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2
하필 바쁜 날에 컴퓨터가 말썽이었다. 그것도 새로 구매한 컴퓨터가 말이다. 일터에서 컴퓨터를 새로 사야해서 아는 사람을 통해 SSD를 달아 성능을 높인 컴퓨터를 구매했다. SSD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고, 심지어 비교적 괜찮은 성능의 컴퓨터도 별로 써본 적이 없다. 집에서도, 그간 거쳐왔던 다양한 일터들에서도 내가 만져온 컴퓨터는 대개 저사양의 컴퓨터로 웹서핑과 문서 작업은 문제없지만, 가끔 이미지 작업을 하려면 느려터지고, 방대한 데이터를 담은 엑셀이나 엑세스를 돌리면 느려지는 그런 컴퓨터였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받을 컴퓨터에 대한 기대가 살짝 컸다. 게다가 컴퓨터를 조립해서 설치해주기로 한 사람도 SSD를 처음 써보는 거라면 아마 분명 놀랄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오지 않고, 다른 사람이 왔다. 갑자기 바쁘다며 지금 보내는 사람이 알아서 잘 해줄거라고 했다. 난 데이터 백업도 받아야 하고, 기본 문서 프로그램 외에 추가로 몇몇 프로그램을 깔아달라고 부탁까지 해놓은 상황이었는데, 그 외에도 이것저것 부탁해놓은 것이 많았는데, 컴퓨터를 갖고 온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데이터 백업도 알아서 받아 주시기로 했다고 말하니, 한숨부터 내쉰다. 바쁜데 데이터 백업 받으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얘기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하필 그날은 급한 문서 작업이 있었고, 외부 회의가 하나, 외부 미팅이 하나 있었다. 데이터 백업을 다 받고 설치를 마칠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알아서 해놓고 갈테니 볼일 보시라는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는 못해 외부 약속을 다 제끼고 옆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 일들도 중요한 일이라 일단 사무실을 나서야 했다. 미팅이 살짝 길어졌고, 회의 시간에는 이미 늦어서 외부 회의는 미안하지만 못 가겠다고 전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도중에 컴퓨터 설치를 마친 그 사람이 다 끝내놓고 간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도착해보니 새 컴퓨터가 옛 컴퓨터 자리에 놓여 있었다.
분명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데이터 백업 받으면서 인증서를 꼭 옮겨 달라고 부탁했건만, 업무를 보다보니 인증서를 불러올 수 없었다. 인증서가 포함된 폴더만 (그러니까 데이터만) 옮겨놓은 것 같았다. 다시 옛 컴퓨터를 갖고와서 선들을 다 갈아 끼우고 시동을 걸어 인증서를 제대로 옮겼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문서 프로그램 외에도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이 필요한데, 애초에 컴퓨터 구매를 결정할 당시에 부탁했던 것이 거의 깔려있지 않았다. 실망스러웠다. 이 바쁜 날에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구해서 깔려니 머리가 아팠다.
문제가 생긴 건 거기서부터였다. 필요한 프로그램을 하나 웹에서 구해 깔았는데, 설치파일에 바이러스와 스파이웨어와 악성코드가 잔뜩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익스플로러 창이 수십개가 떳다! 부랴부랴 제어판에서 의심되는 놈들을 지우고, 백신 프로그램을 돌리고, 시스템 최적화를 시키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봤다. 간신히 몇 개는 지웠는데, 어딘가에 몇 놈들이 숨어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을 하다보면 자꾸 광고창을 띄워댄다. 뭐 일단 거기까지는 참았다. 바쁜 날이니까 어서 할 일을 처리해야지 하고, 업무상 필요한 정부 사이트나 은행 사이트 등을 들어갈 때마다 보안 프로그램 더미(정말 더미라는 말이 어울릴정도로 한 사이트마다 대여섯개 이상이었다.)를 깔아야했다. 문제는 아까 실수로 깔아버린 바이러스가 영향을 미친 탓인지 보안프로그램이 설치되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오늘 업무를 끝내려면 이 사이트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건만 보안프로그램 설치에서 자꾸 멈추니 미칠 지경이었다. 이미 퇴근시간은 지났고, 컴퓨터와 씨름하느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위에서 일하던 분들도 모두 퇴근하고 사무실은 조용했다.
아무리 야근이 길어지더라도 해결해놓고 집에 가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오늘 이걸 해결해놓지 못하면 당장 내일 아침부터 일을 할 수 없었다. 안그래도 오늘 못 끝낸 일이 밀려 있는데, 내일 해야할 일도 산더미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나는 컴퓨터를 그리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의심되는 녀석들을 검색해서 지우고 또 지우려고 애써봐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백신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밤이 늦어서야 결국 포기하고, 낮에 끝내지 못한 문서작업을 하다가 새벽 3시 무렵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 입술이 부르텄다. 피곤해서 그런 것이다. 최근 일이 많기도 했고, 스트레스가 많아서 잠을 잘 자지 못한데다, 어제 컴퓨터와 씨름하고 새벽까지 일했으니 그럴만 했다. 출근하면서 처음 컴퓨터 구매를 의뢰했던 사람에게 연락했다. 문제가 생겼으니, 꼭 당신이 와서 해결해달라고 강조했다. 그는 어제 자신이 못와서 미안하다며 꼭 오겠다고 했다. 빨리 와서 해결해야 내가 일을 할 수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으나, 그는 오후 2시 반쯤 왔다. 확실히 전문가의 손은 다르긴 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아무리 씨름해도 잡아내지 못했던 나쁜 놈들을 그는 하나씩 하나씩 잡아나갔다. 백신도 잘 듣는 외국 아이로 새로 깔아주고, 쓸모없는 국산 백신은 지웠다. 그리고 내가 필요하다고 부탁했던 몇 개의 프로그램을 깔았다. 이러는 동안 제법 시간이 걸렸고, 그가 컴퓨터를 고치는 동안 나는 계속 마음이 급했다. 저녁에는 이사회 회의가 있어서 안건 준비를 해야했고, 어제와 오늘 끝내야 할 일도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바이러스를 잡았는데도, 어제 방문했던 사이트들에서는 여전히 같은 현상이 반복되었다. 업무상 자주 가는 사이트가 대략 10개 가량 되는데, 이들 대부분에 접속할 수가 없었다. 저주스러운 우리나라 웹사이트의 각종 보안 프로그램들! 왜 크롬에선 업무상 필요한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게 만들어놓은 거냐구! 그는 익스플로러 버전이 낮아서 그런 것일 수 있다고 업데이트를 시켰다. 그런데 이 업데이트가 또 시간을 엄청 잡아먹었다. 그는 더이상 머무를 수 없다고, 아마 업데이트가 끝나면 잘 될거라고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익스플로러를 업데이트 하는 동안 부랴부랴 이사회 회의자료를 준비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익스플로러 업데이트를 마쳤고, 재부팅 후에 접속해보니 필요한 사이트마다 열심히 보안 프로그램을 깔아대고 나서 접속이 되었다. 어제와 오늘 해야할 업무를 하다보니 이미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이 날은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날로, 이사회 회의 장소로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애초 계획은 여유있게 퇴근해서 아이들 데리고 회의 장소 근처로 이동해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직 일을 다 끝내지 못했는데, 큰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방과후 교실 마쳤다고, 집으로 가면 되는지를 물었다. 나는 집으로 가지말고 잠시 거기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작은 아이도 걱정이었다. 빨리 가서 데리고 나와야 할텐데, 내가 늦게 가면 방과후 교실 선생님과 어린이집 선생님 퇴근이 늦어질텐데.
얼른 일을 마무리하고, 거의 다 써놓았던 이사회 회의록을 마무리하고, 출력해서 스테이플러로 찍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들고 뛰쳐 나왔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탔다. 아까 미리 큰 아이에게 작은 아이 어린이집으로 가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두 녀석은 어린이집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다가 골목을 걸어나왔다. 회의 시간에 맞추려면 제대로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근처 국수집에 들어가 빨리 나오는 국수를 시켜 후루룩 먹었다. 자꾸만 딴짓하는 아이들에게 칭찬과 협박을 번갈아 해가며 간신히 그릇을 비우게 만들고 버스를 탔다. 계산상으로는 회의 시간에서 5~10분 정도 늦을 듯. 문자를 보내 아이들 밥 먹이고 데려가느라 조금 늦는다고 연락했다. 그제서야 조금 긴장이 풀렸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지나온 시간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졌다.
무사히 회의를 마쳤는데, 이사 중에 한 분이 내 입술을 가르키며 너무 일이 많아 피곤해서 그런 거냐고 물었다. 속으로는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이 사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문제가 생겨 야근을 했다고만 답했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이사 한 분이 일터 일 때문에 피곤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잠을 못 잔거 아니냐고 한 마디 했다. 순간 억울한 감정이 확 솟구쳤다. 억울했지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고, 설명할 기운도 없었다. 다만 그렇지 않고,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갑자기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 이렇게 된 거라고 짧게 말하고 말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오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내일 학교도 가야하고, 어린이집도 가야하는데, 늦게까지 끌고 다녀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작은 녀석은 버스에서 잠들어 버려 안고 왔더니, 집에 와서는 잠이 깨버렸다고, 더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나는 어쨌거나 문제를 해결했다는 후련함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보낸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 그리고 마지막에 들었던 한 마디 때문에 상한 기분을 달래려고 맥주를 한 잔 하고 아이들 곁에 누웠다.
아마도 내가 컴퓨터를 좀 더 잘 다룰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겠지, 아마도 내가 좀 더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면 좀 더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 아마도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면 그 분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겠지. 머리속에서 자꾸 떠오르는 아마도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