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일기04] 전치 8주 이후 6개월 경과
작년 여름 교통사고를 당한 후 입원해 있는 동안 달리 할 일이 없어서 폰 메모장에 이런저런 심정과 병원 내 사소한 일들을 참 많이도 타이핑 해놓았었다. 그땐 병원에 갇혀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그 좁은 병실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만이 내가 생각하고 기록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에 사소한 일들도 잊지 않으려고 잔뜩 써놓았었다. 그 기록들 속에는 40대 중반을 지나는 내 삶의 주요 궤적들을 돌아보고 향후 얼마가 될지 모를 인생을 어떻게 대할지 자세를 바로 잡아보는, 그러니까 나 자신을 나름대로 성찰해보는 내용들도 있었다.
퇴원 후, 그 기록들을 정리해서 여기 알라딘에 남겨볼 생각이었다. 아마 이제는 남은 인생보다는 지나온 인생이 많을 것 같은데, 딱 이 시기에 병원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을 여기 남기고 싶었다. 또 사고와 그로 인한 부상에 대한 세부 내용들, 병원에서 겪었던 나로서는 나름 새로운 경험들을 함께 엮어서 '회복일기'라고 기록할 예정이었다. 다만 폰 메모장에 남겨놓은 양이 제법 많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마구 섞여 있어서 분류가 필요했고, 단상 중심으로 짧게 메모해 놓은 것들은 살을 보태 써나가야 했다.
그 첫 글을 알라딘에 쓰기 시작했는데, 6시간 가량 쓴 내요을 날려먹었다. 예전에도 가끔 겪었던 알라딘 서재 웹 글쓰기의 오류로 분명 로그인 상태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몇 시간동안 쓴 글을 저장하려고 등록 버튼을 누르면 로그인 화면으로 돌아가면서 써놓은 글이 다 사라져버리는 마법 같은 오류다. 너무 오랜만에 알라딘에 글을 쓰느라 잊어버리기도 했고, 또 당시에는 독한 진통제를 먹던 시기라서 약만 먹으면 엄청 졸린데, 그 졸음을 참아가며 억지로 책상 앞에 오래 앉아서 글을 쓰느라 제 정신이 아니기도 했던 것 같다. 암튼 당시 글을 두드린 시간이 6시간에 달할 정도로 글의 내용이 많았다. 주로는 병원에서 내내 생각했던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글을 고민하는 시간이 아닌 정말 두드리는데 들어간 시간이라 글의 분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그렇게 한번 날린 글은 다시 쓰고 싶지가 않더라. 돈 받고 써야 하는 꼭 써야하는 그런 글이 아니라면. 그래서 나는 글의 방향을 바꿔 그냥 부상당한 부위와 수술 및 치료 과정만을 나름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것만 해도 부상 부위가 다양해서 몇 개의 글이 될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회복일기라는 이름으로 글을 달랑 3개 쓰고 얼굴 부상 3가지 종류를 마쳤다. 그보다 더 많은 몸의 부상 부위는 시작도 하지 못했는데, 나는 더이상 글을 쓰지 못했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앞서도 언급했듯이 먹기만하면 엄청나게 졸리는 진통제를 하루 3차례 먹어가며 글을 쓰기가 힘들었다. 밥 먹고 약 먹고 잠시 쉬다보면 졸려서 그냥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둘째는 부상 이후 체력이 많이 약해져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일이 힘들었다. 타자가 느린 편은 아니지만, 내가 두드리는 글은 워낙 양이 많은 편이라 그래도 시간이 제법 걸린다. 꼭 책상 앞이 아니라도 이불 속에서라도 폰으로 북플 앱을 사용해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다른 글은 몰라도 이 [회복일기]는 그렇게 쓸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폰을 이용하더라도 시간이 더 걸리면 걸렸지 적게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는 어느 순간부터 좀 바빠졌다. 일터에서는 공식적으로 병가 중이었지만,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성격의 일도 있었고, 내가 다치는 바람에 모든 사무국 일을 다 떠맡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은 활동가가 원할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알려줘야 할 일도 있었다. 또 가해 차량의 보험사와 소통하며 합의에 이르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이런 일 자체를 겪어 본 적이 없으니, 원래 이런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아는 것이 없었다. 보험사 직원은 그 나름대로는 어쩔수 없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너무나도 불친절하고 어이없는 태도를 보였다. 자동차 사고 과실 비율 인정 기준에서부터 다양한 사고 사례와 법적 처리 과정 및 결과 등 찾아보고 공부해야 할 정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주 오랫동안 연락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변호사 친구에게 염치없이 전화를 걸었고, 교통사고를 주로 다루는 변호사 사무실을 검색해서 온라인 상담도 받았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진통제 때문에 하루 중 깨어있는 시간이 적은 편이었고, 나름 열심히 살았음에도 계속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결국 나름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보험사와의 합의도 마무리했다. 딱 거기까지 하고나서 나는 정말 너무나도 지쳐서 아무것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가을이 끝나고 추위가 시작되어 있었다. 책상이 있는 작은 방은 겨울에 너무 추워서 오래 앉아있기 힘들었다.
결국 내가 쓰려고 마음 먹었던 [회복일기]는 겨우 3번 만에 멈추고 2020년이 다 지나가버렸다. 12월 말에 최대한 짧고 간단하게라도 남은 내용들을 갈무리한 후에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몸은 하루종일 따뜻한 이불 속에 머물며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제 1월도 거의 끝나가고 슬슬 일터에서 복귀를 원하고 있었고, 음력 설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 [회복일기]도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서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실은 오늘 저녁 온라인 회의가 있어서 두 시간 가량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조금 피곤하긴 했지마) 다시 일터에 나가기 전에 이걸 마무리 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자판을 두드린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 외상외과 주치의가 작성한 진단서에 내 부상 부위는 총 9곳이었고, 최소 8주간의 치료기간이 필요하다고 적혀있었다. 그 내용을 읽기 쉽게 살짝 바꾸고 (내 판단으로 겹치는 부분을 합치면) 다음과 같다.
1. 안와하벽 및 내벽 골절
2. 비골 골절
3. 안면부 열상
4. 네 개 또는 그 이상의 늑골을 포함하는 다발골절
5. 어깨 및 위팔 부위의 다발성 근육 및 힘줄의 손상
6. 흉강 내로의 폐 손상
7. 흉강 내로의 외상성 혈기흉
8. 다발성 외상
1번부터 3번까지가 얼굴 부위 부상이고 지난 3개의 글을 통해 주저리 주저리 내용을 늘어놓았던 부분이다. 이제 남은 4번부터 8번까지를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4. 네 개 또는 그 이상의 늑골을 포함하는 다발골절
6. 흉강 내로의 폐 손상
7. 흉강 내로의 외상성 혈기흉
4번, 6번, 7번은 모두 흉부외과에서 담당했던 내용이라 묶어서 이야기하겠다. 이번 사고로 나는 처음으로 갈비뼈 골절을 당했다. 엑스레이 상으로 4개가 부러진 것을 확인했다고 들었다. 그 중 하나가 폐를 찔러서 폐가 찢어졌고, 그로 인해 폐에 공기가 들어차 기흉이라는 증상이 생겼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들은 4번, 6번, 7번에 대한 설명이었다.
흉부외과에서는 우선 오른쪽 옆구리에 엄지손가락 반정도 크기의 구멍을 내서 폐에 관을 삽입해 폐에 들어찬 공기와 피를 빼냈다. 이 관을 나는 약 2주 가량 계속 달고 지내야 했다. 처음에는 어차피 늑골 골절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계속 누워서 지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 관을 달고 지내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지만, 나중에 수술을 통해 부러진 갈비뼈를 고정시킨 후, 그러니까 걸어다닐 수 있게 된 후엔 늘 이 관과 관으로 연결된 피와 체액을 담는 통(이걸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뭐라고 부르던데 기억나지 않는다.)을 매달고 살아야 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제일 힘든 것은 화장실 갈 때였다. 그냥 매달아놓기만 한다고 폐에서 피와 공기가 저절로 빠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석션이라고 부르는 빨아들이는 기계를 작동해놓고 있었는데, 이 기계가 제법 무거웠다. 다행히 손잡이와 바퀴가 달린 봉에 이 기계를 매달아놓고, 그 기계에 연결된 통을 고정시키고, 통에서 내 옆구리로 연결된 관이 꼬이지 않고 잘 늘어져 있도록 조심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이 기계는 제법 무거웠고, 바퀴가 달려있긴 했지만, 이걸 밀고 움직이는 것은 제법 근육을 써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전신 부상으로 제법 오랫동안 근력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당연히 아프고 힘이 들었다. 남들은 링거액을 매단 가벼운 바퀴달린 봉 하나를 끌면서 화장실을 다녀오던데, 나는 그 무거운 기계를 매단 봉에 링거액과 몸에 매달린 관 등을 조심하면서 한발 한발 힘주어 밀어서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화장실 이야기를 한 김에 소변줄(폴리 카테터) 이야기도 잠시 해야겠다. 최초 이송된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소변줄을 차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엑스레이와 컴퓨터단층촬영 등을 한 후 의식이 없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고려해 채웠을 것이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생식기에서 지속적으로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생식기에도 부상을 입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알고보니 소변줄을 채워놓아서 방광에 소변이 고이면 저절로 배출하도록 시술을 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나는 꽤 충격을 받았고,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이미 몇 년전에 이혼해서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애들 엄마가 있었다. 그리고 간호사가 애들엄마에게 내 침대 옆에 붙어 있는 소변백을 비워야 한다고 말한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내 곁을 지켜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것만으로도 나는 미안해서 어쩔줄 모를 지경이었는데, 정기적으로 소변백을 비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옮겨간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아예 한 명도 머물 수 없었으므로, 애들 엄마는 내 곁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단 하루 그가 내 곁에 머물며 지켜준 것만으로도 너무 미안한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 어쩔 줄을 몰랐다.
옮겨간 병원에선 처음에 중환자실에 며칠을 머물렀고, 이후 일반 병실로 옮겨졌는데, 나중에 소변줄을 풀기 전까지 소변백을 비우는 일은 간호조무사들이 맡아서 했던 것 같다. 소변줄을 며칠이나 차고 있었는지는 생각하기 싫지만, 수술 후 걸어서 화장실을 갈 수 있을 정도가 된 후에야 소변줄을 풀어줬다. 그때의 감각을 아마 평생 잊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게 오래 소변줄을 차다가 풀어준 후에는 스스로 소변을 잘 보지 못하기도 하나보더라. 소변줄을 제거한 날부터 이삼일 가량 외상외과 인턴들이 자주 와서 내가 소변을 제대로 잘 보는 지 계속 확인했다. 첫날 밤에는 혹시 내가 침대에서 실수라도 할 것이 걱정된 것인지 당직을 서는 여성 인턴이 찾아와 내 방광 위치에 잔뇨를 감지하는 기구를 대고 검사하면서 소변이 남아있다고 확인시켜줬고, 나는 잠을 자려다가 억지로 일어나 다시 화장실로 향하기도 했다.
이 글이 점점 지저분한 이야기가 되어 가는 것 같아서 조금 걱정이지만, 소변 얘길 했으니, 대변 이야기를 아주 짧게 잠시만 하고 지나가겠다. 처음 사고를 당하고 나흘 동안 나는 물 외에는 아무것도 입으로 넘기지 않았다. 아니 병원에서 먹을 것을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아마도 사흘째 되는 날, 이제 슬슬 미음이라도 먹자고 인턴이 와서 얘길했었는데, 나는 그때 대변은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소변은 계속 저절로 빠져나가는데, 대변은 그럴 수 없을테니까. 어떻게든 화장실로 가서 혼자 해결해야 할텐데, 상체를 일으켜 앉지도 못하는데, 걸어서 화장실을 갈 수 없으니 걱정이 될 수 밖에. 그런데 여성 인턴의 대답은 충격이었다. 그래서 기저귀를 채워놓는 거라고 했다. 그랬다. 나는 줄곧 알몸에 기저귀만 채워진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하루에 서너번 정도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와서 내 몸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려 눕혔다가 바로 눕히기를 반복했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조치라고 했다. 암튼 나는 절대 기저귀에 대변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미음을 거부할까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음을 먹어야 하루라도 빨리 낫는다는 의사와 인턴의 말에 나흘째부터 먹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히도 수술을 받고 걸을 수 있게 되는 날까지 기저귀에 대변을 보는 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수술을 받은 날 밤에 내 발로 화장실에 가서 변기에서 해결했으니, 어떻게 생각해보면 아슬아슬하긴 했다.
그래서 중환자실에 처음 입원할 때 애들엄마가 사서 넣어준 기저귀들은 하나도 쓰지 않았고, 퇴원할 때 전부 간호조무사에게 주고 나왔다. 간호조무사는 내가 화장실을 갈 수 있게 된 다음날부터 기저귀를 차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줬다. 기저귀가 없으니 나는 알몸에 바로 환자복을 입고 지내게 되었다. 사고 당시 입고 있던 옷은 속옷을 포함해 모두 찢어졌고, 애들엄마에게 전해졌다고 들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애들엄마가 넣어준 기저귀와 물티슈 외에 내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중에 휴대폰과 책 한 두권과 수건과 면도기를 비롯한 세면도구들 그리고 퇴원할 때 입을 속옷을 포함한 옷들을 갖다달라고 요청해서(간호사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해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입원 기간 내내 속옷 없이 지내야 했는데, 나는 모든 환자들이 다 그런 건지, 나 같은 교통사고 환자들만 그런 거지 궁금했다. 하긴 어차피 수시로 간호사들과 인턴들이 와서 온 몸의 상처들을 돌봐주어야 했기 때문에 속옷을 입고 있었다면 거추장스러웠을 것 같다. 나는 엉덩이와 허리, 허벅지 등에도 큰 상처들이 여럿 있었다.
다시 부상 이야기로 돌아와서 처음 엑스레이를 통해 부러졌다고 확인한 4대의 늑골 중에 폐를 찔렀던 하나는 수술을 통해 위치를 바로 잡아서 고정시켜야 한다고 했다. 전신마취를 받고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그 고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 받았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다. 그래도 그 수술 덕분에 드디어 혼자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고, 걸을 수도 있었다. 그 전까지 며칠동안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를 드디어 벗어났다.
사실 코로나19로 인해 병원에 보호자가 머물수 없었던 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했는데, 혼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초기에는 좀 서럽기도 했다. 목이 말라도 누군가 물을 먹여주지 않으면 마실 수 없었고, 안와하벽 골절 때문에 초기에는 눈에 눈꼽이 아주 심하게 끼어 잠에서 깨어도 눈을 뜨지 못했는데, 누군가 눈꼽을 떼어주지 않으면 앞을 볼 수도 없었다. 수술 후 몸을 움직이게 되고 나중에 팔을 다 쓸수 있게 된 후로는 보호자가 없는 것이 확실히 장점이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들엄마나 부산에서 올라오신 부모님 중 한명씩 번갈아가며 내 곁을 지켜야 했을텐데, 나는 너무 죄스럽고 미안해서 그걸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고, 또 완전히 망가져서 흉측하게 변해버린, 평생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꿈에 나타날까봐 겁나서 도저히 거울을 볼 수 없게 망가진 내 얼굴을 계속 봐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나조차도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보는 건 더 싫었다.
입원 중반까지도 의사들은 처음에 발견한 4대의 늑골 골절만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 전신 뼈 검사를 통해 또 다른 늑골 손상을 발견했다. 그 전에 나는 자려고 눕기만 하면 등쪽 갈비뼈에서 통증을 느껴 밤마다 쉽게 잠들지 못했다. 처음 며칠은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받고 잠들었는데, 매번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통증의 정도가 조금씩 나아지긴 했지만, 의사들과 인턴들은 통증의 원인을 알지 못했었다. 그 뼈 검사를 통해 갈비뼈 후면도 금이 가있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4대가 아닌 그 이상의 골절이었던 거였다.
암튼 전신마취 수술과 폐에 튜브를 삽관하는 시술과 제거하는 시술을 통해 4번, 6번, 7번 부상은 많이 나아졌다. 덕분에 내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에서 옆구리를 따라 마치 뱀처럼 기다란 흉터가 하나(수술 자국) 있고, 그 아래 십자가 모양의 흉터가 하나(폐에 튜브를 꽂았던 자국) 더 생겼다. 그리고 부러진 늑골을 고정해놓은 체인 모양의 띠(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는 특별히 이상이 없으면 죽을 때까지 그냥 하고 지내도 된다고 했다. 만약 내가 전쟁터에서 죽거나, 어딘가에서 살해당해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로 발견된다면 늑골을 고정해 놓은 저 띠가 나를 구별하는 단서가 될 수 있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5. 어깨 및 위팔 부위의 다발성 근육 및 힘줄의 손상
처음 응급실에서 눈을 떠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엄청난 통증과 함께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들엄마에게 갈비뼈가 부러져서 그렇다는 설명을 들었다. 다시 찬잔히 온 몸을 움직여보니 양 다리는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로 인해 통증은 느껴졌지만, 움직일 수 있었고, 왼손도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움직이긴 했다. 다만 오른팔은 손목부터는 움직이는데, 팔굽치를 접거나 위로 들어올리지 못했다.
정형외과 의사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와서 내 어깨와 팔을 움직여보고 내가 통증을 호소하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이래저래 해보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특별히 뭔가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뼈가 다친 것은 아니고 인대 손상이 의심되긴 하지만 크게 손상된 것 같지도 않은데,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자기공명영상촬영(MRI)을 했는데, 이게 또 엄청나게 힘든 일이더라. 때는 한 여름이었고, 나는 엠알아이 촬영실에 침대 째로 옮겨졌다가 폐에 꽂아놓은 튜브와 연결된 피와 체액을 모으는 통 때문에 한참을 대기했다. 외상외과 주치의와 인턴들이 와서 저 통을 안고 엠알아이 촬영을 위한 통 속으로 들어가도 괜찮은지를 논의하는 것 같았다. 저 안이 거대한 자석이라 금속으로 된 것은 들어가면 안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나는 그 통을 껴안은 채로 자석으로 된 통 속에 넣어졌다. 그리고 약 1시간 가량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소리가 나고 시야에 여러 단색의 선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는데, 나는 자꾸만 숨이 가빠져 버티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소리가 너무 커서 계속 머물다가는 글자 그대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숨을 헐떡거리며 몸을 움찔하면 마이크를 통해 어디서 들리는지도 모를 목소리가 움직이면 안 된다고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다.
사전에 시간을 알려주지 않아서 나는 얼마나 그 시끄럽고 어두운, 사람의 혼을 빼놓는 통 속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알았다고 해도 그 안에서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끼기는 불가능했으니 별로 소용은 없었겠다. 그 고문(내겐 정말 고문처럼 느껴졌다.) 은 멈출듯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이제 끝이겠지 하는 순간 다시 이어지길 반복했다.
결국 누군가 통 속에서 나를 꺼내주었을 때, 얼마나 걸렸는지 물으니 약 50분이었다고 답을 들었다. 나는 욕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렇게 힘들게 엠알아이 촬영을 했는데, 며칠 후 정형외과 의사가 전한 내용은 정말 허무한 것이었다. 일부 인대 손상을 확인했으나, 관절을 움직이지 못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고 처음부터 계속 했던 설명과 별 다를 것도 없는 내용이었다. 다만 의사는 인대 손상을 설명하면서 사고로 인한 손상 외에 퇴행성 관절염도 의심된다고 했는데, 약 2년 가량 이어져 이제는 고질병이 되어버린 내 관절통증, 손가락부터 발가락, 손목, 어깨, 무릎, 발목 등으로 문득 나타났다가 하루 이틀만에 사라지곤 하는 온 몸을 돌아다니는 통증이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아니라 퇴행성 관절염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의 단초를 제공했다. 나중에 나는 다른 병원에서 다시 류마티스성 검사를 받았다가 그 의사에게서도 류마티스성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고 퇴행성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또 들었다.
암튼 원인을 모르고 오른쪽 팔을 아예 사용하지 못하고 제법 오래 지냈는데, 퇴원을 앞두고 서서히 팔이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팔을 완전히 위로 뻗는 동작 외에 일상적인 움직은 모두 가능할만큼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사고 후 6개월이 훌쩍 지난 지금 가끔 어깨가 아프고 팔이 완전히 올라가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이 사고 후유증인지, 아까 언급했듯이 두 의사가 말한 퇴행성 관절염의 증상인지는 모르겠다.
8. 다발성 외상
휴, 이제 마지막이다. 사고 덕분에 머리부터 발까지 온 몸에 상처가 가득했다. 작은 상처들이 아니라 큰 상처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머리나 무릎, 손 등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참 많았는데, 이번에 단 한 번의 사고로 지금까지 얻은 상처들보다 훨씬 더 큰 상처들을 더 많이 얻었다. 약 15개 가량의 상처(얼굴의 열상은 제외)들이 생겼고, 6개월이 지난 지금도 몸 여기저기에 선명한 흉터들이 남아있다.
초기에는 뒷 머리쪽 상처가 가장 아팠는데, 상처의 크기와 깊이로 보면 왼쪽 허리에서 엉덩이를 걸친 상처와 오른쪽 대퇴부에 세로로 길게 난 상처 그리고 왼쪽 어깨 뒤쪽 등에 깊게 난 상처가 가장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이 전신에 난 상처들 때문에 병원에서 내가 입고 지낸 환자복은 일반적인 바지와 티셔츠 모양이 아니라 양 옆이 완전히 트인 형태를 매듭을 단추처럼 잠그고 열어서 입고 벗는 형태였다. 필요할 때마다 양 옆을 열어서 상처를 소독하고 다시 잠그는 방식이었다. 다른 환자들은 수술할 때만 이렇게 생긴 수술복을 입던데, 나는 나중에 대부분의 상처가 낫기 전까지 이렇게 생긴 환자복을 입어야 했다.
속옷이 없었던 나는 주기적으로 상처를 소독할 때마다 바지 양 옆을 열면서 "제가 속옷을이 없어서요." 라고 (여성인) 인턴들이나 간호사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그들은 대체로 쿨하게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자신이 할 일에 집중했지만, 막상 맨 몸의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소독약이 상처를 헤집어대는 통증을 견뎌야 하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외에도 나중에 정리하려고 기록해둔 이야기들이 많은데, 시간 관계상 이정도로 [회복일기]를 마무리 하련다. 사고 이후 6개월하고도 10일 가량이 지났다. 몸의 손상들은 거의 대부분 회복이 되었다. 하지만 얼굴은 아직도 신경쪽의 통증과 이상한 감각 등이 있고, 흉터를 비롯해 외모적으로 회복이 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회복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친한 친구 중에 자주 내 못생긴 외모를 일깨워주는 (즉, 넌 못 생겼어 라고 말해주는) 녀석이 있어서 내 얼굴이 그닥 봐줄만한 외모가 아니었던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게는 그럭저럭 괜찮은 얼굴이었다. 비록 못생긴 얼굴이었어도 내겐 소중한 얼굴이었다. 최근 만난 몇몇 선후배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얼굴이 괜찮다는 말을 계속 해준다. 그들 입장에서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 정도면 괜찮네 이런 건데, 거울을 보는 내 입장에서는 전혀 괜찮지가 않다.
언제가 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얼굴 쪽은 추가 수술을 남겨두고 있다. 그 수술을 통해 보기 흉한 흉터를 해결할 수 있을지, 낮아진 코를 원래 내 코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 신경 쪽의 통증과 이상한 감각들은 나아질지 등을 아직은 알 수 없다.
길기도 했고 또 한 편으론 짧았던 6개월이 훨씬 지났음에도, 이제 2월 1일부터 일터에 복귀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여전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몸은 오히려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고 들었는데, 얼굴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이 글을 두드리기 시작한 지 거의 4시간이 되었다. 남은 이야기는 또 다음에 두드릴 기회가 오겠지. 오늘은 이만 하고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