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울면 무서워
1년에 손녀들을 몇 번 보지도 못하는 부모님을 위해 해마다 휴가는 고향으로 간다. 부모님은 혼자 아이들 데리고 오는 게 힘들다고 뭐하러 오냐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기다리고 계시다는 걸 안다. 그렇게 고향에 내려가면 여동생네 식구들도 시간을 맞춰 온다. 명절을 포함해서 3번 밖에 못 보는 오빠를 보러 오는 건 물론 아닐테고,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놀 수 있게 시간을 만들어 주는 거겠지.
지난 여름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가 재밌게 놀려고 노력을 했고, 여동생네 식구들도 와서 집안은 시끌벅적했다. 갑자기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무슨 일이냐고 아이들을 불러 봤더니, 큰 아이와 큰 조카가 장난으로 작은 아이의 머리카락에 무언가를 발랐다. 아, 왜 그게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지 모르겠다. 당시엔 왜 아이들이 그걸 머리에 발랐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게 뭔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왜 내가 화를 냈는지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암튼 작은 아이의 머리칼은 온통 그 무언가 때문에 달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동생과 어머니는 빗으로 빗어가며 아이의 머리칼을 살려보려 했지만,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달라붙은 머리칼을 빗으로 억지로 떼내려 하니 작은 아이는 아프다고 울었고, 그 울음을 들는 나는 아이가 너무 안쓰러웠고, 또 화가 났다. 여동생은 도저히 방법이 없다며 가위로 머리칼을 잘라야 한다고 했고, 난 그건 싫다고 최대한 해보자고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봤지만, 결국 머리칼의 일부를 잘라야 했다.
요즘도 아침에 작은아이의 머리를 묶어주다 보면 꼭 왼쪽 앞 머리가 어중간하게 남는다. 그래서 화가 난다. 암튼 그때 고향에서 큰 아이와 큰 조카가 작은 아이의 머리칼을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화가 많이 났다.
큰 아이는 본인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내가 더 뭐라고 화를 내거나 혼을 낼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화가 나 있었고, 대체 이게 뭐냐고,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냥 했다고 답이 돌아왔다. 큰 아이를 작은 방으로 불러 따끔하게 혼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때 큰 아이는 억울하다고 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을 수 있도록 타일렀다. 결국 아이는 내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아이와 얘기를 하는 도중에 나도 모르게 울었다. 서러웠다. 큰 아이를 혼내야 하는 상황도, 작은 아이가 머리칼이 잘려 보기 싫은 모양이 된 상황도 싫었고, 짜증났고, 화가 났다. 큰 아이를 달래고 타이르면서 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큰 아이는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서 무섭다고 했다. 그 반응이 너무 의외였다. 왜 무섭지? 아이에게 아빠는 절대적인 강자이자, 무한한 지지자여야 하는데, 그래야 할 아빠가 울고 잇으니 그게 무서운 걸까? 나도 모르게 서러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오히려 더 펑펑 울면서 아빠 울지 말라고, 아빠가 울면 무섭다고 말하는 아이를 보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었다.
큰 아이가 3.5춘기가 되면서 반항이 심해졌다. 4춘기가 되고 나면 더 심해지겠지. 아이랑 함께 웃고 떠드는 게 삶의 거의 유일한 낙이라 생각하는데, 그럴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아이가 감정 기복이 심해지면서 괜한 짜증이나 화가 많아졌다. 작은 아이에게 가벼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다른 건 다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데, 폭력은 그냥 두지 못한다. 큰 아이를 혼내거나, 달래거나 하다보면 아이가 무척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울면서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면 안아주거나, 손을 꼭 붙들고 들어주는데,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아이는 내가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이면 무섭다고 한다. 아빠가 울면 무섭다고 한다. 그래. 아빠는 아이에게 늘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존재여야 할텐데, 바보처럼 우는 아빠라면 믿음이 가지 않을 것 같다.
눈물이 많아졌다
큰 아이는 내가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고, 울면서 "아빠 울지마. 아빠가 울면 무서워" 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난 아이를 껴안고 울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밀려들어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렀다. 난 아이에게 "무조건 아빠가 널 지켜줄거야. 무서워하지마. 하지만 아빠도 울 수도 있어. 아빠가 널 사랑해서 그런거야" 라고 말했다.
[부산행] 영화를 혼자 봤던 날,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딸 키우는 아빠가 보면 안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바보같았고, 부끄러웠지만 눈물을 어쩔 수가 없었다.
세월호 사고 직후 며칠째 제대로 된 구조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때, 밤마다 기사를 읽으며 참 많이 울었다. 밀양 어르신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를 보면서도 울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곁에서 힘들게 바라보는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서도 울었다. 뭐든 아이와 연결되면 눈물이 흘렀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아졌을까?
며칠 전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혼자 잠이 오지 않아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 뿐 아니라 나도 모르게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을까?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온갖 감정이 폭발해버린 듯한 느낌.
그 순간 깨달았다. 혼자 술을 마시는 건 이래서 위험하구나. 나도 모르게 어떤 선택을 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에 대한 동경
그게 몇 년이었는지, 몇 살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고 있었으니, 아마 아침이었을 것이다. 항구 근처 외진 길이었다. 버스가 왼쪽으로 크게 돌고 있는데, 저쪽에서 커다란 컨테이너 트럭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순간 그 컨테이너 트럭이 이 버스를 들이받아 사고가 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아주 빠르게 머릿속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트럭이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버스를 들이 받고, 방향이 바뀐 채 더 나아가 전봇대를 받은 후 건물에 부딪혀 쓰러지고, 컨테이너 상자 두 개가 넘어져 굴렀다. 버스는 옆구리가 크게 찢긴 상태로 뒤로 밀려나 넘어지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트럭은 정확하게 내가 탄 좌석을 들이 받고, 난 머리가 깨지고 얼굴이 흉측하게 망가져 피를 흘리며, 찢어져 구겨진 버스 바닥에 쳐 박혀 있었다. 즉사.
이렇게 상상하는 동안 버스는 빠르게 회전을 마치고 직진 구간에 들어섰고, 달려오던 컨테이너 트럭은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내 시야를 벗어났다.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상상이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름이 돋았다. 그때 그랬다.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았겠다.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 무렵부터 나는 내가 매우 불행하다고 여겼다. 나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그 무렵 어떤 영화를 봤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청소년인 남, 녀 주인공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어떤 어려움 때문에 함께 목숨을 끊는 영화였다. 마지막에 두 사람이 서로를 꼭 껴안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영화를 보고 자살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것 같다. 저런 죽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문득 내가 지금 죽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람들을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가장 슬퍼할 사람들은 역시 가족들일 것이다. 그땐 결혼 전이었으니, 나의 죽음에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은 부모님과 여동생일 것이다. 친구들은? 그땐 친구가 별로 없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내 주위에 벽을 쌓고 살았던 것 같다. 가족 외에는 아무도 슬퍼하거나, 날 기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용기
2년 전 봄이었다. 후쿠시마 핵사고 3주기였다. 시청광장에서 열리는 탈핵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그 소식을 받았다. 당시에도 글을 썼지만, 처음에는 그 부고 문자가 부모님의 부고 소식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포털 사이트 검색어 1위가 '노동당 부대표 박은지'라는 걸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그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나는 당시 꽤 오랫동안 어떤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계속 그의 삶을 이야기했다. 자리를 파하고 돌아와 혼자 책상앞에 앉아 그가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나는 지금 어떤 기분인지를 곱씹어보곤 했다.
그때 내가 서재에 남긴 글을 보니 이렇게 써 놓았다.
지금 나는 한때 같은 깃발 아래서, 같은 구호를 외쳤던 동지의 죽음을 보면서, 한편으로 내 마음을 들여다 본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더 열심히 살라고 말을 하는데, 나는 죽음을 택하는 용기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죽음이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그때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사실 생각으로는 수없이 해 봤지만, 현실에서는 그 만큼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역시 나는 그 정도의 용기가 없는 그런 인간이다. 그저 내 마음을 차분히 들여다 봐야겠다.
그의 선택에 대한 내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때 이렇게 글을 남긴 이후로 남겨진 아이 생각을 많이 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아이를 떠올렸을까? 아이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죽음을 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면, 남겨질 아이를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용기를 가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스스로 이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마음 먹는다면, 그 마지막 순간에 아이들에게 어떤 마음이 들까? 아이들을 떠올리고도 그 선택을 행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전공 수업 때문에 이 책을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읽었다는 기억이 날 뿐, 이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찾아보면 책장 어딘가 있을텐데. 아니 고향집 책장에 꽂혀 있겠구나. 기억나는 건 뒤르껨이 자살을 개인의 행위가 아닌 사회적인 현상으로 해석했다는 것 뿐이다. 자살은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 사망률 1위로 악명이 높다. 몇 년 전 자료이긴 하지만, 언론 기사를 보면 하루에 약 40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하루에 40명이라니. 매일 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에 살고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자살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게끔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많은 이들이 계속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실행중일지 모른다. 왜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할까? 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고 전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나를 없앤다면 세상이 없어지고, 괴로움도, 슬픔도, 억울함도, 고통도 모두 다 사라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 그 선택까지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남겨진 사람들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들이 느낄 감정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또 다른 선택이 가능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는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자살을 부르는 노래
한때 MP3 플레이어에 '글루미 썬데이'만 담아 듣고 다녔던 적이 있다. 유명한 노래인만큼 무척 많은 가수의 버전이 있었다. 그중 마음에 드는 곡들로만 다운받아 무한 반복으로 들었다. 이 노래의 마성에 제대로 빠져 있었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노래라고 생각했다. 들으면 들을 수록 어떤 매력이 느껴졌다.
하루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 노래만 듣기도 했다.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이 노래만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영화를 본 후 에리카 마로잔이 부른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제 다른 가수의 곡은 듣지 않고, 계속 에리카의 목소리로만 이 곡을 듣는다. 내가 본 영화는 독일어 버전이었다. 노래를 잠시 멈추고 "슈필 퓌어 미히(나를 위해 연주해줘요)"라고 말하는 대사가 참 좋았다. 헝가리어 버전으로 들으니 또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이 곡을 하루종일 듣는다고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이 노래만을 반복해서 듣는다는 사실을 안 친구는 무척 걱정을 했다. 난 그저 이 노래가 좋을 뿐. 이걸 듣고 뭘 어쩌려는 의도는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 난 용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