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아무런 계획없이 그냥 훌쩍 떠나는 여행, 참 오랜만이었다. 오래전에 나는 이런 여행 좋아했었다. 그냥 갑자기 훌쩍 떠나 짧으면 2~3주, 길면 4~5주간 여기저기 떠돌다가 돌아오는 여행을 가끔 다녔다. 그래서 친구녀석은 나를 '바람따라 구름따라 김도사'라고 불렀다. 그땐 결혼 전이었고, 직장인도 아니었으니 그게 가능했었지만, 이후 아주 오랫동안 그런 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사실 최근 몇 년간 워크숍이나 출장은 가끔 다녔지만, 일과 전혀 관계없이 그냥 어디 놀러간 적은 거의 없는 듯하다.
지난 주 금요일 새벽 늦게까지 맥주와 함께 추리소설을 읽다가 잠들기 전, 문득 연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일 아침에는 애들 데리고 어디 놀러라도 다녀올까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주말에 일정이 있다고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애들과 집에서 놀다가, 집 근처 놀이터에서 잠시 놀거나, 동네 뒷산을 슬쩍 올랐다가 내려왔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연휴인데, 애들 더 크기 전에 같이 여행을 좀 자주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결정할 수 없으니, 아침에 아이들에게 물어보기로 맘먹고 잠이 들었다.
아침, 늦게 잠들었고, 술도 마셨기에 늦잠을 더 자고 싶었으나, 작은 아이가 내 배 위에서 쿵쿵 뛰어서 깰 수 밖에 없었다. 쉰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빠랑 같이 어디 놀러갈래?", "어디?", "음, 강이나 산이나 바다나. 가고 싶은 곳으로." 아이들은 조금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더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일어나, 몇 해전 놀렀갔던 강원도 평창의 한 펜션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며, 그런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그 집에 다시 가고 싶다고 했고, 거긴 차 없이 놀러갈만한 곳은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보자고 했다. 일단 여행을 가는 것까지는 결정을 했다. 이제 어디를 갈지를 정해야 하는데, 컴퓨터를 켜서 적당한 곳을 검색했다. 아이들과 함께 놀만한 곳, 차 없이도 이동이 어렵지 않은 곳, 아주 멀지 않은 곳으로. 검색을 하는 중 레일바이크 타는 사진을 큰 아이가 보고 "저거 타러가자."고 했다. 그 페이지에 나온 곳은 김유정 역이었는데, 검색해보니 김유정 역은 이미 연휴 내내 예약이 꽉 차있었다. 다른 레일바이크를 검색했다. 여러군데가 나왔다. 그 중 비교적 가까운 곳인 양평을 검색해 연락했다. 당일 예약은 안되고, 직접와서 표를 사야 한다고 했다. 현재 오후 3시까지는 매진이라고 했다. 일단 양평 레일바이크를 타는 것을 목표로 결정. 1박 2일의 나머지 일정은 가면서 혹은 거기 가서 결정하기로 하고, 간단히 여벌옷과 세면도구만 챙겨 집을 나섰다.
양평은 전철이 연결되어 있어서 쉽게 갈 수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한 번,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서 양평으로 갔다. 아이들은 놀러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났다. 가면서 양평에 뭐가 있는지, 나머지 시간을 뭐하고 놀지를 검색했다. 용문사라는 절이 유명하다는 걸 알아냈다. 그쪽에 관광단지가 형성되어서 펜션도 많다고 했다. 낮엔 더우니 저녁에 레일바이크를 타고 용문사 쪽으로 넘어가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용문사를 돌아보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을 대략 세웠다. 나 혼자라면 여기저기 더 많이 돌아다녔겠지만, 아직 어린 작은 아이를 데리고는 무리한 일정을 세울 수는 없었다.
레일바이크
편도 3.2킬로미터, 왕복 6.4킬로미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리. 갈땐 거의 내리막이라 페달을 안 밟고 쉽게 갔다. 반환점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좀 지루했다. 총 50개의 차 중에 4번이어서 50번이 들어올 때까지 한참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오르막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우리 차 앞뒤로는 4인가족이었다. 아이들도 모두 어리지않아 페달을 밟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우리는 3명, 작은아이는 발이 닿지 않아 페달을 밟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앞 차가 너무 느려 답답함을 느꼈다. 한참 신나게 페달을 밟았더니 앞차가 코앞에 있었다. 큰아이가 브레이크를 잡을까 고민할 정도로.
거의 다와서 다리에 힘이 빠지고 엉덩이가 아팠다. 오르막길. 내가 힘들어하니, 큰아이가 분발해서 페달을 밟았다. 도착점에 거의 다 와서 옆에 세워진 푯말들이 재밌었다. "얘들아, 열심히 밟아라! 엄마 아빠 힘드시다", " 남자는 힘, 지금 힘드시다면 운동부족입니다" 등 재치있는 문구들이 많았다. 덕분에 막판에 힘을 끌어올려 웃으면서 들어왓다.
타기 전에는, 타고나서 많이 지치겠지, 다리가 꽤나 아프겠지 예상했었다. 작은 아이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큰 아이도 무리하면 다리가 아플테니, 쉬엄쉬엄 페달을 밟으라고 말해둔 터여서 그랬다. 하지만 거의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평소보다 하체 운동을 조금 많이 했다 생각할 정도.
다음날은 혹시 다리가 땡길지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크게 신경쓸정도는 아니었다. 타바타 인터벌로 에어스퀏을 했던 다음날엔 거의 걷기가 어려울 정도였는데, 거기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큰 아이도 용문사를 걸을 때에는 조금 다리가 아프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괜찮아 보였다.
막걸리와 편육
용문사에는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은행나무를 보고, 절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한참을 그늘에서 쉬다가 내려왔다. 더운 날씨에 아이들은 무척 힘들어했다. 얼린 생수를 한 병 사줬는데, 얼마 안되는 물을 다 마셔버리고는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느라 어쩔줄을 몰라했다. 조금 녹은 물을 서로 먹겠다고 싸우고 난리였다.
늦은 오후 용문 전철역 근처로 돌아와 배를 채웠다. 아이들에게는 막국수를 시켜주고, 난 지평막걸리와 편육을 시켰다. 캬~ 막걸리가 정말 맛있었다. 고기도 맛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집에 가지말고 막걸리를 몇 병 더 마시고, 하루 더 놀고 싶었지만, 그래도 다음날은 집에서 좀 쉬어야 나도 출근하고, 아이들도 학교와 어린이집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꾹 참고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이번 짧은 여행은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제법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 맛있게 먹는 모습 등을 보면서 좋았고, 잠시 일상을 벗어나 강과 산을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아이들 역시 집을 떠나 새로운 곳을 다녀보고, 낯선 곳에서 자고, 맛난 것들을 먹어서 좋았던 듯하다.
또 자주 여행을 가고 싶지만, 주말 일정이 많고, 주머니 사정도 썩 좋지 않기 때문에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것 같다. 하긴 자주 가면 그게 뭔 의미가 있겠나, 가끔 가야 그걸 바라보며 일상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빼놓을 수 없는 책 이야기
이번 여행 틈틈히 읽은 책, 크기도 작고, 얇아서 여행갈때 넣어가기 딱 좋다.(시리즈 이름이 팸플릿이다!) 하지만 내용은 머리 식히러 떠난 여행과는 썩 맞지 않았다. 제목만 보면 착한 전기에 대해 말할 것 같지만, 사실 정부와 핵마피아가 얼마나 나쁜 놈들인지를 알려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괜히 읽다가 열만 받았다!
어쨌거나 전기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이왕 전기를 쓸 수 밖에 없다면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이 현재 이 나라의 발전(전기 생산)과 송전(전기 운반) 시스템에 대해 가장 쉽고 자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6월 13일에는 청계천 2가 한빛광장에서 '탈핵시민행동의 날' 행사가 있다. 세월호 문제도 그렇고,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자꾸 모여서 소리를 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지들이 잘해서 그런 줄 알고 더 지들 배만 채우게 마련이다. 주말이지만, 좀 덥겠지만 그래도 모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