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줄곤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올리비아 로드리고의 [Drivers license] 라는 노래. 평소에도 뭔가 꽂히는 노래가 생기면 계속 반복해서 듣는 편이긴한데, 이번처럼 쉬지 않고 계속 들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계속 이 노래가 땡겼다고 해야할까. 


처음에는 올리비아가 스튜디오에서 녹음했을 원곡인 뮤직비디오를 반복해서 봤고, 그 다음에는 라이브로 공연한 영상들을 봤다. 이어서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유튜버들의 커버 영상들을 하나씩 차례로 봤다. 라이브 공연은 라이브로만 느낄 수 있는 묘미가 있어서 좋다. 커버 영상들은 라이브로 노래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커버 영상들의 묘미는 다양한 자기 해석과 편곡 스타일이다. 각자의 음색들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다.  



요즘은 유튜브 덕분에 최근 곡들 위주로 커버 영상들을 찾아서 비교해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어떤 경우는 원곡을 각자의 언어로 커버한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언어가 달라진 덕분에 곡의 느낌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어서 훨씬 흥미롭다. 유명한 팝송들을 프랑스어로 부르는 유튜브 채널을 발견한 것은 무척 행운이었다. 어떤 유튜브 채널에서는 인도네시아 노래들을 영어로 커버해서 올리는데, 인도네시아 노래들에 흥미가 있는 나로서는 이것 역시 엄청 보물창고로 여겨졌다. 유명한 중국 드라마 주제곡을 일본어로 부른 곡이라던가, 중국 노래를 우리말로 바꾼 경우도 있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언어로 된 커버 곡을 발견한 노래는 루이스 폰시의 [Despacito] 였다. 몇 개의 언어로 커버 곡이 있는지 찾아보다가 포기할 정도로 많았다. 


암튼 거의 하루종일 [Drivers license] 를 듣다가 두 가지 이야기를 상상했다. 하나는 이제 막 운전면허증을 딸 나이가 된 10대 후반의 여성이 이별을 겪은 이야기로 가수 올리비아 로드리고가 실제 10대 후반이니 원곡의 이야기에 가깝다 볼 수 있겠다. 굳이 애써서 찾아보지 않아도 이 노래의 뒷 이야기로 알려진 그와 조슈아 바셋과의 연애. 그리고 사브리나 카펜터의 이야기가 구글의 알고리즘 덕분에 자꾸 눈에 들어오던데, 내가 상상한 이야기는 그렇게 유명인의 이야기가 아닌 훨씬 평범한 내용이다.


다른 이야기는 30대 중반이라는 비교적 늦게 운전면허증을 딴 여성의 이별 이야기로, 설정에 성별에 대한 약간의 편견이 담겨있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이야기를 머리 속에서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어느 여성 작가의 단편 소설에서 약간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순수하게 처음부터 내가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핵심적인 내용을 가져온 것은 아니어서 표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두 이야기는 나중에 글로 써서 보관해둬야지. 언젠가 자동차가 등장하는 다양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모아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글로 써놓은 몇 개의 이야기가 있고, 머릿속에 이미지로 저장된 이야기도 몇 있다. 문제는 글로 써야 한다는 것인데, 오늘 떠올린 이야기를 포함해 구상만 해놓고 쓰지 않은 이야기들이 이미 많다. 이러다가 나중에 구상했던 세부 내용들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오늘은 어쩌면 이 이야기들을 두드려서 저장해둬야 할까? 이 글을 두드리다 말고 오늘 저녁에 읽으려고 이미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찾아뒀는데, 오늘 남은 시간에 책을 읽을 것인가, 이야기를 써놓을 것인가. 모르겠다. 배가 고프니 일단 먹고 생각해봐야겠다. 이래놓고 밥을 먹은 후에는 그냥 잠들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아, 밥을 먹기 전에 왜 하필 자동차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생각했는지는 적어둬야겠지. 일단 오늘 위 두 개의 이야기를 상상하기 전까지는 전혀 떠올리지 못했는데, 자동차가 등장하는 이야기로 얽히면 두 이야기를 활용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아주 오래 전에 내가 겪었던 일을 모티브로 적어놓은 것이 떠올랐고, 잠시 후에 또 다른 이야기들도 생각났다.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서 자유를 의미한다. 대중교통이 없는 곳에서 차가 없으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다. 마치 갇혀있는 것 같은 상황에 놓인다. 나는 농사짓는 시골 마을에 살면서 그런 상황을 겪었다. 차는 또 떠남을 의미한다. 이별의 상징으로 쓰기 좋다. 한편 차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집이나 사무실보다 차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차는 보다 각별한 느낌일 것이다. 평생을 일해도 집 한 채 마련할 돈을 모으지 못하는 현실에서, 매달 엄청난 할부금을 갚아야 하지만, 그래도 자동차 안이라는 좁은 공간만이라도 내 소유로 만들 수 있는 경제적 상황을 소재로 쓸 수도 있다. 거기에 긴 시간 운전하는 것은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하거나, 풀지 못하던 어떤 문제에 다가가는 단서를 깨닫게 만들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자동차 안에 홀로 앉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는 것은 고독한 주인공을 등장시키기에 너무나도 좋은 공간 설정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문제는 디테일이다. 얼마나 잘 묘사하는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드러내는가, 얼마나 흥미롭게 풀어나가는가 등이 중요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희선 2021-03-03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세계음악기행>에서 잘 알려진 노래를 다른 나라 말로 하는 걸 들려주기도 하더군요 한국 노래도 다른 나라 말로 한 거 나온 적 있어요 그런 게 유튜브에도 있군요 저는 그저께 어떤 노래 알고 어제는 그 노래를 포켓몬스터 이름으로 부르는 거 들었어요 그거 들으니 조금 웃기더군요 그냥... 진지하게 불렀다고 했는데, 그래설지도... 어떤 노래가 좋으면 자꾸 듣기도 하죠


희선

감은빛 2021-03-03 16:15   좋아요 1 | URL
희선님께선 라디오를 자주 들으시나봐요.
저는 주로 운전할 때와 음식 할 때 라디오를 틀어놓아요.
한때 영업 일을 할 때는 회사 차로 운전을 많이 해서,
그 당시에 라디오를 엄청 들었어요.

꽤 오래 전부터 차도 없고, 운전할 일도 거의 없어서
라디오 들을 일이 확 줄었네요.
제가 주로 라디오를 듣는 시간은 토요일 오전에 음식 준비할 때와
평일 저녁에 음식 준비할 때인데,
요즘은 그 시간에도 그냥 유튜브 음악을 듣는 경우가 더 많아졌네요.
 
 전출처 : 감은빛 > 록펠러를 무너뜨린 한사람의 힘

요즘 북플이 내게 알려주는 과거 오늘 내가 쓴 글 중에 유난히 10년 전에 쓴 글이 많네. 2011년 초에 여기 알라딘 서재에 글을 자주 썼나보다. 북플이 알려주는 걸 매번 공유하는 건 아니고, 다시 읽어도 의미있다고 생각한 것들만 공유하는데, 특히 이 책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은 정말 책이라서 망설임 없이 다시 소개한다.

7년 전 쓴 글로 [커피의 역사] 퀴즈 당첨자 발표 글도 있던데, 내가 알라딘 서재에서 이런 이벤트도 했었구나 하고 새삼 그때 기억을 떠올려본다. 댓글을 보고 아직도 내 서재를 찾아주시는 분들의 댓글을 발견했다. 시간 내서 찾아주고 댓글을 남겨주시니 고마운 일이고 또 이런 재미없는 글들을 읽으러 와주시는 건 신기한 일이다.

10년 전 [아이다 미네르바 타벨]을 읽고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당시 내가 이 책의 흥미로운 점과 뛰어난 점들을 제대로 소개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다시 읽고 쓴다면, 이것보다는 잘 쓸수 있을 것 같은데, 불행히도 다시 읽을 엄두가 안 난다.

그때 당시에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시간이 흘러 뭔가 이름을 남길만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생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생물학에 대한 꿈을 펼치기 위해 노력한 과정이 언론인으로서 많은 업적을 이루는 발판이 되었다. 덕분에 그는 집요하게 체계적으로 독점재벌의 비리를 캐어나가 결국 거대한 자본을 무너뜨려 펜이 돈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나도 어려서는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환경운동으로 시작해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폭을 넓혔고 이런 저런 일들을 거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언젠가 이 경험들을 바탕으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할 수도 있으리라. 보잘것 없는 한 인간이 그래도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겐 타벨이 삶의 목표 같은 존재라 볼 수 있다.

타벨과 록펠러의 삶을 번갈아 소개하며 두 사람의 인생을 겹쳐 보여준다는 것이 이 책의 큰 특징인데, 장단점이 분명하다. 단점은 이 글에도 적었듯이, 한참 타벨에 집중하고 있는데 흐름이 끊어진다는 점이고, 장점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둘을 입장을 모두 고려할 수 있다는 점과 또 훨씬 더 폭넓은 역사적 사실들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쓰다보니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진다. 읽으려고 쌓아놓은 책 탑을 잠시 옆으로 밀쳐두고 이 책이 어디있는지 찾아봐야겠다. 다시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부분 부분 발췌독이라도 해야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돌이 2021-02-2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븍플의 그 기능 전 꽤 좋더라구요. 추억돋는다는.... ㅎㅎ 이렇게 다시 보고 싶은 책도 생기고요. 어떤 책은 내 리뷰를 다시 읽는데도 하나도 생각이 안나서 내가 진짜 이 책을 읽긴 읽은건가 싶기도 하고요.

감은빛 2021-03-03 16:09   좋아요 0 | URL
네, 바람돌이님.
저도 과거 오늘 기억들을 돌아볼 수 있어서 꽤 좋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도 무척 공감해요!
이거 내가 읽은 책이었던가?
이 글을 내가 썼다고?
이런 경우가 가끔 있더라구요. ㅎㅎ

라로 2021-03-01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북플의 그 기능 너무 좋아해요!! 특히 아이들에 대한 얘기 써 논 것을 읽으면 너무 좋더라구요. 다시 새록새록 기억도 나고. 다만 감은빛님처럼 소환할 수 없다는 단점이...아이폰은 안 되나봐요.ㅠㅠ

감은빛 2021-03-03 16:11   좋아요 0 | URL
아이폰은 공유 기능이 안 되다니!! ㅠㅠ

정말 공감해요!
아이들 어릴 때 적어놓은 글들 다시 읽으면,
그땐 이랬구나 새삼스럽게 기억을 되새겨보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좀 더 부지런히 아이들 이야기를 써놓았다면 좋았겠다 싶기도 해요.
 

아기 고양이


작년 11월 초였다. 애들 엄마가 사무실 근처에서 아기 고양이를 마주쳤는데, 주위에서 엄마 고양이를 찾지 못했고, 건강 상태가 나빠보여서 동물병원에 데려갔다가 집으로 데려왔다. 마침 그 날은 내가 아이들과 만나는 날이었다. 애들과 밖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데려다주면서 잠시 그 집에 머물렀는데, 애들 엄마가 아기 고양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애들과 함께 나중에 애들이 '차차'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처음 만났다.


그렇지만 나는 그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차차와 함께 시간을 보낼 일은 별로 없었다. 그 집을 나온 지도 이제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그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 아이들은 차차와 빠르게 친해졌고, 차차만 바라보고 지내게 되었다. 이젠 나를 만나는 저녁에도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차차와 시간을 보내느라 나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의 심정을 백 번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수 없었다.


그러다 12월 말에 애들 엄마가 애들과 제주에 여행을 계획했다고 하면서 나에게 그 집에 들러 차차의 밥과 물을 챙겨주고, 화장실을 치워주길 부탁했다. 그 정도는 해줄수 있으니, 당연히 승락했다. 그런데 큰 아이가 갑작스레 여행을 안 가고 혼자 집에 남겠다고 선언했다. 애들 엄마는 당연히 안 된다고 했을텐데, 큰 아이가 아빠 핑계를 댔다. 아빠랑 같이 지내면 괜찮지 않냐고. 나는 큰 아이의 요청으로 그 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아이들과 떨어져 살면서도 일주일에 항상 3일 정도는 아이들이 우리집에 머물도록 해왔지만, 큰 아이는 학원과 숙제, 공부, 친구들과의 약속 등을 이유로 오지 않는 (혹은 못 오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작은 아이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큰 아이와 둘이 지낸 경우는 많지 않았다.


엄마 보다 아빠 라는 말을 먼저 했던 아이, 어려서부터 유난히 아빠 딸이었던 아이,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시를 잘 써서 나 뿐 아니라 유명한 시인도 놀라게 만들었던 아이, 어느 날 갑자기 작가가 되고 싶다고 예고 문창과를 가고 싶다고 했던 아이, 원하던 예고 문창과에 합격했다고 엄청 좋아하던 아이, 몇 년 전부터 키가 훌쩍 자라 엄마를 제치고 이젠 아빠와 비슷할 정도로 자란 아이. 태어나자마자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 탯줄을 잘랐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 언제 저렇게 자랐나 싶은 아이와 며칠 연속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함께 그 집에서 생활하는 일은 낯설면서도, 너무나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그 집에 며칠 머물면서 큰 아이와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장난도 많이 치면서 사춘기 이후로 다시 한층 가까워졌는데, 또 아기 고양이 차차와도 친분을 많이 쌓았다. 물론 내 관점에서 차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측면에서 아이들과 애들 엄마는 차차가 동거인인 자신들보다 나를 훨씬 더 좋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단 애들 엄마나 아이들이 차차를 안으면, 곧바로 내려달라는 듯 애처로운 느낌의 울음소리를 내곤 한다. 그리고 곧바로 내려가려고 몸을 뒤틀고 네 다리를 버둥거린다. 그런데 내가 안으면 가만히 내게 안겨 있는다. 울음소리도 안 내고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는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내려가려고 버둥거리지 않는다. 물론 시간이 좀 지나면 그땐 버둥거리다가 내려가버리곤 한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반복 되었는데, 내가 그 집에 가서 차차를 안는 순간 아이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배신감을 호소하는 감탄사를 내질렀고, 애들 엄마는 물끄러미  나와 내게 안긴 차차를 쳐다보며 샐쭉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또 한 편으로 차차는 다른 고양이들이 으례 그러듯이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몸을 부비지 않는데, 그러니까 동거인인 애들 엄마와 아이들에게는 그러지 않는데, 가끔 내가 그 집에 가면 내게는 그런 행동을 한다. 작은 아이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차차가 수컷이라서 남자인 아빠만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좀 많은 편


어린이들이 유난히 나를 잘 따르고 좋아하곤 하는 일은 익숙하다. 차차도 어린 고양이니까 어린이라고 본다면 나는 유난히 어린 생명들이 좋아하고 따르는 어떤 숙명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어려서부터 명절이 되어 할머니네 댁에 가면 내 밑으로 사촌과 육촌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는데, 대략 10명 가량의 동생들을 모두 내가 돌봐야했다. 어른들은 내게 돈을 쥐어주며 동생들에게 공평하게 과자를 사주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했다. 나도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이였건만, 나는 늘 맏이라는 이유로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숫자의 동생들을 떠맡아야 했다.


대학 시절 농활을 가면 동네 어린이들은 모두 내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고작 열흘 남짓의 농활에서 돌아오면 그 꼬맹이들 중 한 두명이 연필로 삐뚤빼뚤 눌러 쓴 글씨로 내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음 해에 그 마을에 또 가면 다시 아이들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서로 내 손을 잡으려고 싸우고, 내 무릎에 앉으려고 싸우곤 했다.


대학 시절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는데, 그 중 쌀 배달도 있었다. 쌀 한 포대 값을 치루려면 액수가 좀 크다보니 보통 지갑에서 그만큼의 돈이 나오지 않고 어디 서랍장을 뒤지거나 하느라 돈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엄마가 그렇게 돈을 찾느라 바쁜 순간, 아이들은 낯선 사람인 쌀 배달부에게 관심을 갖게 되더라. 쌀을 어깨에 이고 오느라 땀이 범벅인 내게 아이들이 다가와 뭔가 질문을 한다던가. 관찰하면서 가까이 다가오곤 했다. 한번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아기가 내 쪽으로 기어오다가 내 바로 앞에서 일어서더니 양 팔을 벌려 안아달라고 시늉을 했다. 땀에 젖은 몸으로 아기를 안으면 안 될것 같아서 웃으며 지금은 못 안아 라고 말했는데, 아기는 팔을 벌린 자세 그대로 내게 한 발 다가오다가 넘어질 것처럼 몸이 기울어졌다. 나는 급하게 아기를 붙잡아 안았다. 아기는 내게 기대어 뭔가 옹알이를 하기 시작햇다. 잠시 후에 아기 엄마가 돈을 찾아왔길래, 상황 설명을 하고 아기를 돌려주려 했다. 엄마가 안아서 받으려고 하는데도 아기는 그 작은 손으로 내 옷을 쥐고 가지 않으려고 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로 삶을 시작한 후로는 선배 활동가들의 아이들이 또 나를 엄청 따랐다. 어느 출장에 아이를 데려올 수 밖에 없었던 선배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 3일 정도 같이 지냈는데, 3일 내내 내 옆에만 붙어 있었고, 헤어지는 날에는 나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었다.


애들 엄마가 큰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을 때, 동네 찜질방에 같이 놀러갔었다. 구석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 둘이 인형을 갖고 놀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 아이들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인 내 옆에 꼭 붙어 앉아서 인형 놀이를 했다. 그걸 보면서 당시 애들 엄마는 꽤나 놀랐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면 내가 전생에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얘기하기도 했었다.


이 외에도 사소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은데, 정작 나는 왜 그런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가 아이들과 장난치고 놀기를 좋아하고, 잘 노는 건 맞는데, 단지 그 이유 만으로 낯선 아이들도 쉽게 다가오는 건 설명하기 어렵다.


아기 고양이 차차 이야기를 하다가 좀 멀리 왔는데, 어쩌면 차차도 같은 이유로 나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외에 다른 이유는 생각하기 어려워서다. 













지인들 중에 강아지를 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다. 그들의 집을 방문하곤 하면서 고양이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번에 아이들이 반려묘 차차와 함께 살게 되면서 나도 덩달아 고양이와 함께 생활하며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있다. 고양이는 참 신기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저자와 SNS 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일상에서 저자가 찍은 고양이 사진을 자주 봐왔고, 고양에 얽힌 이야기들도 많이 읽었다.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엄청 많은 것에 비해 그들의 반려 고양이들이 그만큼 그들을 좋아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척 도도하게 행동하는 것이 고양이에게 확실히 더 어울리기는 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21-02-27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얘기 너무 좋아요. 감은빛님은 분명 투명하고 맑은 어린 존재들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으신 걸거예용! 멋져용!

감은빛 2021-02-28 19:54   좋아요 1 | URL
아우, 붕붕툐툐님. 이렇게 자꾸 칭찬에 길들여놓으시면 큰일납니다. ㅎㅎ
아우라 까지는 모르겠지만, 첫 인상이 선한 느낌이란는 얘기는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제가 또 유독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구요.

희선 2021-02-28 0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한테 잘 해 줄 것 같은 걸 아이가 아는가 봅니다 어디선가 아이는 그런 걸 잘 안다고 하는 본 적 있는데... 새끼 고양이도 좋아한다니, 그것도 좋을 듯하네요 고양이와 살아 본 적은 없지만, 괜찮은 듯해요 잘 모르지만, 그냥...

이월 마지막 날이네요 어느새 그렇게 되다니... 시간은 늘 잘 갑니다 이월 마지막 날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감은빛 2021-02-28 19:57   좋아요 2 | URL
2월의 마지막 날이 이렇게 가네요. 희선님.

또 3월의 첫날이 올테니, 2월의 마지막 날을 미련하게 붙잡으려 둘 필요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붙잡을 수만 있다면 붙잡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인가봐요.

3월에도 희선님의 시와 산문들을 계속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출처 : 감은빛 > 두 번째 책

10년 전 오늘 쓴 글이다. 처음 공저자로 참여했던 책 [100인의 책마을] 이후, 두 번째 공저자로 참여했던 책 [녹색당 선언] 곧 출간될거라는 소식을 전하고, 당시 참석했던 문학상 수상식에서 오랜만에 만났던 선배들의 책 몇 권을 담은 글.

지난 10년간 내 삶도 참 많이 변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술잔을 부딪히곤 했던 노동자 문학 판의 선배들과 못 만난지도 오래되었고, 예전에 일했던 단체들의 선후배 활동가들과도 연락을 안 한지 오래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출판계 친구들, 선후배들도 아주 가끔 소식을 주고 받을 뿐, 점점 관계가 멀어져 감을 느낀다.

책 한 권 쓰자는 제안을 몇 번 받고도, 제대로 된 아이템을 찾지 못해 기획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기회를 잃어버리기만 했다.

그래도 북플이 알려준 덕분에 10년 만에 그 시절의 기록을 읽어볼 수 있어서 좋다. 오늘 쓴 글을 또 10년 지나서 읽어볼 수 있으려나. 과연 알라딘 서재가, 북플이 그때까지 서비스를 제공할지 모르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21-02-25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26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21-02-26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플의 지난 오늘은 가끔씩 읽어보기 좋은 기능 같아요.
10년은 긴 시간 같은데, 진짜 빨리 지나가네요.
감은빛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감은빛 2021-02-26 23:36   좋아요 2 | URL
북플이 페이스북 따라해서 만든 기능이죠.
저는 정작 페이스북에서는 별로 좋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북플에서는 꽤나 괜찮다고 여겨요.
과거의 오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뭐라고 적었는지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부고

비록 친하지는 않았더라도, 잘 알지는 못 했더라도 얼굴을 알고 어떤 공간과 어떤 시간을 함께 한 적이 있는 아는 사람의 갑작스런 부고는 한순간 나를 일시정지 시킨다. 뇌를 비롯한 모든 인체 기능이 잠시 중단된 느낌이었다. 마치 전자제품이 EMP Shock wave 를 맞은 것처럼. 제주 지역에서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해온 활동가의 부고였다. 내세를 비롯해 죽음 이후의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나로서는 영면을 빈다거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들이 모순이긴 하지만, 그를 애도할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고생 많으셨다고 짧지만 그대와 함께한 기억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해본다.

요즘 오랜만에 다시 만나거나 연락이 닿은 많은 이들은 일단 깜짝 놀라고 시작한다. 죽을 뻔 했다면서요? 크게 다치셨다고요? 이제 좀 괜찮으세요? 아이고!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등등.

그 말과 마음이 너무나고 고맙고, 잠시라도 그에게 걱정을 끼친 것이 미안해진다. 업무로든, 운동으로든, 마을 활동으로든, 녹색당 활동으로든 나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잠시라도 나를 떠올리며 생각해 준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어쩌면 끝났을 지 모를 내 남은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살아야겠다.

당장 어제 밤 11시까지 온라인 회의를 마치고, 스트레스에 괴로워하다 쓰러져 누워,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런 삶을 살고 싶었던 건 아닌데 생각했는데, 자고 일어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하긴 하루에 몇 십번이라도 바뀔 수 있는 것이 사람 마음일테니.

오늘도 할 일이 많다. 일시정지 버튼을 풀고 이제 다음 일정으로 움직이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연 2021-02-25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항상 건강 조심하시길..

감은빛 2021-02-25 22:08   좋아요 2 | URL
이렇게 말씀 남겨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비연님께서도 코로나 조심하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