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조금 늦긴 했지만, 하마터면 비행기를 못 탈뻔 할 정도로 늦었다고 깨닫지는 못했다. 대한항공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부러 아시아나를 예약했는데, 티켓 발행을 위해 아시아나 항공 부스를 찾아다니는데 안 보였다. 저가 항공을 비롯해 다른 항공사들 부스는 다 찾았는데, 유독 아시아나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찾아다니던 곳 정 반대편에 아시아나 부스만 외딴 곳에 있었다. 그건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나 부스만 혼자 국제선 쪽에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쨌거나 서둘러야 할 상황이었는데, 줄이 길었다. 다른 항공사 부스는 여유롭던데 아시아나는 대기자가 많았다.


직원 하나가 다가와서 맨 뒤에 선 나를 보고 "예약번호가 있으면 도와주겠다." 고 해서 폰을 건네 카톡 메시지를 보여줬다. 그 직원이 예약번호를 입력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시간이 없다."며 저쪽에 있는 다른 직원을 불렀다. 뭐라고 빠른 어투로 말하던데, '레이터' 란 단어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암튼 늦게 온 사람인 나를 두고 한 말처럼 들렸다. 그 다른 직원은 메인 부스가 아닌 대기자 줄 옆에 있는 임시 부스(복도 한 가운데 이런 게 있는 줄 처음 알았다.)로 들어가 빠르게 단말기를 두드리며, 단말기에 달린 수화기를 들어 누군가와 통화했다. 뭔가 암호 같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빠르게 전했다. 이번에도 '레이터'란 단어가 들린 듯 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출력되어 나온 티켓을 건네며 언제까지 탑승구로 가야 한다고 빠르게 말했다. 그 다급한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급하게 계단을 올라 검색대를 향해 뛰었다.


검색대를 나와 가방에 노트북을 집어넣고 폰과 지갑 등 소지품을 챙기며 시간을 보니, 웬걸 아직 여유있는 시간이었다. (이 정도면 음식이 바로 나온다는 전제 하에) 햄버거나 국수를 먹고 가도 될 시간이 아닌가. 어쨌거나 나는 곧바로 탑승구를 향했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뒤에 섰고, 곧 내 뒤로도 긴 줄이 만들어졌고, 좀 기다려 탑승을 시작하자 비행기에 올랐다.


생각해보니 적어도 출발 시간 30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은 그 시간이 지나면 티켓 발권이 안 된다는 소리였나보다. 떠올려보니 내가 공항에 도착한 것이 대략 비행기 출발 30분쯤 전이었고, 아시아나 부스를 간신히 찾아 줄을 선 것이 대략 25분에서 20분쯤 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좌석에 앉아 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메세지는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분에게 온 것이었다. "이 날씨에도 비행기가 뜨나요?" 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 제주에 내려서 답해야지 생각하고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비행기에 들어설 때, 입구에서 나눠주는 신문을 하나 가져와 이륙 대기중일 때부터 쉬지 않고 계속 읽던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선체 내부가 어두워졌다. 조명이 바뀐 느낌이었지만, 글씨를 읽는데 어려움은 없어서 그대로 계속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주위만 다시 밝아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나가던 승무원이 내 머리 위의 독서등을 켜줬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했는데, 그는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곧 안정 궤도에 오를 줄 알았는데, 비행기 선체가 계속 불안하게 흔들렸다. 집중해서 신문 기사를 보느라 잘 못 느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비행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치 추락하듯 순간적으로 선체가 내려앉았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느낌. 근데 그때부터 선체가 전후좌우로 크게 흔들리더니 몸이 막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신문을 접고, 주위를 살폈다.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좌석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다. 아까와 같이 선체가 추락하는 느낌이 연속으로 여러번 이어지고, 급격하게 몸이 홱 돌아갈 정도로 선체가 쏠리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속으로 이러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거 아닌가 싶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반복적으로 급격하게 선체가 내려앉는 그 느낌, 심장이 철렁,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 싫고 무서웠다. 이건 레일 위를 달리는 롤러코스터가 아닌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가 아닌가!


읽던 신문을 대충 접어서 무릎 위에 두고 양쪽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때 저 앞쪽 간이의자에 앉아 안전벨트를 꼭 맨 승무원이 불안해하는 승객들을 표정으로 달래고 있는 걸 봤다. 그 승무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게도 살짝 웃음을 보내며 뭔가 말을 하는 듯 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표정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 여유를 되찾았고, 곧 다시 신문을 펼쳐들었다. 신문에 집중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그냥 남들 보기에 태연한 척 하려고 신문을 읽는 척 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어쩌면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엄청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한참 심하게 흔들리고 덜컥 덜컥 추락하는 느낌이 들 때는 문득 머릿속에 비행기 잔해가 뉴스 영상으로 비치고, 아나운서가 날짜와 시간을 말하며 몇 명의 사망자와 몇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래. 비행기 사고는 생존자가 거의 없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있을 뿐. 문득 참 보잘것 없는 인생을 살았구나. 뭐 하나 남긴 것 없이 이렇게 가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 후에 안전벨트 등이 꺼지고 승무원들이 마침내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 승객들에게 나눠줄 음료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 이제 안전하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제 확실히 선체의 흔들림은 없었고, 안정적으로 비행하는 느낌을 받았다. 비행기를 많이 타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일 때문이라도 비행기를 타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제주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세 번째 제주행이었다. 셋 다 놀러간 것이 아니라 일 때문에 간 것이었다. 그 중 한 번은 주말을 끼어 2박 3일간 다녀왔고, 1박 2일은 일을 했고, 나머지 시간은 혼자 올레길을 걷고, 지겨울 때까지 바다를 쳐다보고, 흑돼지 삼겹살에 한라산 소주를 마시며 보내다 돌아왔다. 이번에는 딱 주 중이라 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한참 일이 많을 때라 내려갔다가 당일 바로 돌아와야 할 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래도 제주까지 가서 저녁에 바로 올라오기는 좀 억울했다. 억지로 다음날 오전 일정을 비우고, 1박을 결심했다. 제주에 사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했다. 반가운 목소리. 저녁에 만날 약속을 하고 몇 년 만에 볼 그 얼굴을 떠올려봤다. 


그러나 하루 전날 친구는 급한 일이 생겨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마침 함께 아는 한 선배가 그때 제주에 있을 예정이라고, 그 선배에게 연락해보라고 했다. 출판계를 떠나 딱 한 번 봤던가, 아니 두 번 봤던가? 암튼 몇 년 전이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선배에게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문자를 주고 받았고, 그 선배는 그날 제주이 있긴 하지만, 저녁에도 일정이 있어서 나를 만나기는 어렵다고 했고, 나중에 서울에서 보자고 했다.


음, 제주에 또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하루 전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연락해 만나자고 할만큼의 관계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몇몇 얼굴들과 이름들이 머리속에 스쳐갔지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지워버렸다. 대부분 제주시가 아닌 서귀포 쪽이거나 외곽에 사는 이들이었다. 저녁과 함께 반주를 하고 다음날 돌아올 일정으로 연락을 하긴 미안했다.


토론회


토론회 장소는 작년 11월에 강연하러 왔던 곳이었다. 익숙한 장소라 쉽게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들어가고 싶었는데, 비행기에서 하도 시달려서 그랬는지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앞에서 떠들려면 배를 채워야 할텐데, 나중에 분명 후회할텐데 생각하며 뭐 적절히 끼니를 때울 곳을 살폈다. 식당이 몇 개 있었는데, 딱히 땡기는 곳이 없었다. 그냥 편의점에 들어가서 캔 커피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토론회는 예상보다 사람도 많았고, 분위기도 괜찮았다. 나도 충분히 내 역할을 잘 했다 싶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을 하고 나면 늘 스스로를 평가하게 되는데, 나는 대체로 큰 실수는 없는 편이라 작은 실수들 몇 가지를 두고 후회하거나, 그래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날 토론회 발제는 지금까지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잘 한 편이었다. 시작 전에 생각해 둔 꼭 해야할 말들은 다 제대로 전달했고, 중간에 즉석에서 떠오른 이야기도 잘 끼워넣었다. 시간을 살짝 넘기긴 했는데, 앞에서 시간을 더 많이 쓴 발제자도 있었으니, 그 정도는 괜찮았다. 토론회가 끝나고 한동안 사람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느라 꽤 오래 서있었다. 같이 서울에서 내려온 한 연구원이 언제 올라가냐고 묻길래 "내일" 이라고 답했더니 바로 부럽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가냐고 물었더니, 사실 본인은 어제 내려왔다고 했다. 그와 잠시 떠들다가 그만 친구가 약속을 깨버려 지금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 하필 그날은 주최측에서 저녁 식사도 계획하지 않았다. 작년에 내 강의를 주선했던 분은 저녁에 회의가 있다고 급하게 가버리셨다.


혼자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가방을 메고 나섰다. 잠시 걸었다. 제주 칼 호텔을 지나며 오래전 신혼여행 때가 떠올랐다. 안돼! 이런 기분에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 힘들어! 고개를 휘휘 내젖고, 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빨리 걸음을 옮겨, 그 동네를 벗어났다. 일부러 차를 타지 않고 계속 걸었다. 대략 방향은 잡고 있었다. 작년에 왔을 때, 호텔(이라 쓰고 모텔이라 읽자)이 많고, 식당이나 술집이 많은 동네는 봐 두었다. 바다가 멀지 않은 동네.


동문시장


쎈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며 걷다가 문득 지도 앱을 열어보니, 걷기엔 너무 먼 거리라 느꼈다. 게다가 배가 고팠다. 점심도 안 먹고 캔 커피 하나로 때웠던 게 기억났다. 일단 노트북이 들어서 무거운 가방부터 내려놓고 싶었다. 숙박업소 검색 앱을 깔고 찾아보니 가까이에 호텔(이라 쓰고 모텔이라 읽자)이 있었다. 저렴한 편이었다. 결제하고 5분 가량 걸어서 찾아갔다. 주인장이 건넨 열쇠로 열고 들어온 방은 모텔보다 더 소박했다.


가벼운 몸으로 식당을 찾아 나섰다. 회가 먹고 싶었다. 회 한 접시에 한라산 소주 한 병, 그리고 바닷가에서 맥주 두세 병 정도 마시면 다시 숙소로 걸어 돌아올 수 있으리라. 어쩌면 술이 모자라 숙소에서 맥주를 좀 더 마실지도 모르지 라고 생각하며 방향을 잡고 걸었다.


이런저런 술집과 식당들을 지나면서 계속 머리속에 회만 떠올렸다. 한참을 걸어서 동문시장이라 적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에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도 많았다. 누군가 삶에 회의가 들면 재래시장을 찾으라고 했던가? 그 활기에 전염되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으라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난 저 활기찬 분위기 밖에 걷도는 이방인일 뿐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었다. 한참 걷다가 횟집을 하나 발견했다. 식사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지, 주인장은 포장 손님으로 착각한 듯 했다. 오후에 많이 떠들어 목이 조금 아팠지만, 목소리를 높여 먹고 갈 거라고 했고, 주인장은 2층으로 안내했다. 넓지 않은 실내에 손님이라곤 나 혼자였다. 티비도 하나 없이 조용한 객실에 앉아 회가 나오길 기다렸다. 조선족인 듯한 중년의 종업원이 반찬을 놓을 때, 한라산 한 병을 주문했다. "하얀 거?" 라고 묻길래, "네." 답했더니, "하얀 건 좀 독해요." 라고 알려준다. 그 하얀 한라산을 평소 2병 이상 먹는 사람이라고 말하려다가 참는다. 평소 소주는 빨간 걸로만 먹는다고 대꾸해주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빨간 게 뭐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지 라고 혼자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참돔회가 나왔다. 접시에 무를 깔지 않고 그냥 회만 놓아 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훨씬 깔끔하고 좋았다. 맛있었다. 내가 들어온 시간이 좀 늦어서 앉자마자 몇 시까지 하냐고 물었는데, 시간은 충분했다. 한 40분 분 가량 후, 회 한 접시와 한라산 한 병을 다 비우고, 배를 두드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거기서 다시 바다를 향해 걸었다. 도중에 포장마차가 길게 이어진 길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골목에서 술과 안주를 즐기고 있었다. 일행이 있었다면 나도 저기 합류하고 싶었으나, 혼자 저 골목을 들어서기는 조금 망설여졌다. 그냥 다시 걸었다. 바다를 만날 때까지. 제주에 와서 바다 한 번 못 보고 가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내일은 시간 상 바다를 찾아갈 여유가 없을테니, 이 밤에 충분히 바다를 즐겨야했다. 


작년 가을에 한 번 와봤던 곳. 방파제와 테트라포트 너머로 시커먼 바다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문득 요의를 느껴 돌아보았는데, 대중화장실이 없었다. 한참을 걸으며 찾다가 간신히 발견했다. 화장실을 해결하고 나서 편의점에서 500밀리리터 캔 맥주 2개를 샀다. 안주는 필요없었다. 방파제에 몸을 기댄 채 홀짝 홀짝 한 캔을 비우고, 방파제에 걸터 앉아 또 한 캔을 비웠다. 오가는 이들이 모두 연인이거나 가족이어서 조금 더 쓸쓸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먼 것 같았는데, 또 금방 온 것 같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다시 500밀리 맥주 두 캔을 더 샀다. 좀 더 마셔야 잠이 올 것 같았다.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그제서야 뭔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박일환


이 분을 만나 인연을 맺었던 건 벌써 10년도 더 전이다. 당시 이 분은 모 출판사 대표였고, 나는 출판노동자의 삶을 막 시작할 때였다. 늦게 출판계에 들어와 아는 것 하나도 없는 상태로 영업 일을 한다고 많이 힘들었고, 또 그만큼 많이 재미있고 신나기도 했다. 전교조 해직 교사이셨고, 복직해서 다시 중학교 국어 교사로 지내셨던 이 분은 출판사 대표 직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계속 학교에만 계시다가 가끔 일이 있을 때에만 사무실에 와서 회의하고 술을 마시는 것이 대표로서 이 분이 하셨던 일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싶다. 아니,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평소 교사로 생활하시면서도 틈 날때마다 시간을 내어 회의하고 또 술을 마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늘 그렇게 살아서 잘 안다!) 그것도 돈 한 푼 못 받는 직책 뿐인 대표라면 더욱 그렇다. (이것도 내가 늘 그래서 잘 안다!) 아니, 오히려 맨날 후배들 술 사느라 돈이 나갈일이 더 많은 노동자들을 위한 책만 내는 작은 출판사 대표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그 출판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 이 분이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사실 나는 대표로서 제대로 중재해주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약간 원망을 하기도 했었다. 나중에 이 분도 곧 대표직을 내려놓았고, 실무자 출신이 대표가 되었다가, 나중에 또 다른 시인께서 대표가 되셨다는 소식을 계속 듣고 있었다. 이 분이 대표가 되기 이전에는 또 유명한 시인께서 대표였다. 그러고보니 그 출판사는 계속 시인들이 대표가 되는구나. 아니, 아니다! 맨 처음 대표는 소설가가 맡았구나. 그 이후로 계속 시인들이 이어받았구나.


어쨌든 출판사 대표직을 물러나고 부지런히 글을 쓰시고, 책을 내신다고 느꼈다. 그러다 학교에서 퇴임하시고 나서는 훨씬 더 부지런히 글을 쓰시는 듯 하다. 


시인으로 소개 받았고, 시를 몇 번 읽어봤지만, 시 보다는 산문을 더 잘 쓰신다고 느꼈다. 물론 이 분 시가 별로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만큼 산문이 더 좋다는 뜻이다. 요즘 페이스북에 이 분이 '국어사전 혼내기'라는 글을 연재하는데, 정말 재미있고, 신기하고 또 황당한 내용이 많다. 나중에 책으로 엮는다면 꼭 구매해야 할 내용이다. 그런데 이 분 말씀을 보니 이미 [미친 국어사전]이란 책을 냈다고 하시더라. 그러고 보니 언젠가 [어휘 늘리는 법]이란 책도 나중에 사야지 생각만 했다가 잊어버렸는데, 언젠가 사투리에 대한 책도 쓰셨던 것 같은데, 이 참에 다 찾아봐야지 싶었다. '국어사전 혼내기'고 빨리 연재 분량을 모아 책으로 내 주셨으면 좋겠다.


언젠가 또 뵐 날이 오면, 선한 웃음 짓는 얼굴 앞에 책들을 주욱 내밀고 서명 해달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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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 홈페이지를 몇 시간째 지켜보며 보수정당 더불어민주당이 싹쓸이 한 이 결과가 믿기지 않아 잠을 잘 수 없다. 이게 나라냐? 우리가 이런 나라를 보려고 그 고생하며 촛불집회에 나가고 박근혜를 끌어내렸나? 어떻게 자유한국당과 별반 다를게 없는 애들이 대부분 당선되는 이 미친 사태를 두고 다들 편히 잠을 잘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동네에선 더불어 애들이 기초의회에서 1개 지역구를 제외하고 모든 지역구에 1-나 까지 두 명의 후보를 내놓고는 ˝아빠는 1-가를, 엄마는 1-나를 찍으라˝ 는 미친 문자를 돌리기도 했다.

사실 공보물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더불어는 정말 답없다. 자한당과 별반 다를게 없는, 말 그대로 50보 100보인 그 당에서 그나마 문재인, 박원순 정도는 아쉬움은 많지만 인정해줄만하다고 생각한다. 지역으로 내려오면 오히려 자한당보다 더 나쁜 놈들이, 더 어이없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저런 함량 미달 후보를 내놓고 선거에 임하는 더불어를 보면 이 인간들이 얼마나 국민들을 우습게 생각하는지 뻔히 알 수 있다. 자한당만 국민들을 개, 돼지로 여기는게 아니다. 입 밖으로 내지 않을뿐 더불어는 그 보다 더 심각하다!

물론 더불어의 모든 후보가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주 가끔 제대로 된 후보가 없지는 않겠지. 그 정도는 되어야 그래도 제대로 된 보수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제 잇속만 차리는 꼴통이면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닐텐데, 그래도 그 정도 하는 것 보면 쪼끔 인정해줄만한 부분이 있기는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결국 이 정당이 국민들을 우습게 보고 우롱하고 있는 현 상태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래 저 보수 정당이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것인지 걱정과 동시에 짜증이 난다.

선관위가 제시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자한당과 함께 거부한 것들이 더불어 애들이다. 선거구획정위원회가 권고한 4인 선거구와 3인 선거구를 모조리 2인 선거구로 쪼개놓는 만행을 저지른 거만하고 파렴치한 것들이 더불어 애들이다. 이런 것들이 정치인이라고 표를 구걸하는 판이 이번 선거였다.

집으로 온 31개의 공보물을 2번씩 정독했다. 박원순을 제외한 모든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은 말그대로 그냥 쓰레기였다. 썩은 내가 풍기는 더러운 것들. 그것들이 모조리 당선되는 꼴을 봐야 한다니!

오래전 노무현이 당선된 후 공약을 어기고 미친 짓을 할 때부터 내가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지금으로 치면 차라리 자한당이 싹쓸이하면 차라리 싸울 명분이라도 생기고, 전선이 명확하게 형성되는데, 민주주의의 탈을 쓴 꼴통 보수들이 당선되면 싸울 명분조차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제 작은 아이와 공보물을 보면서 놀았다. 아이가 하나씩 공보물을 들어서 물었다. ˝아빠, 이 사람은 어때?˝ 공보물이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곧바로 거짓말쟁이에 나쁜 사람이라고 말해줬고, 잘 기억나지 않는 사람은 다시 공보물을 정독하고 말해줬다. 역시 거짓말쟁이애 나쁜 사람이라고. 그렇게 하나씩 제외하고나니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녹색당과 정의당과 민중당만 남았다. 그 세 당을 모두 합쳐도 자한당이 폭망하고 꼴통보수를 이어받은 더불어민주당에 비하면 아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실이다. 촛불집회에서 고생하며 쌓아온 현실이 고작 이거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잠든 아이들 얼굴을 보며 사과한다.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어른들이 정말 미안하다! 이런 미친 세상 밖에 물려주지 못해서. 저 거짓말쟁이 나쁜 사람들이 그나마 조금 덜 나쁜 사람이라는 이유로 당선되어 큰 소리치고 자기 잇속을 챙길 세상 밖에 물려주지 못해서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나 한반도의 미래가 한층 밝아졌다 여겼지만, 이번 선거로 다시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는 새벽이다.


덧붙임

얼마전 최저임금법 개악에 앞장선 애들이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란 작자들이다. 세월호 변호사로 유명했던, 그래도 그 보수정당에서 몇 안되는 믿을만한 사람이라 여겼던 박주민도 최저임금 개악에 찬성표를 던졌고, 논란이 불거지자 페이스북에 말도 안돼는 변명을 올렸다. 심지어 박주민은 선거기간동안 페이스북에 1-나 후보를 찍어야 한다는 글을 여러차례 올렸다.

이래서 박주민이 보수정당을 선택한 거구나 깨닫는다. 과거 이재오가 그랬듯, 김문수가 그랬듯, 진보를 자처했으나 수구꼴통이 되어버린 수많은 정치인들과 박주민은 과연 얼마나 다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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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14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개표방송을 보면서 여당이 승승장구할수록 진보 정당들의 입지가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더불어민주당이든 자한당이든 간에 특정 거대 정당 독점 분위기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이사 후

이사하고 일주일 하고도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 짐을 다 풀지 못했다. 짐정리는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하는 걸로.

반지하 안녕

기간이 남았음에도 이사를 서둘렀던건, 작년 가을부터 몸에 이상 신호가 왔기 때문이다. 반지하 습기찬 집에 1년 넘게 살다보니 어느순간부터 몸 여기저기가 예고없이 아프기 시작했다. 온갖 증상을 다 의심해보고, 찾아보고, 병원도 가봤는데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올해 3월쯤 동료가 습기와 곰팡이 때문은 아닌지 조심스레 의견을 냈는데,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고, 계속 몸이 무거웠고, 자주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이사하고 아직 10일이 채 되지 않았건만, 지난 7개월동안 지속되었던 증상들이 거의 사라졌다. 이삿짐을 다 실어놓고 마지막에 돌아볼때 정말 깜짝 놀랐다. 방 구석구석 보이지 않던 곳들에 습기와 곰팡이가 엄청났다. 제습기를 자주 틀어놓고, 온갖 종류의 제습제를 여기저기 뿌려두었음에도 그랬다.

아이들도 새 집을 무척 만족스러워한다. 일단 퀘퀘한 냄새가 없고 집이 비교적 깨끗해보이니 좋은 듯하다. 가파른 오르막을 한참 올라야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에도 아이들은 이 집에 대한 불평이 별로 없었다.

정말 반지하 집은 다시는 살 곳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지하 안녕! 다시는 만나지말자.

평창

강원도 평창으로 워크숍 간다. 책 제목이 너무 공감이 가서 잊지 않기 위한 메모와 더불어 간단한 일상 이야기를 남긴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조금쯤 여유가 생기면 잊지말고 기록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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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D-1

이사할 때마다 제일 큰 짐은 항상 책이다. 약 2년전 애들엄마와 함께 살던 집에서 나올 때 책장 3개와 그 책장들을 꽉 채우고도 훨씬 많이 남는 책들을 갖고 나왔고, 당시 이사를 도와주던 후배는 책들 좀 버리라며 엄청 힘들어했다.

그 집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옮길때엔, 수십여권의 책을 버리거나 팔아서 겨우 책장 한 칸 빈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책은 또 늘어났고, 이번 이사를 앞두고 한 사십여권 팔거나 버렸으나, 책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차를 빌릴 곳도 없고, 짐도 더 많이 늘었고, 도와줄 후배도 한 명 밖에 없어서 이사짐센터에 전화해 1톤 트럭을 구했다. 책이 좀 많다고 하니, 아저씨는 보지도 않고 한숨부터 내쉰다. 짐을 미리 다 싸둬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길래, 주말동안 미리 책을 싸두고 오늘 밤 나머지 짐을 싸려고 했다. 혼자서 다 해낼 자신이 없어서 친구를 불렀다. 그 친구도 이번 주말 이사할 예정인데, 본인 짐을 먼저 어느정도 싸놓고, 일요일 오후 우리집으로 왔다.

친구와 함깨 책을 싸려고 하니, 방이 좁아서 먼저 실내철봉을 분리해야 했다. 난 철봉을 분리하고, 친구는 책을 싸기 시작했다. 책장엔 내 나름의 분류대로 책이 꽂혀있었는데, 책을 싸려면 크기별로 맞춰야 하니, 분류를 무시하고 그냥 싸라고 했다. 친구의 속도는 빨랐다. 나 혼자였다면 아마 책을 싸다가 오랜만에 손에 드는 책들을 만날 때마다 추억에 빠지거나, 책장을 들춰 읽곤 했을 것이고, 그러다 훌쩍 시간을 보내고, 하루가 다 지나도록 반도 못 끝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녁이 될 무렵 책을 거의 싸놓은 건 순전히 친구의 공이었다. 도중에 박스가 모자라 근처 큰 슈퍼와 작은 마트와 편의점들을 돌았는데, 대부분 폐지 모으는 할아버지와 계약이 되어있다며, 박스 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간신히 몇 개를 구해서 대부분의 책을 포장해서 쌓아놓았다.

이제 겨우 책만 싸놓았을 뿐이지만, 다른 큰 짐이 별로 없는 내 입장에선 이사짐을 다 싼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생한 친구에게 고맙다고 회를 샀다. 회를 먹다보니 술을 마셨고, 술이 한 잔 들어가니 또 술이 술을 불러서 원래 의도와 달리 좀 많이 마셨다. 이제 하루 남았다. 오늘 조금 일찍 퇴근해서 나머지 짐을 싸고, 내일 아침 에 짐을 실으면 이제 이 집은 영영 안녕이다. 지긋지긋한 반지하! 다시는 반지하에 살지 않으리라. 집을 나오면서부터 세번째 이사다. 앞으로 또 얼마나 자주 이사를 하려나. 앞으로 얼마나 많이 책을 싸고 또 풀어야 하려나.

또 책 욕심

전철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훓어보는데, 앞에선 아저씨 뒤편으로 등산 가방 하나가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한다. 자세히보니 한 중년 여성이 기마자세처럼 반쯤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고 있다. 스퀏 운동을 하는 모양이다. 등산복에 등산 가방을 멘 걸 보면 산을 오르려고 이동하는 듯한데, 준비운동으로 전철 안에서 스퀏을 하는 건가? 어차피 등산을 할 거라면 산 아래에서 스트레칭을 가볍게 하는 정도로 몸풀기는 충분할텐데, 왜 굳이 사람 많은 출근길 전철 안에서 스퀏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까 궁금했다. 게다가 에어스퀏이라고 부르는 맨몸 스퀏 자세도 틀렸다. 엉거주춤 기마자세에서 멈췄다 다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와 발 뒷굼치가 닿을만큼 완전히 쪼그려 않았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 바른 자세다. 어쨌거나 그는 한동안 더 오르내리능 과정에서 자꾸 주위 사람들과 몸이 닿아 불편하게 만들었다. 저 분 과연 혼잡한 전철 아안에서 스퀏을 할만큼 운동이 절박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는 와중에 이 책을 발견했다. 몇 시간동안 책을 싸면서 진짜 책이 많구나. 난 언제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생각했고, 앞으로 책을 좀 적게 사야지 생각했건만, 또 책을 보관함에 담고 있는ㅍ내 모습을 본다. 이사한 집에선 여기서보다는 책을 더 많이 읽어야지. 이 다짐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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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8-04-30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큰 일 치루시는군요. 이사 잘 하시길 바랍니다^^:)
 

갈증

몇 년간 혼자 일하다가 작년 봄부터 일터에 신입 활동가가 한 분 들어왔다. 여성이고, 나이는 나보다 살짝 어리며, 문화영역 활동 경험이 많은 분이다. 혼자 많은 일을 해오다가 한 사람이 늘어서 무척 든든했다. 무엇보다 이전까지 일을 하다가 뭔가 막히면 의논할 상대가 없었는데, 일터에서 누군가 대화 상대가 생겼다는 점이 좋았다. 외부 일정 때문에 밖에 있을때 급한 요청이 오면, 사무실에서 도와줄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하지만 사람이 늘었어도 내 일은 거의 줄지 않았다. 그 분이 가져간 양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일이 생겼다. 이건 뭐 일이 많은 건 평생 바뀌지 않는 팔자려니 하고 살아야 하나보다.

암튼 1년간 마음 든든하게 함께해 준 활동가가 당분간 병가로 자리를 비운다. 다시 혼자가 되고보니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다. 우선 대화 상대가 없어진 점이 제일 아쉽다.

혼자 살고, 혼자 일하니 업무 때문에 사람을 만나거나, 회의에 참석하는 일 외에 누군가와 맘 편히 이야기 나눌 기회가 적다.

물론 내가 일하는 곳은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협동조합들을 비롯한 사회적경제 단위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용 사무실이기 때문에 오가며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꽤 있다. 간혹 야근하는 날엔 옆 사무실 선배와 즉흥적인 술자리를 만들어 스트레스를 풀기고 한다. 가끔 연락하고 만나는 친구나 후배들도 제법 있다.

그러니 이 아쉬움은 좀 더 친밀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갈증이 아닐까 싶다. 사실 하루종일 아무도 안 만났던 날보다, 애들이 왔다가 돌아간 날이나, 적당히 친한 선후배와 한 잔하고 헤어진 순간이 훨씬 더 외롭고 견디기 힘들다.

이 갈증은 쉽게 해결할 수 없으리라 본다. 현재 내 생활영역과 활동영역에서는 이 갈증을 풀어줄 가능성이 없다. 뭔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기에 지금의 나는 너무 일이 많고, 여유가 없고, 지쳐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해갈의 순간이 오리라 믿는다.

책정리

급하게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집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시기부터 늘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는데, 갑자기 기회가 찾아왔다. 이사갈 집도 아주 맘에 드는 좋은 집은 아니지만, 적어도 반지하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정했다. 지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으니 무조건 잡아야했다.

이 집에 와서 짐이 많이 늘었다. 친한 선배가 세탁기도 사줬고, 내 키만한 냉장고도 샀다. 이런저런 자잘한 짐들이 말할 수 없이 늘었다. 게다가 책도 제법 많이 늘었다.

오늘은 다시 읽을 일이 없을 듯한 책들을 삼십여권 챙겨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 두꺼운 책들도 좀 있었고, 나름 흔치 않은 책들도 있었고, 몇 년간 한번도 손대지 않은 만화책도 한 질 넣어갔는데, 완전 실망하고 돌아왔다. 만화책은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가져갔더니, 습기로 인한 손상 등으로 3권을 매입불가 통보 받았고, 두꺼운 책도 상태가 최상임에도 가격이 예상보다 훨씬 낮게 나왔으며, 두껍지 않은 책들은 대부분 균일가로 표시되어 1천원씩 값이 매겨졌다. 재고수량 초과로 판매하지 못한 책들도 몇 권 있었다.

나름 고르고 골라서 가져갔는데, 결과가 이래서 좀 힘이 빠졌다. 게다가 그 와중에 큰 아이와 서로 좀 오해가 있어서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기에 더 기분이 엉망이다.

또 갈증

지금은 애들엄마 집에서 곧 돌아올 예정인 애들엄마를 기다리며 이 글을 쓴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쓰고픈 글도 많은데, 나는 늘 여유가 없다며, 시간이 없다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 다른 갈증이다. 책과 글에 대한 갈증 역시 점점 더 심해지는 듯하다.


이렇게 기분이 우울한 날엔 술을 홀짝거리며, 정말 재밌는 SF소설을 읽고 싶다. 마침 애들엄마의 책상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재미있을 것 같다. 당장은 한 권이라도 책을 늘리는게 부담스러우니, 이사가면 사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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