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조명 아래 빈 술잔이 반짝 빛났다. 재즈 음악이 흘렀다. 바스툴에 걸터 앉은 나는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받친 자세로 오른손을 움직여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바 너머에서 바텐더가 다가와 지포 라이터를 열고 불을 켜서 내 입을 향해 내밀었다. 담배를 물고 그가 켜준 불을 빨아당겼다. 어두운 조명 아래 담배 연기 한 줄기가 위로 솟아올랐다.


"나 한 잔 더 해도 되죠?" 지포 라이터를 닫아 내려놓은 그는 내 귀에 가까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이번에는 목소리 톤을 높여 묻는다. "오빠도 잔 비었네. 한 잔 더 드려야죠?" 그러나 답은 기다리지 않고, 내 잔을 먼저 삼분의 일쯤 채운다. 이어 자신의 잔에도 같은 양을 따른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얼음 통을 꺼내고 내 잔에 얼음 세알을, 자신의 잔에도 얼음 세 알을 넣었다. 익숙한 솜씨다.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그가 하루에 몇 잔이나 술을 따를까? 몇 개의 스트레이트와 몇 개의 온더락스 잔을 채울까? 그는 자신도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아까 내려놓은 지포 라이터를 열어 불을 붙였다. 어두운 조명 아래로 두 가닥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내가 깊이 들이마셨다가 훅 내뱉은 연기와 그가 길게 내뱉은 연기가 만나 섞였다.


"그래서 오빠, 그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머리 위에서 들린 질문에 머리를 괴고 있던 왼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뒤로 묶은 머리칼이, 반듯하게 다림질이 된 검은 셔츠자락이, 그 셔츠 가슴 주머니에 달린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세련된 글씨체로 적힌 글씨를 읽었다. 류민. 그리고 가게 이름 대신 작게 그려진 검은 고양이 그림 실루엣을 보았다. 그는 내 눈을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잠시 기다린다. 난 대답 대신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쥔 손으로 잔을 들어올려 두어차례 흔들었다. 짤랑짤랑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술 한 모금을 넘기자,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아, 미안.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짜릿한 감각이 뇌를 때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들어도 멍한 말투, 어디 나사 하나가 빠져 동작이 부자연스런 장난감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 오빠. 벌써 취했나봐." 그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눈을 흘긴다. 입을 삐쭉 내밀었다가 손에 든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후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떨어뜨렸다. 물에 젖은 티슈 위에서 담뱃불이 취이익 소리를 내며 꺼졌다. 빨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삐죽 내민 빨간 입술이 화면을 가득 채운 영화관 스크린처럼 내 마음에 들어왔다.


"경찰에 쫓겨 골목으로 도망쳤다면서요.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어요?" 그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입에 물고 잠시 머금었다가 마치 약을 털어넣고 삼키듯 고개를 살짝 뒤로 젖히며, 입에 머금은 술을 단번에 삼켰다. 그 동작이 재밌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를 빤히 보는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떨구며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재떨이에 던졌다. 길게 내뱉는 담배 연기 사이로 문득 소음이 들렸다. 시위대가 저마다 지리는 외침과 비명들, 전경들의 구령과 군화발 소리 그리고 방패를 땅에 부딪히는 소리.


"즉시 자리를 벗어나 해산하십시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여러분은 현재 불법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해산하십시오!" 그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담긴 내용이 꽤나 우습다고 여겼다. 문득 저 방송차량에 탄 여성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와중에도 드는 생각은 저 목소리 제법 매력적이라는 생각. 언제나 독특한 목소리에 끌렸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너무나 섹시했던 누군가와 독특한 발음과 울림에 끌렸던 누군가와 톤이 높은 목소리가 설레게 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뒤로 빠져!", "왼쪽으로 들어온다!", "조심해!" 빠르게 울리는 군화발 소리가 가까워지며, 여기저기서 소리가 들렸고,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쪽에서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며 전경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마치 바퀴벌레 떼를 보는 것 같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흩어져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도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가 전경 하나가 날선 방패를 휘둘러 손을 올려 막으려는 자세를 취한 사람의 손을 튕겨내고 그대로 머리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순간 피가 튄 장면이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한참을 뛰었다. 뒤에서 울리는 군화발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갑자기 앞에서 뛰던 여성이 넘어졌다. 옆에서 뛰던 다른 여성이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바로 일어나진 못했다. 나도 다가가 일으키려 했다. 두 명이 양쪽에서 부축해 간신히 일으키긴 했지만, 이대로는 더는 도망칠 수 없었다. 가까워지는 군화발 울림을 들으며 몸을 돌렸다. 맨 앞에서 달려오던 전경의 곤봉을 든 오른손이 위로 올라갔다. 반사적으로 부축을 풀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곤봉을 휘두르려는 그 전경의 방패를 어깨로 부딪혀 뒤로 밀어내고, 곧바로 몸을 틀었다. 왼쪽에서 누군가 뭔가를 휘두르는 것을 깨닫고 뒤로 펄쩍 뛰며 피했다. 곤봉이 아슬아슬하게 내 눈앞을 지나쳤다. 다음 순간 내가 어깨로 밀어냈던 그 전경이 다시 곤봉을 휘둘렀고, 그 다음엔 왼쪽 전경이 또 곤봉을 휘둘렀다. 동작이 큰 두 명의 곤봉을 연속으로 피하며 뒷걸음질 치면서 슬쩍 아까 넘어진 여성을 봤다. 시간을 버는 동안 어딘가 구석으로 숨어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어느새 다른 방향에서 온 전경들에게 잡혀 연행되고 있었다.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이번엔 오른쪽에서 뭔가가 휙 튀어나왔다. 순간 배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몸의 균형을 잃었다. 배를 감싸쥐고 앞으로 넘어지려는 찰나 목과 등에 통증을 느꼈다. 아까 두 명이 격렬하게 곤봉을 내리쳤다. 눈앞에서 번개가 치는 것처럼 순간 시력을 잃은 느낌이었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치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둥글고 만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얼마나 맞았는지 모르겠으나 팔다리가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온 몸에 힘을 줄 수 없었다. 소리를 들으니 군화발들의 뜀박질은 이제 제법 멀어져있었다. 비명 소리와 무언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들이 멀리서 들렸다.


계속 몸을 움직여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을 움직이려 집중했다. 간신히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곧 몸 여기저기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 고개를 들어보니, 가까이에 전경 하나가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고 있었다. 아직 다리 근육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잠시 더 누운 상태로 팔 다리의 각 근육 상태를 살폈다. 소리를 잘 들어보니 근처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한쪽으로 모으는 전경들이 한 둘이 아닌 듯했다.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몸을 일으켜 뛰기 시작했다. 전력질주였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다리가 무척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에서 전경이 하나 따라오는 듯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한참을 뛰어 어느 골목으로 뛰어들어갔는데, 갑자기 진압복을 입고 헬멧을 쓴 경찰을 만났다. 복장이 달랐다. 전경이 아닌 경찰이었다. 헬멧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제법 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뒤에서도 전경이 쫓아오고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달리던 탄력 그대로 그 경찰을 향해 돌진했다. 경찰은 방패를 앞세웠고, 나는 그대로 방패를 발로 밀어차고 멈췄다. 살짝 뒤로 밀렸던 그는 곤봉을 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순간 선택해야했다. 어떤 동작을 취할 것인가? 어디로 피할 것인가? 다음 순간 반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경찰이 휘두른 곤봉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피하고 반사적으로 원투 펀치를 옆구리와 가슴에 꽂아넣고 연결동작으로 어퍼컷을 턱에 꽂았다. 하지만 진압복과 헬멧 덕분에 주먹질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내 손에서 통증만 느껴졌다.


다음 순간 경찰은 다시 곤봉을 휘둘렀고, 내 오른쪽 어깨에 맞았으나, 내가 몸쪽에 바짝 붙어있었으므로 위력은 별로 없었다. 주먹으로 타격을 주지 못하니 발을 쓰꺼나 쓰러뜨려야 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빗당겨치기와 비슷한 동작으로 경찰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발로 헬멧을 걷어찼다. 헬멧 덕에 머리에 충격은 없었어도 목뼈에는 충격이 갔으리라. 곤봉을 뺏어서 도망가려 했으나, 넘어져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곤봉을 놓기 않았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곤봉을 포기하고 다시 한번 헬멧에 발길질을 해주고, 뜀박질을 시작했다.


한참을 뛰어 어느 대형서점에 들어갔고, 화장실에서 확인한 몰골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왼쪽 소매가 찢어졌고, 복부도 날카로운 방패에 옷과 피부가 찢겨있었다. 게다가 뒷 목쪽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옷은 완전히 먼지 투성이였다. 


"오빠, 잠은 집에가서 주무셔야죠. 아깐 멀쩡하더니 언제 취하셨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살피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뜨고 왼손으로 이마를 짚자, "정신 차리셔요. 오늘 그만 드셔야겠네." 라고 말하며 잔에 남은 술을 비웠다. 빈 잔에는 녹다 말은 얼음 한 조각이 남아있었다. 난 여전히 왼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로 오른손으로 내 잔을 가져다 입에 털어넣었다. 타는 듯이 뜨거운 느낌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짜릿한 쾌감이 뇌를 자극했다. 내 잔에도 이젠 녹다남은 얼음 조각 하나가 남았다.


그가 고개를 내 귓가에 대고 "사실 난 오늘 좀 더 땡기는데" 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난 이마를 짚은 손을 떼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보려고 애썼지만, 맘처럼 잘 되진 않았다. 이번엔 그가 내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눈을 마주쳤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살피며 입은 웃고 있었다. "응? 오빠 한 잔 더해도 돼?" 눈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린 그는 술병을 꺼내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번에도 정확히 삼분의 일을 채우고 얼음 세 알을 넣었다. "오빠는 여기 술 깨는 약을 드셔요." 라고 하더니 허리를 숙여 작은 플라스틱 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내밀었다.


그가 내민 병을 받아들고 잘 세워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바로 세우고 그의 눈을 보았다. 생글생글 눈웃음을 짓는 눈이 나를 마주 보았다. "바텐더 류민씨, 마지막으로 노 노래 하나 듣고 갑시.......다.", "네, 무슨 노래 들려드릴까요? 말씀하세요." 그는 무슨 곡인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다시 눈을 둥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음 그게 무슨 노래였더라. 분명 방금전까지만 해도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막상 말하려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있잖아 저기 사막에서 음 작은 가게에...... 어, 그 영화 주제곡이 진짜 유명한데." 여기까지 말하고 머리가 아파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다. 모르겠다. 그냥 담배 한 대 피우고 갈게." 담배 한 개비를 꺼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줬다. 그리고 내가 물고 있던 담배는 자신의 입에 물고, 또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 입에 물리며, 다시 불을 붙였다. 조용한 실내에 담배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나는 동시에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길게 내뿜은 연기는 서로 섞였다.


그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몇 발짝 걸어갔다. 난 그제서야 그가 건넨 술 깨는 음료를 마셨다. 음료를 다 마시고 내려놓을 때쯤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A desert road from vegas to nowhere

some place better than where you're been

A coffee machine that needs some fixing

In a little cafe just around the bend

I am calling you

Can't you hear me

I am calling you


눈을 감고 음악을 듣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그가 내 눈앞에 담배 연기를 훅 내뿜고 꽁초를 재떨이에 던졌다. 꽁초에는 빨갛게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었다. 내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자 그는 빨간 입술을 모아 내밀었다. 그리고 입으로 쪽 하고 소리를 냈다. 카드를 받아들고 몸을 돌려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가게 안 곳곳에 그려진 검은 고양이 실루엣을 본다.


그날 밤 꿈 속에 검은 고양이가 조용이 눈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이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이 빨간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났다가 허스키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귓가에 "불법 시위 중이니 나가줄래?" 라고 물었다가, 가늘고 흰 손이 담배를 내 입에 물리고 불을 붙여줬고, 이어서 차분하고 딱딱한 말투의 여경이 방송차에서 "오빠, 한 잔 더 해도 되지?" 라고 방송했고, 마지막으로 거대한 빨간 입술이 입술을 모아 쪽 하고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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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더운 날을 견뎠던 것은 휴가 덕분이었다. 올해 여름은 평창과 부산에서 재밌게 놀다 올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가를 이틀 앞두고 역기를 들다가 무릎을 다쳤다. 스내치 동작 중에 균형이 흐트러지며 무릎에 통증이 왔다. 


덕분에 부상자 신세로 휴가를 떠나 일주일을 지냈다. 일상이었다면 뭐 그리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있겠지만, 휴가라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 되었다. 다행히 나는 일시적으로 잠시 몸이 불편한 상태로 여행을 다녀왔지만, 평생 그 불편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휴가나 여행이 얼마나 힘든 경험일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흔치 않은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해 자판을 두드려 본다. 


전날 밤


휴가 가기 전날 밤엔 일찍 잠들었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해야지 생각했건만, 더위 때문에 새벽 세시쯤까지 잠들지 못했다. 분명 일찍 자려고 누웠건만, 자꾸만 땀으로 젖는 베개를 돌려 베고, 젖은 깔개를 벗어나 마른 곳으로 옮겨다니다 보니 그 시간이었다. 선풍기 두 대를 교차로 켜 놓아도 그랬다. 도무지 참지 못해서 찬 물로 샤워도 두 번이나 했다. 


아, 더위 더하기 아픈 무릎 때문에도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무심결에 조금 움직이다가 무릎 통증을 느껴 고통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새 얼음팩을 번갈아 냉동실에서 꺼내와 무릎에 대놓고 있었다. 처음엔 수건을 깔고 그 위에 댔는데, 하나도 차갑지 않더라. 그래서 맨 살에 바로 대고 수건으로 대강 고정시켜놓고 잤는데, 처음엔 살갖이 시려웠지만, 나중엔 아무렇지 않더라.


아니 생각해보니 잠시 졸다가 깨긴 했다. 그 주 내내 더위와 슬픔과 쌓여있는 일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느라 제 정신이 아니었고, 잠을 잘 자지 못해 늘 피곤한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계속 깼고, 결국 세 시가 넘어서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고 컵에 얼음을 반쯤 채워왔다. 술이라도 마셔야 잠이 올 것 같아서였다. 다시 냉장고를 열어봐도 마땅한 안주는 없었다. 휴가 가기 전에 집에 음식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음식을 사지 않았고, 있던 음식들은 이삼일 동안 다 먹어치웠다. 라면이 두 개 남아있었는데, 끓여 먹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그 더위에 가스불을 켜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생라면을 부셔서 안주로 삼았다.


아마 얼음물을 탄 소주는 잘 넘어갔다. 한 병을 다 비우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병을 다 비우고도 생라면이 남아서 술병을 치우고도 남은 라면을 오독오독 씹어먹느라 시간이 좀 더 걸렸다. 마침내 라면을 다 먹어치우고 잠시 고민했다.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팔 힘으로 몸을 지탱하며 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순간적으로 무릎에 느껴지는 통증을 견디며, 화장실로 가서 이를 닦고 돌아와서 드러누울까, 아니면 지금 앉은 자세에서 그냥 뒤로 드러누울까. 아주 잠시 머리속에서 고민하긴 했지만, 답은 뻔했다. 되도록이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라는 생각을 하며 양치 하지 않고 누운 행위를 스스로 정당화했다. 아까 그 아픈 무릎으로 소주도 꺼내오고, 얼음도 꺼내오고, 라면도 가져왔으면서 말이다.


잠들기 전에 계속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씻은 듯이 무릎이 나아서 즐거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난 종교를 믿지 않으니 기도 따위 하진 않았지만, 그날 만큼은 아마 기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첫날 아침


혹시 늦게 일어날까봐 알람을 여러개 맞춰놓고 잠들었는데, 첫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깼다. 이 더위에 늦게 일어날 걱정 따위는 필요도 없었다. 다만 눈도 뜨고 정신도 들긴 했는데, 몸을 움직이기가 너무도 싫었다. 혹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살짝 다리를 움직여봤다가 무릎 뼈와 인대 사이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이를 악 물고 신음을 흘려야 했다. 수건으로 대충 고정시켜 둔 얼음팩이 다 녹아 흐물거리는 상태로 무릎에 붙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하루 밤 얼음 찜질을 한다고 늘어난 인대가 다 나을 리는 없었다. 부상 당한 그 순간 느꼈다. 어쩌면 한 달 이상, 심하면 두어달 고생하겠구나. 근데 하루만에 낫길 바라다니. 근데 이 다리로 진짜 휴가를 가긴 갈 수 있는 걸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데, 아니 일어나는 것 조차 너무나도 힘들고 옷을 입는 일만 해도 꽉 깨문 잇몸 사이로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해내는 상태인데, 어떻게 휴가를 갈 수 있지? 머리는 절로 혹시라도 있을 불상사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함께 들어가지 못하고, 아이들만 계곡에 들어가서 놀다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무릎으로 뛰어가지도 못할텐데. 불길한 생각은 한 번 들기 시작하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이번엔 작은 아이가 혼자 신나서 뛰어가는데, 나는 무릎 때문에 쫓아가지 못하고,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자동차가 아이를 치어버리는 상상이라던가, 크고 작은 바위를 오르내리며 계곡을 지나는데, 큰 바위 위에서 작은 아이가 무서워하며 움직이지 못하는데, 나는 무릎 때문에 아이를 잡아주거나 안아서 내려주지 못하고, 순간 몸을 휘청한 아이가 바위에서 떨어져 다치는 상상이라던가.


암튼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불길한 상상들만 하다가 시간을 제법 보내다가 이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어서야, 신음 소리와 함께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어제 생각엔 이 무릎 상태에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아이들을 데리러 가서 아이들의 준비 상태를 챙긴 후에 함께 여행갈 가족을 만나러 걸어가려 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한 발짝, 두 발짝 집안에서 씻고, 짐을 챙기느라 움직이면서 그 생각은 싹 지워버렸다. 이 무릎으로 아이들을 데리러 갈 수 없었다. 우리를 태워가기로 한, 같이 여행갈 가족의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릎 부상으로 움직이기 힘들어요. 죄송하지만, 저희 집으로 데리러 와주시면 같이 애들 만나러 가야겠어요. 라고 쓰고 집 주소를 덧붙였다.


그리고 싸놓은 짐을 점검하다 보니, 수영복을 빠뜨렸다. 무릎이 아프니 무의식적으로 수영복을 챙기지 않았던 것인가. 가져가도 쓸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걸까? 그래도 아무리 무릎이 이래도 애들만 계곡과 바다에 넣어둘 수는 없으니, 수영복은 꼭 필요했다. 근데 어디있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사 후 수영복을 어디다 정리해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수영복이 있을만한 공간들을 다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없었다. 여기도, 저기도, 저 구석에도, 이 구석에도 없었다. 결국 나를 데리러 집 근처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을 때까지도 수영복을 찾지 못했다. 포기하고 그냥 가야하나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작은 방 저 구석에 처박힌 잡동사니가 담긴 종이가방에 있을 것 같았다. 그 종이가방을 찾기 위해 한참을 뒤져서 간신히 그 안에서 수영복이 담긴 비닐봉지를 발견했다.


차를 세워두고 기다리던 이는 내 절뚝거리는 걸음을 보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나는 비탈길을 최대한 빨리 걸어내려가려고 애썼건만, 뒤뚱뒤뚱 절뚝절뚝 걸음은 자꾸만 나를 붙잡았다. 차에 타는 것도 문제였다. 차에 타려면 반드시 무릎을 굽혀야 했고, 그 순간 뭔가 날카로운 것이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그리고 뒤이어 기분 나쁘기 길게 이어지는 둔중한 통증을 느꼈다. 집에서 계단을 내려와 비탈길을 걸어서 차에 타기까지 그 짧은 길이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도 된 듯 길게 느껴졌고, 그 여정 끝네 털썩 앞 좌석에 몸을 묻은 나는 마치 올림픽 경기장에서 100미터 달리기 결승전이라도 뛴 것처럼 피곤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휴가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운전 교대


몇 년 전까지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집으로 가면서 큰 아이에게 전화했다. 짐 다 챙겼으면 준비해서 집 앞으로 나와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말했지만, 결국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신발도 신지 않고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역시 그랬다. 우린 집 앞에 도착해서 한참 기다렸다. 다리가 괜찮았다면 내가 올라가서 애들을 데리고 내려왔겠지만, 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탈때 느낄 그 고통을 떠올리니 여기서 꼼짝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가방을 하나씩 메고 내려왔다. 나는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손짓으로 애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뒷 좌석에, 함께 여행가는 가족 3형제 중에 유일한 딸인 둘째 옆에 차례로 탔다. 애들은 서로 인사를 했고, 나는 운적석에 앉은 이에게 길을 알려주며 간접적으로 출발을 명했다.


평창까지는 생각보다 먼 길이라 도중에 운전을 교대해 줄 생각이었다. 가다가 적당히 휴게소에서 어른들은 커피를 한 잔씩 하고, 애들은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씩 물려주고 잠시 쉬다가 다시 출발할 때는 내가 운전할 생각이었다. 가능하려나? 이 다리로. 생각해보니 안 될 것도 없었다. 나는 무릎을 굽힐 때 통증을 느끼지만, 어차피 브레이크와 엑셀을 밟기 위해 오른발은 편 상태로 있어야 하고, 운전을 하는 행위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운전대를 잡은 이는 시간이 흐를 수록 길이 막히니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서 쉬던가 밥을 먹자 했다. 가는 도중에 다른 차로 이동중인 이 가족의 아내와 아들들은 점심을 어떻게 할 건지, 따로 각자 먹을지, 아니면 어느 지점을 정해놓고 만나서 함께 먹을지 문자로 물었다. 운전중일테니 일부러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한참 후에 답이 왔는데, 쿨하게 각자 먹자고 했다. 우린 평창에 들어와서 목적지인 계곡 입구까지 들어와서 식당을 찾아 주차했다. 차에 타는 일보다 차에서 내리는 일은 생각보다 덜 힘들었다. 차문을 완전히 끝까지 열어젖히고, 무릎을 편 상태로 오른발을 콤파스 돌리듯 돌려 차 밖으로 뻗고, 왼발에 힘을 줘서 엉덩이를 들면 일어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제서야 아빠가 무릎을 다쳤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큰 아이는 걱정스러운지 절뚝이는 내 곁으로 와서 부축하려고 했다. 작은 아이는 평소처럼 내 옆에서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부터 아이들은 휴가기간 내내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다친 아빠를 돌보는 기특한 아이들.


긴 시간 운전한 이는 이 동네 막거리를 마시고 싶어했다. 내가 운전할테니 걱정말고 마시라고 했다. 나는 맛만 보려고 반 잔만 마셨다. 두 집의 딸들은 입맛이 완전히 달랐다. 저쪽집 딸은 동태찌게를 시켜 맛있게 먹었고, 우리집 딸들은 감자전으로 배를 채웠다. 음식은 맛있었다. 특히 도토리묵이 정말 맛있었고, 막걸리도 맛있었다. 운전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반 잔 밖에 못 마신 것이 살짝 아쉽긴 했으나, 그날 밤에 많이 마실 예정이었으니 괜찮았다.


약속대로 운전대를 잡고 출발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별 어려움은 없었다. 차가 낯설어서 차에 익숙해지는 데 조금 시간이 필요했을 뿐. 무사히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계곡을 오르는 외길은 좁았고, 시간이 점심 무렵이라 내려오는 차들이 많았고, 좁은 길을 양쪽 차들이 간신히 지나는 일이 좀 무서웠다. 특히 남의 차를 몰고 있는 입장에서 이 차의 너비를 눈대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계곡


숙소에 도착해 다른 차를 몰고 온 그 집 식구들과 합류하고, 아직 방을 청소중이라고 해서 먼저 계곡을 향했다. 그 계곡으로 자갈과 바위로 된 험한 길을 내려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갈 수 있겠지, 설마 못 가겠나 싶었다. 나중에 막상 가보니 진짜 못 내려가겠더라. 그래도 애들이 계곡에서 놀려면 내가 함께 내려가야 하니 억지로 고통을 참으며 내려갔는데, 정말 아프고 힘들었다.


그래도 계곡 물에 발 담그고 평상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기분은 진짜 짜릿했다. 아이들도 신나게 잘 놀았다. 정말 시원했다. 서울에서 느꼈던 그 끔찍한 더위는 남의 나라 얘기 같았다. 그 고통을 참고 힘들게 내려오길 잘했다 싶었다. 하지만 앉아 있는 내내 무릎이 욱씬욱씬 아팠다. 그때까지만해도 압박붕대를 구하지 못해 맨 무릎으로 다녔다. 만약 압박붕대를 처음부터 구했으면 그렇게까지 악화되지 않았을텐데, 처음 집을 나설 때는 그 생각을 못했고, 나중에 생각이 난 후에는 살 곳을 찾지 못했다.


오후 늦게 이제는 올라가려고 하는데, 그때부터 다리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무릎 통증 만이 아니라 무릎 주위 근육들이 다 무리를 해서 더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다리인데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고 감각도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큰 아이가 내 상태를 보더니 다가와 부축했다. 하지만 그 오르막길은 누가 누굴 부축해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다행히 내 무릎은 내려가는 계단과 내리막길이 힘들지, 올라가는 계단과 오르막길은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비록 울퉁불퉁 불규칙한 바위를 요리조리 잘 밟고 올라야 했지만. 어쨌든 아이를 안심시켜 먼저 올려보내고, 나도 뒤따라 힘겹게 올라갔다.


압박붕대


저녁이 되어 함께 온 가족의 남편은 숯불에 고기를 구울 준비를 했고, 아내는 밥과 야채와 애들 먹을 거리들을 챙겼다. 나는 뭐하나 도와주지 못하고 내 말을 듣지 않는 내 다리를 원망하고 있었다. 무리해서 계곡을 다녀온 덕분에 이제 걸음을 걷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도중에 장을 보러 나간 이에게 압박붕대를 구해달라 했건만, 파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결국 붕대를 구하지 못한 채로 고기를 먹으로 방을 나섰다. 하필 숙소가 2층이라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큰 아이는 이것저것 음식과 그릇과 수저 등을 나르느라 바빴고, 한 발 한 발 다리를 질질 끌며 고기를 먹으러 계단으르 내려가는 나와 옆에서 뭐라도 도와주려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지켜보는 작은 아이를 펜션을 운영하는 선배님이 보셨다. 아까 낮에 마주쳤을 때도 다친 다리를 보고 걱정하셨는데, 이제 잘 걷지도 못하는 날 보고는 뭐가 필요냐고, 지팡이를 줄까 물으신다. 압박붕대가 필요하다 했더니, 구해보겠다고 인근 펜션 사장님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하셨다.  


마침내 함께 온 두 가족 8명이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저쪽 집 남편은 열심히 고기를 구웠고, 아내는 애들 밥을 챙겨먹였다. 나는 그집 남편을 도으려 불판 앞에 섰으나, 별 도움은 못 되고 그냥 시늉만 하며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고기도 거의 다 구워서 맥주를 마시며 고기를 먹고 있는데, 펜션 선배님이 오셔서 압박붕대를 내밀었다. 마침 근처 한 군데서 있다고 해서 가지러 다녀오신 듯하다.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그자리에서 붕대를 감았다. 무릎 때문에 고생한 시간이 길어서 붕대를 감는 건 너무나도 익숙했다. 잠시 후에 선배님이 소주를 두 병 갖고 오셨다. 우리도 소주를 사오긴 했는데, 냉장고에서 꺼내오질 않고 맥주만 홀짝이고 있었다. 아마 내가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면 제일 먼저 소주부터 가지러 갔을텐데, 누구 심부름 시키기도 미안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선배님이 구원자였다. 그때부터 우리 자리에 합석한 선배님과 어른 3명은 늦은 시간까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셨다.


술. 술. 술


유쾌한 시간이었고, 서로 많은 얘길 나누며 교감도 많이 했다. 그날 신기하게도 술이 잘 들어갔다.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술을 마셨다. 이상하게 엄청나게 많이 마셨는데도 취하지 않았다. 선배님은 가져온 소주병이 비면 금방 또 창고로 가서 서너병을 가져오셨다. 아이들은 금새 방으로 올라갔고, 어른들만 남았는데, 그 가족의 아내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대화만 나눴고, 남자 셋이서 소주를 마셨는데, 주로 선배님과 내가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랐다. 암튼 셋이서 몇 병이나 마셨던가? 나중에 세보니 놀란만한 숫자였다. 


늦은 시간 선배님은 조금 취하셔서 주무시러 가시고, 우린 먹은 자리를 대강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가서 더 마셨다. 그 집 남편은 좀 마시다가 먼저 자러 갔다. 특이하게 본인이 코를 매우 심하게 곤다고, 특히 술 마신 날엔 장난 아니라고 말하며 방에서 자지 않고, 혼자 차에서 자겠다고 나갔다. 복층 구조라 그 집 아이들 셋과 아내는 계단 위 다락방처럼 생긴 공간에 누웠다. 덕분에 나와 우리 애들이 아랫층을 다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이미 술을 제법 마셨음에도, 평소였으면 벌써 뻗어버렸을 양이었는데 너무 멀쩡한 게 신기했다. 그래서 더 마셨다. 애들은 내 양 옆에서 안주를 주워먹으며 조잘조잘 떠들어댔다. 어차피 휴가라 애들이 늦은 시간까지 안 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원하는대로 하도록 두었다.


나는 우리가 사온 소주를 다 마시고, 냉장고를 뒤져 막걸리도 큰 통을 하나 다 비우고서야 상을 대강 치우고 누웠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날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게 술의 힘으로 다리의 통증을 잊으려는 무의식 때문이 아닐까. 아니 뭐 나는 늘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니 그런 이유를 붙이는 게 우습긴 하다. 다음날 아침에 다락방에서 잤던 그집 아내의 말을 들으니 새벽에 내가 통증 때문에 신음소리를 여러번 냈다고 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간단히 정리만 하는 정도로 쓸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쓰다간 둘째날부터 마지막날까지 다 쓰면 하루종일 걸려도 모자랄 것 같으니, 간단히 요약만 해야겠다. 우린 평창에서 2박3일을 놀았다. 압박붕대를 감고 나서는 한결 움직이기가 수월했다. 푹 잔 덕분에 근육 피로도 조금은 풀렸다. 둘째날은 계곡에서 놀고, 셋째날은 짐을 싸서 강릉으로 갔다. 강릉에도 송정해수욕장이 있던데, 거기서 저쪽집 식구들은 바다에 들어가 놀았고, 우리 식구들은 곧 부산가는 버스를 타야해서 바닷물에는 발만 담갔다가 말리고, 해송이 만든 그늘에서 쉬었다. 그리고 부산행 버스를 탔다.


다른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 일은 처음이었다. 결혼 생활을 할 때도 아내 친구가 동행한 적은 있었지만, 가족 단위로 함께 움직인 적은 없었다. 다치지 않았다면 훨씬 더 재밌게 잘 놀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재밌게 잘 지내다 왔다. 그 집 부부가 많이 도와주고 배려해준 덕분이다. 그집 남편은 묵묵히 잘 챙겨주고 도와주었고, 그 집 아내 역시 내내 먹을 것들을 챙겨주고 사소한 것들까지 잘 배려해줬다. 함께였기에 여행을 할 수 었었다. 고마웠다!


부산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여동생은 다친 무릎을 보고 난리가 났다. 이 무릎으로 휴가를 왔냐고 타박하고, 애들 데리고 놀러가려고 하면, 다리도 성치 않은 놈이 애들 데리고 어떻게 다닐 거냐고 난리쳐서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우리 애들과 조카들까지 5명을 데리고 해수욕장을 가려고 했는데, 하도 식구들이 난리를 쳐서 간신히 설득했다. 아버지가 동행해서 해수욕장을 한 번 겨우 다녀왔다. 해마다 휴가로 부산에 오면 적어도 두세번 이상 바다에 다녀왔는데, 아니 애초에 그러려고 휴가를 오는 건데. 아까운 시간만 실내에 에어컨 켜고 보냈다. 그 며칠간 내내 시끄러운 조카들의 싸우는 소리, 노는 소리를 들으며 지냈다. 조카들은 예전처럼 놀아달라 하는데, 다리가 아프니 예전처럼 놀아주지 못하고 나는 내내 잠만 잤다. 어차피 나가 놀지도 못하니 회복이라도 확실히 하자 싶었다.


어머니의 성화로 한의원에 한 번 다녀왔다가 원장의 어이없는 행동에 질려서 다시는 안 가겠다고 선언했고, 아버지 차를 몰고 근처 마트를 한 번 다녀왔다. 토요일엔 주말 부부인 매제가 돌아와서 온 식구가 아버지 생신을 축하하러 외식을 했다.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는 해변 근처의 큰 식당이었는데 층별로 취급하는 요리가 달랐다. 우린 오리고기를 먹었는데, 고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일하는 직원들의 태도는 나빴고, 가격은 더 나빴다.


평창에서도 부산에서도 내내 짐만 되는 내 처지가 한심해서 설겆이와 청소 등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최대한 하려고 노력했다. 다들 다리도 성치 않은데 그냥 두라고 했지만, 걷는 게 힘들지 가만히 서 있는 건 괜찮으니 서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 괜찮다. 오히려 의자 없이 바닥에 앉거나 누워 있는 일이 내게는 더 힘든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이삼일 지나자 무릎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아직 완전히 정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혀 굽히지 못하던 무릎을 살짝 굽힐 수 있게 되었고,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혹시 실수로 무릎이 접히며 다시 부상을 당할까봐 여전히 압박붕대는 감고 다니지만, 붕대가 없어도 걷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예상보다 회복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부산에서 어머니가 계속 전자침이라는 뾰족한 침이 네 귀퉁에 각각 달린 네모난 플라스틱으로 계속 무릎을 찔렀는데, 그 덕분일 것이다. 또 조그만 크기의 저주파 자극기를 하루에 이삼십분씩 하고 앉아 있었는데, 그것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그 두 가지가 억지로 움직이느라 혹사당한 무릎 주변 근육들을 풀어주고,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겠지만, 정작 다친 부위인 인대에는 크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대는 저 뼈 안쪽 깊숙한 곳에 있어서 직접 맛사지하거나 치료할 수 없으니까.


이젠 더이상 혼자 누워있다가 일어서는 일이 무섭거나 고통스럽지 않고, 내려가는 계단과 내리막길이 그리 공포스럽지 않다. 물론 혹시라도 발을 잘못디뎌 악화될까봐 조심하기는 한다. 조심조심 잘 회복하고 남은 여름을 잘 버텨야겠다.


마지막은 역시 책 이야기












페이스북에서 이 책 소개를 봤다. 우리 딸들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애들엄마가 사줄 수도 있겠지만, 그전에 내가 먼저 사줘야겠다. 알라딘에 주문하기 보다는 동네서점에 애들이랑 놀러가서 사주는 것이 더 좋겠지. 주말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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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8-09 0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생많으셨네요....
군대에서 10km 마라톤 참가 했다가 무릎 인댄지 뭔지 나가가지고 석 달을 절뚝이며 생활했던 기억이 납니다..... 계단 오르는 것보다 내려갈 때 지옥이었습니다만,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더라고요 ㅋㅋㅋㅋㅋ 개자식들.....

감은빛 2018-08-22 10:28   좋아요 0 | URL
군대에서 마란톤에 참여했군요.

저는 신병교육대 행군 때, 혹한기 훈련 때 이렇게 두 번 훈련 중에 무릎을 다쳤어요.
무릎을 아예 접지 못하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건만 병원에 제대로 보내주지 않았어요.
나중에 연대 의무대와 사단 의무대를 거쳐 육군병원에 갔는데,
군의관이란 작자가 자긴 왜 이런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던 표정이 기억나네요.

책읽는나무 2018-08-09 0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하다가 다치는 사람들이 많다던데....저도 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운동만 하고 오면 요즘 발목,무릎,손목같은 관절쪽이 시큰하더라구요.그래서 좀 주의깊게 읽었더랬습니다.
더운 여름날 그것도 휴가까지 가야했던 상황에서 힘드셨겠습니다.
빨리 완쾌되시길요.^^

감은빛 2018-08-22 10:36   좋아요 0 | URL
네, 운동은 늘 부상의 위험을 안고 있죠.
특히 관절은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 그게 맘처럼 되질 않네요.
마음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책읽는나무님도 운동할 때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

2018-08-09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2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09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릎이 아픈 와중에 소주를 마신 감은빛님 모습을 보니 저도 그런 비슷한 행동을 한 적이 있어요.

무릎에 통풍이 왔는데 입맛이 없어서 감자칩을 안주로 삼아 맥주를 마셨어요. 그때는 무릎 통증의 원인을 모르고 있었어요. 다음 날에도 통증이 남아 있어서 병원에 가봤는데, 그때 통풍 진단을 받았어요.. 의사 선생이 전날에 먹은 음식을 묻길래, 술 마셨다고 하니까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어요.. ㅎㅎㅎ

감은빛 2018-08-22 10:38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염증이 생기거나 한 건 아니라서
술이 별로 문제될 건 없었어요.
통풍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통풍에 맥주는 진짜 문제 인거 아닌가 싶네요.

암튼 그래도 먹고 싶을 땐 먹고, 마시고 싶을 땐 마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뭐 얼마나 살지도 모르는 인생 술 정도는 마셔도 되는거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

페크pek0501 2018-08-16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 나아지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여행을 가지 않은 것보다 간 것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집에만 있으면 무릎 통증에만 집중하게 되니까요. 그럴 땐 정신 분산을 위해서라도 밖에 나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좀 힘들어서 그렇지만.

딸들을 위한 아빠의 수고... 잊혀지지 않을 여행을 하셨다고 생각드네요.
완쾌되시길 바랍니다.

감은빛 2018-08-22 10:40   좋아요 0 | URL
네, 페크님. 염려해주신 덕분에 꾸준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남들은 그 무릎으로 무슨 휴가냐? 여행이냐? 했지만,
저는 정말 너무나도 당연하게 가야하는 거였어요.
말씀처럼 혼자 그 더운 여름에 찜통같은 방에 갇혀 있었다면
아마 미쳐버렸거나 쪄죽었을 것 같아요.
 

난닝구 아이가?


한참 지난 이야기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 아마 5월 중순이었을 것 같다. 올해는 5월 초부터 더웠다. 그 무렵 교육청 주최 강연을 가서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이미 아열대 기후로 바뀌는 중이라고 말했고, 증거로 5월 초부터 더워지는 바로 이 날씨와 장마가 사라지고 국지적으로 예상치 못한 곳에 단발적으로 쏟아지는 소나기(스콜)를 들었다. 두 가지 증거를 듣고 거의 대부분의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암튼 시기로 보면 분명 봄이어야 하건만, 본격적으로 더위가 시작되었던 5월 어느 날 전국연합회와 산업통상자원부 간의 간담회가 있었다. 정부가 작년 연말에 크게 선언했으나, 실상 큰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재생에너지3020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확인하고 의견을 내기 위한 만남이었다. 평소라면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애'처럼)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 입고 다니지만, 그날처럼 외부 공식 일정이 있는 날엔 그래도 (흔히 가다마이라고 부르는) 정장을 입고 나간다. 다만 속에 와이셔츠를 입기는 너무 덥고 귀찮아서, 그냥 반팔 흰 면 티셔츠를 받쳐 입는 편이다. 그날도 흰 반팔 셔츠 위에 흐린 하늘색 정장 윗 옷을 입고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


앞의 일정이 늦게 끝나서 간담회 시간에 늦어버렸고, 1분이라도 더 일찍 가려고 그 더운 날에 엄청난 거리를 뛰었고, 결국 간담회 장소에 도착했을 때, 내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래서 정장을 벗고, 그냥 면 티셔츠 차림으로 앉아있었다. 아마 셔츠가 땀에 젖어 있어서 내 몸이 비쳐보였을 수 있다. 난 더워서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셔츠는 얇은 면이었으므로 분명 그랬을 것이다. 간담회를 마치고 전국연합회 임직원 분들이 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는데, 연세가 많으신 (최고 연장자이신) 이사장님 한 분이 나를 보고 한 마디 했다. "난닝구 아이가?" 그때까지도 하늘색 정장은 팔에 걸어두고 흰 면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이사장님은 손으로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순간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오륙십대 임직원들이 대부분 웃었다. 


난 순간적으로 무척 당황해서 아무런 대꾸를 못했다. 대부분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중반 여성인 이들 사이에서 거의 가장 어린 편에 속한 (30대 여성이 한 명 있긴 했다.) 나는 좀 많이 부끄러웠다. 그때 50대 중반의 사무국장님 한 분이 "아유! 이사장님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난닝구 안 입어요! 요즘 누가 난닝구를 입어요?" 라고 말해줘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내 어깨를 짚었던 이사장님은 "아니 나는 옷이 좀 야한 것 같아서" 라고 말 꼬리를 흐렸다. 그때서야 땀에 젖은 옷 때문에 다 비쳤겠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이 찾아와 더 부끄러웠다.


나를 알더라도 여름에 나를 만나보지 못했던 분들이 여름에 날 만나면 다들 놀란다. 옷에 가려서 몰랐는데, 생각보다 몸이 좋네. 뭐 이런 반응이다. 키도 작고 체격도 작고, 근육의 크기도 크지 않지만, 근 선명도가 좋은 편이고, 승모근과 흉근이 발달한 편이라서 그런 반응을 자주 접한다.


다시 복근 만들기


작년에 큰 맘 먹고 실내철봉과 역기를 구매하고 운동을 좀 열심히 했다. 휴가를 가기 직전이었던 7월 말에 복근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몸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몸은 딱 가을까지만 유효했다. 가을 중반에 어깨를 다쳐 운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팔을 들어올릴 수 없어서 옷도 혼자 입고 벗기 어려웠는데, 어떻게 철봉에 매달리겠나? 어깨 통증은 나을 듯 낫지 않고 계속 이어졌고, 나는 계속 운동을 다시 하지 못했다. 그 동안 만들어놓은 복근이 뱃살에 덮히기 시작했다.


해마다 늦봄이나 초여름부터 여름 휴가 대비 단기 몸매 만들기에 돌입하곤 한다. 근데 올해는 여러 바쁜 일들로 많이 늦어졌다. 여름이 닥치고도 한참 후에야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바쁘다는 핑계 외에도 또 관절 통증에 시달릴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가끔 이유 없이 온몸의 관절이 번갈아가며 아플 때가 있다. 어깨와 팔굼치와 손목과 손가락 관절 그리고 골반과 무릎과 발목까지. 어떤 날엔 손가락, 어떤 날엔 손목, 또 어떤 날엔 어깨가, 어떤 날엔 무릎이, 또 다른 날엔 발목이 아팠다. 그래서 다시 철봉에 매달리기가 두려웠고, 역기를 들어올리기가 두려웠다.


어느 날 친구와 밥을 먹고 나왔는데, 친구가 내 배를 보더니 너도 이제 나이 먹으니까 별 수 없구나 라고 한 마디 했다.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어서 바로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친구의 말 덕분에 깨달음이 있었다. 난 이제 더이상 젊지 않다. 관절 통증이 두렵다면 젊을 때처럼 스트레칭 없이 운동하면 안 된다. 운동 전과 후에 충분히 스트레칭을 해줘야 조금이라도 관절 통증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집에 있던 스트레칭 책을 다시 찾아 꺼내고, 알라딘에서 스트레칭 책을 또 하나 샀다.


그런데 습관은 어쩔수 없나보다. 아니 성격이 급해서 그런가. 자꾸 아주 기본적인 스트레칭만 끝내고 철봉에 매달려 있는 내 모습을 본다.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스트레칭을 익히고, 습관으로 만드는 노력을 해봐야겠다.


아, 그리고 올해도 여름 휴가를 앞 둔 지금 작년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봐줄만하게 복근을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속을 비우고 거울 앞에 서면 복근이 선명하지만, 밥을 먹고 나면 또 배가 나온다. 하루 한 번 아침에만 유효한 복근이라니!


무릎 부상


바빠서 이 글을 쓰다 저장하고 또 쓰다 저장해두고 있었는데, 글을 쓰던 중이었던 엊그제 운동하다가 무릎을 다쳤다. 유연성이 크게 떨어져서 그런지 역기를 들어올리는 동작에서 자꾸 자세가 잘 나오지 않았다. 사전운동으로 스트레칭을 하긴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건지, 스내치를 하는 와중에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자꾸 무릎이 아팠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역기를 들어올리는 중에 무릎에 큰 통증이 왔다. 본능적으로 인대 손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부상은 몇 달짜리일까? 작년 어깨 부상은 적어도 7개월은 갔는데. 아니 근데 하필 여름 휴가를 바로 앞두고 무릎 부상이라니. 이 무릎으로 어떻게 애들을 데리고 재밌게 놀 수 있단 말인가? 작은 아이는 나 없이 물 속에서 노는 것이 불안한데 어쩌나?


어제는 아침에 일어나 사무실에 출근하기도 무척 힘들었다. 당장 누운 자세에서 무릎을 굽히지 않고 편 상태로 일어나는 일 자체가 힘들었고, 씻고 옷을 입을 때에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한 걸음 한 걸음이 엄청난 고통이었다. 제일 아플 때가 계단을 내려갈 때와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다. 우리 집은 2층이고, 우리 사무실은 3층이고, 우리 집은 달동네 꼭대기라서 버스정류장까지 엄청 가파르고 긴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 절뚝절뚝 거리며 걷는 꼴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우습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우연히 동네 의료생협에서 활동하는 운동처방사를 만났다. 그 분께 무릎 부상에 대해 말했더니, 초기에는 얼음찜질을 계속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는 온찜질을 해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리고 평소 운동 중에 어깨나 무릎이 아픈 경우가 많다고 했더니, 무릎을 잘 다치는 사람은 다리 근육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했다. 대퇴부 근육은 많은데, 뒤쪽 햄스트링쪽 근육이 약하거나, 바깥쪽 근육에 비해 안쪽 내전근쪽이 부실하면 그런 경향이 크다고 했다. 그 분의 시선이 내 허벅지로 향했다.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대번에 파악했을 것이다. 딱 그 분의 설명이 정확하게 내 상황이었다. 무릎 부상으로 인한 운동 처방 상담 때문이었지만, 젊은 여성의 시선이 내 허벅지로 향하니 조금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분은 다리 근육을 골고루 발달시킬 수 있는 운동법 몇 가지를 알려줬다. 당분간 스내치를 비롯해 무릎에 부담주는 운동은 금물이라고 덧붙였다. 아마 무릎이 아파서 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살인적인 더위


이사한 집은 거의 달동네라 부를만한 곳의 꼭대기라서 창 밖으로 시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이 멋지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다른 이의 시선을 신경쓸 필요가 없어서 좋다. 조금 떨어진 곳의 건물 옥상에서 보면 어쩌면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이사 후 약 3달이 지나도록 그 건물 옥상에 사람이 있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렇게 탁 트인 전망을 제공하는 창문이 있어서 바람이 잘 들어올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이상하게 이 집엔 바람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집 뒤편 창문은 그렇게 멋진 전망을 가졌지만, 골목길과 접한 앞쪽은 바로 골목 저쪽 건물과 가까워 창문을 열기 어렵다. 게다가 앞 베란다라고 좁게 만들어놓은 공간이 매우 실용적이지 못해서 그 공간을 쓰지 못하고 있고, 그 쪽 창문을 아예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양쪽이 통해야 집이 좀 시원할텐데, 그렇지 못하니 이 더위에 집은 그야말로 찜통이 되었다. 한 낮의 온도는 32도, 습도는 67%가 넘었다.


알몸으로 생활하기


하루종일 집에 있는 주말이면 아침부터 몇 번이나 샤워를 하고 선풍기 앞을 떠나지 않아도 덥다. 아니 딱 선풍기 바람이 닿는 곳만 견딜만하고, 다른 곳은 덥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는 것도 덥고 귀찮아서 아예 아무것도 입지 않고 생활한다. 평소 밤에 집에 들어오면 오르막길을 올라오느라 속옷까지 다 땀에 젖는다. 셔츠를 벗어보면 땀에 완전히 젖어있다. 옷을 다 벗어던지고, 바로 씻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고 운동을 시작한다. 알몸으로.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고, 레그레이즈와 딥스를 연결동작으로 한다. 이 동작은 약 1년 넘게 실내 철봉에 매달려 놀다가 발견했는데, 내 기준으로 전체적인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힘들거나 지루하지 않은 좋은 연결동작이다. 그리고 다시 잠시 스트레칭을 해주고, 이번엔 역기를 든다. 어떤 날엔 스내치를, 어떤 날엔 데드리프트를 주로 하고, 가끔 클린 앤 저크를 한다. 여기까지 하고 하체 운동으로 에어스퀏이나 런지를 하는 날이 많고, 하체운동을 건너뛰고 마무리 운동으로 케틀벨 스윙을 하기도 한다. 어떤 날엔 역기 데드리프트를 생략하고 케틀벨 데드리프트를 하기도 한다. 


가장 하고 싶은 운동은 타바타 버피테스트인데, 집이 2층이고 주로 운동하는 시간이 밤이라 점프를 할 수 없어서 불가능하다. 이사하기 전 반지하 집에서는 새벽에도 버피테스트 뿐 아니라 서전트 점프도 가능했는데, 이런 점은 아쉽다. 타바타 인터벌 운동은 최근엔 별로 시도해보지 않았는데, 휴가가 코 앞으로 다가온 이번 주엔 다양한 운동을 타바타 인터벌 방식으로 해볼 생각이다.


암튼 이렇게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가량 운동을 한 후에야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와 가벼운 안주를 꺼내와 먹고 잠든다. 그 동안에도 계속 옷은 입지 않는다. 아침에 깨서 화장실을 다녀온 후 출근 준비를 할 때에야 비로소 속옷을 입는다. 혼자 있는 날에만 가능한 일이고, 아이들이 오는 날엔 당연히 옷을 입고 지낸다. 그나마 혼자 있는 날에 이렇게 벗고 살 수 있으니, 이 살인적인 더위를 에어콘 없이 보낼 수 있는 듯 하다.


사실 지난 일요일 아침에 깨니 애들 엄마가 그 집에 에어컨 놓을 공간이 있으면, 주문해주겠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아마도 우리집에 있을 동안 더위로 힘들어 할 아이들을 위해서 보냈으리라. 잠시 갈등했다. 정말 덥기 때문에 에어컨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환경운동가로서, 에너지 활동가로서의 정체성과 에어컨을 단 이후의 전기요금에 대한 생각도 들고, 또 한 편으로 앞 베란다 쪽 벽면에 에어컨을 설치할 공간이 마땅치 않은 이유도 있다. 또 내 의지와 관계없이 오래지 않아 이사를 나가야 할텐데, 그때 에어컨 설치비가 추가로 드는 것도 역시 고려해야 한다. 암튼 여러가지 생각이 한번에 들면서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함께 더위를 견뎌야 할 애들 생각도 안 할 수가 없다.


에어컨과 기후변화


에어컨의 유혹을 떨칠 수 있었던 건, 두 대의 선풍기 덕분이다. 앞에서 선풍기가 닿는 곳만 시원하고 다른 부위는 덥다고 했지만, 양쪽에서 두 대의 선풍기를 교차로 틀어놓으면 훨씬 더 견딜만하다. 아이들이 오는 날엔 당연히 그렇게 해서 세명이 함께 더위를 식힌다. 모르겠다. 날이 더 더워지면 후회할 지 모르지만, 일단 아직은 에어컨 없이 버텨보고 싶다. 애들이 오는 날엔 제일 더운 한 낮에 집이 아닌 시원한 곳으로 피서를 가도 될 일이다.


단순히 내가 에너지 활동가라서 에어컨을 안 쓰겠다는 아니다. 나도 더울 때는 되도록 온도를 많이 낮추지 않고 에어컨을 켤 수 밖에 없다. 에어컨이 있다면 말이다. 근데 에어컨은 기본적으로 내가 시원하기 위해 세상을 더 뜨겁게 만드는 이기적인 물건이다. 이 더위에 에어컨 실외기가 몰려있는 건물 뒤편을 지나가야 할 일이 있다면 이해할 것이다.


사실 에어컨을 켜서 전기 사용량이 늘어나면 그만큼 대기중 온실가스 농도가 올라가고, 그럼 기후변화는 더 빨리 심해지고, 그럼 우리는 그만큼 더 더워진다. 이건 명백한 악순환이다. 가장 더웠던 지난 화요일이었던가 그날부터 우리나라 전력 공급예비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아마 7% 대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나도 매일 전력거래소에 들어가서 전력 사용량과 공급예비율을 살피기 시작했다.


봄과 가을에는 설비예비율은 60~70%가 넘는다. 그 말은 우리나라 전체 발전소 중에 70%가 놀고 있다는 뜻이다. 공급예비율은 발전 설비 중 고장났거나 점검중인 것들을 제외하고 당장 가동할 수 있는 설비 용량 중에 남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봄 가을에는 대개 30~40%가 넘는다. 즉 우리나라 발전소 10개 중에 6개 정도는 1년의 거의 대부분(4분의 1 이상)을 가동하지 않다가 더운 여름에만 반짝 돌린다는 뜻이다. 즉 폭염 시기를 대비해 불필요한 발전소를 자꾸 지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당연히 있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생에너지를 늘리면 전력 피크를 낮춰서 예비율이 모자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몇 번 돌리지도 못하는 비싼 발전소를 자꾸 늘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많은 언론에서 올해 더위가 기록을 깰 거라고 보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진기록이 많이 나올 듯 하다. 특히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기록적으로 많이 나올 것 같다. 우리나라도 이제 에너지 복지의 개념으로 폭염을 극복할 수 있도록 에어컨 보급에 대한 말들이 나오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지구는 뜨거워 질 것이고, 에어컨 없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지만, 아니 벌써 지난 주 내내 열대야로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주말 낮에는 땀을 줄줄 흘리고 지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애들엄마의 에어컨 권유를 거부한 걸 후회했지만, 어쨌든 이번 여름은 일단 버텨보련다. 내년에는 또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여러번 썼다 말다 했던 글이라 글의 순서가 맞지 않는데, 그걸 다 손볼 시간은 없다. 내일 아침이면 아이들을 만나 휴가를 떠난다. 부디 망가진 무릎이 조금이라도 낫기를 바라며, 무릎에 아이스팩을 대고 누워야겠다. 이번 휴가는 과연 어떤 시간이 될까? 평소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면, 지금은 걱정이 80% 이상이고, 기대는 별로 없다. 뭐, 어차피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괜히 걱정하느라 시간 낭비 말고 그때 그때 최선을 다하자. 아이들과 함께 또 일 년을 버틸 수 있는 재밌는 추억들을 많이 만들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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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7-29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더운 날씨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감은빛 2018-07-29 16:41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님. 늘 고맙습니다!

라로 2018-07-29 0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감은빛님!! 무릎부상이라니요. ㅠㅠ 제가 더 나이가 많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유연성과 멀어지고 부상이 잦은 것 같아요. 남의 얘기가 아니네요. ㅠㅠ 빨리 회복하시길 바라고 무더위를 피해 시원한 휴가 잘 보내고 오세요 ~~^^

감은빛 2018-07-29 16:4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라로님.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게요. 나이 들면서 점점 유연성이 떨어지는 걸 느껴요. 제가 더이상 젊지 않다는 걸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나봐요.

페크pek0501 2018-08-0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휴~~ 여름이 힘든 건 다 마찬가지인가 봐요. 오늘은 덜 더워 다행입니다.
무릎 부상, 회복되길 바라겠습니다. 저도 허리 통증으로 최근 물리치료를 받은 몸이라
운동할 때마다 조심한답니다. 허리 강화 운동을 해야 하는지 허리를 될 수 있으면 안 건드리고
운동을 해야 하는지 헷갈린답니다.

요즘 중요한 건 건강과 운동이다, 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므로 각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몸입니다.

감은빛 2018-08-08 22:14   좋아요 0 | URL
확실히 입추가 지나니 조금, 아주 조금 낫긴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방안 온도는 32도 밑으로 내려갈 생각을 않고,
선풍기 두 대를 교차해 놓아도 잠시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에
목덜미에 땀이 줄줄 흘러요.

허리 통증이 있으시다니, 어여 나으셔야 할텐데요.
어떤 종류의 통증이냐에 따라 운동법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허리를 강화하는 운동은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무릎은 예상보다는 빨리 나아가고 있어요.
저는 훨씬 더 오래 갈 줄 알았는데,
벌써 살짝 무릎을 굽힐 수 있는 상태가 되었어요.
길어도 일주일에서 10일 전후로 훨씬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페크님, 고맙습니다!
 

믿을 수 없었다. 그 죽음을. 설마 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랬건만, 온통 그를 추모하는 말과 글이 넘쳐났다.

정치인을 믿고 좋아한 건 그가 처음이었다.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다. 먼발치에서 혹은 가까이에서 가끔 마주쳤을 뿐. 가장 자주 만났던 건, 광우병 촛불집회에서였다. 짧은 인사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뿐 그는 아마 나라는 사람을 인지하지는 못했을것이다.

그가 심과 조와 함께 진보신당을 탈당했을때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길을 응원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더 큰 정당에서, 좀 더 대중적인 정당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지길 바랬건만, 그렇게 원하던 대로 가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쉽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를 잊고 살았다. 내 삶이 바빴고, 그가 몸담은 정당에 대한 실망이 점점 커졌다. 내겐 녹색당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래도 마음 한 편에는 언젠가 그가 확실하게 자리를 잡을 날이 올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시다니! 차마 더 말과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겠다.

남들은 그의 죽음에 이어 노무현의 죽음을 떠올리더라. 나는 남들의 말을 듣고서야 그럴수 있겠구나 싶었다. 내게 노무현이란 사람은 그리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나는 오히려 박은지의 죽음이 떠올랐다. 한때 그 두 사람이 같은 정당에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음에도 그랬다. 아, 어쩌면 연결지점이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의미를 찾자면 또 연결되지 말란 법도 없으니.

언론을 통해 그의 유서 내용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죽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역시 노회찬과 박은지 두 사람이 삶을 끊어버린 행위에 절실히 공감하고 있음을.

내세를 믿지 않기에 빈말이라도 명복을 빈다거나 영면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저 결단을 마치고 마지막 가시는 순간만이라도 덜 괴롭고, 덜 외로웠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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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8-07-24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이의 죽음이 이런 느낌일지. 어제 오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감은빛 2018-07-29 00:35   좋아요 0 | URL
며칠이 지나도 이 허망한 느낌을 떨치기가 쉽지 않네요.
이번 주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그리고 매일 술을 마시며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18-07-2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은지님이 돌아가셨을때 그의 아픔이 너무 나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물론 저는 그리 열심히 살지 못했지만) 노회찬 의원의 죽음엔 말문이 턱하고 막히네요. 그 고단한 한 생이 절대 이렇게 끝나서는 안되는데 마음이 너무 아파서요.

감은빛 2018-07-29 00:37   좋아요 0 | URL
청소노동자들이 운구행렬을 맞으려고 땡볕에 나와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났어요.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분을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있나요! 믿을 수가 없네요!
 

비행기


김포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조금 늦긴 했지만, 하마터면 비행기를 못 탈뻔 할 정도로 늦었다고 깨닫지는 못했다. 대한항공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일부러 아시아나를 예약했는데, 티켓 발행을 위해 아시아나 항공 부스를 찾아다니는데 안 보였다. 저가 항공을 비롯해 다른 항공사들 부스는 다 찾았는데, 유독 아시아나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찾아다니던 곳 정 반대편에 아시아나 부스만 외딴 곳에 있었다. 그건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나 부스만 혼자 국제선 쪽에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쨌거나 서둘러야 할 상황이었는데, 줄이 길었다. 다른 항공사 부스는 여유롭던데 아시아나는 대기자가 많았다.


직원 하나가 다가와서 맨 뒤에 선 나를 보고 "예약번호가 있으면 도와주겠다." 고 해서 폰을 건네 카톡 메시지를 보여줬다. 그 직원이 예약번호를 입력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로 "시간이 없다."며 저쪽에 있는 다른 직원을 불렀다. 뭐라고 빠른 어투로 말하던데, '레이터' 란 단어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암튼 늦게 온 사람인 나를 두고 한 말처럼 들렸다. 그 다른 직원은 메인 부스가 아닌 대기자 줄 옆에 있는 임시 부스(복도 한 가운데 이런 게 있는 줄 처음 알았다.)로 들어가 빠르게 단말기를 두드리며, 단말기에 달린 수화기를 들어 누군가와 통화했다. 뭔가 암호 같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빠르게 전했다. 이번에도 '레이터'란 단어가 들린 듯 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출력되어 나온 티켓을 건네며 언제까지 탑승구로 가야 한다고 빠르게 말했다. 그 다급한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급하게 계단을 올라 검색대를 향해 뛰었다.


검색대를 나와 가방에 노트북을 집어넣고 폰과 지갑 등 소지품을 챙기며 시간을 보니, 웬걸 아직 여유있는 시간이었다. (이 정도면 음식이 바로 나온다는 전제 하에) 햄버거나 국수를 먹고 가도 될 시간이 아닌가. 어쨌거나 나는 곧바로 탑승구를 향했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뒤에 섰고, 곧 내 뒤로도 긴 줄이 만들어졌고, 좀 기다려 탑승을 시작하자 비행기에 올랐다.


생각해보니 적어도 출발 시간 30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은 그 시간이 지나면 티켓 발권이 안 된다는 소리였나보다. 떠올려보니 내가 공항에 도착한 것이 대략 비행기 출발 30분쯤 전이었고, 아시아나 부스를 간신히 찾아 줄을 선 것이 대략 25분에서 20분쯤 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좌석에 앉아 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메세지는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분에게 온 것이었다. "이 날씨에도 비행기가 뜨나요?" 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 제주에 내려서 답해야지 생각하고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비행기에 들어설 때, 입구에서 나눠주는 신문을 하나 가져와 이륙 대기중일 때부터 쉬지 않고 계속 읽던 중이었는데, 어느 순간 선체 내부가 어두워졌다. 조명이 바뀐 느낌이었지만, 글씨를 읽는데 어려움은 없어서 그대로 계속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주위만 다시 밝아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지나가던 승무원이 내 머리 위의 독서등을 켜줬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려고 했는데, 그는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곧 안정 궤도에 오를 줄 알았는데, 비행기 선체가 계속 불안하게 흔들렸다. 집중해서 신문 기사를 보느라 잘 못 느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 비행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치 추락하듯 순간적으로 선체가 내려앉았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그 느낌. 근데 그때부터 선체가 전후좌우로 크게 흔들리더니 몸이 막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신문을 접고, 주위를 살폈다.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좌석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다. 아까와 같이 선체가 추락하는 느낌이 연속으로 여러번 이어지고, 급격하게 몸이 홱 돌아갈 정도로 선체가 쏠리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속으로 이러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거 아닌가 싶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일단 반복적으로 급격하게 선체가 내려앉는 그 느낌, 심장이 철렁,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 싫고 무서웠다. 이건 레일 위를 달리는 롤러코스터가 아닌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가 아닌가!


읽던 신문을 대충 접어서 무릎 위에 두고 양쪽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때 저 앞쪽 간이의자에 앉아 안전벨트를 꼭 맨 승무원이 불안해하는 승객들을 표정으로 달래고 있는 걸 봤다. 그 승무원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내게도 살짝 웃음을 보내며 뭔가 말을 하는 듯 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표정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금 여유를 되찾았고, 곧 다시 신문을 펼쳐들었다. 신문에 집중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그냥 남들 보기에 태연한 척 하려고 신문을 읽는 척 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어쩌면 실제로는 짧은 시간이었을지 몰라도 내게는 엄청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한참 심하게 흔들리고 덜컥 덜컥 추락하는 느낌이 들 때는 문득 머릿속에 비행기 잔해가 뉴스 영상으로 비치고, 아나운서가 날짜와 시간을 말하며 몇 명의 사망자와 몇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래. 비행기 사고는 생존자가 거의 없다. 사망자와 실종자가 있을 뿐. 문득 참 보잘것 없는 인생을 살았구나. 뭐 하나 남긴 것 없이 이렇게 가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 후에 안전벨트 등이 꺼지고 승무원들이 마침내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나 승객들에게 나눠줄 음료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 이제 안전하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제 확실히 선체의 흔들림은 없었고, 안정적으로 비행하는 느낌을 받았다. 비행기를 많이 타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 일 때문이라도 비행기를 타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제주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세 번째 제주행이었다. 셋 다 놀러간 것이 아니라 일 때문에 간 것이었다. 그 중 한 번은 주말을 끼어 2박 3일간 다녀왔고, 1박 2일은 일을 했고, 나머지 시간은 혼자 올레길을 걷고, 지겨울 때까지 바다를 쳐다보고, 흑돼지 삼겹살에 한라산 소주를 마시며 보내다 돌아왔다. 이번에는 딱 주 중이라 시간을 뺄 수가 없었다. 한참 일이 많을 때라 내려갔다가 당일 바로 돌아와야 할 지 모를 상황이었다. 그래도 제주까지 가서 저녁에 바로 올라오기는 좀 억울했다. 억지로 다음날 오전 일정을 비우고, 1박을 결심했다. 제주에 사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연락했다. 반가운 목소리. 저녁에 만날 약속을 하고 몇 년 만에 볼 그 얼굴을 떠올려봤다. 


그러나 하루 전날 친구는 급한 일이 생겨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마침 함께 아는 한 선배가 그때 제주에 있을 예정이라고, 그 선배에게 연락해보라고 했다. 출판계를 떠나 딱 한 번 봤던가, 아니 두 번 봤던가? 암튼 몇 년 전이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선배에게 전화를 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문자를 주고 받았고, 그 선배는 그날 제주이 있긴 하지만, 저녁에도 일정이 있어서 나를 만나기는 어렵다고 했고, 나중에 서울에서 보자고 했다.


음, 제주에 또 아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하루 전날 갑자기 누군가에게 연락해 만나자고 할만큼의 관계는 아니지 않나 싶었다. 몇몇 얼굴들과 이름들이 머리속에 스쳐갔지만,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지워버렸다. 대부분 제주시가 아닌 서귀포 쪽이거나 외곽에 사는 이들이었다. 저녁과 함께 반주를 하고 다음날 돌아올 일정으로 연락을 하긴 미안했다.


토론회


토론회 장소는 작년 11월에 강연하러 왔던 곳이었다. 익숙한 장소라 쉽게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들어가고 싶었는데, 비행기에서 하도 시달려서 그랬는지 입맛이 없었다. 그래도 앞에서 떠들려면 배를 채워야 할텐데, 나중에 분명 후회할텐데 생각하며 뭐 적절히 끼니를 때울 곳을 살폈다. 식당이 몇 개 있었는데, 딱히 땡기는 곳이 없었다. 그냥 편의점에 들어가서 캔 커피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토론회는 예상보다 사람도 많았고, 분위기도 괜찮았다. 나도 충분히 내 역할을 잘 했다 싶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을 하고 나면 늘 스스로를 평가하게 되는데, 나는 대체로 큰 실수는 없는 편이라 작은 실수들 몇 가지를 두고 후회하거나, 그래도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날 토론회 발제는 지금까지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잘 한 편이었다. 시작 전에 생각해 둔 꼭 해야할 말들은 다 제대로 전달했고, 중간에 즉석에서 떠오른 이야기도 잘 끼워넣었다. 시간을 살짝 넘기긴 했는데, 앞에서 시간을 더 많이 쓴 발제자도 있었으니, 그 정도는 괜찮았다. 토론회가 끝나고 한동안 사람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느라 꽤 오래 서있었다. 같이 서울에서 내려온 한 연구원이 언제 올라가냐고 묻길래 "내일" 이라고 답했더니 바로 부럽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가냐고 물었더니, 사실 본인은 어제 내려왔다고 했다. 그와 잠시 떠들다가 그만 친구가 약속을 깨버려 지금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 하필 그날은 주최측에서 저녁 식사도 계획하지 않았다. 작년에 내 강의를 주선했던 분은 저녁에 회의가 있다고 급하게 가버리셨다.


혼자 담배 한 대를 피우고 가방을 메고 나섰다. 잠시 걸었다. 제주 칼 호텔을 지나며 오래전 신혼여행 때가 떠올랐다. 안돼! 이런 기분에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 힘들어! 고개를 휘휘 내젖고, 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빨리 걸음을 옮겨, 그 동네를 벗어났다. 일부러 차를 타지 않고 계속 걸었다. 대략 방향은 잡고 있었다. 작년에 왔을 때, 호텔(이라 쓰고 모텔이라 읽자)이 많고, 식당이나 술집이 많은 동네는 봐 두었다. 바다가 멀지 않은 동네.


동문시장


쎈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며 걷다가 문득 지도 앱을 열어보니, 걷기엔 너무 먼 거리라 느꼈다. 게다가 배가 고팠다. 점심도 안 먹고 캔 커피 하나로 때웠던 게 기억났다. 일단 노트북이 들어서 무거운 가방부터 내려놓고 싶었다. 숙박업소 검색 앱을 깔고 찾아보니 가까이에 호텔(이라 쓰고 모텔이라 읽자)이 있었다. 저렴한 편이었다. 결제하고 5분 가량 걸어서 찾아갔다. 주인장이 건넨 열쇠로 열고 들어온 방은 모텔보다 더 소박했다.


가벼운 몸으로 식당을 찾아 나섰다. 회가 먹고 싶었다. 회 한 접시에 한라산 소주 한 병, 그리고 바닷가에서 맥주 두세 병 정도 마시면 다시 숙소로 걸어 돌아올 수 있으리라. 어쩌면 술이 모자라 숙소에서 맥주를 좀 더 마실지도 모르지 라고 생각하며 방향을 잡고 걸었다.


이런저런 술집과 식당들을 지나면서 계속 머리속에 회만 떠올렸다. 한참을 걸어서 동문시장이라 적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에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고,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도 많았다. 누군가 삶에 회의가 들면 재래시장을 찾으라고 했던가? 그 활기에 전염되어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으라는 뜻이었던 것 같은데. 난 저 활기찬 분위기 밖에 걷도는 이방인일 뿐이라는 생각에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었다. 한참 걷다가 횟집을 하나 발견했다. 식사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지, 주인장은 포장 손님으로 착각한 듯 했다. 오후에 많이 떠들어 목이 조금 아팠지만, 목소리를 높여 먹고 갈 거라고 했고, 주인장은 2층으로 안내했다. 넓지 않은 실내에 손님이라곤 나 혼자였다. 티비도 하나 없이 조용한 객실에 앉아 회가 나오길 기다렸다. 조선족인 듯한 중년의 종업원이 반찬을 놓을 때, 한라산 한 병을 주문했다. "하얀 거?" 라고 묻길래, "네." 답했더니, "하얀 건 좀 독해요." 라고 알려준다. 그 하얀 한라산을 평소 2병 이상 먹는 사람이라고 말하려다가 참는다. 평소 소주는 빨간 걸로만 먹는다고 대꾸해주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했다가 오히려 빨간 게 뭐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지 라고 혼자 상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참돔회가 나왔다. 접시에 무를 깔지 않고 그냥 회만 놓아 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훨씬 깔끔하고 좋았다. 맛있었다. 내가 들어온 시간이 좀 늦어서 앉자마자 몇 시까지 하냐고 물었는데, 시간은 충분했다. 한 40분 분 가량 후, 회 한 접시와 한라산 한 병을 다 비우고, 배를 두드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거기서 다시 바다를 향해 걸었다. 도중에 포장마차가 길게 이어진 길을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골목에서 술과 안주를 즐기고 있었다. 일행이 있었다면 나도 저기 합류하고 싶었으나, 혼자 저 골목을 들어서기는 조금 망설여졌다. 그냥 다시 걸었다. 바다를 만날 때까지. 제주에 와서 바다 한 번 못 보고 가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내일은 시간 상 바다를 찾아갈 여유가 없을테니, 이 밤에 충분히 바다를 즐겨야했다. 


작년 가을에 한 번 와봤던 곳. 방파제와 테트라포트 너머로 시커먼 바다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문득 요의를 느껴 돌아보았는데, 대중화장실이 없었다. 한참을 걸으며 찾다가 간신히 발견했다. 화장실을 해결하고 나서 편의점에서 500밀리리터 캔 맥주 2개를 샀다. 안주는 필요없었다. 방파제에 몸을 기댄 채 홀짝 홀짝 한 캔을 비우고, 방파제에 걸터 앉아 또 한 캔을 비웠다. 오가는 이들이 모두 연인이거나 가족이어서 조금 더 쓸쓸해졌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먼 것 같았는데, 또 금방 온 것 같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다시 500밀리 맥주 두 캔을 더 샀다. 좀 더 마셔야 잠이 올 것 같았다.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차가운 맥주를 마셨다. 그제서야 뭔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박일환


이 분을 만나 인연을 맺었던 건 벌써 10년도 더 전이다. 당시 이 분은 모 출판사 대표였고, 나는 출판노동자의 삶을 막 시작할 때였다. 늦게 출판계에 들어와 아는 것 하나도 없는 상태로 영업 일을 한다고 많이 힘들었고, 또 그만큼 많이 재미있고 신나기도 했다. 전교조 해직 교사이셨고, 복직해서 다시 중학교 국어 교사로 지내셨던 이 분은 출판사 대표 직에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계속 학교에만 계시다가 가끔 일이 있을 때에만 사무실에 와서 회의하고 술을 마시는 것이 대표로서 이 분이 하셨던 일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싶다. 아니,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평소 교사로 생활하시면서도 틈 날때마다 시간을 내어 회의하고 또 술을 마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늘 그렇게 살아서 잘 안다!) 그것도 돈 한 푼 못 받는 직책 뿐인 대표라면 더욱 그렇다. (이것도 내가 늘 그래서 잘 안다!) 아니, 오히려 맨날 후배들 술 사느라 돈이 나갈일이 더 많은 노동자들을 위한 책만 내는 작은 출판사 대표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가 그 출판사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때, 이 분이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이메일을 보냈다. 사실 나는 대표로서 제대로 중재해주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약간 원망을 하기도 했었다. 나중에 이 분도 곧 대표직을 내려놓았고, 실무자 출신이 대표가 되었다가, 나중에 또 다른 시인께서 대표가 되셨다는 소식을 계속 듣고 있었다. 이 분이 대표가 되기 이전에는 또 유명한 시인께서 대표였다. 그러고보니 그 출판사는 계속 시인들이 대표가 되는구나. 아니, 아니다! 맨 처음 대표는 소설가가 맡았구나. 그 이후로 계속 시인들이 이어받았구나.


어쨌든 출판사 대표직을 물러나고 부지런히 글을 쓰시고, 책을 내신다고 느꼈다. 그러다 학교에서 퇴임하시고 나서는 훨씬 더 부지런히 글을 쓰시는 듯 하다. 


시인으로 소개 받았고, 시를 몇 번 읽어봤지만, 시 보다는 산문을 더 잘 쓰신다고 느꼈다. 물론 이 분 시가 별로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만큼 산문이 더 좋다는 뜻이다. 요즘 페이스북에 이 분이 '국어사전 혼내기'라는 글을 연재하는데, 정말 재미있고, 신기하고 또 황당한 내용이 많다. 나중에 책으로 엮는다면 꼭 구매해야 할 내용이다. 그런데 이 분 말씀을 보니 이미 [미친 국어사전]이란 책을 냈다고 하시더라. 그러고 보니 언젠가 [어휘 늘리는 법]이란 책도 나중에 사야지 생각만 했다가 잊어버렸는데, 언젠가 사투리에 대한 책도 쓰셨던 것 같은데, 이 참에 다 찾아봐야지 싶었다. '국어사전 혼내기'고 빨리 연재 분량을 모아 책으로 내 주셨으면 좋겠다.


언젠가 또 뵐 날이 오면, 선한 웃음 짓는 얼굴 앞에 책들을 주욱 내밀고 서명 해달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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