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어려서부터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운동회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면 늘 1등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개 2등 정도는 했었다. 그러니까 달리기를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했다는 이야기다. 어른이 되고 달리기를 할 일이 없어서 한동안 잊고 살다가 문득 깨달았던 순간이 있었다. 작은 아이가 항상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큰 아이는 어렸을 때에도 조용한 편이었고, 별로 뛰어다니지 않았지만, 작은 아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늘 뛰어다녔다. 그때 떠올랐다. 나 역시 어렸을 때 늘 뛰어다니는 아이였음을. 그때 내 몸은 이미 배가 뽈록 나온 아저씨 몸이었다. 젊은 시절에 운동했던 흔적이 살짝 남아있긴 하지만, 볼품 없는 몸이었다.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고립운동은 피하고, 전신운동 중심으로 운동을 하면서 되도록이면 달리기를 꾸준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무릎이나 발목 등 관절 부상을 당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골반을 다쳐서 한 달 이상을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관절염이 생겼다.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여기저기 다녀봐도 원인을 찾지 못한, 이제는 고질병이 되어버린 관절염. 한동안 달리기를 즐겼건만, 관절염이 생긴 이후에는 거의 달리지를 못했다. 그리고 교통사고를 당했다. 큰 부상을 입었고, 거의 8달 가까이 전혀 운동을 하지 못했다. 몇 년간 운동을 열심히 해서 만들어 놓은 근육들이 다시 줄어들었다. 근육이 잘 발달한 몸은 아니었지만, 나름 예쁜 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 만족감이 그래도 이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었는데, 근육이 확 줄어들고 나니 허무한 느낌이 컸다. 몸이 다 회복되고 다시 운동을 시작해서 처음 한 동안은 근육이 다시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없어진 근육들을 다시 회복해야 예전에 좋아했던 운동들을 할 수 있으니 그때는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정체기가 왔다. 운동을 하면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이 들어야 재미가 있는데, 계속 제자리 걸음처럼 느껴져서 흥미를 잃었다. 아마도 나이 탓이겠지.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한번 흥미를 잃고 나니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운동을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내가 속한 의료협동조합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건강실천단 활동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매일 꾸준히 운동하고 그 성과를 참여자들과 공유하는 프로그램으로 매일 각자 원하는 운동을 하겠다는 약속이 핵심이고, 참가자들끼리 그 운동의 성과를 공유하다는 것도 재미있고 참신한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위 친한 사람들에게 자주 운동을 해야 한다고 어렵지 않으면서도 효과가 큰 운동을 소개하곤 했다. 매일 짧은 시간만 투자해도 몸에 큰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설득하곤 했는데, 다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운동에 흥미를 느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주로 하는 운동들을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한편으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달리기를 널리 전파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달리기 모임을 제안했다. 매일 각자 원하는 운동을 하되, 주 1회 이상은 모여서 함께 달리는 모임을 만들어 참가자를 모집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달리기를 못해도 본인의 컨디션에 맞춰 천천히 가볍게 달려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몇 분들이 참가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는데, 대부분이 60대 여성분들이었다. 달리기 경험이 있는지 여쭤보았더니 없다고 하셨다. 음, 일단 기본 자세부터 알려드려야 할 상황이다. 


어쨌든 달리기 모임을 이끌어야 하니 나부터 먼저 준비를 좀 해야할 것 같아서 며칠 전부터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달렸더니 폐활량이 엄청 딸리는 것을 느꼈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죽을 것처럼 숨이 찼다. 일단 담배부터 끊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거의 끊은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평소에는 안 피웠는데, 업무 스트레스가 늘어나면서 다시 담배도 늘었다. 일하다가 뭔가 막히면 나도 모르게 담배부터 생각났다. 당연히 완전히 끊지는 못하겠지만, 일단 담배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거리와 시간을 늘려가며 달렸더니 확실히 폐활량이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다시 달릴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간혹 무릎이나 발목의 통증이 생기는 날도 있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관절 통증이 있는 날에는 달리기를 포기했었는데, 요즘은 매일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아파도 달리기를 했다. 최대한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달렸다. 통증이 있는 몸에 적응하면서 관절 통증이 있어도 달릴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평소에 늘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데, 한 2년 신던 운동화 앞 부분 접히는 부위가 찢어졌다. 달리기를 계속 해야 하니 새 운동화를 사려고 매장을 찾아갔다. 런닝화를 주욱 살펴보다가 평소라면 가격 때문에 눈길도 안 줬던 나이키 매대를 그냥 구경만이라도 하려고 가봤다. 그러다 할인이 붙어서 저렴한 운동화를 하나 발견했다. 디자인도 딱 내 취향이었다. 바로 직원을 불러 사이즈를 찾아달라고 했다. 신어보니 지금까지 내가 주로 신었던 저렴한 운동화들과는 착용감이 완전 달랐다. 엄청 가볍고 푹신한 느낌었다. 난생 처음으로 나이키 신발을 신고 달려보았더니 완전 신세계처럼 느껴졌다. 정말 신발이 중요하구나! 달리기를 제대로 하려면 좋은 신발을 신어야 하구나! 하고 깨달았다. 신발을 바꾸고 나니 관절통증이 있어도 달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역시 뭐든 제대로 하려면 장비를 갖춰야 해!
















건강실천단 활동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덕분에 다시 운동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몸매 유지를 위해 가벼운 맨몸 운동만 가끔 생각날 때마다 했었다. 바벨, 덤벨, 케틀벨, 불가리안백에 쌓인 먼지를 닦고 다시 조금씩 중량 운동을 시작했다. 악력기들의 먼지도 닦아내고 빨래 걸이로 전락했던 철봉에도 오랜만에 매달렸다. 운동이 주는 쾌감을 아주 오랜만에 느끼며 왜 한동안 내가 운동을 안 했을까 하며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지금부터라도 다시 운동이 주는 재미를 느끼며 살아야지. 이 재미없고 고단한 삶에 뭐하나 작은 기쁨이라도 느끼며 살아야지.


매일 잊지 않고 운동하기 위해 운동을 기록할 앱을 찾아봤다. 그간 이런저런 방법으로 시도를 많이 했었다. 검색해보면 광고가 붙은 앱들이 여럿 있었는데, 기능의 차이가 제법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헬스장에서 기구를 사용하는 운동을 중심으로 기록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처럼 프리웨이트 운동만 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앱들이었다. 이런저런 앱들을 깔았다가 지우면서 결국은 그냥 메모장 앱에 그날 그날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기록을 했지만, 불편했다. 이번에 다시 검색을 하다가 괜찮은 앱을 하나 발견했다. 물론 이 앱도 대부분은 헬스장의 기구들을 이용한 운동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소수이지만 프리웨이트 운동들이 있었다. 그리고 기존에 없는 운동들을 내가 새로 등록해서 기록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게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자주 새로운 동작들을 시도해보는데, 딱히 이름을 정하기 어려운 다양한 동작들을 해보다가 뭐 하나에 꽂히기도 한다. 이런 것들도 기록할 수 있어서 좋았다.


바쁘고 피곤한 일상 속에서도 운동이라는 작은 기쁨을 챙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늙고 여기저기 관절이 아픈 몸이 되어버려 서글픈 삶이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운동을 할 수 있는 몸이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했던,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었던 시절을 겪었기에, 지금 중량 운동을 할 수 있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잘 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주위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데, 나도 매일 운동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는 않다. 특히 요즘처럼 거의 매일 저녁에 회의나 토론회 등 행사가 잡히면 밤늦게 집에 도착하니 피곤해서 씻고 뻗어버려서 운동을 못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틈틈히 운동을 해야 한다. 일단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달리고, 점심 시간에 식당을 가는 길에 달린다. 일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가볍게 맨몸 운동과 스트레칭을 하고 외부 회의를 갈 때 또 달린다. 아무리 밤 늦게 귀가하더라도 씻기 전에 무조건 한 가지 운동이라도 꼭 하려고 노력한다. 짧은 시간이라도 낼 수 있으면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특히 뭔가를 먹기 전에는 꼭 어떤 방식이라도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을 하고 안 하고의 차이가 결국에는 건강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아, 어제 조금 여유가 있어서 이 글을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다시 바빠져서 글을 완성하지 못하고 퇴근했고, 오늘은 엄청 바쁜 날인데도 이 글을 마저 두드려야 다시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러고 있다. 언제나 바쁜 날일수록 더욱 딴 짓을 하고 싶어지는 이유가 뭘까? 하! 다시 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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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4-19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설치한 앱이 어떤 건지 공유좀 부탁드립니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이, 감은빛 님의 운동을, 이번에는 특히 달리기를 응원합니다!! 달리기 하는 사람 멋져요! >.<

감은빛 2023-04-20 11:22   좋아요 0 | URL
언제나 다락방님의 응원 덕분에 힘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앱은 바디 캘린더 입니다.

yamoo 2023-04-2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설치한 앱이 뭔지 매우 궁금해하던 차에, 락방님이 시원하게 말해주셨네요...ㅎㅎ 저도 공유좀 부탁드려욤~~^^

감은빛 2023-04-20 11:23   좋아요 0 | URL
바디 캘린더 라는 앱입니다. 저는 정말 미음에 들었는데, 다른 분들께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ㅎㅎ
 

학교 폭력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의 영향 덕분인지 어딜가나 학폭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최근에는 조국 흑서라고 불리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의 공동 저자 중 한 명인 권경애 변호사 이야기가 매 순간 언론에 쏟아지고 있다. 3회 연속 출석을 하지 않아 재판에 패소했고, 학폭 피해자의 유가족이 소송비용을 고스란히 물어야 한다고. 처음에 기사를 제대로 읽기 전에 제목만 보고 뭐 이런 변호사가 다 있나 싶었다. 작년에 태양광발전소 건으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가 어이없이 패소하고 엄청난 큰 돈을 소송비용으로 물어줬던 기억 때문에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는데, 학폭으로 딸을 먼저 보낸 어머니라는 분, 나와 인연이 있는 분이었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녹색당 활동하면서 알게 되었고, 페이스북 친구로 맺어져서 종종 소식을 접하곤 했었다. 어쩌다 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살짝 접하게 되어 매번 이름이 보일 때마다 마음이 쓰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페이스북에 접속해봤더니 최근 너무나도 힘들고 바쁜 와중에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에 홀로 대응하는 상황을 계속 올리고 계셨다. 청소 노동자이신데, 일터인 고객의 집에서 청소를 하다가도 거기까지 찾아온 언론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고도 했고, 그 와중에 어떤 언론사에서는 그 분이 청소하는 모습을 찍어가고 싶다고 해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얼마나 참담하고 힘드실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삶의 전부였을 자식을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먼저 보내고,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학교도 교육청도 어느 누구도 진실을 밝히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다가 긴 세월이 지나 이제서야 의무를 다하지 않은 황당한 변호사 때문에 이슈가 되었는데, 지금도 문제의 본질인 학교 폭력의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단지 변호사의 징계나 손해배상 소송에만 촛점이 맞춰져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고 답답한 현실이다.


예전부터 여러 번 적었지만, 나 역시 어린시절부터 늘 폭력을 겪으며 살았다. 다만, 나는 단순한 피해자는 아니었고, 늘 폭력에 맞서 싸웠었다. 맨날 맞고 다녀서 태권도를 배웠고, 더 자라서는 힘을 기르기 위해 운동도 하고 격투기도 배웠었다. 중학교 3년 내내 반에서 제일 많이 싸움을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항상 친구들은 나를 지목했다.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작은 것이라도 뭔가를 뺏기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덩치가 큰 친구들은 일상적으로 작은 아이들의 돈을 뺏거나 학용품을 뺏거나 했었다. 뺏기기 싫어서 맞서 싸우다 얻어 터지고, 운이 좋으면 비기는 정도로 싸움을 하다보니 항상 싸움꾼이라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다.


언젠가 친한 후배가 내게 학폭 때문에 뭐 터질 일은 혹시 없는지를 묻더라. 글쎄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내가 먼저 누군가를 괴롭힌 적은 단 한번도 없어서 당연히 없다고 답했지만, 사소한 시비로 싸움이 붙었다가 결과적으로 나보다 더 크게 다친 아이들은 몇 명 있었다. 그런 것도 학폭이라고 부른다면 맞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가끔 아이들의 학교 생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을 피해 다닌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래. 사실 매번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돌풍, 비, 황사


오늘 날씨가 요상하다는 일기예보를 보았다. 요상하다는 단어가 머리에 콕 박혔다. 최고 초속 25로 바람이 엄청 강하고 벼락을 동반한 비가 내리는데, 강수량이 많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 비 속에 황사가 섞여 내릴 거라고 했다. 그래서 요상하다는 단어를 쓴 거였구나.


해마다 봄 가뭄이 엄청 심했는데, 그래도 올해 봄에는 비가 조금씩 오는 구나 싶긴 하지만, 해갈 하기에는 부족한가보다. 전라도 쪽은 여전히 가뭄으로 인해 피해가 큰지 궁금하다. 강원도 쪽은 건조한 날씨에 바람이 강해서 산불 피해가 크다고 했다.


기후위기 교육을 할 때마다 날씨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이상 기후 현상에 대해 주로 소개하지만, 요즘은 일상적인 날씨 자체가 예전이랑 아예 달라졌다고 설명하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신다. 강의 자료 준비하면서 기상청 자료들을 많이 찾아보는데, 정말 하나하나 자세히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나에게 한 서너시간 날씨 이야기만 떠드는 자리를 만들어주면 신나게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주에는 매일 저녁마다 회의가 잡혀있다. 어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어제는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3건의 릴레이 회의를 다녔다. 10시 반이 되어서야 회의 돌아다니느라 못한 일을 시작했고, 아마 새벽 4시 정도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졸음과 싸우며 일을 했다. 지금 엄청 피곤한데, 이 패턴을 금요일까지 매일 해야 할 생각을 하니 눈 앞이 캄캄하다. 회의를 하고 나면 새로운 일이 생기고, 또 다음 회의를 준비해야 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회의. 회의. 회의. 회의를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즐겁게 수다도 떨고, 얼굴을 보는 일은 정말 좋은데, 그 회의를 위해 필요한 노동들은 힘들다. 오늘 저녁 두 건의 회의 자료와 내일 저녁 회의 자료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정말 일하기가 싫다. 비가 오니 기분이 쳐져서 더 일하기가 싫은 것 같다. 그래도 이제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해야지. 피곤하고 힘들어도 억지로 웃는 얼굴로 회의 자리에 가 앉아야지. 씩씩하게 열심히 일해야겠다.


아참, 고리2호기의 수명이 끝났다고 한다. 한수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명연장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언론 작업을 한다고. 시민들은 고리2호기 영구정지 선포 기자회견을 이미 마쳤다. 물론 이 미친 나라의 대통령이 영구정지를 결정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고리1호기가 결국 시민들의 뜻대로 영구정지를 선언했듯이 고리2호기도 그 과정을 밟아갈 것이다. 물론 영구정지를 선언했다고 당장 핵발전소를 폐쇄할 수는 없다. 아직 우리나라는 핵발전소를 폐쇄할 수 있는 기술이 없다. 안전하게 폐쇄할 수도 없는 핵발전소를 계속 짓겠다는 인간들과 같은 세상에 살아야 하다니.


오늘 페이스북을 보니 황규관 시인이 자신의 산문집에 사인을 해서 판매한다는 글을 올렸다. 그걸 또 한티재 출판사 변홍철 대표가 열심히 퍼나르고 있었다. 좋아하는 분의 책이라, 거기다 사인본이라 바로 연락을 하려다가 집에 쌓여있는 읽지 못한 책들의 탑들이 떠올랐다. 에라 모르겠다. 언제는 책탑 걱정하면서 책 질렀나! 일단 지르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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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3-04-11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투브에서 여자 변호사님이 저 권경애 사건 다뤘는데.. 자기는 저런 불출석을 듣도 보도 못한 사건이라고, 변호사 생활 이십년 헸지만 저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하더군요.아는 분이라 더 그러실 것 같은데.. 1심에서 오억 배상도 무효 되었고 재판비용까지 다 물어줘야 하니.. 아니 그것보다 딸의 죽음이 너무 억울하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이 건은 이제 다시 소송도 못하고 재심이 있긴 한데 재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하네요. 안타까워요…

yamoo 2023-04-12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폭 가해자는 엄벌에 처해야합니다. 발본색원하여 공소시효도 없애야 합니다~!

맞습니다. 책탑걱정하다가는 책을 못사죠~~
저도 놓을 곳도 없는데 계속 책을 사고 있습니다..ㅜㅜ

페크pek0501 2023-04-13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더 글로리, 보고 나서 나도 뭐 친구들을 괴롭힌 적이 없겠지, 하고 생각해 봤네요.ㅋㅋ
학창시절에 나서기 싫어하고 소심한 편이었는지라 남을 괴롭힐 여유?가 없었죠. 그리고 우리 때엔
학폭이 없었던 것 같아요. 놀기 좋아하는 애들이 반에서 꼭 몇 명은 있어서 담임에게 혼나고 반성문 쓰고... 그게 다 였던 것 같아요.
 

꽃길


벚꽃 구경에는 크게 흥미가 없다. 벚꽃이 만개한 모습은 예쁘기는 하지만, 그런 벚꽃길이 근처에 있다면 산책 삼아 걸어볼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예전에 일터가 영등포에 있을 때는 여의도 벚꽃길도 걸어 다녀봤고, 우리 동네 불광천 벚꽃길도 해마다 걸었지만, 모두 가까이에 있었기에 갔던 곳이고, 마침 같이 일하는 일행이나, 같이 식사했던 일행이 원해서 같이 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속초 여행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나무들을 보면서 조금 생각이 변했다. 일단 공간 자체가 관광지라서, 일상을 벗어난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이 벚꽃길이 정말 예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공간이라면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찾아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시 생각해보면 이건 벚꽃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이 속초라는 관광지를 좋아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암튼 중요한 것은 이번에 다녀온 속초 곳곳에서 만난 여러 벚꽃길들이 모두 엄청 예뻤다는 것이다. 영랑호 둘레를 걸으면서 계속 마주친 벚꽃들, 숙소로 드나드는 길에 양쪽 길가에서 우리를 맞이해 준 벚꽃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특히 숙소를 드나들며 여러번 마주친 그 꽃길은 마치 꽃으로 만든 터널 같은 느낌이었다. 꽃길이란 단어를 한번도 내가 직접 써 본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어쩐지 낯익은 이유는 노래를 통해 많이 들어서 때문이겠지. 암튼 처음으로 이런 걸 두고 꽃길이라고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이번 속초 여행은 여러모로 내게 인상적이었다. 우선 20년도 훨씬 더 전에 제대한 이후로 이쪽 동네를 여행 온 것이 처음이었다. 아, 가끔 짧게 스치듯 지나친 적은 여러번 있었다. 무박2일 설악산 산행을 하느라 다녀간 적도 있었고, 양양이나 강릉 쪽도 가끔 볼일이 생겨 짧게 머물다 가기도 했다. 하지만 속초와 고성 쪽으로 놀러갔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신병교육대를 마치고 곧바로 GOP로 배치를 받아 통일전망대가 있는 동쪽 끝 소초에 배치되었었고, 나중에 전방 근무를 마치고 일반 대대로 철수한 후에는 간성에 있는 부대에서 지냈다. 말년에 다시 한 번 전방으로 투입될 수도 있었으나, 당시 편재가 좀 바뀌고 연대와 대대가 막 뒤섞이면서 다행히 전방 투입 전에 제대했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평생 살면서 다시 경험하기 어려운 나름 재미있고 독특한 일들이 많았지만, 어쨌거나 군대는 군대였기에 고달프고 힘들었던 것은 당연하다. 고배율 망원경으로만 보긴 했지만 북한 땅 금강산도 여기저기 둘러보고, 야간에 각 초소를 돌며 근무서면서 늘 바라보는 건 아름다운 동해안과 멀리 북한 해금강이었다. 자연환경이 정말 아름다운 곳에서 근무했지만, 그 삶 자체는 지옥이었기에 모순이라는 생각이 늘 들었다. 암튼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냥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군 생활을 했던 속초 위쪽 고성 쪽으로는 이상하게 갈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무의식이 갈 일을 일부러 안 만들었는지,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이번 여행은 함께 간 사람들에게서 많은 응원과 위로를 받았던 시간이었다. 종종 떠올리는 말이지만, 주위에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 따뜻하게 나를 걱정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감사하다. 함께 간 사람들과의 매 순간 순간이 정말 즐겁고 행복했었다. 아마 살면서 이렇게 많이 웃었던 적이 없었을 정도로 정말 많이 웃고 즐기는 여행이었다. 이런 행복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어서 함께 다녀온 분들께 고마움을 느낀다.


다시 일상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일요일 저녁부터 다시 기분이 다운되었다. 다음날부터 머리 아픈 일들이 잔뜩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회의에 한 번 참석할 때마다 새로운 일들이 생겼고, 참석해야 할 회의는 자꾸 또 새로 생겼다. 엊그제 그러니까 화요일 오후에는 갑자기 급하게 성명서 초안을 써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어지간하면 이렇게 급한 요청은 거절해야 하지만, 워낙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선배가 부탁하시길래,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그날 해야 할 일이 이미 많았고, 또 그날은 유난히 전화도 많이 오고, 매장 손님도 끊이지 않고 계속 들어왔다. 글 쓰는 일은 좋아하지만, 성명서와 같은 딱딱하고 공식적인 글은 좋아할 수가 없다. 관련 내용을 잘 아는 분들께 전화로 조언을 구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밤 늦게까지 성명서를 썼다. 그리고 다른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결국 새벽까지 일을 해야 했다. 늦은 저녁 일단 매장을 정리하고 나서야 저녁을 못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무척 배가 고팠지만, 우선 성명서 초안을 넘기고 뭐든 먹어야지 했는데, 결국 새벽까지 제대로 밥을 먹지는 못했다. 그냥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아 허기만 면하는 정도로 버텼다.


월요일 오후 강의는 그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강의를 준비하는 공무원들의 태도가 좀 어설퍼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고, 강의에 참석한 주민 조직 간부들의 태도 때문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강의를 마치고 바로 다음 회의에 참여하느라 바쁘게 움직여야 했고, 회의가 길어져서 매장을 봐야 하는 시간에 늦어져서 마음을 졸였다. 급하게 매장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그때까지 점심도 못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같이 회의에 참석했었던 선배 한 분이 전화로 왜 저녁을 같이 먹지 않고 바로 갔냐고 물어봐 주셔서 고마웠다. 저녁에 매장을 봐야 하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저녁은 늘 매장 문 닫고 늦게 먹어야 하는데, 뭐 현재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치지 말아라


여행에서 돌아온 일요일 저녁에 큰 아이랑 통화를 하니, 아이가 다쳤다고 했다. 전날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지면서 침대 옆 화장대 모서리에 눈 바로 옆을 찍혀서 찢어졌다고. 일요일 아침에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다녔으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했다고 들었다. 아이는 담담하게 말을 했지만, 나는 속으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아이가 다쳤다는 사실도, 애들 엄마와 아이가 찾아갔던 여러 병원에서 이런저런 핑계로 다친 아이를 치료해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너무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즐겁게 여행을 다녀왔는데, 아이는 다쳐서 치료도 못받고 병원을 찾아다니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왔구나. 다친 아이 곁에 있어주지 못한 사실도 화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아이를 찾아가 얼마나 다쳤는지, 지금은 어떤지 보고 싶었지만, 전화 통화를 한 시간은 이미 너무 늦은 때였고, 월, 화 이틀을 늦게까지 일하느라 가지 못했다. 어제 비로소 아이들을 만나러 다녀왔다. 내가 직접 큰 아이의 상처를 소독해주면서 살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상처가 크지 않아 다행이었고, 벌써 거의 아물어 있었다. 다만 모서리에 부딪힌 충격으로 인해 눈가에는 멍이 들었다가 회복되고 있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라고 속삭였다. 


또 다시 돌아오는 슬픈 기념일들


며칠 전에 4.3 기념일이 지났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은 인간은 당선인 신분일때는 나타났었지만, 올해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저출산 대책으로 30세 이전에 자녀 3명을 낳으면 군면제 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내놓는다거나, 주 52시간도 과한데, 69시간 노동제를 추진하겠다고 하다가 다시 60시간으로 바꾼다거나, 민생특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쌀 소비에 대한 대책으로 '밥 한 공기 비우기'를 말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지금 내가 정말 뉴스를 듣고 있는 건지, 코메디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역시 우리나라는 정치인만큼 국민에게 웃음을 주는 직업이 없는 것 같다. 아,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아니었는데. 암튼 해마다 4.3 기념일에는 기분이 쳐진다. 그건 아마 4.16 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고, 기억이다. 작년 4월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렇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빠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


살인마 전두환의 손자가 광주를 찾아가 유가족 대표들에게 사죄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가 가족과 지인들의 폭로를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때 그 영상들을 찾아봤었다. 그리고 그가 라이브로 마약을 하는 장면도 일부를 보았었다. 한 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부모나 가족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는 없다. 태어나보니 독재자, 학살자의 손자였다면 그 삶은 과연 어떨까? 상상하기 쉽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다. 내 부모님도 마찬가지였고,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부모님들의 여러 실수들을 기억한다. 나 역시 살면서 많은 잘못들을 저질렀다. 그렇다고 내가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저 이 삶 자체가 고달프고 싫어서 삶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건 내 삶의 문제이지,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 아이들 역시 나의 크고 작은 잘못들을 보고 자랐다. 아이들이 과연 나를 원망할 지는 모르겠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설사 이런저런 잘못으로 법의 심판을 받아 교도소 신세를 지고 있는 부모나 조모가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로 원망하거나 경멸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두환 정도의 학살자는 정말 상식의 선을 까마득히 뛰어 넘는다. 내가 만약 전두환의 자손으로 태어난다면 어떨까? 정말 이건 상상이 안 된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참사들, 성수대교 참사, 삼풍백화점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의 큰 사고들이 일어났을 때, 사전에 그를 막을 수 있었을텐데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돈에 눈이 멀어 고의로 이런 사태를 불러온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은 과연 전두환과 비교해 얼마나 다를까? 물론 전두환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니 추정이라 단서를 달 수 밖에 없지만) 국민들에게 총구를 겨누도록 명령하고, 실탄을 발표하라고 명령한 사람이기 때문에 직접 학살자이기에 단순히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건 사실이긴 하다. 다만 그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제대로 책임지지 않았다는 건 대부분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잊지 말고 제대로 기억해야 할 슬픈 기념일들은 너무나도 많다. 그 중에서도 특히 4월은 슬픈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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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을 보내며


또 정신없이 한 달이 지나갔다. 이번 달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일터에서 직책이 바뀌었다. 긴 시간 실무 책임자를 맡고 있었는데, 이제 임원이 되었다. 작년 가을부터 나를 임원으로 추천하면서, 반대하거나 딱히 의견이 없는 다른 임원들을 설득하고, 또 나를 부추겨 더 열심히 활동하도록 지원해준 몇몇 분들이 계시다. 그 분들 덕분에 무사히 임원이 되기는 했는데, 딱히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겠다. 당장 함께 일하는 동료 활동가들이 호칭을 바꿔야 하는데, 이미 긴 시간 입에 붙어버린 예전 직책 때문에 난감해 하는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라 하겠다. 사실 위치가 바뀌어 업무도 바뀌어야 하고, 태도도 바뀌어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 작은 조직에서 실무자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뭐 얼마나 큰 변화가 생기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암튼 훨씬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할 자리인데, 나는 자꾸만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작년 가을부터 정말 일을 그만두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었다. 주위에서 계속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업무 메일을 쓰거나 전화를 걸면서 직함을 밝혀야 할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어색함을 느낀다. 한 2주 전쯤에 그러니까 총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고 난 직후에, 어느 회의 자리에서 처음 뵙는 분이 계셔서 소개를 했는데, 새로운 직함을 말하자마자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 몇 분이 엄청나게 웃었다. 나는 그 분들이 왜 웃는지 몰라 조금 당황하다가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남은 소개를 마저 끝냈는데, 내가 어색하게 말해서 웃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도 모르게 내 경상도 억양이 나와서 특정한 단어를 강조한 것처럼 들렸다고 했다. 서울 산 지 20년 정도 되었고,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에도 특정한 말을 할 때는 제외하고 사투리를 안 쓰는 편이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이 억양은 갑자기 문득 이렇게 튀어나오긴 하나보다.


지난 주에는 또 누군가에게 멋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음, 외모에 신경을 안 쓰고 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멋 부린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아마도 머리카락을 길러서 그런 느낌을 준 것 같은데, 머리카락은 멋 부리려고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40년이 훌쩍 넘게 사는 동안 한번도 장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죽기 전에 한 번은 해보고 싶어서였고, 마침 교통사고로 휴직하는 동안코로나 등을 핑계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사실은 막상 머리카락을 길러보니 내가 생각했던 스타일이 나오지 않기도 하고,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많아서 그냥 확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하는데, 이미 기른 것이 아깝기도 하고, 좀 더 많이 길러서 다른 스타일이 되면 뭔가 좀 달라질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버티는 중이다. 여러가지 불편한 점도 많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은 이발소나 미용실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짧은 머리였다면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머리카락을 자르러 다녀야 했다. 나는 예전부터 미용실 같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라고 묻는 것도 불편하고, 가위질을 하면서 자꾸 고개를 숙여라, 들어라 하는 것도 불편하고 특히 다 자른 후에 뭔가 어색한 내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면 옆에서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모습이 가장 불편했다. 요즘 MBTI 가 엄청 유행이고 나의 이런 모습은 전형적인 I 의 모습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평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I 인 것에 대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업무상 아는 사이이거나 그렇게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E 라고 생각했다고 들었다. 암튼 다른 공간보다 유독 미용실에서 불편함을 느끼곤 했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양한 사람들


두어달 전부터 매장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매장에 앉아 있다보면 정말 사람들은 다양하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외모도, 목소리도, 말투도, 성격도 모두 다 각자 독특하고 특별하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고 여긴다. 불과 이삼주 전까지만 해도 다들 겨울 옷을 입고 들어오시던 분들이 요즘은 다양한 옷차림으로 들어오셔서 그런 것도 재밌다고 생각했다. 오늘 낮에는 반팔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여성 분이 들어오셨는데, 한쪽 팔과 반대쪽 다리에 크게 문신이 있었다. 일부러 쳐다보면 실례가 될 것 같아 슬쩍 보고 말았는데, 요즘은 저렇게 문신을 드러내고 다니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긴 문신을 새긴다는 건,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일부러 숨길 이유는 없는 거겠지.


판매하는 상품들에 대한 문의를 하거나, 리필 스테이션 이용 방법을 묻거나, 어떤 특정한 상품이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질문을 하는 방식도 모두 다 다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나타나는 반응도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분들과는 길게 대화를 이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대답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상품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오기도 한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고 매장 여기저기를 열심히 찍어가는 분들도 있다.


우리 매장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재활용 시스템에서 제대로 재활용 되지 않고 있는 종이팩(우유팩과 멸균팩)과 플라스틱 병 뚜껑 등을 모아서 제대로 재생해 사용하는 업체로 갖다주고 있다. 그냥 모아오라고 하면 별 호응이 없을 것 같아서 자원을 모아오는 수량을 체크하여 리워드로 작은 선물(화장지 1롤)을 드리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1년 반이 넘었는데, 이 화장지를 얻기 위해 자주 방문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대부분 어르신들인데,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오시기도 한다. 일반 가정에서 모아서는 절대 그 정도 양을 모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시는 거냐고 물어보니 남들이 재활용품을 내놓은 걸 자신이 수거해서 가져온다고 했다. 재활용으로 내놓아도 전혀 재활용이 되지 못하는 현 시스템에서는 저렇게라도 모아주셔서 재활용이 되면 그것도 다행이긴 한데, 막상 딱 숫자에 맞춰 가져온 자원들을 꺼내놓고 화장지만 받아서 바로 가시는 그 분들을 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분들은 그 화장지를 받기 위해 또 얼마나 거리를 다니며 고생을 하실까 싶기는 한데, 한 편으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비밀번호


나는 어려서부터 유독 숫자를 잘 외우지 못했다. 가족 생일은 물론이고 집 전화번호도 잘 외우지 못했고, 휴대전화를 처음 만들었을 때나 번호가 바뀌었을 때에는 내 전화번호도 못 외웠다. 당연히 가족들의 휴대전화번호나 친구들 번호도 못 외웠다. 연애할 때에는 연인의 번호를 외우지 못해 구박을 받기도 했다. 이럴 때는 다행이다 싶은 것이 헤어지니 후에 예전 연인의 번호를 폰에서 지우고 나면 그 번호를 다시 떠올리지 못해서 실수로라도 다시 연락하지 못하는 것. 암튼 정말 숫자를 못 외우는 내가 최근 가장 괴로운 일이 여기저기 현관 비번을 외워야 하는 일이다.


일단 우리집 건물 1층 현관 비번과 우리 집 비번은 당연히 외워야 한다. 잊으면 집에 갈 수가 없으니. 그리고 일터의 비번, 일터 건물의 공동현관 비번도 외워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 집의 비번, 아이들 집 건물 비번도 외워야 한다. 이것만 해도 벌써 6개다. 여기에 더해 노트북 비번, 이메일 계정 비번, 은행 계좌 비번 등을 따로 외워야 한다. 물론 이건 숫자만 있는 건 아니고 문자와 특수문자도 외워야 한다. 이메일은 개인 메일과 업무용 메일이 다르고, 각종 포털 사이트와 자주 가는 곳들(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비번도 외워야 하고, 일터 노트북도 내 것 뿐 아니라 공용 노트북 비번도 알아야 한다. 현대인들은 이 수많은 비번들을 다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갈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나는 가끔 일터 건물 공용 현관 비번을 누르려다가 곧바로 떠올리지를 못하고 숫자 키의 배열을 한참을 쳐다보곤 한다. 숫자를 잘 못 외우는 내가 억지로 기억하는 방법은 숫자 자체를 외우기 보다는 키패드 상에서 그 숫자의 위치를 순서대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메일 계정의 비번이나 각종 사이트의 비번은 주로 좋아하는 영어 단어나 문장을 만들어서 기억한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이나 애칭을 넣거나 뭔가 의미가 있는 물건을 넣거나 한다. 예전에는 이렇게 비번을 만든 적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내 별명이었던 '호랑나비'의 학명을 찾아서 그 긴 학명의 단어 하나를 가져다가 비번으로 쓴 적도 있었다.


여행


내일은 친한 사람들과 동해안으로 1박2일 여행을 가기로 했다. 2019년 오키나와를 다녀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때 같이 가지는 못햇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는 분들이 몇 번 더 포함되었다. 맨 처음 놀러가자고 의기투합한 건 4명이었는데, 중간에 계속 사람들이 들어와서 지금은 10명 정도가 되었다. 오키나와 여행 멤버가 7명 모두 성씨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성인 김, 이, 박이 모두 다 있는데도 그랬다. 그 사실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어서 앞으로 이 여행 멤버에 포함할 사람은 모두 성이 달라야 한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앞으로 우리랑 같이 놀러가고 싶은 사람 중에 김, 이, 박은 일단 무조건 못 들어온다. 이번에 같이 가는 사람들도 모두 성이 다르다. 기존 멤버들 외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기존 멤버들과 겹치지 않고 달랐다는 의미다. 사실 나중에 정말 친하고 좋은 사람이 원한다면 성이 겹친다고 굳이 내치지는 않겠지만, 아직은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 재밌다.


오늘 저녁은 조금 바쁠 예정이다. 8시에 매장 문을 닫고 나면 걸어서 20분 거리에 안경을 찾으러 가야하고(눈이 좀 더 나빠져서 새로 맞췄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해놓고, 짐을 싸야 한다.


짧은 강의


담주 월요일에 동네 주민센터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시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강의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조금 만들다가 하기 싫어서 지금 이 글을 두드리고 있다. 강의자료를 만드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닌데, 1시간짜리로 만드는 일은 어렵다.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내게는 어렵다. 글도 짧은 글은 쓰기 어렵지만, 긴 글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강의도 서너시간짜리 강의는 준비할 것도 없지만, 1시간짜리 짧은 강의는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4월에만 잡혀 있는 강의가 3개나 있는데, 이거 모두 1시간짜리 짧은 강의다. 아!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얼른 강의자료 만들고 다른 일도 해야 하는데, 어느새 매장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손님이 자주 찾지 않는 매장에 혼자 앉아 있는 일은 좀 힘이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일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 들어와서 그냥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위에 언급한 재활용품들을 갖고 와서 도장을 찍거나 화장지를 받아가는 분들도 있다. 매출은 안 오르는데 드나드는 사람은 계속 있으니, 다른 업무에 집중할 분위기는 또 아닌 것이다. 정말 그냥 매장 일만 해야하는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또 괜찮은데, 매장도 보면서 다른 일들도 엄청 많이 해야한다는 사실이 문제다.


오늘은 야근을 할 수도 없으니 이제 어서 강의자료를 만들어야겠다.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안녕, 3월. 어서 와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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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4-06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축하드립니다.
새로 얻게 되신 직함에 입에 착착 붙으실 거예요.
계속 좋은 일 많은 4월 보내시기를!

감은빛 2023-04-07 01:57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 고맙습니다!
여전히 일에 치여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네요.
얄라알라님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날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어떤 인터뷰


어느 연구소의 연구원이 재생에너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한참 바쁠 때여서 좀 미루자고 했는데, 그쪽도 보고서 마감일이 촉박하다고 해서 그제 만났다. 사전에 보내온 질문지는 의외로 간단하길래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래 걸리지도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자 그 연구원은 질문지에 없던 질문들을 포함에 아주 구체적인 질문들을 많이 했다. 난 언론사 기자나 대학원생들의 인터뷰에 응할 때면 말이 많아진다. 아니 강의할 때도 말이 많고, 발표할 때도 말이 많은 걸 보면, 그냥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암튼 되도록이면 더 많은 정보를 주고 싶어서 받은 질문 내용에 덧붙여 추가 정보를 더 말하는 편인데, 이 사람은 그걸 듣고 이어서 또 질문을 연결해가다보니 점점 인터뷰가 길어졌다. 말을 한참 하다보니 어느새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질문을 계속 던지던 연구원은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떠드느라 잘 몰랐는데, 인터뷰를 다 마치고 나니 어느새 2시간 반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쩐지 목이 엄청 아프더라.


긴 인터뷰 때문에 약간 진이 빠진 기분이 들었다. 연구원과 헤어지고 그의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약속한 자료들을 전송하고 나서 일을 시작하려다가 머리가 멍하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우선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며 SNS에 접속하여 머리를 좀 식혔다. 한참 후에 해당 연구원이 미안하다며 문자를 보냈다. 보고서를 위한 조사 차원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평소 관심이 많아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며, 너무 긴 시간을 뺐어서 미안해 했다. 시간은 어차피 내기로 했으니 괜찮은데,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그렇게 피곤한 일인 줄은 몰랐다. 이것도 다 나이 탓일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3시간이나 4시간짜리 강의를 해도 이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암튼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날 저녁에는 거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장 문 닫을 시간까지만 가벼운 일들만 처리하고 퇴근했다.



반가운 목소리


9시가 다 되어 매장을 정리하고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중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으니 갑자기 높은 톤으로 내 이름 두 글자를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이름만 부를 정도라면 무척 친한 사이일텐데, 왜 내 폰에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 "네,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여전히 높은 톤으로 자신의 이름을 크게 말했다. 이름을 듣고 나서야 어쩐지 조금 익숙한 목소리였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 17년 전쯤 시민단체에서 함께 일했던 활동가였다. 나보다 한 두살 정도 어려서 그는 나를 오빠 혹은 그냥 이름으로 불렀고, 우린 서로 말을 놓고 지냈었다. 당시 그와 동갑인 여성 활동가가 두세명 정도 더 있었는데, 그 중에 다른 친구들과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데, 유독 그와는 친했었다. 그 단체를 그만두고 나서는 서로 연락이 끊겨서 긴 시간 연락이 없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전화가 온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전화해놓고,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편하게 내게 말을 이어갔다. 뭐 언론 기사를 봤는데, 너무 반가웠다며, 머리도 길렀더라 막 이러면서 같이 기사를 찾아봤던 사람에게 나 이 사람 알아. 나 이 사람하고 친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음,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어떤 기사를 봤을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나는 모른 체하고 그냥 응. 응. 대꾸만 했다. 내 이름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보니까 전화기에 내 번호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나도 어지간하면 전화번호를 잘 지우지 않는 편인데, 왜 내 전화기에는 그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을까. 암튼 그는 반가운 마음에 그냥 바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어떤 프로젝트에 관해 소개하면서 관련해서 한번 미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지난 주에 그 내용을 메일로 받아봤기 때문에 듣자마자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주 정도에 한번 찾아오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같이 일했던 당시의 어떤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녀석과는 유독 힘들게 땀 흘리며 일했던 기억들이 많았다.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다가 잠시 쉴 때 그가 차가운 음료수를 갖고 와 내 뒷목에 갖다대어 깜짝 놀랐던 기억.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다가 서로 몸을 부딪혔던 기억.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떠들고 놀았던 기억 등등. 아,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같은 나이의 다른 후배들과 달리 유독 이 녀석과 친해졌던 이유가 있긴 있었네.


갑작스런 만남의 기억


몇 해 전이었나? 여기 서재에 글을 썼던 이야기인데, 예전에도 환경단체 동기(교육기수로 동기라 나이도 지역도 모두 다름)가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무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아마 그 친구를 못 본지 한 15년 정도는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정말 일이 많고 바빴다. 그 전날 밤새 일하고 씻지도 못하고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아니 이틀 연속 밤샘에 집에도 못 들어갔던 것 같다. 게다가 피곤에 쩔어서 멍한 상태였다. 누군가 공동사무실로 들어선 후 입구 쪽 비어있는 자리들을 지나서 내게 다가올 때까지 나는 굽은 허리에 거북 목 상태로 모니터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내 자리 근처까지 다가와서야 말을 걸었다. 인기척을 느낀 내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배시시 웃는 그가 있었다. 아마 첫 마디가 "오빠, 진짜 오랜만이지?" 였던 것 같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한발 다가서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감탄사 외엔 말도 나오지 않았고,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는 팔을 벌리며 나를 안으려고 다가왔다. 순간 이틀이나 집에 못 들어가서 담배 냄새, 땀 냄새에 쩌들어 있을 내 옷과 몸 상태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십 수년만에 만나 반갑다는 그 포옹을 피할 수도 없는 일.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그냥 가볍게 포옹을 하고 빠르게 뒤로 물러나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 친구는 까무잡잡한 피부색 덕분에 언제나 눈에 잘 띄었고, 꽤 귀여운 얼굴과 작은 키 때문에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또 목소리가 좀 독특했다. 반가운 마음은 엄청 컸지만, 마감에 쫓기는 일 때문이기도 하고, 어색한 상황 때문이기도 해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친구는 내가 바쁜 상황임을 짐작하고,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급한 일 마무리하고 자신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공동사무실 바로 밖에 있는 홀에서 조금 기다리면 최대한 빨리 이것만 끝내고 나간다고 했다.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은 엄청 길었지만, 간혹 페이스북을 통해 소식은 접하고 있었다. 결혼 소식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전해들었던 것 같고,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페이스북에 아이와 함께 있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내 소식도 가끔 접했다고 했다. 내가 여기 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도 내 일과 관련해 제안할 것이 있어서였다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그 녀석과 프로젝트 하나를 함께 하면서 몇 번 만났고, 계획했던 행사를 무사히 마쳤고, 종종 연락하자고, 언제 친했던 동기들끼리 한번 보자고 약속을 했지만, 그 후로 다시 몇 년이 흐르도록 만나지는 못했다. 언젠가 또 불쑥 찾아와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시험과 재미


큰 아이와 통화하면서 학교 이야기를 물었더니 모의고사를 쳤다고 했다. 수능과 같은 방식이었냐고 물었더니 똑같은 방식이라고 답이 왔다. 나는 재미있었겠네 하고 말을 했는데, 아이는 황당해하면서 어떻게 시험이 재미있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학창시절에 중간고사나 모의고사는 성적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힘들었지만, 모의고사는 재미있었다. 그건 따로 시험 범위가 정해진 것도 아니라서 막 닥쳐서 공부할 필요도 없고, 그냥 평소 실력을 테스트하는 것이라, 내가 정말 수능을 치면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올지 알아보는 것이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재미있었다. 어쨌든 시험이니 잘 보기는 해야했고, 나름 긴장도 하고 열심히 풀었는데, 그런 일들이 내게는 재미였다. 게다가 신기하게 모의고사는 성적이 잘 나오는 편이었다.


아이에게 이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나는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압박을 즐기는 사람이었구나. 떠올려보면 내가 가장 즐겁다고 느낄 때는 강의를 하거나, 발표를 하는 순간인데, 그때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는 시선을 느끼면 적당히 긴장도 되고, 내가 준비한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 속으로 잘 해야지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런 마음 상태가 나는 즐거운 것 같다. 내게 재미있는 일은 그렇게 적당한 긴장감과 실수를 저지를 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과 혹시 완전히 망쳐서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까지 드는 순간의 어떤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더 재미있고 즐거운 건 그렇게 중요한 일을 잘 해내고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이리라.


운동도 그렇다. 나는 고립운동을 잘 하지 않고 주로 전신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동작과 어려운 동작들을 계속 시도하는데, 그 무게나 그 강도를 버티기 위한 온 몸의 긴장감을 즐기고, 혹시 실수로 다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을 즐기며, 이걸 결국 해냈을 때의 느낄 짜릿한 성취감에 대한 기대감을 가장 즐기는 것 같다. 그래서 긴 시간 지루하게 운동하지 않는다. 준비운동을 통해 몸을 충분히 풀어준 다음에는 짧은 시간 고강도로 몸을 움직여 그 순간의 아드레날린을 확 늘리는 방식으로 운동하는데, 그런 운동이 내게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는데, 노래방에서도 그런 재미를 가끔 느낀다. 결코 노래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래 부르는 걸 워낙 좋아해서 그래도 좋아하는 노래들을 잘 부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고음을 부르지 못해서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친한 후배에게 두성을 배운 이후로는 어느 정도의 고음에도 조금은 자신이 생겼고, 그래서 노래 부르는 일이 더 즐거웠다.


며칠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래방을 가서 노래를 불렀다. 내 차례가 되어 마이크를 넘겨 받으면 항상 긴장된다. 그 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내 노래만 주목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별로면 어쩌지, 혹시 음정 박자가 틀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든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하면 늘 실망부터 먼저 든다. 하! 내 목소리는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가! 나도 남들처렴 멋진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다 노래가 점점 크라이막스를 향해가고 음이 높아지고 두성을 쓰기 시작하면 조금씩 만족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노래를 이 정도로 부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거 아니겠어. 뭐 이런 마음이 드는 거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엄지 손가락을 세우거나, 좋았다고 한 마디씩 던지면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은 금요일. 야근을 하다 말고 글을 썼고, 이제 퇴근을 해야겠다. 누군가를 불러 맛난 것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싶다 생각이 들었다가도, 집에 가서 샌드백을 두드리고 케틀벨과 바벨 그리고 불가리안백이랑 같이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뒷정리를 시작하고 고민을 다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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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28 01: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의고사를 즐기기도 하셨군요 저는 모의고사라 해도 시험이라 생각했네요 그렇게 해서 성적도 좋게 나온 거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긴장 하면 더 안 되기도 하잖아요 조금 즐거운 마음과 긴장감이 있다면 나을 듯해요 그게 쉽지 않을 듯합니다


희선

얄라알라 2023-04-06 12:11   좋아요 1 | URL
시험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냐는 자녀분의 반문과 표정이 훤히 그려집니다^^

그렇지만 사실 저도 감은빛 님처럼 시험, 정확히는 그 초집중의 시간을 좋아하던 한 사람이었어요^^

감은빛 2023-04-07 01:59   좋아요 1 | URL
희선님. 고맙습니다!
긴장하면 잘 하던 일도 오히려 안 되는 경우도 있죠.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늘 달라지겠지요.
저는 그걸 조금 즐기는 편이라 그래도 결과가 좋은 것 같아요.
아니, 적어도 저는 결과가 좋다고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남들에게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감은빛 2023-04-07 02:00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님. 그렇죠?
아이는 엄청 황당하다는 표정과 말투였어요. ㅎㅎ
그런데 ‘좋아하던‘ 이라고 과거형을 쓰신 이유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씀이신가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3-03-29 1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쁜 가운데 적당한 긴장감이 있는 것을 즐길 수 있는 편이 좋지요.
저는 대중 앞에 서서 말하는 게 무섭고 스트레스 만당일 것 같아요.
말보단 글이 편해요. 수정이 가능하니까요.^^

감은빛 2023-04-07 02:03   좋아요 1 | URL
페크님. 저도 가끔은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두렵기도 합니다.
또 긴장해서 손을 떨거나 목소리가 떨리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긴장을 조금 해야 결과가 더 좋은 것 같더라구요.
지난 월요일에도 한참 강의를 하다가 문득 깨달았는데,
제가 포인터와 마이크를 쥐지 않은 왼손을 떨고 있더라구요.
아, 나 지금 살짝 긴장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2023-04-07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