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합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정당에 요새 말로 단 1도 기대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유한국당과의 야합 소식을 듣고 조금 놀라기는 했다. 그럴 줄 몰라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빨리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혹은 이렇게 천박하게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싶어서였다. 그래. 뭐 애초에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정치인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 싫을 뿐이다.


국회


정말 정말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일이 많기만 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어떻게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는지.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싶은 정도로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떻게든 이걸 해결해보려고 여러 관계부처 공무원들을 만나봐도 답이 없다. 정말 시민운동 판에 첫 발을 디뎠던 거의 20년 전쯤부터 생긴 공무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새삼 활활 타오른다.


어제는 국회의원을 찾아갔다. 공무원들이 도무지 해결해 줄 수 없어 보이니, 이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이 의원이 정말 이 판에서 가장 실력있는 보좌관들을 모았구나였다. 두 분 모두 나와는 몇 차례 일로 만났던 분들이라 그들에 대한 신뢰는 당연했고, 어제 다시 한 번 그 분들의 내공을 확인했다. 두 번째는 이 일이 내 판단과 달리 생각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보좌관들은 해당 의원을 통해 최대한 빠르고 원활하게 이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을 믿을 수 밖에 없지만, 상황이 어렵다는 느낌이 무겁게 내 가슴을 짓눌렀다.


같이 방문했던 이들과 국회 정문을 나오는데, 녹색당 당원들과 마주쳤다. 아까 낮에 긴급 기자회견 소식을 들었던 터라,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겠다 생각했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들. 내가 의원회관 안 따뜻한 실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동안, 그들은 추위 속에서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기자회견에 늦게라도 온 거라고 여겼지만, 나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거듭 사과했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막 헤어지려던 참이었지만, 선거제도 개혁에 몇 년째 투신 중인 하승수 대표는 이 강추위 속에서 천만 밤샘 농성을 하겠다고 선언했단다. 순간 머리 속으로 그의 활짝 웃는 표정과 단호한 표정이 겹쳐 지나갔다. 누군가는 그 추위에 노숙을 하고, 누군가는 그 추위에 오체투지를 하다가 경찰에 길이 막혀 차디찬 바닥에 엎드린 채로 일어나지 못했다는데, 나는 이제 아이들을 만나 따뜻한 집으로 들어가려 하니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미 시간이 많이 늦어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했다. 작은 아이는 공동육아 방과후교실에서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이미 곧 선생님 근무 시간이 끝나기에 내가 돌아갈 때까지 선생님을 기다리시게 할 수 없었다. 아이에게 먼저 집으로 가서 언니랑 기다리라고 얘길 했는데, 계속 고집을 부렸다. 결국 언성을 높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께 너무 폐를 끼치니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아주 살짝 울음이 맺힌 목소리로 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치


아이들은 만나자마자 맛있는 걸 사달라고 했다. 늦은게 미안해서 그러자고 했고, 예전에 한 번 갔던 초밥집을 향했다. 아이들은 최근 연어와 초밥을 좋아했고, 그 집 연어회가 비싸긴 하지만 그나마 조금 저렴했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 메뉴판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아마 사장이 바뀐 모양이다. 내부 인테리어도 전체적으로는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면 많이 바뀌었다. 아이들은 계속 뭔가 바뀐 점들을 찾아냈다.


연어회와 초밥 가격을 보고 조금 망설였지만, 일단 주문했다. 추위에 떨다 들어와서 따뜻한 사케가 먹고 싶어서 그것도 주문했다. 그러고 나니 가격이 엄청나다. 어제 받은 강사비를 떠올리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거야. 강사비의 절반 이상을 써버렸지만, 그래도 애들 입에 들어가는 거니까. 나도 먹고 싶었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웠다.


추위


오늘 아침은 정말 추웠다. 작은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차가운 바람에 온 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느꼈다. 손발이 시린 것도 괴로웠지만, 특히 귀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작년 겨울 방한용으로 구매한 헤드폰을 다시 꺼낼 때가 왔구나 느꼈다.


올 봄 이사오기 전에 살던 집은 작은 아이 학교 바로 앞이었다. 아이 걸음으로 교문까지 5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사 올 때 제일 고민도 작은 아이 학교가 너무 멀어지는 것이었다. 큰 아이 학교도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녀석은 이제 중학생이니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사 후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오는 날엔 매번 작은 아이 손을 잡고 학교를 같이 갔다. 그런데 작은 아이가 너무 멀다고 투정을 많이 부렸다. 우리 집에 오는 날엔 아이들이 늦게 잠드는 경우가 많았고, 아침에 늦게 일어났고, 학교 지각을 간신히 피하느라 뛰는 날도 많았다. 또 큰 아이도 이런저런 불만이 많았다.


결국 애들 엄마와 상의해서 주중 하루, 주말 하루로 정했던 애들 만나는 날을 아예 금,토로 정했다. 애들이 우리 집에서 학교 가는 걸 너무 힘들어해서였다. 그러다 애들 엄마 사정으로 정말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설마


학교 후문 앞에서 아이와 뽀뽀하고 헤어진 후, 아이가 현관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잠시 보다가 주변에 역시 애들 뒷모습을 지켜보는 엄마들 사이로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내리막길을 걷는데, 앞에 유모차가 혼자 있는 모습을 봤다. 설마 애가 있는 건 아니겠지 했는데, 유모차를 지나치며 살펴보니 두꺼운 옷과 목도리 사이로 아이 얼굴이 보였다. 엄마가 어디 있겠지 하고 주위를 살폈는데, 반경 10미터 이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금방 든 생각은 저 후문 앞에서 아이들 뒷 모습을 쳐다보며 추위를 견디는 엄마들 중 하나가 이 유모차 아이의 엄마겠지 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 다음 의문은 왜 저기까지 유모차를 데려가지 않고, 여기 홀로 두었을까? 였다. 아이는 아마 잠든 것 같았다. 움직임이 없었다. 혹시 모르니 아이 엄마가 나타날 때까지 잠시 곁에 있어야 하나 고민했다. 아직 출근시간 여유는 있었지만, 오전 중에 마쳐야 할 일이 여러개라 마음이 바빴다. 게다가 돌아온 아이 엄마가 나를 이상하게 여길지도 몰랐다. 잠시 발걸음을 멈췄지만 결국 유모차를 두고 돌아섰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만났어















요즘 버스정류장들 옆에는 천막이 생겼다. 바람을 피해 그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라는 배려였다. 여름철 교통섬과 횡단보도 앞에 설치한 큰 양산처럼 생긴 그늘막과 함께 큰 돈 들이지 않으면서 시민들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시도로 보인다. 다만 그 천막에 적힌 문구가 조금 거슬렸다. "따뜻한" 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저 안에서 바람을 피하면 바깥보다는 조금 덜 춥겠지만, 따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따듯한지 아닌지 확인해볼까 싶어 들어가 보려다가 참았다.


그러다 버스정류장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만났다. 아니 그는 나를 보지 못했으므로, 누군가를 보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입김을 내면서 종종 걸음으로 정류장으로 다가왔다. 나는 정류장 구조물 밖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다가 인사를 할까 하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갔는데, 그는 그새 정류장 앞에 서있던 버스에 올랐다. 그의 일터 위치를 알기에 조금 의아했다. 오늘은 사무실로 가지 않고 어디 다른 곳에 외근을 가는 건가 싶었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그와 함께 했던 몇몇 순간들이 떠올랐다. 다들 놀라서 어쩌지 못하던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해결했을 때, 그가 나에게 보냈던 감탄의 표정. 그 표정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늦은 밤까지 불을 피워놓고 이런저런 고민들을 나눴던 순간. 그가 내게 건넸던 몇몇 칭찬들. 생각보다 떠오르는 기억이 많았다.


사람은 참 간사하다. 그가 소위 정말 잘나가는 위치에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어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참 세심하고 배려 깊고 매사 꼼꼼하게 잘 챙긴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냥 일 잘하고 좋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근데 그가 몇 가지 일을 두고 내게 칭찬하거나 감탄했을 때부터 그를 대하는 내 마음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의 웃는 모습이 예뻐보였다.


물론 이 감정은 연애감정은 아니다. 그저 호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직은. 그리고 난 이 감정을 키워서 남편과 아이가 있는 사람을 짝사랑하는 입장이 되고 싶진 않다. 다만 오늘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한 순간 그와의 몇몇 추억이 떠올랐을 분이다. 그렇다. 그저 누군가를 만났을 뿐이다. 그저 누군가를 스쳐 지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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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슬럼프? 침체기? 우울증? 무기력증? 침몰? 쇠약?

 

요즘의 나는 흔히 부진하고, 저조하고, 무기력하고, 바닥을 친다는 뜻으로 말하는 온갖 단어를 다 갖다 붙여도 다 해당되지만, 그 말들을 다 동원해도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그런 상태다. 몸도, 마음도, 일도, 인간관계도, 주변 상황도 모두 그렇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마음의 파멸
















오래전 츠바이크의 [마음의 파멸]을 읽었을 때 바로 알 수 있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약한지. 아니 요즘 말로 멘탈이라고 표현해야 하나? 아니면 인격이라고 불러야 하려나. 이 책을 읽을 당시 난 어렸지만, 이미 한 번 이상 마음이 완전히 깨져버리는 파멸을 겪은 후였기에 그 상황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이 부서지는 건 항상 아주 충격적인 사건을 겪어서는 아니다. 일상의 작은 일에도 얼마든지 마음에 균열이 생길 수 있고, 처음엔 별것 아니라 느꼈던 그 작은 균열이 점점 커져 결국 파멸로 몰아갈 수 있다.


물론 부서진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마음가짐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마음을 키워갈 수도 있다. 마음이란 건 늘 상처 받았다가 다시 회복하길 반복하는 것이니. 우리 몸이 그렇듯, 우리 마음이란 것도 늘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지금의 나는 어딘지 모를 아주 깊고 깊은 나락에 가라앉아 있다. 마음이 완전히 부서져버린 상태임을 느낀다. 최근 뭔가 큰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 물론 사건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삶이란 늘 크고 작은 사건의 연속이니. 다만 지금 내 마음의 파멸을 설명할 큰 사건이 최근에 있었던 건 아니란 뜻이다. 


사실 균열은 꽤 오래전에 있었다. 사실 이정도면 꽤 오래 버틴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지금에서야 무너져버린 것을 오히려 칭찬해 줄 수 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꽤 긴 시간 나는 무리하며 살아왔다. 몇 해 전부터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마음은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상처를 입었고, 거기서 멈추지 않기 위해, 부서지기 않기 위해, 나락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생활을 이어왔다. 속으론 다 부서질 것 같은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버티고 있었지만, 겉으론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상을 살아왔다. 그 차이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를 버틴 건 오로지 술과 친구들 덕분이었다. 몇몇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들어주고, 받아주고, 마음 써준 덕분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틴 게 왜 하필 최근에 터져버렸을까? 아마 시작은 업무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올해 유난히 일이 잘 안 풀리고, 업무상 상대해야 하는 인간들의 무책임한 행태 때문에 어이없는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어지간하면 누군가에게 겪하게 화를 내지 않는 편인데, 그렇게 화를 내본 것도 참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집중력이 떨어지니, 자꾸 업무 시간은 길어졌다.


그리고 몸이 자꾸 아팠다. 작년 가을 어깨 부상과 올해 여름 무릎 부상이라는 큰 부상을 두 번 겪었고, 꽤 오랫동안 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제대로 걷거나 앉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그 부상 부위 자체는 제법 아물었지만, 이젠 온 몸의 관절이 다 아프고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늘, 매일 그런 건 아니고 어떤 날은 손목이고, 어떤 날은 손가락 관절이고, 어떤 날은 골반과 고관절이고, 어떤 날은 발목이었다. 가끔 하나가 아니라 둘이 겹치면 좀 심하게 힘들었다. 가령 뜬금없이 왼쪽 발목이 아픈 어느 아침, 그날따라 유난히 부상당했던 오른쪽 무릎이 상태가 안 좋으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이게 이사간 집 덕분에 아주 말도 못하게 힘들었다. 가끔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는 어느 주말, 정말 배가 고팠지만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이 너무나도 무섭고 힘들어 그냥 배고픔을 참고 견딜 정도였다. 택시를 타고 오르면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누으며, 택시 기사님이 깜짝 놀랄 만큼의 길고 높은 급경사. 애들이 오는 날, 아이들 손을 붙들고 그 길을 오르면 애들이 숨을 헐떡 거리며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 그런 언덕이었다.


반지하였던 이전 집에는 자주 놀러와서 같이 술도 마시고, 책도 마음껏 보던 친한 친구가 이 집에 한 두번 자고 간 이후로 웬만해선 오지 않길래 물었더니, 그 언덕이 너무 무서워서 오기 싫다는 것이다.


무릎을 다치기 전엔 이렇게 무섭고 힘들지 않았다. 그게 다 운동이고 체력 단련이라 여겼고, 오히려 좋아했고 또 고마워했다. 일부러 산에 가지 않아도 매일 야트막한 뒷동산을 등산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데 입장이 달라지니 그게 그렇게 힘들고 무서웠다.


그때부터 느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일도, 내 몸도, 내 마음도 자꾸 꼬였고, 추락해갔다. 자신감을 잃었고, 쾌활함을 잃었고, 생기를 잃었다. 집중력을 잃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일상은 자꾸만 내게 일을 쏟아부었다. 끊임없이 주어진 무언가를 해야했고, 어떻게든 무리를 해서라도 완수해야만 했다. 그 삶이, 그 일상이, 그 과정이, 그 고단함이 너무 힘들고 싫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평일엔 어떻게든 버텼지만, 주말엔 완전히 무너졌다. 특히 아이들이 다녀간 이후, 대개 일요일 저녁이 그랬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보내던 어느 주말, 어지간해선 절대 전화가 오지 않던 동생에게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아파서 입원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즈음 유난히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왜 이렇게 목소리 듣기가 어렵냐고 여러번 전화를 받았던 걸 기억했다. 무심한 불효자를 향한 엄마의 짝사랑은 언제나 아들을 죄스럽게 만들고 또 위축시킨다. 동생에게 들으니 다행히 아직은 크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엄마와 아버지는 혹여나 멀리 있는 아들이 걱정이라도 할까봐, 아프다는 사실도, 입원했다는 사실도 모두 아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마음이 아들이 자주 연락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는 걸 혹시 아실까? 자주 연락하면 힘든 마음을 들킬까봐, 엄마 목소리를 들으면 간신히 붙들고 있는 이 마음이 무너져버릴까봐 자주 연락하지 못했다고 변명하면 혹시 이해하실까?


혼자 많은 일을 겨우 겨우 꾸려가다가 작년부터 일터에 동료가 생겼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일을 잘 해줘서 아주 든든하게 생각해왔다. 익숙하지 않을 이 일에 점점 적응해가며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주는 좋은 동료가 되리라고 기대했건만, 그는 갑자기 건강진단을 통해 큰 문제를 발견했고, 큰 수술을 받았고, 병가를 냈고, 조금 회복된 것처럼 보여 돌아오려 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계속 회복이 더뎠고, 반상근으로 억지로 맡은 일을 일부라도 해오고 있었는데, 최근 도저히 몸이 안 좋아서 안되겠다고,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만약 다른 이유라면 백 번이라도 더 붙잡고 싶었지만, 몸이 아파서 도저히 못 나오겠다고 하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 결정을 내리고, 그 말을 내게 꺼내기까지 아마 오래 고민하고, 어렵게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그 결정을 존중할 수 밖에.


할 수 있다! (제발!)


지금 나는 매일, 아니 매 순간 극도의 무기력증과 자기 혐오와 싸우고 있다. 그냥 이대로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당장 해야할 일을 떠올리며, 만나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들 얼굴을 떠올리며 간신히 이 세상에 발을 걸쳐두고 살고 있다.


그나마 긴 시간 무리하며 살아온 습관이 평소 억지로라도, 기계적으로라도 일상에 맞춰 움직이는 것은 가능하게 만들어, 가끔은 이렇게만 해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밤새 불면에 시달리다가 겨우 짧은 잠을 자고 일어나, 몇 번이나 자기 혐오를 달래고, 무기력증을 몰아내고 나가 설명회에 다녀왔다. 그렇게 가기 싫었고, 하기 싫었고, 자신 없었던 설명회였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이 술술 잘 나왔다. 막힘없이 설명하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기계적으로 떠들어대는 것이 나인가,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아니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았던 무기력한 것이 나인가 헷갈렸다.


그리고 억지로 자신을 달래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지금껏 이만큼 해왔잖아. 분명 할 수 있을거야. 조금만 더 힘을 내! 하지만 그 감언이설 뒤에 또 다른 나는 그럼에도 늘 내가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늘 무언가 부족했던 경험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할 수 있어. 딱 고만큼. 할 수는 있을거야. 간신히. 겨우 그 정도밖에 안 되지만 말야. 


음악으로 버티자


가장 힘든 시기였던 최근 몇 년을 버틴 것은 순전히 음악 덕분이었다. 한때 정말 열심히 들었던 (거의 하루종일 틀어놓고 있었던) 중국 아이돌 SING女團의 노래들은 그야말로 일등 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거다. 중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몇몇 곡들은 발음만이라면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들었다. 워낙 많이 들어서 요즘은 조금 시선을 돌려 다른 중국 노래들을 닥치는 대로 듣고 있다. 영화 음악, 옛날 노래, 요즘 노래, 슬픈 노래, 신나는 노래 등등. 


최근 우연히 발견한 노래는 정말 오랜만에 들었던 곡이다. 92년 이었던가, 당시 길에서 산 해적판 테이프가 닳도록 들었던 싱가폴 가수 마이쥬라(Maizurah Hamzah)의 [Wrong girl]과 [Doctor's Order]를 유튜브를 통해 마주쳤고, 그 두 곡을 무한 반복으로 들었다. 그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당시의 어떤 장면들이 계속 떠올랐다. 당시의 어떤 하늘과 어떤 바람과 그 바람에 살짝 흩날리던 어떤 이의 머리칼과 그의 높고 밝은 웃음 소리와 수줍어 어쩔줄 몰라하던 내 마음까지 다 떠올랐다.


오늘 아침 설명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Doctor's Order] 노래의 주인공이 마치 나인 것 같았다. 이 끝없는 나락에서 나를 끌어올려줄, 이 극도의 무기력증을 몰아내 줄, 이 바닥난 자존감을 회복시켜 줄 무언가가 간절히 필요하다고 말이다.


실험


최근 실험을 하고 있다. 일단 담배. 이건 일부러 끊으려고 노력한다기 보다는 지금은 어떤 이유로 별로 땡기지 않아서 당분간 안 피고 있는 상태인데, 이게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서 나로서도 의외이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상황이다. 예전엔 친한 이가 담배 한 대 피우자고 부르면 별로 안 땡겨도 그냥 따라가서 한 대 피우곤 했는데, 요즘은 그냥 안 내킨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두번째는 술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 거의 매일 마시던 술을 요즘은 많이 (매일 마시던 거에 비하면) 줄였다. 이건 일부러 일정 시간 동안 술을 줄이는 변화를 주자는 생각 때문이다. 꽤 긴 시간 술독에 빠져 살았으니, 잠시라도 그 술독을 벗어나 살아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뭔가 변화가 생긴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또 의미가 있을테니. 근데 신기한 것이 그렇게 일부러 줄이고 나니 확실히 술도 예전보다 덜 땡겼다.


마지막은 게을러지기 혹은 앞 뒤 재지 말고 일단 마음가는 대로 해보기이다. 이건 사실 청소년 시기부터 주위 사람들과 다른,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태도이긴 한데, 어느 시기부터 이런 태도가 좀 부족한, 그러니까 너무 남들처럼 혹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선에서 살아가려고 애쓴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태도가 일반적으로는 좋은 선택일 수 없을텐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한 번 해보련다. 아무리 할일이 많이 밀려 있어도 이렇게 길고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이런 글을 두드리고 있는 지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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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0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0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8-11-20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겠지요. 너무 애쓰시지 말고, 무리하시지 말고, 천천히 올라오시길요.

감은빛 2018-12-07 11:01   좋아요 0 | URL
북극곰님, 따뜻한 말씀 정말 고맙습니다! 큰 위로가 됩니다.

슬럼프라고 해야 할까요? 누구나 언제든 이런 시기를 겪을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그 기간이 너무 길고, 그 추락 폭이 너무 큰 것 같아요.

그래도 북극곰님 말씀 덕분에 힘내보겠습니다.

카스피 2018-11-21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겨울이 다가오니 더 처지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지치과 힘드시러다도 좀더 기운내시길 바랍니다.

감은빛 2018-12-07 11:04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격려 말씀 고맙습니다!

네, 겨울이라 추위 때문에 그런 것도 분명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 긴 침체기의 시작은 아직 추워지기 전이었어요.
이제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었네요.

카스피님 말씀 덕분에 기운을 내 봅니다.
 

공동 사회자


올해 지역에서 세번째로 열리는 컨퍼런스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동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작년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지역의 선배 활동가 그룹에서 점점 내게 더 많은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가끔 선배들이 중간그룹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그 역할을 내게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다. 더 얘기하자면 복잡한데, 암튼 어쩌다 보니 중책을 맡았고, 그래서 작년에 비해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재작년과 작년에 열렸던 컨퍼런스 평가 과정에서 내가 주장했던 내용을을 반영해서 좀 더 잘 해보고 싶었던 욕심도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올해는 컨퍼런스 준비에 좀 더 신경을 썼다.


해마다 컨퍼런스를 마치고 그 논의 내용을 모아 보고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책임 편집(내용 정리 및 교정교열) 역할을 계속 맡아 왔다. 한 번에 30여개의 개별 테이블이 열리고, 각 테이블 주최 단위로부터 보고서와 관련 자료들을 받아 정리하고 책으로 만드는 작업이 쉬운 일이 아니라 무척 힘들지만, 출판사에서 책임편집을 해본 경험 덕에 어떻게든 해내고 있고, 한 번 작업하고 나면 그 해 컨퍼런스 내용 전체를 대체로 이해할 수 있기에 만족감도 있었다. 또 그를 통해 큰 돈은 아니지만 부수입을 얻을 수 있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당장 지역에서 그 역할을 해낼 활동가가 없기도 했다. 만약 준비 단계에서 함께 참여하지 않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외주를 맡기면, 보고서의 퀄리티는 훨씬 떨어질 것이 뻔했다. 1회와 2회 컨퍼런스를 마치고 낸 보고서가 좋은 평가를 받고, 지역의 선후배 활동가들이 나를 인정하는 것은 그래도 보고서를 썩 괜찮게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올해도 보고서 제작에 대해서는 그냥 나에게 일임하는 분위기다.


그렇게 작년까지는 컨퍼런스를 마친 이후 보고서 제작 과정에서 전권을 맡긴 했지만, 행사 준비와 진행 과정에서는 최소한의 기여만 하고, 큰 역할을 맡지는 않았다. 올해는 준비 단계에서 기획운영회의에 매주 참여해야 했고, 보고서 준비를 위한 기록팀도 따로 꾸려야 했다. 암튼 실제 행사에서는 여는 마당에서 대표자 인사를 내가 맡았고, 전체 행사 중간쯤에 3개 협동조합이 공동으로 기획한 토론회 진행과 발제를 맡았고, 또 다른 토론회의 토론자 역할도 맡았으며, 마지막 닫는 마당에서 여성 활동가 한 분과 공동 진행도 맡았다. 사실 닫는 마당 진행은 2년 전 첫 컨퍼런스 때도 맡을 사람이 없어서 그냥 내가 맡았는데, 그때는 지금과는 약간 성격이 달라서 훨씬 규모도 작았고, 컨퍼런스를 준비했던 단위 활동가들의 뒤풀이 같은 행사였다. 물론 당시에도 부담은 꽤 있었지만, 막상 닥쳐서는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는 공동추진위원장을 나이대별로 추천해서 선정했는데, 나는 40대 대표로 올랐고, 나와 같이 닫는 마당 진행을 맡은 여성 활동가는 30대 대표로 나왔다. 여는 마당 인사말은 조금 고민을 하긴 했지만, 막판에 시간에 쫓겨서 원고를 썼고, 큰 무리 없이 잘 하고 내려왔다. 이번 컨퍼런스는 지역 언론사가 SNS 생중계도 했는데, 나중에 SNS 상에 남아있는 동영상을 통해 내 발언을 지켜보니 좀 신기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버릇과 손버릇 등도 알 수 있었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긴장하면 저렇게 행동하는 구나 하는 것도 느꼈다.


발제와 토론도 평소 고민했던 내용들을 풀어냈고, 이런저런 행사 준비와 진행은 이 바닥 활동 경력이 20년이 가까운데 뭐 평소 실력으로 커버했는데, 마지막 닫는 마당 공동 사회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혼자 하는 거라면, 그냥 알아서 준비하면 되는데, 아직 그리 친하지 않은 다른 활동가와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는 점이 부담스러웠다. 


그와는 이 전부터 종종 얼굴을 보긴 했지만, 이번 컨퍼런스 준비 전까지 잘 알지 못했던 사이였는데, 평소 이런저런 회의 자리에서 분위기도 잘 맞추고, 활발하게 발언하는 모습을 보아 내공이 상당해 보였다. 역시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게, 준비 과정에서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과 2시간 짜리 행사 사회자 대본을 짧은 시간 안에 뚝딱 만들어냈다! 다만 그가 준비한 부분은 전체 진행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이고, 나는 그 안에서 핵심 프로그램 진행 대본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 핵심 프로그램은 컨퍼런스 전체 프로그램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였다. 각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고, 각 추진 단위의 협조가 필수였다. 


어차피 나는 컨퍼런스 종료 후 보고서 제작 단계에서 각 프로그램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하기 때문에 미리 소통할 생각으로 이 역할을 맡았는데, 행사가 진행중인 짧은 시간 안에 내가 필요한 내용을 다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날 하루 전까지도 그 핵심 프로그램에 대한 대본을 완성하지 못했고, 공동 사회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행사 당일 아침 일찍부터 열일 다 제쳐놓고, 대본을 완성했고, 결국 닫는 마당 1시간을 남겨두고 그가 쓴 전체 대본과 내가 쓴 대본을 합쳐서 공동 사회자 대본이 완성되었다. 서로 맞춰보기 위해 구석에서 잠시 연습했는데, 그도 이런 경험이 적지 않은 듯 했고, 나도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싶어 연습을 많이 하진 않았다. 사실 막상 무대에 서면 어떻게든 하겠는데, 사전에 그와 단둘이 따로 연습하려니까 정말 어색했다. 그도 그랬는지 서로 분위기를 어쩌지 못하고 급하게 연습을 마쳤다.


착각일 수 있겠지만, 가끔 무대 체질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시작 전에는 긴장도 하고,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지만, 막상 사람들 앞에 나서면 의외로 여유를 되찾아 내가 준비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해내곤 했다. 그게 약간 관성이 되어서 나중에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준비를 덜 하는 나쁜 방식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암튼 그런 역할을 맡을 때 상대적으로 쉽게 수락하는 이유다.


근데 이번에 둘이 공동 사회를 보니,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어색해서 자꾸만 실수하게 되더라. 속으로 어! 나 왜 이러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곧 다시 수습하곤 했지만, 내 기대만큼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근데 내 파트너는 나보다 훨씬 더 여유있었다. 임기응변도 어찌나 좋은지. 대본에 없던 말들도 술술 잘 했다.


이 공동 사회는 그가 다 살렸다. 그가 그렇게 잘 하는 모습르 보면서 나도 곧 여유를 찾았다. 재밌었다.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나? 그리고 참여자들의 호응이 좋았기에 또 한편 힘이 났다.


행사를 마치고 둘이 환상 콤비였다거나, 전문 사회자 뺨 친다거나, 둘이 케미가 장난 아니다거나 이런 저런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나는 그때마다 모두 다 그 여성 활동가의 공으로 다 돌렸다. 난 아무것도 한 것 없고, 그가 다 살렸다고 했다.


옷이 날개


작년부터 점점 외부활동이 많아지고 있다. 그 외부활동 대부분은 공무원들을 만나거나, 좀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가 많았다. 평소 목이 늘어난 허름한 반팔 티셔츠에 낡은 반 바지를 입고, 맨발로 아쿠아슈즈 신고 다니는데, 그런 자리가 있는 날에만 정장은 아니더라도 가다마이라고 부르는 걸 입고 나간다. 이거 우리 말로는 뭐라 불러야 할까? 암튼 그렇게 입고 외부 활동을 주로 하다보니 지역의 선후배들은 나의 그런 차림을 자주 보지는 못한다.


이번 컨퍼런스에 공식적으로 앞에 나서야 하는 일이 많다보니 옷차림에 신경을 안 쓸수 없었다. 특히 닫는 마당 사회를 보기 위해 아끼는 여름용 가다마이를 입고 갔는데, 그야말로 보는 사람마다 반응이 장난 아니었다. 한 젊잖은 여성 선배는 놀란 표정으로 오늘 너무 멋져요! 라고 큰 소리를 냈는데, 그 분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 내게는 더 놀라운 일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친한 형과 술을 마시다가 그 형이 요새도 계속 운동하냐고 묻길래, 못한지 오래라고 말했다. 작년 가을 어깨를 다친 후로 꽤 오랫동안 간단한 운동 외에 시도를 못 했고, 다시 본격적으로 운동을 해보려고 하던 와중에 다시 무릎을 다쳤다. 최근엔 거의 아무런 운동도 시도하지 못했다. 그렇게 설명했더니, 그래도 넌 운동했던 '가다'가 있어서 '가다마이'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더라. 뭐 옷이 날개란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보다. 다들 어쩌니 한마디씩 해대던지.


뛰고 싶다.


무릎은 8월 말경 처음 다친 지 3주쯤 지난 후부터 빠르게 회복해서 평지는 거의 정상처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오르막도 괜찮은데, 내리막길과 계단을 내려가는 일은 여전히 부자연스러웠고 힘들었다. 그리고 아직 무릎을 완전히 굽힐 수 없어서 씻을 때와 옷 입고 양말 신을 때 힘들다. 우리 사무실 열쇠구멍은 바닥에 있다. 완전히 쪼그리고 앉거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허리를 완전히 꺾어야 손이 열쇠구멍에 닿는다. 예전에 그 위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내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사무실 문을 열고 잠그는 일이 되었다.


평소 걷는 것 보다는 뛰는 걸 좋아한다.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거의 뛰어다니는데, 벌써 한달 반 이상을 뛰지 못하고 살고 있다. 어느 날 너무 뛰고 싶어서, 뜀박질을 잠시라도 해보고 싶어 시도했다가. 무릎 통증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슬슬 회복이 되는 것 같아서 무릎에 무리가 안 가는 자세로 스퀏을 좀 해봤는데, 다음날 무릎이 아파 죽는 것 같았다. 아직 역기를 드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가끔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와 딥스 그리고 레그레이즈 등을 줌심으로 운동했는데, 이것도 정상이 아닌 몸이다보니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뛰고 싶고, 역기를 들고 싶다. 그런 걸로 스트레슬 좀 날려야 하는데, 대신 자주 술을 마셨다. 술과 안주 덕분에 재작년부터 간신히 공복일 때 복근이 드러나는 몸을 만들었음에도 금방 몸매가 망가졌다. 빨리 다시 뛰고 싶다. 역기도 들고, 케틀벨도 들고, 철봉에 매달려 다양한 운동을 해보고 싶다.


책 읽자



 아는 형이 낸 책이라 동네서점에 깔리자 마자 가서 샀다. 근데 아직 손도 못 대고 한참 지났다. 이번 연휴에 읽어야겠다. 같이 산 책이 3권이나 되는데, 이것들 언제 다 읽으려나.











 동네서점에서 사자마자 큰 아이에게 읽으라고 줬다. 아이가 다 읽고 나면 내가 읽어야지. 그리고 작은 아이가 좀 더 자라면 그때 읽어줘야지.









 이 책은 사자마자 야금야금 읽고 있다. 재밌다. 이런 책이 점점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또 한 권의 책은 제목이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흠 나중에 집에 들어가면 찾아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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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가끔 주말에 잠을 몰아서 자고 나면 일요일 밤에 쉬 잠들지 못한다. 주말에 아이들이 오니 한동안은 좀 피곤해도 참고 애들이랑 놀러 다녔는데, 요 몇 주는 정말 너무너무 피곤해 낮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이젠 정말 늙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날들.

암튼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을 꼼짝 않고 집에서 애들과 뒹굴거렸다. 물론 그 와중에 큰 아이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낮에 나갔지만, 작은 아이는 쭉 나와 함께 집에 있었다.

특히 일요일은 아이와 잠시 놀다가 마치 기절하듯이 잠들기를 여러차례. 늦은 오후에나 온전히 잠에서 깨어, 작은 아이를 데리러 온 애들엄마에게 아이를 보냈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누워서 폰으로 SNS를 보거나, 잠시 책을 뒤적였는데, 일찍 자려고 초저녁에 불을 끄고 잠들었다가, 자정이 막 지났을 무렵 깨버렸다. 그때부터 자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잠들지 못했다. 게다가 그 밤에 배가 고파졌다. 있던 음식은 주말동안 애들과 다 먹어치우고, 남은 건 라면 밖에 없는데, 그 새벽에 배가 고프면 어쩌란 말이냐?

결국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를 얼굴 위에 놓고 억지로 잠을 청하기를 2시간쯤 되어 도저히 못 참고 일어나 라면을 끓였다. 라면에 소주를 마시면 잠이 오려나 생각했는데 집에 술이 없었다. 항상 하는 후회를 또 해본다. 왜 미리 술을 사두지 않았던가? 그리고 또 같은 변명을 반복한다. 술을 사두면 항상 바로 먹어 치워버려서 미리 사둘 수가 없었잖아.

다행이 음식 할 때 쓰고 남은 소주가 한잔 반 가량 남아있었다. 그걸 먹어봐야 아무 소용도 없을 걸 알았지만, 그래서 꽤 고민했지만, 라면을 다 끓이고 결국 조금 남은 소주를 잔에 따랐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때는 라면 먹고 잠시 소화시키고 잘 생각이었지만, 라면 먹으며 노트북을 켜고 뭔가 찾아보기 시작했던게, 라면을 벌써 다 먹고도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뒤늦게 상을 치우고도 잠은 오지 않았고, 이런저런 잡 생각에 술 생각만 더 간절해졌다. 그 한 잔 반을 먹지 말았어야 했는데.

결국 해뜰 무렵까지 뜬 눈으로 지내다가 이제와선 잠들면 오히려 큰 일이라 아예 영화를 하나 틀었다. 영화에선 등장인물들이 자꾸 뭘 먹고 마셔서 더욱 술 생각이 간절해지게 만들었지만, 어차피 아침이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유혹을 떨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을 맞아 씻고 집을 나섰다. 근데 생각보다 머리는 맑다. 몸은 피곤하지만 머리는 맑은 아침이다.

노래(플레이리스트를 바꿔야해)

아침에 회의를 위해 버스로 이동하면서 늘 그렇듯 노래를 들었다. 문득 나오는 노래들이 죄다 처지고 슬픈 노래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쾌한 아침을 맞아 신나고 활기찬 노래를 듣도 싶었는데, 리스트를 쭈욱 내려봐도 그런 노래가 없다. 지지리도 궁상맞은 노래들. 나중에 시간 되면 꼭 플레이리스트를 바꿔야겠다.

이상 아침 출근길과 회의를 위해 오가면서 느낀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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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연습


살면서 가끔 정상인으로서 바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를 깨달을 때가 있다. 군대에 있을 때 무릎 인대가 완전히 나가서 거의 두세달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불편하게 지냈을 때, 제대하고도 가끔 무릎에 무리가 가서 며칠 혹은 한 달 동안 잘 걷지 못했을 때, 한 십여년 전에는 허리 통증으로 고통을 받았고, 또 7년쯤 전에는 골반 통증으로 또 세달 가량을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고, 이번에 또 무릎 인대가 늘어나서 한 달 가량 불편을 겪고 있다. 


평지를 걷는 건 조금 절뚝거리긴 하지만 큰 불편은 없고, 계단을 오르거나 오르막길도 그럭저럭 걸을만한데, 계단을 내려가는 일과 내리막길은 정말 힘들고 어렵고 또 무섭다. 지하철을 타고 회의하러 가야 하는데, 기나긴 계단 앞에서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때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장애인들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일시적으로 늘어난 인대가 회복될때까지만 약간의 이동 장애를 가질 예정인 나에 비해 그 분들은 평생을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고 사셨고 또 살아가실텐데, 그 감정이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어제 6호선의 기나긴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난 이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다. 최대한 관절과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자세를 익혀야한다. 정상인처럼 걸을 수 없으니, 무릎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효과적으로 걸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걷기 연습을 해야 했다.


7년 전쯤 골반 통증이 장기화 되어 두어달째 걷기가 힘들었을 때, [그 남자의 몸 만들기] 라는 책을 읽다가 운동과 생활 전반에 대한 저자의 생각 등을 읽으며 느낀 점이 많았고, 특히 걷는 것도 단순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단전이 이동한다고 생각하라는 저자의 말에 그렇게 움직여보니 정말 걸음이 달라졌다. 이후 꾸준한 스트레칭 등으로 골반 통증이 많이 나아졌다. 한때 '대퇴골두무혈성 괴사'가 아닌가 걱정까지 했었는데, 병원에선 엑스레이 사진만으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고 무조건 MRI 부터 찍자고 했고, 다행히 지인 중 해당 질병을 어려서 부터 앓았던 분이 내 엑스레이 사진을 보시더니 무조건 괜찮다고, 내 대퇴골두가 아주 깨끗해서 절대 무혈성괴사 일리 없다고 확인 해준 덕분에 돈 낭비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한 것처럼 걸음을 걷는 태도가 변했다. 단순히 한 발 움직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발가락 끝부터 척추를 거쳐 머리에 이르기까지 내 몸의 뼈마디 하나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느끼며 걷기 시작했다. 핵심은 위에도 언급한 책의 문구처럼 내 몸의 중심인 단전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느끼며 걷는 것이었다. 


이번에 무릎이 다 나으면 어쩌면 다시 제대로 걷는 법을 또 배우고 익혀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소망은 빨리 무릎 인대를 회복하고 비틀거리나거 절뚝거리지 않고 잘 걷고 싶다는 것이다. 남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을 걸음이 누군가에겐 소망이 될 수 도 있다.


과학은 어려워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가장 어렵고 싫어했던 과목은 수학과 과학이었다. 수학은 이미 초등학교 때 포기했고, 중고등학교 무렵엔 거의 바닥을 헤매었다. 전교 등수로 따지면 국어는 거의 항상 전교 1등, 영어는 대개 상위권 이었지만, 수학은 전교 꼴찌 수준이었다. 과학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땐 미처 몰랐다. 나중에 내 인생에서 과학이 중요한 순간이 오리라는 사실을. 학교를 졸업하면 평생 수학과 과학 따위 마주칠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한 10여년 전부터 일 때문에 늘 과학책을 읽어야 했다. 교양 과학에 머무는 간단한 지식도 내겐 어려웠다. 기초가 전혀 없었기에 그랬다.


근데 신기하게도 어려서 그렇게 어려워했던 과학이 나이 들어서 공부하니 재밌었다. 뭔지 잘 모르지만 그 모르는 걸 하나씩 찾아내서 알아가는 게 더 재밌었다. 요즘은 책과 몇몇 유튜브 채널을 통해 관심분야를 조금씩 넓혀가는 중이다.


이 땅에 과학 지식을 쉽고 재밌게 잘 전달하는 선생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래도 몇몇 믿고 보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 분들 중 한 분의 책이 새로 나왔다. 페이스북을 통해 이 책을 낸 출판사 대표의 재밌는 홍보글을 보았다. 요건 꼭 사야해! 여름 휴가 때 지출이 커서 당분간 긴축재정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 먹어놓고도 계속 실천을 못 했는데, 알라딘에 들어와보니 또 사고 싶은 책이 잔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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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8-08-2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병원은 다녀오신건가요? 정형외과나 한의원에 다녀와야 하는 거 아닐까요?

감은빛 2018-08-22 19:5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한의원 다녀왔습니다. 침도 맞고, 약도 먹었고, 일정 기간동안 물리치료도 받았습니다.

덕분에 인대 부상 치고는 회복이 빠른 것 같아요. 이제 무릎을 (완전히는 못 하지만) 어느 정도 굽힐 수 있고, 걸음도 많이 자연스러워졌어요. (초기에 비해서)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