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게 있어야 가는 게 있는 법
친한 후배가 저녁 9시쯤 회의를 마칠 것 같다고, 마치면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해서 야근을 하며 기다렸다. 9시가 넘어서 문자가 왔다. 곧 마칠 것 같은데, 안 마치고 자꾸 시간을 끌고 있다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어차피 나도 일하고 있으니 걱정말고 다 마치면 연락하라고 답했다. 조금 배가 고프긴 했지만, 참을만 했다. 9시 40분을 조금 넘겨서 전화가 왔다. 지금 마쳐서 이동 중인데,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 저녁을 먹을 곳이 없으니 어쩌면 좋을지 묻는다. 그렇구나. 코로나19 방역수칙 때문에 10시까지 밖에 영업을 못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우리는 바로 근처 치킨 집에서 반반 한 마리를 주문하고, 인근 편의점에서 음료와 술을 샀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내가 다치기 전에는 자주 만나서 사소한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고, 가끔 심각한 이야기들도 주고 받았던 좋은 후배다. 올해는 특히 서로가 각자의 협동조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달라고 청해서, 일종의 거래처럼 나는 그의 조합에서 역할을 하나 맡아주고, 그는 나의 조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주었다. 실은 이런 일은 아주 익숙하다. 시민단체 활동가 시절, 자주 만나는 이웃 단체 활동가들을 우리 단체 회원으로 가입시키려면 나도 상대방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해야 했다. 그렇게 활동비가 최저 생계비에도 한참 못미칠 정도의 활동가 급여에서 꽤 큰 부분이 여러 시민단체의 회비로 나갔다. 그 뿐인가 정당에서도 그랬다. 여타 진보정당과 같이 사업을 추진하려고 하면, 이웃 정당에서 원하는 것을 하나 들어줘야 우리도 뭔가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약 16년 정도 된 그 후배와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깊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그 후배를 챙겨준다는 일종의 착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지금은 그 후배도 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계가 지속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그닥 나쁘지 않았음을 생각하며 다행이라고 여긴다.
학부모 총회
큰 아이가 글을 쓰고 싶다고 예술고등학교 문창과를 가고 싶다고 얘기한 것은 조금 신선한 충격이었다. 요즘은 이러저러한 길들이 일찍부터 열려 있구나 하는 걸 새삼 깨달으면서, 그런 시스템에 들어가기 위한 돈과 노력이 또 얼마나 될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사실 내가 대학을 갈 무렵에는 문예창작과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몰랐고, 나중에 군대에 다녀오고 나서 대학에 문창과라는 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국문과 복수전공을 하면서 시와 소설 관련 과목을 열심히 들었지만, 내 개인의 창작에 그닥 도움이 된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물론 나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한다. 나는 국문과 과목들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늘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유명한 시인과 소설가가 우리 과 교수님으로 계셨지만, 그 분들의 수업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암튼 큰 아이는 이웃 도시의 예고 문창과에 합격했고 올해 3월 초에 입학했다. 잘은 모르지만 나름 유명한 학교라고 했다. 최근 학교에서 학부모 총회에 대한 알림이 왔다. 애들 엄마에게 물어보니 내가 가는 것이 좋겠다고 답이 왔다. 아이 학교가 궁금하기도 했고,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내가 가기로 했다. 이웃 도시라고 쓴 것처럼 서울이 아닌 서울에 바로 붙은 외곽 도시인데, 서울 외곽에 위치한 우리 집으로부터도 꽤 거리가 멀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만 1시간 20분 이상이 걸리고 걸어가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포함하면 거의 1시간 40여분이 걸린다. 처음에는 아이가 그렇게 먼 거리의 학교를 다녀야 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도 고등학교 때는 버스로 1시간 이상이 걸리는 학교로 다녔다.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았으나 바로 가는 버스가 단 하나의 노선 밖에 없었고, 그 노선은 남고와 여고를 포함해서 8개의 고등학교를 지나갔고,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로 운행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실제로 걸리는 이동시간을 따지면 1시간 반정도 걸리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아이가 자신의 꿈을 위해 전국에 몇 개 되지 않는 예고 문창과를 가기 위해 등학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이가 좀 힘들긴 하겠지만, 그것도 아이 몫이라 생각했다.
일부러 그날 일을 쉬고 저녁에 있을 학부모 총회에 느긋하게 갈 생각이었는데, 일정에 쫓기다보니 그날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래도 미리 시간을 체크해서 여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언제나 예상은 빗나가는 것 같다. 이동 경로 대다수가 대중교통으로도 닿지 않는 공간들이었고, 이래저래 움직이다보니 매번 시간에 쫓기며 간신히 움직였고, 마지막 학교를 향하는 길에서도 어이없는 실수로 한 정거장 먼저 내리는 바람에 겨우 시작 시간 5분 전에야 행사장에 도착했다. 학부모 총회 자체는 단순했다. 대부분이 학교 측의 전달사항들이었고, 그것도 대학입시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다. 원래는 학교 차원의 총회와 각 과별 총회와 각 반별 총회가 각각 진행되었어야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학교 총회는 못하고, 각 과별로 30명 정도의 학부모가 모이도록 분산해서 총회를 준비했다고 말한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훨씬 더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될 뻔 했다. 이럴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감사해야 하나?
문창과 전체 학부모가 모이는 총회를 마치고 각 반별로 다시 모였고, 나는 아이의 반으로 이동했다. 아이에게 연락해서 아이 자리가 어딘지 물었다. 창가쪽 맨 뒷자리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놓고 번호를 정하고 번호가 빠른 순서부터 창가쪽 자리부터 세로로 자리를 배치한 거라고 했다. 예전에 내 고등학교 시절에는 키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고 번호가 빠른 순서부터 가로로 자리를 배치해서, 키가 작은 아이들이 앞쪽부터 채우는 방식이었다. 나는 중2까지는 키가 작아서 앞에서 둘째줄이나 셋째줄에 앉곤 했지만, 그 이후로는 중간 정도인 너댓째 줄에 앉게 되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이의 책상을 확인하자마자 그 자리가 예전에는 소위 반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애들이 앉는 자리라는 것이 떠올랐다. 창가쪽 맨 뒷 자리. 이건 영화나 소설에서 일종의 클리셰처럼 쓰이는 장치일 것이다.
수첩을 한 장 찢어서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글자를 적어서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아이가 등교해서 교과서를 꺼내다가 발견하고 놀라겠지.
학부모 총회에 참석한 문창과 1학년 학부모들은 대략 스무명 가까이 되는 것 같았다. 부부가 모두 참석한 경우도 한 두 쌍 정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의외로 아빠들이 몇 명 있어서 놀랐다.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경우 부모 참관 수업이나 학부모 총회라고 가보면 아빠들은 거의 없어서 나 혼자이거나 겨우 한 두명 정도 더 보았는데, 여기는 나 포함 너댓명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앞서 적었듯이 총회에 오기 전에 일정이 꼬여서 간단히라도 배를 채울 시간이 없어서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배가 고팠다. 사람은 누구라도 배가 고프면 기분이 나빠지는 법. 이제 겨우 1학년 학부모일 뿐인데, 학부모들이 계속 대학 입시에 대한 질문만 해대는 걸 보고 짜증도 나고,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나는 오히려 대학 입시는 하나도 안 궁금하고, 아이들이 평소 어떻게 지내는 지, 혹시 뭔가 불편한 것은 없을지 이런 질문을 할텐데. 어쩜 단 한 명도 예외없이 모두 입시에 대한 질문만 해댔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그런 자리에서 입시에 대한 질문만 던지는 부모라면 아이를 아이로서 바로 보지 못하고 그저 대학에 목을 매는 얼빠진 부모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근데 질문을 한 부모는 모두 예외없이 입시 질문이었느니, 마치 나를 제외한 모든 부모가 얼빠진 부모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착각에 빠졌다. 물론 질문을 하지 않은 부모가 더 많았으므로 그건 확실히 착각이며, 입시 질문을 던졌다고 꼭 그렇다는 법은 없으니 더더욱 착각이다.
아이에게 아빠란
아이가 공모전(옛날엔 백일장이라고 불렀는데, 요샌 이렇게 부른다고)에 낼 소설 주제를 고르다가 아빠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주제를 환경이나 에너지 쪽으로 정하려고 하는데, 이 일을 오래 하고 있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고 했다. 자신이 아는 아빠는 그냥 아빠일 뿐이고, 아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 피상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어떤 업무를 하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아마 3년쯤 되었을텐데, 작은 아이가 우리 가족을 캐릭터로 만들면서 엄마는 소띠라 소를 모티브로 해서 '움마'라고 했고, 언니는 토끼를 모델로 해서 '단토끼'라고 했으며, 자신은 다람쥐가 좋다고 '람쥐'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각 동물 모양을 만화 캐릭터로 만들었었다. 그때 아빠는 북극곰을 모델로 해서 '끄곰이'라고 이름을 짓길래, "왜 아빠는 북극곰이야?" 라고 물었더니, "아빠는 북극곰을 살리는 일을 하잖아."라고 답하더라. 그때 속에서 뭔지 모를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요 꼬마 녀석이 이런 말을 다 할 줄 아는구나. 그때 아이가 그린 캐릭터 그림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두었다.
그런데 최근에 인스타그램에 가입해서 내 계정의 모든 게시물을 다 찾아보고 좋아요를 누른 아이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아빠. 내가 그때 북극곰 캐릭터 만들었을 때, 진짜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멋진 말을 해서 아빠를 감격하게 만든 아이는 몇 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한 말을 기억도 하지 못했다. 어째 허무한 기분이다.
활동가의 삶을 살면서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것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남들만큼 풍족한 삶을 살지 못한 점도 그 중 하나다. 다만 나는 어려서부터 워낙 가난하게 자라서 지금 우리 아이들은 충분히 풍족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뒤처질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그 다음으로 미안한 점은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일하는 곳에 많이 데리고 다녔다는 것이다. 큰 아이의 경우 특히 더 그랬다. 작은 아이는 내가 시민단체 활동을 그만두고, 출판사에 다니면서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 받으며 일할 시절에 태어났지만, 큰 아이는 한창 단체 활동가로서 일에 푹 빠져 지내던 시절에 태어났다. 활동가의 삶을 살면서 육아와 가사노동을 함께 하기란 참 쉽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날에는 모든 일정에 아이를 데리고 움직여야 했다. 저녁에 회의나 토론회나 강좌가 생기기도 하고, 촛불집회가 잡히기도 했다. 주말에도 이런저런 일정들이 많았다. 특히 집회가 잡혀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는 집회에 참가하는 입장이 아닌 집회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입장이어서 집회에 빠질 수도 없었다. 아직 어린 아기를 아기띠에 안고, 등에는 기저귀와 여벌옷과 분유통이 든 가방을 메고 집회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맡아 처리하곤 했다.
거리 행진을 하다가 아기가 울면 근처 큰 건물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기저귀를 갈아주고 길가에 앉아 분유를 먹이기도 했다. 행진 대오가 멀어지고 나면 아기를 들춰 업고 뛰어서 따라가곤 했다. 어릴 때 내 기억 속에 가장 먼저 외웠던 노래가 동요나 대중가요가 아닌 민중가요였던 것처럼, 큰 아이는 아기 때부터 나를 따라 온갖 집회 현장을 다녀서 이런 저런 구호와 운동가들을 따라하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주 어릴 때 일이라 지금은 기억을 못하는 듯하다.
작은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녹색당 활동과 동네의 크고 작은 일들에 주로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이젠 아이들이 좀 자라기도 했고, 아이가 둘이라 서로 놀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큰 아이는 좀 지겨워하고 싫어하기도 했지만, 작은 아이는 반대로 놀러가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나는 한 편으로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이런 엄마와 아빠 덕분에 남들과 다른 독특한 경험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 내 경험이 내게 아주 큰 영향을 미친 것처럼 아이의 인생에도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다만 늘 바쁜 삶이라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것은 미안한 일이다. 또 아빠를 따라 늦게까지 밖에 머물러 피곤한 아이들을 보면 정말로 미안했다. 언젠가 저녁 회의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가 한 9시쯤 회의를 다 마치기도 전에 회의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거의 10시가 다 되어 내려야 하는데, 두 녀석이 서로 기댄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한참을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다. 얼마나 피곤했을까? 나 역시 엄청 피곤하고 힘들었다. 나는 대체 뭘 위해 나와 아이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걸까? 이런 생각들이 잠시 들었지만, 어쨌거나 애들을 데리고 내리지 못하면 훨씬 더 고생이고, 훨씬 더 피곤해진다. 큰 아이의 가방을 앞 쪽으로 메고, 작은 아이의 가방은 한쪽 팔만 걸쳐서 내 가방 위에 얹히게 만든 다음에, 한 팔에 하나씩 아이들을 안고 일어섰다. 좌석에 뒤로 기댄 아이들을 내 몸쪽으로 기대게 만들고, 양 팔을 아이들 엉덩이 밑으로 집어넣어, 균형을 잘 잡으며 일어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평소 스쿼트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해서 다행이었다.
일단 열차에서 내리는데 성공했고, 계단을 올라갔는데, 두 손에 아이를 안은 채로 지갑을 꺼내 교통카드를 찍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옆에 계신 누군가에게 청바지 뒷 주머니 지갑을 꺼내 찍어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정신이 없어서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여성 분이 친절하게 지갑을 꺼내 찍어주고, 다시 내 잠바 주머니에 넣어주셨다. 지하철 역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정도 거리였다. 집 근처에 다와서는 꽤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도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아이 둘을 안고 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냥 갈 수 밖에. 그 날은 지금으로부터 약 7년쯤 전이었던 것 같은데, 작은 아이는 아직 어려서 가벼웠지만, 큰 아이는 많이 자라서 결코 가볍지 않았다. 게다가 잠든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걷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지하철 개찰구를 나와 출구 계단을 오르고 나니 찬 바람이 확 불었다. 한참을 더 걷다보니 팔이 후덜거리기 시작했다. 팔에 힘이 빠져서 안긴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찬 바람 때문에 잠이 깬 것인지 몰라도 큰 아이가 잠이 깨서 칭얼거렸다. 쪼그려 앉으면서 큰 아이를 잠시 땅에 내린 상태로 꼭 안아주었다. 아이는 잠시 칭얼대다가 곧 상황을 파악하고 씩씩하게 걸었다. 작은 아이는 깨지도 않고 계속 안겨서 자고 있었다. 한 손에 작은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갔다. 설잠에서 깬 큰 아이가 많이 칭얼대지 않고 대견하게 걸어주어서 너무나도 고마웠다.
두 아이는 각자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나에게 어린이를 위한 에너지 강의를 들었었다. 나는 지역의 어린이 도서관이나 공동육아 방과후 교실 등에서 어린이 에너지 교실과 같은 프로그램들을 많이 맡아서 진행했고, 이왕이면 내가 맡은 프로그램에 아이들을 데리고 참여하곤 했으니, 아이들은 내가 하는 일이 대략 이런 분야 일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암튼 그래서 큰 아이의 공모전에 도움 될만한 정보들을 찾아줬다. 일단 아이가 아직 고등학생이니 청소년과 기후위기 활동을 연결해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정리해줬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청소년 에너지 교육을 가서 사용하는 프로그램의 한 두가지 아이디어와 몇 해 전에 애들 엄마가 번역한 어린이, 청소년 기후변화 활동에 대한 내용에 내가 국내 사례를 정리해서 짧은 원고를 보태어 출간한 책을 책장에서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청소년 기후위기 활동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너무나도 유명한 그레타 툰베리에 대한 이야기들과 그레타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청소년 기후위기 대응 활동들. 그 중에서도 정부를 상대로 한 청소년 기후 소송 사례들을 알려줬다. 아이가 접근하기 쉽게 정리된 몇 개의 사이트 정보와 유튜브 동영상 등을 추천해줬다. 아이는 무척 신기해하고 흥미로워했다. 특히 노벨 평화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던 그레타 툰베리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나처럼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가졌던 희망사항이었다. 한국이라는 환경 분야에 있어서 최악의 조건에서 환경운동을 해온 덕분에 소설로 써먹기 좋은 에피소드들이 꽤 있기도 하고. 잘만 구상하면 흥미로운 소설이 될 것 같지만, 잘 담아내고 싶은 욕심과 글 쓸 시간이 없다는 핑계 때문에 늘 머릿 속으로 구상만 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아이가 먼저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아이가 이 내용을 잘 숙성시켜 잘 담아내기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 공모전 마감일은 이미 바로 코 앞이었다. 아이에게 이번에는 참여해 보는 것에 의의를 두고,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공부하고 고민해서 풀어내어 보라고 했다. 절대 욕심부러지 말고,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것만큼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줬다.
아이는 아빠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나는 오히려 아이가 이런 일로 나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해줘서 고맙다. 아이가 글을 쓰고 싶어 해서, 내 관심사 역시 글쓰는 일이어서 다행히고, 아이가 관심을 가진 분야가 마침 내가 아주 잘 알려줄 수 있는 것이어서 고마운 일이었다.
늘 아이에게 미안하기만 한 아빠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아빠라서 다행이다. 하루하루 참 힘들고 괴로운 인생이지만, 뭐하러 살아야 하나 싶은 때가 종종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뭐 이 정도면 그래도 아주 나쁘지는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