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벼린 칼날

 

이사를 하고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을 불러 세 차례 집들이를 했다. 어쩌다보니 이웃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부르게 되었는데, 두레생협과 의료생협과 녹색당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로 그룹이 나뉘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두레생협분들은 아직 채 집이 정리도 안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오셨는데, 그 분들은 간단한 재료로 즉석으로 직접 음식을 만드셨다. 그 중 한 분이 우리집 칼을 써보더니 날이 잘 서있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남편을 불러 칼을 이렇게 갈아달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내가 이 사람은 칼 가는 게 취미라고, 아주 제대로 자세 잡고 간다고 대답했다. 글쎄 게으르고 건망증이 심해서 칼을 자주 갈지 못했고, 내가 사용할 때마다 칼이 무디어서 불만이었는데, 의외의 반응들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물론 칼 가는 자세는 내가 좀 제대로 잡긴 한다. 대충 갈면 힘만 더 들고 날은 잘 안 서기 때문에 자세는 중요하다. 일행은 내가 아내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열심히 칼을 가는 거라고 농담을 이어갔다.

 

사실 나는 잘 벼린 칼날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나는 무척 예민했다. 자라면서 그 예민함이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졌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가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한없이 날카로운 칼날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날카로움이 때로는 다른 이들이 잘 보지 못하는 허점을 짚어내거나 강대한 권력에 맞서는 작은 힘이 되기도 했지만, 때때로 아니 자주 나와 내 주위 가족이나 동료들에게도 상처를 입히곤 했다. 언젠가 나는 왜 이렇게 적을 많이 만들면서 살았던가 생각을 해봤더니 날카로운 칼날을 피아 구분없이 마구 휘두르고 다닌 때문이리라 싶었다.

 

그래도 그때 그 판단, 나는 무조건 날카로워야 한다는 판단은 옳았다고 믿는다. 설사 틀렸다고 인정한다 해도, 그래서 과거를 붙들고 후회해봐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당시 나는 날카롭고 싶었던 것일 뿐 실제로는 무딘 칼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어울리던 무리 중에 조금 더 날이 선 칼날이었을 뿐인지도.

 

무뎌진 칼날

 

요즘 나는 무난하고 무딘 삶을 살았으면 싶다. 더이상 날카롭고 싶어도 날카로워지지 않는 나 자신을 깨닫는다. 한계다. 나이의 한계인지. 직장인의 한계인지. 아비된 자로서의 한계인지. 무엇이 진정한 한계인지는 몰라도 한계는 확실히 느낀다. 더없이 날카로워질 수 없다면 차라리 날을 다 죽이고 무딘 칼로서의 삶을 사는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쁘지 않다. 무딘 칼도 나름 다 쓸모가 있다. 너무 날카로운 칼은 무서워서 손을 대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적당히 무디고 적당히 날카로운 그저 그런 칼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칼이 아니겠는가.

 

글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날카롭고 예리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무언가 읽는 이의 감성을 쑤시고 휘저어, 읽고 난 후에도 한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그런 글 말이다. 요즘은 그냥 무난하고 평이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평범한 글이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작은 재미와 감동을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이 더 쓰기 어렵고, 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전에는 글의 소재를 어디서 찾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요즘은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고민이 많다. 당장 다음 주로 다가온 두 개의 마감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뭔가 구체화 시켜두어야 할텐데. 늘 머리로는 미리 준비를 하자고 되뇌이지만, 막상 닥쳐야 글을 쓰는 이 습관은 쉬 고쳐지지 않는다.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여유

 

내 작은 소망은 주말에 어느 구석에 짱박혀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올해 대략 서너번 가져본 것 같다. 무척 행복했다.

이번 주는 틀렸다. 벌써 일정이 꽉 찼다. 두 건은 겹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집안 일도, 회사 일도, 아이들과 지내는 일도, 녹색당 일도

모두 내게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바에는 적당히 그때그때 닥치는대로 해보는 거다.

놀고 싶으면 좀 놀고,

책 읽고 싶으면 아무 생각없이 책에 빠져들고

그래야 사는 거 아닌가!

 

제대로 읽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들춰보고 싶은 책들을 고르며 잠시 즐거움을 만끽하자.

 

 

 알라딘 이웃에게 선물 받았다.

 (고맙습니다!! ^^)

 주욱 훑어 보았는데,

 예상보다 더 재미있어 보인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어도 잘 몰랐던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그리운 지명들과 풍경들이 떠오른다.

 

 

 

 

 

 

 

 서점에서 슬쩍 살펴만 보았다.

 당장 손에 넣어도 집중해서 읽을 여력이 없다.

 그래도 갖고 싶은 욕심은 어쩔 수 없다.

 

 지를까 말까 요즘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책.

 

 

 

 

 

 

 

 

 

 

 지난 경제학 공부모임에서 이 책의 재출간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야무님의 글에서도 또 만났다.

 음 역시 당장 읽을 여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소유욕을 자극하는 책.

 

 분량과 가격 모두 부담스럽기만 하다.

 

 기다려라. 언젠가 지르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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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16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갑자기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르는거예요.
묵직하고 검은, 아주 무딘 칼이 나와요, 주인공이 막 웃지요. 그런데
그 칼이 평소에는 무디지만, 아무도 못 자르는 특정한 어떤 것에 대해서 너무나 날카롭더군요.

아마도... 감은빛이 그런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때 술 자리에서 선하게 웃던 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네요. ^^

감은빛 2013-11-25 19:12   좋아요 0 | URL
그 영화가 뭔지 궁금하네요.
왠지 중국 무협 영화일 것 같은데요.

겨울이네요.
그때도 겨울이었지요.
올 겨울에 또 한 잔 해야죠! ^^

yamoo 2013-11-1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로 부터 알 수 있는 사실 하나. 감은빛님은 칼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거~ㅎㅎ
자세는 아무나 잡는게 아닙니다^^

조용히 책읽을 수 있는 여유를 자주 가지시기를 두손모아 기원해드립니다!

아, 근데...제 아뒤를 감은빛님 페이퍼에서 보니 꽤 낯서네욤^^ 어쨌거나 돈의 철학은 소유욕을 자극하는 책임은 분명합니다요~ㅎ

늦가을의 청취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감은빛 2013-11-25 19:17   좋아요 0 | URL
저의 여유를 기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쵸. 소유욕을 엄청 자극하네요.
바빠서 자주 그러지 못해 다행이지만,
틈만나면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야무님, 댓글을 쪼매 늦게 달았더니,
완전 한겨울 날씨네요.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순오기 2013-11-28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벼린 칼로 살아봤으니 무딘 칼의 가치도 아는 것이지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을 감싸안으려는 마인드가 작용하기 때문일지도...
우리가 아는 누군가는 예순이 돼도 감싸안으려는 자세는 찾을 수 없지만요.ㅠ

감은빛 2013-11-28 15:34   좋아요 0 | URL
와! 그렇게 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이게 참 신기하더라구요.
예전에는 그렇게 싫어하던 태도를 지금은 오히려 본받으려 하니까요.

선물해주신 책을 어서 읽고 감사의 글을 남겨야지 생가했는데,
한번 주르륵 훑어보고 난 후로 못 펼쳤네요.
조만간 읽을게요.
고맙습니다!
 
하리하라의 몸 이야기 - 질병의 역습과 인체의 반란
이은희 지음 / 해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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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에 방영된 SBS 스페셜 <환경호르몬의 습격>을 뒤늦게 봤다. 첫 장면부터 충격이었다! 생리통이 너무 심해 울고, 벽을 손톱으로 긁고,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생리통이 심한 아이들이 30%가량이었고, 이들은 ‘자궁내막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자궁내막증은 밖으로 배출되어야 할 생리혈이 나가지 못하고 자궁에 고여 있거나 나팔관으로 역류하는 등의 증상을 말한다. 취재팀은 10대 청소년들과 20대 미혼 여성들 그리고 출산을 경험한 주부까지 생리통이 매우 심한 여성들과 함께 자궁내막증을 치료하고 생리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 방법은 매우 큰 효과를 거둬, 실행한 첫 달에 모든 참여자가 생리통이 급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약을 먹거나, 수술이나 시술을 받지 않았다. 단지 모든 플라스틱 용기, 일회용품, 샴푸, 합성세제, 화장품, 합성섬유 등을 사용하지 않고 유리 용기와 천연 제품만을 사용했다. 자궁내막증과 극심한 생리통의 원인은 바로 환경호르몬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셀 수 없이 많이 사용하는 플라스틱 제품들과 인공적으로 합성된 온갖 화학물질들이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우리 몸을 공격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남성호르몬을 공격해 태아의 남성 생식기를 작게 만들거나 아예 여성의 생식기 모양으로 만든 국내외 사례들도 소개되었다. 미국의 한 소아과 의사는 "남성이 점차 여성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또 여성 어린이들의 성조숙증도 환경호르몬의 영향이라고 했다.

 

방송을 본 후 이 책에서 다시 같은 내용을 만났다. 책에 나온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닐스 스카케백 교수의 연구는 충격적이다. 세계 20개 지역에서 50년 동안 조사된 문헌을 비교 분석한 끝에 1990년대의 남성은 1940년대 남성 보다 정자 수는 50% 감소하고, 정액은 25% 감소하는 등 전반적으로 생식능력이 저하되었다고 보고했다.

 

방송에서는 내분비계 장애물질, 이 책에서는 내분비계 교란물질로 소개된 환경호르몬은 과거에는 없던 물질이다. 석유화학 제품의 급격한 발달과 싼 가격으로 여러 천연 물질들을 밀어내고 우리 주변에 널리 퍼진 후에야 우리는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환경호르몬들이 우리 몸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다 밝혀지지 않았다. 저자는 20세기 중반 이후 늘어나고 있는 각종 암과 아토피성 피부염 역시 내분비계 교란물질의 영향이라는 의혹에 관해서도 소개한다.

 

이 책을 통해 질병의 원인이 박테리아(세균), 바이러스, 원생생물(원충), 진균류, 중금속, 독성화합물질, 내분비계 교란물질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과 함께 종류별로 감염되는 질병과 치료방법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설명은 의학의 발달과 전문화로 인해 오히려 내 몸과 건강이 나에게서 소외되어버린 이 아이러니한 시대에 무척 값지고 귀중한 정보다. 평생 병원에서 뭔지 모를 암호 같은 말만 듣다가 이제야 비로소 질병과 내 몸에 제대로 된 설명을 들었다.

 

‘하리하라’라는 필명이 무척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인도 신화에서 창조의 신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가 등을 맞대고 결합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저자는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생물학과 과학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국내에 몇 안 되는 필진 중 하나다. 앞으로도 저자의 활발한 활동을 바라며, 또 저자와 같은 일을 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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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1-0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리하라가 저자의 필명이군요. 유익한 책 같아요. 몸의 소중함을 나날이 느끼며 사는 계절이 됐어요. 몸과 마음의 계절이요.^^ 좋은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은빛 2013-11-13 12:11   좋아요 0 | URL
네, 글에도 썼듯이 우리나라에 정말 몇 안되는 귀중한 필자랍니다.
어려운 과학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줍니다.
고맙습니다!

hnine 2013-11-0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생명과학 분야 작가랍니다. 말씀하신대로 국내 몇 안 되는 필진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저자의 다른 책들도 권해드릴만 해요.

감은빛 2013-11-13 14:03   좋아요 0 | URL
제일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시니 무척 반갑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이 책도 그렇고 다른 책도 벌써 구해놓고 있었는데,
주욱 훑어보고 나서 제대로 읽진 못하고 있었어요.
최근에 자료 찾다가 이 책은 다 읽었는데,
다른 책들도 하나씩 섭렵해보려구요.
고맙습니다!
 
미래가 있다면, 녹색 이매진 시시각각 1
최백순 지음 / 이매진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2000년 설날,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잔 다르크≫를 봤다. 늘 가던 친척 어른댁에 안 가게 되어 갑자기 시간이 남았는데, 마땅히 할 일은 없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밀라 요보비치의 얼굴이 그려진 극장 간판을 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2011년 가을, 밀라 요보비치 못지않은 미모에 잔 다르크로 불렸던, 페트라 켈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녹색당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때였다.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었기에 잔 다르크라고 불렸는지.

 

잔 다르크는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 말기에 궁지에 몰린 프랑스를 단숨에 일으켜 세운 영웅이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프랑스 땅을 휩쓴 전쟁 덕분에 대다수 민중들은 어려운 삶을 가까스로 이어가고 있었다. 천사의 계시를 들었다는 16세의 소녀는 기적과도 같은 승리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잔 다르크는 희망과 믿음의 상징이었다.

 

197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녹색당의 전신인 SPV(Sonstige Politische Vereinigung) 만들어지고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할 때, 페트라 켈리는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SPV에 참여했던 여러 단위들에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그가 비례 1번이 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70년대 반핵, 평화운동 진영에서 그가 국제적으로 많은 활약을 펼치며 이름을 알린 것도 이유일 테고, 68혁명의 상징인 루디 두치케와 함께 제도권 정당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는 정당이었기에 젊고 참신한 인물을 내세웠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1980년 녹색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2개 주(브레멘 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주 의회에 진출하고 또 1982년 3개 주(니더작센 주, 함부르크 주, 헤센 주)에서 주 의회에 진출하기까지 켈리는 당을 대표해 많은 활동을 했다. 1983년 연방의회에 27명의 의원을 보내면서 그 자신이 연방의원이 되었다. 이때 이미 녹색당이란 이름은 자연스레 페트라 켈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인기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켈리 역시 희망과 믿음의 상징이었다고 생각된다. 전쟁의 시대, 핵발전의 시대에 평화와 반핵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이름. 도무지 승산이 없을 것만 같은 제도권 정치에 겁 없이 뛰어들어 기적과도 같은 연방의회 진출을 얻어낸 이름. 과연 잔 다르크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녹색당은 1998년 적록연정이라 불리는 사민당과의 연정을 시작하여 2005년까지 집권당으로서 다양한 환경정책을 실현했다.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쇄를 통해 궁극적으로 탈핵을 이룰 것을 천명했고, 인간의 존엄성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조항을 연방법에 올렸다. 또한 캔과 병 제품에 환경부담금을 매기는 ‘반 공해법’을 시행하는 등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책들을 펼쳤다. 독일녹색당의 활약상을 전해 들을 때마다 부러움과 막막함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날이 올까? 개그가 따로 없는 정치 현실을 볼 때마다 그런 희망은 쉽게 절망으로 바뀐다.

 

10월 1일은 페트라 켈리의 기일이다. 제주 해군기지는 여전히 공사 중이고, 4대강의 녹조는 해결되지 못하고, 밀양에서 송전탑 공사를 재개하는 이 가을, 페트라 켈리를 기억하며 이 땅에도 새로운 정치, 녹색 정치가 널리 퍼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9월 말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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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0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려야죠.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잖아요.^^

감은빛 2013-11-13 14:07   좋아요 0 | URL
저는 종종 희망을 가지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희망을 가지려면 현재의 조건에서 무언가 가능성을 보아야하는데,
도무지 가능성이 보이질 않으니 말예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예전에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놓치 않으려고 애썼는데,
그 시절에는 정말 날카롭고 씨니컬한 편이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희망을 놓아버렸다.
이 지구와 인류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그냥 나라도 하고싶은대로 행동하겠다 생각이 들었고,
이전보다 많이 밝고 편한 느낌이 들었다구요.
 

 

버스 따라잡기

 

요즘 운동의 재미에 한창 빠져 있었다. 일주일에 두세번, 하루에 삼사십분, 고강도로 짧게 운동하고 휴식을 많이 가지면서 하다보니 크게 몸에 무리가 가지도 않았고, 아주 피곤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운동을 하는 날엔 술 약속이 없으니 폭식과 폭음도 많이 줄었다.(물론 여전히 자주 술을 마신다.)

 

대개 헬쓰클럽에 가서 프리웨이트로 역기를 들었지만, 가끔은 집에서 타바타 인터벌 음악을 틀어놓고 Tabata Something else 를 했다. Push up, Sit up, Squat, Pull up 4개의 운동을 20초 동안 미친듯이 빠르게 하고, 10초간 쉬고, 다시 20초간 미친듯이 하기를 8회 반복하는 것이다. 하나의 운동에 각 4분씩 총 16분이 소요된다. 이렇게 16분 운동하고 나서 바로 쓰러지지 않으면 제대로 미친듯이 하지 않았단 뜻이다. 집에는 풀업을 할 수 있는 철봉이 없기 때문에 풀업 대신, Burpee 를 했다. 맨 처음엔 각각의 운동을 4분간 8라운드를 뛰고 1~2분 쉬다가 다음 운동을 8라운도 뛰는 방식으로 했다. 그랬더니 6라운드 이후로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서 8라운드엔 거의 몇 개 하지도 못한 채 4분이 지나버렸다. 다음에는 4개의 운동을 차례로 한번씩 번갈아가면서 했다. 2라운드를 돌고 나니(즉 8분을 뛰고 나니) 도저히 더이상 운동을 계속 할 수 없어서 대략 2분간 물도 마시고 쉬었다가 다시 다음 라운드를 뛰었다. 즉 도중에 3회 2분씩 휴식을 해서 총 22분 동안 운동을 했다. 이번에는 운동을 번갈아가며 했더니 후반부 6, 7, 8라운드에도 어느정도 횟수를 채웠다.

 

이렇게 타바타 썸씽엘스를 하고 이틀 후에 또 하기를 여러차례 반복했더니 확실히 운동능력이 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기록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이렇게 운동을 하다보니 몸이 확실히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꽤 오랫동안 몸이 무거운 느낌으로 살았는데, 가벼운 느낌이 드니 좋았다. 몸이 가벼우니 걸음도 빨리지는 듯 하고, 뜀박질도 더 잘 되는 듯 했다.

 

하루는 거래처 면담을 가려고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문득 처리하지 못한 업무가 떠올라서 부랴부랴 그거만 해놓고 나가야지 했는데, 또 전화를 받고 어쩌고 하다가 시간이 확 지나가버렸다. 면담 시간에 늦었기에 급하게 나왔는데, 눈 앞에서 버스가 지나가버렸다. 저걸 놓치면 적어도 15분 이상은 기다려야 할텐데, 내 다급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버스는 점점 멀어지고, 나는 신호등에 막혀 발을 동동 구를 수 밖에 없었다. 저 멀리서 버스도 신호에 걸려 멈춰섰다. 가만, 여기서 다음 정거장까지 얼마나 되려나? 한번 뛰어보자 싶었다. 신발끈을 조이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마치 출발선에 선 단거리 선수처럼 몸을 긴장시켰다.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자마자 몸은 튀어나갔다. 점점 버스가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버스도 신호가 바뀌어 출발했다. 저 만치 다음 교차로의 보행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사람들이 차도로 내려서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숨을 한 차례 고르고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어떻게 달렸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두 블럭을 열심히 달렸고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출발하려는 버스를 간신히 잡아 탔다. 버스를 따라잡은 것이다. 쓰러지듯 좌석에 앉는데 온 얼굴과 목으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옷도 마치 비를 맞은 듯 젖어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무릎 부상

 

그 다음날이었다.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났다. 비탈진 내리막길을 열심히 달려내려가다가 갑자기 아스팔트 균열에 발이 걸렸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내 몸이 중심을 잃고 얼굴부터 땅바닥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눈 앞에 땅바닥이 확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안경이 걱정되었다. 새 안경을 맞추려면 제법 돈이 나간다! 안경만은 살려야 한다. 확 다가오는 땅바닥을 손바닥과 무릎으로 땅을 쳤다. 몸을 홱 돌리면서 어깨로 떨어지는데 성공했고 곧이어 내리막을 데굴데굴 굴렀다. 아! 안경과 얼굴은 살렸구나! 안도의 순간은 잠시였다. 아직 일어나지 못한 채 감각이 없는 손바닥과 무릎을 살폈다. 손바닥엔 땅을 치면서 시꺼먼 피가 맺힌 물집이 생겼고, 구르면서 긁힌 상처가 여러곳에 생겼다. 무릎은 일단 바지가 찢어지면서 사이로 빨간 피가 흘르고 있었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저 위쪽에서 차가 내려왔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비켜줬다. 절뚝절뚝 한 걸음 걷기가 무척 힘들었다. 찢어진 바지를 갈아입고 상처를 소독하기 위해 다시 집을 향했다.

 

상처 부위를 씻고 나니,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돌아온 아내가 놀라며 물었다. 어찌된 일이냐고? 설명할 힘도 없어서 그냥 넘어졌다고 답했다. 아내는 구급함을 가져와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거즈를 대고 반창고를 붙였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고 컸다. 바지를 갈아입고 다시 출근했다. 절뚝절뚝 계단을 내려가는 일부터 엄청 힘들었다. 지하철 역이 엄청 멀게 느껴졌다. 평소 뛰어다니던 시간에 비하면 서너배 가량 늦어졌다.

 

시간이 좀 지나면서 무릎의 상태를 살펴보니 뼈나 인대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예전에 무릎을 다친 경험이 많아서 그런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만 상처가 커서 아무는데 시간이 걸릴 듯 했다. 게다가 출퇴근과 거래처 방문 등의 돌아다닐 일이 많아서 회복이 더딜 것이 분명했다. 대략 2주쯤 걸리려나? 아무리 트롤의 치유력을 가졌다고 불리는 나라고 해도 2주는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하루에 두세 차례 소독하고 드레싱을 갈아주는 일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마음은 빨리 걷고 싶은데 절뚝절뚝 걸음이 무거운 것도 무척 힘들었다. 한 쪽 다리로만 걸어다니다보니 그쪽 장단지에 알이 배겼다. 다친 다리는 무릎을 굽힐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서 피가 배어나왔다. 바지 무릎이 피에 물들었다.

 

그렇게 1주일쯤 지나자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상처엔 크고 두꺼운 딱지가 앉았고, 움직이다보면 딱지 사이사이가 벌어지며 피와 진물이 배어나왔다. 그래도 처음에 비해서는 많이 회복되었다. 이제 대략 1주일만 더 지나면 상처는 어느 정도 아물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뛰거나 운동을 하지는 못하겠지.

 

처음 무릎의 상태를 파악했을 때, 든 생각은 이제 운동을 못하겠구나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이제 막 운동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는데, 지금 몇 주간 운동을 쉬어버리면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버릴까봐 두려웠다. 역기의 무게를 조금씩 늘려가는 재미, 새로운 자세를 익히기 위해 여러번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자세가 좋아졌다 느껴질 때의 즐거움, 운동을 한 다음 날 온 몸이 적당히 뻐근한 쾌감 등이 한 순간에 깨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 모임에서 읽은 책들

 

다리가 불편하니 책이라도 좀 읽어야지 생각은 했지만, 내 몸은 그 전보다 더 바빴다. 회의와 스터디 모임과 사회를 봐야 할 행사 등이 연달아 생겼고, 동네 이웃들을 모시고 집들이도 했다. 아이들 이야기를 연재하는 동네 신문에서 만든 행사에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도 받았다. 다리가 아파 운동은 못하건만 자꾸 술자리가 생겨서 마구 먹어대고 있었다. 불행은 겹쳐서 온다는 법칙이 있었던가? 이런저런 머리 아프고 복잡한 일들이 겹쳐 찾아왔다. 일이 잘 해결이 안되니 짜증이 났고, 자연 자꾸 술이 땡겼다. 할일은 많고, 다리는 불편하고,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돈은 없다. 에이! 얼른 다리가 나아서 운동이라도 다시 시작해야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다.

 

 

요즘 공부모임에서 '교육'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첫 번째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페다고지].

 

파울루 프레이리 선생의 실천하는 삶이 느껴지는

훌륭한 책이었다.

 

한창 바쁜 시기여서 내 발제부분 위주로 읽고,

나머지는 대충 훑었다.

시간 날때 꼭 다시 읽어야 겠다.

 

 

 

 

 

다음은 우치다 타츠루의 [하류지향]

이 분의 탁월한 분석과 시선은 분명 대단하다.

그러나 이 책의 기저에 깔린 전제들이 무척 불편했다.

 

'민들레'처럼 좋은 출판사에서

왜 이런 책을 냈을까 무척 궁금하다.

공교육에 복무하는 교사들에게는 좋은 책일 수도 있겠다.

 

요즘 [진격의 거인]의 작가가 극우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던데,

텍스트가 깔아놓은 전제를 주의해서 읽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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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3-10-29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여러가지 중독...예를 들면 커피 중독, 컴 중독 등등...을 경험해 봤지만,
운동중독은 아직이어서 말인데요, ㅋ~.
이거 이거 완전 심각하군요~--;

한번 병원에 가셔서 도수정복이랑 근재교육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참에 운동중독에서 독서중독으로 종목을 갈아타 보시는 것도...ㅋ~.

감은빛 2013-11-01 14:32   좋아요 0 | URL
양철님 덕분에 '도수정복'과 '근 재교육'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어요.
염려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다행히 제 무릎은 인대와 근육 손상이 아닌 단순 상처예요.
상처가 좀 크고 깊어서 문제였지만,
이젠 거의 아물어가고 있어요.
평소 걷는데에는 큰 무리가 없고,
뛰거나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쪼그려 앉는 동작은 아직 잘 안되네요.
이것도 상처가 완전히 아물면 괜찮아지겠지요.
이제 2주쯤 되었는데, 한 열흘쯤 더 지나면 다 낫지 않을까 싶어요.

독서중독 좋은데,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

2013-10-30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1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0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11-03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에 한참 열중하고 있어야 할 때에 몸을 다치면 참 안타깝죠.그렇다고 몸까지 상해가면서 운동해서는 안 되고...
요즘은 크로스핏도 그렇고 타바타도 그렇고 서킷 트레이닝의 변형이 대세더군요.

감은빛 2013-11-05 15:17   좋아요 0 | URL
네, 한동안 운동을 못해서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느낌이었어요.
무릎이 어느정도 나아지고 있어서 이젠 슬슬 운동을 시작해볼 생각입니다.

한 가지 운동만 하는 것보다 서너개의 운동을 돌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크로스핏의 WOD를 보면 대개 3~4개의 운동을 순환하는 것이더라구요.

transient-guest 2013-11-05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친 부위가 다 나을때까지는 운동을 쉴 것을 권합니다. 자칫하면 몸이 비뚤어지는데, 이렇게 되면 오래 고생하게 됩니다. 한쪽 무릅에 의지해서 걷느라 고생하셨다는 글을 보니까 더욱 걱정스럽군요. 다치지 마세요.ㅎ

감은빛 2013-11-05 15:20   좋아요 0 | URL
저는 오래전에 오른쪽 어깨를 다친 적이 있는데,
그 덕분인지 상체 근육이 전반적으로 비대칭입니다.
몸이 삐뚤어진다는 그 표현이 어느정도 맞는 것 같아요.
역기를 들어올릴 때마다 한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자세 때문에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예요.

무릎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완치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 상체 운동 위주로 슬슬 시작해보려구요.

고맙습니다! ^^

transient-guest 2013-11-05 22:06   좋아요 0 | URL
핫! 무릎이군요. 제가 무릅이라고 쓴게 오타인지, 맞춤법을 틀렸던 것인지 기억이...ㅎㅎㅎ 천천히 꾸준히 운동하세요.

감은빛 2013-11-07 14:55   좋아요 0 | URL
ㅍ과 ㅂ의 위치가 상당히 멀어서 단순 오타는 아닌 것 같은데요. ^^
 

 

달달한 다방커피

 

처음 커피를 마셨던 것이 언제였을까? 기억나는 건 아직 고등학생때였던 것 같은데, 어느 명절 때 큰집에서 큰어머니께서 대접에 타주신 달달한 커피였다. 설탕을 아주 많이 넣어서 커피인지, 설탕물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인 소위 말하는 다방커피. 대학때는 커피를 별로 안 마셨다. 자판기 커피는 별로 입맛에 안 맞았고, 커피숍에 가더라도 커피보다는 쥬스류를 주로 마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해서도 커피는 거의 안 마셨다. 여전히 자판기 커피나 인스턴트 커피는 입맛에 맞지 않았고, 따로 커피를 사 마실 일은 거의 없었다. 연애 하면서 자주 들락거렸던 커피숍에선 늘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를 마셨다.

 

커피를 본격적으로 맛보기 시작한 것은 지금의 아내와 만나면서였다. 그 시절에도 나는 아내가 사먹는 인스턴트 커피가 아닌 원두커피를 조금씩 맛만 보는 정도였긴 하지만 암튼 그때가 커피라는 걸 입에 대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아내는 신기하게도 커피를 무척 좋아해서 커피 한 잔에 따라 기분이 확 바뀌었다.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구나 생각했다.

 

시민단체 활동을 그만두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에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저 커피를 잘 못마셔요. 속에서 안 받더라구요."라고 말하며 입맛에 맞지 않는 커피를 안 마셨다. 그런데 거래처를 돌아다니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미는 인스턴트 커피와 자판기 커피를 계속 거절하는 것이 귀찮았다. 어떤 분들은 사양하면 막 섭섭해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냥 주는대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점점 그 달달한 커피 맛에 익숙해졌다. 뭐 익숙해지니 그냥 먹을만 하다 싶어 일하다가 입이 심심할 때는 내가 직접 타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사무실에 따로 커피 대신 마실만한 음료가 없어서 이기도 하다.

 

진한 드립커피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입맛 덕분에 아무래도 다방커피는 영 좋아지지 않았고, 가끔 아내와 함께 간 커피숍에서 마신 아메리카노는 쓴 맛 덕분에 별로였다. 아무래도 난 커피 체질이 아닌가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였던가? 아내가 직접 커피를 내려주기 시작했다. 어! 이건 그리 쓰지 않고 고소한 맛이 나네. 커피의 깊고 풍부한 맛을 그제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내가 내리는 커피를 조금씩 맛보면서 원산지에 따라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커피가 맛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향이 좋고 때로는 먹을만 하구나 싶은 정도였다.

 

커피를 아주 좋아하는 한 선배는 매일 커피콩과 분쇄기를 갖고 다녔다. 집과 직장 어디서라도 갓 갈아서 내린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 라고 했다. 도대체 커피가 뭐길래 저럴까? 이런 생각을 할 때만 해도 아직 커피의 맛을 다 알기 전이었다.

 

어느 지인이 정성껏 내려준 핸드 드립 커피를 마신 후 내 미각은 커피도 맛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아내가 커피숍을 옮겨다니며 말하곤 했던 커피 맛이 좋다 나쁘다의 의미를 대충 알게 된 것 같았다. 내게도 맛있는 집과 별로인 집이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거래처 사람들 혹은 동료들과 커피숍을 들러도 이젠 다른 음료가 아닌 아메리카노를 자신있게 주문했다.

 

그래도 아직은 커피 애호가가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아내가 시키면 커피콩을 갈고, 아내가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곤 하지만 내가 원해서 커피를 내리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니 말이다. 알고보면 커피의 세계도 무척 복잡하고 배울 게 많더라.

 

 

 

 

 

 

 

 

 

 

 

 

 

 

 

커피의 역사를 알고 마시면 또 다른 맛의 세계가 펼쳐진다!

 

예전에는 커피에 관심이 없었던 만큼 커피의 역사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서양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음료였나보지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커피를 처음 마시기 시작한 것은 서양 사람들이 아닌 이슬람 사람들이었다. 아! 나는 이렇게도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었구나.

 

이 책은 커피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아주 흥미진진하다. 커피라는 하나의 물질을 주제로 중세 이슬람의 수도원과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을 받은 오스트리아 빈의 성벽과 사치와 낭비가 절정에 이른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 등을 종횡무진 넘나든다. 그야말로 소설과 논픽션의 경계에 있다고 할까? 이번에는 커피가 나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로 데려갈지 궁금해서 도저히 책에서 손을 떼기 어렵다.

 

이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맛있는 커피가 먹고 싶어진다. 아니 어디선가 커피 향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젠 커피 한 잔을 받아들면 나도 모르게 쉐호데트 수도원 평화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고 또 어느 때엔 투르크 군의 포위망을 뚫고 폴란드 군을 데려온 영웅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뿐인가 프랑스 파리 어느 구석 커피숍에서 혁명의 기운에 도취된 시민이 되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분명 책 한 권을 읽고 있을 뿐인데, 이 책을 알기 전과 후의 커피 맛이 다르다. 커피는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코와 입으로 향과 맛을 즐기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커피에 녹아 있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마시는 것이 아닐까? 따뜻한 커피 한 잔 내려놓고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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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23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향 가득한 이 글을 그냥 무심하게 스쳐 지나갈 도리는 별로 없을 것 같아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곁에 두고 감은빛 님처럼《커피의 역사》를 읽고 싶은 계절입니다. '커피의 역사'는 이 책 저 책에서 참 자주 만나게 되는 '단골손님'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가끔 듭니다.

* * *

커피는 에티오피아의 카파라는 지역에서 음식에 맛을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000년 뒤 커피는 볶이고 갈려 아랍인들의 음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해마다 수백만톤의 커피가 재배된다. 수확물의 거의 절반이 소비지로부터 지구 반 바퀴나 떨어져 있는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서 생산된다....... 커피는 살아남았지만 원산지가 아닌 이국땅에서의 불안정은 경제를 계속 위험속으로 몰아넣었다. 1890년대부터 '커피 대통령'들이 브라질을 통치했다. 공급과잉과 가격폭락에 이은 수확 실패는 실직과 혁명의 원인이 되었고, 모든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상태는 전투 사이의 회복기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 스티브 존스, 『진화하는 진화론』중에서

감은빛 2013-11-01 13:58   좋아요 0 | URL
그쵸? 커피 향이 참 좋게 느껴지는 계절이네요. ^^

커피의 역사 이야기가 자주 만나는 단골손님이로군요.
인용해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낭만인생 2013-10-24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읽고 싶은 책입니다. 평이 좋아 리스트 목록에 올려 놓겠습니다.

감은빛 2013-11-01 13: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낭만인생님.
가을에 딱 어울리는 책이예요.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3-10-24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페이스북에서 보고 사 놓았는데 아직 읽지를 못했어요.
안나 카레니나를 느릿느릿 읽는라.
미시사는 늘 조심스럽게 읽어야하지만 너무 흥미로와서 언제나 관심이 가요.
다 읽으면 저도 후기 남겨야겠어요.
참, 받아보니 책 모양새도 마음에 들어요~

감은빛 2013-11-01 14:00   좋아요 0 | URL
모리님. 벌써 사셨군요! 고맙습니다!
후기 기대할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