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남자친구


"아빠, 냥이 남친 생겼어요."


지난 주 금요일 퇴근 후 아이들을 만나 맛있는 걸 먹겠다고 순대국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한창 사춘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감정을 앞세우게 되는 큰 아이가 건넨 말이다. 냥이는 큰 아이가 자기를 가르켜 칭하는 말이다. 평소 말을 건네면, 짧게 '냥"이라고 답하곤 한다.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네"와 같은 말이다. 


갑작스런 아이의 말에 난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곧바로 축하한다고 말해주고, 어떤 아이인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아이는 언젠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제일 먼저 아빠에게 말해줘야 한다고 당부했던 내 말 때문에 알려주는 거라 했다. 그게 언제였는지,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을 했던 건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난 알려줘서 고맙다고 했고, 무슨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아빠에게 말해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큰 아이가 아직 아기였을 때, 그러니까 두세살 즈음에 어린이집에서 사귄 남자친구가 떠올랐다. 아직 이름도 그래도 기억난다. 그 어린이집 아이들 중에 유독 둘이 친했다. 우리 아이를 데리고 가면 먼저 와있던 그 남자아이가 매일 현관으로 마중나왔다. 머리에 손수건을 얹고(마치 면사포처럼) 둘이서 "딴딴따단~ 딴딴따단~" 노래하며 결혼식 흉내도 많이 냈다고 들었다. 당시 내가 장난으로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냐고 물으면, 엄마 다음이 그 남자아이였고, 그 다음이 나였다.


그리고 네살 혹은 다섯살 무렵 어린이집을 옮겨다니다, 다른 어린이집에서 그 둘은 다시 만났다. 남자 아이가 먼저 그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고, 우리 아이는 다른 곳을 다니다가 중간에 옮겨왔다. 그 둘에 대한 소문은 이미 그 어린이집에 쫙 퍼져 있었다고 했다. 우리 아이 등원 첫 날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갔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이는 낯선 공간에 처음이라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그 남자아이는 옆 반이었는데, 우리 아이 담임이 옆 반 담임에게 말했던 건지, 옆 반 담임이 그 남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기대와 달리 서먹하기만 한 두 사람. 거기에 옆 반 담임이 그 남자 아이에게 새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한 마디 했고, 우리 아이 담임이 우리 아이에게 "질 수 없다!"며 힘내자고 했다.


당연하겠지만, 지금 아이는 당시에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그 아이 이름을 들려줘도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나는 그때부터 아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기면 어떤 기분일지를 가끔 생각해보곤 했다. 막상 그 때가 되니 별 다른 감흥은 없었다. 아직은 안심할 수 있는 나이라고 여기는 걸까? 어쩌면 좀 더 자란 후에 들었다면 다른 기분이었을까? 모르겠다.


어제 만난 큰 아이는 남친이랑 10일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아이의 얘길 들어보면, 주로 같이 지내는 건 친한 친구들, 즉 여자아이들끼리 어울려 지내는 듯 하다. 그 또래 아이들의 연애란 무엇일까? 아이는 나에게 아빠는 언제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었냐고 물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짝사랑은 했지만, 여자친구는 없었다. 여자친구를 사귄 건 고등학생 때였다. 어떻게 만났냐고 묻길래 남녀공학이 아니라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우리는 독서 모임에서 만났다고 했다. 등하굣길, 교회, 독서모임 등이 여성을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물론 나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여성들을 만나고 다녔지만, 그런 자세한 내용은 생략했다.


아이는 아빠의 청소년 시절 연애를 궁금해했고, 아빠는 아이의 연애가 어떨지 궁금하다. 서로 또 이야기 나눌 기회가 생기겠지.


사춘기 딸과의 소통


작년 언젠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평소에 사진과 별로 친하지 않기에, 거의 사진도 안 올리고 가끔 이동시간에 시간 때우러 들어가보곤 한다. 가끔 사진을 올릴 때는 아이들과 놀러갔을 때, 그 기억을 잊지 않으려 사진을 찍고, 그 공간에 올려둔다. 얼마전 큰 아이가 페이스북에 가입해서 나에게 친구신청을 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인스타그램에 가입해서 또 내 계정을 팔로하고 내가 지금까지 올린 모든 사진에 다 좋아요를 눌렀다.


자주 들어가보지 않기에, 그 사실을 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혹시 아이가 보면 안 될 사진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그러고도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말했듯이 내가 올린 사진이 많지 않기에 쭉 살펴보는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그런 사진은 없었다. 음식이나 술 사진이 몇 장, 책 사진이 몇 장, 하늘과 구름 사진이 또 몇 장, 나머지는 아이들 사진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랑 페이스북 친구 맺기를 싫어한다고 들었는데, 인스타 계정도 굳이 먼저 팔로하지 않는다면 내가 알 길이 없을텐데, 이렇게 먼저 치고 들어와서 친히 내 모든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주시니 참 요즘 아이답지 않구나 싶었다. 


최근 잘 쓰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이 망가져서, 새로 사려고 알아보다가 겨울이라 날이 추우니 헤드폰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친구 하나가 겨울이면 늘 헤드폰을 끼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하나 걸렸던 건 안경을 쓰고 헤드폰을 착용하면 귀가 아플거라는 생각이었는데, 오래 착용하면 어쩔수 없다 싶었다.


암튼 퇴근 후 긴 시간 동안 온라인 마켓에 올라온 온갖 제품을 검색하다가, 적절한 가격에 디자인도 꽤 괜찮고, 음질도 나쁘지 않은 제품을 골랐다. 다음날부터 외출할 때는 늘 헤드폰을 쓰고 다닌다. 귀가 정말 따뜻했다. 뺨은 살을 에이는 바람에 시려워도 귀만은 따뜻했다. 그래서 일터 건물 계단 큰 거울 앞에서 헤드폰 착용 사진을 찍고, 사진을 올렸다. 올해 겨울 별로 좋은 일이 없지만, 유일하게 좋은 일은 이 헤드폰을 산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인가 큰 아이가 그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았다. "아빠 ㅋㅋ 왜 그걸 귀마개처럼 쓰고 다녀요? ㅋㅋㅋㅋ" 뭐 이런 식이었다. 귀마개로 쓰려고 산 거니, 귀마개로 쓰는 거지. 게다가 음악도 들을 수 있는 귀마개라니 좋지 않니? 뭐 이런 답글을 달까 하다가 그냥 뒀다.


그리고 최근 아이들이 오는 날, 같이 저녁을 먹고, 집에 보일러를 켜고 따뜻한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아이가 '그림톡'이란 앱을 깔라고 했다. 그걸 깔고 보니 서로 그림으로 퀴즈를 내고 맞추는 게임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그려서 힌트를 주느냐에 따라 상대방에 맞출 수 있을지 없을지는 천차만별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로 한번씩 번갈아 퀴즈를 내고 맞추는 방식이라 마치 편지처럼 메세지를 주고 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북 친구 신청, 인스타그램 좋아요, 그림톡을 통한 퀴즈 주고 받기가 모두 아이가 아빠에게 말을 거는 과정이구나 싶었다. 아이는 지금 아빠와 소통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무심한 아빠가 그걸 잘 못 받아준 건 아닌지 뒤늦게 조금 후회가 된다.


아빠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 좀 미안하구나! 그래도 경상도 남자 치고는 아이들과 장난도 잘 치고, 자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자부한다. 이젠 조금씩 시간 내서 아이가 올린 사진에 좋아요도 눌러주고, 댓글도 달아줘야겠다. 이젠 손 편지 대신 이런 게 소통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고서점에서 구매한 책


 비록 잘 아는 처지는 아니고, 안면만 있는 정도이긴 하지만, 저자 두 사람이 다 아는 사람이라 출간 당시에도 사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번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발견하고 바로 구매했다. 


일상기술연구소라는 제목이 무척 마음에 든다. 적정기술처럼 우리 일상에서도 많은 기술들이 필요하다. 잘 읽고 이것과 비슷한 기획을 더 만들어보면 좋겠다.








 이것도 컨셉이 참 좋다 싶었다. 대충 훑어봤는데, 여기에 담은 영화들이 아주 대중적인 작품들은 아니라 조금 실망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 담긴 수많은 차별 이야기를 묶어보는 것. 정말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친구에게 빌려서 1번 읽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2번 읽었으니 총 3번 읽었다. 정유정의 장편은 다 읽었는데, 이 책이 제일 좋았다.


 언젠가 이 책과 [7년의 밤]은 자세한 서평을 쓰려고 공책에 몇 쪽에 걸쳐 자세한 분석도 해봤었는데, 결국 바빠서 글을 쓰지는 못했다.


내가 다시 장편소설을 쓴다면 이 책의 구성을 참조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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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3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6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7-12-1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무뚝뚝한 경상도남자 아니신 것 같은데요 ^^
저는 아예 제 아들 페이스북에 들어가볼 생각을 안하고 있지만 제 남편은 수시로 드나들다가 (그리고 드나든 티를 내다가) 아들에게 친구 차단 당했답니다 ㅠㅠ

감은빛 2017-12-16 00:50   좋아요 0 | URL
저런! 차단까지 당하셨다니!
저는 정말 아이의 SNS 를 찾아볼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친히 찾아와서 친구신청하고, 팔로할 줄은 몰랐어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되더라구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2017-12-16 0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8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11월 초에 제주에 짧게 다녀온 후로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또 제주에 왔다. 지난 번 강의를 들었던 분들 중에 제주 지속가능발전위원회 분들이 강의 내용이 좋았다고, 전국 지속가능발전협의회 포럼에서 발제를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일정으로 보면 도저히 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강의는 두 시간이지만, 이번 발표는 15분 내외의 시간이었다. 겨우 15분 발제하러 제주까지 가야 하다니! 하지만 이번에도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게다가 이번만큼은 지난번처럼 그냥 바로 올라오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주말을 끼어서, 맘껏 놀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쉬다가 돌아오는 시간 정도는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터에 양해를 구하고 하루 대체휴무를 쓰고, 토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을 잡았다. 일요일에 오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적어도 주말 하루는 아이들과 보내고 싶은 마음에 토요일 오후 늦게 돌아오는 일정을 잡았다.


목요일 오후 발제를 위해 점심때 비행기를 타야 하고, 다음날까지 주체측 포럼 일정에 모두 참여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순전히 주체측에서 제공하는 숙식을 제공받기 위해서였다. 호텔 숙박과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아침과 점심까지 제공받았다. 게다가 금요일 오전 일정인 비양도 지질 트래킹에도 관심이 많았다. 여러모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세 가지가 계획과 어긋났다. 하나는 가능하면 빨리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제주도로 출발해서 좀 느긋하게 쉬다 오자는 생각이었지만, 절대 그렇게 될 리가 없다는 걸 계획할 때도 짐작하고 있었다. 오히려 출발 당일 오전 비행기 시간을 놓치기 직전까지 일에 매달렸음에도 꼭 마무리지어야 할 일을 세 개 정도 미뤄두고 출발했다.


덕분에 지하철을 갈아타는 내내 열심히 뛰어야 했고, 간신히 수속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두 번의 환승역에서 전력 질주에 가깝게 뛰어, 두 번 모두 승강장에 막 들어오는 열차를 간신히 탈 수 있었고, 덕분에 지하철 어플 계산보다 20여 분 이상 일찍 도착했다.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비행기가 출발 예정시간을 넘겨 갑자기 항공기 터미널로 돌아가더니 정비를 한다고 몇 십분을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결국 이륙 시간을 보니 거의 1시간 늦게 출발했다. 마침 이날따라 좌석이 가운데 끼인 자리였고, 책이나 음악을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비행기를 정비하는 1시간 동안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걱정만 했다. 행사 시작 1시간 전에 도착하도록 비행기를 예약했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거리라, 점심을 먹고 행사장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착해보니 이미 행사 시작 직전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택시타고 바로 행사장으로 가야 했다. 이것이 두번째 어긋난 일이다.


세번째는 옷차림이다. 뭘 입고 가야할지 고민을 좀 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이라 정장을 입어야 하나 생각했는데, 문제는 정장 위에 입을 옷이 없었다. 파카는 너무 두꺼워 정장 위에 입기 불편하고, 어울리지도 않았다. 코트가 있긴 한데, 20년도 더 된 옛날 옷이라 너무 낡았고, 디자인도 좀 그랬다. 가을에 입을 만한 얇은 코트가 있긴 한데, 그것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했다. 그냥 평상복 차림으로 갈 생각이었다. 지난 강의 때도 그냥 편하게 입고 갔었다. 물론 그땐 겨우 5명이 들었지만, 이번에는 전국에서 1백명 가까이 모이는 행사라고 하니 성격이 다르긴 했다.


마지막에 선택을 바꾼 건 전날 있었던 강의 전 설명 시간 때문이었다. 전날인 수요일 오후에 나는 김익중 교수님 강의 앞에 10분 가량 설명 시간을 얻어서 발표를 할 계획이었다. 보통 얻기 힘든 기회였고, 최대한 잘 활용해야 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잘 설명할 것인가만 고민했는데, 오전에 사무실을 방문한 이사님이 내 옷차림을 지적했다. 구청장을 비롯해 공무원들이 엄청 많이 오는 자리인데다, 공식적으로 조합을 대표해서 나가는 자리에는 옷차림을 신경써 달라는 요청이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장을 입었어야 했나 하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고 강연 장에 갔는데, 진짜 나를 제외한 청중 1백여명이 모두 정장 혹은 정장에 가까운아주 포멀한 옷을 입고 왔더라. 그제서야 몇 년 입어서 낡은 내 파카가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 고민 끝에 정장을 입고 제주를 가기로 했다. 날씨 어플을 보니 서울보다는 훨씬 온도가 높더라. 제주는 그래도 따뜻한 남쪽 나라니까 괜찮을거야 싶었다. 반나절 서울에서 추운 것 쯤은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제주에 와서도 계속 추웠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특히 오늘 비양도 일정은 흐린 날씨에 정말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다른 참가자들 모두 내 옷차림을 걱정했다. 다행히 그새 조금 친해진 한 분이 자신의 목도리를 내게 양보해 목과 얼굴 아랫쪽을 가렸더니 한결 견딜만했다. 사실 내복도 입었고, 겨울 정장이라 몸은 그리 춥지 않았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목과 귀가 특히 시려웠다. 


이젠 이번 일정에서 좋았던 점들을 말해보자.


우선 인맥을 제법 넓혔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 앞에서 발표한 덕에 전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지난 내 강의를 들었던 제주 지속가능발전위 분들은 손님으로 온 나를 아주 잘 챙겨주셔서 무척 감사했고, 몇몇 지역에서 태양광에 관심이 많다고 특별히 말을 걸어온 분들과도 이틀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다.


사실 어제 점심도 못 먹고 저녁때까지 행사장에 있느라 무척 피곤하고 힘 빠졌지만, 저녁 식사하러 가서 맛있는 음식과 한라산 소주가 한 잔 들어가니 금방 또 활기를 되찾았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처음 만난 주위 분들과 대화를 나누며 술과 음식을 먹었다. 호텔방을 잡고 나서 다른 참가자들이 끼리끼리 2차를 가는 분위기였는데, 나도 슬쩍 낄까 말까 고민을 좀 했다. 끼어들려면 충분히 낄 수 있었지만, 이미 식사하면서 한라산 1병을 혼자 마신 것이 조금 부담이었고, 처음 만난 분들과의 술자리에서 완전 오버하곤 하는 내 성격 때문에 망설여졌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비양도 들어가는 배를 타야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오늘 아침에 다녀온 비양도는 정말 좋았다. 운이 정말 좋은 편이라고 했다. 어제만해도 배가 뜨지 못할 정도로 파도가 높았다고 한다. 오늘도 파도가 높아서 배가 정말 크게 흔들렸는데, 그때마다 여성들과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높았다. 바이킹을 타는 듯 심장이 철렁철렁 떨어지는 느낌을 1초마다 한 번씩 느꼈다. 암튼 비양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생긴 화산섬이다. 고려시대에 터진 화산으로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있다고 했다. 정말 신기한 걸 많이 봤다. 


잔뜩 흐린 날씨에 엄청난 바람이 끝없이 불어서 제법 추웠지만, 그래도 바다 색깔이 정말 예뻤다. 구름이 잔뜩 낀 어두운 하늘도 좋았다. 아마 서울이었다면 회색 도시의 회색 하늘이 좋을 리 없었겠지만, 제주여서 그리고 비양도여서 참 좋았다.


천천히 두 시간 가까이 걸으며 다음에 아이들과 놀러와야지 생각을 했다. 달리 같이 올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애들 생각부터 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사실 아이들은 이렇게 많이 걷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산을 오르내리는 것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급경사 지역이 몇 군데 있었는데, 아이들이라면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울음을 터뜨릴만한 곳이었다. 



비양도에는 한림초등학교 비양분교가 있는데, 전교생이 2명이다. 5학년 1명, 3학년 1명, 같은 집 아이들이다. 이 학교에는 분교장이자 담임선생님인 교사 1분과 행정교사 1분 이렇게 두 명의 선생님이 계시다. 학생 2명에 교사 2명인 학교. 학교가 아담하고 포근한 느낌으로 참 예뻤다.


비양봉을 내려와 배가 오기까지 시간을 보낸 찻집 주인이 이 두 학생의 엄마였다. 그리고 늦동이 막내가 현재 5살인데, 매일 제주도로 배를 타고 어린이집을 다닌다고 한다. 큰 아이가 분교를 졸업해도 막내가 학교에 들어갈 것이기에 또 학생은 2명으로 유지될 것이다.



비양도를 나와서 마지막으로 일행들과 맛있는 밥을 먹고 헤어졌다. 주최측에 불러주셔서 감사하고, 정말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고 진심을 담아 인사를 전했다.


이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제주에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모두 연락을 못하고 지낸지 너무 오래라 갑자기 전화하기가 좀 그랬다. 그냥 올레길이나 좀 걷고, 맛있는 걸 먹고, 근처 숙소에서 푹 쉬면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여전히 강한 바람 때문에 걷기가 힘들었다. 어쩔수 없이 버스로 일정 구간을 이동했고, 그 동안 숙소를 예약했다. 중간에 내려 올레길을 찾아 걸었다. 한참 걷다 보니 해가 따뜻하게 등을 데워주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강했지만, 그래도 견딜만 했다. 한참을 걷다가 바람 좀 피하고 가야겠다 맘 먹고 여기 커피숍에 들어와서 글을 쓴다.



 

이제 슬슬 나가서 숙소까지 좀 더 걷고, 숙소에 가방을 놓고, 저녁에 뭘 먹을지 좀 고민해야 겠다. 근데 점심때 잔뜩 먹은 탓에 아직도 배가 빵빵하다. 흠 숙소에서 푸쉬업이나 버피라도 좀 해야 저녁을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덧) 어제 밤에 호텔에서 씻고 거울에 알몸을 비춰보고, 멋진 내 몸에 또 한번 반했다! 누군가 내게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쓰냐고 묻던데, 내 눈엔 내 몸이 너무 멋진데 어쩌란 말인가? 심지어 지난 3달 동안 어깨 통증으로 운동을 못 했음에도, 어제 저녁에도 잔뜩 먹어서 배가 꽉 차 있었음에도, 멋있었단 말이다. 물론 배가 꽉 차 있어서 평소보다는 복근이 안 보이긴 했다. (평소엔 제법 선명하게 보인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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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12-01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협재해변에서 바라보는 비양도 뭔가 신비로워 보였는데, 아직 비양도에 들어가보지는 못했네요
감은빛님 글 보니 비양도에 가고 싶어집니다

감은빛 2017-12-13 21:52   좋아요 0 | URL
바람이 무척 강한 날이었고, 날이 정말 추워서 덜덜 떨면서 보았는데,
정말 눈 돌리는 곳마다 예술작품이 따로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섬은 작지만,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chika 2017-12-02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양도에는 너무 오래전에 갔었던지라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갠적으로 아이들과 함께가는건 가파도 추천요. 학교도 이쁘고 간혹 개도 보이고 걷기에도 좋고. ^^;;
아, 화산섬에 대한 탐구를 위해서는 비양도가 좋을수도 있겠군요. 물론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모든곳을 다 가보는것이 좋겠지만. 우리네 삶의 환경이라는건. . . ㅠㅠ

감은빛 2017-12-13 21:55   좋아요 0 | URL
사실 지질 트래킹이라고 하나의 생태관광 상품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해설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걸으니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가파도 추천 고맙습니다!
당장은 아이들과 움직이기 어려울 듯 한데,
그래도 1년에 한 두번은 여기저기 돌아다녀보고 싶어요.

그게 아이들에게도 저에게도 추억이자, 일상을 견디는 큰 힘이 되리라 믿어요.
 

제주도 강의 섭외 전화를 받았던 건 몇 달 전이었다. 누군가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그 누군가가 누군지는 오늘 와서 확인했다. 네임 밸류로 따지면 영광이다 싶었다.

사실 엄청 바쁜 시기에 시간 빼서 제주까지 오는게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명확한 이유 없이 강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 게다가 나만 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사실 얘기를 듣는 순간,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강의구나 싶었다.

10월 말까지 강의자료는 보내기로 했는데, 다른 일로 바빠서 어제까지 손도 못 댔다. 어제 낮에 조금 하다 말고 외부 일정 때문에 나갔고, 밤 9시가 훌쩍 넘어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 가서 강의자료는 완성해야지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가볍게 한잔 하고 헤어지니 자정이었다.

결국 회의자료는 만들지도 못하고 피곤해 잠들었고, 아침에 급하게 2시간만에 만들어서 보내고 회의를 갔다.

오후 3시45분 비행기였는데, 오전 회의와 오후 면담 일정까지 있어서 정신없이 바빴다. 급하게 움직여 간신히 비행기 시간을 맞췄다. 이게 몇 년만의 비행기냐? 몇 년만의 제주도냐? 그렇지만 저녁에 강의하고 밤에 끝나서 하루 자고 다음날 바로 서울로 돌아와야 하니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탄것도 아마 제주도였다. 12년쯤? 그때도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이번 제주행은 어떨까?

강의는 참가자가 적어 아쉬웠지만(지금껏 내 강의 중 가장 적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강의했다. 강의를 마친후 밤늦게 제주 흑돼지 삼겹살과 한라산 소주를 늦은 저녁으로 먹었다.

지금은 주최측에서 결제해준 호텔에 짐 풀고, 호텔 9층 라운지에서 맥주 쿠폰으로 밤 바다 바라보면 맥주 마시는 중.

강의도 열심히 했고, 오랜만에 제주에 왔고, 밤 바다를 보는 것도 정말 좋은데, 기분은 썩 좋지 않다. 그냥 나 여기서 뭐하고 있지? 그런 기분. 에이 술이나 더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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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운 주말

최근 2주 아니 3주 동안은 계속 이틀 연속 잠 안자고 일하고 한나절 정도 뻗어있다가 다시 잠 안자고 일했다. 예전에는 평소엔 야근해도, 애들 오는 날엔 무조건 퇴근해서 애들과 시간을 보냈는데, 요 2주 가량은 애들이 오는 날에도 저녁만 같이 먹고 애들을 아이들과 애들 엄마가 사는 집(그러니까 작년 여름에 내가 나온집)으로 데려가 잠시 같이 놀고, 씻기고, 재우고 나저, 11시쯤 애들이 잠들면 나는 다시 사무실로 가서 일을 했다. 그래도 계속 일이 쌓였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집중력이 떨어지고, 속도가 느려졌음을 깨닫는다. 이유는 모르겠다. 뭔가 원인이 있을텐데, 지금은 그걸 고민할 여유가 없다.

지난 수요일, 애들이 오는 날이었지만, 밤에 일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어서 지난주처럼 11시쯤 애들을 재우고 사무실을 향했다. 가면서 아침에 마실 에너지 음료와 새벽에 배고프면 먹을 컵라면을 샀다. 요즘은 아침에 에너지음료를 마셔도 낮이되면 피곤해 견딜수가 없길래 낮에도 마시려고 2개 샀다.

밤새 일하고 낮에 보완하면 끝낼수 있을것 같았다. 근데, 밤새고 아침에 너무 피곤해 잠시 졸았고, 갑자기 다른 일들이 몰려들어 일과 시간엔 그 일을 손대지 못했다. 퇴근 시간 이후 다시 야근을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세부적으로 손대야 할 부분이 많았다. 애초에 판단을 잘 못 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꼼짝도 안하고 일만해도 하루 이상 더 걸릴 일이었다.

수요일과 목요일 이틀 밤을 지새고 금요일 아침, 컨디션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몰골이 너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옷도 갈아입고 좀 씻고 싶어서 집으로 갔다.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다시 사무실로 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아주 잠깐만 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30분만 누워있다가 나가야지. 알람을 두 개 맞췄는데, 잠들었고, 깨보니 5시간을 잤더라.

오후 늦게 출근해 다시 일을 시작했다. 금요일이니 가능한 빨리 일을 끝내고 맘편히 술 한잔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저녁에 우리 사무실 건물에서 녹색당이 함께 참여하는 행사가 있었고, 어쩔수 없이 거기 얼굴을 비춰야했다. 저녁도 못 먹고 일하고 있었는데,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잠시 쉬다가 밤에 끝낼 생각이었다.

오랜만엔 만난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12시가 넘어갔고, 1시쯤 같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향했다. 나는 술 한 잔이 더 땡겼지만, 남아서 다시 일했다. 기필코 이 일을 마치고 가리라 생각했다.

책상에 앉았는데, 집중이 안되어 잠시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다 졸았다. 정신을 차리니 새벽 3시였다. 빨리 마무리하고 해뜰때 집에 가야지 했는데, 막상 또 일을 해보니 남은 분량이 적지 않았다. 그냥 넘어가려던 부분을 혹시나 싶어 살폈더니 다 다시 써야했다.

토요일 아침 다른 사무실엔 아무도 나오지않아 조용했다. 아이들과 토요일 점심때 만나 놀러가기로 약속했는데, 애들 엄마가 낮에 애들과 다녀올 곳이 있다고, 저녁에 만나라고 했다.

좀 힘이 빠졌다. 이왕 이렇게 된거 좀 쉬다가 해야지 싶어서 책상에 엎드려 잠깐 잤다. 1시간쯤. 다시 일을 했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도 멍하고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엉덩이가 다 아팠다.

결국 토요일 저녁 8시, 애들이 집에 돌아왔다고 연락왔을때까지도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나도 마음이 급했다. 빨리 마치고 애들 만나러 가야하는데 이건 뭐하나 손대면 예상했던 시간의 몇 배가 더 걸렸다.

밤 9시가 살짝 넘어 이젠 도저히 더 못 하겠다 싶었을 때, 전체 작업의 97퍼센트 가량 마무리했다. 일요일 밤에 나와서 마무리해야지 생각하고 애들을 만나러 갔다. 정말 피곤하고 배고파서 족발에 소주를 마시고 그냥 뻗었다.

일요일 아침, 밥을 하기 너무 귀찮아서 밖에서 애들 먹을 것 몇가지를 사다놓고 다시 뻗어서 잤다. 잠을 깨니 일요일 저녁이다. 정말 사무실에 앉아 일한 것과 피곤해서 잔 거 외에는 아무것도 못했다. 원래 계획은 아이들과 주말 여행을 다녀오는 거였는데.

이제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나는 다시 사무실에 나가 일을 해야하는데, 정말 하기 싫다! 이게 무슨 주말이야!

낯선 느낌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쓸 생각인데, 일단 말 나온김에 언급만 하자. 최근 애들을 재워놓고 애들 엄마가 올 때쯤 나간 일이 몇 번 있었다. 하루는 애들 엄마가 아예 친구집에서 자고 온다해서 그 집에서 아이와 함께 밤을 보내기도 했다. 함께 잤다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는 그날밤도 컴퓨터 앞에 앉아 일했기 때문이다.

암튼 작년 여름 짐을 싸서 나온 그집은 이제 애들엄마와 아이들만 산다. 더이상 내집이 아니었다. 그 느낌이 무척 낯설고 싫었다. 아직 어린 작은 아이가 가끔 아빠가 다시 돌아와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데, 이 집에 있으니 복잡한 기분에 휩싸여 힘들었다.

가끔 옆 사무실 사람들이 밤새고 아침에 퀭한 상태로 화장실을 오가는 나를 자주보고 그러다 집에서 쫓겨나지 않느냐고 묻는다. 애들엄마와 나 둘 다 영역은 다르지만 동네에서 활동하기에 일부로 공개적으로 이혼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친한 사람들 몇 명만 알고 있다. 그들에게 이미 쫓겨났다고 말하면 뭐라고 할까? 무슨 번거로운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씩 웃고 말았다.

확실히 혼자 살게 된 이후 야근을 하다 늦어지면 그냥 밤을 새는 날이 많아졌다. 텅빈 쓸쓸한 집에 돌아가봐야 뭐 좋은 일도 없는데.

암튼 이제 사무실에 가서 하던 일을 끝내야 한다. 오늘을 넘겨 내일까지 이 일을 끌고가면 매우 곤란해진다. 이번주도 또 엄청 바쁜 일정이다. 정신차리고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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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11-06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을 이해하고 알 것 같아요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보냅니다
몸을 너무 혹사시키지 마세요 ㅠㅠ

2017-11-09 0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려다보다


일터는 건물 3층. 내 자리에선 왕복 5차선 도로를 오가는 차량들이 보인다. 건너편 인도를 걸어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지금은 폐업하고 문이 닫혀있지만, 한때는 문을 열어놓고, 가게 앞에 잡다한 물건들을 진열해두었던 잡화점도 보인다. 그리고 시선이 닿을듯 말듯 저 멀리 편의점도 볼 수 있다.


그날은 아마 더운 여름이었다. 아침부터 시청에서 회의를 하고, 구청과 세무서에 들러 각종 서류를 발급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라면 헐렁한 반팔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출근했겠지만, 그날처럼 공무원들과 회의를 하거나, 거래처를 방문하는 등 외부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하는 날에는 되도록 셔츠에 긴바지를 입는다. 오래전 여기가 아닌 다른 시에서 다른 분야에서 일할 때, 목이 늘어난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출근한 날, 갑자기 시청 문화국장이랑 면담이 잡혀 방문했다가 엄청나게 무시당한 일이 있었다. 물론 당시 나는 옷차림만 보고 날 무시했던 국장의 거만한 태도를 되갚아주었다. 문화재 관련 업무 파악이 채 되지 않았던 국장을 지적하며 부하직원들 앞에서 망신을 주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가능하면 내 능력이 아닌 옷차림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아서, 평소에는 무척 자유로운 옷차림으로 출근하지만, 외부에 공적인 업무가 있는 날엔 꼭 평범한 직장인과 비슷한 느낌이 날만큼의 복장을 챙기려고 노력한다.


아, 그러니까 그날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관공서 3곳을 오가며 진행하는 사업과 관련한 담당 공무원만 대여섯명 이상을 만났던 날이다. 오랜만에 꺼내입은 셔츠는 답답하고 불편했다. 긴바지 역시 갑갑했다. 겉으로는 공무원들에게 최대한 일 잘하는 스마트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면서, 속으로는 후줄그레 한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했던 어제를 떠올리며 빨리 오늘 하루가 아니 적어도 이 회의시간만이라도 지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렀던 세무서에서 일터까지는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였다. 걸으면 대략 15분 걸릴 정도의 거리. 햇빛은 뜨거웠고,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지만, 나는 습관적으로 그러니까 너무나도 당연히 그냥 사무실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한참 걷다가 땀에 젖어 몸에 붙은 셔츠 자락을 손가락으로 떼어내며,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다가 막 옆을 지나가는 버스를 보았다. 그 안에 타고 있는 한 여학생의 얼굴도. 저 학생은 시원하게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겠지. 비록 학교를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덥고 땀이 엄청 났겠지만, 버스를 타고 잠시 앉아 있는 동안 시원한 에어컨 바람 덕분에 그 땀이 다 날아갔을거야. 그래서 지금 쾌적한 버스 안에 앉아 이렇게 땀을 닦으며 땡볕에 서있는 나를 보고 지나가고 있는 거야. 무심코 저 멀리 내가 걸어서 지나온 버스 정류장을 돌아보았다. 나는 왜 저기서 버스를 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가? 이 더운 날에 말이다.


그렇다고 다시 저기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방금 버스가 지나갔다. 다음 버스가 오려면 적어도 10분 이상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 시간이면 사무실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다시 가슴에 달라붙은 셔츠 자락을 떼어내며 걸었다. 목이 말랐다. 시원한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머리로는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편의점에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음료수 병을 꺼내 계산도 하기 전에 벌컥벌컥 마시는 나를 상상하면서 걸었다.


두 통의 업무 전화를 받아 대화하면서 걸었더니 금방 일터 근처에 도착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되는데, 그 앞에 편의점이 보였다. 그래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잠시 멈춰섰다가 냉장고를 향했고, 상상에서처럼 계산도 하기전에 한 병을 다 마셔버리고 싶었지만, 습관적으로 음료수 병을 계산대 앞에 놓았다. 가만, 가방에 담배가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은데, 사무실에는? 어제 저녁 야근하다가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담배갑을 구겨서 휴지통에 넣었던 장면이 영화 장면처럼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쪽하늘에 빨갛게 석양이 타오르고, 나는 옥상 난간에 한 팔을 얹은채 마치 멋진 영화배우처럼 담배를 물었다가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지만, 왼손으로 옆머리를 슬쩍 넘기며 고개를 한번 치켜드는 듯한 동작을 잊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 아니 어느 여성이 보았다면 멋있다고 생각했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멋있게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던 장면이 머리속에서 상영되었다.


"천팔백원입니다." 

순간 밝고 상쾌한 느낌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유니폼 조끼를 입고 모자를 쓴 여성이 계산대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잠시 멈춰있던 나는 담배를 사려고 했던 사실을 겨우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다. 

"저기"

음, 내가 피우던 담배 이름이 뭐였더라? 요즘 담배는 이름을 외우기가 너무 어렵다. 처음 담배를 배웠던 시절에는 훨씬 쉬운 이름이었다. 청자, 백자, 팔팔, 도라지 얼마나 외우기 쉬운가? 아니 외울 필요 자체가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더라? 보헴 시가 쿠...... 쿠 머시기였는데, 쿠바? 그래 이름에 쿠바가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그게 다가 아니었는데, 아씨! 모르겠다.


나는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아까부터 나를 쳐다보는 여성의 뒤편 담배 진열장을 훑으며 익숙한 색깔을 골라내려고 애썼다. 잘 보이지 않았다. 담배 종류가 너무 많았다. 요즘은 이름도 어렵지만 종류도 너무 많다. 내가 처음 담배를 배웠던 시절에는 종류도 몇 개 없었다. 청자, 백자, 팔팔 아니 그만하자. 빨리 담배를 고르지 않으면 저 계산대에 있는 여성의 불쾌지수가 올라갈 것이고, 나를 한심하게 아니 재수없게 여길지 모른다.


일단 손가락으로 아무곳이나 짚었다. 여성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내 손가락이 가르키는 곳을 돌아보았고, 담배 한 갑을 꺼내 앞면을 내게 보이며 물었다.

"이거요?"

뭔지 이름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찾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거 말고, 저, 이름이 생각나지 않네요. 보헴 시가......"

그는 빠르게 보여주던 담배를 꽂아두고 한발짝 걸음을 옮겨 보헴 시가 종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보헴 시가 몇 미리요"

내가 피웠던 게 몇 미리짜리였던가? 대략 10년전 하루에 한 갑 반에서 두 갑 가량 피우던 담배를 약 1년 이상 끊었다가 다시 피웠을 때부터 담배 피우는 양이 확 줄었다. 그때부터 특정 담배 이름을 외워서 피우는 것이 너무 귀찮았다. 누군가 피우는 게 있으면 그걸 따라 피웠고, 이름따위 잘 외우지 못했다. 어차피 나는 사람 이름도 잘 외우지 못하는데, 담배 이름을 외울 수 있을리 없었다. 그 복잡하고 이상한 외국말로 된 뜻도 모를 긴 이름들. 그런 내가, 이름조차 못 외우는 내가 몇 미리짜리였는지 숫자를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예전에는 담배 이름만 알면 되었는데, 이젠 미리 수까지 알아야 하나? 팔팔은 그저 팔팔이었을 뿐. 팔팔 일미리, 팔팔 오미리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팔팔이 몇 미리짜리 담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의 이름을 가진 담배가 타르 함량에 따라 1밀리그램과 5밀리그램 등으로 나눠 다른 담배가 있었다. 저 보헴 시가는 종류가 유난히 많았던 것 같은데, 대여섯개쯤이었던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걸까? 많이 지났을까? 아니면 머리속으로 생각했으니 깨닫지도 못할만큼 짧은, 찰나의 시간만이 지났던 건 아닐까? 유니폼과 모자를 쓰고 계산대에 서있는 사람의 표정을 슬쩍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그 표정은 뭐랄까? 욕을 하고 싶은데, 애써 참으며 영업용 웃음을 보이려 노력하는 표정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무표정이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별 일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워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하고 슬쩍 스쳐 보았더니 표정을 잘 읽지 못하겠다. 아니 모자 때문에 잘 안 보였던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그나저나 빨리 담배를 선택햐야 할텐데, 대충 골랐다가 맛 없는 담배를 피우는 건 정말 싫고, 그랬다면 비싼 담배 한 갑을 버리는 느낌이다. 아마 정확히 스무번 이 순간을 떠올리며 후회할 것이다. 지금 잘 골라야 스무번 담배 맛을 만끽하며, 아무도 쳐다보는 이 없는 옥상 난간에 기대어, 멋진 자세로 손을 뻗어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가, 연기를 길게 내뿜고는 손가락으로 옆 머리를 슬쩍 넘기며 고개를 살짝 치켜드는 듯한 연속 동작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나는 무더웠던 여름날, 그날따라 유난히 더웠던 날, 아침부터 공무원들과 마라톤 회의를 하고, 구청과 세무서에 들러 복잡하고 귀찮은 서류를 잔뜩 작성하고 나와서, 갈증을 느끼며 긴 거리를 걸어 편의점에 들어왔는데, 담배를 고르지 못해서 아직 계산을 끝내지 못했고, 그래서 아직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바로 세 발짝 거리에서 나를 한심하게, 아니 재수없게, 아니 무표정으로 쳐다보는,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쓴 여성 앞에 서서 어쩔줄을 몰라하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바로 다음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내가 뭔가 말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몸을 돌려 담배를 뽑아서 기계적인 동작으로 바코드를 찍었을 것이고, 음료수 가격 1,800원과 담배 가격. 음 담배 가격. 아마도 4,500원? 아마 맞겠지? 그럼 1,800원 더하기 4,500원이니까. 음 8 더하기 5는 13이고, 음 1에 4를 더하고 다시 1을 더해야 하니까. 음 오천 아니 육천삼백원인가? 암튼 그는 예의 그 밝고 상쾌한 목소리로 그 가격을 불러줬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땀에 젖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땀이 묻은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지폐가 있는지 슬쩍 보았다가, 카드를 꺼내 눈치를 보며 내밀었을 것이다. 만원짜리 지폐가 있었을 수도 있으나,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어떻게 무엇을 골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담배를 고르고, 육천삼백원인지 아닌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그가 금액을 말할 때, 예의 그 밝고 상쾌한 목소리가 맞았던가? 안그래도 불쾌지수가 높은 여름 오후, 평소라면 손님이 없을 가장 한가한 시간에 들어와 겨우 음료수 한 병을 올려놓고는 담배를 고르는 척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저 한심한 아니 재수없는 아니 잘생긴 아니 그냥 평범한 인상의 이상한 아저씨 때문에, 인스타그램이나 아니 트위터나 아니 페이스북이나 아니 카카오스토리를 들여다보고 있을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원망하며, 처음 인사했을 때의 그 밝고 상쾌한 영업용 목소리가 아닌 본심이 드러난 낮은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아니면 평소 손님이 없을 가장 한가한 시간에 갑자기 들어와 살짝 놀라며 밝게 영업용 목소리로 인사했더니, 겨우 음료수 한 병을 가져와 계산대 앞에서 담배를 고르는 척 하며 에어컨 바람을 계속 쐬고 있는 저 땀에 젖은 셔츠의 아저씨 때문에 영어 공부를 혹은 일어 공부를 혹은 중국어 공부를 혹은 일어 공부를 혹은 스페인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애써 태연하게 아까 인사할 만큼 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낮거나 어둡지는 않은 목소리로 육천삼백원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은 그 금액을 말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계산대 위에 영어책이 접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게 일어책이나 중국어책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스페인어 였을 수도 있지만, 분명 책이 놓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음 머리속에서 영화 필름을 되감듯 기억을 뒤로 돌려본다. 그러니까 내가 음료수 병을 꺼내 계산대에 올려놓았던 바로 그때, 스톱. 자, 여기서 잘 보면 저기 그가 계산대를 짚은 오른손 새끼 손가락 끝이 책 모서리에 닿아 있다. 책의 글씨는 잘 보이지 않는데, 저건 분명 뭔가 어학책이 틀림없을 것 같다.


아니 잠깐 그런데 다시 보니 책의 판형이 그러니까 크기가 일반적인 어학서적 판형이 아니네. 그럼 저건 에세이나 소설책인가? 그렇다면 그는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 근처 반지하 단칸방에 살며, 학비와 월세를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편의점에서 일하는, 그 와중에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시간을 아껴가며 틈틈히 영어를 아니 일어를 혹은 중국어나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학생이 아니었던가?


이번에는 빠른 속도로 필름을 돌려 육천삼백원인지 아닌지 정확하지 않은 금액을 말하고, 내가 땀에 젖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땀이 묻은 지갑을 꺼내, 만원짜리 지폐가 있는지 확인하고, 당연히 없었기에 카드를 꺼내 눈치보며 내밀었던 그 순간, 얼핏 훔쳐본 그 얼굴이 나오는 장면에서 멈춰보자. 여기 아니 조금 더 가서 여기. 음 역시 훔쳐본 얼굴이라 해상도가 높지 않은데, 조금 확대해서 보면, 전체적인 인상이 어려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학생인 것 같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한데, 해상도가 떨어져서 뭐라 말할 수가 없네.


그렇다면 유니폼을 입고 모자를 쓰고 계산대에 서있는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하려다가 비싼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마음을 바꿔 취직을 하려 했지만, 쉽지 않아서 계속 이력서를 넣어보고,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국 편의점에서라도 몇 시간 일을 해서 입에 풀칠은 해야 하기에 억지로 앉아 있는 20대 중반 혹은 후반의 여성인데,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는 낮 시간이고, 손님도 별로 없는 위치에, 유난히 가까운 거리에 경쟁 편의점이 많고, 유난히 가게 크기가 작고, 유난히 취급 품목이 적은 편의점이라 상대적으로 한가한 편의점이기에 지겨운 낮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소설이나 에세이를 가져와 읽고 있던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카드를 건네받은 그가 단말기에 카드를 꽂고, 계산이 끝나고, 카드를 꺼내 내게 돌려주려고 고개를 들고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갈증을 참지 못해 카드를 건네자마자 음료수 병을 낚아채어 뚜껑을 비틀어 열고 벌컥벌컥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에 서서 카드를 돌려주기 위해 팔을 뻗은 그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젖힌 김에 고개를 한 번 흔들어주어 머리칼에 묻은 땀이 공기중으로 흩어지고, 흩뿌려진 땀방울 중 하나가 그에게 날아가 내게 카드를 건네던 손등에 떨어지고, 나는 음료수 병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시고, 캬~ 라고 감탄사를 크게 내뱉고 싶었지만, 이건 맥주가 아니고, 그래서 오버라고 생각하고 감탄사는 생략하고, 이제서야 그가 내민 손을, 그 손등에 떨어진 내 땀방울을 아니 그 손이 쥐고 있는 내 카드를 보고 나도 손을 내밀었다.


내가 내민 손이 그가 내민 손에 닿으려는 그 순간, 아니 그러니까 카드를 건네주고, 건네받기 위해 서로 내민 손이지만, 늘 항상 언제나 두 손이 정확히 카드의 양쪽 끝을 붙잡고, 정확하게 건네주는 이가 손가락 끝에서 힘을 빼고, 건네받는 이가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교환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아마도 99.99 퍼센트 쯤? 아니 뭐 한 70이나 80 퍼센트쯤? 아니면 한 30 퍼센트라도 두 사람의 손이 닿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게 굳이 건네주는 이가 여성이라서 일부러 혹은 고의로 손가락이 정확하게 카드의 끝을 붙잡을 수 있는 거리보다 조금 더 뻗어서 그 손가락 끝에 살짝 닿도록 뻗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성이 카드를 건네주는 경우에도 여성의 경우보다 그 빈도는 조금 아니 어쩌면 조금 많이, 아니 확실히 떨어지지만, 손가락이 닿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손이 닿았고, 그 짦은 순간 마치 전기가 흐른 것처럼 찌릿한 느낌과 함께 심장이 뛰었다. 보통 그런 순간을 심쿵이라고 표현하던가?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황한 표정인지, 기분나쁜 표정인지, 아니면 그냥 별일 아닌 듯 무표정한 얼굴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 표정은 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그냥 무표정인 듯 했다.


돌려받은 카드를 다시 땀이 묻은 지갑에 넣고, 땀이 묻은 지갑을 다시 땀에 젖은 바지 뒷 주머니에 쑤셔 넣고, 손에 쥔 음료수 병 뚜껑을 열고, 차가운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시며 이제 이 편의점을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아니 돌려서 한 두어발짝 걸어서 문 앞에 다다랐는데, 높은 목소리로 조금은 다급한 듯한 느낌으로 그가 불렀다.


"저기요!"

나는 마시던 음료를 삼키고, 뚜껑을 돌려 닫으면서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의 얼굴이 또렷이 보인다. 아까까지는 내가 좀 더 안쪽에 서서 밖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진 그를 비스듬한 각도로 보고 있었기에, 거기다 모자까지 쓰고 있었기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햇빛을 받아, 큰 검은 눈과 오똑한 콧날과 작고 도톰한 붉은 입술과 갸름한 얼굴 선이 보였다. 예쁜 얼굴이었다.


출입문을 나서려는 내가 나가버리기 전에 불러 세우기 위해 다소 긴장한, 조금은 다급한 표저이었다.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진 듯. 눈동자는 출입문 그러니까 내 쪽으로 치우쳐있고, 입이 살짝 벌어진 상태, 그러니까 "요" 발음이 끝나는 상태의 입술 모양으로 멈춰있었다. 


머릿속에서 화면을 멈춰놓고 그 입술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확대해본다. 입맞추고 싶은 입술이다. 분명 당시에도 저 입술을 본 순간,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입맞추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분명 그랬을거라고 확신하며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그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까 카드를 건네받을 때 살짝 닿았던 손이었다. 이번에는 담배갑을 쥐고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 고민한 후에 무엇을 선택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그 담배를 나는 놓고 나가려던 것이었다. 


"아! 예"

순간 부끄러운 감정이 들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당황한 나는 얼른 달려들어 낚아채듯 담배갑을 받아왔다. 이번에도 아주 짧은 순간 손이 닿지 않았을까 떠올려봤는데, 이번에는 분명 손이 닿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황한 내가 너무 급하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 담배갑을 낚아채려고 뻗은 손이 너무 빨랐고, 거리 조절이 되지 않았고, 그래서 내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던 것이다. 


당황한 그는 짧은 비명과 함께 담배갑을 놓고 손을 뺐고, 내게 잡혔던 희고 작은 손은 빠른 속도로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담배른 아래로 떨어졌고, 나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붉어진 얼굴로, 어쩔줄을 몰라하며, 나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뻗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동시에 허리를 급하게 숙여 담배를 주웠다. 그리고 곧바로 90도로 깍듯이 절을 하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뭔가 그의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까 잠시 기다렸다. 아무런 답도 없었다 다만 당황해서 흥분한 그의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조심스레, 천천히 고개를 들며 허리를 세웠다. 차마 그 얼굴을 바라볼 용기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 표정은 확실히 화난 표정이었다. 아니 당황하고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었지만, 아주 조금 화가 섞여 있었다. 나를 노려보는 듯한 눈빛이 마치 내뿜는 레이저 광선처럼 느껴졌다. 내가 한 번 더 사과를 해야하나? 너무 당황해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 손을 덥석 잡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찰삭 소리나게 때리듯 잡았던 것은 아닌가? 혹시 다치지 않았는지, 손자국이 나진 않았는지 손을 보여달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상황에서 손을 보여달라고 하면 오히려 더 화를 내지는 않을까? 고민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혹시 다치신 거 아닌가요?"

다시 한번 사과하며 이번에는 고개만 살짝 숙여 절을 하고,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는 내 왼손에 짧은 순간 잡혀있다가 빠르게 뻬낸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쥔 채, 움직이지 않고,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서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조금 오래 침묵이 흘렀을 지 모른다. 어쩌면 아주 짧은 침묵이었을 수도 있다. 내겐 아주 긴 시간이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그에게도 긴 시간이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짧았을지도 모르는 그 조용한 순간, 서로가 움직이지 않고 그저 상대를 주시하던 그 순간, 그의 숨소리가 들리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동자만 움직여 그의 가슴을 보았다.


유니폼 조끼를 입은 가슴은 흥분해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실제로 그 거리에서, 실제로 그의 가슴이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그렇게 보았을 것이라고, 그의 가슴이 그렇게 요동치듯 뛰고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왜 그순간 내 시선이 가슴으로 행했을까?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챘을까? 그랬다면 엄청난 변태라고 생각했겠지? 암튼 나는 내 시선이 나도 모르게 가슴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놀라며 다시 그의 눈으로 시선을 올 올렸다. 마치 재판관의 판결을 기다리듯 나는 다시 침묵의 시간을 견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긴 침묵을 깨고, 아니 어쩌면 짧은 침묵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암튼 그는 입을 열었다. 자, 여기서는 느린 화면을 천천히 그의 입을 클로즈업 해보자. 그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데, 그가 뭔가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출입문에 매달아놓은 방울 소리가 크게 울렸다.


정말 타이밍 좋게, 아니 나쁘게 라고 표현해야 하나? 암튼 어떤 사람이, 아니 사람들이, 아니 그게 아니라 자기 몸집만한 가방을 맨 쪼끄만 초등학생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며 편의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다 그냥 들어왔다가 아니라 정말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끝없이, 쉴새없이 떠들며 소란스럽게 편의점 안을 뛰어다녔다. 그리고 우리의 대치 상태는 마침내 끝났다. 나를 향해 있던 그의 몸과 시선이 방향을 틀어, 마구 뛰어다니는 초등학생들을 향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치 이제 그 공간에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나를 외면했다. 아니 외면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조금 더 초등학생들이 뛰어다니며 떠드는 소리르 들으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분명 아까 뭔가 말을 하려고 했는데, 아니 실제로 말을 했을텐데, 듣지 못했다. 뭐라고 했을까? 정말 궁금했지만, 도저히 다시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오른손에 반쯤 마신 음료수 병을 들고, 왼손에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 뭘 골랐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담배갑을 들고 그 편의점을 나왔다. 다시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고, 더운 열기가 후끈 나를 덮쳐왔다. 내가 출입문을 나서자마자 운좋게 눈앞에서 바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절반 이상 대략 2/3쯤 걸어간 지점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전면 유리 건너편에서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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