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꿈들 두번째 이야기


어제 쓰려다가 다 못 쓴 잡다한 꿈 이야기를 다시 이어 쓴다.


#3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거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비에 완전히 젖은 옷은 무겁게 축 늘어져 불편하고 찝찝했고, 신발 안에 들어찬 물 속에서 양말은 물을 흡수하며 불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까는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다 맞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주위에 하나 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도 모두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었다. 나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두 명, 세 명 다시 네 명으로 늘어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까지 식별할 정도로 잘 보이지는 않았다. 먼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그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까만 형체로만 보였다. 내가 더 자세히 보려고 다시 눈가에 흐르는 빗물을 오른손 손바닥으로 훔쳐내자 그들도 같은 동작을 보였다. 살짝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 고개를 조금 들더니 오른손을 들어 얼굴 높이를 훔치는 동작을 취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이젠 아예 물폭탄을 들이붓는 느낌이었다. 이미 온 몸이 다 젖어버린 상태라 비가 얼마나 더 오든 상관은 없었지만, 머리와 어깨로 쏟아지는 빗물의 무게와 강도가 세진 것은 좀 곤란했다. 나는 피곤했고 간신히 남은 힘을 모두 짜내어 서 있었는데, 내리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조금씩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가까운 듯 멀리 보이는 내 주변의 인물들도 그때마다 같이 휘청거렸다. 나는 일부러 왼발을 한 발작 옆으로 빼면서 살짝 무릎을 굽혀 넘어질 것처럼 동작을 취했다가 버텼다. 그들 역시 거의 동시에 같은 동작을 취했다.


피곤함에 잠시 눈이 감겼다. 빗물이 계속 흘러내려 눈을 바로 뜨고 있기가 힘들기도 했다. 눈을 감고 서 있으니 더더욱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양쪽 무릎이 휙 꺾이며 비틀 몸이 기울었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렇게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동작을 유지한 채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피니 그림자들 또한 같은 동작이었다. 다만 아까 대여섯 명에 불과하던 그림자들이 더 많이 늘어나 있었다. 이젠 눈 대중으로 세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꿈에서 깬 시점에서 나는 꿈 속의 내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잊어버려 다시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꿈 속의 나는 분명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안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니, 안 올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꿈 속의 내가 그 비를 다 맞으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절실히 그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그를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였을까? 꿈 속의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사람은.


자꾸만 눈이 감겼고, 축 늘어진 옷은 자꾸만 무겁게 몸을 끌어내렸다. 계속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었지만, 그래도 넘어지지 않고 계속 버텼다. 문득 시간이 궁금해서 손목시계 유리의 물기를 손목으로 닦았다. 시간은 9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던 것 같다. 오전이었을까? 오후였을까? 비 내리는 어두운 하늘 탓에 아침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는 듯 작게 울리기 시작했다가 다음 번에는 가까운 곳인 듯 크게 울리기도 했다. 종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9번을 울렸다. 종소리가 어디에서 들리는지 가늠해보려고 다시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지만,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엔 오른쪽에서 들렸고, 또 다음 순간엔 왼쪽에서 들렸다.


꿈 속의 나는 생각했다. 그는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더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아무리 오래 비를 맞고 기다려봐야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래 알고 있었다. 아마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꿈 속의 나는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돌로 변해 세월의 풍화에 가루가 되어 없어질 때까지 여기에 머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내 주위로 셀 수도 없이 많은 그림자들이 나와 함께 있었다. 나만 혼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 말고도 수많은 어떤 이들이 나처럼 비를 맞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비록 비참하게 버림 받고 쓸쓸하게 혼자 기다리고 있었어도 나는 결코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았다고 꿈 속의 나는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시계를 보고 싶었는데, 왼손 손목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떨궈진 고개를 들어 올릴 힘도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림자들이 내 주위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행히 빗줄기는 아까보다는 가늘어졌다. 졸고 있었던 걸까? 비틀 한 차례 크게 몸이 왼쪽으로 꺾였다. 무언가를 짚으려고 왼손을 들어보려 했으나 빈 허공을 휘저으며 나는 쓰러졌다. 철퍼덕 하고 큰 소리가 나며 바닥에 고여있던 물이 튀어 물보라가 일었다.쓰러지며 머리가 바닥에 닿기 직전에 몸을 뒤집으며 누워버렸다. 물보라가 그렇게 크게 솟아 오른 건 내 온 몸으로 바닥을 쳤기 때문이다.


누워서 비를 맞으니 입과 코로 자꾸만 빗물이 들어왔다. 몸을 일으키려고 생각은 했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옆으로 돌아 눕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그것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내 주위에 머물렀던 그림자들도 함께 넘어졌을까? 궁금했는데 볼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발자국 소리가 찰박 찰박 들렸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작은 물보라가 일었다가 흩어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발소리는 점점 내게 다가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볼 수 없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간절히 원했던 그 사람일까? 아니면 넘어진 나를 보고 누군가 놀라서 다가오는 것일까? 혹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어떤 사람일까? 마침내 발소리가 바로 뒤까지 다가왔고 그때 투명한 비닐 우산의 한 쪽 끝이 내 머리 위에 나타났다. 내 얼굴로 계속 떨어지던 빗물이 우산에 막혔다. 대신 상체로는 우산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이 더 많이 떨어졌다. 발소리는 거기서 멈췄고, 이제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눈을 뜨고 비닐 우산의 한 쪽을 올려다 보았다. 우산 뒤쪽으로 흐리던 하늘이 갑자기 맑아졌다. 짧은 순간 순식간에 비가 그쳤다. 나는 우산을 든 사람이 누구인지 너무나도 궁금했으나 그는 내 얼굴을 막아준 후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으으으 온 몸에 힘을 주고 얼굴을 찡그리며 입가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얼굴을 보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계속 힘을 줬다. 그러다 잠에서 깼다.


꿈 속에서 무언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 안간힘을 쓰다가 잠에서 깨는 경우는 흔하다. 보통은 피하거나 도망가야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힘을 쓰다가 깨는 경우가 많았다. 이 꿈 속에서 나는 반대로 누구든 무엇이든 내게 와주기를 바랐다. 그게 날카로운 칼 끝이라도 피하지 않고 받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긴 기다림의 끝에, 마침내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주었지만, 나는 끝내 그게 누구였는지 알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 버렸다. 궁금했다. 누구를 그렇게 간절히 기다렸던 것인지. 마침내 나타난 인물은 과연 누구였는지. 꿈에서 깨어버린 이상 이젠 결코 알아낼 수 없겠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쓰려던 꿈 이야기를 다 못 썼다. 더 쓰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지금 나는 저 꿈 속의 나처럼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 또 다른 꿈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써야겠다. 오늘도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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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6-22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꿈을 자세하게 기억하시는군요 저는 꿈 한 장면밖에 기억 못하기도 해요 일어났을 때는 좀 길게 기억하지만... 예전에 꿈을 적은 적도 있는데, 그걸 보니 별난 꿈을 꿨네 했어요 비를 맞고 누군가를 기다리다니, 혼자가 아니었다니 조금 무서운 느낌도 드네요 그림자는 뭐였을지...


희선
 

어떤 꿈들


#1

구체적인 내용들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꿈 속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쫓기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일들을 겪다가 어느 순간부터 노래 연습을 하고 있었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축제에서 무대에 서기 위해서. 어떤 노래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꿈에서 깬 직후에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때 적어 두었으면 좋았을텐데. 아마도 최근 연습해서 잘 부르게 된 몇 곡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꿈 속에서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친한 후배가 내게 노래를 가르쳐줬다. 실제로 나는 그 후배 덕분에 몇 달 전에 두성으로 노래 부르는 방법을 익혔고, 그 전까지 그저 고함 지르는 수준에 머물렀던 노래 실력이 그나마 노래처럼 들리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암튼 다시 꿈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엄청 열심히 연습을 했는데도, 어떤 특정한 맛을 잘 살리지 못했고, 그래서 가르치던 후배에게 계속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꿈 속의 나는 그 녀석의 지적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 내 실력에 이 정도면 잘 부르는 것이라고 여기며, 이 정도라도 부르는 것이 어디냐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대에 올라야 하는 축제 날이 왔다. 내가 무대에 올라야 할 시간이 다가올 수록 초조함과 긴장감을 느끼며 어쩔줄을 몰라하고 있었는데, 내 무대 직전에 한 여성이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너무나도 매력적인 목소리에 너무나도 훌륭한 가창력이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긴장감과 초조함은 사라졌고, 그저 그 목소리에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깬 순간 자기 전에 틀어놓은 플레이리스트에서 이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커버곡을 주로 부르던 제이플라가 최근 계속 자신의 곡을 발표하고 있다. 이 곡은 분위기도 좋았고 창법도 평소 제이플라와 달라서 좋았고, 특히 가사가 좋았다. 최근에 낸 서너곡들이 모두 제이플라 자신의 상황을 잘 드러내는 듯한 가사라서 좋다. 암튼 이 노래를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고 자주 듣는 편인데, 하필 잠에서 깨는 시점에서 이 곡이 흘러나왔다. 아니 잠에서 깬 후 멍한 상태에서 조금 생각하다가 깨달았는데, 꿈 속에서 내 차례 바로 앞 무대가 바로 이 곡이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이 노래를 들으며 자고 있던 나는 꿈 속에서도 이 노래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꿈 속에서 무대에 섰던 분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실제 제이플라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학 시절의 나는 나름 노래를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음은 잘 안 올라가지만, 분위기 있게 잘 부르는 편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졌었다. 노래패 활동을 하면서 발성을 조금 배웠는데, 내 목소리와 내 성향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 노래를 조금 배운 덕분에 결혼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실마리를 잡았었다. 암튼 내가 정말 노래를 못하는 구나 하고 깨달았던 계기가 있었다. 언젠가 축제 무대에 우리과 동기 한 명과 둘이 올랐다. 연습할 시간이 별로 없어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고, 나랑 같이 무대에 오른 친구는 심각할 정도의 박치에 약간 음치였다. 이런 친구와 왜 무대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이 녀석이 실수하고 노래를 못 할수록 내가 잘 한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라고 재수없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나서 나도 참 노래를 못하는 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로 절대 노래 실력에 대해 자만심을 갖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동기 녀석은 당연히 계속 박자를 틀리고 절정에서는 음이탈도 일어나는 등 실수가 많았고, 그건 예상했던 부분이었지만, 나 역시도 내 생각처럼 노래가 잘 되지 않아 무척 당황했다. 당황은 계속 실수로 이어졌고, 우리 무대는 그야말로 코메디가 되거나, 귀와 마음을 괴롭히는 고문이 되어버렸다.


이 꿈을 꾸고 나서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는 방금 얘기했던 최악의 축제 무대였고, 또 하나는 신입생 환영회를 가서 즉석으로 짧은 꽁트 대본을 쓰고 그 속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는 역할을 나 자신에게 배정해서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 불렀던 모습. 하나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나름 자랑스러운 기억이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내 노래 실력이 그렇게 좋지 않다고는 여기지만, 그래도 어떤 노래들은 내 나름의 스타일로 잘 부를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더는 남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2

그 길은 거미줄처럼 복잡한 골목길이었다. 그리고 경사가 급한 오르막이기도 했다. 나는 쫓기고 있었다. 오르막을 뛰어 올라가다가 숨이 차서 멈추고 싶었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존재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든 와중에도 어떻게든 다리를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어느 순간 나는 사방이 탁 트인 어떤 공원 같은 곳에 올라 있었다. 어디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데, 내 뒤를 빠르게 쫓아온 일행들이 어느새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들을 향한 후에 어디 빠져나갈 틈이 없는지 살폈지만, 그들은 잘 훈련받은 몸 놀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옆으로 퍼지며 내 도주로를 차단했다. 그들 모두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손에는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들려있었다. 각목, 야구방망이, 곤봉, 삼단봉, 쇠파이프까지. 계속 뒷걸음질을 치다보니 나는 어느새 절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섣불리 들어오지 않고 포위한 채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어느새 절벽 앞 난간에 내 등이 닿았다. 빠르게 뒤돌아보니 절벽은 까마득하게 높았다.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다 라고 생각했다. 내 정면 쪽에서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야구방망이를 든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일정한 간격을 둔 상태로 더 들어오지 않고 멈췄다. 앞으로 나선 그는 몇 발자국 더 걸어서 내게 다가왔다. 가면 때문에 누군지 알아볼 수 없어서 무척 답답하고 두려웠다. 그는 한 서너 발걸음 간격을 두고 멈추더니 손에 들고 있던 방망이를 과시하듯이 크게 공중에서 한 번 휘두르고 그대로 방망이를 땅에 짚고 양 손을 그 위에 얹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왼손을 들어 가면을 벗었다. 


턱에서부터 천천히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가면을 벗는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된 것처럼 무척 길게 느껴졌다. 대체 누구야? 얼른 가면을 벗어! 그 얼굴을 보여줘.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가면이 올라가면서 이제 입매가 드러났다. 웃는 모습이었다. 비웃음이었을까? 빨간 입술과 하얀 이가 드러났다. 그러면서 양 볼에 살짝 패인 보조개도 드러났다. 보조개가 있다. 나는 머리를 굴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보조개가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다.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천천히 가면을 벗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시간이었다. 이제 콧날 끝이 보일락 말락 했다. 콧날이 제법 높았다. 여기까지 드러난 하관을 보며 나는 계속 내가 아는 얼굴들과 비교해보려 애썼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나는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안면 인식 장애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완전히 얼굴이 드러나도, 그 사람이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었어도 누군지 금방 알아보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콧등이 조금씩 드러났다. 하얀 피부와 높은 콧날. 누군지 모르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얼굴일 것이라고 느꼈다. 아주 느린 그의 움직임은 눈이 드러나기 직전에 멈췄다. 그는 가면을 칠할 정도 드러낸 상태에서 멈추고 나와 대치를 이어갔다. 그 다음에는 몇 발작 뒤쪽에 멈춰있던 이들이 일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걸음을 맞췄다. 그들은 앞서 가면을 벗다가 멈춘 이와 함께 정확하게 반원 모양이 되는 지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처음에 그가 했던 것처럼 그들은 각자의 손에 든 곤봉이나 삼단봉이나 쇠파이프 등을 크게 휘두르는 동작을 하고는 땅 바닥에 짚고 섰다. 그리고 하나둘씩 가면을 벗어 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나올 때 일사분란하게 딱 맞췄던 것과는 달리 가면을 벗는 동작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아직 손을 들어 올리는 사람도 있었고, 벌써 가면의 아랫쪽을 쥔 사람도 있었고, 입매가 드러나는 지점까지 가면을 들어올린 사람도 있었다. 


나는 더 큰 두려움을 느끼며 한 사람씩 얼굴을 보려고 애썼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누구에게도 촛점을 맞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고개만 돌리고 있었다. 제각기 저마다의 속도로 가면을 올리는 그 손길들은 역시 정확히 눈이 드러나기 직전에 멈췄다. 그들은 손으로 가면의 턱을 쥔 동작 그대로 멈춘 채 마치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쯤 깨달았던 것 같다. 이거 아마도 꿈일 것이다. 악몽은 자각몽이 되어 버렸고, 나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꿈이었어. 나는 용기를 내어 그들의 가면을 하나씩 벗겨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꿈이란 것을 깨달았어도 꿈 속의 나를 마음대로 통제하지는 못했다. 꿈이란 것을 깨닫자 나는 더 궁금해졌다. 그들은 과연 누구이고 왜 무기를 들고 나를 쫓아 이 절벽으로 몰았을까? 무엇을 복수하려는 걸까? 무엇을 비난하려는 것일까? 꿈이라고 깨닫기 전의 두려움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절박한 어떤 감정들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음 순간 멈춰있던 그들이 일제히 가면을 벗어던지고 손에 든 무기들을 높이 들어 올리며 나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내 시야는 갑자기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으로 채워졌다. 푸르게 맑은 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갑자기 빠른 속도로 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순간 잠에서 깼다. 아마도 꿈 속의 나는 스스로 절벽으로 몸을 던진 것이겠지? 그들이 가면을 벗어 던진 찰나 그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여유는 없었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잠에서 깨자마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불을 머리 위로 덮어 쓰고 몸을 새우처럼 웅크린 채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한참을 곱씹은 후에야 그들은 아마도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분신처럼 여러 몸으로 복제했지만, 실은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얼굴을 보지 못하고 꿈에서 깬 이상 그걸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그냥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편이 나았다.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꿈 속의 그 얼굴처럼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을 한 사람은 현재 내 주변에는 없다. 그러니까 현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아닐 거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있었다. 그렇게 하얀 피부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예쁜 입술. 남성 중에서도 있었고, 여성 중에서도 있었다. 그들 모두를 한 때 꽤나 좋아했었고(이성으로서도, 친구로서도) 꽤나 원망하거나 싫어하기도 했었다.


물론 꿈은 꿈일 뿐이므로 그 얼굴이 실제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과 꼭 같으리라는 법은 없다. 신기하게도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나이대가 달랐으므로 아이들은 생김새가 달랐지만, 꿈 속의 나는 그들이 내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건 꿈이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 그러니 저 꿈 속의 가면 속 얼굴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졌건 실제 내가 아는 사람들과 맞아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더 많은 꿈 이야기를 쓰고 싶었으나,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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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0 15: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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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0 21: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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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0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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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2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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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질


예전에 여기 서재에 왼손 젓가락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군대에서 밥을 빨리 먹는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구박 받았던 선배가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해서 늦게 먹도록 적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건과 왼손을 잘 쓰기 위해서 양손 젓가락질 연습을 하는 내용이 나오는 이현세 화백의 권투 만화를 오래 전에 보고 따라했던 이야기.


얼마 전에 뒤늦게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몰아서 봤다. 시즌1은 교통사고 후 집에서 쉬고 있을 때 봤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퇴원한 후라서 병원 드라마가 제법 재미있었다. 그 드라마 특유의 가볍고 아기자기한 맛이 좋았었다. 나중에 시즌2가 나왔다고 듣긴 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찾아보지 못 했었고, 최근에서야 생각이 나서 주말에 시즌1과 시즌2를 한번에 몰아서 봤다. 시즌1을 다시 본 이유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였다. 암튼 그 드라마 중간에 조정석 배우와 그 여동생 역의 배우님(성함을 몰라서 죄송!)이 밥 먹다가 식탁에서 디제이 디오씨의 그 유명한 노래(제목이 '디오씨와 춤을' 이었구나. 기억이 안 나서 방금 검색함)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젓가락질 잘 해야만 밥을 먹나요? 잘 못해도 서툴러도 밥 잘 먹어요." 조금 어색하게 부르는 듯 안 부르는 듯 부르다가 또 이어 받아서 부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암튼 이 두 사람이 젓가락질이란 단어만 들어도 이 노래가 반사적으로 생각나듯이 나 역시 그렇다.


오늘 다시 젓가락질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아까 급하게 조금 난이도가 있는 젓가락질을 해야 했던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분이 매장에 들어오셨다. 선물세트를 구매하려고 하신다고 세트 쪽을 둘러보시더니 기능성 비누와 비누망이 2개씩 들어있는 세트를 고르셨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며 대나무 칫솔, 실리콘 칫솔캡, 고체치약이 10개 들어있는 작은 원형 틴케이스 이렇게 3가지가 광목 파우치에 담겨있는 외출용 양치 세트를 추가로 고르셨다. 두 세트를 합한 가격에서 약간의 할인을 해드리기로 하고 "언제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라고 물었는데, "지금 주세요." 라고 답이 돌아왔다. 보통 세트 주문은 미리 받아서 예정된 시간까지 준비하는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5세트만 필요하다고 하니 금방 만들어 드릴 수 있다고 답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접어서 모양을 만들어 놓은 종이 상자를 5개 펼치고, 거기에 들어갈 기능성 비누 2종을 5개씩 찾아서 꺼냈다. 매장을 보기는 하지만 재고 정리는 매니저님께서 하는 일이라 나는 특정 상품의 재고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큰 틀에서 진열된 상품 근처의 수납장에 있다는 원칙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암튼 그래서 분주하게 수납장 문을 열었다 닫으며 해당 상품들을 찾아 다녔다. 비누망도 2장씩 5세트를 챙기고, 대나무 칫솔과 실리콘 캡을 챙겼다. 광목 파우치도 5개를 찾았다. 이제 남은 건 작고 귀여운 원형 틴케이스에 들어있는 고체 치약 10알 뿐이다. 이건 여기저기 아무리 뒤져도 안 보였다. 결국 주문하신 분께 양해를 구하고 매니저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 상품은 원래 판매하는 것이 아니고, 외출용 양치 세트에만 들어가는 용도로 만든 것이라고 했고, 원형 틴케이스의 위치와 거기에 채워 놓을 용도인 리필용 고체치약 팩의 위치를 알려주셨다. 틴케이스 뭉치와 고체치약 팩을 찾아 들고 생각해보니 입에 들어가는 제품을 그냥 손으로 담을 수는 없었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젓가락이었다. 젓가락을 이용하면 되겠네. 매장에서 가끔 음식을 먹을 때 사용하는 젓가락을 찾아서 틴 케이스에 작은 고체 치약을 10알씩 집어서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잘 안 잡히더라.


저 위에서 언급한 이현세 화백의 권투 만화에서는 양손으로 콩을 옮기는 젓가락질 연습을 긴 시간 반복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고체치약은 콩처럼 완전히 둥근 모양은 아니라서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옆에 기다리는 분이 계시니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집히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확 부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러면 이 작은 틴케이스에 제대로 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쏟아질 것이다. 게다가 10개씩 딱 맞춰서 쏟을 수 있는 재주도 없다. 젓가락질이 잘 되지 않으니 자꾸 마음은 답답해졌다. 그렇게 어렵게 3개의 틴케이스를 채운 순간 생각이 났다. 샘플로 만들어 놓은 틴케이스가 두 개 있으니 그걸 먼저 드리고, 이 분이 가시고 나면 내가 다시 샘플을 만들어 두면 되겠네.


그렇게 계산을 마친 손님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틴케이스에 고체 치약을 담았다. 이번에는 너무 쉽게 잘 집혔다. 심지어 두 개씩 딱 딱 집혀서 젓가락질 5번 만에 틴케이스 하나를 완성하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아까는 쫓기는 마음이어서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진정이 안 되고 자꾸만 젓가락질이 엇나갔었다. 똑같은 조건인데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하니까 '이게 왜 안 됐어?'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젠가 우리나라 양궁 국가대표팀이 일부러 시끄러운 환경에서 훈련을 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다. 올림픽 경기장에서 예상치 못한 소음 등의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을 마주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사실 내가 낮에 업무에 집중하기 어려운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래서 야근이 많은 것은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시끄럽고 분주한 환경에서도 일을 잘 하는 사람이 되려면 나는 얼마나 더 훈련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사실 시간에 쫓기면 아무리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환경에서도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문서 작업의 경우) 역시 이게 다 마음의 문제라는 말로 귀결된다.


암튼 예상치 못한 선물세트 판매로 오늘 낮에 부진했던 매출을 겨우 살렸다. 뿌듯한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겠다. 이번 주말에도 이래저래 일정이 많다. 물론 이번 주말만이 아니라 다음 주도 그 다음주도 그 다음 다음 주도. 하! 그만하자. 


서울국제도서전과 관련하여 홍보대사 위촉 문제로 시끄럽다고 들었다. 게다가 홍보용으로 풀린 사진에 여성 소설가들만 있어서 그것과 관련해서도 말들이 나온다. 이 건에 대해서는 다음에 시간이 나면 자판을 두드려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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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6-16 2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랙리스트 국가 범죄 실행자 오정희 소설가는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

사지가 들려 끝려나가는 송경동 시인

김건희씨 개막식 축사를 받기위해 우리는 불법적이고 폭력적으로 소거당했다

2023 서울국제도서전을 다녀왔습니다
불쑥 불쑥 화가 올라오네요

감은빛님의 서울국제도서전에 대한 생각도 궁금합니다

감은빛 2023-06-17 12:50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이미 도서전 다녀오셨군요.
저는 올해는 못 갔고, 아마 못 가게 될 것 같아요.
출판계 많은 지인들의 소식들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네요.
조금 정리가 되면 제 생각도 공유할게요.

송경동 선배는 정말 어딜가나 저렇게 끌려나오게 되네요.

참고로 내일 오후 1시 반에는 현 상황에 대한 긴급 기자회견을 코엑스 동문 앞에서 다시 열 예정이구요. 같은 장소에서 2시 반부터는 (가칭)<오정희 사태와 예술권력에 대한 긴급 이야기 마당>을 연다고 합니다.

참고로 오정희 작가 외에도 손진책, 안호상, 송수근 등 여전히 기세등등한 블랙리스트 국가범죄 실행자들, 그리고 이들과 오랫동안 부패한 권력 밑에 숨어 함께 썪어가고 있는 예술권력들에 대한 활동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방울 토마토


약 1시간 전 늘 나를 챙겨주시는 50대 언니 한 분이 갑자기 매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동안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자주 보다가 최근 한 2주 가량 자주 못 본 느낌이다. 내가 "어째 오랜만인 것 같아요." 하고 건네는 인사에 씩 웃어 보이시더니, 들어오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방울 토마토 통을 들고 개수대로 가서 씻기 시작하신다. 그러더니 그릇 하나를 달라고 하신다. 아마 저 방울 토마토를 나에게 나눠주려고 그릇을 찾으시는 것 같아서 작은 그릇을 하나 가져갔더니, 그거 말고 큰 걸 달라고 하신다. 큰 그릇이 마땅한 것이 없을텐데, 앞서 그릇보다 조금 더 큰 그릇을 하나 드렸더니 거기에 열심히 씻은 방울 토마토를 담으신다. 그릇에 많이 안 들어가니 마치 고봉밥처럼 방울 토마토들을 위로 열심히 쌓기 시작하신다. 그런 와중에 역시 친하게 지내는 또 다른 50대 언니 한 분이 들어왔다. 앞의 언니는 50대 후반이시고, 지금 들어오신 분은 50대 초반이시다. 두 분은 곧바로 회의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며, 지하철 역 한 정거장 거리의 모 장소를 언급했다. 내 걸음으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인데, 회의가 7시 시작이라면 두 분은 이미 회의 시간에 늦으신 것일테고, 7시 반 시작이라면 조금 여유가 있는 상황일 것이다.


두 사람은 앉지도 않고 서서 방울 토마토 몇 알을 입에 집어 넣으며 이런저런 급한 일들을 나와 소통했다. 그 와중에 방울 토마토가 달다며 얼른 먹으라는 채근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이 급하게 나가고 내 책상에는 그릇에 수북이 담긴 방울 토마토가 남았다. 요즘 점심때마다 입맛이 별로 없어서 점심을 안 먹는 날이 많고, 오늘도 그랬다. 저녁에 달리기 모임을 가야 해서 6시가 되기 전에 뭔가를 좀 먹어야지 생각을 하긴 했는데,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고,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래 달리기 하고 나서 맛있는 걸 먹자. 그러고 있었는데, 두 언니들이 방울 토마토를 한 그릇 가득 안겨주고 가셨다. 나는 일을 하면서 한 알씩 집어 먹었고, 이 글을 쓰기 직전에 다 먹었다. 세상에 방울 토마토로 배를 채우다니!


어떤 날엔 나 자신이 정말 바보 같고 멍청해서 싫고, 어떤 순간은 미친 듯이 외롭고 슬프지만, 이런 순간에는 내가 그래도 잘 살아왔구나 하고 깨닫는다. 그 바쁜 사람들이 회의를 가야 하는 바쁜 와중에 일부러 지하철 역 1 정거장 거리(회의 장소로부터)에 있는 사람(나)에게 방울 토마토를 챙겨 주려고 일부러 들러서 가다니! 이 두 사람에게, 특히 방울 토마토를 가져와 씻어주신 그 언니에겐 정말 고마운 일이 많다. 언젠가 내가 뭐든 도움을 드려야 할텐데. 사실 한 10년 전에는 내가 이런 저런 도움을 드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분이 요청하는 작은 일들에 힘을 보태기도 했고, 그 분의 일에 아주 사소한 도움들을 드리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고 보니 나는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그 분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깊이 도움을 주고 계셨더라. 난 왜 바보 같이 그런 것들을 모르다가 뒤늦게 깨달았을까?


음,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일단 오늘은 달리기 모임을 가야 한다. 일은 많고도 많은데, 하기는 싫고, 그런데도 자꾸만 새로운 일이 생긴다. 최근 며칠동안 갑자기 여기저기 아픈 곳들이 많아져서 일도 운동도 제대로 못했다. 오늘 달리기 모임을 계기로 다시 운동을 열심히 해야지.


오늘 페이스북에서 강양구 기자의 글을 보고 주문한 책. 여러 사람들이 이 작가의 전작들에 대해서도 칭찬하더라. 이 책 읽고 그 전작들도 찾아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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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11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굶는 건 건강에 안 좋아요. 밥 생각이 없을 땐 계란을 삶아 두 개 정도 먹고 플레인 요플레를 먹으면 요기가 되어요. 아니면 바나나를 먹는 것도 좋지요. 저는 오늘 아침엔 밥 생각이 없어서 식빵을 구워 치즈 한 장 얹어 커피를 곁들여 먹었어요. 간단히 먹을 수 있고 맛있어요.
위의 책은 이번에 나온 신간이네요. 검색해 보겠습니다..갑자기 방울토마토가 먹고 싶네요..ㅋ

감은빛 2023-06-16 19:52   좋아요 1 | URL
페크님. 저는 오래전부터 하루 2끼 혹은 1끼로 생활하고 있는데, 2끼를 먹으나 1끼를 먹으나 별 차이는 못 느껴요. 건강에도 아무 지장이 없구요. 기본은 하루 1끼 저녁을 먹고, 가끔 점심 약속이 생기거나 너무 아침 일찍부터 활동했을 때 정도만 점심을 먹어요. 이렇게 생활한 지 거의 10년이 넘은 것 같아요.

바나나와 구운 계란을 종종 먹어요. 주말에 집에 있을 때 간식으로.

늘 마음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
 

웃는 얼굴


매장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주로 젊은 여성 분들이다. 젊지 않은 여성 분들도 가끔 오시지만, 구매하시지 않고 구경만 하고 가시거나, 구경한 것이 미안해서 아주 작은 상품 한 두 개를 사시거나 한다. 젊은 여성 분들은 이런 저런 다양한 상품들을 구매하신다. 남성들이 혼자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다. 대체로 여성이 들어오니까 따라 들어오거나, 끌려 들어오거나 한다. 매장에 하루종일 있다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누구에게나 늘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어떤 질문에도 자세히 대답하려고 애쓴다. 나의 이런 태도 덕분에 잘 몰랐던, 관심 없어서 존재조차 몰랐던 상품들에 흥미를 갖고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들을 본다. 오늘도 벌써 3명의 구경만 하러 들어온 손님들에게 몇 가지 상품을 자세히 설명해드려서 구매하시도록 했다. 대부분 내가 직접 사용해 본 상품들이고 그 품질을 보증할 수 있기에 자신있게 권했다.


평소에는 잘 웃지 않는 편인데, 매장에 손님이 들어오면 일부러 계속 웃는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 중이다. 제로웨이스트 매장이라 무포장 제품이 많고, 바코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포스기에서 해당 제품을 찾아 입력하는 것이 쉽지 않다. 벌써 1년을 넘게 하고 있는데도 가끔 구매 제품이 많으면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나는 웃으며 제품을 찾아 입력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니 양해 부탁 드린다고 말씀드리고 포스기 화면을 열심히 살핀다. 그러면 대부분 네 대답하고 주위에 놓인 제품들을 더 둘러보곤 한다. 아까도 손님 한 분이 한 10개 정도 되는 제품들을 계산대로 가져와서 미리 시간이 좀 걸리니 양해해주십사 말씀을 드렸는데, 순간 너무나도 맑은 목소리와 너무나도 밝은 웃음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해주셨다. 그리고 계산대 앞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열심히 포스기 화면을 살피며 제품들을 찾아 입력하느라 바빴지만, 왠지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계산을 마치고 금액을 말씀드렸더니 역시나 환하게 웃는 얼굴로 카드를 내밀었다. 


별 것 아닌 웃음 하나가 참 사람 기분을 다르게 만드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 손님들은 현금이나 카드를 줄 때, 무표정이거나 딱딱한 표정이거나 가끔은 찡그린 표정이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현금을 세느라 혹은 카드를 찾느라 그런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 역시 다른 가게에서 계산할 때 어떤 표정이었을까 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대부분 무표정이거나 딱딱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우리 매장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일부러라도 더 많이 웃는 표정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면서 웃는 표정을 연습해야겠다.


또 달리기 이야기


요즘 어딜가나 누굴 만나나 계속 달리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출근할 때에도 뛰고, 퇴근할 때에도 뛰고, 외부 회의를 가게 되면 3 킬로미터 이내의 거리는 뛰어서 간다. 가끔 버스 노선이 돌아가는

경우에는 오히려 뛰어가는 것이 버스를 타는 것보다 더 빠르기도 하다. 어제도 저녁에 토론회를 가는 길에 뛰었다. 한 2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라서 10~15분 정도 걸릴 거라고 예상했다. 조금 피곤해서 천천히 뛰려고 했는데, 뛰다 보니 저절로 속력이 붙어서 나도 모르게 빨라지고 있었다. 도착해보니 9분 걸렸다. 중간에 두 번 정도 잠깐씩 걸었는데, 안 쉬고 계속 뛰었으면 조금 더 빨랐으리라.


도착해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데, 친한 동료가 오더니 "뛰어왔어요?" 하고 묻는다. 나는 "응, 요즘 어디 갈 때마다 뛰어다녀." 라고 대답했더니, "운동 중독이구만." 하고 답이 돌아왔다. 나는 계속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호흡을 가다듬다가 "나랑 같이 달리기 할래?"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다른 선배들도 땀 흘리는 나를 보며 한 마디씩 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저랑 같이 달리기 하실래요?" 물었다. 그들도 모두 고개를 저었다.


엊그제는 약 1.5 킬로미터 거리를 뛰어서 회의를 하러 갔다. 역시 다른 참가자들이 땀을 닦고 있는 나를 보며 한 마디씩 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난 후에 "달리기 같이 하실래요?" 라고 묻고, 달리기가 얼마나 좋은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 달리기 모임의 60대, 50대 언니들이 처음에는 잘 못 달리다가 이제는 엄청 잘 달린다는 사실을 알렸다. 역시 50대인 그 선배들은 조금은 귀가 솔깃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같이 하겠다는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나와 친한 남자 후배들 몇 명에게도 계속 달리기를 권하고 있다. 특히 뽈록 나온 배를 내밀고 다니는 녀석에게 권했더니, 두 번 정도 달리기 모임에 나와서 함께 달렸다. 확실히 한 살이라도 어린 것이 체력이 좋긴 좋구나 싶은 정도로 그 녀석은 처음에 잘 달렸는데, 거리가 점점 늘어나고 시간이 길어질 수록 급격하게 속력이 느려졌다. 내가 1~2 킬로미터 이상을 안 쉬고 계속 달리는 동안 그 친구는 도중에 쳐져서 더 따라오지 못했다.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책 소개를 보니 저자가 천천히 달리기를 강조하더라. 나는 천천히 오래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실 마라톤 같은 장거리 달리기를 원하는 건 아니다. 그저 지금보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멀리 달리고 싶은 생각 뿐이다. 그리고 나는 속도를 원한다. 천천히 달리는 것이 빨리 달리는 것보다 뭐가 더 좋은 건지 모르겠다. 이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냥 달리기 책이 나온 것 자체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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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11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이 달리기를 하시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나네요. 매일 뛰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달리기 예찬론자지요.
저는 뛸 자신은 없으나 다행히도 걷는 재미는 알게 되었죠. 처음엔 건강을 위해 매일 한 시간씩 걸었는데 습관이 되고 나니 힘들지 않더라고요. 요즘은 격일로 걸었는데 다시 며칠 전부터 매일 걷기로 바꿨어요. 다행히 걷는 즐거움을 알아서 걷는 운동에 대한 거부감은 없어요. 몇 보 걸었는지 달력에 기록하는 재미도 있답니다. 달리기 마니아 감은빛 님 파이팅! 입니다.^^

감은빛 2023-06-16 19:58   좋아요 1 | URL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죠.
저는 그 분만큼 글을 잘 쓰지도, 잘 달리지도 못 하지만, 저를 통해 그 분을 떠올리셨다니 영광입니다!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약수터에서 돌로 만든 역기를 들기 시작하면서 운동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긴 시간 근력 운동을 중심으로 했는데, 달리기를 좋아하게 된 건 한참 나중이예요. 근력 운동도 그렇고 달리기도 한 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 힘든 것 같아요.
페크님도 차근차근 달리실 수 있을 거예요. 저랑 한 번 달려보실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