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3월에 서재 이웃 잉크냄새님께서 내 글에 댓글로 중국노래 5곡을 추천해줬었다. 그 추천이 정말 고마워서 그 노래들을 열심히 찾아들었고, 각 노래에 대한 느낌이나, 가수 이야기나 그 곡을 다른 가수가 커버한 사례 등을 찾아서 글을 하나 썼었다. 이 글을 쓰면서 노래 가사를 찾아보고, 노래에 얽힌 사연 등을 찾아보는 일이 재미있었다. 그로부터 약 10개월 가량 지난 최근에 잉크냄새님께서 두 번째로 추천곡을 댓글로 남겨주셨다. 반가운 마음에 한 두곡은 바로 찾아들었었다. 그런데 작년에 쓴 글처럼 가사를 찾아보고, 가수나 노래 정보를 찾아볼 여유가 없어서 시간이 제법 흘러 버렸다. 그래도 1월이 가기 전에는 이 두번째 추천곡들에 대한 글을 남겨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마침 간밤에 급한 일들을 마쳐서 오늘은 조금 여유가 있다. 자, 하나씩 노래를 살펴보자.


참고로 작년 3월 19일에 잉크냄새님의 추천곡에 대해 쓴 글은 여기서 보실 수 있다.

https://blog.aladin.co.kr/idolovepink/16312872



她来听我的演唱会 그녀가 내 콘서트를 들으러 왔어요


첫번째 노래는 4대천왕으로 불린다는 张学友 Zhāngxuéyǒu 의 곡이다. 우리 발음으로 장학우다. 장학우의 노래는 이번에 처음 들었다. 와! 노래를 정말 잘한다. 잉크냄새님께서 따라 부르기 어렵다고 덧붙이셨는데, 확실히 어지간한 가창력이 아니면 못 부르겠다고 느꼈다. 음색도 좋고, 고음을 가볍게 올리는 기교도 대단하다. 가사를 찾아보니 콘서트에 온 여러 관객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17살에서 시작해서 점점 연령대가 올라가는 여성들의 사연을 담고 있다. 장학우의 매력적인 저음으로 담백하게 부르는 곡조도 좋고, 가사도 좋았다. 1999년에 발표한 곡이라고 나오는데, 90년대 특유의 감성도 묻어나고, 한편으로 최근의 발라드 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조금 세련된 느낌도 들었다. 약간 독특한 박자 감각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튜브에 이 곡을 검색하면 당연히 원곡 가수인 장학우의 노래가 먼저 나올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希林娜依·高 라는 가수가 '싱 차이나' 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부른 노래가 가장 상단에 나왔다. 이 가수는 나중에 음반으로 녹음도 한 듯, 음반 버전 영상도 있었다. 생각보다 커버곡이 많지는 않았는데, 남자 가수들은 다들 장학우 버전을 넘어서지 못했다. 여자 가수가 부른 건 대부분 위 여성의 영상이었는데, 单依纯 이란 가수가 부른 영상도 있었다. 재작년 쯤에 이 산이춘 이란 가수 노래를 제법 찾아 들었던 것이 기억났다.


一千个伤心的理由 슬퍼해야 할 천 개의 이유


두번째 곡도 장학우의 곡이다. 잉크냄새님 말씀으론 이게 더 유명한 노래라고 하셨다. 들어보니 앞의 곡보다는 좀 더 듣기 쉬운, 대중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앞의 노래가 비교적 담담한 느낌이었다면, 이 곡은 확실히 슬픈 느낌이다. 제목 자체가 천 개나 되는 슬픈 이유를 말하고 있으니. 장학우의 음색은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앞의 곡은 처음에는 박자가 살짝 독특해서 그 점이 신경 쓰여 막 좋다는 느낌은 아니었고,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들으며, 들을수록 좋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두번째 노래는 그냥 첫 느낌부터 정말 좋았다. 그리고 들으면 들을수록 더 좋았다. 1995년에 나온 곡이었다. 역시 90년대 감성이 확 느껴지는 노래로 딱 내 취향이다.


이 노래도 커버곡들을 찾아보니 곧바로 내가 좋아하는 冯提莫 펑티모가 나왔다. 역시 펑티모는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크롤을 내리다보니 펑티모가 이 곡을 부른 다른 영상들이 여러 개가 더 나왔다. 어쩌면 펑티모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그게 아니라 펑티모가 활동한 기간이 워낙 길어서 많이 불렀으리라 싶었다. 그리고 매우 특이한 커버 영상을 찾았다. 유튜브 채널 이름은 卢旺达青年团 였다. 르완다 청년단이란 이름으로, 아프리카 르완다의 남녀 청년들이 아주 유창한 중국어로 노래를 불렀다. 게다가 원곡의 느낌을 아주 잘 살려서 노래도 아주 잘 불렀다. 처음 영상을 켰을 때는 이 기묘한 느낌 때문에 꽤나 신선하고 흥미롭다 여겼다. 갭차이라고 해야하나. 너무나도 유창한 그들의 중국어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传奇 로맨스


세번째 추천곡은 王菲 왕페이 의 노래였다. 왕페이 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The Cranberries 의 Dreams 의 번악곡 夢中人 이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 에서 짧은 머리에 노란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 내가 가장 좋아했던 가수는 크랜베리스의 돌로레스 오리어던이었다. 그리고 크랜베리스 노래 중에 Linger 와 Ode to my family 다음으로 좋아했던 노래가 Dreams 였다. 물론 아직 2집 밖에 안 나왔을 때니까 그랬고, 나중에는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마다 Zombie 와 Promises 등으로 좋아하는 노래가 계속 바뀌었다. 암튼 지금도 나는 같은 노래의 다른 언어 커버 곡들을 좋아하는데, 이 크랜베리스의 노래와 왕페이의 노래는 이어 듣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또 종종 들었던 왕페이의 노래가 있었는데, 일본 비디오 게임인 파이널 판타지의 주제곡이었던 Eyes on me 였다. 왕페이란 이름은 이렇게 반가웠는데, 잉크냄새 님이 추천해 준 노래 세 곡은 모두 몰랐던, 처음 듣는 노래였다.


일단 이 곡은 왕페이가 2010년 음력 설인 춘절에 방송에서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원래는 李健 Li Jian 이란 남자 가수가 불렀던 곡이었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이 곡은 리젠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낯선 여인의 편지]를 읽고 쓴 곡이라고 한다. 왕페이의 목소리도 엄청난 미성이라 신비한 느낌이 드는데, 원곡인 리젠의 노래를 들어보니 이 사람도 어마어마한 미성이었다. 와! 왕페이 버전에 못지 않은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노래에 영향을 미친 소설이 [낯선 여인의 편지]라는 글을 읽고 보니 그래도 왕페이의 곡이 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나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 소설을 읽었었다. 한참 전이라 구체적인 내용들이 다 떠오르지는 않지만, 어느 남성이 자신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한 여인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여성이 오래 전부터 평생 자신을 사랑했다는 내용이었다. 여성은 그렇게 긴 시간동안 남성을 깊이 사랑했는데, 남성은 그 여성을 알지도 못했다니! 그런데 노래 가사와 분위기가 이 소설과 어울리는 지는 잘 모르겠다. 소설의 배경은 오스트리아인데, 노래는 너무 중국풍이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이 [낯선 여인의 편지]가 긴 시간동안 여러 나라에서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글을 읽었다. 여기에는 한국 영화와 중국 영화도 있었다. 음, 내가 원래 늘 그러기는 하지만, 너무 많이 옆길로 새면 곤란하니 이쯤에서 돌아오자.


아, 그런데 또 내가 좋아했던 그룹 이름이 등장했다. 덴마크 출신 락그룹 Michael learns to rock 이다. 이 그룹이 바로 이 리젠의 노래를 영어로 리메이크 했는데, 제목이 Fairy tale 이었다. 위키 백과를 살펴보니 아마 중국에서 낸 앨범에 이 곡을 끼워 넣었던 것 같다. 곡을 들어보니 가사만 영어일 뿐 노래는 거의 같았다. 마이클 런스 투 락도 오래전에 좋아했던 그룹이었다. 지금도 가끔 노래방에서 25 Minutes 를 부르는데, 그 당시에 정말 좋아했던 노래였다. 이 노래 가사로 단편 소설도 하나 쓰다가 완성을 못했던 기억도 났다.


红豆 홍두

微风细雨 산들바람 이슬비


잉크냄새님께서 이어서 추천한 노래 두 곡도 왕페이의 노래들이다. 이 두 곡은 자세한 정보를 찾아볼 여유가 없어서 그냥 넘어가자. 아, 산들바람 이슬비는 원래 등려군의 노래였더라. 잉크냄새님이 왕페이를 소개하며 대만이 등리쥔, 대륙은 왕페이 라는 표현을 썼었다. 다음에 등려군과 왕페이의 목소리를 비교해가며 들어봐야겠다.


刚好遇见你 마침 그대를 만나


다음 추천곡은 李玉刚 의 노래다. 아, 드디어 아는 노래가 나왔다. 잉크냄새님께서 리위강의 원곡도 좋고 펑티모의 여성스러운 노래도 좋습니다. 라고 쓰셨는데, 나는 딱 이 두 버전의 노래를 엄청 많이 들었었다. 나 역시 원곡도 좋고 펑티모도 좋았다. 처음 잉크냄새님의 추천곡 5곡 중에서 林憶蓮 의 至少還有你 를 펑티모 버전으로 엄청 많이 들었었지만, 원곡은 전혀 몰랐었는데, 이 곡은 원곡과 펑티모 곡 둘 다 많이 들었었다. 아, 그리고 이 곡도 커버곡을 찾다가 아까 언급했던 르완다 청년단을 또 만났다. 이번에도 너무나도 완벽한 중국어에 완벽한 노래 솜씨를 보여줬다.


可惜不是你 당신이 아니라 아쉬워요


다음 곡은 梁静茹 의 노래다. 이 가수는 말레이시아 출신이라고 한다. 노래를 들어보니, 어, 이 곡도 분명 자주 들었던 노래였다. 요 앞의 刚好遇见你 는 확실히 아는 노래라고 말할수 있었던 것이 예전에 가사를 찾아 본 적도 있었고, 노래 제목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자주 듣기는 했지만, 제목을 몰랐다. 가사를 찾아보니 멜로디에 어울리는 사랑 노래였다. 커버곡을 찾아보니 꽤나 많았다. 저 위에서 언급한 산이춘의 커버가 있었고, 이번에도 펑티모가 있었다. 그리고 周興哲 이라는 남성 가수 영상이 있었다. 오, 여성들의 목소리로만 듣다가 남성 목소리로 들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특이한 건 이 곡은 유독 펑티모가 좀 안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어지간해서는 펑티모 정도의 가창력으로 안 어울리기 쉽지 않은데. 원곡 가수의 목소리가 워낙 익숙해서 펑티모의 목소리는 안 어울리는 듯 느끼나 보다.


勇气 용기


다음 노래도 량징루의 노래다. 앞의 可惜不是你 를 듣고 나면 유튜브가 자동으로 이 노래를 들려준다. 같은 가수의 곡이고, 유명한 곡이라 이어서 들려주나 보다. 그런데 듣다 보니 이 노래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마 예전에도 여러 차례 저 앞의 곡에 이어서 나왔던 모양이다.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隐形的翅膀 숨겨진 날개


자, 이제 마지막 노래다. 张詔涵 의 노래. 영어 이름이 안젤라 장이다. 유명한 배우 안젤라 베이비가 생각나는 이름이네. 그런데 이 이름 낯익다 싶었는데, 얼굴과 목소리를 살피니 확실히 예전에 몇 개의 영상을 봤던 가수였다. 당시 들었던 곡들도 기억나지 않고, 잉크냄새님이 추천해 준 이 노래도 아는 노래는 아닌데, 이 가수의 노래를 들었던 것은 확실하다. 


지난 번 추천곡들과 이번 추천곡들을 모두 하나의 재생목록으로 만들어 두었다. 시간 날때마다 들어야겠다. 이번 글엔 노래 별로 글의분량 차이가 심하다. 앞부분은 많이 찾아보고 글을 썼는데, 뒤로 갈수록 가사 정도만 찾아 읽고 다른 정보들까지 뒤져볼 시간 여유가 없었다. 또 다음에 다시 찾아볼 기회가 생기겠지. 잉크냄새님 덕분에 아는 중국노래가 또 확 늘었다. 노래 부자가 된 기분이다. 


주말엔 쉬고 싶어


이번 주말부터 3월 말까지 거의 대부분의 주말에 일정이 잡혔다. 참여하고 있는 여러 협동조합들과 단체들의 총회 시즌이기 때문이다. 그냥 단순히 참가만 해도 되는 총회도 있지만, 몇몇 조합과 단체에서는 이사, 감사, 운영위원 등을 맡고 있어서 해야 할 역할들이 제법 있다.  그냥 눈 한 번 감았다가 뜨면 3월이 다 지나가고 4월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긴 요즘 기분으로는 그 정도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벌써 1월이 거의 다 지나버렸다.  에휴, 아직 음력 설이 안 되어서 나이 한 살 안 먹었다고 우기고 있었는데, 곧 설이 다가오겠구나. 나이를 먹는 일에도 익숙해지려나.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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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30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냥 노래만 들었었는데 노래와 연관된 스토리를 보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중국 노래도 다양할 터인데 저도 90년대풍의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대부분 유사한 느낌의 곡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도 덕분에 유튜브에 중국 노래를 모아 두고 가끔 듣곤 합니다.

감은빛 2026-02-04 10:23   좋아요 0 | URL
작년의 첫 추천도 그렇고, 이번 추천도 그렇고 정말 딱 제 취향인 노래들만 추천해주셨더라구요. 신기합니다! 그리고 정말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

카스피 2026-01-31 0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홍콩의 4대 천왕은 영화배우이면서 동시에 가수일 정도로 만능 엔터테이너들이지요.실제 홍콩에서는 배우가 가수가 가수가 배우일 정도로 겸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한국은 이와 반대로 철저히 가수면 가수,배우면 배우로 딱 분리되는 편이죠.실제 아이돌 가수 출신이지만 배우로 전향하면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에서 잘 알수 있습니다.
문제는 홍콩의 4대 천왕이 아직까지도 중국에서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는데 이 들은 자신의 인기를 위해 결코 후배 가수를 키우지 않고 있기에(이건 대체로 중국적인 특색인듯 싶음.거의 2~30년째 대만 가요계를 장악하고 있는 주걸륜만 봐도 알 수 있지요),중국에서는 이들을 뛰어 넘는 후배 가수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이처럼 중국 가요계가 발전이 없다보니 중국의 MZ세대가 케이 팝에 열광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요.

감은빛 2026-02-04 10:28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서 가수와 연기를 겸업했던 사람들은 엄정화, 장나라, 이정현, 임창정 등이 있을 것 같네요.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영록도 있구요. 더 많이 있을텐데, 제가 모르는 것이겠죠. 저는 거의 아는 바가 없지만, 아이돌들 중에서도 제법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연기를 하면서 가끔 노래를 부르는 경우요.

홍콩 4대 천왕에 대한 그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네요. 카스피님께서는 정말 다 방면에 정보를 많이 알고 계시네요.

 

머피의 법칙

저번에 북플에 지난 오늘 글이 없는 날엔 가능하면 글을 써야지 라는 글을 쓴 후로 매일 아침 북플을 열어 지난 오늘 코너를 열어본다. 다행히 그 후 어제까지는 매일 글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열어보니 글이 없다. 뭐라도 하나 써야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좀 많이 바쁜 날이다. 하필이면 오늘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주에 있을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하기로 했는데, 오늘이 그 토론문을 보내달라고 요청받은 마감일이었다. 대략의 내용은 머리 속에 있지만, 쟁점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있어서 아직 토론문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참 마음만 정하면 금방 끝날 일인데, 그 마음을 정하는 일이 참 쉽지 않아서 언제가 될지 예상할 수가 없다. 저녁부터 밤 늦게까지는 장시간 회의를 들어가야해서 지금 끝내지 않으면, 오늘 보내줄 수가 없다. 고민 끝에 담당자에게 죄송하지만, 오늘 밤에 마무리해서 내일 오전 일찍 보내드리겠다고 양해를 부탁했다. 밤 11시쯤 회의를 마치고 마무리를 해야겠다. 거기에 지난 주에 보내달라고 요청받은 보고서가 또 있다. 이건 벌써 한참전에 해주기로 한 건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오늘은 꼭 보내주셔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아차! 싶었다. 이것도 오늘 밤에 완성해야 한다.

그러니까 평소 좀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미리 이런저런 작업들을 좀 해두었다면, 이렇게 갑자기 몇가지 일이 몰린, 그것도 오늘 꼭 이라는 단서가 달린 일들이 몰리는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텐데, 항상 뭐든 시간에 쫓겨 일을 하다니! 하필 이런 날에 북플에도 글을 하나 올려야 하는 상황이라니! 이런것도 일종의 징크스라고 할 수 있으려나. 흔히 머피의 법칙이라 부르는, 뭔가 일이 꼬이는 날에는 계속 연달아 그런 일이 생기는 징크스가 확실히 있다고 본다.

며칠 전에 북플을 열었을 때 지난 오늘 코너에 글이 7개나 있었다. 내 기억으론 지금까지 그렇게 많았던 날이 없었다. 그날 그런 생각을 했다. 지난 오늘을 살았던 각 연도의 나는 유독 시간 여유가 있었던가봐. 하필 올해도 그날은 조금 여유가 있어서 글을 하나 써볼까 했는데, 밖에서 좀 오래 머물렀더니 갑자기 몸이 확 안 좋아져서 일찍 집에 돌아와서 잠에 빠져들어버렸다. 그날 짧게라도 뭔가를 두드려 놓았다면 내년에는 8개가 되는 거였지만, 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반면 어제는 지난 오늘 글이 겨우 하나였다. 오늘도 지금 이 글을 두드리고 있으니, 내년 오늘 확인하면 글이 하나가 되겠다.

일본 배우와 한국 배우가 함께 촬영한 로맨스 드라마

지난 주말에는 넷플릭스로 [이 사랑 통역 되나요?] 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어쩌다 세계적인 배우로 유명해진 사람과 서너개 이상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통역하는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이한 것은 한국 방송사가 예능으로 준비하는 아이템이 일본의 유명한 배우와 한국 배우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서로 호감을 키우며 데이트를 하는 것이다. 비록 이 드라마는 남녀 주인공이 모두 한국 배우이지만, 거의 마지막까지 일본 배우가 꽤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최근에 유난히 일본 배우와 한국 배우가 서로 사랑하는 역할을 맡는 드라마가 많아진 것 같다. 일단 이세영이란 배우를 처음 알게 된 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있다. 이세영이 일본 유학생으로 나오고 상대 배우는 사카구치 켄타로가 맡았다. 이 드라마는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가 공동으로 집필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라고 한다. 일단 두 사람 모두 외모가 돋보이는 배우이고 연기도 상당히 좋았다. 그 다음에는 [Eye love you] 라는 드라마도 있었다. 한국 배우 채종협과 일본 배우 니카이도 후미가 주연을 맡았다. 채종협이 상당히 밝고 귀여운 이미지로 나오고, 니카이도 후미 역시 엄청나게 귀여운 사람을 맡았다. 드라마 내용은 좀 어이없고 황당한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부담없이 즐길수 있다는 부분에서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한효주와 오구리 슌이 주연을 맡은 [로맨틱 어나니머스]도 있다. 이 드라마는 일단 배우들의 연기력과 인지도가 남다른 기획이라 느꼈다. 그에 비해 이야기 자체는 좀 품이 작은 이야기라서 아쉬웠다. 전반적으로 [Eye love you] 와 비슷한 느낌이다. 쵸콜릿을 다루는 것이 공통점이고, 뭔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능력이나 장애(혹은 결핍)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그리고 아직 보지는 않았는데, 매주 하나씩 공개되고 있는 [첫입에 반하다] 라는 드라마도 일본에 간 한국 유학생과 일본 사람의 로맨스를 다룬다. 한국 배우는 강혜원이라고 하고 일본 배우는 아마 아카소 에이지 인듯. 둘 다 잘 모르는 배우들이다.

일본어를 익히고 있기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보려고 한다. 어떤 것은 여러번 반복해서 보기도 한다. 방금 소개한 드라마들은 한국 배우들의 일본어 발음과 일본어 어휘 구사력 등을 살펴보는 것이 좀 도움이 되었다. 일단 공통적으로 한국 배우들의 일본어 실력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당연히 일본인이 보기에는 아닐수 있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이세영과 한효주의 일본어가 거의 완벽한 것처럼 느껴졌다. 채종협은 뭐랄까 살짝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세 드라마 모두 일본 배우들의 한국어는 정말 많이 어색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일본 사람들도 한국 배우들의 일본어가 어색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일본 배우가 나오기는 하지만, 한일 남녀 커플이 아닌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에는 재일교포 3세인 일본 배우가 작중 유명한 일본 배우의 매니저 역을 맡아 상대적으로 꽤 괜찮은 한국어 발음을 보여준다. 현리 라는 이름의 배우인데,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스파이의 아내] 라는 영화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 이렇게 두 영화에서 보았었다. 아, [Eye love you] 에도 비중이 적은 조연으로 출연했었고, 저번에 글을 쓴 적 있는 [아리스 인 보더랜드]의 세번째 시즌에도 출연했었다. 확실히 재일교포라 한국어 발음이 상당히 좋기는 하지만, 교포라서 또 어색하기도 하다. 이 배우가 원래는 유창하게 우리말을 할 수 있는데, 일부러 조금은 어눌한 발음을 연기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말을 알기는 하지만, 평소에 거의 쓰지 않아서 원래 발음이 그렇게 조금 어눌하게 들리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일본과 한국 배우가 각각 주연을 맡은 로맨스 드라마들 이야기는 원래 따로 묶어서 좀 더 제대로 다룰 생각이었는데, 오늘 어쩌다 간단히 얘기해버렸네.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좀 더 많은 내용을 비교해볼 생각이다. 이제 회의 들어갈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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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6-01-31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현리 배우 올 하반기에 방영될 <킬러들의 쇼핑몰2>에서 악역으로 나와요. <이 사랑 통역 되나요?>에서 보고 반가웠어요. ㅎㅎㅎ

요새 한일 합작인지 두 나라 배우들이 같이 출연하는 드라마가 많아졌어요. 제작비 때문인지 일본에 눈을 돌린 것도 같고… 영화 <굿뉴스>도 일본 배우 많이 나오더라구요. 신기합니다. ㅎㅎ

감은빛 2026-02-04 10:22   좋아요 1 | URL
[킬러들의 쇼핑몰]을 조금 보다가 말았던 것 같아요.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네요. 시즌2가 또 나오는 군요. 정보 고맙습니다! 글에서 언급한 영화 두 편에서 짧은 분량을 보다가 드라마에서 꾸준히 나오는 모습을 보니 이 배우 꽤나 매력적이더라구요.

네, 꼬마요정님 말씀처럼 최근에 한일 두 배우들이 함께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가 눈에 띄게 늘었지요. 좋은 현상인 것 같아요.
 

글쓰기


알라딘 서재에 처음 글을 쓴 것이 2004년 2월이었다. 첫 글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대한 짧은 감상이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내가 읽은 책 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책이고,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었던 책이고, 가장 많은 부분을 필사 했던 책이다. 젊은 시절 한때 골방에 쳐박혀 라면과 담배만 섭취하며 지냈던 시절에 계속 읽고 필사 하기를 반복했던 책이었다. 알라딘이란 온라인 서점에 만든 새로운 공간에 첫 글을 써야 한다면 당연히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 첫 글은 썩 잘 쓴 글은 아니었다. 그냥 별로 개성이 없는 짧은 글. 


온라인 공간에 블로그라는 것을 만들어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 아마 2002년 혹은 2003년 정도였던 것 같다. 몇 개의 블로그 서비스를 옮겨 다니며 꾸준히 글을 썼었는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2010년대 초반에 주로 쓰던 블로그 서비스 하나가 문을 닫으며 약 10년 정도 썼던 글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 후로는 다른 블로그를 다시 만들지 않고 그냥 알라딘에만 글을 쓰고 있다. 알라딘 서재 초기에는 별로 글을 쓰지 않았다. 2004년에 한 서너달에 걸쳐 글 8개를 쓴 후로 다시 글을 쓴 것이 2008년이었다. 몇 년 동안 시민단체 활동가와 학원 강사 등으로 바쁘게 살다가 일을 그만두고 실업급여를 받으며 잠시 쉴 때였다. 그리고 노동운동과 노동자 문학을 하던 선배들이 만든 잡지사이자 출판사에 들어갔다. 그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책과 관련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평이나 리뷰 등 어려운 말로 접근하기 보다는 그냥 책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에게 이야기 하듯 떠드는 방식으로 쓰자 라고 생각했다. 그냥 나 혼자 생각으로 책에 대한 수다 라고 여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알라딘 서재는 가능하면 책 이야기만 남기는 곳이었다. 아직은 외부에 일상 생활 수다를 남기는 블로그가 있었으니까. 아까 언급한 것처럼 당시 주로 쓰던 블로그가 서비스를 종료하면서 더 이상 일상 생활에 대한 수다를 남길 공간이 없어지면서 이 알라딘에 일상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7년 가량 이어왔던 출판계 생활을 접고 다시 사회운동 판으로 돌아오면서 책에 대한 글을 점점 안 쓰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알라딘 서재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간혹 들어와도 책에 대한 글을 안 쓰고 일상 이야기만 쓰게 되었다. 이 시기에 알라딘에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시점부터 다시 알라딘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는 그냥 주구장창 일상 이야기만 썼다. 책 이야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2004년 2월부터 약 12년 동안 여기 서재에 약 670개의 글을 썼다. 가장 글을 많이 썼던 해는 2011년이었다. 그때는 몸 담고 있던 잡지사에서 매달 잡지에 서평을 쓰던 때여서 책을 많이 읽기도 했고, 책에 대한 글을 가장 많이 썼던 시기였다. 잡지에 실어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매달 독자들에게 공개해야 하는 글이어야 하기에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돌아보면 그 해에 유독 "이달의 당선작"으로 선정된 글이 많았다. 2014년에 출판계를 떠나면서 가끔 비정기적으로 취재해서 쓰던 기사도 안 쓰게 되고, 서평 연재도 중단되고 하면서 글을 적게 쓰게 되었다. 이후로 간혹 지역에서 시민신문에 연재 글을 쓰기고 했고, 책 소개 기사를 쓰기도 했는데 나중에 이 시민신문 내부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며 이 조직과 인연을 끊은 후로는 공개적으로 글을 쓸 기회가 사라졌다. 지금까지 단행본 두 권의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한번은 독서 커뮤니티 활동에서 이어져 기회를 얻었고, 또 한번은 녹색당 창당 과정에서 기획에 참여하며 지면을 얻었다. 그래봐야 그 두 권 모두 공동 저자 수가 엄청 많아서 내 글의 분량은 아주 적었다. 이후로 출판계의 몇몇 선배들에게 책을 내보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기획 단계에 머물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바빠서 글을 쓸 여유가 없다가 변명을 하기도 했지만, 실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명확하게 찾지 못해서 기획에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한 서너번 가량 기획서를 쓰다 말았고, 몇 번인가 영업부장에서 퇴직 후 출판사를 차린 선배들과 책 출간 이야기를 하다가 중단되었다. 


중학생 때부터 글을 꾸준히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다. 대학시절까지는 매일은 아니어도 주기적으로 일기를 썼었다. 환경단체 활동가로 일하면서 몸이 두세개여도 모자라는 삶을 살다 보니 일기라는 것을 떠올리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간간히 블로그에 글을 쓰는 재미로 살았다. 너무 바빠 며칠간 글을 단 한 줄도 못 쓰고 지내도, 머리 속으로는 늘 어떤 문장들을 쓰고 있었다. 스마트 폰이 생기면서 메모장에 이런저런 짧은 글들을 남길 수 있었고, 바쁘게 이동하다가도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단어 만이라도 써놓곤 했다. 물론 그래놓고 나중에 열어보면 내가 이때 왜 이 단어를 남겨두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작년 12월 초에 그 전날 많은 눈이 내린 것을 보고 글을 쓰다가 멈추고 그 다음 날에 북플에서 과거 오늘 쓴 글을 보니, 무려 13년 전에 쓴 글이 어제 쓴 글과 거의 완전히 똑같은 글이라는 것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 글은 너무 같은 소재, 같은 패턴에 머물러 있구나. 어쩌면 지금 이 글과 거의 비슷한 글을 언젠가 여기 알라딘에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에 제목으로 넣은 이승환의 노래 제목도 언젠가 제목으로 써먹었을 확률이 높다. 아마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시 제목으로 적은 것은 마땅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저 노래를 참 많이 좋아했고, 자주 불렀기 때문이기도 하다.


새해 계획 같은 것을 세우지 않는 편이다. 살면서 딱히 올해는 꼭 뭔가를 해야지 이런 생각을 가진 적도 거의 없다. 계획이란 거창한 말은 좀 그렇고, 하필 시기가 양력으로 1월이라 좀 그렇기는 한데, 이제부터 이런 거 한 번 해보자고 생각한 것이 아침에 북플을 열어서 지난 오늘 게시판에 글이 없는 날엔 글을 하나 써보자 이런 생각을 해봤다. 그게 오늘이다. 2011년 전후로 한 삼사년을 제외하면 여기 알라딘 서재에 글을 열심히 쓰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오늘 쓴 글이 없는 날이 제법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날 마다 매번 글을 채워 넣기는 쉽지 않겠지. 그러니 꼭 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우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저 가능하다면 짧더라도 글 하나를 보태 놓으려고 노력하자. 뭐 이런 정도의 생각이다.


끄적이다 말고 방치 중인 책 이야기가 몇 개 있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나서 나중에 이걸로 글을 쓰려고 남겨둔 쪽글도 여러 개가 있다. 그리고 꽤 오래 안 보다가 최근 다시 찾아서 보고 있는 여자 프로농구 경기들에 대한 글도 써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에 북플을 열어보고 아, 지난 오늘 쓴 글이 없구나 하고 깨달은 후에 무슨 글을 하나 남겨볼까 고민했다.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아님 늘 하듯 일상 이야기? 아니면 농구 관람기? 농구 이야기를 쓰려고 유튜브로 어제 봤던 경기들을 다시 돌려 보려다가 아, 이러면 글 쓰는데 한 서너시간은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 기록도 따로 찾아봐야 하고, 그 경기 뿐 아니라 최근 경기들의 흐름도 찾아봐야 하고, 다른 팀들의 경기도 살펴보며 비교해야 한다. 다른 할 일도 있기 때문에 글 하나에 그렇게까지 시간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역시 예전에 써놓았던 글들을 찾아서 완성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겠지 생각하고 끄적여 놓은 글들을 찾아보았다. 확실히 제법 많은 분량을 써놓은 글들도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글들도 다시 살리려면 생각보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비교적 빠르게 쓰는 편인데, 한번 멈추고 나면 그 글을 다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 글을 쓸 때 당시의 감정과 느낌이 사라져 버려서 다시 그 맛을 살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결국엔 그냥 최근에 있었던 일들 중심으로 일상 수다를 하나 더 쓰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글감도 두세개 정도 떠올랐다. 그 전에 내가 왜 아침부터 이렇게 글을 두드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써야지 하고 시작한 것이 벌써 한 30분 가까이 지나버렸다. 결국 글을 다 쓰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나있겠구나.


스몸비


서울역에서 파주 운정까지 GTX 일부 구간이 개통하면서 파주로 가는 시간이 엄청 짧아졌다. 그전에는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 반 이상, 거의 2시간 가까이 걸렸다. 지금은 연신내 역으로 가서 GTX를 타면 종점인 파주운정역까지 15분 밖에 안 걸린다. 물론 연신내 역까지 가는데 시간이 꽤 걸리고, 역에 들어서서도 지하 8층인 승강장까지 내려가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개통 초기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에스컬레이터를 수차례 갈아타며 오르거나 내려야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베이터가 생기며 시간이 조금 단축되기는 했다. 확실히 이동 시간이 줄어든 것은 좋기는 하지만, 이렇게 깊숙히 지하 공간을 개발하며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은 천상 환경활동가로 살아갈 수 밖에 없구나.


어느 날 파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열차 안 커다란 화면에서 방영되고 있는 교통 안전 캠페인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평소 이동 중에 열차 안 곳곳에 배치된 안내판과 영상들을 보며 띄어쓰기 오류나 맞춤법 오류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나를 보면 또 한 편으로 천상 출판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영상에서 낯선 단어를 하나 발견했다. 스몸비? 저게 우리말인가? 저런 단어가 있나? 뭔가의 줄임말인가? 스...... 스...... 스 로 시작하는 단어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무심코 스위스를 떠올렸다가 우영우가 생각날 뿐이었다. 귀찮아서 검색해볼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 다시 그 단어를 마주쳤다. 역시 파주에서 돌아올 때였다. 이번에도 무언가 줄임말이 분명할텐데, 스...... 스...... 스님 말고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스를 넘기고 몸은 뭐가 있을까? 몸...... 몸...... 몸은 더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말에 몸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있나? 그날도 검색을 하기는 싫었다. 그냥 머리로만 더 고민해보다가 열차에서 내릴 때가 된 후로는 잊어버렸다. 다시 며칠이 지나서 그 단어와 마주쳤다. 이번에는 참지 못하고 폰을 꺼내서 검색했다. 어! 스몸비(Smombie) 스마트폰과 좀비를 섞은 합성어였다. 줄임말이 아니었다. 어느 언론 기사에 따르면 2015년부터 이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벌써 10년도 더 지났는데, 나는 이번에 처음 봤다. 영미권에서 주로 쓰고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안 쓰는 단어가 아닐까? 아니면 나만 몰랐던 걸까? 내가 보았던 영상은 한국교통안전공단에서 만든 교통안전 캠페인이었는데, 저 스몸비란 단어를 쓸 거라면 친절하게 그 뜻도 적어주면 좋았겠다 싶다. 나처럼 이 단어를 처음 보는 사람이 의외로 제법 있을 것 같은데.


두쫀쿠


언젠가 두바이 초콜릿이라는 것이 유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특이하게도 어려서부터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서 사탕이나 초콜릿 따위 달달한 것들을 거의 먹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두바이 초콜릿이 아무리 유명해도 먹어볼 일도 없었고, 심지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왜 두바이 초콜릿이라고 부르는지 관심도 없었다. 비슷한 유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탕후루가 유행할 때는 작은 아이 덕분에 맛을 보았었다. 아, 그 혀가 아릴 정도의 단 맛 때문에 너무너무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이가 먹어보라고 주었기 때문에 아이 앞에서는 잠시 참았다가 음료수를 사서 계속 입을 헹구듯 마셨다. 이런 것을 사람들이 유행처럼 먹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최근에는 두쫀쿠라는 것이 유행한다고 들었다. 아이들이 무슨 말인지 아느냐고 묻길래, 두바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큰 아이가 맞다며, 두바이 쫀득 쿠키의 줄임말이라고 알려줬다. 쫀득 쿠키라니 이건 또 어느 나라 말인가 싶었다. 근데 두바이가 붙는 걸 보니 두바이 초콜릿과 관계가 있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은 아이가 두바이 초콜릿이 유행하다보니 그 파생상품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두바이 초콜릿보다 더 유명해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작은 아이는 이 두바이 초콜릿이라는 것이 실제로 중동이 있는 두바이라는 지역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는 그냥 그런가 하고 말았다. 암튼 이번에도 작은 아이가 두쫀쿠를 사왔다. 애들 엄마와 큰 아이 그리고 작은 아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안 먹을 생각이었다. 탕후루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작은 아이는 내가 꼭 맛을 봐야 한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작게 자른 조각 하나를 입에 넣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달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바삭한 느낌은 생라면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겉을 싸고 있는 초콜릿은 약간 떡과 비슷한 식감이었다. 뒷맛은 찰떡 아이스를 먹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주 옛날에 어린 시절에 한 번 먹어본 것이라 정확한 맛의 기억은 아니겠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냥 이런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저 내게는 탕후루 만큼의 충격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무슨 맛인지 알았으니 됐다. 다시는 먹을 일이 없을 것이다.


거울 효과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기 시작한 지 5년 정도 되었다. 돈을 주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은 것이 4년 정도 되었다. 아주 가끔 가위로 혼자 끝 부분을 일정한 길이로 자르곤 한다. 어차피 묶고 다니는 일이 많아서 꼭 길이를 맞추지 않아도 상관 없고, 풀고 다닐 때에도 파마를 한 것처럼 반곱슬이라서 길이가 맞지 않아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머리칼이 짧았던 시절에는 짧으면 한 달에 한 번, 길어도 두 달에 한 번은 꼭 미용실에 가야 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옆머리와 뒷머리가 지저분하게 자란 모습을 싫어하고 못 견뎌했다. 그런데 아예 머리를 기르고 나니 미용실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돈을 아끼는 측면도 있지만, 나는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한 10여분 남짓의 그 시간이 좀 싫었다. 누군가, 그러니까 나와 전혀 친밀하지 않은 어떤 존재가 내 몸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긴 시간 만지고 다듬는 것이 불쾌 까지는 아니지만, 그냥 썩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 주위에는 나처럼 머리카락을 기르고 사는 남성들이 여러 명 있다. 언젠가 어느 회의에 갔는데, 나를 포함해서 참여한 남성 네 명은 모두 머리가 길었고, 여성 세 명은 모두 머리가 짧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과는 반대였다. 지금 내 머리카락의 길이는 애들 엄마와 두 딸들과 비교해도 더 길다. 머리를 기르고 살기 때문에 불편한 공간이 있다. 공중 화장실이나 공중 목욕탕 같은 공간이다. 목욕탕은 평소에는 거의 가지 않지만, 아주 가끔 갔을 때에는 나 때문에 놀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화장실은 자주 사람들이 놀란다. 뒷모습만 보고 여자 화장실을 잘못 들어왔다고 놀라서 나가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나는 수염도 기르고 다니기에 앞이나 옆 모습을 본다면 절대 오해할 일이 없는데, 뒷모습은 방법이 없다. 처음에는 전철역이나 공원 화장실 같은 곳에서 자주 이런 일이 생기다보니 좀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익숙해졌다. 놀란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걸 내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으니.


작년 연말에 동네에 있는 헬스클럽에 다니고 있다. 이 헬스클럽이란 단어는 아마 콩글리쉬일텐데, 그렇다고 핏니스클럽이나 휘트니스클럽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해서 그냥 익숙한 헬스클럽이라고 하자. 우리 동네에 이 헬스클럽이 문을 연 것이 딱 작년 이맘때였다. 큰 길가도 아니고 이렇게 작은 동네에도 생기는구나 하고 약간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는 시간 날 때 한 번 구경이라도 해야지 생각했지만, 일 년이 다 되도록 갈 일은 없었다. 아마 보일러 문제만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계속 갈 일이 없었을 텐데, 불행하게도 작년 연말에 보일러에 문제가 생겼다.


그날 따라 중요한 일정이 있었는데, 보일러에 뭐가 문제가 생겼는지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해마다 겨울이면 한 서너번 정도 온수 배관이 얼어 붙어버리는 일이 생긴다. 열선을 감아 놓아도 꼭 서너번은 그렇게 되더라. 대개는 드라이기로 녹이지만, 가끔은 저절로 녹을 때까지 친구 집으로 피난을 가기도 한다. 이번에는 보일러를 살펴볼 여유가 없어서 급하게 동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씻고 가겠다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이미 출근해 있었기 때문에 알아서 씻고 가시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에 보니 다시 온수가 나왔다.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저절로 해결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또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다시 그 친구에게 부탁해도 괜찮았지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한 십여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동네 친구는 동네 뒷산, 산 자락에 살았다. 그 높은 곳까지 따닥따닥 집들이 지어져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친구 집 바로 뒤로 등산로 옆에는 텃밭들이 있었다. 그 비탈진 골목길 어딘가부터 도시가스 연결이 안 되는 곳이라고 했다. 겨울마다 기름 보일러를 돌려야 하는데, 낡은 집이라 아무리 보일러를 돌려도 소용이 없다고 했다. 기름 값만 아깝다고 하며, 그 친구는 매년 겨울이 되면 전철역 근처 헬스클럽을 등록한다고 했다. 아침에 거기서 씻고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거기서 씻고 집으로 온다고 했다. 그 당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게 기름 보일러를 돌리는 것보다 훨씬 더 경제적이고 좋은 방법이네. 씻기 전에 운동도 할 수 있으니 건강에도 좋고. 이런 말을 했었다. 그 말이 이번에 생각이 났다. 이번 겨울에 또 얼마나 자주 보일러가 문제를 일으킬 지 알 수 없는데, 매번 친구네 집을 이용하는 것보다 집 가까이 있는 헬스클럽을 이용하자 싶었다. 


한때는 꾸준히 헬스클럽을 다녔던 때가 있었다. 집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로 운동을 잘 안 하게 되는데, 그래도 돈을 주고 등록을 해 놓으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집에 운동기구도 거의 없어서 가벼운 맨몸 운동이 아닌 제대로 된 운동을 하려면 헬스클럽에 가야 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바벨을 사고, 실내 철봉을 사고, 케틀벨을 사고, 불가리안 백을 사고, 샌드백을 샀다. 덤벨로 여러 종류를 많이 샀다. 케틀벨도 무게 별로 숫자가 늘었다. 집에 운동기구를 갖춘 이후로는 굳이 헬스클럽을 갈 필요가 없었다. 집에서도 충분히 좋아하는 여러 동작들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 심각한 근손실을 겪었고, 이후로 다시 열심히 운동을 해봤지만, 내가 좋아했던 여러 종류의 동작들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운동에 흥미를 잃었다. 대신 달리기에 빠졌다. 교통사고 이전에도 달리기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주로 2킬미터 이내로 짧은 거리를 뛰고 쉬는 방식으로 했었다. 본격적으로 장거리 달리기를 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달리기를 하기 전에는 먼지만 쌓여가는 저 많은 운동기구들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가끔 찔끔 찔끔 운동을 했었다. 그런데 달리기를 하면서부터는 죄책감도 내려놓게 되었다. 나는 달리기를 열심히 하니까 운동은 좀 쉬어도 괜찮아 라고 생각한 것이다.  


헬스클럽에 등록한 것은 거의 15년 만이다. 생긴지 1년 밖에 안 된 곳이라 깨끗했다. 공간이 넓지 않은 것에 비해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나는 어차피 기구 운동은 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기구들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스트레칭 공간이 별도로 있다는 것과 좁기는 하지만 프리웨이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망설임 없이 등록했다. 처음에는 간단히 몸을 풀고 덤벨, 바벨, 케틀벨 운동만 했는데, 나중에는 워밍업으로 트래드밀을 달린 후에 다른 운동을 시작했다. 원래 집에서 헬스클럽까지 달려가는 것으로 워밍업을 해야 할텐데, 거리가 워낙 가까워서 워밍업이 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몸에 열을 좀 내기 위해 트래드밀을 달리기로 했다. 트래드밀을 달리는 것은 참 지겹고 싫은 일이다. 이왕 달릴 거라면 무조건 밖에서 달려야 한다는 생각인데, 겨울이기도 하고, 어차피 돈을 냈으니 다른 기구들은 이용하지 않더라도 이것 만이라도 이용하자고 스스로 타협을 한 것이다. 밖에서 달리면 10킬로미터를 달려도 전혀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은데, 트래들밀에서는 1킬로미터도 못 가서 지겹고 힘들더라. 그리고 좁은 폭 안에서 움직이는 기계의 속도에 맞춰 일정하게 달리는 것이 너무 싫고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하다 보니 이제는 좀 익숙해지기는 했다.


문제는 탈의실이었다. 나는 수염을 기르기는 했지만, 머리가 길어서 내가 탈의실에 있을 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어저씨들이 있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이기는 한데, 그래도 나 보다는 한 열 살 이상 많아 보이는 아저씨들. 게다가 나는 교통사고로 인한 수술자국이 몸에 있다. 이게 의외로 칼에 찔린 자국처럼 보인다고, 예전에 같이 목욕탕에 갔던 친구가 말했었다. 이래저래 탈의실이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수술자국은 최대한 옷을 빨리 갈아 입는 것으로 괜찮지만, 머리는 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운동을 마치고 운동복을 다 벗고 샤워장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에 탈의실로 어떤 남성이 들어왔다. 깡마른 체격에 키가 작았는데 머리카락은 길었다. 눈이 딱 마주쳤는데, 곱상한 인상은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여성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옷을 모두 벗은 알몸이었다.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는데,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서 열쇠로 사물함을 열었다. 그제서야 아, 남자구나 생각이 들었다. 샤워장으로 들어가면서 이런 상황에서 쓰는 표현이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하고 생각을 시작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나중에 한참 나중에 거울 치료 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비록 수염을 기르기는 했지만, 머리카락이 긴 내가 탈의실에 들어서면 다른 사람들도 순간 순간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걸 내가 겪어보기 전에는 어떤 느낌인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내가 그렇게 놀라고 당황해보니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놀랐겠구나 싶었다. 엄밀히 말하면 치료 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으니 거울 효과라고 해야 하려나. 암튼 내가 긴 머리의 남성을 보고 순간적으로 여성으로 착각해 놀라다니. 새삼스럽게 지금까지 나 때문에 놀랐을 많은 남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탈의실에 들어설 때 헛기침이라도 하고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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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20 19: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에 이전 글이 올라오지 않는 날이 많아 감은빛님 글 더 자주 접했으면 합니다. ㅎㅎ
그나저나 스몸비, 두존쿠 두 개 다 의미를 몰랐네요. 어린이 프로 케릭터 이름인가 했네요.

감은빛 2026-01-26 10:42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쓰고 나서 문득 어쩌려고 저렇게 써 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내가 글을 하나도 안 쓴 날이 의외로 꽤 많을텐데.
뭐, 꼭 그렇게 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겠죠.
암튼, 올해는 좀 더 글을 써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잉크냄새님의 멋진 여행 이야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카스피 2026-01-21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감은빛님 글을 자주 접했으면 합니다.그런데 두쫀쿠 가격이 남 사악한것 같아요

감은빛 2026-01-26 10:44   좋아요 0 | URL
두쫀쿠 가격이 정말 비싸더라구요.
작은 아이가 산 가격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큰 야이는 요즘 두쫀쿠를 만들어 파는 카페에서 짧은 시간 일을 하는데,
큰 아이 말로는 그 정도로 비쌀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구요.
본인은 두쫀쿠를 팔면서도 그 비싼 두쫀쿠를 먹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페크pek0501 2026-01-27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글은 너무 같은 소재, 같은 패턴에 머물러 있구나.˝ - 이런 생각을 저도 하는데 어느 시인의 산문집이었던가 본 글이 있어요. 작가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내용만 달리 해서 반복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공감이 갔어요. 저도 글을 쓰다 보면 중복되는 메시지인 경우가 있어요.

말로만 듣는 것보다 실제 경험이 효과적이죠. 자기가 직접 경험해야만 아는 것들이 있어요. 감은빛 님이 긴 머리의 남성을 보고 여성인 줄 놀랐던 경험처럼요. 갑질을 하는 이들이 을, 의 입장에서 살아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ㅋㅋ

감은빛 2026-02-04 10:31   좋아요 0 | URL
페크님께서는 언제나 댓글로 저를 응원해주시고, 힘을 주시네요. 늘 고맙습니다! 글을 더 잘 쓰고 싶은데 다른 방법 보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쓰는 것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하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늘 시간과 의지인 것 같아요. ㅎㅎㅎㅎ
 

이번 주말은 어쩌다 좀비영화를 네 편이나 보고 말았다. 토요일에 두 편, 일요일에 두 편. 모두 넷플릭스에서 보았다. 지난 새벽에 쓴 글에서 소개한 두 편은 인도네시아 좀비영화 [불사의 약]과 필리핀 좀비영화 [아웃사이드]였다. 이번에는 일요일에 본 태국 좀비영화 [지암]과 스페인 좀비영화 [죽은 자들의 골짜기] 이렇게 두 편을 살펴보고, 맨 마지막에는 주말에 연속으로 본 네 편의 좀비영화를 종합적으로 비교해보자. 어제 본 두 영화는 그간 접해보지 못했던 동남아시아 좀비영화라는 점과 위기에 처한 가족이 좀비 세상을 맞은 이야기 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늘 두 편은 좀비와 싸우는 액션이 주요 내용이란 공통점과 또 제목을 정하는 방식에 공통점이 있다.

일단 [지암]부터 보자. 감독 및 배우 정보는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자. 찾아봐도 쓸만한 정보가 없었다. 어제 본 두 동남아 좀비영화는 영화 초반에 어느나라 영화인지 궁금해하며 봤다. 필리핀 영화는 초반 대사가 다 영어였고, 그 다음에 나오는 타갈로그어를 전혀 몰라서 감을 잡지 못했었다. 인도네시아 영화는 처음에 분위기만 보고 태국 영화인가 생각했는데, 잘은 모르지만 약간 동남아 느낌이 나는 영화는 지금까지 태국 영화 밖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국영화는 액션 영화와 호러 영화를 중심으로 한 십여편 정도를 봤었다. 그런데 대사를 듣다보니 아는 단어들이 들렸다. 어, 이거 바하사 인도네시아 잖아. 그럼에도 인도네시아 영화라고 확신하지 못했던 건, 말레이시아어도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구체적인 지명이 나오면서 인도네시아 영화 맞구나 했었다.

반면에 [지암]은 맨처음 나레이션을 들을 때부터 태국 영화라고 알았다. 태국어를 알지 못하지만, 태국어 특유의 발음은 알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레이션이 세계관부터 설명한다.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며 해양 생태계가 붕괴되고 전세계는 식량난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지고, 여기저기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한다. 여기까지 설정은 현실을 매우 잘 반영하여 근미래를 잘 설계했다고 본다. 실제로 현재 인류는 기후위기를 극복할 과학기술도 의지도 없다. 매우 빠른 속도로 파국을 향해 가고 있는데, 대부분 그 심각성을 못 느끼는 아이러니한 블랙 코메디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태국은 고립된 환경에서 어떤 특정한 한 인물이 식량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만들었고, 그래서 태국만이 거의 유일하게 잘 살아남았다는 듯한 뉘앙스를 담은 나레이션이 이어졌다. 여기서 과거 태국의 이름인 시암이란 단어가 나온다. 태국 정부는 과거 위대한 시암처럼 더 훌륭하게 이겨낼 거라며 국민들을 세뇌시키는 듯한 내용이다. 구체적인 단어나 표현을 다를지 몰라도 뜻은 그랬다.

여기서 이 영화 제목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지암은 태국의 과거 이름인 시암에서 첫 글자만 좀비의 Z 를 붙여 만든 제목이다. 즉, 좀비 세상이 되어버린 태국을 뜻한다. 이런 작명법은 뒤에서 다룰 스페인 영화 [죽은 자들의 골짜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 들여오면서 붙인 제목은 영어 제목인 [Valley of the dead] 를 번역한 것이지만, 원제는 [Malnazidos] 이다. 이 단어를 구글 번역에 넣어봐도 뜻이 나오지 않았다. 실제 스페인어에 없는 단어라 당연한 결과였지만, 원제의 뜻이 궁금했던 나는 좀 당황했다. 그러다 저 영화 제목이 시암에서 지암이 된 것을 보고 감이 왔다. 다시 번역앱에 malnacidos 를 넣어봤다. ˝개자식들˝ 이란 욕설이 나왔다. 원어의 어감이 궁금해서 좀 더 검색해보니 영어의 ˝bastard˝ 나 ˝wretch˝ 에 해당하는 욕이라고 했다. 이 욕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최대한 어감이 비슷한 C 자리에 좀비를 뜻하는 Z 를 넣어서 좀비를 향한 욕을 제목으로 정한 것이다. 이 두 영화 모두 잘 만든 제목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봉하며 정한 [죽은 자들의 골짜기] 는 너무 재미없는 제목이다. 원제를 그대로 가져왔다면 더 좋았겠다.

다시 [지암] 으로 돌아가서 조금만 더 배경을 살펴보고 이어서 주인공들을 살펴보자. 많은 디스토피아 영화들처럼 이 영화도 현재보다 퇴보한 근미래를 보여준다. 특히 주인공 부부, 아니 결혼했다는 언급은 없고, 둘 다 반지를 끼고 있지는 않으니 동거 중인 연인일지도 모른다. 다만 여주인공은 반지를 목걸이로 걸고 다니기는 한다. 암튼 이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집은 완전한 빈민가처럼 나온다. 여주인공이 수도 방콕에서도 꽤 큰 규모의 병원 의사인데도 그렇다. 그것도 병원장이 인정하는 유능한 의사인데도? 이건 좀 설정 오류인 것 같다. 이렇게 큰 병원의 유능하고 유명한 의사가 가난할 수는 없다. 아무리 망해버린 근미래 세계라도. 아니 오히려 그런 세상일수록 의사는 권력과 부를 모두 가질만한 직업일 것이다. 의사인 여주인공 린이 가난한 것으로 설정한 것은 남주인공 싱이 돈을 위해 폭력에 노출된 위험한 일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다는 설정을 맞춰주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남자는 무에타이 선수였고, 돈을 위해 불법 경기에도 나갔던 것으로 나온다. 현재도 해안에서 도시로 물품을 운반하는 화물차의 경호원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치안이 엉망이라 도시로 들어오는 화물차는 무기를 가진 깡패들의 습격을 받는데, 주인공이 맨손으로 모두 물리치는 장면을 보여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영화가 이 남자와 좀비들 간의 액션을 보여주겠구나 하고 예상할 수 있다. 실제로 린이 일하는 병원에서 좀비가 등장한 이후로는 싱이 좀비들과 싸워 린을 구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나는 이 액션 장면들이 썩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무에타이는 맨몸 무술이다. 끝없이 몰려드는 많은 수의 좀비를 상대로 맨몸으로 싸운다? 아무리 무에타이 고수라 해도 그게 가능할까? [부산행] 에서 마동석도 맨주먹으로 좀비들을 때려잡기는 했지만, 그는 좀 어설프긴 해도 맨살이 직접 좀비들에게 닿지 않도록 아주 최소한의 방어구(?)를 갖추고 있었다. 아니 하다못해 장갑이라도 하나 끼고 주먹질을 하면 안 되나? 영화마다 설정이 다를 수 있겠지만, 보통 좀비에게 물리지 않더라도 상처를 입어도 감염이 되는 것으로 나온다. 좀비의 피나 체액이 몸 안으로 들어가도 감염이 된다. 주먹질을 하다가 주먹이 좀비의 이빨에 맞아 살갗이 긁히거나 살짝 벗겨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좀비를 제압하려면 머리를 관통하거나 뇌에 타격을 입혀야 하는데, 맨주먹과 발길질로 한방에 좀비를 제압하기에는 두개골이 너무 단단하지 않은가? 아무리 무술 고수라도 아니 오히려 무술 고수라면 무조건 무기를 들어야 할텐데, 싱은 링거를 걸어두는 쇠꼬챙이를 활용하거나 소화기를 무기처럼 쓰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거의 맨몸으로만 싸운다. 물론 팔꿈치와 무릎을 잘 쓰는 무에타이 특유의 동작들로 조금은 더 타격을 줄 수 있지만, 여전히 한계는 명확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좀비는 유난히 약한 것처럼 느껴진다. 좀비의 외모는 아주 흉측하기 짝이 없고, 물고기를 닮아 유난히 가로로 길게 찢어진 입에 아주 날카롭고 큰 이빨을 가진 인상적인 외모의 좀비들이 맨 몸으로 싸우는 단 한 사람을 제압하지 못한다는 건 아주 심각한 오류다. 좀비는 머리가 으깨지거나 관통되지 않으면 죽지 않는 불사와도 같은 존재이며 사람보다 강한 힘을 쓰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이 떼로 몰려오니 경찰이나 군인들도 당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걸 한 사람이 맨 몸으로 상대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곤봉이나 삼단봉 아니 그냥 짧막한 쇠꼬챙이 하나라도 들고 싸웠으면 훨씬 편하게 영화를 봤을텐데.

이외에도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은 영화였다. 전세계가 식량난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어느 한 사람 덕분에 태국만 위기를 극복했다는데, 그 방법이 뭔지 알려주지 않는다. [설국열차] 처럼 단백질바 라도 개발해서 나눠준걸까? 아닌게 아니라 영화 초반에 유난히 바퀴벌레가 우글우글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기분 나쁘게 불길한 느낌의 생선을 먹고 최초의 좀비가 나타난다는 설정인데, 이것도 이유가 나오지 않는다. 바다가 오염되어서 그렇다던가 뭔가 이유가 있었어야 했다. 또 병원에 진입한 특공대가 폭탄을 설치해 건물을 폭파시키는데 이 큰 건물을 폭파시키기에는 너무 적은 폭탄을 건물 지하에만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영화의 가장 절정부에 해당하는 액션 장면에 있다. 옥상에서 진입한 특공대가 중요한 인물을 데리고 헬기로 탈출하려는 장면인데, 주인공 남녀와 특공대가 각자 좀비떼와 싸우다가 마주치는 부분이다. 이 장면은 감독도 좀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유난히 빠르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들이 딱 마주치는 장면에서 싱은 왼쪽 어깨에 총을 맞는다. 총을 든 이들은 특공대 밖에 없으니 이들이 쏘았을텐데 왜 그랬는지, 총을 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이 직전 장면까지 특공대는 계속 달려드는 좀비들에게 공격받고 있었으니 외모상 싱이 좀비가 아니란 것은 알았을 것이다. 아, 아니 다급하면 헷갈릴 수 있고, 아니면 그냥 실수로 쏘았다고 해도 좋다. 일단 총에 맞은 것까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 다음에 왜 린은 자신의 남편 혹은 연인이라고 특공대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의사가 필요하다는 중요인물의 말 한마디 때문에 곧바로 탈출하지 않고 좀비떼와 싸워가며 린을 구하러 왔는데, 왜 린을 지켜주고 있던 싱을 공격하는 걸까? 왜 린은 해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을까? 이어서 특공대의 대장과 싱이 아주 멋있게 일대일 결투를 벌인다.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중요한 장면이자 핵심인데, 이건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왜 둘이 싸우지? 바로 옆에 좀비떼가 있는데, 인간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말이 되나? 게다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싱은 린을 보호하고 있던 사람인데. 소수의 특공대원들이 차례로 좀비떼들에게 당하고 좀비랑 싸울 사람이 부족한데, 왜 특공대 대장은 굳이 멀쩡한 사람이랑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 걸까?그리고 왜 좀비들은 이 둘이 결투를 벌일 동안 습격을 멈춘걸까? 카메라가 둘이 뒤엉켜 싸우는 모습에 집중하는 동안 좀비들은 엉거주춤 곁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걸까? 만약 그 순간까지 주위에 있던 좀비들이 모두 제압당하고 잠시 좀비들이 없는 상황을 상정한 것이라면 싸우는 컷들 사이에 주위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들과 좀비들이 움직이는 장면들을 넣어줘서 관객들이 이해하도록 보여줘야 한다. 이건 연출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싱이 헬기를 타지 않은 것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처음에 싱이 싸우는 과정에서 물렸구나. 그래서 헬기를 포기하고 그냥 보내주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장면들과 맨 마지막 쿠키 영상까지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왜 헬기를 안 탄 거냐고?

아, 이외에도 따지고 싶은 장면들이 너무 많은데, 시간과 지면이 아까우니 그만하자. 감독은 어쩌면 맨몸 무술이 돋보이는 액션 장면을 멋지게 넣고 싶었는데, 좀비들이랑 싸우는 장면에서는 이게 별로 인상적인 합이 나오지 않으니 특공대 대장이랑 멋진 액션씬이라도 넣자고 생각했던 것일까? 암튼 여러모로 억지스러운 부분들이 많아서 아쉬운 영화였다.

이제 다음 영화 [죽은 자들의 골짜기] 로 넘어가자. 이 영화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만약 좀비가 등장했다면 이란 가정에서 출발했다. 이 지점이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하고 흥미로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좀비가 등장하면 이란 가정에서 출발하는 드라마 [킹덤] 시리즈가 연상되었다. 드라마 상에서 정확한 시점이 제시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병자호란은 일어나기 전이 배경일거라고 생각했었다. 또 실제 역사가 아닌 문학작품에 좀비를 등장시켜서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도 생각났다.

스페인 내전은 내전이라 부르지만, 유럽 전체에서 많은 나라들이 참전했었고, 전체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공화제 민주주의 등이 부딪힌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배경으로 좀비물을 만들다니 이거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것이 영화를 보기 전 내 생각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는 기대만큼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나름의 독창성과 장점을 괜찮게 살린 나쁘지 않은 작품이라 생각했다.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라고 해서 원작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는데,  마누엘 마르틴 페레라스라는 작가가 2012년에 쓴 [Noche de Difuntos Del 38] 이란 소설이란 것 외에 다른 정보는 찾지 못했다. 아, 게임이 영화보다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화는 여러모로 만듦새가 썩 좋지는 못한데, 원작 소설은 인물들을 잘 살리고 스페인 내전이란 복잡한 시대 상황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을 해봤다.

이 영화의 가장 좋은 점은 좀 독특한 인물 구성이다. 일단 주인공인 한 로사노 대위는 전형적인 전쟁영화 혹은 액션영화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기업을 대변하는 변호사 출신 군 법무관이다. 실전 경험이 없어 손이 부드럽고 깨끗하다는 묘사가 나온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많이 배운 인물(다른 말로 먹물) 답게 위기 상황에서 빠른 판단을 내리고 눈치도 빠른 편이라 흐름을 잘 읽고 일행을 이끌어간다. 파시스트 진영의 꽤 높은 직책의 간부이지만, 프랑코와 그 세력에 대해서는 다소 불만이 있는 듯하다. 그의 동생은 공산주의 세력에 복무하고 있다는 대사도 있었다.

여주인공은 공산주의 진영의 의용병으로 마지막까지 이름은 나오지 않고 다만 타락한 사제 즉, 성직자를 죽였다고 사제 킬러라고 불린다. 그 사제가 자신의 어린 여동생을 건드려서 죽을만큼 어떤 벌을 준 것처럼 묘사된다. 사람들은 그를 사제 킬러 라고 부르지만, 자신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잘 싸우고,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다. 맨 마지막에 좀 뜬금없는 로사노 대위와의 애정 행각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만, 영화니까 넘어가주자.

공산주의 진영의 리더는 철도 노동자 출신 중사이다. 이 인물도 이름이 안 나왔던 것 같다. 약간 우유부단하게 보이는 측면이 있으나, 인간적인 면모가 있는 꽤 괜찮은 지휘관이라는 생각이 든다. 패색이 짙은 이 전쟁의 판도를 잘 읽고 있으며, 적이라도 불필요한 희생은 줄이려는 생각이 있다.

비중은 좀 적었지만 멋있는 인물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파시스트 진영의 무어인이자 무슬림인 라피르 일병이다. 저격수로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다. 맨 마지막에 행방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아마 무사히 살아남은 것 같다. 마지막에 열차 위를 뛰어다니며 가장 크게 활약하는 인물이다.

다른 한 명은 공산주의 진영의 행동대장 같은 위치에 있는 미겔 안드레우 라는 인물이다. 정규군이 아닌 의용병이라 계급은 없다. 늘 다이나마이트와 성냥을 갖고 다녀서 성냥이라 불린다. 입대 전에 오토바이 경주로 유명한 레이서였다. 아내와 갓난 아기였던 아들이 파시스트 세력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마지막에 폭탄이 잔뜩 실린 차 안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자폭한다.

이외에도 로사노 대위가 데리고 다니는 어린 운전병이자 정비병이 있고, 중간에 합류하는 파시스트 진영의 간부(중위?)가 한 명 있고, 사나운 성질의 수녀도 등장한다.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체격이 크고 힘이 쎈 소련 출신 의용병이 비교적 초반에 좀비에게 당하고, 미국인 사진 기자도 퓰리쳐 상을 노리고 조작 사진을 찍으려다가 좀비에게 당한다. 그리고 공산당에서 직접 파견나온 것으로 보이는 참모(?)도 등장하는데 전형적인 원칙주의자이며 꽉 막힌 인물이며, 그에 알맞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 영화에서는 좀비 사태의 원인을 나치 독일로 설정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결혼식이 열리는 작은 시골마을에 독일군이 쳐들어와 마을 사람들을 전부 학살하는 끔찍한 모습이다. 여기에 어떤 파란 가루가 포함된 가스를 살포해 좀비를 만들었다. 이후 로사노 대위와 공산주의 진영 중사 일행이 만나고, 비록 적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일시적으로 힘을 합치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을 치루는 군인들이니 당연히 총으로 무장했고 덕분에 좀비들을 상대로 제대로 잘 싸운다. 물론 많은 수가 끝없이 달려드는 좀비를 상대로 탄약이 모자라는 등 차례로 당하기는 하지만, 이번 주말에 본 좀비영화 네 편 중에서는 그나마 제일 제대로 싸웠다. 그리고 서로 적으로 목숨 걸고 싸우는 군인이지만, 일시적으로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고 [웰컴 투 동막골]이 떠올랐다. 중반 이후에 조금만 더 인물을 잘 살리고, 결말을 제대로 연출했다면 훨씬 더 괜찮은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쉬움이 크다.

이 영화의 만듦새가 이렇게 좋지 않은 건 아마 제작비의 한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좀비들이 정말 하나도 무섭지 않고 별로 긴장감도 들지 않는다. 좀 더 예산을 써서 제대로 좀비들을 꾸미고, 연기자들도 좀 더 잘 지도했다면 훨씬 그럴듯한 장면들이 나올수도 있었을텐데. 하지만 이 영화의 어설픈 결말 부분은 시나리오 자체가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직전 장면까지 잘 싸웠던 일행들이 유독 마지막에 멍하니 있거나 도망만 다니기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 전투에 임할 때 어마어마한 좀비떼가 덮쳐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터널 입구를 막아놓지 않고 그냥 터널로 들어온 것과 터널로 진입하기 직전에 잔뜩 쌓여있는 보급품 상자들에서 총기와 탄약을 보급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는 장면 등은 명백한 오류다.

자, 이제 주말에 몰아본 좀비영화 네 편을 종합적으로 비교해보자. 일단 좀비영화니까 좀비 얘기부터 하자. 네 개의 영화 중에 가장 형편없는 좀비는 필리핀 영화 [아웃사이드]의 좀비다. 느리고 전투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주인공 가족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못한 장면들을 보면 당연한 선택이다. 지난 글에도 썼지만, 이 좀비들은 좀비로 변하고 직전에 한 말로 짐작되는 짧은 말을 반복한다. 사람을 보면 바로 습격하지 않고 먼저 말을 한다. 이렇게 예의바른 좀비라니!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면, 필리핀은 좀비예의지국이라 불러야겠다. 그 다음 한심한 좀비가 등장하는 건 태국 영화 [지암]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정체모를 생선을 먹고 좀비가 되어서 그런지 물고기처럼 입이 가로로 넓게 찢어져 날카로운 이빨들이 강조된 외모는 정말 흉측하기 짝이 없는데, 변변한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싸우는 주인공 한 명을 어쩌지 못하는 모습은 참 답이 없다. 아무리 상대가 주인공이라 해도, 그 주인공이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밀라 요보비치도 아닌데, 단 한 명을 상대를 못 하다니!세번째로 무기력한 좀비는 마지막에 소개한 스페인 영화 [죽은 자들의 골짜기] 좀비들이다. 이 좀비들도 느리고 떼로 덤비는 것 외에 별로 내세울 것이 없다. 그나마 이 정도로 점수를 준 건 마지막 장면에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가 덤벼들어 군대를 완전히 박살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네 편 중에 가장 강력한 좀비는 인도네시아 영화 [불사의 약] 이다. 이 좀비들은 일단 엄청 빠르게 뛰어다니고, 물린 후에 좀비로 변하는 속도도 빠르다. 결국 한 마을을 완전히 장악했고, 아마 머지않아 나라 전체를 아니, 바다를 건너 다른 섬으로 옮겨가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카르타가 있는 제일 큰 섬만은 장악할 것이다.

다음은 좀비가 되는 원인이다. 어차피 좀비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그 원인을 무엇으로 돌리던 설득력을 객관적으로 따지기는 어렵다. 단순히 작중에서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 라는 점을 살펴보자. 네 작품 중에 [아웃사이드]는 좀비 발생 원인이 나오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이미 좀비 세상이 되고도 한참 시간이 지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무엇을 원인으로 두더라도 어차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어려울테니 아예 원인은 언급조차 안 하는 전략이라면 나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하겠다. 그럼 가장 설득력 없는 좀비 발생 원인은 바로 [지암]이다. 무언가 정체를 알수 없는 생선을 먹고 좀비가 되는데, 이게 무슨 생선인지 왜 그런지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럼 이 세계관에서는 불안해서 아무런 생선도 먹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 다음으로 설득력이 약한 원인은 [불사의 약] 이다. 이 불사의 약이 어떻게 작용해서 좀비가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이건 제약회사에서 신약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작용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는 있다. 마지막으로 네 편 중에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건, [죽은 자들의 골짜기] 이다. 실험을 통해 만들었다는 설정은 앞의 [불사의 약]과 같지만, 여기에서는 나치 독일이란 존재가 더해져 더 무게를 실었다. 요 좀비 발생 원인 부분은 언젠가 시간날 때 더 많은 작품을 두고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다음은 등장인물들의 개성과 매력으로 평가해보자.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더 주인공들에게 몰입할 수 있는지도 포함해서 보겠다. 가장 매력을 잘 살리지 못한 인물들은 [불사의 약]이다. 나름 독특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거기서 더 잘 펼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마지막에 좀비들에게 뜯어먹히면서 프로포즈를 하고, 그 와중에 그걸 받아주는 황당한 연출이 나온 젋은 연인의 경우 이럴 거라면 애초애 왜 이렇게 비중을 높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은 [지암]이다. 처음에는 이 영화를 꼴찌로 생각했었다. 사실 세계관 설정은 열심히 했는데, 인물 설정은 오류 투성이다. 이유는 앞서 얘기했으니 반복하지 않겠다. 꼴찌였는데, 3등이 된 건 이 영화가 조금이라도 나아서가 아니다. 제법 흥미로운 설정의 인물들을 너무 살리지 못한 [불사의 약]이 너무 괘씸해서 순위를 내렸다. 그 다음 2등은 [아웃사이드]이다. 여기도 너무 과도하게 남편의 형에게 집착하고, 아이들에게 좀 냉담한 아내라던가, 어릴적 학대를 당했던 고향집에 너무 쉽게 집착하는 남편이라던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들이긴 한데, 이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방향성만은 잘 살렸다고 본다. 마지막 그래도 괜찮게 인물들을 살린 영화는 [죽은 자들의 골짜기]이다. 이 이야기도 위에서 했으니 반복하지는 않겠다.

마지막으로 다른 요소들 다 제쳐놓고 순전히 재미의 측면에서만 보고 평가해보겠다. 일단 [지암]을 가장 낮은 순위로 두고, 그 다음에 [아웃사이드]를 두겠다. 이야기 자체만 보면 [아웃사이드]가 가장 잔잔하고 어쩌면 지루한 이야기이고, [지암]은 반대로 재미있을만한 액션인데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지암]이 그만큼 액션을 잘 살리지 못한 측면도 크고, [아웃사이드]의 이야기가 그만큼 신선한 접근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다음으로 [불사의 약]을 2위로 두겠다. 작은 시골 마을에 좀비가 나타나 마을이 그야말로 완전히 망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잘 담았다. 물론 아쉬움이 많은 영화지만, 살짝 내려놓고 보면 그나마 볼만하다는 생각이다. 네 편 중에 그래도 재미를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는 건 [죽은 자들의 골짜기]이다. 결말의 전투 장면이 너무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 전까지는 그래도 꽤 재미있었다.

어쩌다 우연히 [불사의 약]을 본 것을 시작으로 주말을 좀비영화 네 편과 함께 보내 버렸다. 넷플릭스가 이후로 [아웃사이드]를 추천해주더니, [죽은 자들의 골짜기]와 [지암]까지 보여주면서 좀비 주말을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나 [지암]을 앞부분 한 1/3 정도 지점까지 보다가 그만두었었더라. 병원에서 싱이 린을 구하기 위해 좀비들과 싸우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그 당시에도 나는 좀비들과 무에타이 전사의 액션 장면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기서 딱 그만둔 것을 보면. 저 위에서는 맨몸으로 싸운다는 걸 강조해서 지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주인공 혼자 싸운다는 것도 문제다. 좀비는 쉴 새 없이 떼로 덤비는데, 이에 혼자 맞서서는 도무지 승산이 없다. 어떻게든 동료를 모아서 팀으로 맞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좀비들을 놔두고 특공대 대장과 일대일 결투를 한 것은 이 영화 최대의 실책이다. 그리고 여자주인공이 너무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 역시 폰 자판으로 글을 두드리는 일은 어렵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린다. 한번 오타가 난 글자는 수십번 반복해도 계속 같은 오타가 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폰 자판도 엄청 빠르게 잘 치던데 그런 사람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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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6-01-13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좀비영화의 경우 영미 영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안 보는 걸 원칙으로 삼아서 넷플에 가끔 태국이나 타국 좀비영화가 소개되긴 하지만 안 보게 됩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좀비영화도 잘 안보기기에...ㅎㅎ 28일 후, 28주 후, 좀비랜드 정도 되는 작품들을 보다보면 다른 나라 작품은 재미가 없더라구요. 몇번 시도는 해 봤지만 보다가 그만 두게 되더군요..ㅎㅎ

감은빛 2026-01-14 03:07   좋아요 1 | URL
야무님, 말씀하신 [28일 후], [28주 후], [좀비랜드] 이 세 작품 모두 저도 좋아하는 영화들입니다. [28년 후]는 조금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트릴로지 중 첫 영화라고 하니 감안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기대하고 봤던 [좀비랜드: 더블탭] 는 정말 기대를 많이 해서 그랬는지 실망이 컸습니다.

저는 영미권 영화 중에도 B급, C급 영화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어중간한 영미권 영화보다는 지금까지 접해보지 않은 다른 언어권, 다른 문화권의 영상 작품들을 더 많이 접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이 글에도 쓴 것처럼 저는 야무님과 반대로 영미권 영화나 우리나라 영화였으면 오히려 안 봤을 것 같아요. 글에서는 비판을 많이 했지만, 저는 언급한 네 작품 모두 보는 동안 재미있었습니다.
 

[불사의 약]과 [아웃사이드]

넷플릭스에서 좀비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았다. 날은 춥고 감기 기운 때문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다보니 뭔가 다른 일을 하기 어려웠다. 암튼 그냥 아무 생각없이 볼만한 영화가 뭐 없나 생각하다 고른 영화가 [불사의 약]이었고, 이걸 다 보고 나서 영화 정보 페이지에서 유사한 영화라고 보여주는 영화들 중에서 [아웃사이드]가 눈에 띄어 클릭했다. 둘 다 딱 시간 때우기 괜찮은 영화였다. [아웃사이드]는 살짝 지루한 면이 있는데, 그래도 배우들의 연기가 괜찮아서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둘 다 좀비영화이지만, [아웃사이드]는 좀비가 등장하는 장면이 별로 없다. 좀비 때문에 망해버린 세상에서 불화로 깨어질 위기에 처했던 한 가족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다룬 이야기다. [불사의 약]은 좀비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후 작은 마을 하나가 좀비로 초토화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여기도 불화로 인해 위기에 처한 가족이 나온다. 그러네. 이 두 영화가 좀비영화이기도 하지만, 위기에 처한 가족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먼저 보았던 [불사의 약] 부터 이야기 해보자. 이 영화는 인도네시아 영화다. 처음에는 분위기만 보고 태국영화인가 생각했다가 대사를 듣고 인도네시아 영화라고 알아차렸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 인도네시아 말을 익히곤 했었다. 원제는 [Abadi Nan Jaya] 로 구글 번역기를 돌려보면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이라고 나온다. 영어 제목은 [The Elixir] 이다. 엘릭서는 연금술에서 주로 사용하는 단어로 불로장생의 약을 의미한다고 나온다.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했던 것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찾아보니 그건 넥타르 라는 이름의 신들이 마시는 음료였다.

영화는 한 제약회사에서 만든 시제품을 두 명의 회사 중역에게 배달하라고 지시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한 명은 사장이고, 다른 한 명은 영화 맨 뒷부분에 등장하는 사람으로 아마도 상무이사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이 시제품이 바로 영화의 제목인 불사의 약이다. 제약회사의 사장은 이제 회사를 매각하고 은퇴할 예정인 노인이었다. 이 약이 배달되는 날은 공교롭게도 회사 매각을 결정하는 서류에 사인을 받기 위해 사위와 딸이 방문하는 주말이었다. 그리고 이날 사장이 살고 있는 시골마을 촌장 집에서는 무언가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있었고, 음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이 잔치에서 음식을 나르고 설겆이를 하는 젊은 여성 한 명이 이 마을 파출소에서 일하는 젊은 경찰에게 삐진 상태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사장 가족에게로 카메라가 돌아간다.

처음에는 얼굴들이 낯설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알고보니 이 가족 좀 독특한 구성이었다. 사장의 현재 아내는 사장의 딸과 어려서부터 절친이었다. 언제인지 시점이 나오지는 않지만, 사장의 아내가 죽고 나서,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의 아빠와 결혼한 것이다. 대화를 보면 사장의 딸은 당연히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고, 경어를 쓰지도 않는다. 딸은 절친이 자신의 아빠와 결혼한 후로 마음의 문을 닫고 말도 섞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남들에게 말할 때에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사장의 아들, 그러니까 딸의 오빠도 이 현재의 사장 아내에게 존칭을 쓰지 않는다. 여동생의 친구라서 당연한 걸일까? 오직 사장 딸의 남편, 즉, 사위만 장모님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원어에서는 달리 부르는 걸 번역 자막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사장 딸과 그 오빠가 모두 이 아내의 이름이나 애칭을 부르는데, 사위는 그러지 않는다. 영화 초반 최고의 갈등 요소는 이 두 사람의 불화이다.

사장은 회사에서 보낸 시제품인 약을 먹었고, 잠시후 흰머리가 검게 변하고, 주름진 얼굴이 펴졌다. 젊어진 것이다. 아내가 이 모습을 보고 놀라고, 나중에 다른 가족들도 모두 놀란다. 사장은 이 약 덕분에 젊어지자, 회사를 매각하려던 계획을 철회한다고 가족들에게 전한다. 이 젊어지는 약으로 대박을 터뜨릴 거라고도 했고, 늙은 몸이 다시 젊어졌으니 은퇴할 생각이 없어질만도 하다. 하지만 평생 일을 해본 적도 없고 아빠 재산으로 고가의 장난감이나 사 모으고, 게임에 빠져 사는 아들은 반발한다. 회사를 팔면 아빠가 자신에게도 돈을 줄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리고 아마도 현재 이 회사의 공장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위와 딸도 반발한다. 알고보니 사위는 이 회사를 매입하려는 다른 회사의 여성과 외도한 것으로 나온다. 딸은 사위와 이혼하고 이 회사를 판 돈으로 자신의 사업을 할 계획이었다고 말한다. 과연 사장이 계획을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매각을 했다고 해도 그 돈을 자식들과 사위에게 나눠줬을까?

딱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제목, 불사의 약이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내용이다. 이후로는 그냥 좀비가 생기고, 퍼져가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다. 불사랑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맨 먼저 불사의 약을 먹었던 사장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며, 좀비로 변하고 그 집 고용인들과 가족들을 공격한다. 우왕좌왕하다가 고용인 한 명이 물리고, 또 다른 한 명은 피를 뒤집어쓴다. 그리로 아들을 물려고 하다가 아들 손에 들려있던 석궁에 머리가 관통되어 움직임을 멈춘다. 영화의 제목인 불사의 약을 먹었는데, 좀비가 되어버린 것인다. 어쩌면 좀비를 불사의 존재로 볼 수도 있을까? 이 영화와 이따 다룰 영화 [아웃사이드] 모두 하반신과 분리되어 상반신만 움직이는 좀비가 나온다. 거의 대부분의 좀비 영화에서 좀비는 머리를 제외한 다른 신체가 분리되어도 죽지 않는다. 오직 머리를 공격했을 때에만 움직임을 멈춘다.

이후의 내용은 좀비가 점점 퍼져가고, 주인공 일행은 좀 바보같이 억지로 살아 남는다. 파출소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초반에 잠깐 등장했던 젊은 여성의 남자친구가 경찰이라서 활약을 좀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 파출소의 경찰들과 또 구조요청을 받고 지원을 나온 이웃 파출소의 경찰들 모두 아무것도 못 하고 손쉽게 좀비들에게 당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에 주인공 일행 세 명이 파출소에서 보호장비들을 착용하고 총기와 방패 등을 챙겨 나서는 장면이 나올 때, 이제서야 좀 속 시원하게 싸우는 장면이 나오려나 했는데 아니었다. 이들은 너무도 무기력하게 수많은 좀비들에게 포위되고 아무것도 못 하다가 천둥번개와 함께 비가 내려 겨우 살아남는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개연성을 찾아보기 어렵고 답답하고 무기력하다. 애초에 불사의 약이란 개념 자체가 현실성이 없고 이걸 먹었는데 왜 좀비로 변하는지도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으니, 개연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겠지만, 그럼에도 영화 안에서 나름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고 물리 법칙이 작용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많이 아쉽다. 전체적인 전개가 좀 많이 답답한데, 요즘 흔히 하는 말로 고구마 백개 먹은 것 같은 모습이다. 맨 마지막에 약간 신파로 빠질 것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다행히 아주 짧게 쿨하게 넘어가더라. 이거 하나는 칭찬할 만하다.

인도네시아 영화를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신선한 느낌이라 전반적으로 답답한 상황이었어도 그냥 봤다. 만약 우리나라 영화나 영미권 영화가 이 모양이었다면 그냥 중간에 포기했을 것이다. 감독이나 배우 등의 정보를 조금 찾아보기는 했는데, 우리말로 된 정보는 많지 않았고 익숙치 않은 인물들이라 그냥 넘어가야겠다. 내용은 많이 유치했지만, 배우들의 연기만은 대부분 다 좋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아직 작은 시골마을 하나만 좀비가 퍼진 상황인데,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서 인도네시아의 수도이자 대도시에 살고 있는 이 제약회사의 또 다른 중역, 맨 처음에 시제품을 보낸 또 다른 인물에게 배달된 약병이 비워진 모습을 카메라가 클로즈 업하며 보여준다. 곧 대도시도 좀비 세상이 될 예정이다.

다보고 나니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 생각난다. 연상호 감독이 이후에 만든 [반도]를 완전히 말아먹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작은 규모의 이야기를 디테일을 살려 만드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여기서 욕심을 부려 큰 이야기로 나아가려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 영화는 한 작은 시골마을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라, 한 편의 촌극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촌이 시골이란 의미의 촌이 아니란 걸 굳이 밝혀야 하는 걸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이 영화는 작은 이야기라서 그나마 그럭저럭 봐줄만한 영화였다고 본다.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이 감독이 연상호 감독처럼 이 영화 이후의 내용, 그러니까 도시에서 좀비 사태가 벌어진다거나 나라 전체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을 생각이라면 누군가 좀 말려줬으면 좋겠다. 아주 가끔 대화를 주고 받는 인도네시아 친구가 있는데, 그에게 대신 좀 전해달라고 할까? 한국의 연상호 감독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자, 이제 두 번째 영화로 넘어가자. [아웃사이드]는 필리핀 영화다. 맨 처음 티비 화면으로 결혼식 장면을 비출 때부터 거의 대부분의 대사가 영어라서 이게 어느 나라 영화인지 알 수 없었다. 결혼식 장면을 녹화한 비디오를 보여준 후에 한 가족이 어느 시골 빈 집, 낡은 빈 집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저택이라 부를만한 집에 도착하는 장면 부터 시작한다. 아, 여기서부터 좀 한 숨이 나온다. 이제 시작인데, 이 영화 호흡이 너무 느리다. 주인공 가족의 아빠가 공구 하나 들고 이 집을 살피는데, 느릿느릿 너무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이 가족은 중년의 아빠와 엄마 그리로 1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큰아들과 한 여덟살이나 아홉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아들까지 네 명이다. 이 집은 아마 아빠의 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보인다. 아빠는 자신의 부모님을 찾으려고 아주 천천히 집을 살핀다. 이층 침실에서 먼저 아버지를 발견한다. 손목에 좀비에게 물린 자국이 보이는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있다. 죽은지 그리 오래 되어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아버지의 오른손에서 은색 권총을 빼내고, 왼손에서는 은빛으로 빛나는 시계를 빼낸다. 슬퍼하는 기색은 전혀없다. 혹시 아버지가 아닌가? 모르는 집을 찾아온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방을 나와서 초첨이 아직 그에게 맞춰져 있어서 뒤쪽 배경이 흐릿하게 보일때 사람인 듯한 형체가 잡히고, 곧이어 그가 ˝엄마˝ 라고 불렀을 때 내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엄마의 얼굴이 좀 이상했다. 눈에 흰자위가 없이 검은색으로 채워졌고, 관자놀이 쪽에 뭔가 뽈록뽈롤 돋아올라 있었다. 전체적으로 낯빛이 어둡고 수척한 모습이 딱 좀비였다. 그리고 엄마가 말을 했다. ˝미안해˝ 잠시 후 또 미안하다고 반복했다.

그렇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좀비들은 말을 한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대화하거나 사람과 대화하는 건 아니고, 한 두 마디 말을 그냥 끝없이 반복한다. 아마도 죽기 직전에 한 말을 계속 반복하는듯 보인다. 아니 그러니까 좀비로 변하기 직전에 한 말. 이 엄마는 누군가 좀비에게 물리고 자신이 좀비로 변하기 직전에 자신의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손목을 물었겠지. 그 남편은 침대 위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아주 긴 시간 왕래가 없었던 아들이 가족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 영화는 좀비영화이지만, 좀비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좀비는 한 마디의 대사를 한다. 만약 내가 이 영화의 단역 배우로 좀비 역을 맡았다면, 좀 당황했을 것 같다. 좀비라 당연히 대사 없이 이상한 소리만 내면 될 줄 알았는데, 한 줄 뿐이지만 대사가 있다니! 좀비인데 이 대사 감정처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죽기 직전 대사니까 슬프게? 아니면 왜 하필 나야 하는 심정으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야하나?

주인공 남자 엄마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첫번째 좀비이고, 두번째 좀비는 철책으로 길을 막아놓은 곳에서 등장한다. 모래주머니로 쌓은 참호 안에서 나온 군인 좀비는 통행증을 보여달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은 무척 신사적이다. 다른 영화의 좀비들은 사람을 보면 앞뒤 안가리고 달려들어 물기 바쁜데, 이 좀비들은 절대 먼저 달려들지 않는다. 아주 예의 바르게 먼저 말을 건다. 그것도 천천히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들려준다. 마치 이런 것 같다. ˝나 좀비야. 나 여기 있어. 내가 지금은 여기 있는데, 곧 너를 물어뜯으려 달려들 예정이야. 그러니 잘 대비하고 있어. 나 곧 간다.˝

나중에 등장하는 많은 좀비 무리는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데, 그중에 신부 아니 목사라고 해야하나? 암튼 성직자가 있었다. 이 성직자 좀비는 신이 어쩌고 하는 상대적으로 긴 대사를 반복한다. 정확한 말은 기억 안 나지만, 성직자가 할 법한 말이었다. 근데 성직자 좀비라니 좀 재미있는 모습이었고, 게다가 설교를 반복해 말하는 성직자 좀비라니 아주 참신한 설정이었다. 그외 몇몇 좀비들은 피하라고 하거나, 저쪽이라고 방향을 알려주는 등 어쩐지 마지막 순간이 그려지는 대사들을 갖고 있었다.

좀비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데, 그 좀비가 죽기 직전 한 마디를 반복한다는 설정은 꽤나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아까 소개한 영화 [불사의 약]에 거의 주인공 비중으로 나오는 젊은 연인은 마지막에 함께 좀비들에게 뜯어 먹히는 와중에 프로포즈를 하는데, 남성이 반지를 꺼내 여성의 손가락에 힘들게 끼워주고 손을 맞잡은 채, 서로를 향해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게 각자 여러 좀비들에게 뜯어 먹히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다. 좀비가 된 이 연인이 이쪽 영화로 넘어오면 이 두 좀비는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 고백을 하는 아주 로맨틱한 좀비가 될 것이다. 게다가 저쪽 좀비와 달리 이쪽 좀비는 상대적으로 외모도 덜 혐오스럽다. 어쩌면 남녀 모두 외모가 괜찮은 배우를 섭외해 사람들을 홀리는 역할로 해도 재미있겠다.

앞의 영화도 답답한 측면이 많다고 했는데,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일단 이 가족의 상황 자체가 답답하고 짜증나는 상태다. 영화 첫장면에 비디오 녹화 장면으로 나오는 결혼식은 이 부부의 결혼식이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을텐데, 첫째 아들은 남편의 아이가 아니고 남편의 형님과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 낳은 아들이다. 영화 중간에 둘째가 첫째랑 같이 옛날 사진첩을 보다가 삼촌(우리식으로 부르면 큰아버지)과 형이 닮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고, 일부러 캐스팅을 그렇게 했겠지만, 첫째를 연기한 배우도 아빠를 연기한 배우랑 거의 안 닮았고, 중간에 짧게 나오는 아빠의 형으로 나온 배우랑 닮았다. 그리고 첫째가 지금 청소년인데, 아내는 여전히 남편보다는 그의 형을 더 마음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이 부부는 긴 시간 불화를 겪고 있고, 그 와중에 좀비 사태가 터졌다. 여기서 더 화가 나고 짜증나는 건, 찌질한 남편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다. 그는 둘째는 아들로 대하지만, 첫째는 마치 남의 집 아이 대하듯 한다. 또 아내는 남편한테 너무 지친 나머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은 바깥이란 뜻이다. 남편은 자신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던 집으로 가족들을 데려왔다. 자신이 어렸을 때 갇혀있곤 했던 지하실에 들어가면 여전히 아버지가 화내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이고, 땀을 비오듯 흘린다. 그럼에도 부모님이 죽고 없는 이 집에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 아내와 첫째 아들은 이 집에 언제까지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고 하루라도 빨리 다른 사람들을 찾아 대피소로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내는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는 남편의 형이 북쪽으로 대피하라고 말했기 때문에 더 밖으로 나가는 것에 집착하고, 첫째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북쪽으로 간다고 해서 역시 북쪽에 집착한다.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이 집에 계속 머물 것인가? 대피소를 찾아 위험한 밖으로 나갈 것인가?

남편의 아버지는 사탕수수 농장주였다. 집 바로 옆에는 닭장이 있어서 매일 계란을 먹을 수 있다. 농장주였던 부모님이 식량을 좀 비축해두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먹거리 걱정은 덜하다. 그리고 펌프로 깨끗한 식수도 언제든 먹을 수 있다. 그럼 사실 굳이 불확실한 정보를 믿고 대피소를 찾아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 모든 상황들보다 가장 큰 장점, 좀비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곳이다. 이 좀비 세상에서 안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까? 영화 후반부에 부상당한 군인 한 명이 도움을 청하러 온다. 그는 이 집에서 차로 반나절 떨어진 대피소에서 왔다고 했다. 보급품을 구하러 군인들이 나섰다가 좀비들의 습격에 모두 죽고 혼자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도 아내와 첫째는 집을 나서서 대피소로 가려고 한다. 아마도 일개 분대 규모는 되었을 군인들이 몰살당했는데, 차량도 무기도 없이, 대피소의 위치도 모른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앞의 영화처럼 이 영화에도 개연성이 떨어지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제법 있다. 답답한 측면들도 꽤나 있다. 그나마 앞의 영화는 줄창 좀비들과 부딪히며 빠른 전개를 보여주지만, 이 영화는 흐름도 너무 느리다. 좀비는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가족 구성원들 간의 갈등이 이 영화의 거의 유일한 긴장 요소인데, 이것만으로 이야기를 끌고가기에는 그 힘이 좀 약해 보인다. 이 영화도 배우들의 연기는 괜찮았다. 아역들도 나쁘지 않았다. 영화 후반에 아내와 첫째가 단 둘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둘이 약간 서먹한 듯 하면서도 서로의 정이 느껴지는 모습이 좋았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괜찮은 장면이라 본다.

필리핀 영화도 인도네시아 영화 만큼이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신선한 맛이 느껴진다. 필리핀어? 아니 타갈로그어 라고 해야하나? 암튼 이 언어는 아는 단어가 전혀 없지만, 대사에 영어를 굉장히 많이 섞어써서 알아듣기가 편했다. 이 영화도 감독과 배우들 정보를 찾아보기는 했으나 딱히 얘기할 만한 내용이 없어 넘어가자. 아, 한 가지. 아내인 아이리스 역의 배우는 이름이 뷰티 곤잘레스라고 영어로 쓰여있었다. 영화 시작할 때도 읽었고, 끝나고 배역이 올라갈 때도 확인했다. 아마도 곤잘레스가 성인 것 같은데, 그럼 이름이 뷰티인가? 혹시 필리핀에서는 혹은 사람 이름이 때는 다르게 발음할까? 그럼에도 이름의 철자가 아름답다는 단어와 완전히 같다는 건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아,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아름 이란 이름을 많이 쓰는구나. 어쩌면 그리 어색한 이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한 번에 몰아서 본 두 영화가 평소 접한 적이 거의 없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영화라는 점, 둘 다 좀비영화라는 점 등이 재미있어서 북플 앱을 열어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불편한 폰 자판으로 이렇게 긴 내용을 두드린 내 자신을 칭찬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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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1-11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사의 약‘을 먹고 ‘좀비‘가 된 건 방향은 틀리지만 불사라는 결과는 틀리지 않은 것 같아요.

감은빛 2026-01-14 02:54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의 말씀이 딱 제 생각입니다.
제목은 좋았으나, 그 만큼의 완성도를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쉽더라구요.

카스피 2026-01-11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남아산 좀비영화라니 좀비도 세계화가 되나보내요.내용만 읽어도 무척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6-01-14 02:56   좋아요 0 | URL
영미권 국가들에서 비영어권 국가들의 영화나 문학을 잘 접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역시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국가들의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적은 것이 사실이죠. 저는 작품의 질과 상관없이 다양한 문화권, 언어권의 작품들을 편견없이 보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척은 아니지만, 제가 글에 적은 것처럼 신선한 느낌도 있고, 볼 만 합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