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바빠!
지난 이삼주는 정말 바쁜 시간들이었다. 늘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이때만큼은 진짜, 정말, 억수로 바쁜 때였다. 주중에는 아이들 보는 날 외에는 야근을 했고, 아이들 보는 날에도 애들 밥 먹이고, 씻으러 보낸 후에 컴퓨터 켜고 일을 했다. 주말에도 뭔가 일정이 생겨 바쁘게 보냈다. 주중에 새벽까지 일하는 날이 많아, 주말에는 늦잠도 자고, 좀 쉬어야 컨디션을 회복하는데, 쉬지 못하고 오히려 텃밭에 가서 삽질을 하거나, 어느 행사에 가서 짐 나르는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지난 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가 피크였다. 예전에도 가끔 몸을 혹사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체력이 딸려 그렇게 무리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오랜만에 또 그랬다. 수요일 밤에는 새벽 서너시까지 일을 하다가 책상에서 졸았다. 정신 차리고 자리에 누운게 5시가 넘어서였다. 목요일 아침에는 탈핵 캠페인을 나가야 했다. 알람이 울렸지만, 도무지 일어날 수 없어 끄고 다시 누웠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이 아침 8시. 고민을 했다. 지금이라도 후다닥 준비하고 뛰어나갈지, 아니면 좀 더 쉬다가 출근할 지, 겨우 일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머리가 멍했다. 몸도 무거웠다. 무리라고 판단하고, 동료에게 못 나가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내고 누웠다. 한 시간쯤 더 자고 출근했다. 확실히 컨디션이 좋아졌다.
바쁜 목요일을 보냈다. 토론회가 두 건이나 있었다. 오후에 하나, 저녁에 하나. 토론회를 모두 마친 후 뒤풀이를 따라갔다. 피곤했고, 다음날 워크숍 준비도 남아있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다. 술도 마시고, 사람들과 떠들어야 스트레스가 좀 풀릴 것 같았다. 뒤풀이를 마치고 나온 시간은 대략 1시쯤이었다. 동네사람들 여럿이 함께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난 집이 아니라 사무실로 왔다. 그들은 이 시간에 사무실에 가냐며 걱정하고, 차라리 집에가서 자고 일찍 일어나사 하라고 말렸지만, 난 씩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술도 그리 많이 마시지 않았고,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집에 가서 잠들면 누적된 피로 때문에 늦게 일어날 것 같았다. 게다가 워크숍 전에 마쳐야 할 일의 양이 밤을 새도 모자랄만큼 많았다. 마지막 만찬의 기분으로 뒤풀이를 즐겼으니, 이제 일을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밤 새 일했다. 생각보다 집중이 잘 되었다. 아침 해가 밝을 때쯤 졸리기 시작했다. 책상에 엎드려 잠시 졸았다. 얼마 지나지않아 옆 사무실에 사람들이 출근하는 소리를 듣고 깨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 워크숍을 갔다. 고민할 꺼리들이 많이 던져진 시간이었다. 드디어 워크숍 공식 일정을 마친 후 뒤풀이. 참석한 사람들에게 할말이 많았다. 다만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잘 말해야 할지 몰라 조금 망설였다.
조금은 후련했고, 조금은 후회했다.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 의사를 잘 전달하지 못하는구나. 담배 한 대를 피우며 이걸로 만족하자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밤새 마음껏 술을 마셨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준비해 온 맥주가 동났다. 소주가 남아있었지만, 이 시간에 소주를 마시고 싶진 않았다. 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3명. 아침 산책을 나섰다. 이른 아침 쌀쌀한 바람에 술이 확 깼다.
산책에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사실 별로 식욕은 없었지만, 남은 음식을 처리하기 위해 조금 먹었다. 잠에서 깬 이들이 밤새 술마시다니! 대단하다! 감탄하길래, 한마디 해줬다. 이틀째라고!
목요일 밤, 금요일 밤 이틀 연속 밤을 샜다. 하루는 일하느라, 하루는 술 마시느라. 집으로 돌아온 시간은 9시쯤이었다. 씻고 아이들이 깰 무렵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대략 49시간만에 잠이 들었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랜만에, 실로 몇 주만에 겨우 휴식을 맞은 주말, 읽다 말았던 책을 다 읽고, 웹툰 하나를 다 봤다. 웹툰은 청각장애인 아이를 가르쳤던 선생이 나중에 아이를 다시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는 이야기다. 아주 우연히 이 만화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앞 부분만 조금 본 후, 계속 바빠서 못 보다가 이번에 완결까지 봤다. 처음 알았던 때는 완결 전이었는데, 그새 완결되었다.
만화를 보면서 한 아이가 떠올랐다. 군대 다녀와서 등록금과 용돈을 벌어보려고 학원 강사 생활을 했다. 학원 생활은 재밌었다. 난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시간이 좋았고, 뭔가를 가르치는 일도 재미있었다. 학원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가진 모순 때문에 짜증나는 일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나중에 '사교육 시장에 복무하면서 사회 정의를 외치는 모순'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찾지 못해 더이상 학원 강사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5곳의 학원에서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다녔던 학원마다 조금씩 기간과 양상은 달랐지만, 나에게 관심을 가졌던 여학생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그저 자신의 삶에 들어온 익숙치 않은 존재에 대한 관심이라고 여겼다. 적당히 잘 해주면서, 적당한 선에서 잘랐다. 몇몇은 가물가물 얼굴이 떠오르는데,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단 한 아이만 예외다. 이 녀석은 얼굴도 선명하게 떠오르고, 이름도 생각난다. 첫 학원에서 만났던 귀엽고, 반듯한 모범생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으니, 지금은 벌써 서른을 좀 넘겼겠다.
당시 그 학원에는 공부하러 오는 아이들보다는 그저 시간을 때우러 혹은 친구들과 놀기 위해 오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아니 그런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그 학원 아이들의 특징은 그 학원이 위치한 동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부산에서도 소문난 우범지대였다. 학원 수업을 마치고, 행적적인 업무들까지 다 끝내고 퇴근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내려오면, 할머니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다가와서 "총각, 꽃밭에 물 좀 주고 가소~"라고 말을 걸었던, 그런 동네였다. 그리고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이들 중에 어지간히 선을 넘은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는 것을. 그것은 나 역시 학창시절 선을 많이 넘었던 아이였기 때문에 더욱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 수업은 둘 중 하나였다. 딴짓 하거나, 소곤거리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진도를 나가거나, 하나 하나 다 지적하고 바로잡다가 진도를 하나도 못 나가거나. 처음에는 아무리 화가나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이들의 태도를 보고 바로 자세를 바꿨다. 아이들은 웃고 있던 나를 쉽게 생각했고, 그저 무시해도 되는 선생으로 보았다. 그 후 평소에는 웃되, 잘못된 태도에는 엄하게 대했다. 쉽지 않았다. 한 동안은 교실에 들어서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마치 시합에 나가는 권투선수처럼 각오를 다지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모든 반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은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로 다양했다. 하지만 초등부와 고등부 수업은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중등부 수업이었다. 중3 수업이 가장 힘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권투선수처럼 각오를 다지고 들어가야 했던 수업은 중3 중에서도 2개 반 정도였다. 중2와 중1 수업은 그래도 할 만했다. 이 아이들은 아직은 순진한 면이 있었다. 같은 학년이라도 반의 분위기는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반은 도무지 진도를 못 나가게 엉망이었다면, 어떤 반은 아이들이 열심히 들어줘서 힘든 줄도 모르고 진도를 빼기도 했다.
그 아이는 그런 반에 있었다. 비교적 수업 분위기가 좋았던 반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내가 엄하게 꾸짓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으리라. 그 반에서는 자주 웃었고, 분위기가 좋았기 때문에 진도를 빨리 빼고 나면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줬다. 늘 앞쪽에 앉아 집중해서 수업을 들었고, 질문에 대답도 잘 했고, 가끔 농담이나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면 웃는 얼굴로 열심히 들어주던 아이였다.
중간고사 기간이었던가? 아니면 소풍이나 현장학습 같은 것이 겹쳤던 날이었나? 다른 학교는 모두 행사가 있어서 아이들이 못 오고, 그 아이의 학교 학생들만 학원에 온 날이 있었다. 반마다 달랐지만 한 반에는 대략 너댓개의 학교 학생들이 함께 다녔다. 암튼 그 반에 그 학교 아이들은 네 명이었고, 정원 20여명 중에 겨우 4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진도를 나가야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눈치빠른 아이들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대부분의 아이들이 빠졌기 때문에 진도를 나가면 다음 시간이 어려워 질 거라고, 한번 쉬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러고 싶지만, 원장 선생님 눈치가 보여서 그냥 놀 수는 없다고, 조금 진도를 나간 후에 상황을 봐서 판단하겠다고 답했다. 아이들은 조금 뾰로퉁한 태도로 교재를 펼쳤다. 약속대로 진도는 아주 조금만 나갔다. 원장 선생님이 순찰돌 시간이 지났다 싶을때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제부터 자유시간을 줄건데, 밖에서 보기에 그래도 공부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책은 펼쳐놓고, 작게 이야기하거나, 다른 할 일을 하는 건 괜찮다"고 했다. 아이들은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교탁에 기대, 다음 수업을 준비했다.
잠시 후 아이들이 질문이 있다고 했다. 말해보라고 하자 첫번째 질문이 곧바로 "애인있어요?" 였다. 없다고 답하자 아이들이 박수까지 쳐가며 호들갑스럽게 좋아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한 아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옆에 있던 아이가 "얘가 선생님 좋아한대요!" 라고 크게 말했다. 당황한 아이는 안그래도 붉어진 얼굴이 더 빨개지며, 말을 한 아이의 어깨를 툭 쳤다. 내가 웃으며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했던가? 그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아이들은 계속해서 연애 경험을 이야기 해달라고, 키스 경험을 이야기 해달라고 졸랐다. 넘어갈 듯 말듯, 이야기 해줄 듯 말듯, 아이들과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재밌었다.
그 수업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군대가기 전 사귀던 여자친구와 늦은 저녁 공원에서 키스했던 이야기의 서두를 조금 꺼내다가, 당시의 분위기와 주변 묘사만 열심히 늘어놓고는,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겠다고 김새는 발언을 했고, 아이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있다가 실망해서 원성을 높였다.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그때 얼굴이 붉어진 그 아이가 "선생님" 하고 불렀다. 표정이 묘했다. 수줍어하면서도 내 눈길을 피하지 않고,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그 다음에 나온 말은 고백이었다. 좋아한다고. 난 좀 당황스러웠다. 교실에서 그것도 친구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대부분이 결석이고, 친한 친구들만 있었다고 해도. 그리고 평소 그 아이를 눈여겨봐왔기에 그 말이 나를 놀리는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못했다. 다른 아이였다면 아마 그런 의심이 먼저 들었을 지 모르지만.
그 후로 그 아이는 자주 교무실에 놀러와서 인사를 했다. 조그만 쵸콜릿이나 사탕, 음료수를 건네기도 했다. 아이는 늘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고, 내가 반가워하면 뭔가를 슬쩍 건네고 사라졌다. 그 반 담임이었던 여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얘기를 들었던 건지, 아니면 눈치로 알았던 건지 나에게 넌지시 아는 척을 했다. 아이가 선생님을 무척 좋아한다고 잘해주라고 했다.
당시 여학생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던 과학 선생이 있었다. 나보다 2살 아래였던가? 같은 학교 후배였기 때문에 종종 함께 술을 마시곤 했던 그 녀석은 키도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도 잘 생겼다. 학원에서 최고 인기 강사였다.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의외로 수업은 잘 못했다. 목소리도 힘이 없고, 딴 짓하는 아이들을 잘 다루지 못해 어쩔줄을 몰랐다.
그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나를 과학 선생과 비교하며 수업도 재미있고, 흥미있는 역사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는 등등의 이유로 나를 더 좋다고 했다는 묻지도 않았던 이야길 들려주었다. 암튼 나는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잘 몰라서 그저 웃기만 했는데, 그 아이는 속으로는 어땠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나보다 훨씬 차분하게 날 대했다. 수업 시간에도 늘 경청하고, 질문에 빠르게 대답하고, 잘 웃었다.
그 학원에서 마지막 날이 기억난다. 내가 담임을 맡았던 우리반 아이들에게 한 명, 한 명, 진심으로 충고를 했다. 아이들은 대체로 무덤덤했지만, 집에가면 맨날 게임만 했던 남자 아이 하나가 진짜 그만두는거냐고 왜 그만두는거냐고 몇 번 질문을 하기도 했다. 다른 반 아이들에게는 그만 둔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원장 선생님이 원한 거였다. 전임 선생님이 말 없이 그만두는게, 새로온 선생님에게 아이들이 적응하기 더 좋다는 판단에서였다.
우리반 아이들에게만 말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어떻게 알았던 건지 그 아이가 교무실로 찾아왔다. 평소와 달리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 아인 내 눈을 피해 바닥을 쳐다봤고, 옆에 있던 친구가 대신 물었다. "선생님 그만두세요? 왜요? 왜 갑자기 그만두세요?" 난 잠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가 그저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렇다고 형식적인 대답을 했다. 그때 마지막에 그 아이가 "다른 학원에 가셔서도 건강하세요!"라고 했다. 나는 고개 숙인 그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나중에 생각났는데, 그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알려줬던 것 같다. 다른 학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말했나보다. 한참 후에 다른 학원을 다니다 그만두었을 때는 친했던 여학생들이 핸드폰 문자로 종종 연락을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마 핸드폰이 그렇게 널리 퍼지기 전이었던 것 같다. 분명 내 친구들 중엔 핸드폰 가진 녀석들이 종종 있었지만, 당시에 나는 핸드폰이 없었다. 아마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겠지.
가끔 그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생글생글 웃음기 머금은 입매가 떠오르곤 했다. 언젠가 나를 참 좋고 봐주고,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셨던 농민회 형님이 술자리에서 이제 갓 성인이 된 자기 큰 딸이랑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사위삼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그 아이 생각이 났다. 아마 나이가 비슷했을 것 같다.
웹툰 하나 보고 너무 옛 추억에 빠져들었나보다. 만화에서 호가 "성생니"하고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 그 아이가 "선생님"하고 불렀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몇 주 전에 읽기 시작했다가, 한동안 바빠서 손도 못대고 있다가, 이번 주말에 다 읽었다. 소설에 대한 평은 왠지 쓰기 어렵다. 단번에 다 읽었다면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을텐데, 중간에 너무 오래 쉬다 읽어서 맥락이 많이 끊겼다. 다 읽고 나서 조금 이해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너무 쉽게 복수를 이어가는 주인공과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