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되고 싶었던 직업 중 하나는 서점 주인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어 사람들 지나가기도 어려운 그런 서점. 온종일 책 읽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 참 좋겠다 싶었다. 물론 지금은 안다. 서점 주인은 서점 경영과 각종 잡무 때문에 맘 편히 책 읽을 시간 따위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작은 서점은 아무리 운이 좋아도 살아남기 어렵다. 왜곡된 유통구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때문에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다. 지난 논란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다른 온라인 서점들의 대응이 없는 상황에서 알라딘이 갑자기 반대 서명을 띄우면서 알라딘 서재에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는 듯하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알라딘은 반대 서명이 아닌 찬반을 묻는 게시판으로 전환했고, 몇몇 출판사들이 알라딘에 출고 정지를 선언했다. 이 복잡한 국면을 바라보는 것이 참 씁쓸하다.
가만히 있으려고 하다가 나도 모르게 몇몇 게시글에 댓글을 남기게 되었다. 대부분 추측으로 이루어진 정보에 대한 보완 설명 개념으로 댓글을 남겼는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나도 따로 글을 하나 남긴다.
내가 보기에 이번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안 발의에 대한 독자들 논란의 핵심은 책값이다. 그래서 책값이 싸다, 비싸다 하는 말들이 자꾸 오가는 듯하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도서정가제(즉 출판문화산업진흥법)는 엄밀히 말해서 정가제가 아니다. 일부 출판인들은 이를 '할인촉진법'이라고 부른다. 이 법은 이름과는 달리 정가판매가 아닌 할인판매를 부추기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법 덕분에 온라인 서점은 맘껏 책값을 할인하고, 마일리지를 제공하면서 독자를 모아왔다. 그리고 출판사도 조금 더 많은 책을 팔기 위해 여기에 편승했다. 그리고 할인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반 서점들은 점점 더 설 곳을 잃어갔다. 책이 팔리지 않으니 서점에서 출판사로 대금결제를 해주기가 어렵고, 출판사 입장에서도 책이 팔리지 않는 서점들보다는 책이 더 잘 팔리는 온라인서점으로 집중했다. 시간이 갈수록 온라인서점은 시장 점유율을 높여갔고, 이제 매우 큰 힘을 갖게 되었다.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이 법이 정말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서시장에서 유독 온라인서점에만 매우 유리하게 만들어진 이 법 덕분에 출판사와 독자들은 알면서도 계속 온라인서점의 힘을 키워줬다. 아니 도서의 정가가 뻔히 정해져 있는데, 책을 반값에 파는 것이 정상인가? 그럴 거라면 왜 애초에 정가를 반으로 책정하고, 할인 없이 팔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앞서 현행 제도를 '할인촉진법'이라 부른다고 했다. 이 법 덕분에 출판사도 독자도 마치 할인을 안 하면 안될 듯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인 판매를 하지 않는 출판사들도 많다. 아마 시장 점유율로 따지면 상대도 안 되겠지만, 숫자로만 따지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가 책 할인 판매에 익숙해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온라인서점이 처음 생기고 자리를 잡은 것 자체가 오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할인 판매라는 관행이 강하게 굳어져 간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이름과는 달리 할인을 권하는 이상한 법 때문에 불공정하고 기형적인 유통구조가 자리 잡았고, 점차 굳어져 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를 바로 잡는 것이 정상으로 보인다.
내가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가장 강하게 깨달은 것은 작년 여름 [안철수의 생각]이 출간되었을 때였다. 당시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큰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온라인 서점이나 오프라인 서점이나 독자들이 책을 많이 찾았다. 온라인 서점들은 아마 예약 판매를 했을 테고, 출판사로부터 차질없이 물량을 제공받아 팔았지만, 오프라인 서점들은 책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단골들이 책 나오기 전부터 예약해두고, 드나드는 독자들이 책을 찾아도 책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니! 그에 반해 대형서점들과 온라인서점들은 책을 쌓아놓고 팔았다.
당시 SNS를 통해서 황당한 글을 읽었다. 7월 25일 오전에 교보문고 광화문 매장 앞에서는 '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낙하산 인사 규탄 및 출판문화살리기 실천대회'가 열렸다. 여기에 전국 각지의 중소형 서점을 경영하는 사장님들도 올라오셨는데, 집회가 끝나고 교보문고 매장에 들린 사장님들께서 저마다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쌓여있는 [안철수의 생각]을 바라보았다. 출간된 지 10일째인데, 예약을 받아놓은 책들이 벌써 여러 권인데, 도매상에 아무리 연락을 해도 계속 물량이 없다는 답변밖에 돌아오지 않는데, 여기 교보문고에는 책으로 탑을 쌓아놓았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단골들을 실망하게 만들고, 예약 받아놓은 책들을 취소할 것인가? 서점경영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동료 서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교보문고에서 책을 사가서, 최소한 예약된 부수만이라도 팔 것인가? 솔직히 매우 황당하면서도 눈물겨운 소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황당한 상황은 바로 불공정한 거래를 규정해놓은 현행 도서정가제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는 출판사와 서점 간의 거래에 대한 문제이다. 절대 책 가격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개정안이 통과된다고 해도 책값이 더 올라가거나 내려가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책값 산정에서 마케팅 비용의 문제는 엄밀히 말하면 부차적인 부분이다. 독자들은 더는 지금처럼 과도하게 할인된 가격에 책을 사보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일 텐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이 비정상이다. 게다가 일부 출판사들은 지금도 할인 판매를 하지 않고 있으니, 모든 책들을 다 할인받았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소비자로서의 독자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책값이 아닌 서점과 출판사 간의 유통 구조를 바로 잡는 것에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이번 개정안으로 동네서점들이 살아날 수 있나?'라는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번 개정안이 동네서점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힘겹게 꾸려가고 있는 서점들이 적어도 온라인서점과 같은 조건에서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합리한 제도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네서점이 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출발 선상이 달랐던 것을 뒤늦게라도 같은 위치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처음 알라딘이 내걸었던 '도서정가제 강화'라는 표현이 무척 유감이고, 그 안에 담겨있던 사실 왜곡에도 유감을 표한다. 마치 독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출판사들의 이기주의 때문에 빼앗기는 상황인 것처럼 몰아갔다. 알라딘의 이러한 왜곡은 무척 치사한 행위이지만 큰 효과를 발휘하여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서명을 받았다. 이번 개정안의 본질을 흐려 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다음으로 알라딘에 출고를 정지한 출판사들에 대해 짧게 생각해보자. 오늘 아침 존경하는 선배 출판인의 페이스북에서 관련 글을 읽었다. 출판사는 거래처와의 관계에서 가끔 출고정지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주로 어떤 문제가 계속 반복되고, 더는 말로는 설득이 어렵다고 판단할 때 이루어지는 조치다. 알라딘은 벌써 두 번째로 도서정가제 반대 서명을 조직했다. 나와 그 선배의 기억으론 두 번째인데, 한기호 소장님은 세 번째라고 하신다. 어쨌거나 반복되는 문제에 대해 이제는 말로는 설득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출고정지를 한 거라고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다른 온라인서점들이 모두 가만히 있는데 혼자 나섰다는 것도 출고 정지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알라딘 서재에서 몇몇 분들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다. 동의하진 않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내가 주로 구매하는 서점이고, 내가 서재를 만들어 이용하는 서점인데, 여기에 책을 안 준다고 하다니, 독자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다만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분명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출고 정지라면 당장 그만큼의 매출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대부분 규모가 있는 출판사들이었기 때문에 알라딘 정도의 거래처라면 제법 큰 액수의 매출이 나올 것이다. 대의 때문에 실리를 포기하는 일을 웬만한 출판사 사장이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어려운 결정을 출판사에서 내린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출고정지까지 내린 방식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알라딘은 한차례 태도를 바꿔 찬반 공론의 장으로 전환(물론 출판사 내부적으로 출고정지를 발의한 시점에서는 아니었겠지만)했다. 한 번 더 대화를 시도하고, 조금 더 지켜봐 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그리고 지금 알라디너들이 분개하듯 독자를 무시한 처사로 보인다는 것을 간과한 것(간과한 것이 아니라 고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추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도 아쉽다. 혹시 이런 조치를 출판사들이 단체로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어제 그런 우려 때문인지 인문사회과학 출판인협의회와 한국어린이 출판협의회 그리고 청소년 출판협의회 등의 출판 단체들이 모두 조직적인 출고 조치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입장을 발표했다.
늘 그렇지만 대립하는 입장에서 논쟁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상대방 주장을 잘 이해하기 어렵고 또 내 주장을 쉽게 전달하기 어려울 때 더욱 그렇다. 이번 일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논쟁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나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현이 다른 분들의 의견을 막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논쟁이 아닌 토론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여기에 관련된 다른 의견이나 질문은 언제든지 환영하니 남겨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