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뇌
어느날 길을 걷다가 갑자지 머리 속에서 어떤 노래가 맴돌았다. 그게 단 한 소절 "키스 키스 키스 베이비" 라는 아마도 후렴구로 여겨지는 부분만 계속 머리 속에서 무한 반복되는 것이다. 이게 대체 어떤 노래일까? 내가 어디서 이 노래를 들었길래, 이 부분만 자꾸 떠오르는 걸까? 누구 누래일까? 궁금했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야했다. 그 노래는 며칠동안 잊을만하면 한번씩 머리 속을 맴돌았는데, 바쁘기도 하고, 노래에 신경쓸 여유가 없기도 하고, 궁금함을 참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며칠 후 좀 여유가 생긴 어느 저녁 검색창에 저 가사를 넣어봤다. 바로 노래 제목을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고, 몇 개의 문서를 뒤지다가 미쓰에이라는 그룹의 허쉬라는 제목의 곡이라고 알아냈다. 집에 티비도 없고, 대중가요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노래를 잘 듣지도 않는 편이다.(팝 음악에는 조금 관심이 있어서 가끔 듣긴 하지만) 미쓰에이가 몇 명인지 어떤 그룹인지조차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 노래를 들었던 걸까? 길 가다가 어디 가게에서 크게 틀어놓은 음악을 들었던가? 아니면 어디 커피숍이나 호프집에서 들었던 것일까?
나중에 우연히 깨달았는데, 전혀 상상도 못했던 곳에서 거의 매일 듣고 있던 노래였다. 바로 운동하러 가는 헬스클럽에서 매일 틀어놓은 음악이었던 것이다. 나는 헬스큽럽에서 머무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20분이 채 안될 정도로 짧다. 남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동안 아주 고강도 운동을 하고 나오는 편인데, 남들이 주로 이용하는 머신은 일체 쓰지 않고, 오로지 역기를 붙들고 프리웨이트 운동만 하고 나오는 편이다. 몸의 다른 근육은 일체 쓰지 않고, 오로지 움직이는 부위의 근육만 사용하는 머신운동은 완벽한 고립운동이다. 그래서 비교적 안전하다. 사실 이 머신운동은 초기에 재활훈련 등 어딘가 불편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머신운동에 비해 프리웨이트는 신체 모든 부위를 다 써서 운동해야 하고, 자칫 잘못하면 다칠수도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연습과 주의가 필요하고,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나는 5분에서 15분 가량 짧은 본운동 시간(준비운동과 마무리운동을 제외한) 안에 옷이 흠뻑 젖을만큼 고강도 운동을 하는 편이라 매일 무거운 무게에 도전하고, 횟수를 늘리고, 새로운 운동을 시도하는 등 고도의 집중력이 없으면 부상으로 이어질만한 운동을 하고 있다.
아마 그래서 헬스클럽 안에서 노래를 들은 기억은 전혀 없다.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시끄럽게 노래를 틀어놓는 곳에서 나는 단 한번도 노래를 들었다는 기억을 떠올릴 수 없다. 그런데 하필 그날은 노래를 들었던 것이다. 전날부터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맞았고, 에어컨 바람 때문에 살짝 냉방병과 감기 기운이 있었다. 그래도 운동을 해야지 싶어서 억지로 가긴 했는데, 막상 역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몸이 무거웠다. 아마 이 헬스클럽에 다닌 3개월 동안 거의 유일하게 벤치에 앉아서 쉬었던 날이었다.(평소엔 아무리 지쳐도 앉아서 쉬지 않는다. 서서 숨을 고르고, 스트레칭을 하고 다시 다음 세트를 이어가거나, 다른 운동으로 옮겨갈 뿐) 차가운 물을 마시고, 멍하게 앉아 있는데 노래 소리가 들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곳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헬스클럽은 시끄러운 음악을 하루종일 틀어놓는다. 앞서 머리 속을 맴달았던 '허쉬'란 노래는 아니었다. 제목과 가수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걸그룹, 혹은 아이돌그룹이라 부를만한 젊은 여성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뻔했다. 아마 이것도 유행하는 노래이겠지.
그제서야 떠올랐다. 내 머리속에 '허쉬'가 계속 맴돌았던 이유도, 여기서 들었기 때문이구나. 그러고나니 무의식 중에 여기서 그 노래를 거의 매일 들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와중에서도 나의 뇌는 그 노래를 기억하고 아무 이유없이 어느 시점에 그 노래의 일부 후렴구를 무한반복으로 플레이 했던 것이다.
무의식이란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광고가 중요하고, 입에 착착 감기는 유행어가 중요하구나. 슈퍼에서 어떤 물건을 보았을 때, 무의식적으로 반복적으로 들어왔던 어떤 광고를 떠올리고, 그 연상작용이 구매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진 이 사회가 몸서리쳐지도록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파이트 클럽]을 보면 영화 곳곳에 작은 브래드 피트가 아주 짧은 시간동안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순간이다. 감독은 광고나 영상매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세뇌효과에 대해 일깨우고 싶었던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거대한 남성 생식기(브래드 피트의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는 충격적이다. 설사 나의 의식이 짧은 순간 스쳐지나간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의 무의식은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어딘가에 저장해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가 전혀 상상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
내가 의식하고 있는 동안 한번도 들은 적이 없던 노래를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다가 후렴구를 반복 플레이했던 그 경험이 나는 소름끼치도록 무섭다!
학교 교육이나 사회생활도 모두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는 국가의 말에 순응하는 인간, 자본의 말에 순응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경쟁하는 인간, 누군가가 가르키는 목표에 의심하지 않고 달려드는 인간, 남들과 협력하려하지 않고 경졍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바로 공교육의 목표다. 이것이 바로 무서운 세뇌이며,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무한 경쟁 시대, 철저한 자본주의 시대, 국가 권력이 국민을 우롱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도 웃을만한 '1번 어뢰'를 믿어야 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북한 해커들의 존재를 믿어야 하고, 그래서 어딘가가 해킹을 당하면 무조건 북한 소행임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비행가능 거리와 무게, 연료 등과는 전혀 관계 없이 무인기는 무조건 북한에서 보낸 것이라 여겨야 하고, 변사체의 사인을 밝히지 못했어도, 그 시체의 신원이 누구라고 발표한다면 무조건 믿어야 하는 것이다. 설혹 그 사체가 한겨울 옷을 입고 한여름에 죽었다고 발표한다고 해도 말이다.
풍요 속의 빈곤
집 근처에 헬스클럽이 서너개가 있건만, 모두 나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머신만 가득한 곳이고, 내가 원하는 프리웨이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의외로 간단하다. 역기를 한 두개쯤 여유있게 구비해놓고, 역기를 들 수 있는 거울 앞 빈 공간이 조금 있길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네 곳 중에 두 곳은 아예 프리웨이트를 할 공간 자체가 없었고, 한 곳은 조금 공간이 있었지만 좁았고, 여유분의 역기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갔던 곳, 집에서 가장 먼 곳에서 그나마 운동할 공간을 발견해서 기뻤다. 하지만 여유분의 역기가 단 하나였다. 데스크 앞에 앉아 있는 트레이너에게 물었더니 하나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그 역기를 따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더이상 찾아가 볼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프리웨이트를 할 수 있는 비교적 넓은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그 곳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운동하러 갔던 첫 날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요즘 각광받고 있는 케틀벨이 아예 없었고, 작년에 헬스클럽에서 즐겨했던 전신운동 기구인 로잉머신도 없었다. 게다가 여유분으로 하나 있었던 역기는 길이가 짧았다. '클린 앤 저크'는 할 수 있었지만, '스내치'와 '오버헤드 스퀏'은 할 수 없었다. 그 역기로는 제대로 운동을 할 수 없었고, 결국 스퀏렉에 걸린 역기나 벤치 프레스에 걸린 역기 둘 중 하나를 가져와서 써야 했다. 게다가 스퀏 렉에 있는 역기는 아주 낡아서 녹이 잔뜩 슬었고, 완만하게 휘어져 있어서 가끔 바가 제멋대로 헛돌기도 했다.
조금 고민하다가 어쨌거나 돈을 내고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데스크에 있는 트레이너에게 물었다. 케틀벨을 구매할 수는 없는지? 여유분 바벨을 제대로 된 것으로 하나 더 구매할 수 없는지? 스퀏 렉에 있는 낡은 바를 교체할 수 없는지? 내 질문에 트레이너는 무척 황당한 표정으로 마치 '당신이 뭔데 그런 걸 요구하느냐?'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헬스클럽을 이용하는 대다수는 그냥 머신운동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케틀벨을 구매해봐야 쓸 사람은 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열악한 여건 속에서 그리 어려운 요구도 아니고, 그리 고가의 장비를 요구한 것도 아니고 모두 적은 비용으로 구비가 가능한 품목들인데, 그것도 고려해보지 못한다면 내가 여기서 오래도록 운동할 수 있겠는가?
사실 트레이너의 반응이 기분 나빠서 첫 한 달만 다니고 그만두려 생각했다. 그런데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좀 귀찮아도 벤치 프레스에 걸려있는 제일 멀쩡한 역기를 프리웨이트 공간으로 옮겨와서 운동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했다. 물론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으면 어쩔수 없었지만, 그땐 그냥 여유분의 역기로 클린 앤 저크를 열심히 했다. 지난 3달 동안 가끔 트레이너에게 혹시 케틀벨은 어떻게 되었냐를 물었지만, 늘 알아보겠다는 무성의한 답변만 돌아왔다. 본 운동을 마치고 마무리 운동으로 제일 좋은 두 가지는 케틀벨 스윙과 로잉머신인데, 여기는 케틀벨도, 로잉머신도 없었다. 결국 나는 케틀벨 대신 덤벨로 스윙운동을 했고, 로잉머신은 대체할 운동이 아예 없었기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운동하다가 예를 들어 스내치 동작 중에 뭔가 잘 안되고, 누군가가 좀 가르쳐줬으면 싶을 때가 있었는데, 어디 물어볼 사람도 전혀 없었다. 여기는 모두 머신 운동을 하러 온 사람들 밖에 없었고, 트레이너 조차 역기를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비싼 돈 주고 개인 트레이닝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데드리프트 동작을 엉터리로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는 어이가 없었다.)
달리 대안이 없어서 3달동안 다니긴 했지만, 좀 더 제대로 운동하고 싶다는 갈증이 늘 있었다. 하지만 크로스핏 전용 체육관을 가려면 지금 내고 있는 돈의 4배 가까운 돈을 내야 했다. 없는 형편에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수는 없었다. 대신 할 수 있는 운동을 제대로 열심히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전 3달의 기간이 끝나고나서 재등록을 하지 않았다. 달리 갈 곳은 없기 때문에 당분간 집에서 혼자 운동을 해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케틀벨부터 구매했다. 집에 역기가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케틀벨과 덤벨로 대체해서 충분히 운동할 수 있다. 당분간 해보다가 정 안되겠다 싶으면 그때가서 또 고민해보면 된다. 다시 거기를 돌아가던가, 아니면 좀 멀어도 제대로 된 곳을 찾아보던가.
분명 예전에 비해 헬스클럽은 많이 늘었고, 헬스머신의 종류도 많아졌다. 하지만 머신을 전혀 이용하지 않는 나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가끔 남들과 같은 돈을 내는 것도 아깝다 느낄때가 있다. 예를들어 가장 전기를 많이 잡아먹고,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트레드밀(런닝머신)을 나는 아주 가끔 밖에 이용하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지난 3달동안 5번 정도 써봤다. 그것도 남들이 한 시간 내내 달리거나 30분 이상 달릴 때, 나는 길면 5분, 짧으면 3분동안 전력질주하고 지쳐서 내려오곤 했다. 평소 나는 준비운동 차원에서 헬스클럽까지 뛰어다니곤 했다. 트레드밀을 사용했던 5번은 사정상 달려올 상황이 안되었거나, 준비운동이 미흡했거나, 전날 운동의 피로가 덜 풀려 과도한 웨이트가 무리라고 판단했을 때 뿐이었다. 그렇다면 트레드밀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도 덜 쓰고, 공간도 덜 쓰고, 아니 아예 그 많은 머신들 중에서 내가 이용하는 건 거의 없는데, 그 넓은 공간 중에서 구석에서 역기 하나 들 수 있는 공간(즉 사람 하나 설 수 있는 공간)만 사용할 뿐인데 같은 돈을 내는 것이 억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떠오른 단어가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남들과 다른 운동을 지향하는 사람에겐 어쩔 수 없는 것이가. 삶에서도 남들과 다른 길을 가고자 하는 입장에서 늘 비슷한 처지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듯하다. 언제쯤 이 아웃사이더 인생르 벗어나 보려나?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의 역사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일본 학자가 쓴 [몽골 세계제국]이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했는데, 예전부터 몽골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 책과 함께 주위에 꽂혀 있는 몇 권을 한꺼번에 집어들고 비교해가며 살펴보았다.
이 책이 특히 흥미로웠던 건 앞부분에서 이 책을 세계 최초로 세계사를 집대성한 라시드 웃 딘(일반적으로 라시드 알 딘이라 부름) 의 [집사(集史, Jami' al-Tavarikh)]를 기초로 하여 썼다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콜럼버스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인도를 향해 출항한 것이 아니라 쿠빌라이칸을 만나기 위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도 흥미로웠고, 흔히 '동방견문록'이라 알려진 [백만의 서(Il Millione)의 저자 마르코 폴로가 실존인물이라는 역사적 진술을 찾아볼 수 없다고 써놓은 부분들도 흥미로웠다. 몽골에 대한 관심에서 펼쳐본 책이었지만, 공부할 꺼리가 무척 많았다. 이 책을 시작으로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역사에 대해 좀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아주 오랜만에 공부에 흥미가 생겼다.
다음에는 이 책을 읽을 생각이다. 몽골 건국신화다.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일지 직접 읽어가면서 추리해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