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공간


1년에 한 번씩 애들 엄마가 독일로 출장가는 시기가 돌아왔다. 나와 사귀기 전부터, 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해왔던 일이었고, 큰 아이가 태어난 다음 해에도, 작은 아이가 태어난 해에도 다녀왔었던 일이었다. 이혼 여부와 별개로 이 기간이 되면 달리 애들을 맡길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혼 전과는 달리 아이들과 10일 이상 같이 지내야하는 이 상황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물론 나는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세상에서 제일 좋기 때문에 당연히 이 기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임에 틀림없지만, 다만 아이들이 우리 집을 싫어하고, 평소 더 많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 애들 엄마와 같이 지내는 공간, 즉, 이혼 전까지 나와 함께 살았던 집에 있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만 이 집에 다시 돌아와 지내야 하는데, 그게 너무 낯설고 또 한 편으로 싫은 느낌이다.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작년이나 재작년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여기 알라딘 서재에 두드려 놓았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이 공간에 다시 돌아와 며칠을 지내야하지만, 이 낯선 느낌이 너무 싫다고. 일상이 다 싫은데 그 중 최악은 음식을 만들 때다. 아이들은 기특하게도(혹은 신기하게도)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주는 걸 좋아한다. 보통 아이들은 밖에서 사먹는 패스트푸드 같은 걸 좋아하는 걸로 아는데, 우리 아이들은 참 다르다. 암튼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애들 반찬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집 주방이 왜 이렇게 낯선 건지. 분명 4년 하고 몇 개월 전까지 나도 이 집 주방에서 자주 음식을 만들었었다. 그 사이 익숙했던 몇몇 냄비와 프라이팬 등 조리기구가 없어졌고, 못보던 조리기구가 생기긴했지만.


그런데 뭐 간단한 반찬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소금이나 식초나 이런저런 기본적인 재료들이 뭐가 어디 있는지 도통 찾지를 못하겠다. 매번 큰 아이를 부르거나, 작은 아이를 불러서 엄마가 이걸 어디 놔뒀을까를 물어야 한다. 물론 당연히 애들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며칠 전에는 심지어 밥 짓기를 실패했다. 대학시절 자취했던 때부터 밥을 해먹은 입장에서 평생 밥 짓기에 실패한 경우는 처음이다. 애들 엄마가 주로 쓰는 압력 밥솥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밥을 태워서 누룽지를 끓여보았다. (누룽지는 맛있었다. 큰 아이도 누룽지가 맛있다고 더 달라고 했다.) 이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인데, 도통 실패의 원인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그 압력밥솥으로 밥을 하기가 두렵다. 그래서 집에 가서 내가 쓰던 압력 밥솥을 가져왔다. 이해할 수 없을 때는 그냥 포기해야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조리기구를 사용하면 되는 것을.


어제는 탕을 하나 끓이고, 나물을 무쳤다. 아주 오랜만에 해본 시도였다. 평소라면 귀찮아서 절대 하지 않았을텐데, 왠지 이 집 주방에 서면 예전에 내가 해준 잡채나 나물 무침 등을 맛있게 먹었던 가족들 생각이 나서 자꾸 오랫동안 안 해본 음식을 다시 해보고 싶은 욕심을 내게 되는 것 같다. 문제는 앞서도 말했듯 이젠 이 집 주방이 낯설다는 점이다. 예전의 그 맛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만든 음식이 맛이 없을 리가 없는데. 내가 귀찮아서 안 해서 그렇지 맘 먹고 하면 못하는 음식이 없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그래도 맛있다고 먹어주는 아이들이 기특하고 고마울 뿐이다.


제일 견디기 어려운 건, 이 집 곳곳에 배어있는 추억들이 불시에 뇌리에 떠올라 괴로운 것과 이 집에서 나와의 기억이 비교적 적은 작은 아이가 자꾸만 "우리는 이렇게 해" 라고 애들 엄마가 정한 어떤 방식을 나에게 가르치려고 들 때다. 그때마다 내가 "엄마는 그렇게 하지만, 이렇게 해도 틀린 건 아니야. 이렇게해도, 저렇게해도 다 괜찮아." 라고 말해도 아이는 듣지 않는다. 그저 애들 엄마와 함께 지내며 익숙해진 그 방식만을 고집할 뿐. 그게 사소한 일일수록 나는 더 괴롭다.


사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점점 더 아빠와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혼에 대해 논의 할 때, 무조건 반반 아이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줄 것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걸었었다. 만약 아이들 양육권으로 소송을 해야 했다면, 아무리 가난한 상황이었어도 무조건 싸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은 점점 우리 집에 오기를 싫어했고, 처음에 반반이었던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젠 일주일에 이틀. 그마저도 주말에 친구들과 노느라 시간을 보내는 큰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이들은 점점 아빠와 멀어지는 구나 생각하면 정말 서글프다.


지긋지긋한 갑질


아침엔 조선일보 앞에서 왜곡 보도 규탄 기자회견을 했고, 오후엔 신규 발전소 건으로 공무원들의 어이없는 갑질 때문에 수십통의 전화와 문자와 이메일을 보내며,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보려고 애쓰느라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나의 질문에 화를 내며 갑질하는 공무원. 그가 어린 여성이라서 더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나이 많은 남성과 나이 어린 남성의 갑질 때문에 이번 보다 더 화가 났었다. 그땐 오히려 공무원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은 마음에 더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어린 여성이라서 더더욱 말을 조심하느라 단 한 번도 먼저 강한 어투로 말을 건 적 조차 없었다. 약 3달 전, 그가 막 이 부서로 발령받았다고 업무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며칠 후에 연락 달라고 했던 그 때부터 나는 계속 그를 존중해왔다. 그냥 무심코 질문을 하려다가도 한 번 더 생각해서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단어를 선택하곤 했다. 그랬기에 오늘 그가 언성을 높이고 내게 화를낸 순간, 그 화를 견디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쥔 손이 덜덜 떨렸고, 말이 빨라졌고, 나도 그를 따라 언성이 높아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목소리까지 떨리는 걸 감춰보려 했는데,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 후에 그가 다시 전화를 했는데, 내 질문과 요청 사항을 검토 중이니 며칠 기다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몇 시간동안 안정을 되찾았기에 평소처럼 예의를 갖춰 내가 물어야 할 질문들을 던졌다. 그는 자세한 대답을 피한 채 현재 검토중이니 기다리라는 너무나도 형식적인 답변으로 일관하다가, 내 계속되는 질문에 잠시동안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 듯 했으나, 참는 것 같았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끝까지 본인이 화를 낸 것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아마 본인은 잘못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정말 본인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너무나도 공무원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데, 말이 잘 안 통하는 어떤 남성이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서 불쾌했다고 여길 것이다. 딱 거기까지가 그 사람의 한계일 것이고, 이 나라 공무원의 한계일 것이다. 


예전에 했던 환경단체, 시민단체 그리고 출판사 일도 힘들었지만, 약 5년동안 이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 바로 공무원 갑질을 견디는 일이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 시절에는 절대 갑질을 견딜 이유가 없다. 그냥 싸우면 되는 일이었다. 만약 공무원이 갑질을 하면 공무원 복무규정을 비롯해 온갖 법규를 다 동원해 그를 뭉개버릴 수 있었다. 출판사에서는 공무원이 아닌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 도매상 담당자들의 갑질이 있었지만, 그걸로 굳이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다. 그건 시스템의 문제였고, 나는 그저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가끔 술을 사주고, 가끔 식사를 대접하면서 내가 필요한만큼만 챙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단체에 있을 때처럼 공무원을 묵사발 내버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사업이 되도록 만들어야 했으니까. 언젠가부터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내가 탁구공이 된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부서에서 핑 치면, 저 부서에서 퐁 치는 탁구공. 여기 관공서, 저기 관공서, 이 주무관, 저 사무관, 이 시공사, 저 전문가 중간에서 조율하느라 하루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끼니도 제 때 못 챙겨먹으면서 여기 저기 회의와 미팅을 쫓아다니는데, 정작 일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게 지난 5년동안 계속 반복되고 있다.


가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짧은 시간에 확 늙었냐고 묻는다. 흰 머리가 많이 늘었고, 머리 숱도 눈에 띄게 줄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이젠 내 나이보다 더 늙어보인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게 다 공무원 갑질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다.


어떤 날엔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분하고 짜증이 나 견디기 힘들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겠지. 벌써 1시를 훌쩍 넘기도록 이 글을 두드리고 있으니. 정말 하루라도 빨리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수천번째 반복해본다. 이 일을 그만둬야 내가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양육비다. 매달 애들 양육비로 보내야 하는 돈이 최저임금을 맞춰 받는 내 활동비의 절반이다. 그것도 최저임금이 올라서 지금은 절반이지만, 그 전에는 그 비중이 더 컸다. 암튼 고정적으로 받는 수입이 없으면 양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스트레스에 짓눌려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매일 매일 다른 답을 찾아보려 고민하지만, 늘 그때마다 떠오르는 건 이 나이에 무슨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나마 이 분야에서 인정 받는 게 어딘가 하는 너무나도 보수적이고, 매너리즘에 빠진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조금이라도 더 젊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술과 담배가 없었다면 어찌 견뎠을까?


이 힘겨운 삶을 견뎌낸 건 전적으로 술과 담배 덕분이다. 남들은 술과 담배가 건강에 나쁘다고 말하겠지만, 내게는 반대다. 만약 그 둘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자살을 선택했거나, 아예 정신이 나가버렸을지도 모른다. 자주 함께 술을 마시는 후배들에게 늘 고맙다고 말한다. 그들이 술 자리에서 내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담배가 없었다면, 나는 일과 시간을 무사히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오전 중에 2건의 회의를 채 마치기도 전에 넋이 나가버리지 않았을까? 담배가 있었기에 정신을 추스리고, 해야 할 일을 다시 정리하고,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의 수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술과 담배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니다.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지만, 올해들어 자꾸 이유없이 여기저기 관절이 아픈 이후로 마시는 양과 마시는 빈도를 많이 줄였다. 담배는 오래 전, 그러니까 애들 엄마가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잠시 끊었다가 몇 년 후에 다시 피우게 된 이후로 양이 확 줄었고, 이후에 거의 늘지 않았다. 담배 한 갑을 사면 대개 일주일 이상을 피운다. 담배를 가장 많이 피운 시기였던 자취 시절, 하루에 2갑씩 피웠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거의 어디가서 흡연자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술과 담배는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산소마스크와 같은 역할, 즉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란 말이다.


운동과 술


이유 없이 여기 저기 아픈 관절 통증으로 운동을 못 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침마다 손가락, 손목, 발목, 무릎, 어깨 등 비정기적으로, 간헐적으로 통증을 느끼며 매번 생각하는 건, 스트레스와 피로와 술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도무지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닫는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 또 숙취와 피로와 관절 통증을 느낀다. 이 악순환은 이 일을 그만둬야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주말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날에는 술도 담배도 없이 이틀 이상을 아무런 문제 없이 보낼 수 있다. 아니 그 기간이 한 달이던, 두 달이던 일에 의한 스트레스가 없으면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실제로 연휴 며칠 동안 그렇게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무척 운동이 하고 싶다. 피로와 관절 통증으로 매번 간단한 동작조차 제대로 된 자세가 나오지 않아 포기한 날들이 얼마던가? 


아이가 내민 상추쌈


이렇게 서재에 주저리주저리 글을 두드리고 있는 건, 아마도 조금 마신 술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하루 너무나도 갑작스레 어이없는 상황을 맞아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들였고, 그래서 퇴근 무렵 너무나도 지친 상태였다. 도저히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줄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아니었다.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걸어 외식을 하자고 제안했고, 나는 오늘만큼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상태였기에, 뭔가 술과 함께 먹을 음식이 필요했다.


예전에 자주 갔던, 한동안 거의 가지 않았던 보쌈집을 찾아갔다. 큰 아이는 그 집이 싫다 했고, 작은 아이는 오랜만에 간다고 좋아했다. 억지로 큰 아이를 끌고 찾아갔건만, 그 집은 이제 배달이나 포장 주문만 받고, 식당 안에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어쩔수 없이 돌아나와서 다른 식당을 찾아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곳이 없었다.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나도 아이들도 지쳐갔다.


역시 한때 가끔 가곤 했던 갈비집 앞에서 아이들의 의사를 물었더니, 둘 다 좋다고 했다. 돼지갈비 2인분을 시켜놓고 잠시 반성과 자기 합리화의 시간을 가졌다. 이 기후 위기 시대에 육식을 줄여야 하건만, 그럼에도 오늘 같은 날엔 고기와 술을 좀 먹어줘야 내가 살 수 있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이런 고기집에 오면 나는 늘 고기를 구워 아이들을 먹이느라 초반에는 거의 먹지 못한다. 어느 날 그런 사실을 깨달았는지, 큰아이가 말없이 상추에 고기와 마늘 등을 얹은 쌈을 내 입에 넣어주곤 했다. 매번 그 상추쌈을 받아 먹을 때마다 나는 고마움과 뿌듯함을 느낀다. 말없이 아빠를 위해 행동하는 딸이 되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런 딸을 키웠다는 자부심이 든다.


오늘도 아이가 말없이 내민 상추쌈을 받아 먹으며, 그리고 바로 이어 소주 한 잔을 들이키며, 하루 종일 너무나도 힘들었던 시간들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런 맛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거지. 


우울한 날, 우울한 감정


영화나 소설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접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아마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욱 힘들다. 하물며 실제 겪는 누군가의 죽음은 더욱 힘들 수 밖에 없다. 그 누군가가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해도, 스쳐 지나는 뉴스 속 한 줄이라해도 그렇다. 


'설리'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우연히 출판사 후배가 들려준 노래, 불나방 스타 소세지 클럽이라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짝퉁이란 느낌이 물씬 드는 밴드의 노래를 들었을 때였다. 어느날 보았던 유튜브 영상에서 유희열이 너무나도 좋아해서 라디오 방송에서 두 번씩 틀기도 했다고 소개했던 [알앤비]라는 노래 중에 '설리'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 노래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설리라는 이름이 뭔지 무척 궁금해져서 검색해봤더니 아이돌 출신의 여성이라고 결과가 나왔다.


사실 누구나 각자의 취향이란 게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해도 내 눈에는 별로인 사람이 분명 존재한다. 내겐 몇몇 배우나 가수가 그랬다. 다들 예쁘다고 난리여도, 내 눈에는 글쎄 였다. 설리도 내 취향은 아니어서 별로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희열 뿐 아니라 내게도 무척 좋아하는 노래가 되어버린 그 노래 가사는 아쉽게도 그닥 설득력을 갖지는 못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가 나온 영화를 봤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아마 평소라면 절대 보지 않았을 영화였겠지만, 어쩌다 시간 때우기 용으로 봤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이 영화에 설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에서 이 영화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리얼]은 그 악명을 익히 듣고 난 후에, 대체 얼마나 못 만든 영화길래, 얼마나 엉망이기에 다들 저런 반응이지 하는 궁금한 마음에 뒤늦게 봤다. 아,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그가 나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니 모를 수 없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짧게 나온 그의 눈부신 몸매 때문이었다.


아, 이런 표현은 결국 그를 특정한 이미지로만 소비하는 시선이나 심지어 그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갔을 거라고 추정하는 (아직 그 죽음에 대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들었다.) 악플과도 다르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냥 내 입장에서 솔직한 감상을 표하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다른 걸 찾을 수도 없지 않은가?


암튼 그렇게 내게는 거의 모르는 사람과도 다름 없는 누군가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다. 그가 연예인이어서, 내가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이어서 아마 더 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사회면에서 단 한 줄 언급한 어느 이름 모를 노동자의 죽음이었으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여기 서재에 여러번 언급했지만, 사춘기 시절부터 자주 자살 충동을 느꼈고, 진보신당 박은지 부대표의 선택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을 느꼈듯이, 나는 자살이 결코 해서는 안되는 나쁜 선택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선택할 수도 있는, 여러 갈림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 그 죽음이 자살이라고 결론나지 않았지만) 만약 설리의 죽음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해도 충분히 존중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온전히 그의 선택이니까.


그래서 혹 언젠가 내가 그런 선택을 하더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내가 실패해서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정신이 온전치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내 인생의 여러 선택 중 하나를 택했을 뿐이라고. 그 선택에는 분명 그에 합당한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고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봤다. 한 번에 다 본것이 아니라 5일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이어서 봤다. 이 영화를 좋아해서 여러 번 다시 본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그걸 다 쓰려면 또 엄청난 시간과 분량이 필요할테니 다음으로 미뤄두고, 이번에 다시 보면서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몇몇 감정선이 보였다. 이것도 다 나이가 들어가는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는 또 감정이 울컥했다. 우울한 날에 우울한 결말을 맺는 영화라니. 이 영화의 여운이 아이들을 재우고, 이 글을 두드리게 만들었고, 이 시간까지 온갖 잡다한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무실에 두고 온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2시 반이다. 내가 좋아하는 Lady Antebellum 의 [Need you now] 에 나오는 가사 quarter after 1(새벽 1시 15분) 보다 1시간 15분 더 지났고, 내가 좋아하는 책 [세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보다는 30분 전이다.  


내일 아침에 아이들을 깨워서, 뭔가를 간단히 먹여서 학교를 보내고 출근하려면 이젠 자야할텐데, 웬지 술이 모자라서 잠을 자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이 글은 이만 마무리해야겠지. 쓰고 싶은 글이 많은데, 늘 시간은 부족하다. 언젠가 이 일을 그만두게 되면 구상해놓은 소설을 써야지. 오늘 밤엔 머릿속에서 소설을 쓰며 잠을 청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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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10-16 0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t‘s half past five~ ^^
좀 주무셨나요?
저는 평소 잘 안꾸는 꿈을, 그것도 2시간 짜리 특강 듣는 꿈을 다 꾸었네요.
아마 어제 2시간 짜리 어떤 수업을 땡땡이친 것 때문에 찔렸나봐요.
아이들과의 길지 않은 시간, 잘 보내시기를.
피곤하실텐데 아이들이 좋아하니 직접 식사 준비를 해주는 아빠, 아이들 아침 먹여 학교 보낼 생각하며 잠을 청하는 아빠.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감은빛 2019-10-17 18:4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자려고 누웠는데도 잠이 안와서 한참을 뒤척이다 잠들었어요.
얼마 못 자고 일어나야해서 어제는 많이 피곤했어요.
남겨주신 말씀 하나하나 모두 고맙습니다! ^^

책읽는나무 2019-10-16 0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 보니 이 새벽에 괜히 눈물이 핑 도는 듯 합니다.
지금 창밖엔 일출이 시작되려고 산너머 하늘께가 붉어졌습니다.
일출을 보려고 부러 일찍 일어나려고 노력중입니다.그러면 하루가 좀 더 다르게 느껴지는 기분이랄까요!!
암튼 고단하실테지만 하루,하루가 감은빛님께 좀 더 나은 날들이 되길 바랍니다.

감은빛 2019-10-17 18: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일출을 보려고 일찍 일어나신다니,
절대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는 저로서는 부럽습니다.
말씀 덕분에 힘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9-10-16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일들이 있었군요. 삶의 고단함이 전해져 옵니다. 하지만 부디 힘내세요. 오늘 저도 이런저런 생각하다 어떠면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고 대단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춘기 아이는 다른 이유지만 엄마와도 멀어진답니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세상 전부였던 시간들 생각하면 갑자기 울컥울컥 할 때가 많아져요. 화이팅하세요.

감은빛 2019-10-17 18: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네, 말씀처럼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차라리 그냥 죽음을 선택하면 괴롭거나 힘든 일은 이제 더 생기지 않을테니까요.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또 망설이게 되는 것 같아요.

사춘기 아이는 정말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이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아요.
금방 화냈다가, 다시 금방 또 배시시 웃으면서 다가오곤 하더라구요.

큰 아이가 엄마와도 이런저런 일로 다툼이 있었던 걸 알고 있어요.
어떤 면에선 오히려 애들 엄마가 저보다 더 큰 아이 대하는 걸 힘들어하더라구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2019-10-16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7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9-10-17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가지 맘 고생이 많으시네요.그래도 화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감은빛 2019-10-17 18:4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카스피님.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yrus 2019-10-17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공무원은 전화를 받는 태도가 불친절해요. 예전에 할머니 이름으로 소유한 땅 때문에 토지 관리하는 공공기관에 일하는 공무원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어요. 부동산과 토지 관리에 대해 잘 몰라서 전화를 한 것인데 공무원이 알려준 설명이 이해가 안 돼서 양해를 구하고 다시 질문을 했어요. 공무원은 다시 설명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약간 짜증을 내면서 대답했어요. 감은빛님이 느꼈을 심정이 어떤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감은빛 2019-10-17 18:51   좋아요 0 | URL
네, 시루스님.
전화 받는 태도 뿐 아니라 뭐랄까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 같은 것이
안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냥 주어진 자리에서 딱 주어진 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실은 그 주어진 만큼조차 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고 느껴요.
물론 모든 공무원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제가 운동을 시작했던 약 20년 전부터 여러가지 일로 만나본 대다수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요즘 특정한 공무원들 때문에 너무 머리가 아프네요. ㅠㅠ
 


실수, 망연자실


아마 저녁 8시쯤이었을거다. 딱 퇴근시간 맞춰 나오면 도저히 사람이 더 탈수 없는 만원버스를 두어대 이상 그냥 보내야하니, 일부러 한 시간 이상 일을 더 하다가 나왔었다. 그날 따라 저녁 회의나 일정이 없었고, 딱히 약속도 없는 날이었다. 평소였으면 밀린 일을 하며 더 늦게까지 있었을텐데, 좀 피곤했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평소보다 일찍(?) 나온게 그 시간이었다.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켜고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타야할 버스 도착 시간을 보니 아직 한참 남았다. 차라리 걸어갈까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그날의 피로감이 너무 컸다. 그냥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 한 사람이 높이 달려있는 버스 도착정보 전광판을 보려고 뒷걸음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나대로 음악을 들으며 안 읽은 글 숫자가 몇 십개씩 표시된 메신저 앱을 열어보느라 그가 다가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는 내게 부딪쳤고 둘 다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서로 사과를 했다. 한 눈에 보아도 옷차림이 세련된 여성이었다. 아마 30대 중반이 아닐까 싶은 얼굴.


그는 내가 옆으로 물러난 자리 옆에 서서 버스 도착정보를 한참 보더니, 다시 폰을 들여다보더니 도로가에 서서 초초한 듯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 빨간색 광역버스 한 대가 곧 도착할 예정이라는 알림이 뜨고, 그 버스가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마 그 버스를 타려는 듯, 한 발을 더 도로쪽으로 내딛고 목을 빼고 기다렸다. 


그런데 버스가 정류장까지 오지 않고 조금 위쪽에서 도로가로 접근해 속도를 줄이더니 정작 정류장은 그대로 통과해 지나쳐버렸다. 그는 버스가 정류장에 오기도 전에 멈추는 것 같은 모습을 보더니 아마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그 버스가 도로 안쪽으로 차선을 바꾸며 속력을 내자 도로로 내려서서 손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버스는 그를 보지 못했는지 그대로 휙 자나쳤다.


명백한 버스 기사의 실수였다. 다음 버스는 20분을 더 넘게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 순간 차도에서 다시 인도로 올라서는 그의 표정을 보았다. 망연자실한 모습. 나였더라도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났을 것 같다. 그는 아예 택시를 타려는 듯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며 택시가 오는지 살폈다. 퇴근 시간은 지났지만, 여전히 차량은 많았고, 택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경험으로 안다. 그 길에서 그 시간대에 빈 택시를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버스 도착 알림에 나온 다음 버스가 올 20여분 뒤까지도 빈 택시를 만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그가 그렇게 초조하게 버스를 기다린 것은 아마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때 그렇게 초조함을 느꼈다. 


내가 타아햘 버스가 오기까지 한참을 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내가 예상한대로 그는 아직 택시를 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버스에 올랐기에 그 다음 그의 행보를 알 수 없었다. 그는 과연 자신을 태우지 않고 그냥 가버린 버스 기사를 원망했을까?


양수(두물머리), 양평, 용문 그리고 막국수


재작년에는 유독 강의 요청이 많았는데, 작년에는 강의 요청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들어오는 요청이 있어도 내가 직접 하지 않고, 주위에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넘겼다. 올해 다시 강의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특히 올해 요청은 내 경험을 보고, 나를 지명해서 들어오는 요청이 대부분이라 다른 사람에게 넘길수가 없었다.


그 중 양평에서 온 요청이 있었다. 서울에 산 지 15년이 훌쩍 넘었지만, 나는 아직도 우리 동네를 벗어난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경기도 지리는 더 모른다. 양평에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양평이 어딘지도 몰랐다. 강의는 총 2회였는데, 하루에 몰아주면 좋았으련만, 주 1회씩 총 이틀을 양평까지 가야했다. 구체적인 위치가 어딘지는 몰랐지만, 서울의 서북쪽 끝에 살고 있는 내게 엄청 먼 거리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아침 10시 강의였는데, 강의 장소까지 대중교통으로 3시간 가까이 걸리는 걸로 길찾기 앱이 알려줬다. 7시 전에 나와야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차를 빌려 운전해서 가능 방법도 생각해봤으나, 아침 출근길에 얼마나 차가 막힐 지 생각이 미치자,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 생각을 폐기했다. 여러번 갈아타더라도 어쩔수 없이 대중교통으로 가야지 생각했다. 전날 일찍 자고 컨디션 조절을 잘 해야 강의시간에 맞출 수 있고, 강의도 잘 할 수 있으리라 머리로는 생각했다. 하지만 술 한 잔 하자는 후배의 연락에 내 손가락은 내 머리와는 관계없이 약속을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어! 이러면 곤란한데. 어쩔 수 없이 나는 술을 한 잔 마시고 자정을 넘겨 집으로 들어갔고, 알람을 10개 넘게 맞추고도 혹시 못 일어나서 강의를 펑크내고 이 바닥에서 신용을 완전히 잃게 될까봐 걱정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잠에 들긴 했는데, 계속 악몽을 꿨다. 꿈에서 나는 매번 늦게 일어나 급하게 경의중앙선을 타러 가는데, 꼭 버스가 사고가 나거나, 내가 뛰다가 다치거나, 경의중앙선 열차가 고장이 나거나 해서 강의 장소에 늦게 도착하는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었다. 그러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떴고, 이게 악몽의 반복인지 현실인지 깨닫기도 전에 후다닥 준비해서 길을 나섰다.


경의중앙선 열차에서 나는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정말 먼 곳이었다. 문득 자세를 바꾸며 어디쯤 왔는지 살펴도 아직 한참을 더 가야했다. 그러다 문득 밖을 보았는데, 운길산 역을 지나고 있었다. 그게 몇 년 전이었더라? 두물머리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지금처럼 경의중앙선을 타고 가다가 동행이었던 녹색당 당원에게 운길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내 머리는 당연하게 그때의 두물머리 투쟁에 대한 기억을 재생했다. 천막촌에서 지냈던 시간들. 그때 오랜만에 만났던 환경단체 선배들. 아름다웠던 두물머리의 모습들.


갑자기 양수 역에서 내려 두물머리를 다시 한 번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강의를 안 갈 수는 없었다. 얼마나 더 가야하나 노선도를 살피다가 내가 내려야 할 양평역에서 조금 더 가면 용문 역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올해 여름 휴가를 준비할 때 큰 아이는 다시 한 번 레일바이크를 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과 레일바이크를 두 번 타봤는데, 한 번은 용문에서 한 번은 삼척에서였다. 그 유명한 강촌 김유정역 레일바이크도 타보고 싶었는데,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당연한 듯 삼척이란 답이 돌아왔다. 길이(시간)과 재미 면에서 단연 삼척이 훨씬 낫다. 그래서 2년 전에 이어 올해 또 삼척을 휴가 일정에 포함시켜 준비했었다.


2년 전에 탔을 때는 작은 아이가 아직 어려 페달에 발이 닿지 않았었다. 그리고 큰 아이도 지금 보다는 어렸기에 힘을 충분히 내지 못했다. 올해는 두 딸들이 열심히 페달을 돌리니, 나는 거의 힘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올해는 유독 앞쪽에서 속력을 내지 못했다. 속력을 좀 내고 달려야 재미가 있는데, 마치 연휴때 고속도로에 차들이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레일바이크 들이 멈춰선 채 한 참을 기다려 조금 움직이고, 또 조금 가다가 멈춰 한참을 기다리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암튼 그날 큰 아이가 몇 년전에 갔던 용문 여행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아직도 그때 용문 역 근처에서 먹었던 막국수 맛을 못 잊고 있었다. 또 먹고 싶다고 다시 가보자고 했다. 비록 레일바이크 노선은 삼척이 더 재밌지만, 레일바이크를 타러 놀러갔던 여행지로서의 기억은 용문이 더 강하게 남아있는 것 처럼 느꼈다. 과연 그 식당이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을까? 아직도 그때 그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어쩌면 아이는 스스로 그 맛에 대한 환상을 심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중에 다시 가서 먹어보면 기억하는 그 맛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느 주말 아침 느닷없이 아빠가 짧은 여행을 가자며 짐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갔던 그 여행이 인상 깊었기에, 긴 시간 경의중앙선을 타고 가서 처음 먹었던 음식인 그 막국수를 인상깊게 기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의 말을 듣고 또 하나 궁금했던 건, 과연 언제까지 아이가 그 막국수 맛을 기억할 것인가였다. 언젠가 아이가 어른이 되고, 삶에 지친 일상을 보내던 어느날 문득 아빠랑 함께 여행가서 먹었던 그 막국수 맛을 떠올릴까? 어쩌면 내 나이쯤 되어서 아빠에 대한 그림움과 함께 그 막국수를 떠올릴까?


사진을 뒤져보니 그 여행에서, 그 식당에서 찍어놓은 막국수 사진은 그렇게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식당 주인이 아이들이 먹기에는 매울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길래, 아예 매운 양념은 다 빼고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는 긴 시간 이동 끝에 꽤나 배가 고픈 상태로 막국수를 먹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는 같은 식당에서 아이들은 한 번 더 막국수를, 나는 수육에 막거리를 마셨다. 그날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은 수육을 먹고 신난 작은 아이가 장난치고 웃는 모습이었다. 내 기억에는 작은 아이가 막국수도 맛있어했고, 수육도 맛있게 먹었던 것 같다. 정작 큰 아이가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작은 아이는 지금은 그 여행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듯 했다. 그래. 그땐 어렸지. 그 후로 몇 번을 그렇게 갑자기 아빠가 즉석으로 결정한 여행을 다녀온 것은 기억하던데, 그런 여행의 거의 처음이었던 그 여행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궁금해지는 건, 나중에 작은 아이는 어떤 시간의 어떤 사건과 연결해서 아빠를 기억할까?


어쩌면 이번 여름 삼척에서 지낸 시간으로 아빠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무엇으로 우리 부모님을 기억하는지도 떠올려본다. 수많은 사건들, 시간들이 스쳐 지났다. 즐거웠던, 어쩌면 행복했던 시간들도 있었고, 서운하고 슬펐고 힘들었던 시간들도 있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겠지. 어느 한 사건만으로 아빠를 기억하지는 않겠지. 복잡다양한 많은 시간과 사건과 감정들이 얽혀있을 것이다.


거제 출장 다녀온 일과 주말마다 이리저리 불려다닌 일과 기후위기 집회에서 있었던 일 등을 적고 싶으나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아서 일단 다음으로 미룬다. 내일도 지역 축제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 주말마다 일. 주말에는 좀 쉬고 싶다는 몸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구나. 아, 그리고 해마다 돌아오는 애들 엄마의 독일 장기 출장도 곧 다가온다. 아이들과 원없이 붙어서 지낼 수 있겠구나.


※ 오늘 밤엔 부모님과도 아이들과도 전화 통화를 해야겠다.

※ 오랜만에 감상을 남기고 싶은 책이 생겼는데, 통 시간을 못 내고 있다.

※ 3달 넘게 운동도 못 하고 있다. 운동하고 싶다. 운동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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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10-04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글은 언제나 찌이이이인한 맛이 있어서 좋고 부럽고 훈훈하고 막 그래요. 오래 글이 안올라오시면 눈코뜰 새 없이 바쁘시겠지 하면서도 어쩐지 기다려집니다.
저는 운동하고 싶지 않지만 운동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그 말씀에는 크게 공감합니다!! 응원합니다^-^

감은빛 2019-10-17 18:39   좋아요 0 | URL
답이 많이 늦었네요! 정신없이 살다보니.
syo님 말씀에 많이 힘이 납니다. 고맙습니다! ^^
 


기후위기 비상행동 주간 아침 캠페인


언제 안 바쁜 시기가 있었냐고 물으면 늘 바쁘다고 답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이번 주는 그야말로 대박 바쁜 날들이었다. 아니 거슬러 올라가면 8월 초 휴가를 다녀온 후 추석 연휴 전까지 1달간도 완전 바쁜 날들이었고, 그 전에 휴가 가기 전 7월 한 달도 엄청 바빴다.


일단 밥벌이를 하는 일터의 업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올해 봄 1명의 활동가와 1명의 반상근 활동가를 채용해 조금 내 일이 줄어드는 것 처럼 느껴졌지만, 이후 일이 더 많이 늘어났고, 두 분의 신입 활동가는 업무를 익히고, 자신의 몫을 완전히 가져가는데 시간이 걸려 그만큼 내게 업무 부하가 걸렸다. 나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 여겼지만, 그 사이 사람이 늘어난만큼 업무량도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다. 게다가 자꾸 일이 꼬여서 완결지었어야 할 일들은 자꾸 뒤로 밀리고, 새로 들어오는 일들은 그대로 들어와 그야말로 재앙 수준으로 일이 늘었다. 그리고 그만큼 내 건강은 나빠졌고, 그만큼 내 머리칼은 빠졌고, 스트레스는 늘었다.


게다가 나는 다양한 지역 활동에서 이런 저런 역할을 맡아 참여중이고, 여기에 더해 녹색당에서는 지역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우리 지역 녹색당은 기후 위기를 본격적을 알리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캠페인과 정당연설회 등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그 준비와 실행으로 주말까지 바쳐가며 활동했다.


이번 주는 지역 녹색당에서 기후위기 비상행동 주간으로 설정하고, 매일 아침 지하철역 캠페인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명색이 공동운영위원장인 나는 하루도 안 빠지고 나가기로 결의를 했다. 결과적으로는 수요일 아침에 너무 몸이 안 좋아서 하루 빠지긴 했지만, 오늘 아침까지 4일을 캠페인을 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출근해서 일을 해야하는 입장에서 따로 짬을 내서 다른 일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침 출근길 캠페인은 그것 자체로 스트레스다. 그나마 피켓을 들고 가만히 서있는 건 그래도 괜찮은데, 전단지늘 나눠주는 일을 맡으면 힘들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출근길에 다른 일에 시선을 줄 여유가 없다. 그런데 누군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전단지를 나눠준다? 내 입장이었더라도 싫을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급하게 이동하는 분들은 제외하고, 가능하면 다른 분들의 동선을 막지 않으면서 최대한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며, 그 분의 손 위치 가까이 전단지를 내밀어야 한다.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 분이 손을 내밀어 전단지를 받아주시면 감사한 일이고, 그냥 지나치더라도 그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아침에 몇 백장의 전단지를 돌렸다. 한 편으로 뿌듯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피곤한 일이다. 아침에 출근도 하기 전에 벌써 퇴근하고 싶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지친다.


동네에서 캠페인이나 정당연설회를 하다보면 거의 매번 아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대다수의 지인들은 응원과 격려의 말과 행동을 보인다. 내가 고생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가끔 느껴진다. 그런 태도들은 참 고맙다! 지인이 아닌 모르는 분들이 가끔 응원하고 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정말 고마움을 느낀다. 반대로 거의 어김없이 다가와 딴지를 걸거나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정당연설회를 하다보면 반드시 그런 분들과 마주친다.


나는 저녁형 인간이라 밤에 혼자 있을 때 업무 효율이 가장 높고, 집중도 잘 되는 편이다. 그래서 야근이 많다. 낮에 여기저기 회의가 많아 저녁이 되어서야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러 아침 출근 시간을 늦게 잡았고, 남들보다는 늦게 일어나고, 늦게 출근한다. 그런데 아침 캠페인을 하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서 남들 출근할 때 나와 있어야 한다. 이게 또 엄청난 스트레서였다.


새벽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내 꿈에서는 늦게 일어나 캠페인에 늦어서 함께 하기로 한 동료들이 나를 기다리며 원망하는 상황, 내 일터 상급자가 늦게 나온 내게 한 마디하는 상황 등이 무한 반복된다. 편히 자야 몸과 마음도 피로를 회복할텐데, 일찍 일어나 나가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자꾸 꿈에서조차 시달리니 잠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특히 오늘 아침에는 녹색당 차원의 캠페인과 동시에 일터에서도 임원들이 캠페인에 동참하기로 해서 실무자인 내가 피켓을 만들어서 챙겨 나와야했다. 내가 늦으면 그들은 피켓 없이 아무것도 못하고 소중한 아침 시간을 낭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계속 늦게 일어나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택시가 안와서 뛰고 어쩌고 하는 등의 꿈을 수십번 반복해서 꾸었다. 결국 알람이 울려 잠을 깼는데, 잠을 하나도 못 잔것처럼 피곤했고, 오늘따라 발목과 무릎이 아팠다. 하필 오늘. 비틀비틀 절뚝절뚝 내리막길을 어렵게 내려와 택시를 탔다. 딱 맞춰 도착할 줄 알았는데, 다 와서 신호에 걸리는 바람에 3분을 늦어 버렸다.


아! 정말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아침 캠페인, 아침 회의, 아침 면담, 조찬모임 등등 아침에 해야하는 일이 제일 싫다. 내일은 토요일이니 늦잠을 잘 수 있겠지.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깨우기 전까지 안 일어날테다.


기후 위기를 막으려면 당신의 행동이 필요해!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억지로 억지로 움직였던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아이들을 키우며 밥벌이를 위한 일터 업무 외에 추가로 녹색당 활동을 비롯해 지역 내 다양한 일들을 떠맡아왔던 바로 그 이유다.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자신, 자신이 사람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이기적인 이유로 움직인다면 세상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둘째는 그레타 툰베리 덕분이다. 작년부터 등교를 거부하고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의회가 기후 비상 선언을 하도록 움직였으며, 최근에는 온실가스를 내뿜는 비행기 대신 최소한의 편의시설도 없는 작은 요트로 2주간 대서양을 건너 뉴욕의 기후위기 국제 회의에 참여할 예정인 청소년 환경운동가 덕분이다. 그의 연설을 몇 번 찾아보았는데, 그 놀랍도록 간결한 논리와 설득력에 매료되었다. 그의 활동을 보고 있자면, 아무리 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나 역시 분발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이 지치고 마음이 힘들때마다 습관처럼 그의 연설 영상을 틀어놓고 다시 마음을 다 잡았다.




셋째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활동의 관성 혹은 사회적 위치와 명예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까? 대학 시절부터 환경운동을 비롯한 사회활동을 시작했으니, 활동가로서의 삶은 벌써 20년을 넘었다. 그 기간 중 한때 밥벌이을 위한 직업이 학원 강사, 건설현장 노동자, 출판사 노동자 등으로 직업활동가가 아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 시기에도 업무 외 시간에는 끊임없이 다양한 활동에 참여해왔다.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 벌이에 집중해야 했던 짧은 시간들을 제외하면 실제로 대부분의 시간은 환경운동단체, 사회운동을 위한 법인 등에서 일했다.


그 긴 시간 활동을 이어오며 일정 부분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평가할 만한 지점도 분명 있겠지만, 또 일정하게는 과학에서 관성의 법칙이라고 부를 만한, 그냥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어떤 생각이 자꾸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그 생각의 밑바탕에는 사회적 위치와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이렇게 내 동기를 분석해보고 나니, 다른 사람들의 동기나 이유도 궁금해졌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동료들, 선배나 후배들의 동기는 무엇일까? 언제 터놓고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동기는 무엇인가요?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위해 내일 오후 3시 대학로에 나와주세요! 지역에 계시다면 그 지역 행동에 함께해주세요.


그레타 툰베리의 말처럼 이제는 희망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때입니다. 바로 지금 당신의 행동이 필요합니다!




서울 9.21 13:00 서울 혜화역 1~2번출구
경남 9. 21 17:00 창원 상남동 분수광장
대구 9.21 13:30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
충북 9.21 10:00 청주 무심천
전북 9.21 14:00 전주 남천교
부산 9.21 11:00 부산 서면 하트조형물
전남 9.21 14:00 전남 순천 조례호수공원
수원 9.21 17:00 수원역
홍성 9.21 10:20 홍성역
제주 9.21 14:00 제주시청 주차장 제주 그대로가 아름다워 필요어수다 양 행사
제주 9.21 14:30 제주컨벤션센터 로비 UN 세계 평화의 날 행사
















요즘 이 책을 읽으며, 아주 오랜만에 진지하게 책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시기를 넘기면 내 서재에 몇 년만에 서평 하나를 등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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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림


학창시절에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모두 책받침을 갖고 다녔다. 하나가 아니라 몇 개씩. 아름다운 여성 연예인들의 사진 때문이었다. 흔히 책받침 4대 여신이라고 불리는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왕조현, 브룩 쉴즈 뿐 아니라, 최진실, 이상아, 김혜수 등 한국 언니들도 있었다. 나는 정작 필기할 때 책받침을 받치면 필기감이 썩 좋지 않아서, 실제로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책받침은 늘 갖고 다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름다운 언니들의 사진을 보고도 누군지 잘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어느날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친구들이 마구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같은 연예인의 다른 사진들을 들이밀며, "이 사람과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야?" 묻고 내가 틀린 대답을 하면 다같이 책상을 쾅쾅 내리치며 크게 웃는 것이다. 나는 그게 부끄럽기보다는 오히려 이상했다. "어떻게 이 사람과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야? 분명 다른 사람이잖아!" 그러면 친구들은 다시 크게 웃으며 놀려댔다. "안경은 뭐하러 끼고 다니냐? 눈 갖다 버려라!"


그 시절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친구들은 저 사진들을 보며 죄다 구분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확인


학창시절에는 인간관계 폭이 좁고, 하루종일 같은 공간에 강제로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으니, 내가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야 수많은 선배들과 동기들을 만나며 누가 누구인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잘 구분하지 못하는 증상을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나는 대다수가 나와 비슷하게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간혹 유난히 사람을 잘 기억하고 알아보는 친구들이 눈에 띄긴 했다. 그들이 독특한 것이고 대부분은 나와 비슷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는 여러번 만나도 쉽게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관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여러차례 만나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물론 그들이 말을 걸거나 아는 체를 하면 그제서야 떠오르긴 했지만, 아주 가끔 오랜만에 만나는 어떤 사람들의 경우, 말을 걸어와도 그가 누구인지 쉽게 떠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아주 곤란한 상황을 몇 차례 겪으면서 내가 남들과 달리 유난히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리고 쉽게 기억해내지 못하는구나 하고 깨닫기 시작했다.


화장


내가 잘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이었다. 간혹 남성들의 경우도 그랬지만, 대부분 여성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화장법과 머리 스타일의 변화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추정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가족도 못 알아본 경험 때문이다.


언젠가 우연히 티비에서 전유성 씨의 딸이 아빠가 길에서 만나면 자신을 못 알아본다는 얘길 하는 걸 봤다. 그게 마치 한 두번이 아닌 것처럼 말했던 것 같다. 그 순간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긴 하구나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엄마를 한 번, 동생을 두세번 못 알아본 적이 있다. 그 모든 경우 길에서 마주쳤는데, 내게 익숙한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바로 화장의 유무, 미용실, 화장법의 변화 등이 이유였다.


어느날 동생은 버스에 앉아 있다가 들어오는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들었는데, 내가 자신을 똑바로 보고도 지나쳐서 뒤쪽 어딘가에 서서 가더라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어떻게 동생을 못 알아볼 수 있냐고 따졌다. 나는 동생이 나를 붙잡고 말을 거는 순간까지, 즉 동생의 목소리를 듣기 직전까지 이 여성이 왜 나를 붙잡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낯선 여성이 내게 무슨 볼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익숙지 않은 얼굴이 입을 열자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나는 이 사람이 나랑 20년 넘게 같이 살아온 동생이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어느날 엄마도 길에서 자신을 못 알아보고 지나치는 나를 보고 내 팔을 덥석 잡았다. 그냥 스쳐 지날때는 얼굴을 보고도 못 알아봤지만, 나를 붙잡고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즉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엄마를 알아볼 수 있었다. 다행히 엄마는 내가 생각에 잠겨 걷느라 자신을 못 본거라 여기는 듯 했다.


이때 나는 속으로 큰 충격을 받았는데, 내가 사람을 못 알아보는 증상이 생각보다 심각하구나 느낀 것이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저 위에 언급했던 전유성 씨와 딸의 경우를 나도 겪는게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뻔 했다.(다행히 '뻔'에 그쳤다!)


큰아이는 중학생이 되어서부터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요즘은 화장을 하지 않으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이가 자신만의 화장법을 찾고,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화장법이 자주 바뀌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 아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어떤 화장법을 주로 사용하는 것 같고, 볼 때마다 일정한 즉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 전 어느 단계의 어느 날, 나는 아이와 사람이 많은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아이가 가까이 올때까지 나는 아이를 알아보지 못할 뻔 했다. 다행히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아이를 알아보았고 전유성 씨와 같은 경우를 겪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아이는 아직 중학생일 뿐이고, 점점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알수 없는 것이니까. 게다가 나는 아직은 어린 작은 아이도 있지 않은가. 그 아이가 자라서 또 어떤 화장을 하고 나타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초성게임


그런데 최근 조합원 캠프를 다녀와서 내가 단지 사람 얼굴만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흔이 훌쩍 넘어서야 나에 대한 어떤 본질적인 사실 하나를 깨달은 것 같다. 정말 사람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살아가는 걸까? 과연 내가 아는 내가 정말 내가 맞는 걸까? 어쩌면 남들 눈에 보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는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1박2일 캠프를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무척 힘들고 피곤했는데, 뭐 그런 일이 한 두번도 아니어서 익숙하긴 했다. 익숙한 것과 힘들고 어려운 건 분명 다른 문제다. 익숙하다고 해서 그 일이 힘들지 않다거나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면서 겹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다행히 마지막 조합원 교류 프로그램은 따로 준비하고 진행하실 분들이 있어서 나는 하루종일 긴장하고 있던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 여러 행사에서 자주 초성게임을 접했다. 아마 매년 두세번은 이 게임이 포함된 행사에 참여한 것 같다. 보통 팀을 나눠서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어느 단위에서 하더라도 보통 나와 같은 팀이 된 사람들은 안심하는데, 내가 아는 게 많아서 이 게임을 잘 할거라고 여기는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 게임을 못하는 편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분명히 잘 아는 단어여도 초성만으로 제시된 시각 정보를 나는 그 단어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나중에 게임에 직접 개입하지 않은 진행자나 문제 출제자가 내게 와서 넌지시 묻기도 했다. "일부러 안 맞춘거야? 금방 맞출줄 알았는데.", "아니, 나는 전혀 몰랐어. 그 단어를 모른 것이 아니라 그 초성이 그 단어라는 걸 몰랐어."


여러차례 초성 게임을 겪으며, 문제나 힌트를 읽어주는 류의 게임과 달리 유난히 맞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번 캠프에서는 혹 이게 내가 늘 '불치병'이라 여기고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추리


단서1. 나는 텍스트를 읽고 푸는 문제나 듣고 푸는 문제에서는 크게 어려움 없이 아는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

단서2. 같은 답이어도 초성만으로 단서가 주어지면 전혀 연결시키지 못한다.

단서3. 초성만으로 답을 맞추지 못해 힌트가 제시되면 단서1의 경우에 해당하므로 문제를 맞출 수 있다.

단서4. 어려서부터 유난히 숨은 그림 찾기나 틀린 그림 찾기 등의 게임도 잘 하지 못했다.

단서5. 내가 누군가를 잘 알아보지 못한 몇몇 경우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의 얼굴, 머리 스타일, 키나 체격 같은 정보들을 내 기억 속의 어떤 누군가와 매치 시키지 못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단서6. 이 경우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떠올린 경험이 있다.

단서7. 인터넷 보안을 위해 이상하게 왜곡된 숫자나 문자 인증을 자주 틀린다. 난 분명히 내 눈에 보이는대로 정확하게 입력했는데, 자꾸 시스템은 틀렸다고 한다.

단서8. 내 기억으로 이런 현상은 적어도 중학교 때부터였고, 잘 떠올려보면 이전에도 사소하지만 비슷한 경험으로 엮을 수 있는 기억이 있는 걸 보면, 나는 이런 현상을 태생적으로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거나 경험을 쌓아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단서9. 앞으로도 시각 정보만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거나 해결해야 할 상황이 오면 과연 이 판단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 쉽게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서10. 어쩌면 이 증상은 내 시력이 난시와 근시로 매우 나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덧붙임1. 마흔이 넘어서부터 노안이 왔다고, 내게 아직 노안이 안 왔냐고 묻던 선배들 이야기를 흘려 들었는데, 요즘 가끔 책을 읽다가 촛점이 잘 안 맞는 것 같은 증상을 겪는다. 이게 그 노안인건가? 이제 곧 다촛점렌즈 안경을 맞추거나 돋보기 안경을 하나 더 맞춰야 하는 건가? 아니 왜 난시에 근시에 겹쳐 노안까지 찾아오는거냐구!


불치병


언젠가부터 나는 이 증상 혹은 현상을 불치병이라 여겼다. 하나의 글에는 다 언급도 할 수 없을만큼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자신을 못 알아본 사실에 크게 화를 냈고, 어떤 이들은 당황한 후 별일 아닌 것처럼 대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이후에 나를 무시하는 방식의 복수(?) 택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 적도 수없이 많았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지금도 누구였는지 궁금한 한 사람이 있다. 내 기억에 분명 한 때 그와 친하게 대화를 나눴던 시간이 있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그를 마주쳤을 때 그가 누구인지, 이름은 뭔지, 어떻게 만났고, 함께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그와 함께 있었던 기억의 조각이 스치듯 떠올랐다 사라질 뿐이었다. 그가 다가와 아주 반갑게 인사를 걸어왔을때, 나는 그가 선배인지, 친구인지, 아니면 후배인지를 얼른 떠올릴 수 없어서 무척 당황했다. 아! 정말 우리말과 문화는 왜 이렇게 사람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그에 따른 대응을 다르게 만들었던 말인가! 만약 영어였다면 그저 태연하게 "Hi" 한마디 했을면 괜찮았을텐데. 너무 당황했던 나는 그에게 아무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고, 반갑게 웃던 그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기가 싹 가시더니 이내 황당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내게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기회를 주지 않고 돌아서버렸고, 이후 그를 아주 가끔 마주쳐도 그는 나를 무시하고 못 본 척 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과연 누구였는지 알지 못한다. 여러번 곱씹어 떠올려본 기억으로, 그는 아마 우연한 기회에 친해진 친구였던 것 같다. 짧은 기간에 빨리 친해졌고, 그러다 꽤 오래 서로 마주치지 못했고, 그날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내가 그를 못 알아본 것이다.


만약 그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날 내가 널 무시하거나 일부러 그렇게 대한 것이 아니라고. 널 금방 떠올리지 못한 건 분명 잘못일 수 있지만, 내가 늘 그럴 수 밖에 없는 증상을 가졌다는 걸 설명해주고 싶다. 이외에도 길에서 마주쳤다가 내가 금방 알아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을 보여주고 싶다.


어떤 특정한 훈련을 통해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길에서 내 소중한 가족들을 못 알아보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지하철역 캠페인에서도 잘 아는 선배의 익숙한 얼굴을 보았는데, 한순간 그 얼굴이 너무 낯설어보여 혹시 아닌가? 잘 못 본가 싶어서 인사를 망설였는데, 문득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며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 하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약 한 달 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를 오늘 아침 일을 계기로 적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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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게 매달리기 / 케틀벨 스윙


어제 밤 이젠 키가 많이 커서 내 눈높이 정도까지 자란 큰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왜 나는 쎄게 매달리기 안 해줘요?" 오랜만에 들은 단어라 뜻과 연결시키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쎄게 매달리기'라는 단어는 작은 아이가 지은 이름으로 실은 아이들을 케틀벨처럼 안고 스윙 동작을 하는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그네를 타는 기분을 느껴 재밌고, 나는 아이 몸무게 만큼의 강도로 운동하는 효과를 얻는다. "너 어릴때 많이 해줬어.", "기억 안 나.", "너 크고 나서도 많이 해줬어.", "지금 해줘.", "지금은 못 해. 너 키가 아빠랑 비슷한데 어떻게 해."


아마 아이는 문득 내가 작은 아이에게 그 쎄게 매달리기를 해주는 장면이 떠올라서 왜 자기는 안 해줬냐고 물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오래전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는 농활가서도 동네 아이들을 죄 맡아 돌보고 같이 놀았고, 운동 단체 선배들의 아이들도 늘 데리고 놀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과 놀 때는 몸을 움직이며 노는게 가장 좋은데, 그 중 최고는 아무래도 아이의 팔이나 겨드랑이를 잡고 빙글빙글 도는 동작이다. 아이가 순간적으로 공중에 뜨면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 든다. 그때부터 다양한 동작으로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아이들을 마치 바벨이나 케틀벨처럼 여기고 운동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이는 기분 좋게 놀고, 나는 운동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그런 동작들 중에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던 건 큰 아이가 언급한 스윙이다. 작은 아이 말로는 쎄게 매달리기. 자기 입장에선 나한테 매달려 있는 동작인데, 뒤로 갔다가 앞으로 높이 올라갔다가 다시 뒤로 떨어지는 동작이 자신에게 '쎄다'라는 단어로 연결되었으리라.


아이들이 자라면서 계속 몸무게가 늘었으니 나로서는 따로 더 무거운 케틀벨을 사지 않아도 운동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교 4~5학년 즈음까지 할 수 있다. 대략 10kg 에서 30kg 가까운 무게로 운동할 수 있다.


이 스윙 동작의 핵심은 케틀벨을 뒤로 당길 때 허리를 펴고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엉덩이를 최대한 접어서 힙힌지(Hip Hinge) 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Hinge 는 경첩이란 뜻으로 접었다 펴졌다 하는 동작을 말한다. 케틀벨 스윙은 힙힌지를 통한 전신운동으로 빠른 속도 많은 횟수를 반복하면 유산소 운동의 효과도 거둘 수 있는 아주 좋은 운동이다.


케틀벨은 크기가 작고 내 손 안에서 컨트롤이 가능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아이를 안은 채 힙힌지를 잘 만드는 것이 이 동작의 핵심이며, 아이의 재미와 나의 운동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아이들이 이 동작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집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종종 해주곤 했는데, 그럼 어른들도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만약 그 장면을 다른 아이들이 본다면, 우루루 몰려와서 서로 나도 해달라고 난리가 난다. 그럴 때는 줄을 세워놓고 차례대로 서너번씩 해줘야 한다.


하루는 그렇게 몰려든 동네 아이들에게 스윙을 해주고 있는데, 트레이너이자 운동처방사로 일하는 분이 보더니 몸무게와 체형이 다른 다양한 아이들을 해주는데도 자세가 완벽하다고 칭찬했다. 그 당시 내가 스윙이란 운동을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나이 차가 있는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꾸준히 해주다보니 키가 크거나 작거나 덩치가 크거나 작은 아이들을 안고 힙힌지를 만드는 과정을 다양하게 해봐서 그랬을 것이다.


목마 타고 앉았다 일어나기 / 백 스쿼트


아이를 바벨 대신 안고 다양한 동작을 할 수 있다. 아이가 좋아했던 또 다른 동작은 아이를 어깨 위에 목마 태우고 내가 스쿼트 동작을 하는 것이다. 이는 내 뒷목과 어깨 위에 바벨을 얹고 앉았다 일어나는 백 스쿼트 동작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는 바벨 운동 중에 백 스쿼트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내 관심사는 거의 언제나 스내치에 있었고, 스내치를 잘 하기 위한 동작으로 오버헤드 스쿼트가 있었다. 그래서 스쿼트 운동은 거의 언제나 오버헤드 스쿼트나 맨몸 운동인 에어 스쿼트로 했었다.


그런데 바벨이 아닌 아이를 태우고 하면 아이도 재미를 느끼고 딱딱하고 차가운 바를 목에 얹어 피부가 쓸리는 일도 없다. 아이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니까. 작은 아이의 경우 어렸을 때는 재밌어하다가 조금 자란 후에는 오히려 무섭다고 겁을 먹곤 했다. 내가 운동 효과를 얻으려면 앉을 때는 천천히 앉고 완전히 쪼그려 앉은 풀 스쿼트 자세에서 잠시 멈췄다가 힙드라이브 힘으로 빠르게 일어나야 하는데, 그 동작이 너무 빨라 무섭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태우고 스쿼트를 할 때는 속도 조절이 필요했다.


백스쿼트는 비교적 무게를 올리기 쉬운 온동이다. 아이가 자라도 꾸준히 해줄 수 있다. 다만 나는 어깨 부상과 무릎 부상 이후로 무게를 드는 운동을 거의 하지 못해 한동안 해줄 수 없었다. 지금이라면 큰 아이는 어려울테고, 아직 작은 아이는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슴 위에 앉히고 윗몸 일으키기


지금은 주로 철봉에 매달려 레그레이즈나 토우 투 바 동작으로 복근 운동을 하는데, 예전에 실내 철봉을 사기 전에는 늘 윗몸 일으키기를 했다. 아, 사실 윗몸 일으키기는 순수 복근 운동을 아니다. 상반신 전체가 아닌 복근 위쪽만 들어올리는 크런치 동작이 오히려 복근 단련에는 더 필요한 운동이다.


여기에 무게를 더하려면 주로 바벨 원판을 가슴에 얹고 하거나 덤벨을 얹고 해야 한다. 이는 차갑고 자꾸 미끄러져서 불편하다. 대신 누운 상태에서 아이를 내 가슴 위에 앉히고 양 팔로 잘 안은 후에 윗몸 일으키기 동작을 하면 효과적이다. 이때 아이가 내 얼굴을 자기 다리 사이에 두게 되는데 그래서 큰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인지 안 하겠다고 했다. 아마 부끄럼을 느끼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 동작은 주로 작은 아이를 올리고 했다.


처음엔 계속 윗몸일으키기 동작을 최대한 정자세로 하려고 노력하고, 힘을 떨어진 후에는 클런치 동작으로 전환해 몇 개라도 더 했다. 완전히 지쳐 도저히 더 할 수 없을 때까지 조금이라도 몸을 들어올려야 한다. 이따 가장 주의할 점은 다리를 반동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코어 근육 단련이 필수이고, 이를 위해 벽에 발을 붙인다던가, 의자 다리를 활용한다던가 다양한 방식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아이를 배 위에 앉게 하고 아이가 앉은 방향을 달리하면서 다양한 변형 동작을 해 볼수 있다. 작은 아이는 어려서부터 내 몸 위에서 노는 걸 좋아했고, 나는 그 점을 활용해 아이의 무게로 다양한 코어 단련 동작을 해 볼 수 있었다. 


등 위에 앉히고 팔굽혀펴기


영화에도 종종 나오는 아이를 활용한 가장 대중적인 운동 동작은 등 위에 아이를 앉히고 하는 팔굽혀펴기 동작일 것이다. 그런데 이는 무게 푸쉬업에 익숙한 숙련된 사람들에게 가능한 동작이다. 맨몸 푸쉬업을 주로 했고, 무게 푸쉬업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무척 어렵더라. 작은 아이를 앉혀 놓고 간신히 자세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로 억지로 두 세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정자세로 10회 이상 꾸준히 할 수 있을만큼 힘이 있다면 아이가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텐데, 펌핑 운동을 거의 하지 않았던 나는 그만큼의 팔힘을 갖지 않았다. 아이도 이 동작만큼은 재미가 없다며 별로 호응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예전에 고민해보고 함께 놀면서 다양한 동작을 생각해보곤 했던 것 같은데, 그러지 않은 지도 어느새 몇 해가 지나 이젠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은 사춘기 큰 아이의 눈치를 봐야 할 일이 많아지면서, 아직 어린 작은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느낀다. 이제 몇 해만 더 지나면 작은 아이도 더이상 나랑 놀아주지 않겠구나 싶다. 아직 놀아줄 때 최대한 열심히 재밌게 잘 놀아야지. 더불어 큰 아이와 잘 놀 수 있는 방법이 뭔지도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다 나중에 이 녀석들이 성인이 되면 아빠랑 같이 술 마셔주려나? 내게 최고의 선물은 아이들이 사주는 술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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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8-04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아이들고 함께하는 운동이네요.운동도하고 아이들과의 친밀감도 높이고 일석이조인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