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른다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은 3차원이라고 하더라. 만약 4차원에 사는 어떤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시간까지 초월한(?) 존재인걸까?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컨택트]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우리와 다른 외계 종족이 나온다. 주인공은 그 외계 종족과 소통을 시도하면서 그들처럼 미래를 미리 느끼기 시작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런 이야기 자체는 정말 재미있지만, 그런 상황을 실제로 겪은 일처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시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과 다르게 흐르는 세계라는 것. 당연히 겪어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는 것이겠지. 상상해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오늘은 SF읽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지난 모임에서 내가 이번에 읽을 책을 내가 좋아하는 필립 케이 딕 으로 추천했고 다들 동의했다. 내가 추천한 책이라 더 열심히 책을 읽었고, 모임을 어떻게 운영하면 더 효율적이고 재미있을지 생각하면서 사전에 이야기 꺼리들을 각자 자유롭게 제시하고, 이것들을 모아서 마인드맵 형태로 만들어 차례 차례 공유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리속으로 오늘 어떻게 진행할지 나는 어떤 이야기들을 준비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행한 소식들이 들렸다. 누군가는 오늘 야근을 해야해서 못 온다고 했고,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도 요즘 일이 많아서 빠지겠다고 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번주 토요일 총회 때문에 부담스럽다고도 했다. 나 역시 2월과 3월이 일 년 중에 제일 바쁜 시기다. 다들 바쁜 것은 당연히 이해하고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 특히 야근 때문에 못 오신다는 선배님은 엄청 긴 시간 다른 독서 모임을 이끌어오시면서도 거의 빠진 적이 없는, 아니 한번도 없는 분이라 이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암튼 갑자기 모임이 연기되어서 나는 달리기를 하러 나갈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내 몸은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침대에 누워 폰을 들고 북플 앱을 열고 있었다. 음, 이 글만 쓰고 달리러 나가야지.

예전에, 아마 거의 20년 전에 필립 케이 딕 단편들을 제법 많이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단편집을 구매하면 읽었던 단편이 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읽기로 한 책은 헐리우드에서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든 [토탈 리콜]의 원작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가 수록된 책이고, 나는 이 책을 구매하면서 역시 영화로 만들어진 단편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있는 책도 함께 구매했다. 책을 받고 보니 둘 다 700쪽이 훌쩍 넘는 벽돌책이었다. 특히 먼저 읽고 있는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는 25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이중 23편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들이라고 했다. 어쩐지 특유의 분위기는 익숙하지만 딱 읽었었다라고 기억나는 작품이 계속 안 나와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미리 읽었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구나.

내가 책을 읽는 순서는 판권면을 가장 먼저 보고, 서문, 해설이나 후기, 부록, 역자 후기 등을 다 살펴보고 그제서야 목차를 확인하고 읽는다. 본문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고 목차를 보면서 제일 끌리는 곳으로 먼저 가곤 한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할 장편소설이면 이러면 안 되지만, 단편집은 상관없으니. 역자 후기에도 적혀있지만, 필립 케이 딕은 헐리우드에서 가장 많은 영화의 원작을 가진 작가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원작으로 인정한 것들도 그렇지만, 실은 이 다작 소설가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원작으로 인용하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들도 제법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 그가 현재의 영화와 드라마 산업에 미친 영향은 훨씬 더 클 것이다. 온라인 상에 필립 케이 딕의 영향으로 만든 영화 라고 언급된 영화들 중 하나는 놀랍게도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도 있었다. 와! 이것도 필립 케이 딕의 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거였다니. 나는 아직 읽어보지 않은 [어긋난 시간]이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고 했다.

사실 이런 부분이 또 필립 케이 딕의 한계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사람은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결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다. 매끄럽고 매력적인 문체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고, 이야기를 촘촘하게 잘 짜는 사람도 아니다. 살아있는 듯한 흥미로운 인물들을 잘 만드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엄청나게 극적인 인생을 살았고, 그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바쁘게 글을 써내느라 개별 작품에 크게 공을 들이지는 못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주제와 그 주제를 제시하는 방식의 독창성이고 그가 만드는 세계의 독창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블레이드 러너]도 [토탈 리콜]도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모두 그의 소설이 원작이지만 영화의 시나리오에서는 소설에 담겨진 내용 보다는 훨씬 더 확장된 세계에서 더 짜임새 있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원작인 소설은 사실 그렇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까지 다루고 있지 않다. 이런 점이 그를 생각할 때 가장 아쉬운 부분일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읽었을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 읽을 때에도 이 이야기를 내가 다시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을 집어넣고, 좀 더 세부적인 설정과 비어있는 이야기들을 넣어서 장편으로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 책의 서문을 읽어보니 실제로 당시 미국 SF 작가들 중 일부는 이렇게 필립 케이 딕의 영향을 받아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처럼 전적으로 모든 설정을 받아온 것은 아니겠지만.

시간의 정방향과 역방향

각 단편마다 흥미로운 설정과 이야기들이 펼쳐져서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다 좋았다. 그 중에서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약속은 어제입니다] 라는 작품은 1965년에 완성해 편집자에게 넘겼고, 1966년 발표된 것인데, 시간이 정방향으로 흐르는 세계와 시간이 역방향으로 흐르는 세계가 공존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워낙 짧아서 더 구체적인 설정을 알 수 없지만, 등장인물들 중 다수는 내일을 지내고 오늘 그리고 어제를 향해 살아간다. 하루 중에서도 밤과 저녁, 오후를 거쳐 오전으로 시간이 흐른다. 그런데 이 부분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작중 등장하는 어떤 발명품의 영향에 따라 어떤 인물들은 또 정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나중에는 어떤 아이디어 때문에 일정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혹은 그 세계 전체가) 특정한 시간대를 기점으로 정방향과 역방향을 계속 반복해서 오가는 일종의 시간 감옥 안에 갇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다만, 이 흥미로운 설정에서 작가는 이야기를 펼치다가 뚝 끊어버리고 끝낸다. 작가가 직접 쓴 설명이 담긴 부록과 역자 후기를 보면 이 이야기는 [거꾸로 도는 세계] 라는 장편으로 다시 써서 출간했다고 되어있다. 국내에 발행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꼭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는 이 이야기 완전히 생소한 것만은 아니다. 일단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라는 스콧 피츠제랄드의 1922년 소설과 이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 있다. 나는 책은 읽지 못했고, 영화만 봤었다. 이 이야기는 모두가 정방향으로 살아가는데, 딱 한 명만 기이하게도 역방향으로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죽음까지 변하지 않고 주욱. 이걸 필립 케이 딕은 시간의 흐름이 어떤 발명품에 의해 정방향에서 역방향으로 바뀌고 그게 또 역전되기도 하는 등 복잡하게 바꾸었고, 여기서 다시 이 발명품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눠서 더 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설정을 만들었다.

자, 이쯤에서 뭐 생각나는 것 없을까? 그렇다. [테넷] 이다. 나는 이 영화를 세 번이나 보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린 스크린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즉 컴퓨터 그래픽이 전혀 없이 아날로그 특수효과만으로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큰 규모의 첩보 액션 영화이지만, 그 안에 인버전 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넣어서 시간을 역행하게 만들어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나는 이 영화를 그냥 첩보 액션물로 아주 재미있게 보았고, 그 인버전이 이용되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인버전 부분은 영화로 본 것만 세 번이고, 이걸 해석해 준다는 영상들을 여러차레 보았음에도 솔직히 완전히 이해했는지 자신이 없다. 그런데 어쨌건 어떤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 일부 등장인물만 시간이 역방향으로 흐른다는 이 이야기는 저 필립 케이 딕 소설의 설정과 같다. 찾아보지 않아서 자신할 수 없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아마 이 소설들을 읽어보지 않았을까?

뫼비우스의 띠

시간이 반대로 흐른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반드시 언급하고 싶은 영화가 있다.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라는 일본 영화로 나나츠키 타카후미 라는 작가가 2014년에 출간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책은 읽어보지 못했고 고마츠 나나 주연의 영화만 봤는데 정말 인상적인 작품이었고, 무조건 두 번 볼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참 좋아하는 입장에서 원작을 읽지는 않았지만, 원작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었을까? 진짜 천재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필립 케이 딕의 소설을 읽고 이 영화 생각이 났다. 디테일은 많이 다르지만, 시간을 정방향으로 사는 사람들과 역방향으로 사는 사람들이 얽힌다는 부분은 혹시 여기서 가져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미나미야마 타카토시는 후쿠쥬 에미라는 동갑내기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이 여성은 자신과는 시간이 반대로 흐르는 세계에서 건너온 사람이었다. 타카토시의 세계와 에미의 세계는 서로 5년에 한 번씩만 통로가 열리고, 한 번에 40일(영화에선 30일)만 열린다고 한다. 이둘의 운명은 정말 ‘운명의 장난‘ 이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말이 없을 것 같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은 느낌을 준다.

5살의 타카토시를 우연히 35살의 에미가 구해준다. 10살의 타카토시에게 30살의 에미가 상자를 건너주며 타코야끼를 사준다. 15살의 타카토시를 25살의 에미가 만난다. 그리고 20살의 타카토시와 20살의 에미가 만난다. 25살의 타카토시가 15살의 에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30살의 타카토시가 10살의 에미를 찾아간다. 그리고 35살의 타카토시가 5살의 에미를 구해준다.

30년 이라는 시간을 두고 서로가 서로의 생명을 구해주는 이 인연. 처음 타카토시 기준에서 우연히 어떤 어른이 구해주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에미 입장에서는 30년 전에 타카토시가 구해준 것을 갚기 위함이고, 또 두 사람이 서로의 스무살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서로를 반드시 구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5년 단위로 이렇게 얼핏 보면 둘이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둘이 스무살인 해에 만나고 헤어지는 하루 하루를 보면 여성인 에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왜냐하면 남성인 타카토시의 시간은 정방향으로 흐르지만, 에미의 시간은 역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둘이 공평하게 서로 반대가 아니라, 반대는 반대인데 절대적으로 유리한 정방향과 무조건 불리한 역방향이라는 방향성을 내포한 반대라서 무척 차별적인 구조다. 그러니까 만약 입장을 바꿔 에미가 정방향, 타카토시가 역방항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고 그러면 그 차별은 반대로도 가능하지만 이 작품에선 에미가 불리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어른 에미는 청소년 타카토시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도 상관없고, 그보다 어린 10살의 타카토시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상자만 건네도 괜찮다. 타카토시는 그 모든 일들을 정방향으로, 즉 시간 순서대로 겪을 예정이니까. 하지만 어른 타카토시는 청소년 에미에게 아주 구체적인 내용들까지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미가 타카토시를 찾아가지 못하고, 그러면 이 뫼비우스의 띠는 끊어진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하는 에미 입장에서는 점점 자신과의 기억을 잃어가는 타카토시와 만나야 한다. 마침내 타카토시는 에미를 처음 마주치는 날 에미는 마지막 날이라 다시는 동갑내기 연인인 타카토시를 보지 못하는 날이 된다.

찾아보니 영화에는 없는 설정인데 소설에서는 에미 쪽 세계에서만 타카토시 쪽 세계로 넘어올 수 있다고 나와있다. 그러면 왜 에미만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다 배워서 반대 방향으로 시작해야 하는지가 조금 납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타카토시가 먼저 에미를 찾아갈 수 없다면 이야기가 성립될 수 없으니.

필립 케이 딕의 소설과 영화 테넷에서는 역방향인 경우 시간을 정방향에서 그대로 뒤집는 것이라서 날짜만 반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중 시간도 반대로 간다. 밤에서 저녁으로, 오후에서 오전으로. 이 영화에서 정방향과 역방향인 두 인물이 만나면 그럼 두 사람은 실제로는 단 한 순간도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아주 짧은 순간 서로 스쳐지나갈 뿐. 각자의 시간 흐름이 적용되는 상태에서 마주친다면.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에미가 타카토시의 세계로 넘어와서 타카토시 시간대를 살아가는데 원래 세계로 넘어가면 다시 반대인 상황을 하루 단위로 반복하는 것이다.

뭔가 복잡하게 고려해야 할 것들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맨처음에 말했듯이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경험을 할 수 없으니, 그것을 이해하고 상상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겠지.

언젠가 나도 시간 흐름을 비트는 독창적인 글을 써볼수 있을까? 나는 그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어려울 것 같다. 자, 이제 달리기 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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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7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레이드 러너][토탈 리콜][마이너리티 리포트][트루먼 쇼]의 원작자라니...하나도 힘든데 명작 SF를 이렇게나 많이 쓰다니 대단하네요. 스릴러의 대가 스티븐 킹과 필적할만 하겠네요.

감은빛 2025-03-21 20:57   좋아요 0 | URL
유명한 영화들만 언급해서 그렇고, 실제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소설들이 훨씬 더 많다고 해요. 제가 잘 모르거나, 미국에서는 유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덜 알려진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달리기의 즐거움과 고통

어쩌다가 3월 말과 4월 초에 10킬로미터 대회 두 개를 나가야 할 상황이 되었다. 4월 초 대회는 양천 달리기 대회로 안양천에서 열린다. 이건 1월에 신청했었다. 작년에 아주 더운 날과 무척 추운 날 두 번 대회를 나갔었기에 올해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날에 대회를 나가보고 싶어졌다. 당시 생각에는 4월 초라면 딱 좋겠다고 생각했고, 막 찾는 중에 4월 초 대회가 눈에 들어와서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다. 신청 링크가 열리는 시간에 미리 알람을 맞춰두고 곧바로 들어가서 신청하고, 참가비를 계좌로 보냈는데, 다음날 확인해보니 이미 신청은 마감된 상태인데 나는 참가비 입금 확인이 안 된 상태로 나왔다. 어, 이거 취소되어 버린건가 싶어서 곧바로 전화해서 송금한 시간을 알려줬다. 담당자는 내 송금내역을 확인했다고 정상적으로 신청완료 되었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며칠전에 지인에게 링크를 하나 받았다. 우리 동네 불광천에서도 달리기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었다. 신청 링크는 며칠 후에 열린다고 되어있었다. 나는 이 소식을 달리기 모임 단톡방에 올렸다. 다들 멀리까지 일부러 대회에 참가하러 가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회가 열리니 좋은 기회라고 신청하자고 했다. 나는 좁은 불광천변 산책로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이 달리면 사고가 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작년에도 괜찮았다는 누군가의 말을 보고 일단 신청해보기로 했다. 다들 참가하는데, 나만 빠지면 섭섭한 일이지. 아, 잠깐 두 대회간의 기간이 정확히 얼마인지 궁금해 찾아봤다. 불광천은 3월 30일, 안양천은 4월 12일. 12일 이상 시간이 남아있으니 괜찮겠다 싶었다.

작년 11월 말 대회에 참가한 이후로 약 100일동안 장거리 달리기를 하지 않고 짧게 2~3킬로미터 정도만 달렸다. 날씨가 춥다는 핑계와 귀찮다는 심리상태가 만든 결과였다. 그래도 아예 달리기를 안 하는 것은 양심에 걸려서 가끔 짧은 거리를 달렸다. 그리고 3월 초가 되어서 다시 달리기 모임에 나가 6킬로미터를 달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조를 맞춰 달리는 것은 한편으로 심리적 안정을 주지만, 각자의 페이스가 다른데 서로 맞춰주느라 서로에게 손해이기도 하다. 나는 겨울 내내 제대로 달리기를 하지 않다가 오랜만에 달리는 거라서 현재 내 몸 상태가 궁금했다. 그래서 약 6분 중반 페이스로 천천히 달리는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 너무 오래 쉬어서 잘 못 달릴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몸은 가벼웠고, 속도를 막 높이지 않아서 호흡도 괜찮았다. 마음은 더 달리고 싶었으나, 오랜만이라는 점을 고려해 일행들과 함께 6킬로에서 멈췄다. 여기서 시작해서 서서히 올려나가야지 생각했다.

생각은 그렇게 했는데, 정말 오랜만이어서 생각보다 다리에 피로감이 오래갔다. 나는 이삼일 지나는 시점부터 언제 다음 달리기를 나갈지 계속 몸 상태를 살폈는데, 바쁜 시기이기도 했고, 다리 근육의 회복도 더뎠다. 결국 6일 후에 이러다 대회에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겠다는 조바심을 안고 달리기를 하러 나섰다. 이제 낮에는 날이 제법 풀렸지만, 해가 떨어지면 아직 많이 쌀쌀했다. 얇은 바람막이 잠바와 달리기 때문에 산 싸구려 장갑을 챙길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고 나섰다. 오늘은 최소 12킬로미터, 최대 15까지 달려볼 생각이었다. 달리기 시작하고 3킬로 정도면 충분히 몸이 더워질테니 바람막이는 필요없고, 장갑도 괜찮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달리기를 시작하자마자 후회했다. 바람막이도 그냥 입고 왔다가 나중에 벗어서 허리에 감으면 되는 것을 하고 후회했지만, 특히 장갑이 아쉬웠다. 몸은 약 3킬로 지점까지 가기전에 더워졌지만, 손은 후반까지도 계속 시려웠다.

이거 오늘은 생각보다 멀리 못 가겠구나 느낀 것은 약 4킬로쯤 달렸을 때였다. 다리 근육의 피로가 덜 풀렸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몸이 무거웠다. 그래서 목표를 12가 아니라 10킬로미터로 바꿨다. 사실 8정도도 쉽지 않을 것 같은 상태라 느꼈지만, 대회를 두 개나 앞두고 이 시점에서 10킬로 정도는 달려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 조금 무리를 했다. 한강을 슬쩍 한번 쳐다볼 시점에 5킬로미터를 찍었고, 조금 더 뛰다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돌아가는 길이 좀 힘들었다. 몸도 무겁고, 다리에 근육통이 느껴졌지만, 나는 계속 기록을 신경쓰고 있었다. 5킬로 지점까지 페이스가 520으로 나쁘지 않았기에 이 페이스를 가능한 한 유지하고 싶었다. 지난 11월 말 대회의 페이스와 비슷했다. 그날로부터 약 100일만에 10킬로를 다시 달리는데, 기록이 그렇게 쳐지지 않으면 그걸로 안심을 할 수 있을것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내 생각 그리고 의지와 달리 몸은 빠르게 지쳐갔다. 7킬로 지점에 페이스는 527이 되어있었다. 이대로라면 최종 페이스는 535가 넘으리라. 여기서 갈등이 생겼다. 좀 무리가 되더라도 다시 페이스를 올려볼 것인가. 아님 기록 부담을 내려놓고 그냥 몸 상태에 맞춰 달릴 것인가. 후자를 택했어야 했는데 욕심이 많은 나는 전자를 택했다. 좀 더 페이스를 끌어올렸는데 얼마가지도 못했다. 그렇게 무리한 덕에 8킬로 지점부터 자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9킬로까지는 버티고 버티며 달렸는데 마지막 1킬로를 남기고 완전히 지쳐버렸다. 억지로 달리고는 있는데, 자세가 다 흐트러져서 한심한 꼴이었다. 게다가 오른발에 물집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종아리 근육통이 점점 심해졌고, 심지어 허리와 옆구리에도 통증이 나타났다. 고통을 참으며 무거운 다리를 끌면서 달렸다.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고, 몇 번이나 멈춰서 걷고 싶었지만 꾹 참고 뛰었다. 이제 정말 얼마남지 않았다고 나에게 말을 걸면서 이를 악물었다. 결국 10킬로 알림이 떴다. 최종 페이스는 534 였다. 내 예상이 대충 들어맞았는데, 마직막 1킬로는 6분대를 뛰었음에도 앞에 9킬로 덕분에 생각보다 괜찮게 나왔다. 지난 11월 말 대회에 비해 기록이 많이 쳐지지는 않았다. 이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물론 몸은 제대로 걷기도 힘들만큼 지쳐있었지만.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거점으로 이동해 물을 마시고 두터운 잠바를 입었다. 땀에 젖은 머리띠를 벗어 비누로 씻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쉬면서 거리별 페이스를 확인했다. 확실히 초반 기록이 좋았는데 반환점을 돌면서부터 점점 페이스가 떨어졌다. 확실히 겨울동안 오래 쉬어서 체력이 너무 떨어졌다. 이 컨디션에 이 정도 기록은 정말 너무 무리였다. 그래도 몸은 힘들었지만, 기분은 좋았다. 이 정도라면 3월 말까지 남은 시간동안 다음 목표를 어디까지 할지 즐겁게 고민해볼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아서 안심했다. 기분이 좋아지자 갑자기 급격하게 배가 고팠다. 가까운 곳에 있는 맛있는 해장국집에서 자주 먹던 내장탕을 먹으러 갔다.


계속 이어지는 꿈

자주는 아니고 가끔 있는 일인데 새벽에 꿈에서 얼핏 깼다가 다시 잠들면 아까 꾸던 꿈을 이어서 꾸는 경우가 있었다. 이것보다 조금 더 자주 있는 일은 비슷한 꿈을 계속 반복해서 꾸는 것. 어떤 날에는 반복하거나 이어서 꾸거나 이 둘이 반복되기도 한다.

며칠 전 일이었다. 초저녁에 피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계속 잠이 깼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아마 충분히 자서 깰 때가 되었다고 깬 것 같은데, 또 금방 정신을 차리기에는 너무 피곤해서 다시 곧바로 잠들기를 반복한 것일까? 어쩌면 음악을 켜놓고 잠이 들었기에 음악 때문에 중간에 깬 것일지도 몰랐다. 평소에는 유튜브로 곡 하나를 선택하고 그 뒤로는 저절로 이어지는 노래들을 듣곤 하는데, 그날은 내가 좋아하는 여러 나라의 노래들을 넣어서 만든 리스트를 재생했었다. 영국과 미국의 팝 음악들이 기본이고, 자주 들었던 일본 노래들과 중국 노래들. 그리고 한때 잠깐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면서 자주 들었던 인도네시아 노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다. 그동안 즐겨 들었던 독일 노래들, 프랑스 노래들, 스페인 노래들, 인도 노래들 그리고 이란 노래들까지.

그날의 꿈 이야기는 바로 기록해두고 싶었는데, 깨자마자 얼른 준비하고 나가야 할 상황이어서 기록할 틈이 없었다. 기억은 금방 사라졌고 디테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내가 어딘가 기숙사 같은 곳에 머물고 있었고, 어떤 중요한 미션을 해내야 할 상황이었는데, 잘 될 것 같다가도 계속 실패했고, 실패하고 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면 이어서 그 미션에 계속 도전하는 식으로 같은 꿈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아주 조금 디테일이 기억나는 부분은 꿈이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질 때에는 어떤 미션에 도전한다는 큰 줄기의 이야기 외에 많은 부분들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꿈 속에서 나를 도와주던 사람이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거나, 내가 비교적 젊은 나였다가 다시 나이든 나로 바뀐다던가. 그럼에도 그런 상황들마저 마치 자연스러운 듯 이어졌다. 꿈이었으니까. 꿈에서 깨었다가 다시 빠져들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분명 이것이 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깨기가 싫었다. 나는 차라리 이 꿈 속 세계에 살기를 원했다. 뭔가 하나도 이치에 들어맞지도 않고 모든 것이 다 제멋대로인데도 그랬다.

기억나는 또 다른 건, 관계들이 다 제멋대로 섞여 있었다는 점이다. 꿈에서 내 가장 친한 친구이자 미션에 함께 도전하는 중요한 동료는 사실 현실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한때 짝사랑했던 사람으로 바뀌어 있기도 했고, 또 어느 순간 현실에서 정말 친한 동료로 만약 내가 꿈에서처럼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면 진짜 열심히 도와줬을만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기도 했다. 또 아이들의 나이가 제멋대로 왔다갔다 했다. 귀여운 꼬맹이 시절의 큰 아이가 나타났다가 다음 순간 지금 성인이 된 큰 아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작은 아이는 나를 가장 마음 아프게 했던 사춘기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았다.

꿈은 사실 그냥 꿈일 뿐이다. 해몽이나 이런 건 다 의미없다. 돼지꿈을 꾸었다고 복권을 사러가는 건 옛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꾸만 꿈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데자뷰 현상이라고 부르는 일을 자주 겪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처음 온 곳인데, 꼭 예전에 와본 것 같은 기분이고, 갑자기 누군가 말을 하고, 누군가가 반응하는 모습을 보며, 이 장면 분명히 과거에 똑같이 겪었는데 하고 생각했다. 예지몽이 아닌 다음에야 완전히 똑같은 순간을 다시 마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렸던 나는 내가 예지몽과 같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던 날, 꿈에 아무말없이 나타나 내 머리를 쓰다듬고 사라지셨다. 할머니께서 아프시다는 연락은 받았었지만, 나는 대학 시험기간이란 핑계로 병원에 가지 않았었다.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는데, 그 죄책감이 그 꿈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싶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 인간의 잠과 꿈에 대해 얼마나 밝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왜 인생의 긴 시간을 잠을 자느라 보내야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뇌의 부하 때문에? 몸의 휴식 때문에? 꿈은 도대체 왜 꾸는 걸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 에서는 막 연극처럼 그려지기도 하고, [인사이드 아웃 2]에서는 무슨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이 잔뜩 모여서 그린 그림을 업로드 했던 것 같은데.


어떤 연락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던 누군가가 연락을 했다. 해외로 공부하러 간다고 했던 것이 몇년 전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의 연락을 받고 이제 돌아온 건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곧바로 용건을 남기지 않고 그저 잘 지내냐는 인사만 남겨두었다.

아주 잠깐 그를 좋아했던 시간이 있었다.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에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내가 가장 끌렸던 것은 그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알고 지내는 동안 계속 일로 마주쳤고, 개인적으로 친해질 기회가 적었다. 그래도 가까이에서 자주 마주쳤기에 이래저래 그와 함께한 시간이 적지는 않았다. 계속 그냥 일 잘하는 멋진 사람 정도로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가 마음에 들어왔던 건 그가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편하게 대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다가 툭툭 손으로 치기도 하고, 아주 살짝 애교 섞인 말투를 건네기도 하고, 무뚝뚝하게 감정 없는 말투가 대부분인 사람이 나와 있을 때 감정을 담은 평소 말투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착각은 금물이었다. 그가 그렇게 조금은 편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인 것은 그저 나를 선배이자 동료 활동가로서 조금 더 친해졌다는 뜻일뿐. 별것도 아닌 애교에 괜히 마음이 설레었다가는 큰일이었다. 유난히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 문득 편한 말투로 대해서 그 간극이 나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암튼 나는 냉정하게 아주 짧은 시간 그에게 가졌던 감정을 마음에서 지웠다. 감정은 지웠지만,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은 남아있다. 갑작스런 그의 문자에 나는 잠시 옛 기억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정신을 차렸다.

그가 별 용건없이 괜히 나에게 연락했을 리는 없었다. 이제는 같은 공간에서 활동하지도 않고, 어쩌면 만날 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알고보니 그는 내게 무언가를 물어왔는데, 왜 그가 내게 물어봤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직접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나는 알아봐주겠다고 답하고 잘 지내라는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는 교통사고 이후 회복이 잘 되었는지 물었다. 그래. 아주 먼 일 같았는데, 그리 먼 일은 아니었구나.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다시 업무 복귀했을 무렵 그가 공부하러 떠났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이제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고, 어쩌다 집회 현장이나 어딘가의 행사장에서 스쳐 지날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짧게 그를 향해 호감을 가졌던 것처럼 이번 일도 그렇게 스쳐 지날 것이다. 나중에 우연히 이 글을 읽으면 이런 일이 있었어? 하고 넘어갈 정도의 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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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5-03-14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라톤 이야기를 보고 있으니 북플에는 올리지 않았지만 대구마라톤 풀코스 나갔다가 DNF했던 순간이 생각나네요
버스를 탔는데 엘리트 선수 초청선수들도 남자 여자 1명씩 있었어요
달리기를 하다보면 무리해야 하는 순간이 종종 오곤 하는데요 각자마다 몸상태도 운동능력이 틀리니 정답은 없겠지만 제 생각은 기록보다는 펀런으로 뛰다보면 그 속도가 익숙해지는 시점이 오는거 같아요 이론과 실전은 차이가 나긴하죠 변수도 많고요 기록보다는 완주와 부상없이 건강하게 대화 마무리 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저도 4월에 다시 군산에 풀마라톤 도전해요ㅎㅎ
이번에는 완주해봐야죠ㅎㅎ
화이팅!!

감은빛 2025-03-14 22:4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루피닷님.
대구 마라톤에서 그런 일이 있었군요. 사정은 모르지만, 엄청 아쉬우셨겠어요.
저랑 친한 형(몇 년째 단거리 달리기만 하던 저를 장거리 달리기로 이끈 사람)도 그 대회에서 풀코스 달렸어요. 그날 제법 추워서 힘들었다고 하더라구요.

평소에는 기록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컨디션에 따라 달리는 편인데,
대회를 앞두고는 마음이 달라지더라구요.
대회에서는 그래도 좋은 기록을 세우고 싶어지는 마음이라......

군산 마라톤에서 좋은 성적 올리시기를 바랍니다! 화이팅!

2025-03-15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1 2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25-03-15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킬로 달리기라니 참 대단하십니다.건강을 챙기시면서 즐겁게 달리시기 바랍니다^^

감은빛 2025-03-21 21:00   좋아요 0 | URL
카스피 님, 고맙습니다!
달리기가 정말 재미있는데, 가끔씩은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즐기면서 해야 하는데, 가끔은 대회와 기록 때문에 억지로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여자 농구 플레이오프 5차전 두 경기를 보고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운동하는 걸 좋아했지만, 잘 하지는 못했다. 어렸을 때는 거의 매일 축구만 했는데, 운동에 소질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분단 대항 축구 대회가 열려 최종 수비수(스위퍼)로 뛰었는데, 그 대회의 엠브이피가 되었다. 당시 우리 팀에는 우리 반에서 가장 빠르면서 발 재간도 좋았던 공격수가 있었다. 우리팀은 매 경기 두세골 정도는 넣어주면서 계속 이겼고, 결국 우승했다. 그럼 그 친구가 엠브이피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해 다른 아이들도 모두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최우수 선수 상을 받은 것은 우리 팀이 꾸준히 점수를 넣으면서도 가장 적은 실점으로 항상 수비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축구를 했으면서도 공을 잘 다루지 못했고, 킥도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기 싫어하는 성격과 상대 선수가 나를 제쳐도 곧바로 따라가 앞을 막아서는 순발력과 체력으로 끝까지 상대방 스트라이커를 괴롭혔다. 아마도 결승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 팀이 전반에 두 점을 넣어 2대 0으로 앞서 있었다. 후반전 초반에 좀 쉽게 한 점을 주고, 점수는 2대 1이 되었다. 후반 내내 상대 팀은 동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우리 팀은 추가점을 넣어 달아나려고 했지만 두 팀 모두 결정적인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약간 소강상태에 들어가 종반으로 가고 있었다. 양팀 선수들은 대부분 지쳐 있었다. 막바지에 상대팀 스트라이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측면으로 공을 몰고 올라왔다. 우리 미드필더는 돌파를 당하거나, 움직임을 못 읽어 뒤쳐졌다. 그는 빠르게 치고 들어왔고 나는 뒤돌아 골키퍼를 한 번 보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리를 좁히자마자 그는 속이는 동작으로 나를 제치고 나갔다. 나는 순간 중심을 잃고 살짝 미끄러졌다가 곧 몸을 일으켜 달렸다. 골키퍼가 앞으로 나가야할지 그 자리를 지켜야 할지 어쩔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을 때, 그러니까 아직은 조금 거리가 있을 때 상대 스트라이커가 조금은 성급하게 슛을 쏘려고 잠시 속도를 줄였을 무렵 내가 뒤에서 뛰어와 공을 빼았았다. 우리 팀은 열광했고, 지겨보던 다른 분단 아이들도 모두 그 장면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았다. 내가 그 공을 몰고 중앙으로 가는 동안 경기가 끝났고, 우리 팀이 우승했다. 그 마지막 장면과 지금까지 수비에서 활약 덕분에 나는 엠브이피를 받았다. 그리고 아마 이삼일 학교를 빠졌다. 그날 너무 심하게 무리를 해서 앓아누워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축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중학생 시절에는 역기를 들거나 철봉을 하는 등 힘을 기르는 운동을 주로 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 만화 슬램덩크가 엄청나게 유행했다. 당시엔 아직 이 나라에 프로농구는 없었고, 실업농구와 대학농구가 각각 인기가 있었는데 농구대잔치 라는 리그에서 실업팀과 대학팀들이 모두 맞붙었다. 이때 실업팀은 기아팀의 허재, 강동희, 김유택의 막강한 트리오가 독보적이었고, 내가 좋아했던 컴퓨터 슈터로 불린 삼성의 김현준이 있었다. 대학팀은 당시 오빠 부대라고 불리는 여성들을 몰고 다닌 연세대가 압도적인 전력을 갖고 있었다.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등이 포진한 연세대는 나중에 실업팀을 모두 제치고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암튼 슬램덩크를 비롯해 드라마 마지막 승부 등 미디어의 영향으로 나도 농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농구를 좀 열심히 했었다. 하지만 키도 작은 편이었고, 역시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뭐 썩 잘하는 편이 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실제로 해본 스포츠와 보는 것을 즐긴 스포츠를 비교해보면, 야구는 가장 오랫동안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었지만, 실제로 제대로 야구를 해 본적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다들 가난했기 때문에 야구공은 커녕 배트나 글로버 하나 가진 친구들이 드물었다. 그저 테니스공을 주먹으로 쳐서 간이 야구를 하곤 했는데, 이런 걸 실제 야구랑 비교할 수는 없다. 축구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해본 경기이겠지만, 관람하는 스포츠로서 축구는 그렇게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저 위에서 언급한 중학생 시절에 부산 대우 로얄즈의 김주성 선수를 좋아하긴 했지만, 축구 경기를 보러 경기장에 가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국가대표 경기는 어지간하면 중계를 보기는 했지만, 야구를 거의 매일 보았던 것과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농구는 뒤늦게 해봤지만, 키가 작다는 한계를 많이 느꼈고, 그리 열심히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보는 농구는 그래도 꽤 좋아했었다. 삼성의 김현준 선수를 좋아해서 중계방송을 좀 봤었고,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기아나 연세대, 고려대 경기도 가끔 봤었다. 배구는 실제로 경기를 해본 기억은 없고, 중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배우기는 했었다. 배구 경기도 가끔 보기는 했었다. 농구와 배구는 주로 늦가을부터 봄까지 하는 편이라 야구나 축구에 비하면 적게 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여자농구를 한참 즐겼던 시기가 딱 몇년도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모두 은퇴한 정은순, 전주원 선수 두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내가 제일 좋아하고 응원했던 선수는 정은순 선수였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농구 경기 자체를 보지 않고 살았다. 배구는 가끔 봤었는데, 이상하게 농구는 안 봤었다. 그러다가 이번 겨울에 유튜브로 여자농구를 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여자 농구 올스타전을 봤는데, 일본 올스타와 국가 대항전을 벌였다. 그런데 올스타전이라는 특성 때문에 한일전이라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진지한 분위기가 아니라 웃음과 장난이 판을 치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여자 농구 경기를 보지는 않았지만, 스포츠 뉴스 따위와 노는 언니 등의 예능 프로그램 덕분에 김단비, 박지수, 강이슬 등의 선수들은 알고 있었다. 박지수는 보이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튀르키에 리그로 갔다고 한다. 배구로 치면 김연경 선수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그 올스타전을 본 것을 계기로 자주 유튜브로 여자농구 경기를 보았다.

내가 주목한 팀은 우리은행과 비앤케이 두 곳이었다. 우리은행은 이번 시즌에 들어오면서 주전 멤버들 대부분이 다른 팀으로 옮겨가고, 김단비 혼자 팀을 이끄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런데 경기를 보다보면 이 김단비 선수의 활약이 어마어마했다. 초인이라고 불러야 할까? 각 종목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배구의 세계적인 선수인 김연경 선수가 아무리 잘 해도 한 경기에서 미치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농구의 김단비가 한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김연경보다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리그를 진행하면서 다른 선수들도 김단비의 영향을 받아 경기력이 향상되어갔다. 우리은행이 김단비 원맨팀이었다면, 부산 비앤케이는 김소니아 원맨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팀이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비앤케이는 다른 선수들이 조금 더 존재감을 드러내는 편이다. 김소니아 선수가 각 경기마다 김단비 못지않은 활약을 펼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 용병 선수를 비롯해 박혜진 선수라던가 안혜지 선수 등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곤 했다.

팀으로 가장 눈길이 가는 팀인 우리은행이 정규리그 우승을 했고, 비앤케이는 내 고향 부산이 연고지이기도 하고, 김소니아 선수와 안혜지 선수에게 자꾸 눈이 가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체 선수들 중에 가장 눈이 가는 선수는 케이비의 허예은 선수였다.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링을 향해 달려들어 레이업이나 훅슛을 넣는 모습이나 플로터를 던지는 모습을 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가끔씩 터지는 노룩 패스들, 결정적인 어시스트들을 보면 왜 농구를 지배하는 자리가 포인트가드인지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잊을만하면 터지는 삼점슛.

내가 키가 작아서 그런지 슬램덩크 만화에서도 가장 애착이 가는 선수는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이 아니라 송태섭이었다. 저 위에서 언급한 연세대 이상민이 포인트가드 치고 키도 크고 득점력도 좋은 편이라 가장 이상적인 포인트 가드로 꼽히곤 하는데, 내 기준에서 여자농구에서 가장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는 포인트 가드는 허예은 선수라고 본다. 그 다음이 아까도 얘기한 안혜지 선수다.

정규리그 우승한 우리은행과 4위인 케이비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고 2위인 비앤케이와 3위인 삼성생명이 맞붙었다. 네 팀이 각 5판 3선승제인 플레이오프에 돌입했는데, 우리은행이 먼저 2승을, 비앤케이가 2승을 먼저 올리며 쉽게 끝날줄 알았으나 막판에 케이비와 삼성생명이 투지를 끌어올려 2대 2를 만들었다. 재미있게도 나란히 2연승 후 2연패를 당한 우리은행과 비앤케이는 이러다 떨어지는 이변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는 긴장감을 주었다. 그렇게 나란히 5차전에 들어간 두 경기 엄청 재미있었다. 확실히 여기까지 와서는 김단비 선수와 김소니아 선수 모두 어느정도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지 예전에 느꼈던 만큼의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대신 좀 더 유기적인 팀플레이가 나와서 보다 이상적인 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3년 전에 아이들이 무슨 농구 웹툰을 보고 농구공을 샀다고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레이업슛과 뱅크슛 그리고 자유투 던지는 법 등을 알려줬는데, 아이들은 어려워하면서도 재미있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이들이 좀 더 열심히 농구를 했다면, 나도 같이 뒤늦게 농구 열정을 불피워보려나 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지금 이렇게 유튜브로 열심히 농구 경기를 찾아보는 것이겠지.

윤석열이 석방되는 이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이 무력감 속에서 그나마 농구 경기를 보면서 빠져들어서 현실을 잠시 잊는다. 얼른 윤석열을 다시 감방에 쳐놓고 좀 더 마음 편하게 남은 챔피언 결정전을 즐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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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3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14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펑티모와 완쯔요


지난 주 월요일이었다. 일정이 없는 날이라 늦잠을 자고 여유있게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유튜브는 내가 처음 선택한 음악 이후로는 내가 종종 듣는 음악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확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알고리즘에 의해 다른 전혀 모르는 음악들 등을 섞어서 무작위로 들려준다. 뭐 어차피 책이 집중하다 보면 어떤 음악이 나오는지 잘 깨닫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차피 별로 상관은 없었다. 그렇게 잠시 책에 집중하면서 빠져들고 있을 즈음에 업무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으며 음악을 멈췄다가 통화를 마치고 다시 재생을 시켜보니 나온 노래가 한동안 자주 들었던 펑티모의 노래였다. 펑티모는 한 5년 정도 전에 엄청 자주 들었던 인터넷 가수였다. 그러니까 주로 다른 가수들의 노래를 커버해 부르는 개인 방송을 올리는 가수였다. 귀여운 외모에 엄청난 가창력을 가졌으며,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자신의 목소리와 음역대에 맞춰 잘 응용하는 음악 감각도 뛰어난 분이다. 우리나라에는 고양이 송이라는 동영상으로 유명해졌다고 하고, 나는 데시파시토 등 팝송들을 커버한 동영상들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엄청 유명해지고 나서는 돈도 많이 벌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본인 노래도 내고, 방송도 출연하곤 했다. 우리 복면가왕을 수입해가서 만든 가면 쓰고 노래 부르는 프로그램에 토끼탈을 쓰고 나와서 노래 두어곡을 불렀는데, 그중 공심(空心)이란 노래를 듣자마자 좋아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남성 가수인 광택이란 분의 노래인데, 펑티모가 평소 방송할 때도 여러 번 불렀던 곡이었다. 곡이 좋기도 하고, 본인도 자신이 있으니 방송에서 불렀겠지. 정말 잘 불렀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는 광택의 원곡보다 이 펑티모 버전이 더 좋았다. 펑티모 버전이 평소 방송에서 불렀던 것도 여러 동영상이 있고, 아까 언급한 가면 쓰는 방송에서 부른 버전도 있고, 또 최근에 어느 연말 시상식 같은 무대에서 부른 버전도 있고 다양한데, 유튜브에서 이 여러 버전들을 하나의 리스트로 만들어서 계속 반복해서 듣게 되었다. 


그러다가 펑티모 외에 다른 가수들이 부른 버전들도 찾아보게 되었고, 여러 남녀 인터넷 가수들의 동영상들을 들었다. 제법 잘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남성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원곡 가수인 광택보다 못했고, 여성들은 펑티모와 비교하는 순간 대체로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러다 귀가 번쩍 띄인 것이 완쯔요 라는 인터넷 가수가 부른 버전이었다. 펑티모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고, 어떤 소절들은 펑티모보다 더 유려하게 넘어가기도 했다. 다만 펑티모는 아까 얘기한대로 여러 번 불렀기 때문에 버전이 많은데 비해 완쯔유 가 부른 곡은 하나 밖에 찾을 수 없었다. 암튼 그래서 펑티모와 완쯔유가 부른 공심을 리스트로 만들어 두고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펑티모도 그렇고, 이 완쯔유 라는 가수도 이미 본인의 곡을 냈기 때문에 인터넷 가수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 비록 여전히 개인 방송을 주로 하지만, 티비 방송에도 나오는 가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그리고 인터넷 개인 방송의 음향 장비와 반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티비 방송 프로그램 못지않게 잘 부르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그만큼 이 사람들이 음악적으로 다른 가수들에 비해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사실 나는 유튜브 외에 다른 인터넷 방송을 보지 않고, 유튜브도 주로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들 그리고 몇명 영화 채널을 주로 보고, 대부분은 음악을 듣는 용도로 이용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플랫폼으로 개인 방송들을 보고 있고, 그중 유명한 디제이들은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린다고 들었다. 이미 뉴스에도 본 적이 있는데, 어느 유명한 방송 플랫폼의 여성 디제이에게 어느 남성이 교제를 전제 조건으로 수천만원 혹은 수억원의 후원(별풍선?)을 했다가 나중에 사기로 고소했다는 소식도 접했었다. 참, 신기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웹툰으로도 유명했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마스크 걸]에서도 주인공이 인터넷 개인 방송을 열어 인기와 더불어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구독하는 영화 채널 중에는 대기업에 다니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유튜버(본인 표현)가 되었다고 대기업 연봉보다 유튜브로 버는 수입이 더 크다는 사람도 있었다. 영상을 찍고, 편집해서 올리는 것을 공부해서 그 정도의 수입을 벌 수 있다면 누구라도 한번쯤 생각해 볼만하다 싶었다. 그리고 곧 뉴스에서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에 1순위가 압도적으로 유튜버 라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그보다 조금 더 전에는 프로게이머 였다는 이야기도 본 적이 있었다. 확실히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맞춰 각 세대가 가진 생각, 어떤 가치관들이 크게 달라진다고 느낀다. 


내 친구 중 한 명도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한참 열심히 영상을 찍곤 했었다. 그 친구 나름대로 뭔가 독창적인 아이템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만들었다고 느껴지긴 하는데, 솔직히 재미는 별로 없었다. 결국 구독자가 많이 늘지 않고 정체되는 시기가 길어지면서 이 친구는 영상 찍고 편집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잘 몰랐던 사실이지만, 초기에 유명한 유튜브 채널 중에는 혼자 콘티 짜고, 찍고, 편집하는 일을 다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면, 최근에는 각각의 영역을 맡아하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좀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분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잘 하는 채널이 점점 더 늘어나면 그냥 개인이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개성만 믿고 혼자 뛰어들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앞서 말한 한동안 영상을 찍던 친구가 그 당시에 내게도 사진이나 영상을 꾸준히 찍어두고 나중에 편집하는 방법을 배워서(그렇게 어렵지 않다면서) 너도 영상을 올려보라고 권했다. 당시에는 제법 열심히 운동을 하던 시기여서 운동하는 사진과 영상을 기록해두라고 그렇게 반복해서 말하길래, 나도 삼각대 겸 셀카봉을 사서 혼자 이런저런 운동하는 사진들과 짧은 영상들을 찍기도 했다. 언젠가 동영상 편집하는 법을 배울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컴맹에 가까운 내가 그런 고급 기술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고, 그저 사진을 좀 남겨두자는 마음에서였고, 이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가끔 올리기는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지인이 자주 모이는 사람들을 모아서 사회적 이슈나 시사 상식 등에 대해 떠드는 영상을 찍자는 제안도 여러 차례 했었다. 이 친구는 사진을 전문적으로 찍었고, 영상도 제법 잘 만드는 사람이라 촬영과 편집은 확실히 문제가 없었고, 어떤 컨텐츠를 어떻게 담아낼 것이냐가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 친구는 여러 차례 나에게 진행을 맡아 달라고 하면서 각 회차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잘 섭외해서 중요한 사안들을 짚어주는 방식으로 하자고 했었다. 재미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재미있게 진행할 자신은 없었지만, 매끄럽게 어색하지 않게 진행할 자신은 있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영상을 찍으려면 사전에 대본도 꼼꼼하게 작성해야 하고, 전문가 섭외도 하고, 그 전문가들과 조율도 잘 해내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일이 바빠서 그 정도의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답을 좀 애매하게 했던 모양인데, 나중에 이 친구가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며 늘 꺼내는 말이 진행을 맡기려고 했던 내가 거절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엎어진 거라고 내 탓을 하곤 했다.


사실 돈을 버는 목적이 아닌 그저 내 여러가지 활동들을 정리해두는 용도로라도 사진이나 영상을 어딘가에 올리곤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달리기 결과는 매번은 아니라도 종종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고, 다른 운동은 이제 귀찮아서 따로 찍지는 않고 있는데, 조금만 더 신경스고 조금 더 부지런해진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생각으로는 그렇고 현실은 늘 생각이나 예상과는 다르기 마련이긴 하다.


환자를 돌보는 고마운 사람들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새콤달콤]이란 영화를 봤다. 그저 그런 흔한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마지막 반전이 생각보다 신선하고 괜찮았다. 이름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와 반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고 비슷하게 이름으로 인해 벌어지는 오해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약 20년 전에 단편소설로 쓴 적이 있었다. 내가 쓴 몇 안되는 소설 중에서도 단연 제일 괜찮은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소설을 보여줬던 지인들의 반응도 나쁘지는 않았던 기억이 있다. 암튼 그래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대체로 나쁘지는 않았지만, 썩 좋지도 않았다고 느꼈다. 단 한 명 간호사 역을 맡은 여주인공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약 4년 반 전에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당시에 나는 갈비뼈가 여러대 부러져서 스스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누군가 일으켜줘야 일어나 앉을 수 있었고, 걸을 수 없었고, 몸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그때 하루에 두어번 간호사나 인턴(혹은 레지던트인지 암튼 나는 이들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들이 내 몸을 옆으로 굴려서 몸을 뒤집어 줬다. 나 혼자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는데, 하필 그때 코로나가 제일 심한 시기였고, 내가 입원한 병원은 또 코로나 환자가 많은 병원이라 보호자가 병원에 상주할 수 없었다. 이게 한 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지만, 몸을 혼자 가누지 못하는 나로서는 많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런 시기에 자주 찾아와서 뭐 불편하거나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어봐주고 챙겨주는 인턴이 있었다. 어찌나 친절하게 잘해주는지 그 사람이 정말 너무 고마웠다.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내 몸의 상처나 통증 등 중요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겨주고 모습 덕분에 정말 천사처럼 느껴졌다. 저 [새콤달콤]이란 영화를 보면서 여주인공이 환자에게 잘해주는 모습 때문에 갑자기 그가 생각이 났다. 나중에 퇴원하면 꼭 어떻게든 은혜를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매번 그 병원에 갈 때마다 그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결국은 한번도 찾아가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오히려 실례가 될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름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기도 했다.


몇 달 전에 치과에서 신경치료를 받을 때 일이다. 당시 나를 맡았던 간호사가 내게 무척 친절하게 잘 대해줬다. 마취 주사를 맞을 때 꽤 아프다고 주의를 주면서 내 어깨에 손을 얹어 토닥토닥 나를 달래듯 두드려줬다. 그 손길이 나는 정말 고마웠다. 그때 여러모로 좀 힘든 시기이기도 했고, 많이 우울한 때였는데, 그의 그 손길이 나를 많이 위로해줬다고 느꼈다. 그는 그저 직업으로서 간호사의 일을 조금 더 신경써서 잘 대해준 것이겠지만, 내게는 그 작은 행동이 엄청 큰 위안이 되었다. 앞서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때의 그 인턴과 방금 말한 이 간호사 두 사람은 아마 평생 은인으로 기억에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 같은 치과에서 나를 담당한 다른 간호사가 내게 재미있는 행동을 했다. 처음 진료를 시작한 의사가 나에게 간단한 조치를 하고 간호사에게 뭔가를 지시한 후에 잠시 다른 환자를 보러 자리를 옮겼다. 그 후로 나는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그건 사실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간호사는 그 긴 기다림이 신경쓰였는지, 내게 말을 걸어주기도 하고, 칫솔질 하는 법을 알려주는 영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고도 다시 한참을 더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새하얗고 조그마한 인형 하나를 건네줬다. 앙증맞고 귀여운 그 인형을 주면서 그는 내게 심심하시니까 이거 조물락 만지고 계세요. 라고 말하며 손아귀 힘을 기르는 운동도 되구요. 이거 이렇게 쥐고 계시면 마음의 위로가 되기도 하구요. 나중에 치료 받으시다가 통증이 와도 이거 안고 계시면 괜찮으실거예요. 그리고 엄청 귀엽잖아요.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으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재미있기도 하고 한편으로 흰머리와 흰수염이 가득한, 누가봐도 중년의 아저씨인 나에게 자그마한 귀여운 인형을 건네는 그의 행동이 좀 많이 웃겼다. 그가 내 손에 그 인형을 쥐어주고 가버렸기 때문에 나는 어쩔줄을 몰라하면서도 그냥 인형을 쥐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냥 그가 시킨대로 조물락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인형은 정말 귀여웠다. 우리 작은 아이에게 주면 딱 좋아할만한 인형이었다. 치료를 다 받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그 간호사 생각이 났다. 나름 나를 신경써서 잘 해주려고 한 행동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정말 고마운 일이다. 이 일도 앞서 언급했던 사례들과 함께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다.


이 글은 어제 쓰기 시작했지만, 절반 정도 쓰고 회의를 들어가느라 완성을 못했고, 회의를 마친 후에는 또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결국 하루를 넘겨버렸다. 그리고 오늘은 3월 11일 후쿠시마 핵 폭발 사고 14주년이 되는 날이다. 다른 기억해야 할 날들이 많지만, 이 날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날이다. 이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1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도쿄전력과 일본 정부는 전혀 수습을 못하고 있다. 핵폭발로 날아간 건물 지붕을 덮지도 못하고 있고,(참고로 체르노빌 핵폭발 사고 때에는 약 6개월만에 뚜껑을 덮어서 더이상 방사능이 새어나오지 못하게 막았었다.) 매일 매순간 방사능이 새어나오고 있다. 아마도 일본 정부는 몇 백년이 지나도 이 사고를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잠시만 근처에 머물러도 치사량에 가까운 방사능에 노출되기 때문에 직접 사람이 들어가 작업을 할 수 없고, 로봇이나 기계를 보내도 방사능 때문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녹아버린 핵연료봉이 어디어 어떤 상태도 있는지도 파악하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긴 시간 알 수 없을 것이다. 인류는 이 사고 이후로 방사능이라는 치명적인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아, 할말이 너무 많지만, 오늘은 너무 바쁜 날이다. 일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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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3-12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중국 노래를 좋아해요. 중국 노래의 감성이 한국의 90년대풍 발라드와 비슷한 면이 많아 중국 생활 당시에는 꽤 즐겨 들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지나 제목을 많이 잊어버렸네요. 가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成都(청뚜, 성도), 好久不见(하오지우부쩬,오랫만이네요)도 괜찮고 린이롄의 至少还有你(쯔쌰오하이요우니,당신만 있으면)、류더화의 练习(롄씨,연습),류뤄잉의 后来(호우라이,나중에야) 한 번 들어보세요. 공심은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감은빛 2025-03-14 22:29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좋은 노래들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나씩 다 찾아 들어볼게요.
말씀하신대로 약간 90년대 느낌이 드는 노래들이 저도 좋더라구요. ㅎㅎ
 

바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수라처럼] 이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아니, 드라마 내용과 줄거리는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는데,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나와서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 감독 중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다음으로 좋아하는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를 통해 처음 알았고, [세번째 살인]과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등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 감독이 우리나라 배우들과 작업한 [브로커]를 정말 기대했는데, 대실망이어서 하마구치 류스케 보다 순위가 내려갔다. 아직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보고 실망한 적은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1979년 드라마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했다. 그 대본이 이후 자신의 작업들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 드라마를 거의 각색하지 않고 본인이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시대 배경도 1979년 그대로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아버지가 다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된 네 딸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후로 각자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다루고 있다. 네 딸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렸하다. 유명한 배우들이 그 역할을 맡기도 했고, 워낙 연기들이 좋아서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늙고 바람난 아버지 역할 역시 유명한 배우가 맡았다. 나에게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쿠니무라 준이다. 곡성에서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이 드라마에서 인자하게 웃는 표정인데도, 나는 어쩐지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주인공으로 네 자매를 설정한 것은 어쩌면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의 영향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리고 곧바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도 떠올렸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는 다섯 자매가 나온다. 한 명이 더 많았다. 나는 일단 감독을 보고 이 드라마는 봐야겠구나 생각하긴 했지만, 네 자매의 배역을 보고 엄청 놀랐다. 일단 첫째는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다. 이 분이 젊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에는 우리나라에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이전이라 작품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둘째는 오노 마치코가 맡았다. 고레에다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도 나왔었고, [솔로몬의 위증]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도 보았었다. 셋째는 아오이 유우가 연기했다. 내가 한창 일본 문화를 접하던 시기에 제일 유명한 배우를 꼽으라면 아오이 유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넷째는 히로세 스즈가 맡았다. 고레에다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처음 봤었다. 이후에 역시 고레에다 감독의 [세번째 살인]도 보았고, 이상일 감독의 [분노]도 봤다. 그리고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도 봤다. 외모와 연기력 모두 독보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네 자매의 독특한 성격과 삶의 모습들을 보는 것이 이 드라마의 주 내용이다. 그리고 아빠와의 관계. 넷은 아니지만 두 딸을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나중에 내가 더 늙으면 딸들과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되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이 드라마에 왜 이렇게 바람 피우는 남성이 많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실제로도 많았을 수도 있다. 과거 70년대 말의 일본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 시절 한국에도 아마 많았을 것이다. 바람이 난다는 건 해당 남성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 여성도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이 드라마의 분기점이 열린다.

물론 이 이야기는 드라마니까 현실보다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렇게 바람난 남성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겠지. 네 자매와 그 엄마 이렇게 다섯 명 중에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지 않은 사람은 두 명 뿐이다. 첫째는 작중 시점에서 이미 남편과 사별한 상태라 남편이 바람을 필 수 없다. 생전에 바람을 피웠는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본인이 기혼자인 남성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리고 셋째의 남편은 아직은 신혼이라 바람을 피우지 않고 있다. 넷째의 남편은 결혼 전에 이미 딴 여자와 있는 모습을 넷째와 둘째에게 들켰다. 둘째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아주 강하게 의심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정황 증거는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바람난 상대방이라고 의심했던 여성의 결혼식에 초대 받는다. 이 둘째의 남편은 이 딸만 넷 있는 집에서 마치 가장처럼 여러 궂은 일들을 떠맡아 처리하곤 한다. 장인어른과도 잘 지내고, 딸들이 바람난 아버지를 비난할 때에도 계속 장인 편을 든다. 그것은 그가 남자라서, 그것도 역시 바람난 남편이라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 아들 없는 집의 아들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편을 드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편드는 짓이 옳다고 볼 수는 없는데, 이 시대 상황과 일본 사회라는 곳에서 이 인물의 가치관으로는 바람 한 번 피울수도 있지가 되는 것이라고 봤다. 이것은 다른 여성들의 태도에서도 여러 번 보인다. 첫째는 아버지의 바람에 대해 다른 딸들보다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현재 다른 남성과 불륜관계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첫째로서 아버지와의 유대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넷째도 아버지의 바람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막내로서 아버지와 잘 지내는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남친이 집에서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장면을 보고서도 그것 때문에 화나는 것이 아니라 운동선수인 남친이 계체량 때문에 단식해서 자신도 임신중인데도 단식에 동참하고 있었는데(심지어 그래서 쓰러져서 둘째가 데리고 돌아온 길인데) 남친이 다른 여성과 먹고 남은 흔적인 빈 라면 그릇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일 이후에 바람 자체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결혼한다. 남편의 바람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둘째다. 그는 아버지의 바람 때문에 엄마가 받은 상처와 고통을 가장 공감한다. 그는 계속 남편의 바람을 의심하고 상대방으로 추정되는 비서를 신경쓰지만, 화면으로 보여주는 장면 만으로는 끝까지 이 남편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고 확정할 수 없다. 아버지의 바람을 처음 발견하고 사람을 써서 증거를 모은 셋째는 가장 심하게 화를 낸다. 하지만 그 사건 덕분에 만난 남성과 사랑에 빠지고, 나중에는 그 남성이 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엄마는 충격으로 돌아가심) 들어와 살면서, 또 결혼해서 결국 이 셋째 부부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가장 아버지와 잘 지내는 딸이 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야기. 퇴직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일터에 나가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은 일터에서 크게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얼마든지 외출이 가능하고, 그 일주일에 하루는 주로 다른 여성과 그의 아들과 보내고 있었다. 작중에서 그 아들은 이 아버지와는 관계없는, 그 여성이 과거에 만난 다른 남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 이 어린 꼬맹이가 할아버지 뻘 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이 아버지를 엄청나게 따르고, 이 아버지 역시 이 꼬맹이를 엄청 아낀다. 드라마는 아마도 일부러 이 아버지의 바람이 여성을 만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빠 없는 아이를 위해 애써 시간을 내주는 것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딸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본 그 여성은 이 아버지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한 것. 그래서 이 아버지는 이제 더는 그들 모자를 만나지 않는데, 아들은 계속 아빠를 찾아 전화를 걸고 따로 둘이 만나기도 한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 아들을 야멸차게 내칠수 없으니 계속 대화하는 것인데, 이 아들이 비밀을 말해버린다. 사실은 새아버지가 없다는 것. 즉, 이 여성이 거짓말로 결혼을 통보해 이 아버지가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헤어졌다고 해서 바람을 피웠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아버지가 아무리 혼외자인지 이혼 후 편모자가 된 것인지 모를 이 어른 아들에게 잘 대해준다고 해도 그가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성을 만났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혼자 집안 일을 잘 해내지 못해 엉망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집에 불이 나기도 하고.

고레에다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비슷한 내용들이 있다. 세 자매는 어릴 때 자신들을 떠났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갔다고 배다른 자매를 만난다. 그래서 네 자매가 되어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그중 첫째는 가정이 있는 남성과 불륜 관계에 있다. 아버지가 엄마를 버리고 떠나 힘들게 살았을 그가 다른 기혼자를 만난다는 것. 고레에다 감독이 79년의 이 원작 드라마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말한 것이 이 영화에 드러난다.

바람은 다의어다. 기압의 차이로 인한 공기의 흐름이 가장 많이 쓰는 뜻이고, 무언가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도 바람이다. 내가 10년 가까이 일했던 일터는 태양과 바람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다들 태양광발전과 함께 풍력발전도 하는 것으로 듣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바람은 그 바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그 바람이예요. 윈드가 아니라 호프예요. 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를 두고 다른 상대를 만나는 것도 바람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그건 아니었다. 이건 바람나다 라는 동사였다. 명사로는 이 뜻이 없었다.

솔직히 살면서 다른 이성 상대에게 끌리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속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서로 쿨하게 이해하는 관계들도 있다고 듣기는 했다. 그게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이 드라마를 주욱 보면서 내 인생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그 길에서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언제나 생각은 많다. 그러나 나는 늘 현실의 어떤 틀 안에 묶여있거나 갇혀있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데, 선택은 종종 파란 알약이다. 그냥 익숙하고 편한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 제일 쉬우니까. 깨어나라. 깨어나는 선택을 주저없이 하면 좋겠다.

아, 바람 이야기의 어딘가에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 이야기도 하려 했는데, 이건 깜빡했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으므로 이건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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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3-06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데 외도에 대한 가치관이 우리나라와 너무 달라 놀라긴 했어요. 히로세 스즈 연기력과 미모에 저도 정말 깜짝 놀랐어요. 최근 그녀가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 <누가 공작의 춤을 보았나> 보는 중입니다. 아주 대성할 배우라는 생각 들더라고요.

감은빛 2025-03-11 12:53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도 재미있게 보셨군요. 반가워요! ㅎㅎ
저도 그랬어요. 지금 이게 맞아?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속에 맴돌더라구요.
음 그 드라마도 찾아봐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5-03-15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는 바람 피운 남자와 안 들킨 남자가 있다면서요...ㅋㅋ
지금 생각난 건데, 남녀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군요. 단 친구가 될 수 있는 기간, 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친구 사이가 언제 연인 사이가 될지 모른다는 거죠. 저도 넷플릭스에서 두 감독의 영화를 찾아봐야겠습니다. 오늘 할 일이 생겼네요. 영화 이야기라 반갑게 읽었어요.^^

감은빛 2025-03-24 16:54   좋아요 0 | URL
페크님, 저는 이 드라마를 보기 전에는 그 생각을 못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많은 남성들이 바람을 피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여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ㅎㅎㅎㅎ
그래서 이 감독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가 생각이 났어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젊은 여성들이 등장하거든요.

2025-03-23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24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