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형 인간
오늘 하루는 그냥 푹 퍼질러 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아침이었다. 알람이 머리 옆에서 울리는데, 어디 멀리서 울리는 음악 소리처럼 느껴졌다. 피곤했다. 눈을 떴으나 눈꺼풀의 무게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감겨버렸다. 눈을 뜨지 못한 채 간신히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알람을 멈췄다.
매일 아침마다 느끼는 건데, 나는 단연코 새벽형 인간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온 가족이 다 같이 단칸방에 살 때는 엄마가 그만 자야 한다고 말하면, 누워서 이불을 덮어쓰고 자는 척했으나, 실제로는 모두 다 잠들 때까지 온갖 공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만히 누워(자는 척하면서) 몇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나중에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옮긴 후엔, 나와 여동생이 작은 방에서 지냈다. 그때도 처음엔 불을 끄고 자는 척하다가 동생이 잠들고, 엄마가 큰 방에 들어가시고 나면, 불을 켜고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저절로 잠들곤 했다. 조금 더 자라서는 밤에 만화를 그리거나 글을 쓰기도 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도 이 습관은 고쳐지지 않았다. 늘 새벽까지 책을 읽거나 뭔가를 끄적거렸다. 대학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새벽까지 깨어있는 일이 너무나도 익숙하기에 늘 가장 늦게까지 남아서 술을 마셨다. 학원 강사 생활을 할 때는 자정 무렵 퇴근해서, 그때부터 아침까지 술을 마셨다. 아침에 잠들고, 점심때쯤 깨서 간단히 밥을 먹고 출근하곤 했다. 책과 끄적이는 일이 술로 바뀌었을 뿐, 나는 늘 새벽까지 뭔가를 붙들고 있었다.
새벽이 되면 뭔가 대단한 걸 쓸 수 있을 것처럼 창작욕이 불타오른다. 어제도 그랬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일어나야지 생각했다. 최근에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이들을 재우다가 나도 함께 잠든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꼭 일어나서 뭘 좀 해야지. 큰아이가 먼저 잠들고, 한참 후에 작은아이의 숨소리도 고르게 쌔근거리기 시작했다. 슬며시 휴대폰과 안경을 챙겨 일어났다. 작은 방으로 건너와 컴퓨터를 켜고, 끄적이다 멈춘 습작들이 들어있는 폴더를 열었다. 쓰다만 단편소설들이 몇 개 있고, 장편소설의 설정을 끄적여 놓은 것이 두어 개 있었다. 무얼 한번 건드려볼까? 파일 하나를 열었더니, 처음 이 설정을 잡았을 때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 왜 이런 유치한 설정을 잡았을까? 이걸 어떻게 고치면 좀 더 개연성이 좋아질까? 고민하다가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 서핑을 시작한다. 서핑을 하다보면 원래의 목적은 곧 사라진다. 서서히 눈에 피로가 몰려오고,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머리는 아주 천천히 굴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시간 검색어나 주요 뉴스를 타고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있다. 저런! 결국, 오늘도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했다. 더 버티면 내일 출근이 힘들어진다. 이젠 자야 한다. 조금이라도 눈과 뇌를 쉬어줘야 내일 일을 할 수 있다. 애초에 욕심이 지나친 것이었다. 낮엔 일을 하고, 저녁엔 아이들을 돌보고, 새벽에 글을 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접으며 폴더를 닫고, 컴퓨터를 끈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몸과 마음이 무겁다.
최악의 마감
지역 언론에 한 달에 한 번 아이들 이야기로 글을 쓰기로 했다. 작년 연말에 첫 글을 보내고, 1월 마지막 날에(정확하게는 2월 첫 날의 새벽이지만) 두 번째 글을 보냈다. 보고서든 에세이든 마감일을 딱 정해줘야 바로 전날 밤을 새워서 글을 쓰는 편이라 미리 알려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냥 월말까지 달라고 표현하셨다. 솔직히 1월 마지막 날이 되도록 잊고 있었다. 퇴근 시간에 문자를 받았는데, 오늘까지 원고를 주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월말이라고 했지. 어차피 말일에는 정산업무 등으로 야근을 해야 할 상황이라 빨리 업무를 마무리하고 사무실에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니 집중력이 확 떨어졌고, 업무는 자꾸 늦어졌다. 새벽으로 넘어가서야 어느 정도 업무를 마쳤다 싶었는데, 갑자기 프로그램에 오류가 생겼다. 어라! 이거 왜 이래? 지금 장난하는 거지? 왜 이러는 거야? 내일 아침까지 꼭 마무리해야 하는데, 지금 이러면 어쩌라는 거야? 아침에 출근해서 자정이 지나도록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었으니, 눈이 너무 피곤했고, 머리는 무거웠다. 오류를 해결해야 하는데,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으려나? 오류 해결을 포기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1월 중순에 대략 어떤 콘셉트의 글을 써야지 생각해둔 것이 있어서, 가볍게 시작했다. 한참을 두드리다가 뭔가 좀 초점이 안 맞는 느낌이어서 다 지우고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두드리고 지우고, 두드리고 다듬고, 다시 두드리고 또 지우기를 여러 차례. 한 서너 시간 두드리다 보면, 대충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은 글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워낙 핀치에 몰린 상황에서 시작해서 그런지 시간이 지나도 글이 더 나아지지 않았다. 읽어보고 또 읽어봐도 뭔가 부족해 보였는데, 도무지 그 부족함을 메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이번 달엔 그냥 보내야지. 더 이상은 쓸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다시 오류가 났던 프로그램을 살펴봤다. 이번엔 뜻밖에 간단하게 해결책을 찾았다.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었다.
사무실에는 잠잘 공간이 없다. 집에 돌아가서 씻고 발 뻗고 자고 싶었다. 택시비는 대략 1만 5천 원. 사무실 차량을 몰고 갔다가 아침에 가져올까 생각도 해봤는데, 너무 피곤해서 운전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고, 거리로 나섰는데 비교적 외진 곳이라 과연 택시가 올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온몸을 마구 할퀴었고, 다리와 이빨이 덜덜 떨렸다. 몸은 춥고, 머리는 멍했다. 이러다가 피로와 저체온증으로 나도 모르게 쓰려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차를 몰고 나올까?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할 즈음 택시 한 대가 멀리서 다가왔다.
집에 돌아온 시간은 4시가 넘어서였다. 씻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이제껏 최악의 마감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쉬움은 있었으나, 더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꼭 내고 싶은 책 중에 하나는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었다. 육아휴직을 했을 당시엔 욕심을 좀 내보려고 했으나, 곧 현실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물거품이 되었다. 조금 여유가 생길때마다 블로그에 끄적이곤 했는데, 가벼운 끄적임에 불과했다. 이번 지역 언론에 보내는 글도 한 달에 한번씩인데다 글의 분량도 작고, 통일성 있는 기획으로 이어가기가 어려워 책으로 엮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심은 남아있다. 내가 조금 더 부지런해진다면 언젠가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딱 내가 쓰고 싶었던 책이 나왔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소제목들을 읽어보니, 딱 내가 하고싶었던 그런 얘기들이 실려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무지 재미있을 것 같다.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함께 지를 책을 고민해봐야겠다. 어쩌면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먼저 구매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