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감은빛 > 꿈,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한 그 기억!

알라딘이 내가 9년 전에 이런 글을 썼다고 알려준다. 실제로 당시에는 이 비슷한 내용의 악몽을 자주 꾸었는데, 요즘은 거의 악몽을 꾸지 않는다. 문득 그 이유가 궁금하다. 언제나 삶이 영화나 드라마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극적이라는 사실을 해 바뀌고 며칠 지나지않아 깨닫는다. 올해는 연초부터 정말 스펙타클하구나. 차라리 이 가혹한 삶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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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이 안 맞잖아

큰 아이는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패드로 만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누워서 폰으로 외국어 단어를 따라하고 있었다. 몇개의 단어를 다 익히고 나면, 짧은 음악이 나왔다. 나는 외국어를 따라했듯이 그 음악 멜로디를 따라했다.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터키어, 인도네시아어, 힌디어, 스페인어 이렇게 여러개의 언어를 돌아가며 몇 개의 장을 따라했고, 매번 그 멜로디를 따라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 멜로디를 따라할 때마다, 큰 아이가 쳐다보며 ˝왜 그것까지 따라해?˝ 라고 물었다. 나는 ˝그냥˝ 이라고 답했다. 정말 아무생각없이 그냥 따라했으니. 아이는 매번 내가 그 음악을 따라할 때마다 한 마디씩 했고, 나는 그런 아이의 반응이 재밌어서 그 짧은 음악이 나올 때마다 빠짐없이 따라했다.

계속 하다보니 아이가 조금 언성을 높이며 ˝아니 왜 그걸 따라하냐고.˝ 라고 했다. 듣기 싫다는 표현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재밌어하는 표현처럼 들리기도 했다. 제대로 말해주시 않으면 사람 생각은 알수 없는 거니까. 나는 그냥 계속 진도를 나가 다음 단어들을 따라했고, 아이도 다시 드라마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장이 다 끝나자 또 그 음악이 나왔고, 나는 또 따라했다. 아이는 ˝아니, 음이 안 맞잖아!˝ 이제서야 깨달았다. 아이는 맞지않는 음으로 반복해서 따라하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 것이었다.

큰 아이는 신기하게 어릴 때부터 한번 들은 음악의 계이름을 바로 알아내곤 했다. 절대음감이라고 해야하나? 처음 들은 노래도 바로 따라할 수 있었다. 기타를 튜닝할 때마다 음을 잘 찾지 못해 애를 먹는 나로서는 정말 부러운 능력이다. (아, 물론 기타를 거의 치지 않기 때문에 튜닝할 일 역시 거의 없지만) 아이는 음이 맞지 않는 것에 민감한 편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따라했던 그 소리가 거슬렸던 것이리라. 나는 아이처럼 절대음감이 아니니 아이가 얼마나 거슬려했을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수동형, 피동형 문장이나 맞춤법,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보면 거슬리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다음에 그 음악을 따라할 때는 최대한 음을 맞추려고 노력해본다.

이 자리 앉아도 될까요?

지하철을 여러번 갈아타고 몇 군데를 오갈일이 있었다. 붐비는 열차, 완전 만원이라 주위 사람들에게 꽉 끼어있었던 열차가 대부분이었지만, 도중에 텅 비어서 앉아갈 수 있는 열차도 있었다. 한 번은 완전 만원 열차를 탔는데, 도중에 어느 역에서 사람들이 왕창 내려서 숨 쉴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 때 내 앞에 앉아있던 분이 일어나면서 자리가 났다. 나도 앉고 싶었지만, 서있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 서있기 힘든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서 그냥 서있었다.

잠시 후 뒤에서 어느 여성이 ˝이 자리 앉아도 될까요?˝ 라고 물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손짓으로 앉으시라고 답했다. 자리가 비면 말도 없이 앞에 있던 사람을 밀치고 앉는 사람들이 많은데, 저렇게 물어보고 앉는 사람은 처음보는 것 같다. 심지어 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는데, 각도 상 그 분이 내 귀를 못 봤을리 없었는데, 그렇게 물었다. 다행히 내가 듣던 음악 볼륨이 작아서 그 분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분이 자리에 앉고 일행인 여성들이 함께 와서 서느라 나는 옆으로 조금 물러나야했다. 그들은 대화를 나눴고, 그 소리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음에도 내게 들렸다. 음, 자리를 양보한 대신 나는 서있던 자리에서 밀려나고 소음 때문에 음악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되었다.

계단

가끔 무릎이 아픈 날이면, 계단과 내리막길이 정말 두렵다. 무릎이 아프기 전에 나는 계단을 좋아했다. 상체에 비해 하체가 부실했던 나는 따로 하체운동에 시간을 투여할 여유가 없으니 뜀박질과 계단 오르기로 하체 운동을 대신했다.

지하철 6호선은 계단이 높고 가파른 역이 많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오르며 그걸 타고 오르는 사람들보다 먼저 계단 끝까지 올라가는 걸 즐겼다.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들도 걸어 오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 사람들보다 빨리 가는 일은 쉬울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근력을 바탕으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계단을 올라야한다. 매일 퇴근길 계단이 높고 가파른 역에서 계단을 오르며 연습을 했다. 몇일이 걸렸는지 몇달이 걸렸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결국 계단을 오르며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오르는 사람들보다 항상 먼저 도착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계단 오르기가 재미있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계단을 오르며 근육을 쓰고 나면 그 감각이 좋았다. 뜀박질 후 가쁜 호흡 속에서 느껴지는 쾌감이나 근력운동 후 약간의 통증과 함께 느끼는 쾌감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데 무릎이 아픈 이후로는 계단을 예전처럼 빠르게 오르내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예전처럼 뜀박질을 즐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고, 예전처럼 빠르게 에어 스쿼트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거울

몇 년 전이었다. 한창 운동을 즐기던 때였고 매일 아침 공복에 속을 비우고 샤워를 하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몸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거울에 비친 내 몸은 아름다웠다. 근육이 크지 않으면서도 선명하게 자리 잡은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내 몸을 보는 일이 이 재미없고 힘든 세상을 견디는 작은 만족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무릎을 비롯한 관절 통증으로 운동을 못한지 시간이 많이 지났다.

먹는 양과 횟수가 줄어서 살이 빠졌고, 그래서 날씬한 몸을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근육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젠 더 이상 거울로 내 몸을 보는 일이 즐겁지 않다. 오히려 자꾸 줄어드는 근육 때문에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래도 최근에는 관절이 안 아픈 날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어서 조금씩 다시 운동을 시작해보고 있다. 워낙 오래 쉬어서 당장 예전처럼 힘을 쓸 수는 없었다. 이렇게 조금씩 하다보면 다시 운동을 즐기던 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 관절들이 다시 운동을 버텨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이젠 다시 돌아갈 수 없을거라는 절망감이 들 때도 있고,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부딪히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다. 그냥 한 번 해보는 것. 그게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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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20-01-1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관절에 좋은 약을 좀 드세요.
나이 많아지면 제일 소중한게 관절입니다. 특히 무릎관절이 중요하죠,
그린홍합이나 msm 그외에도 요즘은 관절을 위한 효과 좋은 약들이 많더군요.
몸매는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안아픈게 제일 중요해지는 시기가 다가 오고 있답니다.
경험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ㅎ ㅎ
 


아빠는 끄곰이


최근 작은 아이는 웹툰의 영향을 받아 만화를 그리고 있다. 이런걸 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현세, 이상무 화백 등의 영향을 받아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의 딱 지금 작은 아이 나이였다. 그때는 소년 만화 잡지들이 종이로 출간되던 시기여서 만화책을 보면서 비슷하게 배껴그렸는데, 작은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동거의 법칙]이라는 웹툰을 보고 가족을 특정한 캐릭터로 그려서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만화를 그린다. 아마 애들 엄마가 그 웹툰을 아이에게 알려줬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이가 내게도 보여줘서 함께 봤다. 직장생활을 하는 젊은 여성의 가족들 중 할머니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시골로 귀촌하면서 할머니와 단 둘이 동거를 하게 된 계기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살구를 좋아하셔서 별명으로 살구라고 부르고, 캐릭터도 살구 모양으로 그렸다. 만화가 본인의 캐릭터는 나무늘보로 그렸고, 그의 절친한 친구는 뭐였더라, 수달이었던가 뭔가 물에 사는 작은 동물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그런 식으로 그리면서 아주 사소한 부분들에서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가는데, 그 따스한 시선과 일상의 잔잔한 재미들이 꽤 괜찮았다.


아이가 내게 보여준 부분은 앞 부분 조금이어서 나중에 시간 날때 최근 소식을 찾아보려 검색했더니 중간부터 거의 연재가 이뤄지지 않다가 얼마 가지 않아 완결이 되었던데, 살펴보니 살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마지막화 내용이었다.


암튼 그 만화에 영향을 받은 작은 아이는 엄마와 언니와 자신의 캐릭터를 각각 만들었는데, 아마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고 만든 느낌이었다. 엄마는 소를 귀엽게 형상화 한 캐릭터로 엄마가 소띠라서 그랬던 것 같고, 언니는 토끼로 그렸는데, 아마 언니가 귀여운 토끼 이미지를 원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자신은 다람쥐로 그렸다. 언니가 귀엽다고 다람쥐라고 부르며 볼을 잡아당기곤 했기에 그렇게 정했으리라.


그리고 아이는 내게 물었다. "아빠는 어떤 캐릭터로 할까?", 나는 아이가 애들엄마를 소로 그린 것을 보고 별 생각없이 "아빠는 용띠니까 용으로 해줘."라고 말했는데, 아이가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더니, 아빠는 곰이 어울린다고 북극곰으로 그리겠다고 했다. 왜 북극곰이냐고 물으니, "아빠는 북극곰을 살리는 일을 하잖아." 라고 답했다.


기특하게도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아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아빠가 하는 에너지 운동이 지구를 살리고, 북극곰을 살린다는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물론 나는 아이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 이면에 숨은 뜻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에게 덩치가 큰 남자 어른인 아빠는 아무래도 곰의 이미지와 비슷할 수 밖에 없음을. 게다가 겨울이면 집에서 군대 제대할 때 가져온 깔깔이를 입고 늘 누워서 뒹굴거리는 모습을 주로 보기 때문에 더욱 곰 이라는 이미지에 가깝게 느꼈을 것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암튼 그래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북극곰 캐릭터를 부여받았고, 아이는 캐릭터 이름을 '끄곰이'라고 지었다. 참고로 엄마는 '움마', 언니는 '단토끼', 자신은 '람쥐'라고 이름을 지었다.


부모 참관 수업


이미 한참 지난 이야긴데, 그간 서재에 글 쓸 여유가 없어서 이제서야 끄적인다. 지난 달 중순 즈음 아이가 낮에 전화를 걸었다. 왠일인가 싶어 받았더니, 곧 학교 방과후 수업에서 부모 참관 수업이 열리는데, 엄마는 그날 바빠서 올 수 없다고 했단다. 엄마 대신 아빠가 꼭 와달라고 부탁했다. 내 기억엔 작년에도 내가 한 번 부모 참관 수업을 갔었다. 그때도 애들 엄마가 바쁘다고 했었다. 일정을 보니, 그 시간에는 비어있었지만, 앞의 일정을 마치고 가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리고 사실 무척 바쁜 시기여서 사무실에서 일을 해야 했지만, 아이가 꼭 와달라고, 엄마 아빠 아무도 안 오면 안된다고 하길래, 어쩔수 없이 가겠다고 약속했다.


당일 학교로 갔더니 예상대로 아빠는 나 혼자였다. 작년에도 그랬다. 대부분은 엄마들이 왔지만, 가끔 할머니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이가 참여하는 반 외에 다른 반에 또 거의 한 명 꼴로 아빠들이 있었다.


아이가 속한 반은 뭔가 작은 물품을 만드는 공예 수업 같은 것이었고, 그날은 손거울을 만들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하나씩 만들도록 시킨 후에 부모들에게도 따로 또 하나씩 만들라고 제안했다. 어쩔수 없이 나도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거울을 하나 만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어쩌면 참 불편한 일인데, 선생님도, 주위에 앉은 다른 엄마들도 어쩐지 나를 어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거울을 만들었고, 나중에 완성해놓고 보니 제법 잘 만들었더라. 선생님은 아마 일부러 그랬겠지만, "어머! 아버님, 너무 잘 만드셨네요!" 라고 호들갑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강의, 원고, 교정지, 일, 일, 일, 서류, 서류, 서류


연말부터 그 다음해 3월까지는 정말 일이 엄청나게 몰리는 시기다. 매일 야근이고, 매일 철야고, 매일 잠이 모자라고, 매일 죽을 것처럼 피곤한 날이다. 지난 주에는 주초에 좀 무리를 했다가 감기몸살에 걸려 정말 죽을 것처럼 아팠다. 살면서 그렇게 심하게 아팠던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한창 바쁘고 중요한 시기에 아파 누워버리는 바람에 일이 더 밀렸다. 


사실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아플 일도 없었을텐데,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문제다. 이번 주에도 또 이틀 연속 철야하고, 하루는 저녁 늦게 들어가고 다시 이틀을 밤샘 작업했다. 지금 또 몸과 마음의 피로가 한계치에 도달했음을 느낀다. 그래서 몸은 어쩔수 없더라도 마음의 스트레스라도 좀 풀어보고자, 이 바쁜 시기에 여기다 이 글을 쓴다.


게다가 올해는 유난히 외부 강의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내일 오전에 잡힌 강의까지 이번 주에만 강의가 3건이다. 일주일에 3건의 외부 강의라. 이런 일이 또 생길까 싶을 정도로 강의가 몰린다. 바쁜 시기가 아니라면 강의를 하는 건 나도 좋아하는 일이고 부수입이 생기니 감사한 일이지만, 이 바쁜 시기에는 내 몸과 마음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


청탁 받은 원고와 교정지도 있고, 연말 안에 마무리지어야 할 무수한 행정서류와 기획서와 보고서들이 까마득히 멀리까지 줄을 서있다. 


얼마나 바쁜 시간을 보냈으면 최근 몇 주간은 거의 술도 못 마셨다.



절판도서 구매


절판도서 알림 설정을 해놓았더니 부산 어딘가의 중고 매장에 책이 들어왔다는 알림이 떴다. 나는 일을 하다말고 곧바로 배송 주문 후 결제부터 했다. 그리고 3일 후에 책을 받았다.














지난 달에 산 10여 권의 책들 중 절반은 한 번 펼쳐보지도 못했다. 이 책은 또 언제 펼쳐보려나. 어려서 나는 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곰을 겨울잠을 자기 때문이다. 곰 외에도 여러 동물들이 동면을 하지만, 유독 곰을 떠올린 건 겨울잠을 자는 대표적인 동물이라서였겠지. 작은 아이가 그려준 캐릭터 그림을 보며, 차라리 진짜 북극곰이 되어 겨울 내내 잠만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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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고 일은 줄어들지 않아


한동안 야근을 안했다. 일은 많이 밀려 있었지만, 일부러 야근만은 피했다. 쭈욱 야근을 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이 다가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건물에서 늘 야근하는, 자주 밤샘하는 이웃 일터 몇몇 분들이 저녁 8시나 9시쯤 퇴근하는 나를 보며 "왜 요즘은 야근 안 해요? 맨날 야근하던 사람이."라고 묻기도 했다. 그렇다고 저녁 시간을 푹 쉬거나 한 것도 아니다. 저녁에 외부에서 회의가 있었던 날도 있었고, 집에서 일터 일이 아닌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들이 있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피로에 찌든 몸과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관절 통증까지 매일 야근을 할 몸 상태가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야근을 자주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일단 일이 엄청나게 몰리는 시기이기도 하고, 낮엔 회의와 찾아오는 사람들과 강의 등으로 컴퓨터 앞에 앉을 시간이 없었고, 저녁에도 이것저것 급하게 치고 들어오는 일들을 처리하고 나면 늘 새벽이 되곤 했다. 정작 밀린 일은 계속 손을 대지 못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급격하게 느껴진다. 지난 번에는 딱 하루 밤새 일하고, 오전에 현장 답사를 갔는데, 거기서 만난 친분이 있는 업체 담당 부장님께서 나를 딱 보더니 곧바로 "밤새 일하고 오신 거예요?" 물었다. 얼마나 상태가 안 좋아보였으면 첫 마디가 저 질문이었을까? 그리고 또 다른 날엔 밤새고 오후 늦게까지 일한 후에, 집에서 조금만 쉬다가 다시 밤에 일해야지 했는데, 다음날 늦은 아침까지 깨지 못하기도 했다. 불과 3년 전에만해도 3일 연속 밤새 작업하며, 잠깐씩만 졸아도 잘 버텼다. 3일 연속 밤샘 작업하고 하루 쉬고, 또 3일 연속 이런 식으로 일을 이어가기도 했다. 최고 기록은 87시간 동안 연속 일하면서 집에는 잠깐씩 들어가서 씻고, 옷만 갈아입고 나왔던 것. 물론 그 시간에 잠깐씩 졸았던 시간은 포함되어 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예정보다 훨씬 늦게 퇴근하면서도 애초에 생각했던 일의 10분의 1도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계속 밖에 있었고, 오후에 사무실 돌아와서도 두 건의 미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 건마다 그 정도로 시간이 걸릴줄 몰라서 둘 다 시간이 더 걸리는 바람에 나는 컴퓨터 앞에 전혀 앉아보지도 못했고, 앞 타임의 방문자는 논의를 다 마치지 못하고 다시 날짜를 잡았고, 뒷 타임의 방문자는 제 시간에 도착하고도 나를 기다리느라 한참을 시간을 허비했고, 결국 서로 다음 일정 때문에 시간에 쫓겨 대화를 나눠야했다. 결국 또 해야할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금요일은 아이들을 만나는 날인데, 기다리는 아이들이 혹시 배고파할까봐 걱정이 되어 마음이 급했다. 전화를 걸어보니 다행히 애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있다고 했다. 그제서야 안심하고 토요일인 내일 발전소 청소를 가기 위한 준비물들을 챙기고,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 한 두건을 마친 후에 퇴근했다. 가면서 생각했다. 오늘도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으니, 밤엔 애들하고 장난치고 놀다가 자야겠다. 내일도 발전소 청소를 마치고, 하루종일 고생한 나를 위해 술 한잔 해야하니 또 일은 못 하겠구나. 일요일 저녁에 애들을 보내놓고, 지역 녹색당 운영위원회 회의 자료를 만들어서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나서 사무실로 가서 밤새 일을 해야겠다. 일요일 밤을 사무실에서 보내면 월요일부터 또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내겠지. 분명 밀린 일을 다 처리하려면 며칠을 밤을 새도 모자랄거야. 


그리고 그 생각 그대로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밤까지 보내고, 지금 월요일 아침을 맞는다. 사실 어제 오후에 아이들을 보내고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전날 발전소 청소 하느라 무리해서 등과 어깨쪽에 근육통이 있었고, 시원찮은 무릎과 발목으로 수백번 사다리를 오르내리느라 관절 통증도 있었다. 너무너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맡아 놓은 일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어쩔수 없이 급하게 안건지를 만들어놓고 회의 장소로 갔다. 일요일 저녁 늦은 시간, 춥고 비까지 내려 기분은 급격하게 다운되었지만,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는 길어졌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사무실로 출발했고, 12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분명 가볍게 저녁을 먹고 집을 나섰었고, 회의하면서도 간단한 간식을 먹었는데, 사무실 오자마자 급격하게 배가 고팠다. 졸릴 것을 대비해 편의점에서 에너지 음료를 사면서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등을 잔뜩 사서 먹었다. 집에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과식을 하고도 자꾸 뭔가가 먹고 싶었다.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밤새 일을 했음에도 별로 피곤하지는 않다. 공동사무실에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능률이 좋을때 일을 더 해야지 생각했는데, 아까 마을에서 활동하는 선배 한 분이 불이 켜진 우리 사무실 문을 열고 밤새 일한 거냐고 물어서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니 흐름이 깨져 버렸다. 잠시 쉬며 담배를 피우고 이왕 흐름이 끊어진 것, 알라딘에 짧은 글이나 하나 남겨야지 생각했다.


사실 쓰고 싶은 내용은 따로 있었는데, 그걸 다 쓰려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여, 그냥 금요일부터 바쁘게 지낸 주말 이야기를 짧게 전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월요일인 오늘도 저녁 늦게까지 회의가 있다. 그리고 아마 오늘도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일을 해야할 것 같다. 과연 언제 집에서 편하게 발 뻗고 잘 수 있을까? 일단 빨리 일이나 계속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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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공간


1년에 한 번씩 애들 엄마가 독일로 출장가는 시기가 돌아왔다. 나와 사귀기 전부터, 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해왔던 일이었고, 큰 아이가 태어난 다음 해에도, 작은 아이가 태어난 해에도 다녀왔었던 일이었다. 이혼 여부와 별개로 이 기간이 되면 달리 애들을 맡길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혼 전과는 달리 아이들과 10일 이상 같이 지내야하는 이 상황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좋기 때문에 당연히 이 기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임에 틀림없지만, 다만 아이들이 우리 집을 싫어하고, 평소 더 많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 애들 엄마와 같이 지내는 공간, 즉, 이혼 전까지 나와 함께 살았던 집에 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만 이 집에 다시 돌아와 지내야 하는데, 그게 너무 낯설고 또 한 편으로 싫은 느낌이다.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작년이나 재작년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여기 알라딘 서재에 두드려 놓았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이 공간에 다시 돌아와 며칠을 지내야하지만, 이 낯선 느낌이 너무 싫다고. 일상이 다 싫은데 그 중 최악은 음식을 만들 때다. 아이들은 기특하게도(혹은 신기하게도)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주는 걸 좋아한다. 보통 아이들은 밖에서 사먹는 패스트푸드 같은 걸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우리 아이들은 참 다르다. 암튼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애들 반찬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집 주방이 왜 이렇게 낯선 건지. 분명 4년 하고 몇 개월 전까지 나도 이 집 주방에서 자주 음식을 만들었었다. 그 사이 익숙했던 몇몇 냄비와 프라이팬 등 조리기구가 없어졌고, 못보던 조리기구가 생기긴했지만.


그런데 뭐 간단한 반찬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소금이나 식초나 이런저런 기본적인 재료들이 뭐가 어디 있는지 도통 찾지를 못하겠다. 매번 큰 아이를 부르거나, 작은 아이를 불러서 엄마가 이걸 어디 놔뒀을까를 물어야 한다. 물론 당연히 애들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며칠 전에는 심지어 밥 짓기를 실패했다. 대학시절 자취했던 때부터 밥을 해먹은 입장에서 평생 밥 짓기에 실패한 경우는 처음이다. 애들 엄마가 주로 쓰는 압력 밥솥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밥을 태워서 누룽지를 끓여보았다. (누룽지는 맛있었다. 큰 아이도 누룽지가 맛있다고 더 달라고 했다.) 이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인데, 도통 실패의 원인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그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기가 두렵다. 그래서 집에 가서 내가 쓰던 압력 밥솥을 가져왔다.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그냥 포기해야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조리기구를 사용하면 되는 것을.


어제는 탕을 하나 끓이고, 나물을 무쳤다. 아주 오랜만에 해본 시도였다. 평소라면 귀찮아서 절대 하지 않았을텐데, 왠지 이 집 주방에 서면 예전에 내가 해준 잡채나 나물 무침 등을 맛있게 먹었던 가족들 생각이 나서 자꾸 오랫동안 안 해본 음식을 다시 해보고 싶은 욕심을 내게 되는 것 같다. 문제는 앞서도 말했듯 이젠 이 집 주방이 낯설다는 점이다. 예전의 그 맛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만든 음식이 맛이 없을 리가 없는데. 내가 귀찮아서 안 해서 그렇지 맘 먹고 하면 못하는 음식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래도 맛있다고 먹어주는 아이들이 기특하고 고마울 뿐이다.


제일 견디기 어려운 건, 이 집 곳곳에 배어있는 추억들이 불시에 뇌리에 떠올라 괴로운 것과 이 집에서 나와의 기억이 비교적 적은 작은 아이가 자꾸만 "우리는 이렇게 해" 라고 애들 엄마가 정한 어떤 방식을 나에게 가르치려고 들 때다. 그때마다 내가 "엄마는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해도 틀린 건 아니야. 이렇게해도, 저렇게해도 다 괜찮아." 라고 말해도 아이는 듣지 않는다. 그저 애들 엄마와 함께 지내며 익숙해진 그 방식만을 고집할 뿐. 그게 사소한 일일수록 나는 더 괴롭다.


사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점점 더 아빠와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혼에 대해 논의 할 때, 무조건 반반 아이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줄 것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걸었었다. 만약 아이들 양육권으로 소송을 해야 했다면, 아무리 가난한 상황이었어도 무조건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은 점점 우리 집에 오기를 싫어했고, 처음에 반반이었던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젠 일주일에 이틀. 그마저도 주말에 친구들과 노느라 시간을 보내는 큰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이들은 점점 아빠와 멀어지는 구나 생각하면 정말 서글프다.


지긋지긋한 갑질


아침엔 조선일보 앞에서 왜곡 보도 규탄 기자회견을 했고, 오후엔 신규 발전소 건으로 공무원들의 어이없는 갑질 때문에 수십통의 전화와 문자와 이메일을 보내며,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애쓰느라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나의 질문에 화를 내며 갑질하는 공무원. 그가 어린 여성이라서 더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나이 많은 남성과 나이 어린 남성의 갑질 때문에 이번 보다 더 화가 났었다. 그땐 오히려 공무원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은 마음에 더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어린 여성이라서 더더욱 말을 조심하느라 단 한 번도 먼저 강한 어투로 말을 건 적 조차 없었다. 약 3달 전, 그가 막 이 부서로 발령받았다고 업무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며칠 후에 연락 달라고 했던 그 때부터 나는 계속 그를 존중해왔다. 그냥 무심코 질문을 하려다가도 한 번 더 생각해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단어를 선택하곤 했다. 그랬기에 오늘 그가 언성을 높이고 내게 화를낸 순간, 그 화를 견디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쥔 손이 덜덜 떨렸고, 말이 빨라졌고, 나도 그를 따라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목소리까지 떨리는 걸 감춰보려 했는데,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 후에 그가 다시 전화를 했는데, 내 질문과 요청 사항을 검토 중이니 며칠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몇 시간동안 안정을 되찾았기에 평소처럼 예의를 갖춰 내가 물어야 할 질문들을 던졌다. 그는 자세한 대답을 피한 채 현재 검토중이니 기다리라는 너무나도 형식적인 답변으로 일관하다가, 내 계속되는 질문에 잠시동안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 듯 했으나, 참는 것 같았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끝까지 본인이 화를 낸 것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아마 본인은 잘못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 본인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너무나도 공무원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데, 말이 잘 안 통하는 어떤 남성이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서 불쾌했다고 여길 것이다. 딱 거기까지가 그 사람의 한계일 것이고, 이 나라 공무원의 한계일 것이다. 


예전에 했던 환경단체, 시민단체 그리고 출판사 일도 힘들었지만, 약 5년동안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 바로 공무원 갑질을 견디는 일이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 시절에는 절대 갑질을 견딜 이유가 없다. 그냥 싸우면 되는 일이었다. 만약 공무원이 갑질을 하면 공무원 복무규정을 비롯해 온갖 법규를 다 동원해 그를 뭉개버릴 수 있었다. 출판사에서는 공무원이 아닌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 도매상 담당자들의 갑질이 있었지만, 그걸로 굳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그건 시스템의 문제였고, 나는 그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끔 술을 사주고, 가끔 식사를 대접하면서 내가 필요한만큼만 챙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단체에 있을 때처럼 공무원을 묵사발 내버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사업이 되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언젠가부터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내가 탁구공이 된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부서에서 핑 치면, 저 부서에서 퐁 치는 탁구공. 여기 관공서, 저기 관공서, 이 주무관, 저 사무관, 이 시공사, 저 전문가 중간에서 조율하느라 하루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끼니도 제 때 못 챙겨먹으면서 여기 저기 회의와 미팅을 쫓아다니는데, 정작 일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게 지난 5년동안 계속 반복되고 있다.


가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짧은 시간에 확 늙었냐고 묻는다. 흰 머리가 많이 늘었고, 머리 숱도 눈에 띄게 줄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이젠 내 나이보다 더 늙어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게 다 공무원 갑질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다.


어떤 날엔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분하고 짜증이 나 견디기 힘들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겠지. 벌써 1시를 훌쩍 넘기도록 이 글을 두드리고 있으니. 정말 하루라도 빨리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수천번째 반복해본다. 이 일을 그만둬야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양육비다. 매달 애들 양육비로 보내야 하는 돈이 최저임금을 맞춰 받는 내 활동비의 절반이다. 그것도 최저임금이 올라서 지금은 절반이지만, 그 전에는 그 비중이 더 컸다. 암튼 고정적으로 받는 수입이 없으면 양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짓눌려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매일 매일 다른 답을 찾아보려 고민하지만, 늘 그때마다 떠오르는 건 이 나이에 무슨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나마 이 분야에서 인정 받는 게 어딘가 하는 너무나도 보수적이고, 매너리즘에 빠진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조금이라도 더 젊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술과 담배가 없었다면 어찌 견뎠을까?


이 힘겨운 삶을 견뎌낸 건 전적으로 술과 담배 덕분이다. 남들은 술과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고 말하겠지만, 내게는 반대다. 만약 그 둘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자살을 선택했거나, 아예 정신이 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주 함께 술을 마시는 후배들에게 늘 고맙다고 말한다. 그들이 술 자리에서 내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담배가 없었다면, 나는 일과 시간을 무사히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오전 중에 2건의 회의를 채 마치기도 전에 넋이 나가버리지 않았을까? 담배가 있었기에 정신을 추스리고, 해야 할 일을 다시 정리하고,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지만, 올해들어 자꾸 이유없이 여기저기 관절이 아픈 이후로 마시는 양과 마시는 빈도를 많이 줄였다. 담배는 오래 전, 그러니까 애들 엄마가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잠시 끊었다가 몇 년 후에 다시 피우게 된 이후로 양이 확 줄었고, 이후에 거의 늘지 않았다. 담배 한 갑을 사면 대개 일주일 이상을 피운다. 담배를 가장 많이 피운 시기였던 자취 시절, 하루에 2갑씩 피웠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거의 어디가서 흡연자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술과 담배는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산소마스크와 같은 역할, 즉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란 말이다.


운동과 술


이유 없이 여기 저기 아픈 관절 통증으로 운동을 못 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침마다 손가락, 손목, 발목, 무릎, 어깨 등 비정기적으로, 간헐적으로 통증을 느끼며 매번 생각하는 건, 스트레스와 피로와 술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도무지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 또 숙취와 피로와 관절 통증을 느낀다. 이 악순환은 이 일을 그만둬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주말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날에는 술도 담배도 없이 이틀 이상을 아무런 문제 없이 보낼 수 있다. 아니 그 기간이 한 달이던, 두 달이던 일에 의한 스트레스가 없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실제로 연휴 며칠 동안 그렇게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무척 운동이 하고 싶다. 피로와 관절 통증으로 매번 간단한 동작조차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오지 않아 포기한 날들이 얼마던가? 


아이가 내민 상추쌈


이렇게 서재에 주저리주저리 글을 두드리고 있는 건, 아마도 조금 마신 술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하루 너무나도 갑작스레 어이없는 상황을 맞아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들였고, 그래서 퇴근 무렵 너무나도 지친 상태였다. 도저히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줄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걸어 외식을 하자고 제안했고, 나는 오늘만큼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상태였기에, 뭔가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이 필요했다.


예전에 자주 갔던, 한동안 거의 가지 않았던 보쌈집을 찾아갔다. 큰 아이는 그 집이 싫다 했고, 작은 아이는 오랜만에 간다고 좋아했다. 억지로 큰 아이를 끌고 찾아갔건만, 그 집은 이제 배달이나 포장 주문만 받고, 식당 안에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어쩔수 없이 돌아나와서 다른 식당을 찾아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나도 아이들도 지쳐갔다.


역시 한때 가끔 가곤 했던 갈비집 앞에서 아이들의 의사를 물었더니, 둘 다 좋다고 했다. 돼지갈비 2인분을 시켜놓고 잠시 반성과 자기 합리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 기후 위기 시대에 육식을 줄여야 하건만, 그럼에도 오늘 같은 날엔 고기와 술을 좀 먹어줘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이런 고기집에 오면 나는 늘 고기를 구워 아이들을 먹이느라 초반에는 거의 먹지 못한다. 어느 날 그런 사실을 깨달았는지, 큰아이가 말없이 상추에 고기와 마늘 등을 얹은 쌈을 내 입에 넣어주곤 했다. 매번 그 상추쌈을 받아 먹을 때마다 나는 고마움과 뿌듯함을 느낀다. 말없이 아빠를 위해 행동하는 딸이 되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런 딸을 키웠다는 자부심이 든다.


오늘도 아이가 말없이 내민 상추쌈을 받아 먹으며, 그리고 바로 이어 소주 한 잔을 들이키며, 하루 종일 너무나도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런 맛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지. 


우울한 날, 우울한 감정


영화나 소설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아마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힘들다. 하물며 실제 겪는 누군가의 죽음은 더욱 힘들 수 밖에 없다. 그 누군가가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해도, 스쳐 지나는 뉴스 속 한 줄이라해도 그렇다. 


'설리'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우연히 출판사 후배가 들려준 노래, 불나방 스타 소세지 클럽이라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짝퉁이란 느낌이 물씬 드는 밴드의 노래를 들었을 때였다. 어느날 보았던 유튜브 영상에서 유희열이 너무나도 좋아해서 라디오 방송에서 두 번씩 틀기도 했다고 소개했던 [알앤비]라는 노래 중에 '설리'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 노래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설리라는 이름이 뭔지 무척 궁금해져서 검색해봤더니 아이돌 출신의 여성이라고 결과가 나왔다.


사실 누구나 각자의 취향이란 게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해도 내 눈에는 별로인 사람이 분명 존재한다. 내겐 몇몇 배우나 가수가 그랬다. 다들 예쁘다고 난리여도, 내 눈에는 글쎄 였다. 설리도 내 취향은 아니어서 별로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희열 뿐 아니라 내게도 무척 좋아하는 노래가 되어버린 그 노래 가사는 아쉽게도 그닥 설득력을 갖지는 못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가 나온 영화를 봤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아마 평소라면 절대 보지 않았을 영화였겠지만, 어쩌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봤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 설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에서 이 영화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리얼]은 그 악명을 익히 듣고 난 후에, 대체 얼마나 못 만든 영화길래, 얼마나 엉망이기에 다들 저런 반응이지 하는 궁금한 마음에 뒤늦게 봤다. 아,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그가 나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니 모를 수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짧게 나온 그의 눈부신 몸매 때문이었다.


아, 이런 표현은 결국 그를 특정한 이미지로만 소비하는 시선이나 심지어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갔을 거라고 추정하는 (아직 그 죽음에 대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악플과도 다르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냥 내 입장에서 솔직한 감상을 표하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다른 걸 찾을 수도 없지 않은가?


암튼 그렇게 내게는 거의 모르는 사람과도 다름 없는 누군가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다. 그가 연예인이어서, 내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어서 아마 더 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사회면에서 단 한 줄 언급한 어느 이름 모를 노동자의 죽음이었으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여기 서재에 여러번 언급했지만, 사춘기 시절부터 자주 자살 충동을 느꼈고, 진보신당 박은지 부대표의 선택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을 느꼈듯이, 나는 자살이 결코 해서는 안되는 나쁜 선택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선택할 수도 있는, 여러 갈림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 그 죽음이 자살이라고 결론나지 않았지만) 만약 설리의 죽음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해도 충분히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니까.


그래서 혹 언젠가 내가 그런 선택을 하더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내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정신이 온전치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내 인생의 여러 선택 중 하나를 택했을 뿐이라고. 그 선택에는 분명 그에 합당한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봤다. 한 번에 다 본것이 아니라 5일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이어서 봤다. 이 영화를 좋아해서 여러 번 다시 본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그걸 다 쓰려면 또 엄청난 시간과 분량이 필요할테니 다음으로 미뤄두고, 이번에 다시 보면서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몇몇 감정선이 보였다. 이것도 다 나이가 들어가는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는 또 감정이 울컥했다. 우울한 날에 우울한 결말을 맺는 영화라니. 이 영화의 여운이 아이들을 재우고, 이 글을 두드리게 만들었고, 이 시간까지 온갖 잡다한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무실에 두고 온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 반이다. 내가 좋아하는 Lady Antebellum 의 [Need you now] 에 나오는 가사 quarter after 1(새벽 1시 15분) 보다 1시간 15분 더 지났고, 내가 좋아하는 책 [세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보다는 30분 전이다.  


내일 아침에 아이들을 깨워서, 뭔가를 간단히 먹여서 학교를 보내고 출근하려면 이젠 자야할텐데, 웬지 술이 모자라서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이 글은 이만 마무리해야겠지. 쓰고 싶은 글이 많은데, 늘 시간은 부족하다. 언젠가 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구상해놓은 소설을 써야지. 오늘 밤엔 머릿속에서 소설을 쓰며 잠을 청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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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0-16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s half past five~ ^^
좀 주무셨나요?
저는 평소 잘 안꾸는 꿈을, 그것도 2시간 짜리 특강 듣는 꿈을 다 꾸었네요.
아마 어제 2시간 짜리 어떤 수업을 땡땡이친 것 때문에 찔렸나봐요.
아이들과의 길지 않은 시간, 잘 보내시기를.
피곤하실텐데 아이들이 좋아하니 직접 식사 준비를 해주는 아빠, 아이들 아침 먹여 학교 보낼 생각하며 잠을 청하는 아빠.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감은빛 2019-10-17 18: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자려고 누웠는데도 잠이 안와서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었어요.
얼마 못 자고 일어나야해서 어제는 많이 피곤했어요.
남겨주신 말씀 하나하나 모두 고맙습니다! ^^

책읽는나무 2019-10-16 0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 보니 이 새벽에 괜히 눈물이 핑 도는 듯 합니다.
지금 창밖엔 일출이 시작되려고 산너머 하늘께가 붉어졌습니다.
일출을 보려고 부러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중입니다.그러면 하루가 좀 더 다르게 느껴지는 기분이랄까요!!
암튼 고단하실테지만 하루,하루가 감은빛님께 좀 더 나은 날들이 되길 바랍니다.

감은빛 2019-10-17 18: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일출을 보려고 일찍 일어나신다니,
절대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는 저로서는 부럽습니다.
말씀 덕분에 힘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9-10-16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삶의 고단함이 전해져 옵니다. 하지만 부디 힘내세요. 오늘 저도 이런저런 생각하다 어떠면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고 대단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춘기 아이는 다른 이유지만 엄마와도 멀어진답니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세상 전부였던 시간들 생각하면 갑자기 울컥울컥 할 때가 많아져요. 화이팅하세요.

감은빛 2019-10-17 18: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네, 말씀처럼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차라리 그냥 죽음을 선택하면 괴롭거나 힘든 일은 이제 더 생기지 않을테니까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또 망설이게 되는 것 같아요.

사춘기 아이는 정말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이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금방 화냈다가, 다시 금방 또 배시시 웃으면서 다가오곤 하더라구요.

큰 아이가 엄마와도 이런저런 일로 다툼이 있었던 걸 알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오히려 애들 엄마가 저보다 더 큰 아이 대하는 걸 힘들어하더라구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2019-10-16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7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9-10-1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 맘 고생이 많으시네요.그래도 화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감은빛 2019-10-17 18:4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카스피님.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yrus 2019-10-17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공무원은 전화를 받는 태도가 불친절해요. 예전에 할머니 이름으로 소유한 땅 때문에 토지 관리하는 공공기관에 일하는 공무원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어요. 부동산과 토지 관리에 대해 잘 몰라서 전화를 한 것인데 공무원이 알려준 설명이 이해가 안 돼서 양해를 구하고 다시 질문을 했어요. 공무원은 다시 설명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약간 짜증을 내면서 대답했어요. 감은빛님이 느꼈을 심정이 어떤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감은빛 2019-10-17 18:51   좋아요 0 | URL
네, 시루스님.
전화 받는 태도 뿐 아니라 뭐랄까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 같은 것이
안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냥 주어진 자리에서 딱 주어진 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실은 그 주어진 만큼조차 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고 느껴요.
물론 모든 공무원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가 운동을 시작했던 약 20년 전부터 여러가지 일로 만나본 대다수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요즘 특정한 공무원들 때문에 너무 머리가 아프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