 나는 필립 로스의 모든 문장들을 버리고 내가 만들어낸 단 하나의 문장만을 가슴에 담는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미국적인 문제들은 21세가 10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성형수술을 하고,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 앞에 망설인다. 또 누군가에게는 정의에 눈감고 불의에 동조하는 것이 삶의 전부다. 결국 필립 로스가 말하는 <휴먼 스테인>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내일의 문제이고 미래의 문제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공통으로 고민해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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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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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그동안 내게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김훈의 소설들.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는데 문학을 공부하면서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그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늘 죄책감처럼 가슴을 짓눌렀다. 어쩌면 사회 비판적 성향이 짙어 보이는 작가의 인상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무슨 말을 하든 게으른 나의 비겁한 변명이란 걸 알면서 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읽지 못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가였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그런 내가 감히 현대문학을 아는 척 해도 될까. 김훈을 읽지 않고는 현대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처절한 반성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읽을 기회라는 게 주어진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세련됨이 현대적인 거라고, 현대적이어야 청춘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던 시절에 소재조차 고루해보이는 김훈의 소설이 내 시야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노래> 시리즈가 한창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할 때 구석에서 21세기에 무슨 이순신 일대기야 하던 건 나였고, <강산무진>과 <남한산성>이 인기 가도를 질주할 때 또 강이랑 산이야 하며 하품하던 것 역시 나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겨우 지금에 와서야 그가 내뱉는 세계의 아릿함을 모르고 지나온 20대의 절반이 못내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내게는 언제나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것 투성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시조인지 시인지 모르는 작자미상의 公無渡河歌는 옛 것을 지루해하던 나에게 제일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어준 옛 글이었다. 우연히 듣게 된 국문학 수업에서 뒤늦게 옛 시의 고풍스러움을 깨닫게 된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렇게 김훈의 <공무도하>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모든 현상을 어떻게든 인연으로 엮어 보려는 엉뚱한 버릇이 있다. 한 번 발동하기 시작하면 복잡미묘한 세상도 때로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나는 그게 좋다. 온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서 꿈틀대는 느낌. 그럴 때 세상은 완전한 내 것이 된다. 하지만 내가 쥔 세상이 반드시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상은 처음부터 내가 부른다고 달려오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던 탓이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면 나는 이미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렇다. 죽음의 강 레테는 한 번 건너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건너고 싶을 때 건널 수 없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없지만 돌고 돌다보면 어느 순간 같은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는 걸 우린 그저 본능으로 알고 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애써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없는 것, 나의 것과 너의 것이 동일하면서도 다른 것, 눈 앞에 건너야 할 강이 있지만 건널 수 없는 것.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서 이것 아닌 것도 저것 아닌 것도 아닌 것, 삶. 김훈의 <공무도하>는 인간 본연의 비루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호들갑스럽지 않고 오히려 담담하다. 지금은 모두 혼자이지만 언제든 함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살아간다는 것은 더 없이 치열하면서도 또한 치사하다. 언제 죽어도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삶들이 지천에 널렸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는 사실만이 유일한 사실이다. 모든 인간사의 중심에서 부지런히 사건을 날라다 주는 기자 문정수를 통해 우리는 비로소 돌아보게 된다. 의붓여동생을 강간한 친아버지를 쇠절구로 쳐죽인 아들, 혼자 방치되다시피 자라다 키우던 개에게 물려 죽은 소년, 어딘가에서 TV를 통해 소년의 죽음을 접하고 소멸한 엄마, 누군가를 고해바친 댓가로 살아난 고얀 목숨, 생산직 노동자의 취중 실족사, 아직 개통되지 않은 도로에서 크레인에 치여 즉사한 17세 소녀, 딸의 보상금으로 거액의 빚을 갚은 아버지, 결혼이민으로 시집온 베트남 여인, 그리고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저 관찰자의 역할 밖에는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 우리 중에 주인공도 있고, 관찰자도 있다. 누군가는 주인공이고 누군가는 관찰자가 되는 것, 때로 두 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사다. 인간이 처음부터 비열하고 치사하고 더러웠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웠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소설 초반 발생하는 홍수는 강을 건너지도, 건너지 않을 수도 없는 이들의 발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또한 마지막까지 강을 건너지 못하는 인간의 추악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홍수는 정말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초자연적 힘일까? 어쩌면 홍수야말로 인간의 욕망과 허상이 만들어낸 거울 속의 거짓 세상, 그 집합체가 아닐까? 그렇다면 해망이 가진 과거의 상흔과 현재 해망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업 앞에 보상이라는 이름의 작업이 과연 가능할까? 합리와 불합리, 선과 악, 이성과 비이성이 부딪치는 빈번한 소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진실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의 욕망도 흘러가고 있다는 것 뿐. 그것은 동시에 걸어갈 수 없기에 언제나 어긋날 수 밖에 없는 보상불가능한, 시간 너머의 것이다. 개발로 인한 삶의 터전을 돈으로 보상할 수 있다면, 이미 일그러진 그들의 삶과 빼앗긴 평화와 충만의 시간은 과연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우린 아무도 낙타처럼 가볍게 시간 너머로 갈 수 없다. 강을 건널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달아나는 것을 추적할 수도 없다. 인간중심적 개발과 자연친화적 개발이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고귀를 물질로 환산할 수는 없어야 한다. 인연의 맺고 끊음을 반복하며 생존 자체로 파닥거리던 인간이 언제부터 돈을 위해 인연을 응집시키고 해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단 말인가. 이 비극을 단지 바람에 날리는 소금먼지나 똥먼지를 보상하듯 돈으로 환산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살기 위해 타인의 장기를 사는 행위가 종교적 신앙과 박애의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정당성의 날개를 달았듯, 온 존재를 다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노을과 안개의 습성처럼, 얼마남지 않은 마지막 날들의 시간을 우린 악착같이 양심을 파는데 할애하고 있다. 온 세상의 모든 관심이 하나로 집중되는 날, 누군가는 불행에 떠밀려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인데, 삶인데, 인간사를 두고 감히 누가, 존재의 옳고 그름을, 무슨 근거로, 어떤 방식으로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로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 좀 더 나은 삶이, 인간이, 세상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자. 그럴 수만 있다면 홍수가 그칠지도, 희망이 고개를 들이밀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의 미래를 큰소리로 말하자. 희망을 끌어안자. 말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를 더 많이 가진 기자 문정수는 자신을 태우고 강을 건너줄 노목희가 떠난 한국에서, 강변의 아침 안개를 무사히 맞이할 수 있을까. 그는 또다시 자신에게 담긴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였으면 좋겠다. 슬픔, 아픔, 비열함, 희망. 이 모든 것이 나였으면 좋겠다. 기삿거리가 전혀 없는 서북 경찰서에서 동남 경찰서로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인생 무게가 더 가벼워질 수 있도록. 내가 날면 모든 것이 날도록. 내가 건너면 모든 것이 함께 건너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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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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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사소한 장난에도 까르르 웃던 단발머리 소녀시절부터 하루키를 읽었다. 뭘 알고 시작했던 것은 아니다. <상실의 시대>부터 <어둠의 저편>까지 5년을 꼬박 읽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 시절, 저 모퉁이를 돌면 처음 보는 세계와 조우할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나 거울 속의 내가 진짜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혼돈이고 방황이었다. 어떤 날은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 일찌감치 책을 덮었고 어떤 날은 나의 실체와 만날 욕망에 몸서리치며 책을 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읽고자 하는 욕망을 멈출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세라쟈드의 유혹에 못 이기는 샤리아르 왕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시엔 미흡한 표현력 때문에 하루키의 다른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얘기한다는 건 시도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는 금기처럼 여겨졌다. 흡인력은 대단하지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 늘 막히고 마는 것이 내 탓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루키의 세계관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가 창조한 세계 속에 나는 살았다. 5년 전 일이다. 이번엔 반드시 알고 싶었다. 표현하고도 싶었다. 목적은 단 하나. 그의 소설 속에 투입되는 쓸모없는 소품 말고 작품 바깥에서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똑똑한 말이 되고 싶었다. 바로 그거였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려는 욕망과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싶은 비평욕구가 충돌했다. 그를 처음 만난 후로 무려 열 살이나 더 자랐으니 못할 것도 없다. 어느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 넘치는 독자가 되었다. 드디어 모든 페이지를 다 덮고 이 글을 쓴다.

굳이 고백하자면 <1Q84>를 읽는 긴 시간동안 내가 과연 어디에 존재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아오마메와 덴고를 만난 시간이 진짜였는지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들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만나고 있으면서도 아직 만나지 않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실체와 관념이 뒤섞인 온갖 알레고리로 가득 찬 아이러니한 세계에 들어서는 일은 그저 신비롭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기에 해석 같은 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것만으로도 하루키는 대단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것이리라. 어쨌든 그의 새 소설은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의미에서 낯선 경이로움으로 다가왔다. 내가 자랐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는 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모든 세계를 포함하는 우주 그 자체다. 비록 문학이지만 심리학, 사회학, 종교학, 철학, 역사학, 과학을 버물린 폭풍 같은 단 하나의 텍스트다. 초현실적 감각과 빨려들듯 선명한 이미지에 감탄했다.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믿지 않으면 그만이다. 펼칠 때부터 내 것이 아니었으니 모두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내 것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어느새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긴장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나를 발견한다. 빠져들면 안 된다. 동화되어서도 안 된다. 나는 평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효과는 있었다. 적어도 나는, 아직은, 그 거대한 우주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당신은 몇 개입니까? 도대체 수많은 당신 중에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가짜입니까? 나는 스물일곱 개 존재합니다. 아니, 그건 년(年) 단위로 볼 때 얘기고, 만약 월(月) 단위로 본다면 나를 도대체 몇 개라고 해야 할지, 만약 일(日) 아니 시(時), 분(分), 초(秒)로 본다면 과연 내가 몇 개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나눈다면,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의 수로 나눈다면, 시시각각 변하는 머릿속 생각으로 나눈다면 과연 나는 몇 개가 될까요? 이것이 진실이다. 우린 아무도 자신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래서 타인을 만들어내고 교감하며 그 중 누군가를 통해 나를 정의하려 한다. 아오마메와 덴고는 알았을까. 자신이 몇 개인지를, 어디까지가 기억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를,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를. 세상에 그 사실을 아는 존재는 딱 하나다. 완벽한 존재, 초자연적 존재, 리틀 피플, 아니 신. 살아가는 동안은 절대로 진짜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아오마메와 덴고가 단 한 번이라도 같은 세상에 함께 존재했다고는 여길 수가 없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엾은 커플은 표면상으로만 보더라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데이트를 할 수도 없고, 껴안을 수도 없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다. 끊임없이 만나려고 애쓰지만 결국은 만날 수 없다. 내가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없는 것처럼. 각기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셀 수 없는 나들은 그저 각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을 할 뿐이다. 종교, 범죄, 성욕, 사랑, 고독도 모두 그런 이유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린 알게 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쥐고 있다한들, 우린 기본적으로 흔들리는 존재이지, 흔드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이동한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삶에서 죽음으로, 사랑에서 증오로, 희망에서 절망으로, 선에서 악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인간에서 신으로, 무엇에서 무엇이 아닌 것으로.

아오마메는 어린 시절 ‘증인회’에서 고립되었던 기억이, 덴고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냉랭한 대우가 오래도록 상처가 되어 남았다. 적어도 진짜라 믿는 세상에서 진짜의 모습을 한 그들은 남들과 같이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아오마메는 살인자, 덴고는 남의 작품을 리라이팅해 문학상을 조작한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오마메와 덴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 두 개인 세계에 있다. 달은 왜 두 개가 되었는가. 상처가 치유되는 지점이 열 살의 교실이라는 점에서 또는 리틀 피플이 택한 필연적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둘은 동일 기억을 공유하는 동일 인물일 수 있다. 그렇다면 리틀 피플은 뭐고 공기 번데기는 또 뭘까. 실체를 알 수 없으므로 끝없는 고민이 필요하다. 우린 누군가와 어떤 기억을 얼마나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방금 전의 현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거대한 저장고에 든 기억이 작가 박민규가 만든 냉장고에서 터져 나오기 전에는 카스테라의 모습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엉클어진 기억들의 존재와 부재를 누구도 제대로 생산해낼 수 없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악과 선, 현실과 환상, 실체와 관념, 죽음과 삶처럼 상반된 것들은 절대로 동시에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해서도 안 된다. 간단한 공식이 파괴되는 순간 비극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나는 저 세계의 나와는 분명 다르다. 나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새로운 세계에서의 실체 또한 그대로일 리 없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실체는 매번 달라진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본질 또한 흔들리게 된다. 내가 변한 것인지 세계가 변한 것인지 알 수 없어진다. 바로 그 때, 1Q84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장 소중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후회의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중하지만 상처가 된 기억. 예를 들면 아오마메와 덴고가 서로에게 이끌렸으나 끝내 말할 수 없었던 사랑 같은 것. 덴고에게 연상의 걸프렌드와 후카에리가 아오마메에게 가는 길이었듯, 아오마메에게 있어 낯선 남자들과의 잠자리는 덴고를 향한 사랑이자 자신을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 그는 과연 어느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내가 너를 부를 때, 너는 무엇을 듣고 있을까? 전화를 하고, 목소리를 듣고, 보고 싶다는 말에 달려온다 해서 달려온 너를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그 때의 너라고 완전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하루키는 자신의 모든 작품에서 늘 욕망의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욕망이 있으면 변형도 있다. 욕망은 속한 세상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뒤틀린다. 내 부모가 재벌이 아닌데 내가 재벌 2세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바로 지금 내가 안은 모든 욕망의 근원이 오로지 나에게만 있으란 법도 없다. 리틀 피플이 만들어낸 덴고의 공기번데기에 열 살의 아오마메가 들었듯 나의 공기번데기를 열면 나만 아는 나의 욕망이 들었음을 그 누구도 아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이어져 있으며 또한 누구와도 이어져 있지 않다. 나를 여러 개로 나눠야 하는 자체가 이미 부조리한 세상에 속해있는 증거다. 그것은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아는 세계와 모르는 세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우주 곳곳에 뿌려져 있는 모든 세상의 것들이 이미 나다. 그건 굳이 공기번데기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미 안다. 아오마메와 덴고에게서는 그저 존재의 본질을 배울 뿐이다.

나의 공기번데기와 그의 공기번데기에 같은 것이 든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모두를 존재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욕망, 기억, 추억 등이 모두 그렇다. <1Q84>는 사랑이야기가 아니지만 내가 알게 된 유일한 사실은 나의 눈, 코, 입, 팔, 다리, 가슴 같은 실체가 매순간의 시간과 보이지 않는 모든 공간에서 관념의 기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속에 이미 사랑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덴고는 아오마메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하루키가 이대로 소설을 끝맺지는 않을 거라는 소식이 일단은 희망적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뒤로 갈수록 의문이 풀리는데 반해 <1Q84>는 불확실성과 비판을 감내해야 할 부분만 잔뜩 남겨두고 영 찝찝하게 끝났기 때문이다. 고마쓰와 연상의 걸프렌드의 부재, 아오마메와 덴고의 재회, 끊임없는 달 타령을 허용한다고 해도 평화를 지향하던 농업 코뮌 단체였던 ‘선구’가 종교단체로 변모한 과정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뜬금없다. 경험상 하루키가 다음 권을 쓴다고 해도 알레고리로 둘러싸인 모든 것들의 실체는 여전히 관념에 휩싸여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3권을 보고 싶은 마음은 그저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읽는 내내 누가 툭 치면 금방이라도 이 세계의 내가 아닌 다른 세계의 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어야 했다. 불바다가, 폭탄이 나를 삼켜버리지 않기를, 2009년에 사는 내가 200Q년으로 이동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이기를,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기를, 나의 모든 것은 언제나 내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느낌은 원래 하루키의 작품이 주는 선물이니 이번에도 고스란히 안고 가려 한다. 다른 어디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현재, 나와 또 다른 내가 또는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이 서로 만나 이야기하고, 밥 먹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기를, 죽음이 아니라 삶이기를,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를, 그래서 행복하기를. 성교로 인한 교접. 비록 짧았지만 어쩐지 그 초월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비약적인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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