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네스북 기록 갱신 중인 고공농성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정말 힘들다. 자주는 아니지만 일 때문에 옥상을 살펴봐야 할 일이 생긴다. 그나마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면 괜찮지만, 가끔 사다리로 올라야 하는 경우는 좀 무섭다. 작년 여름엔 긴 사다리로도 옥상까지 닿지 않아, 사다리 맨 끝에서 약 1미터 이상을 팔 힘으로 버텨 올라야했다. 사다리 자체도 부실해서 휘청거려 오르는 동안 불안했지만, 맨 끝에서 양 팔에 힘을 주고 몸을 끌어올일때는 이러다 저 아래로 떨어지면 얼마나 다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옥상에 올라서도 작업하는 내내 많이 불안했지만, 가장 무서울 때는 내려올 때였다. 몸을 뒤로 상체를 양 팔로 받친채 하체를 내려 사다리를 밟아야 했는데, 사다리가 멀리 있어서 발이 잘 닿지 않았다. 간신히 사다리에 발이 닿아 내려올 수 있었는데, 대략 3~4분 남짓 걸렸을 그 시간 동안 나는 몇 십번이나 미끄러져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해가 바뀌어 이젠 작년이 되어버린 12월 초엔 또 눈이 쌓인 곳의 철제 사다리를 밟고 옥상을 올라야 했는데, 사다리가 많이 미끄러웠다. 그때도 역시 미끄러져 곤두박질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무려 75미터 높이의 굴뚝 위에서 420일이 넘게 농성중인 두 노동자가 있다. 오늘(1월 7일) 기준으로 422일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매일 기네스북 기록을 갱신 중이란다. 이전 기록 역시 같은 건으로 인한 고공농성이었다. 바로 파인텍 해고 노동자들 이야기다. 2014년 차광호 씨가 408일간 벌인 고공농성이 바로 이전 기록이었다. 지금은 박준호 씨와 홍기탁 씨 두 분이 동료의 기록을 갱신했다. 이전에 고공농성을 했던 차광호 씨는 현재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고, 29일째다. 파인텍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태고자 무기한 연대단식에 돌입한 4명(박래군․나승구․박승렬․송경동)은 21일째다. 그리고 김우 씨는 15일차, 이해성 씨는 14일차 단식 중이라고 한다.


문제는 굴뚝 위 두 노동자가 420일 이상 굴뚝 위에서 생활하면서 건강이 매우 나빠져 몸무게가 채 50킬로그램이 되지 않는데, 어제부터 단식에 돌입하겠다고 통보하고 음식과 물을 전달하던 줄을 내리지 않는다고 했다. 굴뚝 위 농성은 그 자체로 최소한의 음식과 물만 섭취하며 지냈을텐데, 여기에 더해 아예 곡기를 끊는다니. 아니 물조차 올려보낼 수 없다니. 이건 아예 그냥 죽음을 각오했다는 뜻이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떻게 75미터 굴뚝 위 좁은 공간에서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온갖 불편함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난 여름의 그 폭염과 이 겨울의 혹한을 어떻게 버틴단 말인가? 저 높이에선 폭염과 혹한이 수십배는 더 심하게 느껴질텐데 말이다.


이런 지경인데도 언론은 그닥 관심을 두지 않는 듯 하다. 연예인들의 온갖 잡다한 소식들이 각종 포털 사이트를 장식해도, 목숨을 걸고 악덕 기업메 맞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다. 


작년에 마무리 했어야 할 일을 붙들고 사무실에 앉아, 아무것도 함께하지 못하면서 괜히 마음이 쓰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지난 주말 아이들이 왔을 때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었다고 페이스북에 자랑했던 일이 괜히 부끄럽게 느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마음을 보태는 일 뿐. 부디 무사히 내려오시길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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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7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8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9-01-08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기사를 보았는데 회사가 얼른 근로자와 문제 해결을 했음을 하는 바램입니다.감은빛님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감은빛 2019-01-08 19:11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말씀츠럼 회사가 얼른 해결해주면 좋겠지만,
스타플렉스 김세권 사장이 하는 꼴을 보니
그렇게 쉽게 움직일 것 같지 않아 걱정입니다. ㅠㅠ
 

2018 이란 숫자에 1을 더할 순간이 지척이다. 이제 손 뻗으면 닿을 곳까지 다가왔다. 올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단위를 놓고 상대적으로 기억할만한 것들이 떠올라 끄적여본다.


담배가 줄다.


작년부터 담배가 별로 땡기지 않았다. 사실 꽤 오래 전부터 편집을 하거나 원고를 쓰느라 글을 붙들고 씨름하는 시간과 술에 취한 시간 외에는 담배를 그리 많이 피우지 않았다. 그래도 꾸준히 담배를 피웠던 건 늘 하는 변명,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정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 순간엔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이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과 쓴 소주를 탁 털어 넣는 것 외엔 다른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올해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여러번 있었는데, 그랬던 순간을 제외하고 평소엔 거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심지어 술 마실 때에도 담배가 땡기지 않아 다들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 혼자 남아 소주를 홀짝이는 신기한 경험도 여러번 했다.


아,, 그렇다고 담배를 끊을 생각은 없다. 이러다가 또 언젠가 담배가 무척 땡기는 날이 올 지 모르고, 그때가 되면 주저없이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며,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즐길 것이다.


술이 늘다.


생각해보면 주량은 늘 고무줄처럼 줄었다가 다시 늘기를 반복했다. 술이 늘었다는 표현은 주량이 늘었다기보다는 술 마시는 횟수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제작년과 작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랬다는 말이다. 그건 이 재미없고 지긋지긋한 삶을 버티기 위해 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 나와 같이 일을 해본 친구가 그랬다. 왜 니가 그렇게 술을 마시는 지 이제 알겠다고, 그전에는 술 좀 줄이라고 권하고 싶었으나, 이젠 그 말을 차마 못하겠다고. 술을 마셔야만 살 수 있다는 내 말을 인정하겠다고 했다. 다만 그래도 몸 생각도 좀 하라는 충고는 잊지 않았다.


인정받거나 동정받거나


활동 경력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활동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나의 활동을, 어쩌면 나라는 존재의 일부분을 인정해주는 시선들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실수를 할 수 있는 동물이고, 누군가에게는 동정을 받기도 했다. 아마 그건 작년을 비롯해 그 어느 해에도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올해 유난히 상반된 이 두 시선을 많이 느꼈다. 그건 내가 과거보다 더 예민해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인정받는다는 건 기대가 커진다는 뜻이고, 기대가 커지면 나중에 실망도 커질 수 밖에 없는 법. 그러니 단순히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간사한 동물이라 칭찬받고 인정받는 것은 또 기쁘다.


우리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굴러떨어지고야 말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포스일뿐. 그저 다음에는 좀 더 인정받기를 원하고 좀 덜 동정받기를 원할 뿐.


늙음


한때 동안이란 얘길 많이 들었다. 지금은 주위에서 왜 이렇게 늙었냐는 얘길 주로 듣는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이렇게 술과 일에 파묻혀 살면서 늙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 예전의 나와 비교해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땐 일을 즐겼다는 것. 지금은 그저 다른 방법이 없으니 버틸 뿐.


한 가지 아쉬움은 몸매는 다시 운동하면 만들수 있지만, 한번 늙어버린 얼굴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올해 유난히 팍 늙어버린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렵고 또 아쉬워 이젠 거울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확 줄었다.


운동하고 싶어


반대로 씻고 나서 벗은 내 몸을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언젠가 페이스북에 "매일 아침 씻고 거울을 볼 때마다 내 몸에 반한다. 내 몸 왜 이렇게 예쁜거냐!" 라고 썼더니, 누군가 어떻게 그런 표현을 공개적으로 올릴 수 있냐고 물었다. 그 여성 분은 본인이 무척 부끄럽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난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예쁜데 어떡하냐?" 되물었다.


그건 아마 작년 여름 일이었다. 공복에 운동을 하면 복근이 선명하게 드러났던 시간들. 하지만 그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어깨 부상을 당한 이후로 거의 운동을 못했다. 가을부터 올해 봄까지 어깨 부상의 영향으로 상체 근력운동은 아예 하지 못했고, 가끔 하체 맨몸 운동 위주로 했다. 그나마 늦봄에 스트레칭을 열심히 해서 다시 운동을 시작해 짧은 기간 여름 대비 몸매를 만들었다가, 여름 휴가를 가기 직전에 무릎을 다쳐서 다시 운동을 중단해야 했다. 이번엔 무릎 뿐 아니라 어깨, 손목, 발목, 골반까지 몸 전체의 관절이 다 아팠다. 그 상태로 겨울까지 쭉 운동을 할 수 없었다. 가끔 철봉에 매달리면 손목과 어깨 통증을 느껴 신음이 흘러나왔고, 하체 운동을 해보려면 무릎과 발목 통증을 느꼈다.


작년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벗을 몸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건, 그 전에 만들어놓은 근육량과 확 줄인 식사량 덕분일 것이다. 사실 나날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근육을 보며 마음이 초조하다. 애들 엄마가 작은 아이를 임신했을 당시, 내 배를 보고 "니가 임신했냐?" 고 던진 말에 충격받아 다시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 몇 년의 결실이 금방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조금 아주 조금 여유를 갖자


최근 몇 개의 아주 어두운 글을 쓴 것처럼,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일이 꼬여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일터 일과 가족 관계와 사회 문제 그리고 내 마음까지 총체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그 중 가장 큰 슬픔 중 하나는 사춘기 아이와의 소통 문제였다. 우리 딸은 착하고 순해서 그럴 일이 없을거라 여겼건만, 아이는 격렬하게 사춘기를 지나는 중이었고, 그만큼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와 충돌을 일으켰다. 


그때마다 나는 아이가 처음 태어난 순간부터, 자기 키가 내 얼굴까지 닿는다며 즐거워하던 최근까지의 시간들이 머릿 속을 스쳐가며 안타까웠다. 안아달라고 보채던 마냥 귀여웠던 아이는 이제 온 몸으로 나를 거부하고 밀어내고 있었다. 안그래도 몸도 마음도 피폐한 나는 아이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껴 화를 내고 말았고, 그 화는 아이를 더 밀어내고 말았다.


한 발짝만 물러나서 생각해보면,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누구보다 격렬하게 사춘기를 보내지 않았던가. 그저 전부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었던 시절. 반항과 폭력의 기억들. 그리고 착하기만 했던 아들이 상상할 수 없을만큼 난폭하게 변해버린 모습을 보면서도 끝까지 믿어준 부모님이 떠올랐다. 나 역시 아이에게 그런 아빠여야했다. 끝없이 아이를 믿어주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아빠가 되어야 했다. 세상이 전부 아이에게 등을 돌려도 나만은 아이를 안아줘야 했다.


다만 그냥 다가가서 안으려고 하면 아이는 한 발 물러선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그시절엔 나도 그랬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아이에게 언제나 아빠가 여기 있다는 걸. 필요하면 늘 손을 뻗어준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유가 필요하다. 작은 여유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몰려도 한 숨 돌릴 여유는 있는 법. 지금 이 바쁜 와중에도 이 글을 두드리듯이 늘 찾으면 여유는 생기는 법. 아이와의 관계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모두 여유가 생겨야 볼 수 있는 법이다.



운동이 꼭 필요해

















지금처럼 술과 일에만 빠져 살아서는 그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지금 내게 운동이 꼭 필요한 이유다. 여러 해 전, 골반 부상으로 몇 달을 절뚝거리며 살았던 시절 저 두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운동법으로 도움을 받았다기 보다는 저자의 삶의 태도, 운동에 임하는 자세 등 정신적인 부분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시 저 책들을 들쳐봐야겠다.


깊고 넓은 늪 속에서 조금씩 몸을 끌어올려야겠다. 언제까지 늪에 빠진 몸을 내려다보며 신세 한탄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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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2-27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단 한번도 제 몸을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 없는 운동기피자로서, 멋있고 부럽습니다......

2018 감은빛 님의 손에서 살짝 벗어난 것들이 죄다 웃으며 돌아오는 2019를 기원합니다^-^

감은빛 2019-01-07 20:57   좋아요 0 | URL
저는 쇼님이 무지 부럽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으시는지.
하루종일 책만 읽어도 그렇게는 못 읽을 것 같은데요. ^^

새해 좋은 일들 가득하길 바랍니다!

페크pek0501 2018-12-2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스센터에 다니는 친구가 그러더군요. 러닝 머신 뛰면서 예쁜 몸매 만드는 일이 즐겁다고요.
건강만 생각한다면 운동할 마음이 크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운동할 땐 몸매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봤자지만요... ㅋ

감은빛 2019-01-07 20:59   좋아요 0 | URL
몸매를 가꾸려 운동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요.
저는 몸매가 목적은 아닙니다만,
운동을 하고도 몸매가 따라오지 않으면 그건 좀 억울하긴 하더라구요.
사실 먹는 걸 조절하지 않으면 열심히 운동해도
저절로 몸매가 따라오진 않더라구요.

2018-12-28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07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12-3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원하시는 바 많이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감은빛 2019-01-07 21:03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인사말씀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8-12-3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 2019년이 시작입니다.
새해에는 올해 오지 못했던 행운까지 더해서 늘 좋은 일들 함께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따뜻한 연말과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감은빛 2019-01-07 21:0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인사말씀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영상 세대


아이들을 보면 확실히 요즘 애들은 유전자 자체가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늘 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폰으로 셀카를 찍거나 영상을 찍는 걸 보면 그렇다. 한번은 애들 밥 챙겨주느라 주방에 있었는데, 작은 아이가 내 폰으로 영상을 찍었더라. 자기 장난감이나 인형을 막 소개하고, 사탕이나 초콜렛 같은 걸 막 설명하고, 그러다 내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고 막 소개했더라. 어디서 이런 걸 배워서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늘 보던 유튜브 채널을 따라하는 거였다.


작은 아이가 자기 물건들 하나씩 보여주고, 소개하다가 뭔가 더 없어서 내 물건들을 막 뒤져서 꺼내오는데, 대학 시절부터 갖고 있던 다이어리를 꺼냈다. 예전에 아이가 뒤져봤던 거라서 거기에 예전 내 사진들이 있다는 걸 알았던 거다.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군대 때 사진들이 몇 장 있었다. 그리고 오래된 신분증들. 학생증, 도서관증, 태권도 단증 등등 이런 것들에 있는 내 사진들을 막 영상에 보여주고 있었다.


아빠 여깄네


나중에 아이가 단체 사진들에서 아빠를 찾겠다고 했다. 찾아보라고 했더니 대학 시절 동기들과 찍은 사진들이나, 동아리 단체 사진에서는 금방 나를 찾아냈다. 그러다 군대에서 완전 군장에 총까지 메고 찍은 사진들에선 쉽게 찾지 못했다. 당연히 방탄모를 써서 얼굴이 잘 안 보이니 찾기 어려울 수 밖에. 결국 아이가 힌트를 달라고 했다. 그제서야 나도 자세히 살펴보니 소대 전체가 같이 찍은 사진에선 나도 나를 못 찾겠더라. 근데 가만 떠올려보니 그때 내가 분대장이었단 걸 기억해냈고, 견장과 호르라기를 차고 있는 나를 곧 발견했다.


아이에게 남들한테 없는 걸 어깨에 달고 있다고 했더니, 그래도 사진이 작아서 잘 찾지 못하더라. 그래서 아이가 다시 왼쪽, 중간, 오른쪽 중에 어디냐고 묻더라. 당시 내가 가장 선임 분대장이라 가장 가운데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중간이라고 알려줬더니. 두세번 만에 아이가 찾아냈다. 아~ 아빠 여깄네. 


아빠 책 읽어 줄게


주말 아침에 피곤에 취해 일어나지 못하고, 머리로만 애들 뭘 좀 먹여야 하는데, 피곤해서, 이불 밖이 너무 추워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있었다. 큰 아이가 깬 걸 느끼고, 작은 아이가 내 품으로 쏙 파고들어서 춥다고 속삭이는 걸 듣고 반사적으로 아이를 꼭 껴안고 토닥여줬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아이들이 배고프단 소리가 나올 때쯤에야 일어나서 먹을 걸 챙겼다.


밥을 먹이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누워있는데, 아이가 책을 읽어주겠다고 그림책을 가져왔다. 동물들과 관련한 몇 개의 짧은 에피소드가 있는 그림책이었는데, 아마도 싸구려 전집에 포함된 책이었던지, 정식 판매하는 책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용도 뭐 별 내용이 없었는데, 아이는 그 별거 아닌 게 그렇게 웃기다며 막 웃었다.


예전에 아이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땐 과장된 목소리와 표정으로 열심히 읽어주곤 했는데, 이젠 그 쪼그맣던 녀석이 나에게 책을 다 읽어주는 구나 싶었다. 별로 재미없었지만, 아이가 열심히 읽어주는 걸 보고 급 반성하고 열심히 들었다. 다음에 또 읽어달라고 해야겠다.


아빠 게임하자


토요일에 아이들과 동네 서점에 가서 책과 문구류 등을 샀다. 가방 속에 몇 년째 숨어있었던 5만원 상품권으로 모자라 추가로 돈을 써야 했다. 그 와중에 작은 아이랑 문구 코너를 돌다가 보드게임을 하나 샀다. <식객> 이란 게임이었고, 전국을 돌며 음식을 맛보고 포인트를 모으는 방식이었는데, 살짝 아쉬웠다. 뭔가 집중이 잘 안되고 허술한 느낌.


한동안은 아이들과 트럼프 카드 게임을 많이 했다. 나도 어릴때 여러 종류의 카드 게임을 자주 했고, 많이 알고 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애들하고 하려니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 그래도 애들하고 어울려 제법 자주 했는데, 요새 큰 아이가 시들해하니 작은 아이랑 둘이서만 하는 건 또 별로 재미가 없더라.


또 한동안은 애들과 윷놀이도 자주 했다. 우리 지역의 어느 사회적기업에서 우리 동네 사회, 경제, 문화적 자원들을 배치한 지도로 윷놀이 판을 만들었는데, 정말 아이디어 좋게 잘 만들었다. 그걸 말판으로 놓고 윷놀이를 하면 자주 다니는 익숙한 공간들 위에서 윷놀이를 하는 것이라 애들도 좋아했다.


아이들이 오는 날이면 계속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거나, 폰으로 유튜브를 보곤 하는데, 그것보다 주기적으로 애들이 질리지 않을만한 재미있는 게임들을 찾아보고, 개발해야겠다. 예전엔 그런 궁리를 많이 하고 살았는데, 요샌 여유가 없으니 생각도 못했다.


연말


벌써 꽤 오랫동안 침체기에 푹 빠져 있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 정말 올해가 며칠 남지도 않았다. 일이 안 풀려도 지독하게 안 풀려서 정말 저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래도 막판에 하나 기분 좋은 성과를 올렸다. 덕분에 칭찬도 좀 받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아주 조금은 올라온 듯하다.


그래도 연말 안에 끝내야 할 일들과 1월 초까지 마쳐야 할 프로젝트 등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절로 한 숨이 난다. 벌써 이틀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야근 중인 지금 술 한 잔 생각이 간절하지만 참고 있다. 오늘은 공식적인 송년회 일정도 하나 있었지만, 일 때문에 포기했고, 친했던 후배로부터 따로 연락이 왔건만 그것도 거절했다.


기억해보면 작년 이맘 때는 완전 술독에 빠진 것처럼 매일 술을 퍼부으며 지냈던 것 같은데, 올해는 그래도 작년 보단 조용히 보내는 구나.


워낙 주변에서 걱정어린 시선과 건강을 염려하는 말들을 많이 받고 들어서, 이젠 좀 멀쩡한 것처럼 연기라도 해야겠다 싶다. 실제 이 긴 침체기에서 벗어나 정상 궤도를 올라올 날이 언제일 지는 몰라도 이대로 계속 가다간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를 걱정하고, 소문이 퍼질 것 같아서 안되겠다. 과연 연기를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를 속인다는 각오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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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9 2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7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0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7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8-12-20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요즘 초등학생들은 유트브 계정이 있는 아이들이 최고 인기인라고 하더군요^^

감은빛 2018-12-27 20:13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직접 영상을 만들어 올리는 것 같아요.

정말 유전자 자체가 다른 아이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자주 들어요.
 

잔뜩 흐린 하늘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냥 만사가 다 싫고 그 중에서 나 자신이 제일 싫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없어졌으면 싶었다. 사실 간단하다. 내가 없어지면 세상이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까. 내가 없어져도 세상은 알아서 잘 돌아가겠지만, 내 기준에선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난 이미 없어졌으므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세나 윤회는 없다. 애초에 종교라는 것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일 뿐.


어제 평소보다 목을 더 많이 써서 오늘 하루종일 목이 아팠다.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후로 내 원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아니 목소리 자체가 바뀐 것 같다. 톤이 더 낮아졌고 굵어졌다. 원래 목소리가 작고 목이 약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스트레스를 이유로 담배는 또 줄창 피워댔다.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담배 연기를 내 뱉었다. 타들어가는 담배소리를 들으며 한숨 또 한숨, 후회 또 후회가 이어졌다. 왜 그랬을까? 대체 왜 나는 그에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을까?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그냥 내가 못난 사람임을 인정하면 되었을텐데, 왜 그에게 상처를 주며 허세를 부렸을까? 그는 또 왜 그날 따라 그렇게 신경질 적이었을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조금만 더 화를 덜 냈다면, 조금만 더 톤을 낮췄다면 그렇게 까지 되지 않았을텐데. 사실 계속 두려웠다. 이 관계가 쉽게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깨져버릴까봐.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한 사람을 잃게 될까 싶어 늘 두려웠다.


뭐라고 해야할까? 어떻게 연락해야 할까? 연락을 받아주긴 할까? 그냥 아무런 예고 없이 훌쩍 찾아가서 사과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내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까?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고민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다 타버린 담배를 던져버리고, 발로 밟았다.




생활비를 다 써버려 라면 하나 사지 못하고 이틀째 굶고 있던 날, 그는 엄마 몰래 반찬과 밥을 잔뜩 싸서 가져왔다. 몰래 가져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명하면서 그는 내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오빠를 위해 이렇게 애 썼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했다.


그는 일하느라 바쁘고 힘들었지만, 주말마다 꼬박꼬박 나를 만났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고 싶었을테지만, 일찍 일어나 내 자취방에 와서 먹을 걸 챙겨주고, 피곤하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곤 했다. 난 그런 그에게 팔베게를 해주고 함께 누워 있는 것이 좋았다. 문득 잠이 들었다 깨면 그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 좋았다.


그는 화를 냈다. 집안 곳곳을 뒤져 겨우 찾아낸 동전 몇 개로 라면을 두어 개 살 지, 담배를 살지 고민하다가 결국 담배를 사는 나를 보는 게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왜 오빤 자기를 아끼지 않아? 왜 오빤 오빠를 함부로 굴려? 제발 그만해! 지긋지긋해!


글쎄 어떻게 답해야 했을까? 소설을 쓰겠다고 골방에 칩거하며 산 게 벌써 몇 달째였다. 집에서 보내주는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는 한 달을 버티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 돈은 밥과 반찬이 아니라 담배와 술 값으로 대부분 나갔다. 수입 없이 더 버티기 어려워 결국 학원 강사를 선택한 날, 난 마음 속으로 소설을 포기했다.


어쩌면 그랬다. 나는 소설가가 될 수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하지만 찌질한 나는 뭔가 구실이 필요했다. 지긋지긋하다는 그의 말이 그 구실이 되어 주었다. 나는 편하게 그를 원망하며 소설을 접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안심했다. 내가 부족해서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고 나는 마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수도 있었는데, 그의 말 때문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기억을 조작했다.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제일 싫은 건 나 자신이었다. 그는 나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내가 싫다 했다. 나도 내가 싫다 그래서 나를 잘 돌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싫은 사람을 누가 잘 돌보겠나.


나는 사실 신기했다. 나조차 싫어하는 나를 좋아해주는 그가 신기하고 이상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불처럼 내게 빠져들었다. 허세에 가득 찬 교만하고 삐딱한 인간이 뭐가 그리 좋았을까? 나조차 좋아하지 못하는 날 좋아하고 챙겨주는 그를 잃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고 싫다. 잃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젠 느낄 수 있다. 이 관계가 이젠 더 이어지지 어려울 수 있겠다. 돌릴 수만있다면 뭐라도 하겠지만, 돌릴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안다.


슬픔을, 아픔을, 구차함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건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다. 차라리 그만두면 안 될까? 이렇게 힘든 삶이라면 그만해도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 그만둘 용기조차 없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나는 오늘도 온갖 핑계로 자신을 정당화 시키며 살아간다. 그 옛날 그랬듯이.언제나 그랬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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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4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19 1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0 0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냥 2018-12-17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허지원 임상심리전문가의 책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를 추천합니다.
어쩌면 눈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는 생각이 들어요.

감은빛 2018-12-19 19:55   좋아요 0 | URL
뇌과학 책이네요. 일단 보관함에 담았어요.
좋은 책 추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보물 발견


어느 순간부터인가 가방을 메고 다니는 일이 정말 귀찮다. 몇 달 전에 어느 회의 자리에 가면서 가방을 안 갖고 맨 몸으로 갔는데, 그걸 본 이웃 조합 이사장님께서 혀를 끌끌 차셨다. 가방도 안 갖고 오다니! 그 분 생각으론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어떻게 회의 참석하러 오면서 가방도 없이 올 수 있단 말인가? 근데 가방이 필요한 이유는 회의 자료를 담아 가는 것과 회의 자료에 기록할 필기구를 가져가는 이유 밖에 없다. 당시 필기구는 내 옷 주머니에 들어있었고, 회의 자료는 둘둘 말아서 가져가면 되었다.


암튼 한동안 서류가방을 사무실에 두고 작은 가방만 메고 출퇴근을 하거나, 아예 가방 없이 출퇴근을 했다. 저녁에 술 자리에 가방 없이 가면 다들 물었다. 가방은? 어, 사무실에. 다시 가서 일할거야? 아니. 안 가. 근데 왜 가방은 두고 왔어? 그냥. 갖고 다니기 귀찮아서. 여러 사람과 이런 내용의 대화를 했다.


며칠 전에 우연히 사무실에 둔 서류가방 맨 뒷면 지퍼를 열었다. 겉으로 만져보니 뭔가 봉투가 같은게 있어서 열어본 거였다. 종이 봉투를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동네 서점에서 발행한 1만원 상품권이 5장이 나왔다. 이걸 언제 받았나 떠올려보니, 아마 5~6년 전쯤 지역 신문에 연재글을 쓰고 원고료 대신 받았던 거였다. 왜 이게 여기에 들어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서 못 쓰면 어쩌나 싶었다. 상품권을 펼쳐들고 꼼꼼히 살폈다. 혹시 기한이 정해져있는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기한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이걸 갖고 책 사러 갔다가 안 된다고 하면 곤란하니 미리 확인이 필요했다. 마침 그 동네서점 점장과 친분이 있었다. 메세지로 상품권을 받고 잊고 있다가 시간이 많이 지나 발견했는데, 지금 사용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당연히 가능하다고 답이 돌아왔다. 그제서야 기쁜 마음이 들었다. 어딘가 숨겨뒀다가 잊어버린 비상금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내가 사고 싶은 책도 많지만, 애들을 데려가서 애들 원하는 책도 사줘야겠다. 당시 원고료 대신 이 상품권을 받을 때 쓴 글은 아이들에 대한 글이었다. 글감을 제공해준 당사자들에게도 보상이 필요하겠지.


주말에 아이들과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 장면을 떠올리며 나도 몰래 웃음을 지어본다.


인정 욕구 충족1


누구나 남에게 인정 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 걸 인정 욕구라고 하더라. 나 역시 인정 욕구가 있다. 아니 난 그 인정 욕구가 좀 강한 편이라 생각한다.


며칠 동안 1번의 발제와 2번의 강의를 했다. 그래서 발제비와 강의비가 통장으로 들어왔다. 물론 그 돈은 통장에 며칠 머물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난 돈이 들어왔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강의비 받았으니 술 한 잔 마셔야지. 발제비 받았으니 술 한 잔 마셔야지 이러며 매일 술을 마셨다. (즉, 돈이 안 들어왔어도 뭐라고 핑계를 대며 매일 마셨을 거다.)


어제 강의는 후배 부탁을 받고 급하게 수락했는데, 참여자가 무척 적었다. 강의 시작할 때는 4명이었고, 중간에 두 명이 더 들어와 마지막엔 6명이 들었다. 아마 내 강의 경력에 최소 인원이지 싶다. 그 주제로 강의를 여러번 했기 때문에 이번 강의를 위해 딱히 준비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주제는 같아도 대상이 달라서 강의 자료를 살짝 손 보면서 머리속으로 강의를 한 번 해봤다.


발제나 강의나 사회를 맡으면 항상 시작할 때 살짝 긴장한다. 그 시작을 어떻게 편안하게 잘 풀어내냐에 따라 그날의 결과가 정해진다. 욕심이 많은 편이라 내 강의자료는 늘 시간에 비해 많은 것들을 담고 있고, 나는 늘 시간에 쫓기며 빠른 말투로 정보를 쏟아낸다. 속으로는 늘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데도, 내 입은 쉴새 없이 말을 쏟아내고 있다. 그래서 강의 후에 말이 정말 빠르시군요 라는 평을 듣곤 했다.


근데 최근에는 욕심을 줄이고, 딱 필요한 만큼만 정보를 제공하고 나머지는 생략하는 기술을 점점 익혀갔다. 이번 강의는 인원이 적어서 거의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시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한 강의 중에 가장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한 강의라고 느꼈다. 이건 완전 자뻑이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은 강의였다. 소수의 참여자들 한 명 한 명과 모두 눈을 맞춰가며, 적당한 시점에 질문을 던지고, 강조하기 직전에 여백을 주고, 강조점에선 확실히 효과음을 넣어줬다. 


예전에 학원 강사 할 때부터 잘 알고 있었고, 노력했던 게 한 편의 영화같은 강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강의 자료를 만들 때마다 가장 신경쓰는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다. 강의 태도도 정말 중요하다 단순히 정보만 떠들어대는 것은 지루하다. 실제 경험담과 같이 스토리가 들어가야 한다. 늘 살펴보면 확실히 실제 있었던 사건을 들려줄 때 사람들이 가장 집중한다는 것을 느낀다.


암튼 강의를 마치고 주선자였던 후배와 담배 한 대를 피울 때, 후배가 강의 정말 잘 들었다고 했다. 형님 강의 잘 하신다는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 들어보니 더 대단하네요! 했다. 나는 쑥스러웠지만, 그래도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이런 걸 인정 욕구라고 하는 구나 깨달았다.


인정 욕구 충족2


지난 주였던가 정책 개선 제안 및 현장의 어려움 등을 토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그날 아침엔 학교 설명회가 있었다. 큰 아이가 다니는 학교인데, 나는 학교 햇빛발전소를 설명하기 위해 교장선생님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인 애들 엄마가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제는 남이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가족이었던 사람. 그 사람이 학교측 중요한 의사결정자로 참여하는 자리라니. 그래서 사실 좀 긴장되었고, 좀 많이 신경쓰였다. 아침에 뭘 입고 갈지 고민을 많이 했다. 평소 학교 설명회를 다닐 때는 그냥 평소처럼 다녔다. 청바지에 셔츠 차림. 근데 그날 만은 왠지 정장을 입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설명회에 임하는 나도 더 집중이 잘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정장을 입고 나갔기에 오후에 있었던 정책 개선을 위한 모임에도 당연히 정장을 입고 갔다. 여러 조합에서 각자 여러가지 어려움을 토로하고 개선 방안을 요구했다. 그런데 각자의 입장들을 들으면서 조금씩 아쉬움이 있었다. 발언을 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잘 정리해서 말하면 좋을텐데, 이야기가 자꾸 엉뚱하게 흘러가거나, 배경을 잘 설명하지 못하거나, 흐름이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앞서 여러 사람들이 요구했던 내용들에 대해 쭉 정리를 했다. 시간 순서에 따른 정리, 배경과 이유와 목표에 대한 정리, 과정과 현재와 향후 예상 시나리에오 대한 정리. 나중에 모임을 마치고 함께 참석했던 친구에게 메세지를 받았다. 오늘 진짜 멋지던데, 네 정장 입은 모습도. 회의 흐름을 한 번에 정리한 발언도. 라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으며 딱 들었던 생각이. 그래, 나 정장 완전 잘 어울리지. 몸매가 받쳐주잖아. 그리고 나 완전 정리 잘 하는 편이지. 항상 핵심을 잘 깨닫는 편이고, 흐름을 잘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니까. 완전 자뻑이지만, 늘 내 일정에 회의가 많은 이유는 그 회의 마다 내가 돋보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경우가 있다. 내가 준비하고 주최하는 회의는 당연하고, 단순 참석하는 회의에서도 나는 (적어도 내 생각에는) 중요한 제안이나 지적을 하거나, 논의가 지리멸렬할 때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해왔다.


암튼 친한 친구에게 그렇게 인정을 받으니 그것도 무척 기뻤다. 어제 그 친구와 술을 마시는데, 그 녀석이 이렇게 말했다. 네가 스트레스가 많은 이유를 알겠다. 왜 네가 그렇게 술을 마시는지 알겠다. 이렇게 스트레스가 많고 힘든 일이지만, 이 분야에서 네가 이렇게 인정받는 사람이니, 너에게 다른 일을 찾으라는 말을 못하겠다. 다들 너만 쳐다보는 것 같더라. 네가 워낙 유능하니까 더 너한테 기대고 있는 것 아니냐. 뭐 이런 내용이었다.


가끔 왜 나는 이렇게 살고 있을까 회의가 들 때가 있다. 돈도 못 버는 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걸까? 그 시간에 돈을 벌었으면 훨씬 더 안정적으로, 훨씬 더 폼나게 살 수도 있었을테데. 어제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내가 인정 욕구가 많은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싶었다. 인정 받고 싶으니까 부탁을 저버리지 못하고,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 떠안고 가다보니 늘 바쁘고 정신없고 피곤한 삶을 살고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처음부터 질문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가 아니라 왜 이렇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었나로 질문을 바꿔야 할 것 같다. 근데 그 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이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성격이나 성향의 문제인가? 아니면 자라는 과정에서 형성된 가치관이나 태도의 문제인가? 모르겠다.


늙어간다는 것















요즘 부쩍 늙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날 학교 설명회에서 만난 애들엄마는 오히려 더 젊어진 듯한 느낌이더라. 염색한 머리는 여전히 숱이 많았고, 피부는 탱탱하고 밝았다. 연애하던 시절에 참 사랑했던 그 눈은 생기가 넘쳤다. 지금 내 꼴을 보면 그가 나보다 연상이라는 사실을 과연 누가 믿을까? 사실 이혼하기 한참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나보다 어리게 보았다. 나도 예전에는 꽤 동안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젠 절대 입 밖에 낼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동안.


그리고 왜 이렇게 몸이 여기저기 자꾸 망가지는지 모르겠다. 왜 자꾸 여기저기가 아픈지 모르겠다. 친구한테 얘기하니 늙어서 그런 거란다. 젊을 때는 절대 겪어보지 못한 증상들이 자꾸 생기는 게 정말 그냥 늙어서일까? 늙어간다는 것 그것 참 슬픈 것 같다.


내 몸에 대해 더 잘 알아야겠다. 늙더라도 이렇게 아프면서 늙고 싶지는 않다. 건강하게 늙고 싶다. 이번 주말에 아이들과 서점에 가서 살 책을 정했다. 친한 (아니 만난지 꽤 오래 되었으니 친했던 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형이 번역한 책이니 벌써부터 책 정보는 알고 있었다. 이번 주말엔 너를 읽어주마.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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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18-12-13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왜 아프냐 하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래요.
어떤땐 아픈데도 술을 마시면 일종의 마취같은 현상으로 좀 나은것 같거든요.
그런데 사실 본인이 더 잘알잖아요.

감은빛 2018-12-14 05:00   좋아요 0 | URL
그래요. 마지막 말씀처럼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이 재미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렇지만 술을 많이 줄이고 있어요.
진짜 술 때문인지 아닌지 한번 보자 싶은 마음도 있어요.

말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