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인문 엠디가 페이스북에 이 책의 표지와 함께 다음의 글을 올렸다.

 

#오늘의제목 <남자는 언제나 이유를 모른다>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 "뭐가 미안한 건데?" 어떤 면접 압박 보다도 어려운 공포의 질문들.

 

여기에 번역자인 친한 형이 '남자를 위한 책일까, 여자를 위한 책일까?' 라고 댓글을 달았다. 나는 표지를 보는 순간 딱! 이건 늘 궁지에 몰리는 남자들을 위한 지침서 같은 책이겠구나 생각이 들어서, 아마 남자를 위한 책인 것 같다는 의견을 댓글로 남겼다. 다만 엔터를 치기 전에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남자를 이해하도록 돕는 용도의 여자를 위한 책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읽어봐야 알 수 있겠다는 도망갈 구멍을 하나 만들어 뒀다. 그러자 그 형이 '남자를 겨냥한 책이 (감히) 저런 제목을 달았다면 많이 안 팔릴 것 같은데… ^^' 라는 댓글을 다시 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난 평소 저런 생각을 자주 해서, 딱 제목만 봐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싶은데. 일단은 그 형의 의견에 동의하고 넘어갔는데, 한참 후에 다시 댓글이 달렸다. 목차 등 책 정보를 살펴본 그 형이 저자도 남자이고, 남자들을 독자로 겨냥한 책이 맞는 듯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제목이 맘에 안 드는지, '남자에게 이유를 묻지 마라' 정도의 제목이 어땠을까라는 제안을 했다. 음, 난 여전히 저 제목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어서 별로 제목에 대한 의견은 없었고, 이 정도 대화를 하고 보니 책 정보라도 한번 봐야겠다 싶어서 나도 목차와 저자 정보를 읽었다. 일본인 저자는 남성인 듯하고, 번역자는 (이름만 봐서는) 여성인 듯하다. 내용은 확실히 남자들을 위한 책이다. 정말 궁지에 몰렸을 때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재미로 한 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싶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여기에 '원제=여자는 남자의 어디를 봐야 할까.'라는 댓글을 남겼고, 아마도 여성이 아닐까 생각되는 두 분이 각각 '어떤 면접압박보다 어려운 질문들....이라니ㅎㅎㅎㅎㅎ'와 '그걸 왜 모를까요... ㅎㅎㅎㅎ'라는 댓글을 남겼다.

 

'그걸 왜 모를까요' 라는 댓글을 남긴 여성분과 친분이 없어, 직접 말씀드리지는 못했지만, '모를 수밖에 없다.'는 답을 드리고 싶다. 저 질문은 반대로 여성들도 남성들이 '왜 모르는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하긴 여성과 남성으로 단순화해서 그렇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다.) 나는 늘 또래 친구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서울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연애를 할 때는 여자친구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결혼하고 나니 아내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아이들 입장에 쉽게 서지 못해 어려움이 많고, 직장 생활에서는 사장님과 직속상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 평직원의 입장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뿐인가 대학 동기들, 친한 친구들, 선후배들, 함께 활동하는 동지들 등등 누구 하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연애 시절, 갑자기 표정과 분위기가 변한 여자친구는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다. 이 데이트를 위해 얼마나 기다렸고, 얼마나 설렜는데, 지금 이렇게 망쳐버리다니. 아니 근데, 대체 왜 화가 난 걸까? 왜 기분이 나빠졌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 없다. 이러다 싸움으로 번지면 으레 질문을 당한다. '왜 화났는지 알아?' 알 수 없다. 알라딘 인문 엠디의 표현처럼 면접관의 질문보다 더 어렵고 긴장되는 것이 여자친구 혹은 아내의 질문(혹은 추궁)이다.

 

아내와 자주 다툰 덕분에 아내도 이젠 내가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내가 아내의 미묘한 감정 변화와 그 원인을 쉽게 깨닫지 못하듯, 아내 역시 내 기분 변화와 그 원인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해봐도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그게 왜 기분이 나쁜 걸까? 왜 그 말에 화를 내는 걸까?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봐도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이쯤 되면 노력하기보다는 그냥 포기하는 게 낫다. 굳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의 심정을 쫓으려 애쓰기보다는 상대의 그 감정과 원인을 그대로 인정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그리고 상대를 존중해서 되도록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더 중요할 것이다. 연애와 결혼 생활을 거쳐 여기까지는 어렵게 어렵게 왔다. 그런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문제는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거다. 그리고 지독하게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거다. 한바탕 서로의 생활 방식과 의견 충돌로 싸움이 생기고, 어렵게 화해를 하고 나면 당분간은 서로 조심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새 긴장이 풀리고 자신도 모르게 같은 일이 반복된다. 개인마다 경우는 다르겠지만, 분명 노력한다고 실수를 완벽하게 보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답은 아마도 서로의 실수를 감싸주는 포용력이 아닐까? 젊은 시절 한때는 '사랑'이란 단어에 대한 어떤 환상 혹은 집착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랑한다는 감정 하나면 다 해결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더는 사랑이란 말을 믿지 않는다. 다만 서로 위하는 마음,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 이해하지 못해도 감싸줄 수 있는 마음, 이런 마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

겨울비가 내린다. 11월 30일 밀양 탈핵버스를 탈까 말까를 놓고 며칠째 고민 중이다. 요즘 계속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주말만이라도 좀 쉬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 토요일에는 이미 다른 일정도 있다. 하지만 늘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밀양에 가보지 못한 것이 계속 맘에 걸린다. 지난 토요일 시청광장에서 열린 탈핵 집회에는 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셨지만, 기대만큼 많은 수는 아니었다.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사태와 천주교 신부님들의 시국선언까지 그레이트 어메이징 스펙타클 판타스틱 정국에서 밀양과 강정은 점점 잊혀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공사가 재개된 후 이 추운 날씨에 날마다 경찰과 한전 직원과 중장비와 맞서고 있을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달려가 봐야 할 텐데. 에이 우울한 마음에 또 술 생각이 간절하다. 요즘 거의 매일 마셨건만,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너무 많다. 내가 나중에 일찍 죽는다면, 그건 술 때문이 아니라, 부패 정치인들, 부패 관료들, 핵마피아들, 건설마피아들, 돈에 눈 먼 기업인들, 정치 깡패들, 용역 깡패들, 권력에 눈 먼 경찰들과 검찰들과 판사들 등등 이 사회 각지에 뿌리 내리고 있는 썩은 인간들 때문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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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1-26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 책을 서점 가서 죽치고 봐야 겠어요. 이런 주제의 책들을 좀 가지고 있어 비교해 보고 좋으면 알라딘에서 냉큼 주문해야지요^^

감은빛님은 정말 열심히십니다. 전 그런 생각도 못하고 산답니다. 추운데 공사를 저지할 어떤 힘도 없어 매우 우울하군요~ 전달 보니, 신림역 앞에서 막 서명도 받고 그러던데.. 에휴~

감은빛 2013-11-27 14:16   좋아요 0 | URL
실물을 보지 못해 좋은 책일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살펴보시고 좋으면 알려주세요.

늘 투쟁 현장의 소식을 접하고 살지만,
매여있는 몸이다 보니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죄스럽고 미안합니다.
강정 해군기지, 밀양과 청도의 송전탑, 영양댐, 강원도 골프장, 내성천 등등
지금도 수많은 개발 현장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뿐인가요?
쌍차(쌍용자동차)와 현기차(현대, 기아자동차), 콜트 콜텍, 발레오 공조 등 장기투쟁 사업장들도 많죠.

온갖 현장들에서 들어오는 소식들을 듣고 있으면 따뜻한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이 참 한심하다 느껴집니다.
당장 생업을 작파하고 달려갈 수도 없으니 안타깝네요.

비로그인 2013-11-26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탈핵집회에 꼭 가고 싶었는데 못 갔어요 ㅠㅠ 김익중교수님, 한국탈핵이라도 열심히 읽고 리뷰 써야겠어요
감은빛님 일찍 죽으면 안돼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당당하게 그넘들의 수명을 단축시켜야죠~같이 화이팅해요!!!

감은빛 2013-11-27 14:19   좋아요 0 | URL
그날 김익중 교수님께서 속 시원하게 연설해주셔서 모두 힘이 났어요.
탈핵은 세계적인 추세이고,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룰 것이라는 말씀.
저도 그 책 읽어야 하는데, 잊고 있었네요.
아른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일찍 죽고 싶진 않지만, 스트레스와 술과 과로로 오래 살것 같진 않네요.
그 넘들의 수명을 과연 단축시킬 수 있을까요?
그래도 아른님이 응원해주시니 힘 내겠습니다!
함께 힘내 봅시다! ^^

루쉰P 2013-11-2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 여전히 ㅋ
요즘 루쉰 선생을 읽는 데 무덤 서문에 이런 글을 쓰시더군여.
대충 풀자면
'나는 요즘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고 오래 살려고 하고 있다. 왜냐면 세상을 마음 껏 하는 무리들에게 오래 살아 글이라도몇 편 지어 그들을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위함이다.'
루쉰 선생 역시 권력자들에게 그들이 마음데로 하는 세상을 자신의 위치에서 불편하게 하고자 오래 살거라 결의 하셨는 데 감은빛님도 절대 몸 망가 뜨리지 마세요 ^^
그건 적에게 이로운 겁니다 ㅎ

감은빛 2013-11-27 14:22   좋아요 0 | URL
대단씩이나 할 건 없어요.
일이 많아져서 예전처럼 집회나 현장을 못 가보고 살고 있으니까요.

루쉰 선생의 말씀이 맞지만,
그건 루쉰 선생 정도 되는 분이니 가능하지요.
저야 뭐 일찍 죽던 오래 살던 그들에게 별 영향도 못 미칠텐데요.

루쉰님 댓글 오랫만에 보니 참 좋네요!
자주 오셔서 글도 쓰시고, 댓글도 종종 써주세요! ^^

노이에자이트 2013-11-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이웃에는 알콜중독 아줌마가 있습니다.잊을 만하면 난동을 부리는데 온 동네(복도식 아파트)가 들썩거립니다.그걸 생각하며 이 글을 읽으니 심정이 복잡하네요.

감은빛 2013-11-28 15:35   좋아요 0 | URL
그런 분들이 동네마다 한 분씩 계시는 듯해요.
예전 살던 곳에도, 지금 이사온 곳에도 꼭 그런 분이 계시네요.
그 복잡한 심정을 알듯 말듯 하네요.

2013-11-28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8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11-2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존 그레이 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을 보고 많이 배웠어요.
개정판이 나오기 전에 읽었는데, 남자와 여자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거죠.
부부 생횔에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에요. 저자가 그것을 겨낭하고 쓴 책이니까요.

자기의 마음도 모를 때가 있는데, 상대의 마음을 알기란 얼마나 어려울까요.
하지만 이런 류의 책을 보며 노력하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보단 살기가 더 쉬워 질 거라고
믿습니다.

감은빛 2013-11-28 15:4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보자마자 그 책이 딱 떠오르더라구요.
얼마나 비슷하고 얼마나 다를지 모르겠네요.

저는 이런 류의 책들이 오히려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 이렇게 못박아버리고,
모든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도 좀 우려가 됩니다.

다른 분들은 부부생활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둘 다 '화성남, 금성녀'를 읽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어요.
책은 책이고, 현실은 현실이니까요.
그래도 다르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점,
또 다른 신화를 만들긴 했지만 신화 자체를 드러낸 점 등은
인정받을 만한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꿈보다 해몽

 

오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1.
에너지 음료 2개(1+1 구매)를 마시면 42시간 동안 잠을 안자고도 버틸 수 있다.

2.
37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 에너지 음료 2개의 효능도 떨어지는데, 이때 술이 한 잔 들어가면 다시 멀쩡해진다.

3.
42시간 잠을 자지 않고, 에너지 음료 2개를 마시고, 정종과 맥주를 여러잔 마시면 취한다.

4.
잠을 잘자고, 에너지 음료를 마시지 않고, 정종과 맥주를 여러잔 마셔도 취한다.

5.
술에 취한 다음 날엔 쓸데없는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 분이 이 쓸데없는 글이 좋다고 댓글을 남겼다. 나는 이글의 어떤 점이 좋은지 궁금하다고 댓글을 달았고, 한참 후에 그 분이 다시 아래와 같은 답을 달았다.

 

하하. 에너지 음료와 술 권하는 뭔가에게 건조하고 담담하게 투정하는 듯해 짠하면서도 마지막 짧은 '봄'이 좋네요.

 

그야말로 멋진 해석이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이런 쓸데없는 글에는 과분한 해석이다. 어쨌거나 결론은 에너지 음료 2개면 42시간 동안 버틸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부여

 

오늘 점심은 내장탕을 먹으러 갔다. 맛있는 집을 가기 위해 차로 이동했는데, 얼마전 들어온 신입 편집자가 내 옆에 앉았다. 운전자 포함 5명이라 우린 서로 붙어 앉을 수 밖에 없었는데, 내가 앉자마자 신입은 코에 손을 대며 "팀장님, 이거 술 냄새예요?" 라고 물었다. 아, 나한테서 술 냄새가 아주 심하게 나나보다. 나는 순순히 "네."라고 답했고, 신입은 "대체 얼마나 드신거예요?" 라고 다시 물었다. "글쎄요. 세지 않아서 모르겠네요. 많이 먹었어요." 나는 되도록 고개를 창 쪽으로 돌리며 답했다. 그리고 신입은 계속 안주는 뭘 먹었냐, 누구랑 마셨냐, 몇 시까지 마셨냐 등을 물었다. 이 여자가 민망하게 왜 자꾸 캐묻나 싶었지만, 건성으로라도 답은 해줬다.

 

내장탕을 맛있게 먹고 돌아오는 차에는 또 신입이 내 옆에 붙어 앉았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 "팀장님한테 나는 이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참 정겨운 느낌이예요!" 아내는 술 냄새와 담배 냄새를 질색하는데, 이 친구는 정겹다니. 이런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싶었다. 그런데 얘길 듣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술과 담배를 즐기셔서 항상 그 냄새를 맡고 자랐다고 한다. 같이 살 때는 늘 그 냄새를 맡는 것이 싫었는데, 이제 떨어져 살다보니 그 냄새를 맡으면 아버지가 생각난다고, 그래서 정겨운 느낌이라고 했다. 무슨 소린가 했더니 술 냄새, 담배 냄새에서 아버지를 떠올린 것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어떤,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한다. 이를테면 'Never gonna falling love again'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어떤 장면,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과 분위기와 행동들을 떠올린다거나, 오래된 등산화를 신으면 몇년 몇월 몇시쯤 어느 산을 올랐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나 연상은 당시의 기분을 그대로 불러온다. 한편 당시의 기분과 상관없이 그저 그리운 느낌만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다. 당시에는 화가 났거나 슬펐다해도 지금 떠올릴 때에는 그저 그리울 뿐일 때가 가끔 있다.

 

하필 술 냄새와 담배 냄새로 기억되는 아버지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친구에게는 특별한 의미일 것이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은 나를 무엇으로 기억하고 떠올리게 될지 궁금하다.

 

 

요즘은 소설 보다 역사책이 더 땡긴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근현대사 책에 자꾸 손이 가고, 눈이 간다. 오늘 살펴본 책은 요거! 조만간 주문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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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3-11-21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빠 담배 냄새가 좋았는 걸요. 울 언니들은 질색했지만. 아빠의 담배냄새와 까슬한 턱수염 촉감이 아직도 기억나요. 생신이라고'솔'담배를 선물했다고 초등학교 2학년 일기장에는 적혀있더라고요. ^^ 뭐 좋은 거라고. ㅋ 어린 맘에 아빠가 젤 좋아하는거라고 선물해드렸나봐요.

그런 아버지가 이제 안 계시니, 참..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여기서 괜히 아버지 타령을.. ^^

감은빛 2013-11-25 18:47   좋아요 0 | URL
담배 냄새는 대개 좋아하지 않던데요.
특히 여성분들은 더욱.

'솔', 참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저는 담배를 선물한 적은 없지만,
담배 심부름, 술 심부름은 참 많이 했어요.
그때 '솔'을 자주 사러다녔어요.

담배를 선물 받은 아버님께서 북극곰님을 참 예뻐해주셨을 것 같아요.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 기억되시겠어요.

2013-11-21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5 1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13-11-22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고 제 옷에 나는 냄새 킁킁 맡아보니 섬유유연제 냄새와 스킨 냄새만 나네요. 저만의 냄새는 별로 없는 듯. 개발 좀 해야겠는걸요? ^^

감은빛 2013-11-25 18:49   좋아요 0 | URL
대개 스킨이나 향수 냄새가 자신만의 향기가 되는 것 같아요.
저야말로 얼굴에 뭘 바르는 걸 귀찮아해서,
저만의 냄새가 없는 듯 해요.

마녀고양이 2013-11-2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저는 에너지 음료 한잔 마시고 그날은 어찌 버티는데,
땅겨쓴 에너지로 인해 이후 이틀은 잠만 자댑니다... 에너지 음료, 오, 싫어... ^^

감은빛 2013-11-25 18:50   좋아요 0 | URL
대개 에너지 음료로 밤을 새고나면 다음날엔 죽을 것처럼 피곤하더라구요.
저도 한 이틀 푹 잠만 잤으면 좋겠어요.
요즘 잠이 참 모자라네요!

페크pek0501 2013-11-2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스북에 남긴 글, 이렇게 저렇게 조합해 놓은 것이 재밌네요.

"5. 술에 취한 다음 날엔 쓸데없는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 저는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쓸데없는 글을 쓸 때가 있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기로 했어요.
쓸데없는 글이 어떤 이에겐 쓸데없지 않은 글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쓸데있는 글이
어떤 이에겐 쓸데없는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그래서는 아니고...
쓸데없는 글도 가끔은 필요하단 생각입니다. 제 표현대로 말하면 영양가 없는 글도 필요한 게
우리 인생이다, 뭐 이런 거죠. 아... 이것도 쓸데없는 댓글이 되려나요...ㅋ

감은빛 2013-11-26 13:36   좋아요 0 | URL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 ^^

술에 취한 다음 날엔 쓸데없는 글을 쓰는 경우가 많지만,
취하지 않아도 쓸데없는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는 건 굳이 밝히지 않았네요.

페크님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세요.
저 역시 늘 쓸데없는 글을 쓰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겐 쓸모 있는 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댓글, 제게는 아주 좋은 글인걸요.
늘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다락방 2013-11-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떤' 남자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는 무척 좋아했던 적이 있어요. 아찔하게 섹시한 느낌을 줬었거든요. 대부분의 남자들로부터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지만요. 이게, 그 사람만의 고유한 체취와 담배냄새가 섞여 더 멋진 향을 내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 것 같아요. 하핫

감은빛 2013-11-27 14:06   좋아요 0 | URL
누구나 고유한 체취가 있죠.
특히 냄새에 민감한 여성분들은 그런 걸 잘 느끼시는 듯.
아찔하게 섹시한 느낌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네요. ^^

yamoo 2013-11-26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하를 막론하고 술냄새와 담배냄새는 역겨워하는 1인입니당~

그나저나 1번 내용이 사실인가욤? 사실이라면 도저하고픈 1인..ㅋㅋ

아, 근데 쓸데 없는 글이란게 뭔가요?? 알라딘 서재에서 쓸데없는 글은 별로 못봤는데~ㅎ

감은빛 2013-11-27 14:09   좋아요 0 | URL
술 냄새, 담배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죠.
모처럼 외투를 꺼내입은 날,
마침 갑작스레 회식이 잡혀 밤 늦게까지 술집에 머물렀다면,
그 외투엔 술 냄새, 담배 냄새, 고기 냄새를 비롯한 온갖 음식 냄새가 배였겠죠.
이런 때는 다음 날 아침에 그 옷을 입을 수 없더라구요.

1번은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사람마다 효능과 부작용이 다를 수 있으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글은 1~5번 페이스북에 쓴 글을 말한 거구요.
평소에도 쓸데없이 끄적끄적하는 글들을 말하기도 해요.
 

잘 벼린 칼날

 

이사를 하고 친하게 지내는 이웃들을 불러 세 차례 집들이를 했다. 어쩌다보니 이웃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부르게 되었는데, 두레생협과 의료생협과 녹색당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로 그룹이 나뉘었다. 가장 먼저 방문한 두레생협분들은 아직 채 집이 정리도 안된 어수선한 상황에서 오셨는데, 그 분들은 간단한 재료로 즉석으로 직접 음식을 만드셨다. 그 중 한 분이 우리집 칼을 써보더니 날이 잘 서있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남편을 불러 칼을 이렇게 갈아달라고 하셨다. 그러자 아내가 이 사람은 칼 가는 게 취미라고, 아주 제대로 자세 잡고 간다고 대답했다. 글쎄 게으르고 건망증이 심해서 칼을 자주 갈지 못했고, 내가 사용할 때마다 칼이 무디어서 불만이었는데, 의외의 반응들이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물론 칼 가는 자세는 내가 좀 제대로 잡긴 한다. 대충 갈면 힘만 더 들고 날은 잘 안 서기 때문에 자세는 중요하다. 일행은 내가 아내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열심히 칼을 가는 거라고 농담을 이어갔다.

 

사실 나는 잘 벼린 칼날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어렸을 때 나는 무척 예민했다. 자라면서 그 예민함이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졌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내가 그래도 살아남으려면 한없이 날카로운 칼날 하나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날카로움이 때로는 다른 이들이 잘 보지 못하는 허점을 짚어내거나 강대한 권력에 맞서는 작은 힘이 되기도 했지만, 때때로 아니 자주 나와 내 주위 가족이나 동료들에게도 상처를 입히곤 했다. 언젠가 나는 왜 이렇게 적을 많이 만들면서 살았던가 생각을 해봤더니 날카로운 칼날을 피아 구분없이 마구 휘두르고 다닌 때문이리라 싶었다.

 

그래도 그때 그 판단, 나는 무조건 날카로워야 한다는 판단은 옳았다고 믿는다. 설사 틀렸다고 인정한다 해도, 그래서 과거를 붙들고 후회해봐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게다가 당시 나는 날카롭고 싶었던 것일 뿐 실제로는 무딘 칼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어울리던 무리 중에 조금 더 날이 선 칼날이었을 뿐인지도.

 

무뎌진 칼날

 

요즘 나는 무난하고 무딘 삶을 살았으면 싶다. 더이상 날카롭고 싶어도 날카로워지지 않는 나 자신을 깨닫는다. 한계다. 나이의 한계인지. 직장인의 한계인지. 아비된 자로서의 한계인지. 무엇이 진정한 한계인지는 몰라도 한계는 확실히 느낀다. 더없이 날카로워질 수 없다면 차라리 날을 다 죽이고 무딘 칼로서의 삶을 사는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쁘지 않다. 무딘 칼도 나름 다 쓸모가 있다. 너무 날카로운 칼은 무서워서 손을 대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적당히 무디고 적당히 날카로운 그저 그런 칼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칼이 아니겠는가.

 

글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날카롭고 예리한 글을 쓰고 싶었다. 무언가 읽는 이의 감성을 쑤시고 휘저어, 읽고 난 후에도 한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그런 글 말이다. 요즘은 그냥 무난하고 평이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평범한 글이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작은 재미와 감동을 읽을 수 있는 그런 글이 더 쓰기 어렵고, 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전에는 글의 소재를 어디서 찾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요즘은 평범한 일상의 소재를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에 고민이 많다. 당장 다음 주로 다가온 두 개의 마감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뭔가 구체화 시켜두어야 할텐데. 늘 머리로는 미리 준비를 하자고 되뇌이지만, 막상 닥쳐야 글을 쓰는 이 습관은 쉬 고쳐지지 않는다.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여유

 

내 작은 소망은 주말에 어느 구석에 짱박혀 조용히 책 읽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올해 대략 서너번 가져본 것 같다. 무척 행복했다.

이번 주는 틀렸다. 벌써 일정이 꽉 찼다. 두 건은 겹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집안 일도, 회사 일도, 아이들과 지내는 일도, 녹색당 일도

모두 내게 시간을 요구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바에는 적당히 그때그때 닥치는대로 해보는 거다.

놀고 싶으면 좀 놀고,

책 읽고 싶으면 아무 생각없이 책에 빠져들고

그래야 사는 거 아닌가!

 

제대로 읽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들춰보고 싶은 책들을 고르며 잠시 즐거움을 만끽하자.

 

 

 알라딘 이웃에게 선물 받았다.

 (고맙습니다!! ^^)

 주욱 훑어 보았는데,

 예상보다 더 재미있어 보인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어도 잘 몰랐던 이야기들이 들어있다.

 

 그리운 지명들과 풍경들이 떠오른다.

 

 

 

 

 

 

 

 서점에서 슬쩍 살펴만 보았다.

 당장 손에 넣어도 집중해서 읽을 여력이 없다.

 그래도 갖고 싶은 욕심은 어쩔 수 없다.

 

 지를까 말까 요즘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책.

 

 

 

 

 

 

 

 

 

 

 지난 경제학 공부모임에서 이 책의 재출간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야무님의 글에서도 또 만났다.

 음 역시 당장 읽을 여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소유욕을 자극하는 책.

 

 분량과 가격 모두 부담스럽기만 하다.

 

 기다려라. 언젠가 지르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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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1-16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갑자기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르는거예요.
묵직하고 검은, 아주 무딘 칼이 나와요, 주인공이 막 웃지요. 그런데
그 칼이 평소에는 무디지만, 아무도 못 자르는 특정한 어떤 것에 대해서 너무나 날카롭더군요.

아마도... 감은빛이 그런 분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때 술 자리에서 선하게 웃던 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네요. ^^

감은빛 2013-11-25 19:12   좋아요 0 | URL
그 영화가 뭔지 궁금하네요.
왠지 중국 무협 영화일 것 같은데요.

겨울이네요.
그때도 겨울이었지요.
올 겨울에 또 한 잔 해야죠! ^^

yamoo 2013-11-1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로 부터 알 수 있는 사실 하나. 감은빛님은 칼가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거~ㅎㅎ
자세는 아무나 잡는게 아닙니다^^

조용히 책읽을 수 있는 여유를 자주 가지시기를 두손모아 기원해드립니다!

아, 근데...제 아뒤를 감은빛님 페이퍼에서 보니 꽤 낯서네욤^^ 어쨌거나 돈의 철학은 소유욕을 자극하는 책임은 분명합니다요~ㅎ

늦가을의 청취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감은빛 2013-11-25 19:17   좋아요 0 | URL
저의 여유를 기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쵸. 소유욕을 엄청 자극하네요.
바빠서 자주 그러지 못해 다행이지만,
틈만나면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야무님, 댓글을 쪼매 늦게 달았더니,
완전 한겨울 날씨네요.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순오기 2013-11-28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벼린 칼로 살아봤으니 무딘 칼의 가치도 아는 것이지요!^^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을 감싸안으려는 마인드가 작용하기 때문일지도...
우리가 아는 누군가는 예순이 돼도 감싸안으려는 자세는 찾을 수 없지만요.ㅠ

감은빛 2013-11-28 15:34   좋아요 0 | URL
와! 그렇게 봐 주시니 영광입니다!
이게 참 신기하더라구요.
예전에는 그렇게 싫어하던 태도를 지금은 오히려 본받으려 하니까요.

선물해주신 책을 어서 읽고 감사의 글을 남겨야지 생가했는데,
한번 주르륵 훑어보고 난 후로 못 펼쳤네요.
조만간 읽을게요.
고맙습니다!
 
하리하라의 몸 이야기 - 질병의 역습과 인체의 반란
이은희 지음 / 해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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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에 방영된 SBS 스페셜 <환경호르몬의 습격>을 뒤늦게 봤다. 첫 장면부터 충격이었다! 생리통이 너무 심해 울고, 벽을 손톱으로 긁고,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생리통이 심한 아이들이 30%가량이었고, 이들은 ‘자궁내막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자궁내막증은 밖으로 배출되어야 할 생리혈이 나가지 못하고 자궁에 고여 있거나 나팔관으로 역류하는 등의 증상을 말한다. 취재팀은 10대 청소년들과 20대 미혼 여성들 그리고 출산을 경험한 주부까지 생리통이 매우 심한 여성들과 함께 자궁내막증을 치료하고 생리통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 방법은 매우 큰 효과를 거둬, 실행한 첫 달에 모든 참여자가 생리통이 급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약을 먹거나, 수술이나 시술을 받지 않았다. 단지 모든 플라스틱 용기, 일회용품, 샴푸, 합성세제, 화장품, 합성섬유 등을 사용하지 않고 유리 용기와 천연 제품만을 사용했다. 자궁내막증과 극심한 생리통의 원인은 바로 환경호르몬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셀 수 없이 많이 사용하는 플라스틱 제품들과 인공적으로 합성된 온갖 화학물질들이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우리 몸을 공격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남성호르몬을 공격해 태아의 남성 생식기를 작게 만들거나 아예 여성의 생식기 모양으로 만든 국내외 사례들도 소개되었다. 미국의 한 소아과 의사는 "남성이 점차 여성화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또 여성 어린이들의 성조숙증도 환경호르몬의 영향이라고 했다.

 

방송을 본 후 이 책에서 다시 같은 내용을 만났다. 책에 나온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 닐스 스카케백 교수의 연구는 충격적이다. 세계 20개 지역에서 50년 동안 조사된 문헌을 비교 분석한 끝에 1990년대의 남성은 1940년대 남성 보다 정자 수는 50% 감소하고, 정액은 25% 감소하는 등 전반적으로 생식능력이 저하되었다고 보고했다.

 

방송에서는 내분비계 장애물질, 이 책에서는 내분비계 교란물질로 소개된 환경호르몬은 과거에는 없던 물질이다. 석유화학 제품의 급격한 발달과 싼 가격으로 여러 천연 물질들을 밀어내고 우리 주변에 널리 퍼진 후에야 우리는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환경호르몬들이 우리 몸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다 밝혀지지 않았다. 저자는 20세기 중반 이후 늘어나고 있는 각종 암과 아토피성 피부염 역시 내분비계 교란물질의 영향이라는 의혹에 관해서도 소개한다.

 

이 책을 통해 질병의 원인이 박테리아(세균), 바이러스, 원생생물(원충), 진균류, 중금속, 독성화합물질, 내분비계 교란물질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과 함께 종류별로 감염되는 질병과 치료방법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설명은 의학의 발달과 전문화로 인해 오히려 내 몸과 건강이 나에게서 소외되어버린 이 아이러니한 시대에 무척 값지고 귀중한 정보다. 평생 병원에서 뭔지 모를 암호 같은 말만 듣다가 이제야 비로소 질병과 내 몸에 제대로 된 설명을 들었다.

 

‘하리하라’라는 필명이 무척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인도 신화에서 창조의 신 비슈누와 파괴의 신 시바가 등을 맞대고 결합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저자는 강연과 기고 등을 통해 생물학과 과학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국내에 몇 안 되는 필진 중 하나다. 앞으로도 저자의 활발한 활동을 바라며, 또 저자와 같은 일을 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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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11-0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리하라가 저자의 필명이군요. 유익한 책 같아요. 몸의 소중함을 나날이 느끼며 사는 계절이 됐어요. 몸과 마음의 계절이요.^^ 좋은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은빛 2013-11-13 12:11   좋아요 0 | URL
네, 글에도 썼듯이 우리나라에 정말 몇 안되는 귀중한 필자랍니다.
어려운 과학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줍니다.
고맙습니다!

hnine 2013-11-07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생명과학 분야 작가랍니다. 말씀하신대로 국내 몇 안 되는 필진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 책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저자의 다른 책들도 권해드릴만 해요.

감은빛 2013-11-13 14:03   좋아요 0 | URL
제일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시니 무척 반갑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이 책도 그렇고 다른 책도 벌써 구해놓고 있었는데,
주욱 훑어보고 나서 제대로 읽진 못하고 있었어요.
최근에 자료 찾다가 이 책은 다 읽었는데,
다른 책들도 하나씩 섭렵해보려구요.
고맙습니다!
 
미래가 있다면, 녹색 이매진 시시각각 1
최백순 지음 / 이매진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2000년 설날,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잔 다르크≫를 봤다. 늘 가던 친척 어른댁에 안 가게 되어 갑자기 시간이 남았는데, 마땅히 할 일은 없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밀라 요보비치의 얼굴이 그려진 극장 간판을 보았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2011년 가을, 밀라 요보비치 못지않은 미모에 잔 다르크로 불렸던, 페트라 켈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녹색당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던 때였다.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었기에 잔 다르크라고 불렸는지.

 

잔 다르크는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 말기에 궁지에 몰린 프랑스를 단숨에 일으켜 세운 영웅이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프랑스 땅을 휩쓴 전쟁 덕분에 대다수 민중들은 어려운 삶을 가까스로 이어가고 있었다. 천사의 계시를 들었다는 16세의 소녀는 기적과도 같은 승리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잔 다르크는 희망과 믿음의 상징이었다.

 

1979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녹색당의 전신인 SPV(Sonstige Politische Vereinigung) 만들어지고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할 때, 페트라 켈리는 비례대표 1번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SPV에 참여했던 여러 단위들에 쟁쟁한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그가 비례 1번이 되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70년대 반핵, 평화운동 진영에서 그가 국제적으로 많은 활약을 펼치며 이름을 알린 것도 이유일 테고, 68혁명의 상징인 루디 두치케와 함께 제도권 정당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는 정당이었기에 젊고 참신한 인물을 내세웠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1980년 녹색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2개 주(브레멘 주,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서 주 의회에 진출하고 또 1982년 3개 주(니더작센 주, 함부르크 주, 헤센 주)에서 주 의회에 진출하기까지 켈리는 당을 대표해 많은 활동을 했다. 1983년 연방의회에 27명의 의원을 보내면서 그 자신이 연방의원이 되었다. 이때 이미 녹색당이란 이름은 자연스레 페트라 켈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인기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켈리 역시 희망과 믿음의 상징이었다고 생각된다. 전쟁의 시대, 핵발전의 시대에 평화와 반핵이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이름. 도무지 승산이 없을 것만 같은 제도권 정치에 겁 없이 뛰어들어 기적과도 같은 연방의회 진출을 얻어낸 이름. 과연 잔 다르크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 녹색당은 1998년 적록연정이라 불리는 사민당과의 연정을 시작하여 2005년까지 집권당으로서 다양한 환경정책을 실현했다.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쇄를 통해 궁극적으로 탈핵을 이룰 것을 천명했고, 인간의 존엄성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조항을 연방법에 올렸다. 또한 캔과 병 제품에 환경부담금을 매기는 ‘반 공해법’을 시행하는 등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정책들을 펼쳤다. 독일녹색당의 활약상을 전해 들을 때마다 부러움과 막막함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날이 올까? 개그가 따로 없는 정치 현실을 볼 때마다 그런 희망은 쉽게 절망으로 바뀐다.

 

10월 1일은 페트라 켈리의 기일이다. 제주 해군기지는 여전히 공사 중이고, 4대강의 녹조는 해결되지 못하고, 밀양에서 송전탑 공사를 재개하는 이 가을, 페트라 켈리를 기억하며 이 땅에도 새로운 정치, 녹색 정치가 널리 퍼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9월 말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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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0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려야죠.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고 하잖아요.^^

감은빛 2013-11-13 14:07   좋아요 0 | URL
저는 종종 희망을 가지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희망을 가지려면 현재의 조건에서 무언가 가능성을 보아야하는데,
도무지 가능성이 보이질 않으니 말예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예전에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놓치 않으려고 애썼는데,
그 시절에는 정말 날카롭고 씨니컬한 편이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희망을 놓아버렸다.
이 지구와 인류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그냥 나라도 하고싶은대로 행동하겠다 생각이 들었고,
이전보다 많이 밝고 편한 느낌이 들었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