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척
누구나 다 그런 때가 있겠지만, 가끔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자주 나는 미친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분류하면 몇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대개는 말도 안되는 일정이 될 수 밖에 없도록 상황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그 말도 안되는 일정을 다 소화해내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미친 것 같은 행동이다. 나는 스스로 그걸 '미친 척' 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꼭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에 이 미친 척이란 행위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주 중요한 서류를 넘겨야 하는 날, 아주 중요한 심사가 있는 날, 아주 중요한 강의가 있는 날, 아주 중요한 발제가 있는 날 등. 만약 이걸 습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마도 학창시절부터 '배수의 진'을 치고 시험 공부를 했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배수의 진 이란 방법이 좋아서 자주 사용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 일에 착수하기 전에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볼지, 어떻게 접근할지, 어떤 방향으로 끌어갈지, 누가 도움을 주거나 함께 할 수 있을지,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까지 나아갈지 등 고민하느라 긴 시간을 소비하고 마감 시간에 간신히 맞출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실제로 일을 시작하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긴 시간 충분히 고민하기 때문에 막상 일을 착수하면 그 처리 속도는 빠르지만, 그만큼 빠르지 않으면 도저히 시간 안에 끝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반드시 빨라야만 한다.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주 그랬다. 그게 중요한 일이라면 더더욱.
왜 이런 이야길 두드리고 있냐면, 최근에도 또 몇 번이나 이 미친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근데 나이가 드니까 이젠 예전처럼 빠릿빠릿하게 일을 처리해내지 못해서 위기 의식을 느낀다. 게다가 내 몸도 예전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무리하면 몸이 잘 버티지를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또 이 미친 짓을 반복하고 있다. 나란 인간 정말!
며칠 전에 4시간짜리 강의를 했다. 약 한 달 전에 강의 요청을 받았을 때, 4시간이라고 해서 조금 자신이 없었다. 난 목소리가 작은 편인데, 강의를 할 때는 억지로 목소리를 키워서 말을 한다. 말이 빠르고 말을 아주 많이 하는 편이라서 그렇게 두 시간 이상 강의를 하면 목에 무리가 간다. 젊을 때 학원 강사 시절에는 하루에 7시간 정도 강의를 했었다. 당연히 연속은 아니고 중간 중간에 강의가 비는 시간이 있었다. 연속은 길어도 3시간이나 4시간이었던 것 같다. 학원을 그만 둔 이후로는 3시간짜리 강의가 가장 길었다. 그 여러 번의 3시간짜리들은 모두 2시간 하고 30분 가량 지날 때쯤 목이 급격하게 아파져 힘들었던 기억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청탁을 받았을 때, 그 부분을 전달했다. 그쪽에서는 질의응답을 좀 길게 하셔도 되고, 조금은 일찍 마쳐도 상관없는데, 일단 4시간 예정으로 맞춰달라고 했다. 강의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3시간에 끝내기는 무리라고 나도 판단했고, 결국 수락했다.
해당 강의는 약 2년 전에 한 번 했던 내용이라 강의 자료는 만들어 둔 것이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났으니 보완이 필요했고, 자료를 고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서너 시간 정도로 예상했다. 대체로 머리 속에 있는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시각자료로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강의 전날에는 수정한 자료를 넘기려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중간에 끼어들거나 뒤로 밀리면서 예전에 만들어뒀던 자료를 한 번 열어보지도 못한 상태로 강의 전날의 일과 시간이 지나버렸다. 입맛이 별로 없어서 저녁도 거르고 사무실에서 자료를 만들고 퇴근해야지 생각했는데, 갑자기 급격하게 수술했던 부위에 통증이 생겨 급하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진통제를 먹었다. 아주 짧게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깼다.
강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어! 어! 어! 이상하다. 자료가 왜 없지? 분명히 2년 전에 만들었는데. 여기 저장되어 있어야 하는데. 서너시간 동안 노트북 하드 디스크와 이메일 계정 두 개와 포털에서 제공하는 드라이브 두 곳을 뒤졌는데, 만들어뒀던 강의 자료를 찾지 못했다. 있을거야. 분명히 있을거야. 그때 분명 저장해뒀어. 라고 생각하며 기계적으로 찾던 나는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자료를 못 찾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4시간짜리 강의 자료를 다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그 자료를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아마 48시간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날 오전에는 외부에서 회의가 있었고, 회의가 끝나면 바로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해서 점심 먹을 시간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강의 자료를 보완할 시간은 길어도 서너시간에 불과했다.
실은 한달쯤 전에 늘 갖고 다니던 USB 메모리 스틱을 잃어 버렸다. 그 안에 강의자료가 대부분 담담겨 있었다. 아마 분명히 2년 전에 만들었던 자료도 그 안에는 들어있을 것이다. 나는 더이상 노트북과 웹을 뒤지는 걸 그만두고, 며칠 전부터 찾고 찾다가 포기해버린 그 메모리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절박했다. 만약 못 찾으면 강의를 하는 건 불가능했고, 나는 크게 망신을 당할 것이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강의 청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차근 차근 그 메모리 스틱이 있을만한 공간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30여분 후에 드디어 찾아냈다. 며칠 전부터 적어도 10번 이상 샅샅이 뒤졌던 가방의 맨 안쪽 깊숙한 곳의 작은 포켓에서 나왔다. 내가 여기에 집어넣은 적은 없는데, 왜 그 안에 들어가 있었을까?
이제부턴 정말 손이 바빠져야 할 시간이다. 머리는 이미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존 자료를 두 번 훑어보고, 불필요하거나 상황이 바뀐 내용들을 빼고, 보완해야 할 내용들을 고치고, 추가로 넣어야 할 내용들을 만들었다. 내용을 수정하면서 머리로는 끊임없이 강의 리허설을 돌렸다. 이 부분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여기서는 이런 농담을 하고, 여기는 좀 뜸을 들이면서 반응을 살피는 것이 좋겠어. 약 1시간 반 가량 내용을 수정한 후에는 맨 앞에서부터 강의할 내용들을 아주 빠르게 머리 속으로 돌리며 오류가 없는지 점검했다. 한 두 군데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발견해 다시 고쳤다. 한 번 더 점검을 마치고는 서둘러 준비하고 회의 장소로 출발했다.
전날 밤 진통제를 먹고 한 세 시간 정도 자고 깨서 밤새 잠을 못 잔 상태라 엄청 피곤했다. 긴 하루가 될 것이 뻔했다. 오전의 회의도, 오후의 강의도 모두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일이었다. 중간의 이동시간도 식사시간도 모두 아슬아슬하게 맞춰놓아서 조금만 실수하면 큰 일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회의도 무사히 마쳤고, 아슬아슬하게 기차를 탔고, 강의 장소 근처에서 아주 급하지 않게, 즉 조금은 여유있게 밥도 먹은 후에 강의 장소에 도착했다. 강의도 무사히 잘 마쳤다. 질의응답까지 실제로는 4시간 반을 강의했다. 마이크를 잘 활용했고, 중간에 목소리 크기를 적절히 조절했기 때문에, 마지막 시간에 조금 목이 아프긴 했지만 끝까지 강의를 마칠 수 있었다.
강의를 요청했던 분과 강의를 들었던 분들 대다수가 만족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강의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돌아보면서 내가 또 미친 짓을 했구나 생각했다.
잘난 척
가끔 재수없게 잘난 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나는 스스로 잘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특정한 분야에서 남들의 인정을 받는 경우가 생기다보니 나도 모르게 자만심이 생기기도 한다.
얼마 전에 아주 중요한 심사가 있었다. 예전에는 현장에서 발표 심사를 했었지만, 올해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온라인 발표로 진행한다고 연락을 받았다. 나는 강의나 발표를 할 때 현장에서 사람들의 호응에 반응하면서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는 편이다. 준비는 철저하게 하되, 실제 진행은 매우 즉흥적이다.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바로 바로 체크하지 못하면 뭔가 힘이 빠지고, 설명도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는 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온라인 강의가 무척 힘들었고, 도저히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발표를 온라인으로 해야 한다니! 왠지 자신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 빠른 것만 좀 조심하면 된다고 격려하고 조언했지만, 나는 어쩐지 자꾸만 실수를 연발할 것 같은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발표 날 아침. 소음의 영향이 적은 회의실을 대여해 노트북을 펼쳐두고 발표 리허설을 했다. 평소라면 그냥 머리 속으로만 했을텐데, 이번에는 발음을 신경쓰면서 또박또박 말하면서 시간을 쟀다. 늘 즉흥적으로 추가 설명을 붙이는 편이라 정해진 발표 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딱 시간을 맞추기 위해 아예 대본을 작성해 두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고, 화면에 작은 아이콘처럼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여럿 나타났다. 대체로는 모르는 분들이었지만, 몇몇 아는 얼굴도 보였다. 그 아는 얼둘들을 보고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폰으로 초시계를 작동시키고 화면 한쪽 구석에 작성해놓은 대본을 띄워두고 발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조금 호흡을 느리게 가져가면서 여유를 가졌다. 발음에 신경을 많이 썼다. 중반에는 내가 너무 대본에 적힌 대로 읽으니까, 듣는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대화하는 것처럼 말을 바꾸다가 갑자기 특정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잠시 위기에 빠졌지만, 곧 다른 대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넘어갔다. 마무리는 중요한 내용을 반복해서 짚어주고 강조하면서 정해진 시간을 아주 살짝 넘겨서 마쳤다. 심사위원들의 평이 전반적으로 괜찮았고, 질문도 많았다. 각각의 질문들에는 여유있게 잘 답했다.
시간이 지나서 심사 결과가 나왔다. 무척 좋은 성적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 나 개인이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하는 일터, 즉 법인이 상을 받는 것이지만, 그게 다 내가 한 일이니 내가 상을 받는 것처럼 기뻤다. 무엇보다 자신 없었던 온라인 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그 심사 결과로 상을 받는 다고 하니 그 기쁨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심사 결과를 듣고 나서 같이 일하는 후배 활동가랑 대화하면서 내가 평소에 발표 같은 걸로 긴장하거나 떨리지 않는데, 그때는 너무 긴장하고, 너무 떨렸었다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 국장님이 그렇게 자신없어 하시는 모습은 의외였다고, 그러면서 국장님이 발표하실 때는 전혀 걱정 안 해요. 라고 말하고 웃었다. 그냥 잘 한다는 말보다 내가 맡았을 때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에게 마치 농담처럼 잘난 척을 좀 했다. 당연히 그들은 또 잘난 척 한다고 무척 싫어하는 척을 했다. 이 못난 인간이 이 재미없는 삶을 살면서 가끔 이렇게라도 잘난 척을 좀 해줘야 그래도 살아갈 맛이 나지 않겠나 싶다.
괜찮은 척
생각해보면 살면서 제일 많이 하는 '척'은 괜찮은 척 인것 같다. 아픈데도 괜찮은 척, 슬프지만 괜찮은 척, 힘들지만 괜찮은 척, 자신없지만 괜찮은 척. 이건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렵겠다.
왜 그런가 생각해봤더니,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곰곰히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거나 드러내지 못하고 자꾸만 괜찮은 척을 해왔던 것 같다.
내가 자주 하는 척들. 미친 척, 잘난 척, 괜찮은 척 중에 가장 나쁜 것은 아마도 괜찮은 척이 아닐까 싶다. 미친 척은 내 몸과 정신 건강에는 크게 상하게 만들지만, 그만큼 집중하고 온 몸의 에너지를 쥐어 짜내기 때문에 대개는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른 피해나 손해를 만들지는 않는다. 잘난 척은 대부분 농담인 것처럼 위장하는 편이고, 대체로 남들이 인정해주는 분야에 한해서 하는 편이라 역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괜찮은 척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은데, 그 중에 잘못해서 오해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상처가 되거나 피해를 주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 대해 당시에는 괜찮은 척 했지만, 나중에 그것으로 인해 다른 상황으로 이어지고 그 괜찮은 척이 그 원인이 되었음이 밝혀지면, 그때 왜 그랬냐고 추궁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사회생활도 그렇고 친한 지인들과의 인간관계도 그렇고 언제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척을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내 경우에는 위 세 가지 경우가 가장 흔히 하는 행동인 것 같다. 사실 평소 내가 이렇구나 하고 깨닫는 것 조차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반응하거나 행동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제 이런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할 것인지 찬찬히 생각을 해봐야겠다.
오늘도 중요한 일정이 있는데 미친 척을 하느라 잠을 잘 못 잤다. 오후 중요한 일정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