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산군도, 부안 내소사, 고창 선운사


어린이 날이 포함된 연휴라 아이들과 어디 놀러 갈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했으나, 아이들은 이미 애들엄마와 놀러 갈 예정이라고 했다. 아, 한발 늦었구나. 나는 그냥 조용히 혼자 집에서 영화나 보고, 책이나 읽어야지 생각했다. 그런데 연휴 거의 직전에 친한 친구가 전북 고창에 귀농한 친한 형님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그 형님이 귀농하시기 전에 한동안 제법 친하게 지냈었는데, 몇 해 전에 귀농하신 이후로는 한번도 찾아뵙지 못했었다. 반면 놀러 가자고 제안했던 친구는 그 형님과 잘 알지 못했는데, 동네 등산 모임에서 어쩌다 그 형님과 친한 다른 사람 덕분에 그 집에 놀러 갔었다고 했다. 나는 이미 연휴에 집에서 조용히 지내야지 라는 생각을 했던 터라,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는데, 그 형님과 몇 해 동안 연락을 못 하고 지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연락을 드려봤다. 형님은 반갑게 전화를 받으시고는 언제든 편하게 놀러 오라고 하셨다. 일단 날을 잡고 나서 함께 놀러 갈 다른 사람들이 혹시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여행을 제안했던 친구는 사람들을 더 모아서 가려고 친한 사람들 중심으로 더 제안을 해봤는데, 거의 연휴 직전이어서 다들 이미 다른 일정이 있었다고 했다.


결국 그 친구와 단 둘이서 아침 일찍 만나서 출발했다. 여행 전날 밤에 악몽을 꾸느라 같은 악몽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꾸면서 몇 번이나 잠을 깨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상태로, 피곤한 몸으로 출발했다. 거기에 연휴 시작 시점부터 계속 얼굴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이 심했다. 통증 부위가 살짝 더 부어올랐고, 여러 형태의 통증들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며 사람을 괴롭혔다. 게다가 통증 부위가 바로 눈 밑이라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눈을 감고 있으면 피곤한 상태에서 잠이 들어버릴까봐,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혼자 잠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혼자 속으로만 통증을 견디며 보냈다. 


고창까지는 먼 길이다. 중간에 운전하던 녀석이 피곤하다며 휴게소에 들렸을 때, 운전 교대를 제안했다. 녀석 혼자 오가는 길을 다 운전하게 할 수는 없으니, 체면 상 내가 한 번 정도는 운전을 해야 할텐데, 돌아오는 길은 녀석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려가는 길에 내가 운전을 한 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전대를 잡았는데, 낯선 차에 익숙해지는데에도 시간이 필요했고, 계속되는 통증 때문에 운전에 집중하기가 어렵기도 했고, 통증이 자꾸 눈에 영향을 미쳐서 혹시라도 내가 실수를 하게 될까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일단 핸들이 좀 빡빡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엑셀과 브레이크 유격에 익숙해지는데에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 옆에 앉은 친구는 코를 골면서 잠이 들었다. 나는 통증에 시달리면서, 눈이 불편해도 일부러 잠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건만.


고창의 형님은 낮에 농사일과 소 키우는 일을 하셔야 해서 저녁이나 되어서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아침 7시쯤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막히지 않아서 수월하게 군산까지 내려왔다. 친구는 우선 새만금 방조제로 연결된 고군산군도를 가보자고 했다. 녀석이 얼마 전에 다녀왔었는데, 제법 좋았다고 했다. 나는 사실 새만금 간척 사업 반대 운동에 참여했었다. 내가 공저자로 참여했던 첫 책 [100인의 책마을]에 실었던 원고에도 그 이야기를 썼었다. 당시 나는 새만금 투쟁이 결국 법정 싸움으로 옮겨졌다가 실패하면서 그 결과로 인해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 투쟁 이후로 새만금을 직접 찾아가지 않았었다. 4공구 기습 점거 투쟁 이후 20년이 훌쩍 지났다. 나와 함께 간 친구는 방조제로 인한 환경오염과 다양한 문제들이 있지만, 한편으로 방조제 덕분에 고군산군도를 차로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며, 나를 거기로 이끌었다. 군산에서 방조제로 조금 들어갔다가 선유도 방향으로 빠져서 신시도, 무녀도를 지나 선유도에 차를 대고 보행자 전용 다리인 스카이워크(왜 이름을 영어로 이렇게 촌스럽게 지었을까>)를 건너서 장자도로 들어갔다. 풍경이 멋졌다. 그곳에서 느긋하게 경치를 감상하며 걸으면서도 나는 그 옛날 새만금 4공구의 그 날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전면 재검토를 공약으로 걸었던 노무현 정부는 환경파괴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커지자 막바지에 전국의 거의 대다수 덤프 트럭을 동원해 밤낮없이 바위와 흙을 퍼날라 부어서 원래 예정된 공사기일을 크게 앞당겨 물막이 공사를 끝낼 참이었다. 우리 활동가들은 전국적으로 비상선언을 하고 부안성당에 모였다.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어 몸으로 물막이 공사를 막다가 끌려 나오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을 했지만 결국 빠른 시간 안에 바위와 흙으로만 방조제 뼈대를 쌓아서 물막이 공사가 끝나버렸다. 이에 우리 활동가들은 전국에서 약 80여명의 활동가들을 모아 비상 작전을 실시했다. 4공구 기습 점거 및 해수유통 행동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활동가들은 밤까지 작은 읍내인 부안에 직접 들어오지 않고 인근에 잠복해 있다가 자정이 넘어서 부안성당에 모였다. 새벽에 새만금 개척사업에 반대하는 어민들의 협력을 얻어 어선 여러 대를 얻어 타고 4공구 물막이 공사가 막 끝난 방조제 위에 도착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우리는 삽과 곡갱이로 바위와 흙을 파나가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걸렸을까 해가 뜨고 사방이 밝아질 무렵 방조제 위쪽을 파내어 다시 해수를 유통 시켰다. 막혔던 물길을 임시로 다시 뚫었던 것이다. 그 무렵 소식을 접한 언론사 기자들과 시공사와 농어촌공사 직원들이 몰려왔다. 곧이어 전경들이 엄청나게 몰려왔고, 이어서 새만금 개발 추진협의회(새추협)라는 이름을 앞세운 용역 깡패들이 나타났다. 깡패들이 타고온 배는 물대포가 장착되어 있어서 바닷물을 강하게 뿌렸다. 경찰 물대포도 정통으로 맞으면 몸이 뒤로 밀리고 휘청거리듯이 그 해수 물대포도 엄청 강해서 정통으로 맞으면 몸이 휘청 거렸다. 얼굴이라도 맞으면 소금물이라 눈이 따갑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와중에 깡패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를 바닷물에 빠뜨리려고 했다. 우리는 여성 활동가들을 안쪽으로 배치하고, 남성들이 여려겹으로 바깥에 둥글게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더러 머리채를 잡히거나 수염을 잡혀(중년의 남성 활동가들은 수염을 기른 이들이 제법 있었다.) 끌려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 깡패들이 대놓고 폭력을 휘두르는데도 전경들은 그 주위에 도열해 그 광경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점심 무렵이 되어 전북환경연합에서 빵과 물 등 우리가 먹을 것들을 배로 싣고 왔는데, 깡패들이 이 음식들을 빼앗아 죄다 바다에 던져버렸다. 


용역들이 몇 차례 우리를 뒤흔들어 놓다가 지쳤는지 빠져 있는 동안 이제는 전경들이 우리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수였고, 전경들은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으므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고, 우리가 전경들에게 밀려 뒤로 또 뒤로 물러나는 동안 저 멀리서 포크레인이 나타나더니 우리가 새벽에 몇 시간이나 걸려서 삽과 곡갱이로 파서 해수를 유통시켜 놓은 것을 다시 메우기 시작했다. 우리가 손으로 팔 때에는 몇 시간이나 걸렸지만, 포크레인은 채 몇 분이 걸리지도 않아 모두 원상태로 만들었다. 허무했다. 당시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혹은 시민사회 수석이 새만금 재검토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할 때까지 이 방조제를 점거하고 나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각오로 새벽에 불시에 기습 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하지만 채 24시간도 버티기 전에 많은 활동가들이 지치기는 했다. 용역 깡패들은 계속 폭력을 휘둘렀고, 여성 활동가 두 명이 그들이 던진 물병 등에 맞아 실신해서 병원으로 실려 나갔다. 그럼에도 전경들은 깡패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우리만 괴롭혔다. 깡패들이 빠지면 전경들이 달려들고, 전경들이 빠지면 다시 깡패들이 달려들었다. 밤새 삽질과 곡갱이질이라는 고된 노동을 하고, 계속 오락가락하는 비를 맞아 온 몸은 쫄딱 젖어 있었으며, 아침이 되자마자 깡패들과 전경들의 폭력에 번갈아 시달리며 몇 시간을 지나는 동안 다들 지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비록 점심으로 전달 받으려던 빵과 물도 죄다 빼앗겨 버려졌지만, 우리는 더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랑 소통하던 서울의 상황실에서는 청와대가 처음에는 당황하고 난처해하다가 시간이 갈 수록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며, 더 무리하지 말고 철수하라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연차가 제법 있는 선배 활동가들은 다들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우리가 어떻게 여기 들어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나갈 수는 없다고. 비록 밤이 춥더라도, 하루쯤 더 굶더라도 이렇게는 나갈 수 없다고 버티자고 하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나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하지만 협상은 우리 몫이 아니라 서울의 상황실에 맡겨진 임무라고 했다. 나갈 수 없다고 버티던 선배 활동가들도 결국 위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나보다. 둘째날 저녁이 다 되어서 우리는 긴 방조제를 터덜터덜 걸어서 나갔다. 전경들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간다고 하니 친절하게 길을 터줬다. 용역들은 점심 시간에 배를 타고 나가서 밥을 먹고 돌아온 후로는 그렇게 심하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다가 철수한 후였다. 오락가락 비를 계속 맞기도 했고, 안 하던 곡괭이질을 하느라 지치기도 했고, 거기에 용역 깡패들과 전경들에게 하루종일 시달린 탓에 너무 너무 힘들었지만, 그것보다도 이 고생을 하고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그냥 내 발로 멀고 먼 거리를 걸어서 방조제를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허무하고 속상했다. 그때 그 감정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고군산군도를 대충 둘러보고 차를 타고 나와서 다시 방조제 위를 지났다. 지도를 보며 내가 당시에 기습 점거했던 4공구가 어디쯤일지 가늠해보려고 했는데, 잘 모르겠더라. 부안에서 접근하는 방조제 입구에서 차로 얼마나 걸리는 곳일까? 당시 내가 걸어서 나오는데 얼마나 걸렸을까? 1시간쯤이었을까? 확실히 30분 보다는 길었던 것 같다. 방조제 위를 차로 지나며 계속 그날의 그 감정에 곱씹어 보았다. 씁쓸했다.


그날은 어린이날이자 석가탄신일이었다. 우리는 내소사 앞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내소사를 느긋하게 구경했다.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내소사는 처음 와봤는데 절이 참 좋았다. 특히 대웅전이 웅장하기도 하고 아기자기하게 예쁘기도 하고 정말 멋있었다. 예전부터 문화유산 답사도 다니고 하면서 절을 제법 다녀봤는데, 이렇게 멋진 대웅전은 몇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소사를 적당히 즐기는데 비가 오락가락 했다. 아까 장자도에 있을 때부터 비가 어중간하게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타고 다시 고창 선운사로 향했다. 선운사는 15년? 16년 전쯤에 어느 소설가와 시인의 결혼식 때문에 한 번 왔던 곳이었다. 당시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았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진입로를 걸어가다 보니 조금씩 기억이 났다. 진입로의 기억과 풍경이 좋아서 비를 맞으면서도 기분이 괜찮았는데, 절에 들어서자마자 확 기분이 나빠졌다. 경내에서 조그맣게 무대를 만들어 조잡한 스피커로 뽕짝 반주를 틀어놓고 노래자랑 같은 행사를 하고 있었다. 스피커가 조잡하다 보니 반주의 음질이 형편없었고,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 실력도 참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좀 차분하게 조용하게 절을 즐기다 가고 싶었는데, 시끄러운 뽕짝 음악 때문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서둘러 대웅전과 그 주위를 휘휘 돌아보고는 그냥 나왔다. 그 와중에 점점 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대법원의 이례적으로 빠른 판결과 고등법원의 파기환송심 재판 연기


이번에 나와 함께 고창에 다녀온 친구는 지역 녹색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녀석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재명을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서 나와 언쟁을 벌이곤 했다. 나는 이 친구의 그런 성향 탓에 몇 차례 부딪힌 후로는 가능하면 민감한 주제를 피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서울을 나서는 동안 라디오로 시사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계속 이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나는 사실 이재명이나 저쪽 빨간당 후보들이나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번 판결에 대해 크게 불만은 없었다. 다만, 이례적으로 아니 말도 안되고 빠르게 판결을 내린 대법원의 태도는 무조건 비판 받을 만 했다고 여긴다. 내가 법조인은 아니니 2심의 판결과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따질 입장은 아니고, 그저 태도의 문제로서 비판하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데, 대법관들이 이재명을 제거하려고 정치적 개입을 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까지는 납득하기 어렵다. 그가 뭐라고 떠들던 나는 그저 듣고 있었다. 앞서도 말했든 나는 잠을 못 자서 컨디션이 나빴고, 심지어 얼굴 통증이 심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연휴 내내 어디를 가도 이 이야기 밖에 없었다. 식당에 앉아 있을 때에도 옆 테이블과 그 옆 테이블 모두 이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고, 온라인에서도 다들 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 고등법원에서 파기환송심을 대선 이후로 연기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이제서야 조금은 열기가 가라앉으려나. 어쨌거나 김문수와 한덕수가 단일화를 하더라도 이재명이 당선되는 것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저 사회대전환 연대회의 권영국 후보가 무사히 후보 등록을 마치고 완주하여, 몇 퍼센트의 득표를 올릴 것인지가 이번 대선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다. 권영국 후보가 없었다면 이번에도 투표장에서 그냥 무효표를 만들어야 했을텐데, 그나마 찍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다. 그가 기탁금을 잘 모아서 후보 등록을 잘 마친다면 말이다.


달리기 이야기


지지난 주에 달리기 모임에서 함께 달리는 형과 가볍게 30분 달리기를 하면서 하나 느낀 점이 있었다. 이 형이 꽤나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날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둘이 종종 30분 동안 6킬로 정도 달리기를 하면 우리 보다 빠른 사람들을 만날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혼자 10킬로미터에서 20킬로미터 사이를 긴 시간 달리다보면 나보다 빠른 사람들을 제법 만나게 되는데, 신기하게 그 형이랑 달릴 때에는 그닥 보지 못했었다. 이 형은 본 실력은 나보다 훨 빠르지만, 나랑 같이 달릴 때에는 가볍게 거의 내 페이스에 맞춰 달리곤 했었다. 그러다 두어번 우리를 추월해가는 젊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그게 아마 3월 초였을 것이다. 우리가 3킬로 지점을 찍고 돌아오고 있을 때 아마 한 4킬로에서 5킬로 사이 정도에서 아주 빠르게 우리를 추월해 가는 키 크고 체격이 좋은 남성이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젊어 보였다. 그 형은 나를 돌아보면 "어떻게? 따라가 봐?"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형, 우리 못 따라가." 라고 말했다. 나는 겨울 동안 짧은 거리만 달리고 장거리 달리기를 쉬어서 그만큼 체력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 보기에 그 형도 그리 달라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린 이제 다 늙은 사람들이라 젊은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형은 아마 혼자였다면 따라가봤을텐데, 내 눈치를 보느라 못 간 것이 아쉬웠는지 여러 차례 나를 돌아보며 눈짓을 보냈다. 나는 계속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고 약 한 달 반 정도 지난 지지난 주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3킬로 지점을 찍고 돌아와 대충 4킬로 근처였다. 젊은 여성이었다. 우리를 추월하기는 했지만, 아주 크게 차이가 날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우리를 제친 후에 우리와 비슷한 속도로 조금 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때 앞서 뛰던 이 형이 또 나를 돌아봤다. "어때? 이번엔 따라가 봐?" 라고 물었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으며 "형, 아마 우리 이번에도 못 따라갈 걸." 라고 말했다. 이 여성은 그렇게 빠르게 치고 나가다가 저 멀리서 다시 속도를 줄였다. 어쩌면 인터벌 훈련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분이 속도를 확 줄이자 우리가 금방 따라잡았다. 아마 형이 무의식 중에 속도를 조금 올렸으리라. 그렇게 한동안 비슷하게 가다가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가 다시 속도를 줄이는 방식으로 그 분과 우리는 꽤 긴 거리를 비슷하게 달렸다. 우리는 우리 페이스에서 무리하지 않고 일정하게 달렸고, 그는 빠르게 뛰다가 속도를 확 줄이기를 반복했는데, 거의 비슷한 페이스가 나왔다. 그러다 아마 5.5 아니 한 5.3 정도 지점에서 이 분이 다시 빠르게 속도를 높였는데, 이 형이 앞에서 뭐라고 소리를 치더니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 뭐라고 하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나도 속도를 높여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아, 근데 이 형의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미 조금 지쳤던 나로서는 따라가기가 조금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전력질주 해보는 거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신나게 달리기는 했다. 그리고 뒤쳐지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 이 형 뒤를 따라다닌 것이 이제 7개월쯤 되려나? 겨울 동안 안 달렸으니 거기서 3달을 빼면 4개월? 이젠 이 형이 속도를 맘껏 내도 뒤쳐지지는 않고 따라갈 정도는 되었구나. 아직 이 형을 앞지르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목적지까지 전력질주를 마치고 들어보니 아까 그 분을 따라가려고 속도를 냈던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빨라진 형을 쫓느라 그 여성 분은 신경도 못 써서 어떻게 된 것인지 몰랐다.


오랜만에 15 아니 거의 16킬로


연휴 내내 얼굴 통증에 시달리느라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 고창으로 출발하기 전에는 만약 통증이 좀 나아지고, 컨디션이 회복되면 짧게라도 달려보려고 런닝복을 따로 챙겨갔었는데, 꺼내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저녁 8시에 일을 마치고 달리기를 하러 나섰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15 정도 달려볼 생각이었다. 컨디션이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달리기를 제법 쉬었던 만큼 근육 피로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 11월 중순에 15에서 19 사이의 거리를 종종 뛰었던 것에 비하면 올해는 두 차례의 10킬로 대회를 제외하면 대부분 5~6 킬로 수준으로만 뛰었다. 딱 한 번 대회 직전에 8킬로를 뛰었던 것이 대회를 제외하면 가장 먼 거리였다.


오늘은 몇 차례 시도해다가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었던, 소위 말하는 존2 달리기, 혹은 LSD를 해볼 생각이었다. 시작부터 평소보다 훨씬 느긋하게 뛰었다. 심박수가 올라가지 않게, 호흡이 가빠지지 않게 신경쓰며 가볍게 뛰려고 했다. 평소 즐기던 롤링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툭툭 발을 옮겼다. 해가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서 날이 너무 추워졌다. 시작 전에 가볍게 몸을 풀면서 조금 떨렸는데, 딱 2킬로 정도 뛰니까 몸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3킬로 지점부터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계속 550 페이스를 유지했다. 평소 아무생각 없이 뛰면 거의 530 페이스가 나오는데, 이렇게 일부러 천천히 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성향 상 일부러 느리게 뛰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다. 그래서 예전에 몇 차례 이 존2 훈련을 해보려다가도 실패하곤 했던 것. 거리가 늘어날 수록 속도를 올리지 않아도 조금씩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심박수가 빨라지길래 조금씩 속도를 더 줄였다. 이렇게 일부러 천천히 뛰니까 몸이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다. 암튼 6분대 페이스까지 느려졌을 때가 대략 5킬로미터를 지났을 때였다. 6과 7을 지나면서 다시 5분 후반 페이스로 돌아왔다. 7킬로를 지나 거의 8킬로가 다 되었을 지점에서 양화대교를 만났다. 여기를 찍고 돌아가면 15에서 16 사이 거리가 나온다. 조금만 더 갔다가 턴을 하면 16을 찍는데, 나는 그냥 여기서 돌기로 했다. 아주 잠시 하늘의 달을 찍느라 멈췄다가 다시 달렸다.


8을 찍고 9을 향해 달릴 무렵에 한 여성과 나란히 달리게 되었다. 그냥 보기엔 아주 가볍게 그렇게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달리는 것처럼 느꼈는데, 같이 달려보니 엄청 빨랐다. 와! 저렇게 조깅하듯이 뛰는데도 이렇게 빠르다고! 한동안 따라가보려고 속도를 높여보았다. 나는 지금까지 안 하던 롤링까지 하면서 속도를 올렸는데도 간신히 그 속도를 따라가는 정도였다. 신기했다. 롤링도 하지 않으면서 저렇게 빠른 자세라니. 저 분이 롤링을 하면서 더 속도를 높이면 대체 얼마나 더 빨라질까?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한동안 그를 따라가면서 짧은 구간 좋은 런닝 메이트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곧 턴을 해서 양화대교 방향으로 돌아가버렸다. 나는 뛰던 관성이 있으니 속도를 줄이지 않고 유지했다. 여기서부터 좀 신기했다. 앞서 말했듯이 한 7킬로 정도까지는 550 정도 페이스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9킬로 지점에서 갑자기 페이스가 확 빨라졌다고 앱이 알려줬다. 520 페이스라고? 내가 지금 그렇게 빠르다고? 긴 거리를 600에 가깝게 뛰었으므로 지금 종합해서 520이 나왔다는 것은 현재 페이스가 4분대 페이스라는 뜻일 것이다. 내가 지금 그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다고? 그런데 왜 안 힘들지? 이상하게 크게 힘들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리고 10을 넘어서서부터 조금씩 체력이 다 되었음을 느꼈다. 지쳤다. 그런데 좀 신기했던 것이 지난 주까지 그러니까 4월까지는 후반에 지치기 시작하면 자세부터 무너져서 체력도 다 되었는데 자세까지 무너져 더 나쁜 상황이 되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분명 지쳤고 힘들었는데, 자세는 무너지지 않았다. 심지어 페이스도 그닥 떨어지지 않고 비슷하게 유지했다. 그런데 크게 힘이 들지 않았다. 이거 뭐지? 이게 소위 말하는 '러너스 하이' 상태인 건가? 10이었나 11이었나 이쯤에서 심지어 종합 페이스가 510을 찍었다. 말도 안돼! 절반 이상을 일부러 천천히 달렸는데, 그럼에도 지난 4월 초 대회에서 죽어라 뛰었던 수준의 페이스가 나온다고? 이거 앱이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이후로는 제법 힘들었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아주 조금씩 페이스가 느려지면서 달렸다. 13을 지나 14로 가면서부터 급격하게 발바닥이 아팠다. 물집이 생길 것 같은 느낌. 그제서야 내가 제대로 된 런닝화를 안 신고 평소 신는 저렴한 런닝화, 바닥이 두텁지 않은, 즉, 쿠션이 별로 없는 런닝화를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쿠션이 제대로 된 비싼 런닝화는 주로 10킬로 이상 뛸 때에만 신고, 평소 6에서 8킬로 정도 뛸 때에는 늘 이 신발을 신고 뛰었었다. 오늘은 아침에 나올 때 이렇게 본격적을 장거리를 뛸 생각이 없었기도 했고, 그냥 습관적으로 늘 신던 이 신발을 신었던 것이다. 이게 10킬로 미만일 때에는 발에 그렇게 충격이나 무리를 주지 않는데, 거리가 늘어나니 급속도로 발 상태가 나빠졌다. 그러고 보니 신발끈도 꽉 조이지 않았었네. 내 발보다 발볼이 조금 더 넓어서 신발 안에서 발이 조금씩 놀다보니 더 발바닥이 아픈 느낌이었다. 마지막 2킬로 정도는 정말 힘들었다. 여기서 페이스가 확 쳐졌다.


그래도 15.89킬로미터를 535 페이스로 뛰어서 1시간 28분에 들어왔다. 나중에 앱을 보니 10킬로미터 PB를 달성했더라. 기존 기록은 지난 4월 12일 양천마라톤 대회에서 50.29였는데, 오늘은 49.26으로 나왔다. 음, 이거 아무래도 오늘 앱이 좀 이상한 거 아닌가 의심이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달리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 땀을 씻고 잠시 쉰 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실은 발바닥이 아파서 바로 집까지 걸어가기가 어려워 일부러 사무실에서 글을 쓰며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다. 피곤하지만 기분은 좋다. 이제 발바닥이 좀 덜 아프니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면서 뭔가 가볍게 먹을 것을 사서 얼른 먹고 쉬어야겠다.


오늘도 정말 기분 좋은 달리기였다. 충분히 쉬어 준 후에, 다음 주에는 20킬로미터에 도전해볼까나.


아, 오늘 강양구 기자 페이스북에서 본 책 두 권을 올려둬야지. 조만간 구매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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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5-08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활동가 분들을 직접 본 것은 대추리였어요. 알라딘에서 알게 된 여성 활동가 두 분을 모시고 대추리까지 갔는데 도로 옆으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허허벌판 중간에 각종 깃발이 펄럭이는 그 곳이 외딴 섬처럼 고립되어 있더군요. 꽤 먼 곳에 차를 세우고 셋이서 철조망을 통과해서 들판을 전력질주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행히 그 날 행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아 비닐하우스에서 봉준호 감독, 가수 정태춘씨가 인사하는 모습도 보고요. 같이 간 두 분이 다른 활동가 분들과 인사하는 동안 마당에 쪼그려 앉아 바라보던 밤하늘도 떠오르네요. 다음 번에도 운전을 부탁받았는데 그 전에 대추리가 군 병력에 의해 진압되어 그 때가 마지막이 되었어요.

감은빛 2025-05-14 13:42   좋아요 0 | URL
제가 평택환경운동연합에서 활동하던 시기가 딱 미군기지 투쟁이 시작되던 때였어요.
그 당시 주민공청회 막으려고 평택에서 활동하던 활동가들이 총 출동했다가,
평택 경찰서 형사들에게 두들겨 맞고 끌려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안경도 깨지고 얼굴에 상처도 입었는데 보상도 전혀 못 받았어요.
당시에는 밥값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은 활동비를 받을 시기여서
비싼 안경 값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나중에 내부 사정으로 평택환경연합이 문을 닫고,
서울에 있는 다른 단체에서 일하던 시기에 본격적으로 미군기지 투쟁이 이뤄졌어요.
저도 당연히 자주 참여했었습니다.

대추분교를 철거해버렸던 여명의 황새울 작전 때에는 다른 일정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었는데, 늘 그것이 빚처럼 느껴집니다.
 

스페인 정전 대란


스페인과 포르투갈 일부 지역에서 정전이 일어나 긴 시간 동안 전기 없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신호등이 멈춰 차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전철이 멈춰버려 교통이 마비가 되었고, 전화기가 먹통이 되고, 카드 단말기를 쓸 수 없으니 사람들은 물건을 사지도 못하고 식사를 결제할 수 없었다. 밤이 되자 도시가 아니 온 나라가 그냥 깜깜해졌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우리는 전기 없이 살기 어렵다. 흔히 종말이나 좀비 창궐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 제일 말이 안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전기와 통신이 살아있는 점이다. 우리가 전기를 이용하려면 얼마나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른다. 전기는 아주 민감해서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지지 않고 한 쪽이 많아지고 다른 한 쪽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곧바로 블랙아웃으로 이어진다. 2011년 9월 15일에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생길 뻔 했었다. 그때 전력거래소에서 다급하게 무작위 순환 단전을 실시하지 않았다면, 전계통 블랙아웃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지금 스페인 정전처럼 당시 우리나라도 전체 정전이 일어났을 것이다. 당시 사고에 대해 사후에 그리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지는 않았는데, 전력예비율이 낮았던 이유는 발전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요 발전소들이 일제히 점검에 들어가 있었다는 언론 기사를 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그 일을 계기로 대규모 석탄화력발전소들을 마구 지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손 꼽히는 기후 악당으로 등극했다.


사실은 발전소가 부족한 것이 전력예비율과 공급예비율을 잘 조절해 운용하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는데, 이걸 빌미로 온실가스를 뿜어내는 석탄화력발전소를 잔뜩 짓는 정부라니. 내란으로 물러난 윤석열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후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핵발전을 떠들어 댔는데, 핵발전이야 말로 이 전력 계통망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근원이다. 핵발전소는 한번 핵연료봉을 투입하면 몇 년 후에 그 연료봉을 꺼낼 때까지 발전소를 멈출 수가 없다. 하루 24시간 내내 돌아간다. 그래서 과거에 핵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야간에 써야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지니까 심야 전기를 싸게 공급했었다. 그리고 밤에 싼 전기로 물을 산 정상에 끌어 올리고 낮에 전기가 필요할 때 그 물을 떨어뜨려서 발전을 한다는 요상한 개념의 양수발전소가 우리나라에 많은 이유도 이 핵발전소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가동하면 끄지도 못하는 핵발전소는 유연해야 할 전력망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번 스페인 정전에 태양광 발전 탓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태양광은 소위 말하는 변동성, 날씨에 따라 변하는 출력량 때문에 전력망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태양광은 일기예보를 예측 가능하다. 그 유동성 만큼 천연가스 발전을 늘리거나 줄이면 충분히 대응이 가능하다. 게다가 ESS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이번 정전의 원인은 전력망을 통제하는 발전회사의 잘못일 것이다. 개별 발전소를 운영하는 태양광 발전 사업자 탓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을 에너지정의행동 이헌석 대표는 우리나라 통신 시장에 빗대어 SK, KT, LG 와 같은 통신회사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지 애플이나 삼성 같은 개별 제조사 탓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한전이라는 공기업이 송전과 배전을 다 맡고 있고, 발전도 한전의 자회사들이 대체로 맡고 있어서 전력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국민들이 거의 없다. 다른 나라는 발전회사, 송전회사, 배전회사 대부분 민간 기업들이고, 개인이 직접 특정한 발전회사, 송전, 배전회사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을 모르기 어려울 것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지만, 오늘은 좀 바쁘니 이 정도로 하고. 전력망과 블랙아웃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들은 우석훈 박사가 쓴 소설 [당인리]를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우석훈 박사가 무슨 소설을 썼나 하고 의아했는데, 읽어보니 사전 조사를 많이 하고 쓴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여러 해 전에 무슨 티비 프로그램 촬영 때문에 우 박사님과 단둘이 재생에너지 현황에 대해 짧게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에너지 분야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는데, 이후에 공부를 많이 하셨나 보다.

















죽음과 그 곁의 노동자들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내 주위 지인들도 다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장례식장에 갈 일이 많아진다. 특히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환절기에 더욱 그렇다. 얼마 전에도 장례식장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최근 몇 년은 뵙지 못했지만, 우리 조합 초기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의 모친상 연락이 왔다. 현재 조합의 임원들은 잘 알지 못하는 분이었다. 초기 임원들 대부분이 현재는 임원이 아니시니. 그래서 그 분을 아는 내가 대표로 조문을 가기로 했다. 혼자 가기는 조금 그래서 현재 임원 중에 제일 친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 장례식장에서 집이 엄청 가까운 지인을 데리고 갔다. 조문을 하면서 실수가 있었다. 기독교 식으로 국화를 얹고 기도만 해도 되는 상황이었던 것 같은데, 습관 때문에 그만 절을 두 번 하고 말았다. 암튼 절을 하고 일어서서 상주와 인사를 나누는데, 그 선생님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떻게 오셨냐고 물으셨다. 아, 장례식장으로 오는 길에 그 생각이 들기는 했었다. 그 분을 못 뵌지 제법 오래 되었고, 나는 최근에 장발에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으실테니 어쩌면 못 알아보실 지도 모르겠다 라고. 암튼 내 이름을 말씀 드리고 우리 조합 이름을 얘기했더니, 그제서야 아~~ 아~~~ 하면서 반가워하셨다.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다고 못 알아보겠다고 하셨다. 


장례식장에 오면 가끔 우리 부모님을 모실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닥칠 일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최근에 희정 작가님이 신간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조업과 관련한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르포인 것 같다.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여기에 올려본다.
















이 외에도 할 말이 많은 날인데, 오늘은 너무 바쁜 날이기도 하다. 금요일에 또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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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5-02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너지는 발전보다는 저장 기술의 한계가 가장 큰 난관인 것 같습니다. 태양이 작렬하는 곳, 조수간만의 차가 큰 곳, 미친듯한 바람이 부는 곳은 많고 또 낙후한 지역일텐데 , 무한정한 대체에너지 자원이 결국 저장 기술의 한계로 그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 같네요.

감은빛 2025-05-08 19:25   좋아요 1 | URL
잉크냄새님, 재생에너지는 꼭 그렇게 태양이 작렬하고, 미친듯이 바람이 부는 곳이 아니어도 됩니다. 조력발전소는 조수간만의 차가 큰 곳이어야만 가능하기는 한데, 이건 기술 자체가 가성비가 그리 좋지 않습니다.

태양광의 경우 온도의 영향도 크게 받기 때문에 사막처럼 태양이 작렬하는 곳에서는 오히려 발전 효율이 많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그 전기를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끌고 오느라 돈이 많이 들죠. 저장의 문제가 아니라 송전과 배전의 문제입니다. 그냥 우리가 사는 집 옥상에, 지붕에 설치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풍력도 바람이 쎈 곳에서 발전이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 곳이 더 효율이 좋습니다. 풍력은 육지보다는 해상 풍력이 훨씬 더 안정적인데, 역시나 전기를 끌어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물론 저장 기술의 한계도 있습니다. 낮에 생산한 전기를 밤에 사용하려면 저장해야 하니까요. 다행히 리튬이온 배터리 기술이 발달하면서 저장 기술이 점점 나아지고 있어요. 아직은 한계가 있지만요
 


시작은 달리기 이야기로


우리 동네 의료협동조합에서 올해도 건강실천단 활동을 한다. 올해가 3년차인가? 일단 나는 3년째 참여하고 있다. 첫해는 달리기 모임, 두 번째였던 작년에는 하루 시 한 수 읽기 모임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인 올해는 무려 3개의 모임에 참여한다. 작년에 이어 하루 시 한 수 읽기 모임은 그대로. 그리고 올해 달리기 모임은 매일 30분 달리는 것이 모임의 기본 룰이라고 했다. 아! 매일 30분이라고! 이거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신청했는데. 일주일에 5번 이라던가, 암튼 가끔은 쉬어줘야 할텐데. 현재 내 체력으로는 매일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강도를 조절하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평소에 강도를 조절해 일부러 천천히 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이번에 달리기 모임이 이거 하나 밖에 없어서 들어왔다는 다른 사람도 매일 달리는 것은 무리라고 의견을 남겼다. 마침내 모임지기가 각자 본인의 몸 상태에 따라 가능한 만큼 달리는데, 가능하면 매일 달려보자는 의견이었다고. 88일 동안 매일 달린 사람은 어쩌면 모임지기 한 명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 생각이 들자, 나도 조금 무리라도 같이 달려서 두 명으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첫날 30분을 달리자마자 곧바로 그 생각을 지웠다. 너무 힘들었다. 나로서는, 내 페이스로는 매일 달리기는 절대 무리다.


첫날이었던 22일 화요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지구의 날이라서 그랬는지 비가 왔다. 비가 미세먼지를 씻어주고, 가뭄에 시달리는 봄을 적셔줬다. 그날 저녁에는 아이들을 만났다. 애들 엄마와 작은 아이가 새로 이사 간 아파트 근처에는 아주 큰 공원이 있다. 예전에 살던 곳에도 바로 근처에 큰 공원이 몇 개 있었다. 정말 파주에는 큰 규모의 공원이 많다. 그리고 최근에 개통한 GTX 종착역인 운정중양역에서 그리 멀지 않다. 운정중앙역에 내려 도로를 따라 조금 걷다가 만나는 공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면 금방 그 아파트를 만난다. 몇 차례 걸어 다니면서 이 공원이 달리기 하기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건강실천단 첫 날이었던, 지구의 날 밤에 집으로 돌아오기 전 그 공원에서 30분 달리기를 했다. 큰 아이는 그 공원의 한쪽 끝에서 버스를 타고 원룸으로 돌아가는데, 공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외진 곳 인데다, 밤이라 애들 엄마는 늘 내게 큰 아이가 버스 탈 때까지 지켜봐 달라고 했었다. 그날도 아이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달렸다. 한동안 불광천만 달리다가 아주 오랜만에 다른 곳을 달리니 색다른 기분이 들어 좋았다.


예전에 짧은 거리를, 그러니까 2~3 킬로미터 정도만 달렸던 시절에는 여기저기 아무 곳에서나 달렸다. 우리 동네에는 큰 공원이 아예 없고, 적당히 달릴 곳이 거의 없다. 나는 동네 골목길들을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내가 운영했던 달리기 모임에서는 주로 혁신파크에서 달리기를 했다. 그러다 작년 여름부터 장거리 달리기, 적어도 5~6 킬로미터 이상을 달리기 시작하면서는 그 정도 거리를 달릴 곳이 불광천 밖에 없어서, 매번 불광천을 달렸다. 


불광천을 달리는 것은 장단점이 있다. 천변 산책로를 따라 한강까지 연결이 되니 10킬로미터 이상 20킬로미터 이상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거리를 늘려 달릴 수 있다. 달리는 동안 신호를 기다릴 필요도 없고, 산책하는 사람들과 자전거들 때문에 조금 붐비는 시간대만 피하면 한가로운 길을 달릴 수 있다. 단점은 방금 말한 사람들과 자전거들이다.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대에는 달리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리고 매번 같은 곳을 달리다 보니 익숙함과 함께 지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 일부러 거리를 확 늘려서 멀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도 그런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이번에 파주에서 공원을 달려보니 정말 재미있었다. 일단 달리는 경로를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정말 다양하게 만들 수 있었다. 외곽으로만 돌 수도 있고, 중앙을 가로 질러 갈 수도 있고, 외곽과 안쪽 산책로를 섞어서 돌 수도 있고, 방향을 반대로 틀어서 오르막 길을 반대로 오르내리도록 바꿔줄 수도 있고. 하나의 길을 한 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같은 길을 돌아와야만 하는 단조로운 불광천에 비해 이 공원은 정말 재미있었다.


다만 불광천을 뛰고 나면 잠시 거점에서 세수하고, 물을 마시며 쉬다가 집까지 걸어서 돌아오면 되는데, 파주에서 공원을 뛰고 나면 대중교통을 통해 돌아와야 하는데, 땀에 흠뻑 젖은 몰골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30분 달리기를 마치고 세수를 하고 바람에 땀을 말리고 운정중양역으로 향하기는 했지만, 분명 내 몸에서는 땀 냄새가 났을 것이다. 아무리 평소 땀 냄새가 안 나는 편이라고 이야기를 듣긴 했어도, 그래도 바로 옆에 누군가가 앉는다면 냄새가 안 날 수 없을 것이다. 평소 밤 11시가 넘어서 운정중앙역에서 전철을 타면 사람들이 거의 없기는 했는데, 어떤 날엔 한 칸에 나 혼자 타고 돌아온 적도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며 역으로 갔는데, 그날 따라 사람들이 많았다. 어쩌면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때는 비교적 초기라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암튼 가는 도중에 좌석이 거의 다 찼고, 결국 내 옆에도 누군가 다른 사람이 앉았다.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옆 자리의 사람은 내가 내릴 때까지 특별히 불편해하거나 불쾌해하는 기색이 없었지만,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불편했을 수도 있겠지.


둘째 날이었던 어제는 불광천을 달렸다. 저녁 8시까지 매장을 보는 날이었는데, 마침 매장 안 테이블에 책 모임 사람들이 9시까지 모임을 하겠다고 했다. 예전에는 그 분들이 알아서 매장 문을 잠그고 가시라고 안내하고 나는 퇴근 했었지만, 어제는 나도 할 일이 남아있어서 그냥 9시까지 매장을 보면서 일했다. 책 모임을 마친 분들이 뒤늦게 매장에서 몇 가지 제로웨이스트 물품들을 구매하고 나서, 달리기를 하러 갔다. 책 모임에 속한 분 한 분과 일부러 달리기를 하려고 오신 분이 또 한 분. 이렇게 여성 두 분도 달리기를 하신다고 해서 같이 30분 달리기를 했다. 각자의 속도가 다르니 출발 지점에서 동시에 출발해서 딱 30분 되는 시간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처음에는 두 분이 어느 정도 달리시는지 궁금해서 잠깐동안은 함께 달려보면서 자세를 좀 봐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기엔 길을 막으며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 두 분의 속도도 예상보다 많이 느렸다. 그냥 내 페이스 대로 달려야겠다고 생각을 바꾸고 앞으로 치고 나갔다.


첫날 파주에서는 540 페이스로 5.4킬로미터를 달렸고, 둘째 날 불광천에서는 539 페이스로 5.4 킬로미터를 달렸다. 일부러 의식한 것도 아니고 속도는 계속 들쭉날쭉 변했는데, 결과는 거의 똑같이 나왔다. 요즘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달리면 대체로 530에서 540 정도 페이스로 달리게 되는 것 같다. 거리가 3킬로 정도 되면 몸에 열이 오르며 페이스가 올라 510 이나 500 까지 올랐다가, 나중에 돌아오는 길에 조금씩 지치면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540 에서 550 정도까지 떨어지는 듯. 마지막까지 여기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결국은 전체 페이스는 540 정도가 만들어 진 것 같다. 전날 뛰고 연달아 뛰는 거라서 둘째 날이 더 힘들 줄 알았는데, 첫날이 훨씬 더 힘들었다. 둘째 날은 그냥 달릴 만하다고 느꼈다. 뒤에 일정이 없었다면 아마 거리를 늘려 한 8킬로미터 정도 달려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냥 딱 30분에 맞춰 끝냈다.


그리고 3일째인 오늘은 하루 쉴 예정이다. 아침에 고민을 좀 했다. 런닝 복장을 챙겨 나갈 것인지 말 것인지. 외부 일정이 없는 날엔 아침에 그냥 런닝 복장 그대로 출근하기도 하는데, 오늘은 아침에 구청 공무원들과 면담이 잡혀 있어서 평상복을 입고 나와야 했다. 오늘은 저녁까지 매장을 보고, 마치고 곧바로 워크숍에 참여해야 한다. 워크숍이 끝나는 시간은 아마 9시 반. 뒷 정리를 하고 나면 아마 10시. 어제보다도 더 늦은 시간이다. 그리고 내일은 새벽에 일어나 먼 길을 가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달리기는 무리가 될 것 같았다.


요즘 계속 평일에는 잠이 모자라고, 주말에 몰아서 자고 있다. 그냥 출퇴근만 하는 것도 피곤한 일인데, 매일 달리기를 하려면 체력을 더 길러야 할 것이다. 아마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해나가다 보면 점점 익숙해지긴 하겠지.


시 쓰기와 글쓰기


건강실천단 첫 날 달리기를 하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제목으로 시를 하나 써보고 싶다고. 달리면서 머리 속으로 시를 써봤다. 나중에 전철에 타서는 폰을 꺼내 메모장에 두드렸다. 빠르게 완성하고 문창과에서 시를 공부하고 있는 큰 아이에게 보여줬다. 큰 아이의 평가는 "시가 아니라 에세이 같아요." 였다. 음, 뭐 꼭 칭찬을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내 딴에는 시라고 생각하고 쓴 글이 '시'가 아닌 것 같다고 하니 조금은 실망이었다. 다시 읽어보니 내 기준에서는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날이 바뀌기 전에 '하루 시 한 수 읽기' 모임에 그 시를 공유했다. 그리고 큰 아이가 평가한 저 문장을 그대로 덧붙였다.


그리고 다음 날, 그 모임 구성원 중 꾸준히 달리기를 하시는 여성 선배님 한 분이 반응을 남겨주셨다.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 입장에서 달리기 '시'를 잘 읽었다고 쓰셨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시'라고 일부러 강조했다는 점. 예전에 철인3종 경기에도 여러 차례 나갔었다고 들었고, 평소에 시를 많이 읽으시는 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달리기와 시 이 두 가지 주제에서 그 분과 나는 연결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재치있는 반응에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나서 생각했다. 결국 나는 시를 계속 쓸 사람은 아니다. 다음날 생각해보니 큰 아이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선택한 단어와 문장은 시 보다는 산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평생 시 보다는 소설에, 산문에 더 관심이 있었고, 지금도 늘 산문을 쓰는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겠지.


아래는 엊그제 쓴 시


달리기 / 감은빛


긴장되는 마음, 

심호흡이 필요해

가벼운 제자리 뛰기

준비운동

그리고 출발선


자, 이제 가자

눈은 조금 멀리 전방을 주시하고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고

가슴과 허리를 쭉 펴고

발이 땅을 박차고 나간다

양 팔은 접은 채로 자연스럽게 흔들어

너무 뒤로 가거나 앞으로 가지 않게

아주 가볍게

옆으로 흔들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


자, 이제 조금씩 속도를 올려

빠르게 다가왔다가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내 온 몸으로 부딪쳐 왔다가 

아주 짧은 순간 안아준 후에 떠나가는 바람

양 옆을 스쳐가는 나무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숨이 헐떡여지기 시작하면

기분이 좋아질거야

세상 어떤 무엇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두 번에 걸쳐 힘차게 숨을 내뱉어

배 속 깊은 곳까지 숨이 닿았다가

내 온 몸으로 산소를 전달해야 해


호흡과 심장 박동과 발을 내딛는 속도를 맞춰

내 몸이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주목해

나는 온 세상의 기운을 받아 계속 달릴 수 있어


달리는 동안 나는 

힘차게 물을 박차 오르는 날치가 되고,

알래스카에서 뉴질랜드까지 쉬지 않고 날아가는

흑꼬리도요가 된다

명왕성을 지나 오르트구름을 향해가는 

보이저1호가 되기도 하고,

심해와 물 위를 오가는 개복치가 되기도 한다


점점 숨이 차고 발이 무거워지면

호흡을 깊게 유지하고

아주 조금씩 속도를 줄여야 해

바로 발을 멈추지 말고

저 멀리 목표를 정하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나가야 해


달리기를 멈추면

바로 앉거나 눕지 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걸어보자


땀이 식으면

이제 세상에 대한 사랑이 뜨겁게 차오를거야

지구를 사랑하고, 우주를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달린다

        


3월 말에서 4월 초에 혁신파크 공공성 지키기 투쟁 관련 글을 써 달라고 청탁을 받았었다. 그때 개인적인 감성을 많이 담아서 글을 써봤다. 이렇게 써도 되나 싶을 정도 개인적인 내용이 많았다. 친한 사람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지인 서너명에게 글을 보내며 한번 읽어봐 달라고 했다. 반응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대체로 개인적인 내용들은 좀 들어내고, 내가 잘 알고 있는 전문적인 내용들을 좀 더 보완하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그들에게 보내긴 했었다. 내가 봐도 글이 중구난방이었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쨌든 담고 싶은 느낌이 있어서 일부러 개인적인 기억들을 담아서 개인적인 감상을 넣었던 것인데, 그게 전체적인 글에서는 군더더기 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그들의 조언처럼 그걸 다 들어내 버리기는 싫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이 흘렀다. 마감일은 훌쩍 지났고, 나는 내가 원하는 느낌의 글을 쓰지도 못하고, 조언을 해준 사람들의 의견대로 글을 고치지도 못했다. 결국 시간에 쫓겨 적당한 타협점을 찾았다. 군더더기 처럼 느껴지는 내용을 조금은 과감하게 지우고 에너지 이야기 부분을 좀 더 보완했다. 하지만 전체 글의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정쩡한 느낌은 남아있었다. 그렇게 글을 보내고 나서는 미련을 버렸다. 나중에 기고 글을 올리는 과정에서 에너지 부분이 조금 더 보완된 수정안이 돌아왔다. 누군가 수정해준 덕분에 지인들의 조언들처럼 무게 중심이 그쪽으로 좀 더 가있었다. 뭐, 어차피 내 손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서 그대로 다 수용했다.  


이번 기고 글을 쓰면서 또 한 번 느꼈다. 나, 참 글을 못 쓰는구나. 그리고 의외로 내 주위에 글을 잘쓰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또 하나 느낀 것은 나이가 들면서 좀 쓸데없는 버릇과 고집들이 자꾸 생기는 것 같다. 글을 쓰면서 내가 익숙한 방식으로 쓰다 보면 꼭 서론이 길고, 잠시 엉뚱한 이야기로 샜다가 돌아오는 나쁜 버릇이 들어 있다는 걸 느낀다. 그냥 혼자 쓰고 읽을 거라면 어떻게 쓰던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특정한 목적과 특정한 독자를 상정하고 쓰는 글이라면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는 나는 자꾸 그 방식을 바꾸려는 생각보다는 그걸 통해서 색다른 느낌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재주는 따르지 않는데 엉뚱한 것을 이루고 싶어하는 바보 같은 모습이다.


오늘 원고료를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돈이 들어오면 아이들과 맛있는 것 사 먹어야겠다.


※ 목요일에 글을 써서 등록하기를 눌렀는데, 글이 올라가지 않았다. 금요일인 오늘 확인하고 다시 등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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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4-25 2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감성의 하루키의 수필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같은 글 모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감은빛 2025-04-30 20:09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늘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 덕분에 달리기 글을 꾸준히 모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희선 2025-04-26 0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 시 한 수 읽기를 하셔서 시도 쓰셨나 봅니다 요새 즐겁게 하는 달리기로... 날마다 30분씩 달리기 쉽지 않겠습니다 날마다 30분이나 한시간 걷기는 그나마 괜찮을 텐데... 날마다 못한다 해도 자주 달리시겠군요


희선

감은빛 2025-04-30 20:11   좋아요 0 | URL
사실 시를 써볼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는데,
그날 갑자기 달리기에 대한 시를 써야지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매일 달리는 것은 무리였어요.
무리하지 않고 꾸준히 달리기로 했어요.

희선님, 늘 고맙습니다!

카스피 2025-04-26 18: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일 달리는 것이 건강에 좋은 것 같아도 한편으론 무리하면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고 황영조 김독님이 말씀하시더군요.안전한 주법으로 건강하게 달리시기 바랍니다^^

감은빛 2025-04-30 20:12   좋아요 0 | URL
네, 카스피님. 저도 매일 달리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서 이삼일에 한 번씩 쉬기로 했어요.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25-04-27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격일 걷기 운동을 하는데 요즘은 1주에 4~5회 걷는 것 같아요. 강좌 수강, 운동 가는 날, 친정 가는 날, 장보는 날 등이 있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저는 6천보 이상 걸으면 무리라서 그 이하로 걸어요. 나이 들었거나 체력이 약한 이들은 격일 운동이 좋다고 하네요. 중요한 건 자기 몸컨디션에 알맞은 운동이겠지요.
시, 잘 읽었어요. 왜 시가 아닐까요? 산문시, 라는 것도 있는데 말이죠. 원고료 타시는 기쁨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신문 기고를 할 때마다 들어왔던 원고료가 참 좋았어요.

감은빛 2025-04-30 20:15   좋아요 1 | URL
큰 아이는 시를 전공하는, 그러니까 좀 더 엄격하게 시에 대해 고민하는 녀석이라, 본인 기준으로는, 본인이 생각하는 틀에서 시라는 범위에 애매하다는 뜻이라고 해석했어요. ㅎㅎㅎㅎ

6천보 이상 걸으면 무리가 되나봐요. 저는 거의 매일 8천보 이상 걷고, 달리기를 하는 날이면 대개 1만5천보를 넘어가요.

재미도 없는 긴 글을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페크님, 늘 고맙습니다!
 

빠르게 걷기


아침에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곳에서 약속이 있었다. 버스로 가려면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그 버스 노선이 한참을 밖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하고, 자주 오는 노선이 아니기도 해서 걷는 것이나, 버스를 타는 것이나 시간으로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앱에서 알려준 기준으로 걸어서 47분, 버스 노선 2개를 갈아타고 가면 38분 정도. 하지만 이 동네에 오래 살았던 나는 가는 길을 대부분 걸어봤기 때문에 47분이 아니라 40분도 안 걸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괜히 멀리 빙 둘러서 버스를 탈 필요없이 그냥 바로 걸어가는 것이 더 빠르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아이들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를 오랜만에 걸었다. 내가 걸었던 시간이 딱 학생들 등교 시간이었다. 그 길에 중학교 2개와 고등학교 3개와 초등학교 3개가 차례대로 나왔는데, 중고등학생들은 친구들과 무리지어 가거나, 혼자 가는 모습이었지만, 초등학생들은 부모 손을 꼭 붙잡고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한 젊은 아빠가 여자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우리 아이들이 예전에 졸업한 초등학교를 향해 걷는 모습을 보았다. 절로 옛날 생각이 났다. 이제 성인이 된 큰 아이와 아직 한창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고, 저녁에 방과후 교실에서 집을 데리고 왔던 날들이 생각났다. 그 시절의 나는 아마도 젊었겠지.  잠깐 추억에 잠겨 걷는 사이에 걸음이 느려졌다.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에 딱 맞출 수는 있어도, 조금 미리 도착하기는 어려운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도중에 만나는 작은 교차로에서 보행 신호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서 마음이 급해졌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신호를 무시하고 무단횡단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답답했다. 결국 신호가 바뀌면 뛰고 또 신호등을 만나면 대기하면서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했다. 뛰어가는 건 쉬운 일이지만,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빨리 걸어보니 이건 또 뛰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어려운 일이더라. 약속 시간 5분 전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내 계산보다 1분 늦은 4분 전에 도착했다.


약 1시간 가량 일을 마치고 일터로 돌아가는 길은 더 멀었다. 우리 집에서 일터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5분에서 20분 가량 걸린다. 그럼 약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걸까? 지름길을 알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니리라 생각했다. 암튼 버스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걸었다. 아침에 왕복한 것 만으로도 1만보를 넘게 걸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시간 계산이 좀 이상해졌다. 1킬로미터 정도는 한 6분이 채 안되어 뛸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힌 후로는 자꾸 거리 계산을 달리기 기준으로 하게 된다. 실제로는 어디를 가던 그 거리를 다 뛰지는 않고, 반 이상은 걸으면서도. 일터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지나치며 보니 재개발 구역에 묶여 넓은 구역이 철거되어 있었다. 그 언덕 위 달동네를 살피며 우리 가족이 살았던 그 집도 철거 되어버린 건가 하며 한참을 머리를 굴려보았다. 위치 상으로 보니 확실히 철거된 것이 맞았다. 그 집 다음에 살았던 곳, 언덕 위에서 조금은 아래로 내려온 위치에 있는 다세대 주택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동네를 지나쳐 한 20분 이상 걸으면 이혼 한 후에 내가 살았던 집들이 위치한 골목들이 있었다. 그 집들도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겠지. 새삼 이 동네에 참 오래 살았구나 싶었다. 20년을 훌쩍 넘겼으니. 지금 기준으로는 아직은 부산에 살았던 날들이 조금 더 많겠지만, 몇 해만 더 지나면 이젠 서울에 살았던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지금 친하게 지내는 지인들 중 다수는 대학을 진학하면서 서울로 온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이미 고향에 살았던 시간보다 서울에 살았던 시간이 더 긴 사람들이다. 나는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고, 중간에 군대도 다녀왔고, 대학 졸업 후에 활동가의 삶을 시작한 것도 부산이었기에 서울에 올라온 시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었다. 아주 오랜만에 예전에 자주 걸어 다녔던 작은 골목들을 걷다 보니 우리집이었던 곳들 뿐 아니라, 친했던 지인들의 집들도 대부분 기억났다. 대부분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간 사람들이었다. 골목길과 그 안의 낡은 건물들은 대부분 그대로였지만, 그 건물에 들어선 가게들은 거의 대부분 바뀌어 있어서 낯선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예전 가게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 곳도 있었다. 오래 전 버스 종점이었던 곳,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선 낯선 곳 맞은 편에 있는 낡은 중국집은 예전 간판 그대로였다. 과연 주인도 그대로일까? 맛은? 언젠가 다시 여기를 찾아와 옛 맛을 떠올리려 애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며 다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스타일


최근에 태양광 사업에 대해 상담을 하러 오신 분은 퇴직하신지 몇 해 지났다고 말씀하셨다. 즉, 거의 70세 정도 되신 분이라고 이해했다. 말씀하시는 말투나 태도가 기본적으로 겸손하고 예의를 잘 갖춘 분이라 생각했다. 한참 대화를 나누고 나중에 헤어지기 직전에 그 분이 다소 조심스러운 말투로 "혹시 연배가 어떻게 되시는지?" 라고 나에게 물었다. 그분 표현으로 내 얼굴은 젊어 보이는데, 풀어헤친 장발은 온통 흰 머리에, 수염도 흰 수염이 많으니 나이가 많은 것처럼 느껴지니, 젊은 사람이 맞는지 아니면 나이가 많은데 동안인 것인지 궁금하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곧 50입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니,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그럼 젊으신 분이 맞군요. 라고 하셨다. 아, 이 흰머리와 흰수염 때문에 나이 들어보인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이 정도 일 줄 몰랐다. 그렇구나. 나 70대 어르신이 보기에도 헷갈릴 정도로 많이 나이 들어 보이는구나. 장발에 수염을 고수하는 일이 쉽지 않구나.


며칠 전에는 옷을 예쁘게 잘 입은 젊은 여성이 매장에 왔었다. 그 분은 매니저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월차라서 왔다고 말했다. 일부러 찾아왔는데, 하필 그날은 매니저님 휴무일이었다. 하루종일 내가 혼자 매장을 보는 날이었다. 그 분이 처음에 약간 쭈뼛거리며 어색해 하시길래, 편하게 계시라고 하고 나는 일을 보려고 했다. 아마도 오랜만에 매장에 방문한 듯 최근에 새로 들여놓은 물품들을 신기한 듯 감탄사를 내며 살펴보길래, 하나 하나 설명을 해드렸다. 그렇게 좀 떠들고 나니 둘 다 조금은 어색함이 사라졌다. 그 분이 나를 좀 유심히 보시더니 문득, 스타일이 엄청 멋지세요. 라고 말을 했다. 멋지다는 말은 예의 상 한 말이겠지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 인 것은 맞을 것이다. 그 말을 하고서는 내가 좀 더 편해졌는지, 이젠 내 눈치를 안 보고 매장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펴보더라. 나는 편하게 구경하시고 혹시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라고 하고 일에 집중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젊은 여성 손님이 들어왔다. 새로 들어온 분이 찾는 물품을 찾아드리고 질문에 답을 하고 어쩌고 하는 동안 이 예쁘게 옷을 잘 입은 분은 나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나가셨다. 매니저님께 말씀 전해드린다고, 누구라고 전할까요? 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가셔서 놓치고 말았다. 나중에 매니저님께 전달했는데, 누군지 짐작이 안 간다고 했다.


최근에 여기저기서 매장으로 탐방을 와서 30분에서 1시간 사이로 우리 협동조합과 매장에 대해 설명을 할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 탐방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동네 활동가들로 나와 친한 사람들이었다. 탐방을 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조합과 매장을 더 널리 알릴 수 있고, 우리의 활동을 홍보하면서 더 힘을 받을 수도 있을테니. 하지만, 아무리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말을 잘 하는 편인 나라도 연달아 계속 사람들을 맞이하고, 설명하고, 질의 응답하고,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마냥 좋은 것 만은 아니다. 일단은 힘이 들고,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이렇게 열심히 설명하는 일이 쉽지 않다. 누군가는 그렇게 탐방을 오려면 적어도 최소한의 기준인 강사비 혹은 탐방비를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하곤 하는데, 그게 참 애매하다. 오히려 잘 모르는 사이라면 그런 요구를 할 수 있겠지만, 다 친한 활동가들 사이에서 그런 요구는 어려운 일이다.


암튼 그래서 여기저기 여러 단위에서 찾아 올 때마다 짧은 강의와 질의응답을 여러 차례 했었다. 그때마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장발에 수염이라는 외모에 대한 부분이 있을 거라고 본다. 흰머리와 흰수염도 한 몫 했을 것이고. 거기에 20년 넘게 활동가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면모, 연구자나 이론가가 아닌 실천하는 사람으로서의 면모에 대한 어떤 느낌과 시선이 있을 거라고 본다.


지금의 나는 누가 봐도 눈에 확 잘 띄는 사람이 되었다. 예전에 좀 평범한 모습이었을 때에 비하면 정말 튀는 외모다. 그래서 더욱 바르게 행동하고 작은 실수라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한다. 이런 튀는 스타일로 잘못된 언행을 하면 쉽게 드러나고 오래 기억될 수 밖에 없다.


지지난 주에도 한 팀, 지난 주에도 한 팀, 오늘도 한 팀. 3주 연속 많은 사람들을 모시고 설명하고 떠들다보니 오늘은 좀 많이 지친다. 안 그래도 밤에 잠을 거의 자지 못해 피곤한 날이고, 일이 많은 날이었는데, 이래저래 사람들에게 시간을 자꾸 뺏기다 보니 해야할 일들은 또 하지도 못했다.


일은 남았는데, 다음 회의를 위해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일단 이 글을 마치고 다음 일은 이동하면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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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4-21 2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목을 걸어보면 느껴지는 게 있어요. 전혀 의식하지도 못했던 어떤 기억들이 살아날 때가 있어요. 나의 뇌 속에서 건져 올려지지 않던 어떤 이미지와 기억들이 골목을 걸음으로써 어떤 연상 작용에 의하여 문득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걸음과 뇌 작용의 상관관계적인 해석보다는 골목이 오래도록 품고 있던 기억을 느끼게 된다는 다소 비과학적인 믿음에 더 기울게 됩니다. ㅎㅎ

감은빛 2025-04-30 20:18   좋아요 0 | URL
골목이 오래 품고 있던 기억을 느낀다는 말씀이 너무 좋네요. 와!!
잉크냄새님이 예전에 중국에 있던 시절의 골목 이야기 썼던 글 생각이 나요.
나중에 시간 날 때 다시 가서 읽어볼게요.

페크pek0501 2025-04-23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을 못 잔 날은 일의 양을 줄여야겠더라고요. 저의 경우 잠이 보약이에요.
말하는 건 쉽게 지치는 일이죠. 요즘 더욱 그걸 느껴요. 말할 때 에너지 소비가 많음이 느껴져요. 그래서 모임이 있을 때 초반에 말을 잘 하다가 끝에 가서는 듣고만 있게 됩니다.ㅋㅋ

감은빛 2025-04-30 20:19   좋아요 0 | URL
요즘 평일에는 잠이 너무 모자라요.
잠을 길게 자지 못하고 중간에 계속 깨는 편이고,
꿈에 시달리다고 해야 하나, 꿈 속을 헤맨다는 느낌의 꿈을 자주 꾸네요.

그래도 주말에는 모자란 잠을 자는 편입니다.

희선 2025-04-25 0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걸어가는 것과 버스 타고 가는 게 비슷한 시간이 걸리면 걸어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걸어가면 조금 힘이 들지만 버스를 타면 힘이 덜 드는군요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하는 것도 괜찮은 듯합니다 감은빛 님은 따님들 어렸을 때를 떠올리기도 했군요 어릴 때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금도 지나가면 돌아가지 못하겠습니다 지금도 나중에 떠올릴 좋은 기억 많이 남기기를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5-04-30 20:21   좋아요 0 | URL
그쵸? 걸으나 버스 타나 비슷하면 걷는 것이 낫죠?
저는 멀리 나가지 않고 동네에서 일한지 10년 정도 되었는데,
거의 매일 걸어다니고 버스나 지하철을 거의 타지 않아요.
가끔 버스를 탈 일이 생겨도 걸어서 얼마나 걸릴 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네요. ㅎㅎ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접속했더니 11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14년 4월 15일에 내가 페이스북에 아래 글을 올렸다고 알려줬다. 딱 보자마자 이 글에 쓴 그 순간이 기억났다. 그 무렵의 아이는 유독 나를 많이 따랐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당연히 없겠지만, 큰 아이를 저렇게 안아 올릴 수 있는 시절로 딱 한 번만 돌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문득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이 부러워진다. 그 집안 남성들은 모두 자신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데. 그런 능력 나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 어렸을 때로 자주 돌아가서 더 많이 아껴주고 더 많이 사랑해주고 싶다.


딸과의 5분 데이트


점심 먹고 졸릴 무렵, 큰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학교 마치고 방과후교실 가는 중이라고, 아빠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어디냐고 물었더니, 횡단보도 건너는 중이라고,

어딘지 딱 감 잡았다.

마침 일하는 곳에서 2~3분 거리다.

천천히 걸어가면 곧 아빠가 갈 거라고 말하고 뛰어나갔다.

아이는 멀리서 나를 보자마자 막 뛰어왔다.

만나자마자 번쩍 안아 들었다가 내렸다.

손잡고 천천히 걸어서 딱 5분 동안 데이트했다.

동네에서 일하니 이런 재미도 있구나.


2014년 3월에 나는 4년 넘게 일했던 출판사에서 해고 당했다. 잡지만 내던 잡지사였었는데, 단행본 출판을 위해 나를 영업자로 고용했던 곳이었다. 나는 심각한 적자였던 잡지를 정상적인 유통 체계를 구축해 흑자로 돌려줬고, 단행본을 꾸준히 내면서 흑자 폭을 크게 증가 시켰다. 초기에 사장은 나를 마치 구세주처럼 대했다. 그러다가 해가 가면서 유통망이 안정적으로 구축되고 나니, 사장은 이제 내가 불필요한 사람처럼 느꼈나 보다. 내가 내 모든 인맥과 능력을 총 동원해 잘 만들어 놓은 그 체계는 사실 내가 없으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를 해고 하고 나서야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출판사를 그만두게 된 무렵에 나와 아주 친했던 동네 친구가 녹색당 구의원 후보로 출마를 결심했었다. 녹색당 창당에 함께한 후에 나는 녹색당 활동을 정말 열심히 했었다. 구의원으로 출마를 결심했던 그 친구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동네에서 정치를 한다면 정말 정치가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물론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당연히 그 친구가 당선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여러 당원들은 그 친구가 10% 이상 득표해서 선거 비용의 절반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도 당연히 불가능 할 거라고 했다. 나중에 그 친구가 9.7% 였던가 암튼 9% 이상 득표율을 달성해서 내가 아는 소규모 진보 정당 후보 중에 가장 높은 득표율을 올린 것을 보고 놀라기는 했고, 조금만 더 나왔으면 정말 50%를 보전 받았을 텐데, 라고 아쉬워 하기는 했다.


암튼 3월에 출판사에서 해고를 당한 시점의 나는 구의원으로 출마하겠다는 친구에게 선거운동을 함께 해달라고, 구체적으로는 선거 사무실의 사무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하필 그 시점에 해고를 당하다니! 이건 선거운동을 하라는 하늘의 계시 같은 것일까 라고 생각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늘 대중교통으로 3~40분 이상 가야 하는 일터로 출근하다가, 바로 우리 동네에 있는 선거 사무실에 출근하게 되어 삶이 많이 달라졌다. 선거 사무실은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리고 당시 큰 아이가 다니던 학교와는 5분 거리였다. 당시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공동육아 방과후 교실로 이동했는데, 가는 길에 아빠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짧은 순간 아이가 걸어가는 경로를 머리 속으로 그렸고, 곧바로 사무실을 나서서 아이에게 뛰어나갔다. 아이는 멀리서 나를 보고 뛰어왔고, 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이를 안아 올렸다. 사랑하는 딸과의 5분 데이트. 그날 하루종일 기분이 참 좋았다.


그리고 그 바로 다음날이 역사적인 16일이었다. 우리는 뉴스에서 뒤집혀진 배를 보면서 그래도 다행히 학생들을 대부분 구출했다는 오보를 믿었다. 사실은...... 사실은...... 아, 눈물이 나려고 한다. 우리는 선거운동을 하다가 식당에서 뉴스를 보았고, 오후 선거운동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그리고 며칠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무실로 출근을 하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늘 페이스북을 통해 저 글을 읽으며 행복했던 짧은 데이트를 떠올렸다가 곧바로 그 다음날이 그날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순간 급 기분이 우울해졌다. 아, 이런 기분으로 다시 일하기 쉽지 않다. 끊어버린 담배가 다시 땡기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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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4-16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오보에 속았던 기억, 뉴스가 배들이 마구 가고 있다는 보도를 하면서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던 가짜의 기억과 함께 아직도 제대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한 화가 납니다.

한 명이 구축한 체계는 그 사람이 없으면 무너지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기민한 사장이었다면 그 인간성과는 별개로 그 인맥과 체계를 빼앗아올 생각을 할텐데 당시 사장이 욕심은 많았어도 감은 좀 딸렸나 봅니다. 저도 초기사무실에서 원년맴버로 일하다가 나와서, 그리고 속아서, 나올 때 그 비열한 자의 행동이 기억이 나네요...

아이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시간이 훌쩍 흘러서 성인이 되어가는 자녀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감은빛 2025-04-21 14:07   좋아요 1 | URL
11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세월호 사고의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죠. 그저 잠수함 충돌은 아닐 거라는, 어마어마한 과적과 불법 개조로 인해 복원성이 무너진 선체가 원인일 거라는 추측만 남았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터라 어쩌면 영원히 그 진실을 밝혀 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잠수함을 탓하는 음모론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착실한 조사가 필요했다는 뉴스타파의 기사를 보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게스트님도 비슷한 경험을 겪으셨나 봐요. 저는 나중에 그 사장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혼자 어쩔줄 몰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당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일인 것을 그것도 모르고 나를 해고 했나 싶어서 어이 없기도 했고, 그냥 사람이 그거 밖에 안 되는 사람이구나 했어요. ㅎㅎㅎㅎ

2025-04-23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4-30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