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를 뚫고


어제 저녁 아이들과 임진각을 다녀왔다.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문득 비 내리는 강가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왔으면 좋겠다 싶었다. 처음엔 바다를 생각했다. 그러다 비 오는 날엔 강이 더 어울리겠다 싶었다. 그럼 어디? 예전에 출판사 다닐 때 파주에 있는 거래처를 오가며 임진각이 여기서 멀지 않겠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임진각을 한번도 가 본적이 없어 거기 가면 바로 강이 보일거라고 생각했다. 오후 늦게 집을 나설 때는 비가 그리 많이 오진 않았다. 사실 비도 오고 아이들도 나가는 걸 귀찮아해서 좀 고민을 했다. 게다가 연휴 한 가운데 끼인 날이라, 나눔카 업체에 놀고 있는 차가 거의 없었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대여존이 많았고, 차도 많이 늘었길래, 쉽게 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하철 역을 기준으로 두세정거장 거리에 10여 개의 대여존 중에 놀고 있는 차가 없었다. 그래서 조금 멀리 이동하더라도 차를 빌릴 것인지를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가지 말자 생각을 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보자고 마음 먹었는데, 누군가 예약을 취소했는지 차가 하나 나왔다. 얼른 예약부터 해놓고, 아이들을 준비시키고, 나도 세수하고 옷을 입었다.


비가 오니 아이들과 나도 모두 방수가 되는 잠바를 입고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아이들은 집을 나서면서 배가 고프다고,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했고, 평소라면 사주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만은 아이들 기분을 고려해 사줬다. 햄버거가 나오는 동안 근처 카페에서 아이들이 버거랑 마실 스무디를 사고,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확실히 아이들과 움직이면 시간이 더 걸린다. 이동시간까지 고려해 시간을 예약했건만, 예약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주차장에 도착했고, 넓은 주차장에서 차를 찾는데 시간이 또 걸렸다. 흘러가버린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오늘 내 목표는 비가 내리는 강을 보는 것. 그걸 위해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


아이들이 안전벨트를 매고 버거와 스무디를 먹기 시작했다. 차가 흔들리고, 움직일 때 스무디 쏟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고, 라디오를 켜고 운전을 시작했다. 이건 경차의 새 모델이던가? 처음 몰아보는 차종. 계기판도 낯설고 뭔가 모르는 게 잔뜩이다. 비가 내리고 흐린 날씨라 라이트를 켜고 운전해야 했는데, 핸들 왼쪽 레버를 아무리 돌려도 라이트가 켜지지 않더라. 요즘 차들은 외부 밝기에 따라 자동으로 라이트가 켜졌다가 꺼지던데, 이 차종도 그런 줄만 알고 그냥 운전했다. 가면서 아무리 봐도 라이트가 들어온 것 같지 않은데, 이상하다는 생각만 계속했다. 와이퍼의 조작도 뭔가 어색했고, 뒤쪽 와이퍼 조작 버튼도 찾질 못했다.


낯선 차 운전에 조금 익숙해지면서 나도 배가 고파 내 몫으로 산 햄버거를 꺼내 한 입 물었다. 작은 아이가 갑자기 "아빠 운전하면서 햄버거를 드시면 어떡해요? 사고 날지도 모르잖아요!" 라고 말한다.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을까? 안전교육 같은 걸 받을 때 그런 말을 들었던 걸까? "아빠는 앞에서 눈을 안 떼고 먹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고 아이를 안심시켰지만, 그닥 안심한 눈초리는 아니었다. 예전에 출판사에서 출장 다닐 때에는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즉 한 시라도 일찍 돌아오고 싶어서) 밥도 식당에서 사먹지 않고, 김밥이나 햄버거 따위를 사서 차를 몰고 고속도로 위에서 먹으며 운전하곤 했다. 김밥이 한 입씩 먹으면서 운전하기 좋지만, 햄버거라고 뭐 그리 어려울 일은 없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차 천장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예전에 자주 운전을 해야했을 때에는 빗길 운전이 그렇게 싫었다. 비가 오면 차가 잘 미끄러지기도 하고, 앞뒤좌우가 잘 안 보여 시야가 매우 좁아진다.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날 빗길 운전을 해야 할 때면, 좁디 좁은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이 든다. 잘 보이지 않아서 원하는 대로 차선 변경도 못하고 무조건 앞으로만 가야하는 듯한 느낌. 어딘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폭우가 내릴 때 운전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첫 기억은 시민단체 활동가였던 시절,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대회가 있어서 선배와 후배 활동가를 태우고 갔을 때였다. 장소가 아마 군산이었던가? 아침 일찍 나섰는데, 그때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을 빠져나가 서해안고속도로에 들어선 후부터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하더니, 경기도 남쪽 어딘가에서 부터 완전 물폭탄 같은 폭우로 바뀌었다.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해놓아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고속도로에 있던 모든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앞 차의 비상등이 깜빡이는 걸 간신히 알아보고 천천히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폭우 때문에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아주 조금 비가 덜 온다 싶을 때(그래도 여전히 폭우)부터 차들이 조금씩 속도를 더 냈다. 시속 30미만이다가 한 60 정도로 속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서해대교를 지난 이후로는 시속 80~100가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는 여전히 내렸지만, 그 순간에 비하면 안 내리는 거나 마찬가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 순간은 정말 악몽이었다. 와이퍼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내리는 비라니! 


두번째 기억은 출판사에 다닐 때, 파주에 있는 거래처를 가는 길이었다. 자유로를 타고 올라가는데,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국도에 접어든 이후로는 폭우로 바뀌었다. 차가 많지 않은 길이라 부담은 별로 없었지만, 자주 다니지 않는 길이라 헷갈려하는 곳에서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게다가 거래처 약속 시간 안에 가야했기 때문에 부담감이 컸다. 순간적으로 확 퍼부울 때는 와이퍼를 최고 속력으로 해놓아도 잘 안 보였지만, 그 순간은 짧았고, 이후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수준은 아니었다. 어딘가 교차로를 지나자 철길 교차로가 나타났다. 갑자기 그 폭우 속에서 노란 비옷을 입은 아저씨들이 빨간 안전봉을 들고 나타나 길을 막았다. 차단막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땡땡땡땡 종이 울리고 멀리서부터 열차의 진동과 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비가 많이 오고 있었음에도 창문을 내리고 비를 맞으며 그 빗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던 아저씨들을 보았다. 그냥 차단막이 내려오기만 해도 차들이 멈추지 않나? 저 폭우 속에 저렇게 뛰어나왔다가 또 들어가야 하나? 저 분들은 어디서 비를 피하고 몸을 녹이다가 다시 또 뛰어나올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다.


마지막 기억은 폭우는 아니고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날이다. 어차피 폭우 때문에 힘든 건 앞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 갇혀서 눈먼 상태가 되는 건 생각하기도 싫을만큼 끔찍한 일이다. 안개도 마찬가지다. 잡지사에 있을 때였다. 잡지 편집위원이었던 선배가 늦은 나이에 장가를 가는데, 결혼식 장소가 전북 고창이라 잡지사 식구들을 태우고 운전해서 갔다. 선배는 시인이었고, 가끔 르뽀 글을 쓰는 작가였고, 형수가 될 분은 소설가였다. 그 쑥맥인 선배가 어떻게 형수를 만났을까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암튼 우린 결혼식 전날 내려가서 장어와 복분자주를 마시고, 선운사 근처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아침에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올라왔다. 갑자기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된 건 고창 시내에서 선운사 쪽으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우리 차는 연식이 오래된 프라이드였는데, 안개등이 따로 없었다. 낡아 빠진 차라서 라이트도 그리 밝지 않았던 터라, 안개가 짙어지니 발 밑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구름 위를 달리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 였다. 비상등을 켜고 속력을 시속 30 미만으로 완전히 줄이고, 천천히 나가야 했다. 난 답답하고 무서웠는데, 동행했던 여성 편집자는 그 안개가 낭만적으로 느껴졌나보다. 갑자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고, 그는 한껏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만 기억난다.


어제는 출발할 때는 비가 많이 오진 않았다. 파주를 가로질러 북으로 달리는 중에 몇 차례 빗줄기가 굵어졌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빗길을 달려 강을 보기 위해 나섰던 것이니. 예전에 자주 운전하던 날엔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신경이 예민해져 무척 싫었는데, 지금 이렇게 빗길을 달리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그리고 일부러 느긋하게 달렸다. 아이들을 태우고 있기도 했고, 별로 서두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차선을 바꿔갔을 정도로 앞차가 답답하게 달려도 그냥 뒤따라 갔다. 속도가 느릴 때, 신호에 걸렸을 때 햄버거를 다 먹어치우고, 커피를 마시며 느긋한 마음으로 빗소리를 즐기며 차를 몰았다.


해가 저물어 어두어질 무렵 임진각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막판에 잠들었기에, 도착했다고 깨우니 좀 짜증을 냈다. 어두워서 뭔가 잘 보이질 않았다. 게다가 비가 다시 거세지고 있었다. 주차장과 도로는 물이 잘 빠지지 않아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다. 아이들과 나는 모두 신발과 바지가 다 젖은 채로 강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아 움직였다. 마침내 전망대를 찾아 올라갔는데, 바람이 엄청 심하게 불었고, 비는 다시 폭우가 되었다. 아이들은 춥다고 건물 안에 머물렀고, 혼자 전망대 겸 옥상에 올라 북녁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저 너머 임진강이 흐르는 곳이라 짐작되는 곳으로 시선을 주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 때문에 우산이 소용이 없어, 그냥 폭우를 다 맞고 서있었더니 온 몸이 다 젖어버렸다. 그래도 좋았다. 하늘은 어두웠고, 비는 쏟아졌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이 시공간이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비 내리는 강을 보고 싶다고 무작정 찾아온 것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덜덜 떨리는 몸을 추스려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작은 아이는 아빠가 한동안 내려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던지, 계단에서 내가 보이자마자 큰 소리를 아빠를 불렀다. 난 계단을 뛰어 내려가 작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아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젖은 머리칼을 넘겨줬다. 아이들을 화장실에 들여보내고, 아빠가 입구 바로 앞까지 차를 가져올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폭우를 뚫고 달렸다. 다 젖어버린 바지가 몸에 붙어 잘 뛰어지지 않았다. 차에 시동을 켜고 앞으로 나가려는데,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기 때문에 라이트를 켜야 했는데, 난 아직 라이트 작동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왼쪽 레버를 밀었다가 당겨보기를 반복했다. 당겼을 때 상향등이 켜졌다. 하지만 레버가 고정되지 않고, 손을 놓으면 다시 어두워졌다. 난 왼손으로 레버를 당겨 상향등을 켠 채로 운전해서 아이들을이 있는 전망대 입구로 갔다.


아이들을 태우고 임진각에서 나오면서 도저히 상향등 레버를 당긴 채로는 운전을 못 하겠어서, 라이트 켜는 법을 찾고 가리라 맘 먹었다. 실내등을 켜고 차근차근 하나씩 운전대를 살폈다. 뒷 유리에 성에가 끼어 보이지 않았기에 뒷 유리 열선을 켜는 법도 찾아야 했다. 뒷 유리 와이퍼 조작 버튼을 먼저 찾고, 열선 켜는 법도 찾았다. 이제 라이트만 찾으면 되는데, 왼쪽 옆에 뭔가 동그란 버튼이 있어서 돌려봤더니 드디어 라이트가 켜졌다. 이걸 못 찾아서 그렇게 헤맸다니! 어이가 없어서 헛 웃음이 나왔다.


돌아오는 길도 느긋했다. 차량이 많지 않은 길이라 천천히 달려도 문제는 없었다. 올때 잠들었던 아이들은 갈 때는 눈이 말똥말똥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돌아오는 길도 재밌었다. 마침 롤링스톤즈 잡지가 선정한 90년대 최고의 노래 100곡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창 좋아했던 음악들, 자주 들었던 음악들이 나와서 좋았다. 어느 교차로에 차가 멈췄는데, 배철수 아저씨가 셰릴 크로의 'If it makes you happy'를 틀어줬다. 나도 모르게 볼륨을 올리고,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셰릴 크로의 2집은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반복해서 들었다. 



이 곡도 좋지만, 'hard to make a stand'도 좋고, 월마트에서 산 총으로 서로를 죽이는 이들을 조심하라는 가사 때문에 월마트에서 음반 판매를 거부해, 결국 흥행에 참패하게 만든 곡 'love is goodthing'도 정말 좋다. 



배철수의 음악캠프가 끝날 때쯤 우리도 차를 빌렸던 주차장 근처에 도착했다. 네비로 정확하게 그 주차장을 찾아 찍을 수 없어서 근처 골목에서 좀 헤맸다. 일방통행에서 거꾸로 들어갔다가 비켜주기도 했고, 길이 이상하게 꼬여 있어서 다시 큰 길로 나갔다가 다른 골목을 찾기도 했다. 간신히 주차장 주 출입구 앞에 도착했는데, 철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하지? 난 이제 차를 반납해야 하는데, 주차장이 잠겨 있으면 어떻게 들어가지? 관리하는 아저씨도 퇴근해서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뒷문이 있는데 내가 못 본 걸까? 차를 몰고 주차장 근처를 한 바퀴 돌았는데, 찾지 못했다. 반납 예정시간이 이제 거의 다가왔다. 30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한데, 그러려면 돈을 또 더 내야 한다. 다급했다. 우산도 안 쓰고 내려서 관리실 근처를 돌아보는데, 누군가 주차장 안쪽에서 담배를 피우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큰 소리로 물었다. 거기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그는 그는 친절하게 뒤쪽에서 들어오는 골목 입구를 알려줬다. 빠르게 차를 몰아 그 골목으로 들어왔다. 차를 주차시키고, 아이들에게 짐을 챙겨 내리게 하고, 반납 버튼을 누르고 보니 딱 반납 예정시간이었다. 반납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는 1분 후에 왔다. 휴~ 가슴을 한번 쓸어내리고 아이들 손을 붙잡고 나왔다.


근처 마트에서 먹고 싶은 걸 잔뜩 하고, 와인도 한 병 사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큰 아이가 갑자기 모 뷔페식당 이름을 보고 가고 싶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큰 아이의 말을 듣고도 잠시 망설였다. 비싼 가격 때문이기도 했고, 온 몸이 다 젖은 이 상태로 거길 가야 하나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맛있는 것, 먹고 싶은 것 사서 집에가서 씻고 편하게 먹을면 안될까? 아빠가 다 사줄게." 이렇게 옷도 신반도 다 젖은 찝찝한 상태로 먹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 물었는데, 아이는 그래도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 오늘은 원하는 대로 해주자 싶었다.


아이들은 신나서 이것저것 먹었다. 난 사실 그리 입맛이 땡기는 음식이 없었다. 회 종류를 비롯한 해산물은 거의 없었다. 말라버린 훈제연어가 유일했다. 할라피뇨가 들어간 매운 파스타와 치킨을 비롯한 몇 가지로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아이들 물을 떠 주려고 구석으로 갔다가 와인통을 발견했다. 돈을 좀 더 내면 와인을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고 써있었다. 직원에게 물었더니, 영수증 한 장을 더 발급하고, 내 팔목에 흰색 테이프를 감고, 와인잔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에 화이트와인을 조금 따라 마셨는데, 무척 달았다. 그 옆에 있는 레드와인도 달았다. 곧바로 후회했다. 이렇게 달기만 한 와인인 줄 알았으면 안 마실 걸 그랬다 싶었다.


달디 단 와인을 마시며 와인을 좋아하는 이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곧바로 답이 왔다. 달지 않고 드라이 한 와인이 있으니 그걸 마시라고 했다. 내가 찾지 못했다고 답을 했더니 통이 두 개라고, 하나는 달고, 하나는 드라이한 거라고 했다. 남은 와인을 한번에 마시고 다시 가보니 과연 그렇더라. 처음엔 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글씨로 설명을 다 붙여 놓았더라. 멜롯 어쩌구 하는 드라이 한 맛의 와인을 잔 가득 따라와서 마셨다.


와인을 서너잔 쯤 마셨는데,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방송이 나왔다. 나는 빠르게 잔을 비우고 또 와인을 가득 채워왔다. 이미 배가 불러 다른 안주는 못 먹겠고, 할라피뇨 두 세 조각과 올리브 서너조각만 담아왔다. 아이들은 이미 달기만 한 케익 조각이나 쿠키 종류를 먹고 있었다. 딱 문 닫는 시간까지 와인을 다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젖은 옷을 벗으며 빨래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하루를 잘 보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아이들이 임진각이란 단어를 듣거나 보면, 어제를 떠올리겠지. 햄버거와 스무디와 폭우와 바람과 추위 그리고 맛있었던 음식을 기억할 지 모른다. 아빠가 문득 비 내리는 강을 보고 싶어서 다녀왔다는 말은 혹시 기억할까? 어쩌면 다 잊어버리고 왜 아빠가 우릴 비 맞히고, 추위에 떨게 했을까 원망만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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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10-0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와 와인에 방점 총총 :)

감은빛 2016-10-08 16:37   좋아요 0 | URL
비와 와인. 참 잘 어울리는 느낌이예요. ^^
 

흰머리가 늘었다


요즘 부쩍 흰머리가 늘었나보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흰머리를 지적한다. 오래전부터 왼쪽 귀 위쪽에 흰머리가 있었다. 오른쪽에는 많지 않은데, 왼쪽은 자꾸 늘어났다. 재작년이었던가? 부쩍 늘어난 것이 눈에 띄더니, 작년에는 나도 놀랄만큼 늘었다.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어차피 늙어가는 처지에 흰머리 좀 있다고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후배들은 염색 좀 하라고, 늙은이처럼 그게 뭐냐고 말한다. 어제 오랜만에 마주친 사람은 나보고 염색을 했냐고 물었다. 급한 일이 있어 제대로 대꾸도 못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그 말이 좀 이상했다. 분명 흰머리를 보고 말을 했을텐데, 그 말은 왼쪽 귀 근처만 흰색으로 염색했냐고 묻는 말이었나? 멋 부리려고 일부러 그 부분만 흰색으로 염색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런데 그 정도로 내 흰머리가 멋있나? 아니 그냥 우연히 마주쳤는데,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상황에서 흰머리가 눈에 띄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염색했냐고 말이 나왔을지도 모르지. 별것 아닌 말 한 마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시비


며칠 전 토론회에서 만난 선배가 툭 말을 던졌다. "넌 여기 무슨 일로 왔냐?" 10년 넘게 알고 지낸 사이지만, 진짜 정이 안가는 사람이다. 속으로 '이 인간 또 시비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동안 잊을만하면 꼭 한번씩 만나는 이런 인연은 대체 뭐지? 왜 이런 인간을 계속 마주치며 살아야 하는 거지? 왜 난 급이 안 맞아서 당신이랑 같은 자리에 있으면 안 되나? 나랑 같은 자리에 있어서 불쾌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딱 대놓고 하던가? 무슨 일로 왔냐고? 넌 무슨 일로 왔어? 아우 진짜! 확 들이받아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래 뭐가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아,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받아쳤어야 했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어색한 웃음만 지었던 나 자신이 싫은 거다. 바보같이 왜 웃고 있었던 걸까?


이 놈의 불치병


며칠 전 회의에 참석했는데, 낯선 여성이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인사를 했다. 너무 반갑다고, 여기 계시냐고 물었다. 난 당황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일단 반갑다고 답을 하고, 이 여성을 어디서 만났던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입은 반갑다는 말을 내뱉었으나, 얼굴 표정과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마 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긴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어디서 어떻게 만난 인연이었을까를 고민했다. 어딘가 회의 자리에서 마주쳤을 것 같은데, 그 반가워하는 말투를 보면 그냥 단순히 스쳐갔던 건 아니었겠지? 뭔가 나와 공감대가 있었던 걸까? 그런데 난 왜 기억을 하지 못할까?


회의 시간 내내 그가 발언할 때마다 유심히 들으며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그리고 긴 회의가 끝나갈 때 즈음 기억이 났다. 우리 동네 녹색당 총회에 참석한 분이었다. 그날 처음 나왔고, 이후로 녹색당 모임에 나온 적이 없으니 딱 한 번 만났었다. 올해 총회였다. 그 총회는 내게 여러모로 힘든 행사였다. 나는 창당하기 전부터 운영위원을 맡아 여러가지 일을 함께 했다. 창당 후 지역에서 당원모임을 결성할 때, 당연한 듯이 운영위원이 되었고 우리 지역 녹색당을 대표해 수많은 회의에 참석하고, 여러 행사에서 발언을 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많은 일들을 해왔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나는 좀 많이 지쳐있었다. 돈을 많이 벌지 못하지만, 생계를 위한 활동이 따로 있는 입장에서 녹색당 활동은 제 2의 직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회의를 하고, 회의 결정사항을 실행하고, 연대활동을 해야 했다.


언젠가 당내에서 누군가와 갈등을 겪을 때, 그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욕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내가 지역에서 독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지역을 대표하는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제발 부탁이니 내가 운영위원을 사퇴하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도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내가 계속 해왔던 일이라서, 사람들이 내가 하길 바라기 때문에 해왔다. 작년 연말부터 올해 초 총회를 준비하면서 이번에는 반드시 맡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분명 당원들은 또 맡아주길 바랄 것이다. 달리 할 사람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냐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거절해야 했다. 그 총회는 그런 자리였다. 그걸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이 너무 어려웠다.


그는 아마 그래서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도 활동가였고, 딱 보기에도 경력이 많고 일을 잘 할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처음 나온 총회에서 아주 예리한 지적과 질문을 던졌다. 당원들은 그에게 운영위원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본인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서 일이 너무 많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회의 도중에 그 사실이 기억났다. 그 회의에서 나는 10분 동안 발표를 맡았는데, 준비한 내용을 설명하다보니 정해진 시간을 훌쩍 지나 거의 15분 가량을 떠들었다. 당시 총회에서도 나는 당원들에게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했다. 아마 내가 진행한 세 번의 총회 중에 가장 비효율적으로 시간만 질질 끌었던 총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아마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저 사람은 정해진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구나 라고.


하늘과 땅


엇그제는 좋아하는 옷을 꺼내 입었다. 황토색 면바지는 색깔 때문이 아니라 내 몸에 꼭 맞고, 편해서 좋아한다. 2년 전쯤 후배가 샀다가 작아서 입지 못하는 옷이라고 해서 내가 입어봤더니, 나에게 꼭 맞았다. 하늘색 티셔츠는 색감이 너무 좋아서 아끼는 옷이다. 정장을 입지 않기 때문에 조금 격식을 갖춰야 하는 날에는 칼라가 있는 티셔츠를 입는 편인데, 이 옷의 칼라와 단추 디자인을 좋아한다. 하지만 한 사오년 동안 이 옷을 입지 못했다. 몸에 붙는 옷이라 배가 나오면 보기 싫기 때문이다. 어느날 여러 사람들과 야외에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실 때 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고기를 잔뜩 먹고 배가 뽈록 나온 나를 보고 누군가 비웃었다. 아, 진짜 티셔츠 아래단이 뽈록 나온 배에 걸쳐 있는 모습이 끔찍하게 보기 싫었다. 그 후로 이 옷은 계속 옷장 안에만 있어야 했다.


작년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뱃살이 좀 없어졌다 싶었을 때, 이 옷을 꺼내 입어봤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아랫배에 아직 남은 살이 만져지니, 그때 그 비웃음이 떠올랐다. 다시 옷을 벗어 옷장에 쳐박아두었다.


올해는 운동 보다 탄소화물을 줄이는 식사 덕분에 뱃살이 많이 없어졌다. 드디어 자신있게 이 옷을 꺼내 입을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입지 못하고 있던 옷이 꽤 많았다. 예전에 즐겨입었던 몸에 딱 붙는 티셔츠와 민소매 셔츠들. 그 중에서도 아끼는 옷은 밴드 블랙홀에게 받았던 티셔츠다. 그 옷은 받고 나서 몇 번 입어보지도 못했는데, 배가 나오기 시작해서 계속 옷장에서 잠자고 있었다. 가끔 옷을 찾다가 그 옷을 비롯해 입지 못하는 옷들이 보이면, 한숨이 나왔다. 올해는 자신있게 그런 옷들을 입고 다녔다.


암튼 엇그제 그렇게 좋아하는 하늘색 티셔츠를 입고 출근했다가 회의에 참석해서 사람들을 만났다. 한 젊은 여성 활동가가 내게 "땅과 하늘의 형상화하는 스타일로 맞추셨군요. 역시 자연을 사랑하는 분이세요."라고 했다. 아니 정확히 저 문장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의미였다. 순간 좀 당황해서 뭐라 반응을 해야할 지 몰랐다. 이건 분명 뭔가 놀리는 느낌인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여성은 평소에도 나를 만나면 놀리듯 말을 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어떤 의미인지 잘 몰라서 번번히 제대로 대응을 못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길 주고 받다가 그가 생각보다 더 어리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한때 일했던 단체에 그도 일했었는데, 나보다 10년이나 후배였다. 교육기수로 몇 기냐고 물었다가 앞자리가 예상치 못한 숫자가 나와서, 내가 이렇게 늙었구나 싶었다.


지긋지긋하게 싫다! 내가!


어제 중요한 설명회를 마치고 후련한 기분으로 뒤풀이를 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백남기 어르신 부검 영장이 발부되었단다. 다들 화가 나 있었고, 당장이라도 서울대 장례식장으로 달려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황당하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설명회 준비를 하느라 이틀동안 밤을 샜기 때문에 많이 피곤했고,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술이 많이 들어갔다. 다행히 조건부 영장이라 당장 집행을 하진 않을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 조건부라는 것이 무척 치사하고 더러운 짓이라는 것에 대해 토론했다. 유가족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부검을 하겠다고 했고, 부검에 유가족이 들어와 참관하라고 했단다. 부검하는 장면을 모두 녹화할 거라고 했단다. 애초에 부검을 해야할 상황이 아님에도 말도 안되는 영장을 발부하면서, 유가족이 원하는 이라는 단서를 달아버림으로써 이 부검을 유가족이 원하는 것처럼 아니 원해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그럼 유가족이 끝까지 원하지 않는다면? 그럼 뭔가 캥기는 것이 있어서 응하지 않는 거라고 억지를 부리며 강제 집행을 하겠지.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317일 동안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 계시던 분이 돌아가셨는데, 부검을 한다고? 이렇게 사인이 명확한데 왜 부검을 해야하나? 그 인간들은 머리가 없나? 지능이라는 것이 없나? 그렇게 멍청한 인간이 어떻게 판사가 되었나?


일부 사람들이 서울대병원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소주 한 병을 들이부었다. 그래. 마셨다가 아니라 들이부었다가 맞는 표현이다. 그리고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었다.


아침에 해야할 중요한 일 두개를 놓쳤다. 서너개쯤 맞춰놓은 알람도 나를 깨우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찍혀있었다. 부랴부랴 씻고 집을 나섰는데, 도무지 술이 깨지 않았다. 시청에서 협약을 맺고 도장을 찍는데, 공무원에게 내가 아직 술이 덜 깼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공무원이 내게 도장을 조금 삐뚤게 찍었다고 한 소리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이러고 살고 있나? 늘 뭔가에 쫓기듯 살고 있는 내가 싫었다. 늘 뭐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늘 술에 쩔어 살고 있는 내가 싫었다. 지긋지긋하게 싫다! 내가!


어제가 마감이었던 기사 하나를 오늘로 미뤄두었다. 이제 그 기사를 써야한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아직 술이 덜 깬 머리를 굴리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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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9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9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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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런 이야기


언제였던가, 아직 한참 더웠던 어느 날 동네 합창단 형들과 술을 마셨다. 형들은 동네 어느 허름한 라이브카페로 날 데려갔다. 그 자리엔 합창단에 아직 들어가지 않은 사람이 둘이었다. 나와 또 한 사람. 그는 노래방에 가면 밤새 마이크를 놓지 않는 사람, 노래를 제법 잘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누구나 인정할만큼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 형들은 그 전부터 우리 둘에게 합창단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난 우선 노래를 그리 잘 하지 못하고, 합창을 연습하는데 투자할 시간이 없었으며, 연령대가 높은 그 합창단에 들어가 막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나보다 어린 30대 남성과 여성이 있지만, 불과 몇 달 전만해도 그렇지 않았다.


암튼 형들은 라이브 카페에서 우리 둘의 노래 실력을 시험해보고, 합격하면 들어오라고 했다. 그게 시험이던 아니던, 분위기에 취해 우린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멋지게 잘하는 그는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합창단 사람들도 노래를 불렀다. 유일하게 나보다 어린 30대 친구는 이적의 <하늘을 달리다>를 불렀던가? 엄청난 가창력이었다. 남자가 들어도 반할 것 같은 목소리에 고음도 어마어마했다. 형들도 좋은 노래들을 잔뜩 불렀다. 시간이 많이 지나, 이젠 그게 어떤 노래들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도 분위기에 못 이겨 노래를 불렀다. 뭘 불러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18번이라 부를 만큼, 노래방을 갈 때마다 부르는 곡이 두세곡 가량 있는데, 왠지 그날 따라 자신이 없었다. 다들 노래를 잘 하는 사람들이니, 나도 잘 부르고 싶었다. 그리고 남들처럼 돋보이는 곡을 부르고 싶었다. 그런데 딱 이거다 싶은 노래가 없었다. 내가 잘 부를 수 있으면서, 남들이 듣기에 좋은 곡.


빨리 곡을 고르라고 독촉이 올 무렵, 오래전 가끔 불렀던 곡, 이 분위기를 이어가면서도 나쁘지 않게 부를 자신이 있는 곡이 떠올랐다. 이승환의 <그냥 그런 이야기>였다.




카스트라토? 카운터테너?


우리 팀이 한창 무대를 독점하고 난 후, 아저씨들이 몇 명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뒤를 이어 무대를 장악했다. 드럼과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하면서,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그 중 한 아저씨가 생글생글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허름한 청바지를 입었다. 이건 편견일지 모르지만 어디 막노동이라도 하다가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야말로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가성으로 블론디의 <마리아>를 불렀는데, 그 깨끗한 고음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어떻게 저 아저씨가 저런 미성의 고음을 낼 수 있을까? 게다가 그는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아주 쉽게 고음을 냈다. 마치 장난기 넘치는 표정인 듯 생글생글 웃으며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를 보며 우린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 중 최고는 조관우 인 줄만 알았다.




우린 모두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노래를 들었던 모든 이들은 기립 박수를 쳤다.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앵콜곡을 불렀다. 유감스럽게도 다음 곡이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전히 가성으로 높은 음역대의 여성 가수 노래를 불렀다. 두번째 곡을 들으면서 하나 깨달았던 건, 그가 맑고 깨끗한 가성으로 고음을 쉽게 올리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고, 음을 길게 지속하지는 못하더라는 거였다.


한편 나는 그날 이 노래를 들을 때까지만해도, 이 곡을 [미녀는 괴로워]에서 김아중이 부른 곡으로만 알고 있었다. 즉 블론디의 원곡을 몰랐다. 나중에 김아중의 곡과 블론디의 원곡을 찾아 들으니, 그 아저씨의 노래까지 셋 다 각각의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래도 가장 좋은 건 블론디의 원곡인 것 같다.


시간이 조금 지나 다시 우리 팀이 무대를 장악했다. 이번엔 모두 팝송을 불렀다. 대부분 올드팝 위주였다. 난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이클 런스 투 락의 <25미니츠>를 골랐지만, 곡을 찾을 수 없어 부르지 못했다. 대학시절 여자 후배를 앉혀두고 기타를 튕기며 불렀던 곡이었지만, 그리고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다시 불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언젠가 이 노래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엔 자주 들었던 팝송 가사를 모티브로 단편소설을 써보는 시도를 종종 했다. 테이크 댓의 <백 포 굿>이라던가, 컬러 미 배드의 <와일드 플라워>도 그랬다. 나중에 가장 소설로 옮겨 보고 싶은 노래는 로렌 크리스티의 <바넷사스 파더>였다. 다른 곡은 몰라도 이 노래는 언젠가 꼭 시도해 보고 싶다.



암튼 그날 내가 불렀던 <그냥 그런 이야기>는 합격점을 받았다. 합창단에 꼭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난 그냥 웃고 말았다. 솔직히 합창이라는 것이 들으면 아름답지만, 내가 그 속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오랜 시간 연습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생각 났던 건, 잠시 몸 담았던 노래패에서 노래를 배우며 힘들었던 기억이었다. 발음이 좋지 않다고, 발성이 좋지 않다고, 너무 기교를 섞었다며, 음을 끝까지 제대로 내라며, 계속 선배들에게 혼나던 기억 밖에 없었다. 단 한 번 올랐던 무대에서 첫 음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가 계속 남아 그 다음 곡도, 또 그 다음 곡도 계속 실수를 연발했던 최악의 기억까지 떠올랐다.


비록 합창단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어느새 친해진 형들과 맘 편히 술을 마시는 일은 즐겁다. 또 언젠가 그 허름한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를 듣고 또 부르며 술잔을 기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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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27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환 1집 수록곡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텅빈 마음`입니다. 진짜 서글프거나 가슴이 허한 느낌이 드는 날에 이 노래를 들으면 울컥합니다. ㅠㅠ

감은빛 2016-09-27 13:18   좋아요 0 | URL
<텅빈 마음> 참 좋은 노래죠.
그 노래도 오래전에 기타 치면서 자주 불렀던 곡이예요.

이승환 1집에서 <가을 흔적>과 <눈물로 시를 써도>를 참 좋아했구요.
<좋은 날>도 자주 불렀던 곡이예요.
그 특유의 꺾기 창법을 흉내내면서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
 


혼자 남는 법


아이들을 데려다 주고 돌아온 밤, 혼자 남는 밤은 허무한 기분이 든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 어두운 집안에 불도 켜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혼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본다. 외로움과 허무함이 견딜 수 없이 밀려들면 다시 집을 나서 술을 사온다. 취해버리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혼자가 되기 전에는 이렇게까지 허무하고 외로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땐 그저 오래전 혼자 자취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냥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별로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때도 일주일에 삼 일은 아이들과 함께 지냈고, 나머지 시간은 밖에서 모두 잠들때까지 술을 마시다가 들어갔다. 어쩌다 술자리가 생각보다 빨리 끝나면, 괜히 일찍 들어갔다가, 아직 잠들지 않은 애들 엄마와 마주치는 것이 싫었다. 그 어색한 순간이 견디기 힘들었다. 혹 술을 함께 마실 사람이 없으면, 혼자라도 술을 마시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갔다.


그래, 지금도 일주일에 삼 일은 아이들과 지낸다. 나머지 시간은 거의 술이다. 그건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이들이 돌아간 밤이 되면 이렇게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될 줄은 몰랐다.



마로니에 2집 테이프를 즐겨 들었던 때는 90년대 초였다. 좋아했던 노래는 A면 첫 곡이었던 <안개꽃 꽃말은 슬픔>과 B면 첫 곡이었던 <혼자 남는 법>이었다. 둘 다 황치훈의 노래였다. 그땐 아직 아픈 이별을 몰랐을 때였을텐데, 혼자 가슴 아픈 이별을 상상하며 <혼자 남는 법>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딱 이 노래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곡이 없었던 이 테이프는 박학기나 윤상이나 공일오비의 테이프에 점점 자리를 내주고 먼지가 쌓인채 잊혀졌다. 그런 이 노래를 다시 떠올렸던 건, 이 집으로 이사 온 첫 날이었다.


무척 더운 날이었다. 함께 이사짐을 옮겨준 후배와 나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책장 세 개 외에는 가구도 하나도 없었고, 그저 짐이라곤 옷과 책 밖에 없었다. 아니 이불 몇 개를 챙겨나오긴 했구나. 책이 워낙 많아서 생각보다 짐을 옮기고 정리하는데 오래 걸렸다. 아니 책 정리는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제목도 보지 않고 꽂아두기만 했음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책장에 다 들어가지 못한 책들은 여전히 끈에 묶인 채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고생한 후배에게 고기와 술을 대접할 생각이었다. 짐을 대충 부려놓고 지칠대로 지쳐 고기집으로 가려는 때, 애들 엄마는 애들을 맡기고 약속이 있다고 갔다. 고기와 술로 배를 채우고 후배는 돌아갔고, 아이들을 다시 애들 엄마에게 데려다주고 혼자 텅 빈 방으로 돌아온 밤, 낯설기만 한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났다. 가스도 아직 연결하지 않아 뭘 해먹지도 못했던 밤, 편의점에서 소주 두 병과 컵라면을 샀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조심조심 가져와 소주를 마셨다. 가구 하나 없는 방에서 바닥에 앉아 라면을 씹고, 소주를 들이키며,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검색해 이 노래를 들었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이제 난 정말 혼자구나.


손빨래


다른 필요한 물건들은 하나둘 장만했지만, 세탁기만은 사지 않았다. 일단 돈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화장실이 좁아 세탁기를 놓고 나면 너무 불편할 것 같았다. 오래전 혼자 살 때에도 세탁기는 없었다. 그땐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번씩 손빨래를 했다. 여름 옷은 뭐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겨울 옷은 좀 힘들긴 했다. 가끔 빨래를 커다란 가방에 가득 담아, 부모님 댁에 가서 빨래를 해오기도 했다. 겨울에는 자주 그랬던 것 같다.


세탁기를 사주겠다는 선배가 있었다. 내게 뭔가를 해주고 싶어했다. 난 여름이라 아직은 괜찮다고 거절했다. 나중에 여름이 가고 날이 추워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하는 손빨래는 재밌었다.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였다. 비누 거품을 잔뜩 내고, 여러번 헹궈 깨끗해진 빨래를 보면 기분이 좋았다.


손빨래에 다시 익숙해지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지만, 곧 다시 예전의 노하우를 기억해냈다. 흰 옷, 비교적 깨끗한 옷부터 더러워진 옷, 짙은 색깔의 옷 순서로 비누칠을 하고, 대야에 넣어 거품을 잔뜩 내고 나서, 다시 같은 순서로 헹구기 시작한다. 대야에 받은 물이 더러워질 때까지 순서대로 하나씩 옷을 넣어 헹군 다음 꼭 짜고, 다시 깨끗한 물을 받아서 헹구고 짜기를 반복한다. 더이상 비눗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헹구면 마지막으로 물기를 짜내고 거실(이라기 보다는 개수대가 놓인 통로라고 불러야겠지) 바닥에 던져두고, 그 다음 순서의 옅은 색 옷부터 다시 헹구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 물을 최대한 적게 쓰고, 시간도 훨씬 적게 들여 빨래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자고 가는 날엔 아이들의 속옷과 양말이 빨래더미에 쌓인다. 아이들의 겉옷은 엄마 집에 가져가서 빨아야 한다고 말한다. 속옷과 양말은 금방 빨수 있지만, 겉옷은 힘들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반드시 반 바지를 입어야 한다. 비가 오는 줄 모르고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가, 다 젖은 그리고 흙탕물이 잔뜩 튄 청바지를 빨아야 했던 날엔 진짜 힘들었다. 그 옛날 군대에서 군복 빨던 때가 생각났다. 요즘은 군대에도 세탁기가 있다던데, 당시엔 사병이 세탁기를 사용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두꺼운 야전 상의도 모두 손빨래를 해야 했다.


빨래는 거의 밤에 했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크게 켜놓고 한 두세시간 빨래를 하고나면 거의 녹초가 된다. 하지만 깨끗해진 빨래를 널어놓고 나면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느껴진다. 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만큼 지쳤지만, 기분은 좋은 상태로 잠들 수 있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지쳐 쓰러질 수 있으니 빨래는 좋은 것이구나. 하지만 이 짓도 하루이틀이지. 이젠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슬슬 긴 바지와 긴 팔 상의가 빨래로 나올 때가 되었다. 날이 더 서늘해지기 전에 세탁기를 사야 할 때가 되었다 싶다. 다음 달 중순 다시 이사를 하고 나면 꼭 세탁기를 사야겠다.


가사노동


집안 일은 귀찮고 힘들다. 밥과 반찬 만들기, 설겆이, 청소, 빨래 어느 것 하나 편한 일이 없다. 아이들이 오지 않는 날, 혼자인 날은 그런 집안 일을 최소한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밥 그릇에 반찬을 함께 담아 먹기도 하고, 다행히 땀을 많이 흘리지 않은 날엔 냄새를 맡아보고 괜찮겠다 싶은 옷은 창가에 걸어두었다가 다시 입기도 한다. 아니 혼자인 날은 밥을 잘 해먹지 않는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밖에서 먹고, 저녁도 주로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운 후에 돌아온다.


아이들이 오는 날엔 어쩔 수 없이 밥도 해야하고, 반찬과 국도 만들어야 한다. 설겆이도 훨씬 더 많이 나온다. 빨래해야 할 옷도 더 많다. 어떤 날엔 기분 좋게, 빠르게 집안 일을 해내지만, 대개는 귀찮은 마음에, 하기 싫은 마음에 일을 미룬다. 더이상 꺼낼 그릇이 없거나, 더이상 신을 양말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마음을 먹고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이사를 나가기 위해 집을 내놓았을 때에는 꼬박꼬박 설겆이도 하고, 빨래도 해야 했다. 청소도 자주 해야 했고, 쓰레기도 자주 비워야 했다. 매일 아침 이불 속에서 몸만 빠져나와 씻고 출근했지만, 이젠 낮에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 집을 보러 와서, 이불이 그대로 펴진 방을 보고 욕을 할 것 같았고, 개수대에 쌓인 그릇들과 화장실 입구에 쌓인 빨래감을 보고 욕을 할 것 같았다. 


매일 끝없는 집안 일을 하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어차피 누군가 대신할 사람도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니 마음을 고쳐 먹고, 기분 좋게, 미뤄두지 말고 집안 일을 하자. 그게 내가 나를 돕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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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7 08: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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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7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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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오는 날 다음날이 휴일이면, 아침에 일어나는 게 행복하다. 만약 휴일이 아니라면, 그 때는 전쟁이다. 아이들을 깨우고, 준비물을 챙기게 시키고, 또 내가 챙겨주고, 씻으러 들어가라고 독촉하다가, 정 안 되면 짜증내는 아이를 꼭 안고 달래가며 화장일 입구까지 데려가야한다. 간단히 먹을 걸 준비해주고, 나도 씻고 출근 준비를 해야한다. 아이들은 아침에 멍하게 있는 시간이 많다. 양치나 세수를 하다가도 멈춰있고, 머리를 빗다가도 멈춰있고, 먹다가도 멍하니 가만있다. 그럴때마다 난 점점 언성이 높아지고 급기야 화를 내는 날도 있다. 다행히 이젠 큰 아이가 제 할일은 대부분 알아서 하는 편이라 한결 편해지긴 했다.

오늘처럼 휴일 아침이면 한결 여유롭다. 나도 아이들도 맘껏 이불 위에서 뒹굴며 늦잠을 잘 수 있다. 난 밤에 막 잠든 아이들의 얼굴과 아침에 아직 깨기전 아이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정말 좋다. 새삼 이 아이들이 언제 이만큼 자랐나 하고 신기하다 싶기도 하고, 이렇게 사랑스럽고 천사같은 얼굴이었나 싶기도 하다. 가만히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와 뺨에 입맞추고 꼭 껴안으면 왠지 벅찬 감정이 솟구친다.

오늘은 아마 7시 무렵 깼다. 아이들이 다 이불을 차고 자고 있어서 다시 이불을 덮어주고, 차례로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앞서 말한것처럼 이마와 뺨에 입맞추고, 한번씩 껴안은 후에 방을 나왔다. 확실히 가을이다. 맨 다리가 약간 쌀쌀한 느낌이다. 화장실을 다녀와 노트북을 켜고 중국어 강좌를 잠시 봤다. 왠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작은 아이 곁에 누웠다. 녀석의 고요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울 것 처럼 소리를 냈다. 악몽을 꾸는 건가? 난 급하게 아이를 껴안고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아이의 귀에 낮은 음성으로 ˝괜찮아. 아빠가 옆에 있어. 아빠가 지켜줄게.˝ 라고 속삭였다. 녀석은 잠시동안 더 인상을 쓰면서 살짝 몸부림을 치다가 곧 내 팔과 다리에 매달렸다. 다시 표정이 평온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아이를 안고 누워있었다. 이런 시간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하며 누워 있었다.

밖에서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크게 나서 정신이 들었다. 아이들 아침 먹일 준비를 해야했다. 냉장고엔 김밥과 주먹밥이 있어서 밥은 하지 않아도 된다. 간밤에 행사장에서 남은 주먹밥을 잔뜩 가져왔고, 그 전날 밤엔 또 다른 행사를 마치고 남은 김밥을 가져왔었다.

애호박과 두부를 썰어서 묽은 된장국을 끓이고, 남은 애호박은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을 입혀 부쳤다. 냉장고에서 꺼낸 김밥도 계란을 입혀 부치고, 노랑과 빨강 파프리카를 썰어놓았다. 주먹밥을 어떻게 데울까 고민하다가 그건 그냥 먹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알라딘에 글을 쓰려는데 갑자기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예전에도 자주 그런 일이 있어서 모뎀과 공유기 전원을 껐다 켰는데, 그래도 안 되었다. 또 한 번, 이번에는 끄고나서 한 5분의 시간을 두고 다시 켰다. 그래도 되지 않아서 인터넷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신호가 가다가 멈추는 현상이 있다고 일단 복구신호는 보냈지만 기사가 방문해서 봐야 한다고 했다. 내일 방문해도 되냐 묻길래 제일 바쁜 월요일이라 안 된다 하고 화요일 오전으로 약속을 정했다. 그럼 이제 화요일까지 인터넷은 휴대폰 엘티이 밖에 못 쓴단 얘긴데 난 데이터 양이 적어서 테더링을 할 순 없다. 노트북으로 쓰던 글을 포기하고(임시저장 되어 있겠지?) 폰으로 북플을 열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난 스스로 재미없는 사람이라 여긴다. 매사에 진지하고 농담이나 장난은 애들하고 있을 때 외에는 잘하지 않는다. 회의, 토론회, 간담회, 기자회견, 강연회 등 다양한 행사 진행을 맡아왔지만, 파티와 같은 흥겹게 노는 자리의 진행은 스스로 잘 안 어울리더라는 생각을 했다. 몇 번 해봤는데, 재미없었다는 평을 들었다. 어제의 파티 진행도 그래서 안 하고 싶었다. 아이들과 같이 가야하는데, 아이들을 돌봐야 하므로 안된다고 거절했다.

작년에 작은 도서관 문학의 밤 진행을 하고 있었는데, 작은 아이가 나에게 와서 안아달라고 하더니, 곧 내 다리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웃었고, 난 말을 멈추고 아이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아이는 더욱 꽉 매달렸다. 어쩔수 없이 아이를 왼팔로 안아 올리고, 오른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진행했다. 큐시트를 왼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볼 수 없었다. 기억에 의존해 즉흥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아이들을 데려가야하는 행사에선 아무것도 맡지 않으려고 애썼다.

작은 아이는 아마 낯선 어른들만 가득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놀아줄 수 있는 언니가 만화책에 푹빠져 반응이 없고, 만화책이나 그림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도 글씨를 못 읽어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언니가 안 놀아주니 아빠를 찾았을텐데, 아빠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떠들고 있었으니 아빠도 놀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다시 혼자 그림책을 보며 시간을 보냈겠지.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도저히 못 견딜 지경이 되었을테고, 무조건 아빠한테 안아 달라고 했을 것이다. 혼자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보려고 애썼을 아이가 가여웠다.

하지만 행사 준비 회의에선 달리 진행을 맡아줄 사람이 없었다. 회의는 소강상태로 길어졌고 다들 지쳐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내게 맡아달라는 간곡한 요청이 왔다. 마지막으로 고민이 되었다. 공간이 달라서 어쩌면 작은 아이도 잘 놀수 있을것 같았다. 또 하나의 고민은 내 진행이 재미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내 단점을 보완해 줄 다른 한 사람과 공동진행을 하는 조건으로 승락했다. 다른 대안이 없었고, 긴 회의를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행사 하루 전 함께 진행을 하기로 한 여성 활동가와 짧게 준비를 위한 논의를 했다. 이 친구도 평소 회의나 간담회 진행을 보면, 나 못지않게 재미가 없던데. 이 파티 완전 흥행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진행 자체는 별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분위기를 띄울 것인가 하는 스킬이 중요하다. 둘이 함께 진행하려면 둘의 호흡도 중요할텐데, 지금 이 짧은 시간에 준비할 수도 없었다. 혼자 하는게 차라리 편할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엔 왠지 자신이 있었다. 재미있게 할 수 있을것 같았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평소보다 한 톤 높은 음성과 조금 더 흥분한 마음가짐으로, 조금 과장하고 오버해서 말했다. 하지만 또 차분할 때는 차분하게 했다. 내 목표는 낯선 사람들이 서로 조금이라도 더 친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아이스 브레이킹이 필요했다. 몇개의 프로그램을 알고 있고 종종 써먹어 봤지만, 파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적절한 걸 찾아보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고민 끝에 `가위 바위 보` 게임으로 정했다. 진행자가 적절히 분위기를 잘 띄워야했다. 큐시트를 만들지 않으려 했다가 맘을 바꿔, 감탄사와 손동작까지 표기한 대본을 만들었다.

행사장에 일찍 도착해 이것저것 준비를 도와준 후에 입 운동을 했다. 목도 가다듬었다. 작은 아이는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 뛰어다니며 노느라 보이지 않았고, 큰 아이는 맨 앞자리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마이크와 대본을 들고 있는 날 보고, ˝아빠가 사회자 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자기도 나중에 사회자 할 거라고 했다. 아빠 딸이니 잘 할 거라고 말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들이 늦게와서 시작이 좀 늦어졌고, 축하공연에서 두번째 앵콜이 나와서 또 진행이 늦어졌다. 총괄하는 친구(앞서 나와 공동진행을 하려던 여성 활동가)가 자꾸 시계를 보며 걱정했다. 밥도 먹어야 하고, 마쳐야할 시간은 계속 다가오는데 아직 본 행사는 시작도 못 했으니 그 초조함은 당연하다. 난 대략 계산을 해보고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내게 맡기라고 했다. 순서 하나를 간략하게 진행하면 될텐데, 흐름을 자연스럽게 가져가려면 순서를 바꿔야했다. 그 친구에게 바뀐 계획을 알려줬다.

앞서 말한 아이스 브레이킹 게임을 뒤로 보내 밥 먹기 직전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잘 맞아떨어졌다. 순서를 늦춰 늦게 도착한 사람들 포함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 그 중엔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동네에서 유명한 언니 활동가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내 말에 적절한 반응과 리액션을 보여주어 내가 좀 더 자신감을 가질수 있도록 해주었다.

밥 먹으면서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느낀점을 말할 수 있도록 1분 발언대를 하자는 내 아이디어도 성공이었다.

파티를 다 마치고, 준비팀만 남아서 뒤풀이를 했다. 우린 모두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친 개운한 기분으로 술을 마셨다. 누군가 큰 아이에게 너희 아빠 어떻게 이렇게 사회를 잘 보냐고 물었다. 아이에게 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내가 들으라고 한 말이겠지.

수고했다, 고생했다는 공치사를 많이 받았지만, 사실 난 그리 한 게 없다. 무대 준비, 음향 준비, 현수막과 포스터를 비롯해 행사장을 꾸미는 일, 음식을 준비하고 세팅하는 일 등등 뒤에서 나보다 훨씬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오히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는 이유로 혼자 공치사를 받는게 부담스러웠다.

축하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큰 아이가 내가 써놓은 대본을 읽고 재미있어 했다. 특히 가위 바위 보 게임에서 ˝사회자가 왕이니 무조건 시키는대로 해야 한다˝ 등의 표현을 보고 웃었다. 그런 아이의 웃음도 내게 힘이 됐다.

밤에 잠들기 전 준비팀에서 홍보를 맡은 이가 찍은 페이스북 생중계 영상을 다시 돌려 봤다. 아! 내 목소리 왜 이렇게 이상한거지? 이게 진짜 내 목소리야? 예전부터 영상 인터뷰 한 거나, 행사 스케치 등에서 내 목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긴 했지만, 이번에 일부러 감정을 끌어올려 오버해서 진행한 목소리는 더 이상했다.

큰 아이에게 이 목소리가 아빠 목소리와 똑같은지, 그러니까 아이에게 내 목소리가 실제 이렇게 들렸는지 물었더니 그렇다 했다. 그렇구나! 이 이상한 낯선 목소리가 내 목소리구나. 아이는 다만 아빠가 평소보다 훨씬 소리를 크게 내서 놀랐다고 했다.

인터넷이 되지 않아 폰으로 긴 글을 쓰려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들다. 이제 점심 먹고 어디로 놀러갈지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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