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짓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운전하면서 미친 짓을 딱 두 번 했는데, 이번이 세번째 미친 짓이다. 또 이런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살다보면 또 생기겠지. 이번에도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작년 연말부터 질질 끌어온 업무가 자꾸만 내 몸과 마음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저번 주에 기필코 끝내리라 생각했지만, 날마다 새로운 일은 자꾸 생기고, 우선 순위에서 자꾸 뒤로 밀렸다. 월요일 아침 출근 하면서 다짐했다. 오늘은 밤을 새서라도 이걸 마무리 하겠다고. 낮엔 다른 일상 업무들 하느라 제대로 열어보지도 못했고, 저녁 먹고 야근에 돌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일하다 중간에 이번 달 취재할 분께 연락 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에 통화할 때 이번 주 중 평일 낮에 언제든 괜찮다고 하셨으니, 수요일 오후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말씀드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 계신 분이 수요일은 안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목요일나 금요일을 여쭤봤더니 다 안된다고 하신다. 그럼 언제? 바로 내일인 화요일만 시간이 좀 난다고 하신다. 다른 방법은 없다. 취재를 하려면 그 분 일정에 맞춰야 하니, 어쩔 수 없이 화요일 오후로 약속을 잡았다. 급하게 취재 준비를 해야하게 생겼다. 사전 자료 조사를 하고, 질문지를 뽑는데 적어도 너댓시간은 걸릴 터인데, 이를 어쩌나?
게다가 애초에 나는 화요일 오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작년에 마치지 못한 일을 끝내리라 다짐했다. 지금 끊지 못하면 이 일을 1월 말까지 끌고 갈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었다. 뭐 다른 방법은 없다. 어쨌든 하려고 했던 일을 해야지. 한참을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눈이 아파서 고개를 들어보니 자정을 넘겼다. 곧 집에 가는 지하철 막차 시간이다. 지금 접고 집에 가느냐, 새벽까지 좀 더 하느냐 잠시 고민했다. 일을 끝내려면 아직 멀었다. 편의점에 가서 에너지 음료를 하나 사왔다. 다시 일을 시작했다. 중간에 눈이 아프고 집중력이 떨어져서 잠시 엎드려 있긴 했지만, 최대한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봤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문득 정신을 차리니 5시가 넘어 있었다.
중간 중간에 모니터 구석의 시계를 보면서 3시 쯤엔 집에 가야지, 4시 넘으면 가야지 생각했는데, 벌써 첫차가 다닐 무렵이 되었다. 하던 일도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서두르면 한 시간 안에 끝나겠다 싶었는데, 집중력이 너무 떨어졌다. 다른 일로 뇌를 환기 시킬 겸, 잠시 취재 준비를 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좀 찾아보고, 질문할 내용들을 키워드로 툭툭 던져 보았다. 5시 즈음부터 다시 하던 일을 시작해서 6시를 살짝 넘긴 시간에 대충 일단락을 지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았다. 한번 더 살펴보려고 그냥 넘어갔던 부분들이 중간중간에 있었다. 이걸 다시 보기에는 지금 너무 피곤했다. 일단은 집에 가서 좀 씻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와서 봐야지 싶었다.
지하철 역에 내려서 집을 향해 걷는데, 모든 사람들이 나와 반대 방향인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거 참 묘한 느낌이었다. 남들 출근할 때 퇴근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나도 금방 다시 출근해야 했다. 아산으로 취재를 가기 위해 차를 몰고 나와야 했고, 아직 어린이 집을 옮기지 못한 작은 아이를 예전에 살던 동네로 데려다 줘야 했다.
사무실을 향해 차를 몰고 가면서 든 생각은 중간에 한 시간만이라도 잠을 잘 틈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 점심을 먹지 않고 출발해서 아산 근방 어딘가에 차를 대고 잠시 자다가 시간 맞춰 가야지 싶었다. 쉽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운전 중 나도 모르게 졸다가 사고가 나면 안되니 준비는 철저하게 해야지 싶었다.
사무실에서 오전에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취재 준비를 최대한 간단하게 했다. 급하게 질문지를 작성해서 메일로 보내고, 전화로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밤새워 마친 일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아쉬웠지만 그냥 그대로 넘겼다. 나중에 미숙한 부분에 대해 한 소리를 듣더라도 어쩔수 없다. 틈이 나면 잠시 졸려고 했는데, 그럴 틈은 없었다.
졸음 운전을 벗어나는 방법 2
앞서 쓴 글에서 졸리면 오히려 속도를 높여 곡예운전을 하는 방법이 있다고 썼다. 어느 술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그 얘길 열심히 떠들었더니, 술집에서 일하시는 분이 참견을 했다. 그런 걸 바로 '칼치기'라고 부른다고, 그걸 당하면 무척 기분이 안 좋다고. 그 이야길 들어주었던 후배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사실 나는 그 '칼치기'란 것을 자주 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졸리면 히터를 끄고, 창문을 살짝 열고, 껌을 씹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목을 살짝 돌려주는 등의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행동들을 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대개 껌을 씹는 것만으로도 졸음은 쉽게 달아난다.
그러나 나는 밤을 꼴딱 샜고, 단 한 숨도 잠을 자지 못했으며, 대략 2시간 반 가량 운전을 해야 했다. 게다가 고속도로는 신호가 없고, 길이 단조롭기 때문에 쉽게 졸리다. 솔직히 겁이 났다. 졸음 운전이 가장 나쁜 건 나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상관 없는 남에게도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야 해 졸음을 막아야 했다.
껌 : 껌은 기본이다. 앞서도 말했듯 나는 웬만큼 졸린 상황에서도 껌 하나만 씹으면 제법 오래 졸음을 참으며 버틸 수 있다. 씹는 속도와 방식을 자주 바꿔주면 더 오래 버틴다.
초콜릿 : 예전에 자주 출장을 다녔던 후배가 그랬다. 야간 운전도 자주 하던 친구였는데, 졸리면 무조건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초콜릿을 왕창 산다고 했다. 초콜릿을 계속 먹으면서 운전하면 밤샘 운전도 가능하다고 했다. 난 한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워낙 경험도 많고 운전도 잘 했던 친구라 그의 말을 믿으며 출발하기 전 편의점에 들러서 초콜릿을 샀다. 판형 초콜릿은 뜯어서 먹기 불편하니 패스, 개별 포장된 작은 초콜릿도 운전 중에 포장 풀기가 불편하니 패스, 플라스틱 통에 든 카카오 함량이 높은 제품을 골랐다.
에너지 음료 : 출근하자마자 진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긴 했지만, 출발 직전에 에너지 음료를 하나 마셨다. 혹시 모르니 하나 더 사서 차에 놔둘까, 엄청 졸릴 때 마실 수 있도록 하는 생각에 냉장고 앞에서 잠시 고민했으나, 내려 가는 동안엔 괜찮겠지 싶었다. 올라올 때 다시 사던가 하지 싶었다.
그리운 옛 동네
출발할 때는 아침에 생각했던 것처럼, 근처 어딘가에 차를 대고 좀 쉬려고 했다. 점심때가 다 되었지만 너무 피곤한 상태여서 그런지 입맛도 없었다. 밥 보다는 잠이 우선이었다. 예상대로 고속도로에선 계속 비슷한 속도로 달린다는 점과 도로가 단조롭다는 점 때문에 졸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껌을 씹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도 따라 흥얼 거렸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네비가 평택즈음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라고 안내했다. 안중읍 방면으로 달리다가 아산호 방조제를 건너는 길을 안내하는 듯 했다. 문득 한동안 살았던 시골 마을이 생각났다. 안중 읍내 가는 길목에 있었다. 당시 농사짓는 마을 빈집에 들어가 살았는데, 그 집이 아직 남아있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다. 나와 같이 살고 같은 단체에서 활동했던 선배를 찾아 놀러온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난 곳도 그 집이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넉넉했다. 익숙한 길이라 어렵지 않게 그 마을을 찾아갔다. 마을 입구에 있는 정미소는 그대로였다. 마을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조금 넓어졌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큰 길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그 길을 보면서 옛 추억에 잠시 잠겼다. 비록 짧은 기간을 살긴 했지만 그래도 이 길을 아침 저녁으로 오갔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 도착해보니, 차를 댈 곳도 마땅치 않았다. 게다가 앞집 개가 자꾸 짖어대서 가까이 가질 못했다. 저 안쪽이 바로 살던 집인데 차를 대고 바로 앞까지 가보고 싶은데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할머니 한 분이 수상한 눈길로 나를(내 차를) 본다. 개가 자꾸 짖어서 카메라로 조금 먼 발치에서 살던 집을 찍고는 다시 차를 돌려 나왔다. 외관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한데 빈집 느낌은 아니었다. 그 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빈집이었는데, 지금은 누군가가 살고 있는 듯 했다. 뭐 집에 들어가 볼 생각도 아니었으니, 그냥 그 집이 잘 있구나 하는 걸 확인 한 것으로 만족했다. 차를 돌려 나와서 마을 입구의 정미소 앞에 차를 대고 잠시 내렸다. 논과 밭을 휘휘 둘러보며 옛 추억을 꺼내보고 사진도 몇 컷 찍었다. 이왕 온 거 여기서 좀 쉬다 갈까 싶어 의자를 제끼고 몸을 뉘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안중읍에 가서 배를 채우고 다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밥을 먹고 다시 아산을 향해 출발. 도중에 졸리지는 않았다. 목적지에 20분 먼저 도착해서 알람을 맞춰놓고 의자를 제꼈으나 이번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내려서 주변을 좀 둘러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고속도로 졸음운전
취재는 생각보다 잘 되었다. 준비가 부족해서 조금 걱정했으나, 편안한 분위기에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부지런히 받아 적고,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5시를 훌쩍 넘겼다. 장소를 바꿔 한 군데를 더 돌아보고 취재를 마쳤다. 감사와 작별의 인사를 전하고 아산을 출발 한 것이 5시 반이 살짝 넘어서였다. 생각보다 조금 늦어졌다. 사실 5시 이전에 취재를 마치고 출발할 생각이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퇴근길 정체 상황을 맞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가고 싶어서 커피나 에너지 음료를 살 생각도 못하고 그냥 출발했다. 사실 근처에서 마땅히 살 만한 가게도 없었다.
일단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우려했던 대로 졸리기 시작했다. 아까 사두었던 초콜릿이 생각나서 두어 개를 집어 먹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향이 입안에 퍼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았다. 역시 그 후배의 말이 맞았어! 초콜릿만 있으면 밤샘 운전도 하겠다 싶었다. 하나씩 하나씩 초콜릿을 녹여 먹으며 운전을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 순간부터 도로에 차가 많아졌다 싶더니 속도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정체까지는 아니지만, 이 속도로 가다가 언제 도착하나 걱정이 될 만한 상황이었다. 초콜릿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허, 설마 나 초콜릿 한 통을 다 먹는 건가 싶을 때쯤 이미 통은 비어있었다. 평소 단 음식을 즐기지 않고, 초콜릿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한 통을 다 비우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길게 늘어선 차량의 행렬, 속도가 나지 않는 지루한 고속도로, 초콜릿을 다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졸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야 해!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나! 나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졸음을 쫓기는 쉽지 않았다. 껌을 씹었다. 처음 한 동안은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이 너무 피곤했다.
그건 아마도 찰나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잠시 눈이 감겼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 몸의 감각이 문득 차가 옆으로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뇌로 경고를 보낸 것 같다. 다행히 차선을 벗어나진 않았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구나 싶어서 뺨을 서너대 때리고 눈을 부릅 떴다. 잠시 괜찮았는데, 또 어느 순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무렵이 잠을 못 잔지 대략 30시간이 훌쩍 지났을 때였다. 차량은 느린 속도로 꾸준히 가고 있었다. 앞엔 끝없이 늘어선 차량의 행렬이었다. 어디서부터 밀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차량 후미 등의 빨간 불빛 수 백개가 눈을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다시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거의 좀비처럼 아무 생각없이, 겨우 최소한의 의식을 유지한 채 앞 차만 따라가고 있었는데, 또 한번 저절로 눈이 감겼다. 차가 왼쪽으로 쏠렸고,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바로 잡으며 눈을 떴다. 다행히 이번에도 옆 차선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갑자기 엄청 부끄러웠다. 뒷차와 옆차가 얼마나 욕을 할까 싶었다. 차선을 바꿔 조금 가다보니 휴게소 안내 표지판이 나왔다. 그래, 시간은 좀 더 걸리더라도 일단 조금 쉬었다 가자. 8시에서 9시 사이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했지만, 아무리 차가 막혀도 8시 반이면 충분히 도착하리라 생각했다.
휴게소에 내려 화장실을 다녀오고, 커피와 에너지 음료 사이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에너지 음료를 하나 사고, 초콜릿을 찾았는데, 아까 샀던 플라스틱 통에 든 카카오 함량이 높은 초콜릿이 없었다. 판형 초콜릿과 개별 포장된 초콜릿과 초코바만 있었다. 좁은 매장을 두세 바퀴를 돌며 뒤졌지만 없었다. 포기하고 그냥 차에 올랐다. 그래 오늘 하루 먹은 초콜릿이 아마 몇 달간 먹은 양보다 더 많았을거야. 그만 먹자.
집으로
잠시 쉰 덕분인지, 에너지 음료 덕분인지 몰라도 이제는 졸리지는 않았다. 다만 눈의 피로가 좀 심했고, 머리도 좀 멍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서 뻗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시간 안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데 집중해야 했다. 도로의 정체는 서울에 가까워질 수록 더 심해졌다. 지루했다.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았다. 배철수 아저씨의 선곡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아는 길이 막혀서 그런지, 네비가 다른 길을 안내했다. 이 길은 한참 돌아가는 길인데, 왜 이런 길로 안내할까? 그냥 내가 아는 길로 갈까? 분명 퇴근길 정체 때문이겠지? 그렇담 얌전히 네비 말을 들어야지. 그런데 역시 익숙치 않은 길에, 상태가 좀비보다 조금 나은 상황이라 그런지 길을 잘못 들어버렸다. 좁은 길이라 차를 돌릴 수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달려보자. 한참을 달리다보니 익숙한 길이 나왔다. 예전에 일했던 단체 근처였다. 당시 차를 갖고 출퇴근 할 때 늘 다니던 길이었다. 한참을 돌아서 엉뚱한 곳으로 와 버린 것이다. 시간은 이제 빠듯해졌다. 늘 다녔던 길이니 시간은 대략 짐작이 갔다. 그래도 8시 반 전에 도착하겠구나.
아이들을 만나기로 한 건물 앞에 차를 세운 건 8시 15분쯤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긴장이 탁 풀려서 그대로 쓰러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해보니 미친 짓이었다. 잠을 한 숨도 안 자고 차를 몰고 출장을 가다니! 고속도로에서 졸다니!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아이들 얼굴을 보니 왠지 미안해졌다. 녀석들을 차에 태우고 집에 가면서 아이들에게 부탁했다. 아빠가 무척 피곤한 상태니, 도착하면 어서 씻고 잘 준비를 하자고. 그러나 부탁한다고 말을 잘 들어주면 아이들이 아니지. 녀석들을 씻기고 재우기까지 또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 했다.
막상 애들을 누이고 나니, 나는 잠이 안왔다. 피곤하지만 잠은 안오는 상태. 그래 나 저녁을 안 먹었지. 점심때도 입맛이 없어 밥을 남겼던 터다. 초콜릿만 한 통을 다 먹었을 뿐, 달리 먹은 건 없었다. 밥을 퍼려다가 입안이 까끌거려 도저히 씹지 못할 것 같았다. 집 앞 슈퍼에 뛰어가 막걸리를 한 병 사왔다. 김치 몇 조각, 깍두기 몇 개에 한 병을 비웠다. 아이들은 누워서도 뭔가 장난을 치면서 떠들고 있었다. 두 녀석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추고 꼬옥 껴안아 주고 나서 누웠다. 그리고 기절했다. 대략 10시 반쯤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 힘들었다. 한 시간만 더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억지로 몸을 일으키긴 했다. 결국 10분 지각했다. 지금 멍한 상태로, 퇴근도 안하고 이 글을 쓰는 건, 앞으로 되도록이면 이런 일을 만들지 말아야지 하고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의미다. 에휴! 취재 해온 내용 정리해서 기사를 써야할텐데, 기사는 안 써지고, 이런 글을 술술 잘 써지니. 한숨이 나온다. 기사 쓸 걱정은 내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