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경험의 차이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보았다. 요즘 아이들은 워드나 엑셀 프로그램의 저장 아이콘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는 글이었다. 그제서야 플로피디스크가 사라진지 제법 오래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씨디롬조차 안달린 컴퓨터가 나온다는데, 플로피디스크를 알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콘은 직관적이다. 보는 순간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플로피디스크를 모르는 아이들은 그것이 저장버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낼까? 그냥 외우는 것일까?
요즘 경험의 차이로 인해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다. 서로의 경험과 상황과 이해관계가 모두 다른 이들이 만나 관계를 잘 풀어가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중간에서 이쪽의 편이 되어주지도 못하고, 저쪽의 편이 되어주지도 못했다. 양 쪽 모두에게 좋은 해결안이 무엇일까? 아니 그런게 과연 있기는 한 걸까?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가 한발 물러서서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일텐데, 그게 가능했다면 이렇게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아니 지금 이 상황을 바라보는 나마저도 내 개인적인 잣대에 따라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지 않은가? 과연 내 경험에 따라 내가 내린 판단에 100% 이해하고 따라 올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둘. 새 것과 헌 것
며칠 전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동네 작은 공원에 다녀왔다. 몇 해 전에 사두었다가 모셔두기만 했던 축구공과 줄넘기를 갖고 갔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다니며 공을 찼고, 오랜만에 줄넘기도 해봤다. 그런데 한창 줄넘기를 하다가 잠바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뒷 케이스와 배터리가 분리되어 나뒹굴었고, 급히 줄넘기를 멈추고 주워들었더니 액정이 깨져 있었다. 강화유리로 되어있을 액정은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금이가있었다. 혹 완전히 망가져버린 것일까 겁이나서, 급히 배터리를 끼우고 폰을 켜봤다. 다행히 잘 켜졌고, 전화를 비롯한 기능에 이상은 없는 듯 했다. 다만 화면의 대부분이 깨진 거울처럼 보여서 글씨를 읽기가 불편했다. 이런저런 기능을 작동시켜보다가 손가락이 금간 유리조각에 베여 피가 났다. 그제서야 액정보호 필름 남은 것이 어딘가에 있었을텐데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금간 유리위에 보호필름을 붙였다.
다음날 일터에서 동료들에게 보여줬더니, 금이 아주 예술적으로 가서 마치 무늬처럼 보인다는 농담을 했다. 보호 필름 덕분에 손을 베일 걱정은 없으니 그냥 (예술적인)무늬로 생각하고 (조금 불편해도) 그냥 계속 쓸 것인가? 이번 기회에 낡은 스마트폰을 최신 폰으로 바꿀 것인가 고민을 했다. 최근 약정 기간이 끝났고, 그 전부터 약정 기간이 끝나면 폰을 바꾸려고 마음 먹고 있었기 때문에 이건 폰을 바꾸라는 징조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덥석 바꿀까 싶기도 했지만, (폰 시세를 잘 아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최근이 워낙 빙하기(녀석의 표현에 의하면)라 좀 더 기다리는 것 좋겠다고 하니 돈도 없는데, 그냥 써야하나 싶기도 했다.
결국 나는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새 폰을 질렀다. 이전 약정기간에 워낙 비싼 요금제를 쓰고 있어서, 제법 좋은 폰(완전 최신은 아니다!) 질렀는데도 오히려 요금제는 더 내려갔다. 그래 오히려 예전보다 돈을 더 아끼는 것이다. 어쨌거나 새 폰을 받아들었는데, 여전히 나는 불편했다.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해야 했고, 새로운 기능을 익혀야했다. 만약 액정이 깨지지 않았다면, 익숙해진 헌 것을 두고 굳이 불편한 새 것을 사야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셋. 적응과 매너리즘
3월과 4월 작은아이는 유난히 짜증을 많이 부리고,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내는 이를 두고 '엄마엄마 병'에 걸렸다고 표현했는데, 왜 갑자기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작년 연말부터 지역에 있는 시민신문에 아이들과 지내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데, 마감을 앞두고 글을 쓰다가 그 답을 찾았다. 3월부터 새학기가 시작되고, 아이는 학년을 올라갔다. 새로운 담임 선생님과 새로운 친구들과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이는 아직 어렸고, 작년 담임 선생님을 거의 엄마처럼 여기고 지냈는데, 하루 아침에 새로운 엄마와 지내야 하게 되었으니, 그 스트레스가 엄청났을 것이다. 그제서야 왜 아이가 엄마엄마 병에 걸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4월 중순부터 작은아이는 많이 좋아졌으며, 5월이 되자 어느정도 적응을 한 것처럼 보였다.
큰아이도 이제 2학년이 되어 학교 생활에 어느정도 적응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입학하기 전에는 울음이 많고 여린 아이가 어떻게 학교 생활을 해나갈까 싶어 걱정을 했고, 실제로 엄한 선생님을 만나 많이 힘들어했다. 지금까지 학교라는 공교육 시스템에 대해 들어오고 또 피상적으로 생각해왔던 문제점들이 하나하나 내 문제가 되었다. 혁신학교라는 곳으로 옮겨 볼까? 계속 고민하다가 돈 때문에 포기했던 대안학교를 다시 알아볼까? 돈 문제는 대출로 해결하면 안될까? 아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차라리 일을 그만두고 내가 아이랑 지내면서 홈스쿨링을 할까? 나는 강사 생활도 제법 해봤고, 아이들과 노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라 잘 해낼 자신도 있는데 말야. 아니 그래도 아이들은 또래랑 지내는 게 제일 좋지. 아무리 무너진 공교육이라지만, 학교에서 친구들과 지내는 것이 제일 좋지 않겠어? 아이가 스스로 답을 찾아 낼거야! 아이를 믿고 시간을 주자. 등등 수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끊임 없이 들었다.
어쨌거나 이제 어린이집과 학교에 적응해가는 아이들을 보니 한편으로 대견하면서, 한편으로 부럽다는 생각도 든다. 삶이라는 여정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 한심한 내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사실 잘난 척을 좀 하자면 나는 늘 적응을 참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왔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보여졌던 모양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해도 초기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금방 내 것으로 만드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밤새 술을 마시며 금방 친해지곤 했다. 대학 시절 몇 가지 알바를 뛰었을 때에도 빨리 배우고 성실하다는 평을 들었고, 학원 강사 일을 할때도 금방 익숙해졌고, 아이들과도 상당히 잘 지냈다. 몇 군데의 시민단체 일을 하면서도 단체의 중심이 되는 활동과 내부 살림살이를 고루 익히고 배웠고,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내며 선배들에게 칭찬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잘난 척을 빼고, 솔직하게 말해본다면 남에게 보이는 모습만 그랬을 뿐, 그 과정들에서 나는 늘 힘들었고,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지금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부터 해오던 업무는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해야하나. 너무 방심해서 가끔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가 있을 정도인데, 작년 연말부터 새롭게 맡은 업무는 이제 배워가는 입장이다. 서툴러도 너무 서투르다. 노력한다고, 시간을 들인다고 쉽게 익숙해지거나 적응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 내가 이렇게 모자라는 인간이었구나. 이제서야 자만심에서 벗어나 솔직하게 내 부족함을 들여다 본다.
그냥 예전 업무에서 새로운 업무로 전환이 된 것이라면 또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텐데, 성격이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맡고 있으니, 더 정신을 못 차리는 듯 하다. 새로운 일은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해 계속 삽질 중이고, 그러다 익숙했던 예전 일에서도 예상치 못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것도 제대로 못하고, 저것도 제대로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넷. 깨어나자!
진보와 혁신은 낡은 것을 제대로 잘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시작된다. 내 문제도 마찬가지다.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다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의식적으로 자꾸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받아들이면서 기존에 갖고 있던 내 견고한 매너리즘을 깨어보려고 노력중이다. 예전에 학생운동에 살짝 발을 두고 있었을 때, 여러가지 갈등과 문제를 겪으면서 나는 앞으로 좁은 틀 안에 갇혀 있지 말고, 계속해서 깨어있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지금의 내 모습은 그때의 그 생각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그 각오를 새로이 다지면서 나를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겠다. 끝없이 반성하고 깨어나려고 노력하자! 낡은 틀에 갇히는 순간 나는 예전에 내가 경멸했던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