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죽었다. 뉴스를 접하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일단은 화가 난다. 사형을 시키거나 평생 감방에 가둬두어야 할 살인마를 경호인력까지 붙여서 잘 살게 두다가 결국 자연사했다.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존엄하겠지만, 예외가 있다면 살인마나 학살자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죽으면 안 되는 인간인데, 이렇게 편하게 가게 두면 안 되는 인간인데. 화가 난다.

강풀 작가의 웹툰 [26년]과 영화가 떠오른다. 비록 암살은 범죄이지만, 저 학살자는 암살 당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었다. 웹툰 연재 당시에도 또 이를 영화로 만드는 과정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텐데. 완성이 되어서 다행이다 싶긴 한데, 그럼에도 결말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이해는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결말로 만들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이 아쉬움은 영화 [암살]의 결말을 보고나서 더 커졌다. 그렇게 속 시원한 결말을 내주면 참 좋았을텐데.

갑자기 몇 년 전에 읽었던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책도 생각났다. 집에 아직 있을텐데,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신기하게 노태우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이 죽었다. 마치 따라 죽은 것처럼. 노태우는 10월 26일에 죽었다. 공교롭게도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날이다. 이왕이면 전두환이 10월 26일에 죽었으면 더 멋진 우연이 만들어졌을텐데.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학창시절 우리 집에는 전두환이 대통령 재직시절 본인 사진이 실린 우표 전체를 수록한 우표책이 있었다. 당시 나는 우표를 모으는 걸 취미랍시고 떠들고 다녔는데, 친척 어른 중 누군가가 그 얘길 듣고 구해주신 걸로 기억한다. 근데 그 분은 내가 이후 전두환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리라곤 예상 못 하셨을 것이다. 나중에 나는 그 우표책을 갈가리 찢기도 하고, 큰 우표는 문에 붙여놓고 다트를 던져 눈을 맞추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살인마이자 학살자와 같은 하늘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가 추징금도 갚지 않고 황제처럼 살고 있을 때, 대다수의 선량한 국민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고 살아간다는 이 부조리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좀 잔인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오늘은 이 죽음을 축하해야겠다. 드디어 악마보다 추악하고 더러운 놈과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게 되었다. 오늘은 문어 대가리를 안주로 썰어 먹으며 술 한 잔 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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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1-25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식구는 조금이라도 슬퍼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습니다 어땠을지... 편하게 죽은 것 같군요 피해자는 그러지 못할 텐데...


희선

감은빛 2021-12-03 14:42   좋아요 0 | URL
식구라면 슬퍼했겠지요. 그 측근이라는 자들은 죽음 이후에도 망언을 계속 쏟아냈다고 하더군요.
 

무기력증


가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일에 집중이 안 되고, 머리가 전혀 돌아가지 않는 날이 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면 분명 또 문제가 생길 것이 뻔한데, 지금 빨리 일을 해야하는데, 도저히 머리가 안 돌아간다. 그냥 멍하니 시간만 보내는 날. 그런 날이면 밥 먹는 것도 귀찮고, 움직이는 것도 귀찮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진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누워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숨도 안 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뭐라고 이렇게 산소를 허비하고 살아야 하는 건지 싶다. 머리 속으로는 자꾸 처리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떠오르고, 어떤 일은 어떻게 저떻게 처리하고, 또 어떤 일은 누구와 논의하고, 또 다른 일은 누구에게 자료를 요청해서 먼저 검토해야 하고 등등 나도 모르게 일들을 처리하는 절차들이 바쁘게 돌아간다. 아까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는 전혀 움직이지 않던 머리가 누우니 다시 움직인다. 이건 뭐 청개구리도 아니고.


부상과 회복


한창 열심히 하던 운동을 한동안 쉬었다. 여름에 너무 더웠기 때문이고, 날이 조금 선선해진 이후로는 그냥 몸을 움직이기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전이었다면 근손실이 두려웠을텐데, 이미 오랫동안 운동을 쉬어 근육이 다 사라진 이후라서 더 두려울 것도 없었다. 이렇게 운동을 안 하면서도 마음이 편할 수 있다니. 이건 좀 좋은 건가 라고 생각을 해봤다. 운동은 안 했지만, 먹는 양이 줄어든 덕분에 운동 열심히 하던 시절보다 복근은 더 선명해졌다. 이것도 좋은 건지 어떤지 모르겠다. 다만 이젠 예전처럼 샤워할 때 내 몸을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게 되었다. 너무 마른 몸. 근육이 없는 내 몸은 낯설다. 다시 운동한다고 예전처럼 근육을 만들 수 있을까? 어쩌면 이젠 너무 늦어버린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샌드백을 산 후로 한동안 재밌게 두들기며 지냈는데, 그것도 다 한 때였다. 뭔가 계기가 없으면 내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운동기구들을 계속 방치하게 될 것 같다.


지난 주에는 운동을 좀 해볼까 하다가 부상을 당했다. 운동을 하다가 다친 것은 아니었다. 그날따라 아침부터 발목이 좀 아팠다. 가끔 이유도 없이 내 몸 여기저기 관절이 아픈 증상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어떤 날엔 무릎, 어떤 날엔 손목, 어떤 날엔 어깨였는데, 그날은 발목이었다. 근데 하필 그날 외부 일정이 두 개나 있었고, 걸어다녀야 하는 거리가 꽤 되는 상황이었다. 절뚝 절뚝 아픈 발목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프다고 빠질 수 있는 일정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하루종일 걸어다니며 일정을 모두 소화했다. 하필 그날 저녁에 애들을 만나는 날이라 또 밤 늦게까지 밖에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한쪽 발을 질질 끌면서 경사가 급한 골목길을 걸어 오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퉁퉁 부어버린 발목을 발견했다. 일어서는 것 조차 힘들었다. 화장실을 갈 때에도 엉금엉금 기어서 이동하고, 뭔가를 짚고 의지해야만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몇 해 전 친한 친구가 일본에서 사다 준 동전 모양 파스를 찾아서 발목 여기저기 붙였다. 3일을 꼼짝도 안 하고 방 안에만 머물렀다. 움직이지 않으니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아서 하루 한 번 간단히만 먹었다. 일어설 수 없으니 뭔가 만들어 먹지도 못하고 그냥 조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걸로 먹었다. 삼일이 지나자 붓기가 좀 빠졌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절뚝 절뚝 걸을 수 있었다. 처음 발목이 아팠던 날 수준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다시 무리하면 또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것 같아서 그대로 이틀을 더 방 안에만 머물렀다. 회복에 총 5일이 걸린 셈이다.


지금도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라서 여전히 살짝 절뚝거리며 걷는다. 오랜만에 회의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들 걱정의 말씀들을 전해왔다. "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냐?", "다리는 또 왜 그러냐?" 나는 참 사람들에게 걱정만 끼치는 존재인 것 같다.


가을 하늘


아픈 발목으로 무리하게 움직여서 발목 관절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그날, 하늘이 정말 그림처럼 멋졌다. 좁고 위험한 사다리를 통해서만 올라갈 수 있는 어느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하늘을 봤다. 안 그대로 발목이 아파서 안 올라갈까 생각도 했는데, 꼭 내 눈으로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올라갔다. 일을 마치고 하늘을 보는데, 멋진 하늘이 마치 보상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 하늘을 보려고 내가 이 발목으로도 여길 올라왔나보다.


아주 어린 시절 어느 날이 떠올랐다. 미술학원을 잠시 다녔을 때였으니까 아마 국민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문득 하늘을 봤는데, 너무 멋졌다. 꼭 그림으로 그려놓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스케치북을 펼쳐들고 그리기 시작했는데, 내 재주로는 도저히 저 멋진 하늘을 표현할 수 없어서 그게 너무 너무 안타까웠다. 


이번에도 하늘을 보며 그림을 그려보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 전 그날 내 그림 실력을 깨달았기 때문에 시도는 안 했다. 그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오래 전 그날에는 휴대폰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젠 화질이 좋은 폰으로 사진을 찍어놓고 언제든 볼 수 있다.


그날 저녁 아이들과 저녁을 먹는데, 큰 아이가 하늘이 너무 예뻤다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아이가 찍은 사진은 내가 찍은 것 보다 더 멋졌다. 이 멋진 가을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인간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날은 발목이 완전히 망가진 날이었고 절뚝거리며 여기저기 옮겨 다니느라 참 힘든 날이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힘들었던 기억과 통증보다 잠시 보았던 그 하늘이 먼저 떠오른다. 안전 난간도 없었던 그 옥상에서 하늘로 뛰어들고 싶은 기분을 간신히 참아야했던 그 기억이 말이다. 



책상 앞에 앉았으면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은 안 하고 이렇게 알라딘에 들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은 내일 해야겠다. 오늘은 그냥 돌아가서 쉬어야지. 뭔가 계기를 만들어야겠다. 무기력증을 극복하고 다시 일과 운동에 빠져들 수 있는 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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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9-16 2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40여일전에 다친 발목이 신경 쓰이는지라 감은빛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을 해봅니다. 푸욱 쉬시고 무기력을 날려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붕붕툐툐 2021-09-17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음~ 발목은 잘 낫고 있나요? 발목 다치면 진짜 불편하잖아요~ 그런데 아름다운 하늘 본 걸 더 기억하시다니! 저도 하늘이 너무 예쁜날엔 내가 지구인이어서 참 행복하다 생각해요! 오늘 도서관에 신청한 책‘사랑하고 있기 때문에‘가 왔다고 해서 빌려왔어요~ 비록 빌리긴 했지만 도서관에 신청했으니 잘 한 거죠?ㅎㅎ인생은 그래프처럼 오르락 내리락이 있잖아요~ 애쓰지 않아도 어느날 운동 뽐뿌가 올 거예요! 지금은 무기력한 현재를 즐겨도 괜찮아요~ 그럴 때도 있는 거죠~😉

희선 2021-09-21 0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목이 아프신데도 여기저기 다니셨군요 며칠 쉬셔서 나았다고 해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아픈 것보다 예쁜 하늘 보신 게 더 기억에 남으시는군요 하늘이 예뻐서 카메라에 담아도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이 담을 수 없어 아쉽습니다 본래 자연을 그대로 담을 수 없겠지요

감은빛 님 명절 연휴 이틀 남았지만, 남은 날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미친 척


누구나 다 그런 때가 있겠지만, 가끔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자주 나는 미친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분류하면 몇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대개는 말도 안되는 일정이 될 수 밖에 없도록 상황이 흘러가게 내버려 두고 그 말도 안되는 일정을 다 소화해내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미친 것 같은 행동이다. 나는 스스로 그걸 '미친 척' 이라고 부른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꼭 중요한 일정이 있는 날에 이 미친 척이란 행위가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주 중요한 서류를 넘겨야 하는 날, 아주 중요한 심사가 있는 날, 아주 중요한 강의가 있는 날, 아주 중요한 발제가 있는 날 등. 만약 이걸 습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아마도 학창시절부터 '배수의 진'을 치고 시험 공부를 했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배수의 진 이란 방법이 좋아서 자주 사용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떤 일을 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 일에 착수하기 전에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볼지, 어떻게 접근할지, 어떤 방향으로 끌어갈지, 누가 도움을 주거나 함께 할 수 있을지,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까지 나아갈지 등 고민하느라 긴 시간을 소비하고 마감 시간에 간신히 맞출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야 비로소 실제로 일을 시작하는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전에 긴 시간 충분히 고민하기 때문에 막상 일을 착수하면 그 처리 속도는 빠르지만, 그만큼 빠르지 않으면 도저히 시간 안에 끝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반드시 빨라야만 한다. 그렇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주 그랬다. 그게 중요한 일이라면 더더욱.


왜 이런 이야길 두드리고 있냐면, 최근에도 또 몇 번이나 이 미친 척을 했기 때문이다. 근데 나이가 드니까 이젠 예전처럼 빠릿빠릿하게 일을 처리해내지 못해서 위기 의식을 느낀다. 게다가 내 몸도 예전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무리하면 몸이 잘 버티지를 못한다. 그걸 알면서도 또 이 미친 짓을 반복하고 있다. 나란 인간 정말!


며칠 전에 4시간짜리 강의를 했다. 약 한 달 전에 강의 요청을 받았을 때, 4시간이라고 해서 조금 자신이 없었다. 난 목소리가 작은 편인데, 강의를 할 때는 억지로 목소리를 키워서 말을 한다. 말이 빠르고 말을 아주 많이 하는 편이라서 그렇게 두 시간 이상 강의를 하면 목에 무리가 간다. 젊을 때 학원 강사 시절에는 하루에 7시간 정도 강의를 했었다. 당연히 연속은 아니고 중간 중간에 강의가 비는 시간이 있었다. 연속은 길어도 3시간이나 4시간이었던 것 같다. 학원을 그만 둔 이후로는 3시간짜리 강의가 가장 길었다. 그 여러 번의 3시간짜리들은 모두 2시간 하고 30분 가량 지날 때쯤 목이 급격하게 아파져 힘들었던 기억들이 남아있다. 그래서 청탁을 받았을 때, 그 부분을 전달했다. 그쪽에서는 질의응답을 좀 길게 하셔도 되고, 조금은 일찍 마쳐도 상관없는데, 일단 4시간 예정으로 맞춰달라고 했다. 강의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3시간에 끝내기는 무리라고 나도 판단했고, 결국 수락했다.


해당 강의는 약 2년 전에 한 번 했던 내용이라 강의 자료는 만들어 둔 것이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났으니 보완이 필요했고, 자료를 고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서너 시간 정도로 예상했다. 대체로 머리 속에 있는 내용이지만,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시각자료로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강의 전날에는 수정한 자료를 넘기려고 생각했는데, 이런저런 일들이 중간에 끼어들거나 뒤로 밀리면서 예전에 만들어뒀던 자료를 한 번 열어보지도 못한 상태로 강의 전날의 일과 시간이 지나버렸다. 입맛이 별로 없어서 저녁도 거르고 사무실에서 자료를 만들고 퇴근해야지 생각했는데, 갑자기 급격하게 수술했던 부위에 통증이 생겨 급하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진통제를 먹었다. 아주 짧게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깼다. 


강의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어! 어! 어! 이상하다. 자료가 왜 없지? 분명히 2년 전에 만들었는데. 여기 저장되어 있어야 하는데. 서너시간 동안 노트북 하드 디스크와 이메일 계정 두 개와 포털에서 제공하는 드라이브 두 곳을 뒤졌는데, 만들어뒀던 강의 자료를 찾지 못했다. 있을거야. 분명히 있을거야. 그때 분명 저장해뒀어. 라고 생각하며 기계적으로 찾던 나는 해가 뜰 무렵이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자료를 못 찾는다면 남은 시간 동안 4시간짜리 강의 자료를 다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그 자료를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아마 48시간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날 오전에는 외부에서 회의가 있었고, 회의가 끝나면 바로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해서 점심 먹을 시간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강의 자료를 보완할 시간은 길어도 서너시간에 불과했다.


실은 한달쯤 전에 늘 갖고 다니던 USB 메모리 스틱을 잃어 버렸다. 그 안에 강의자료가 대부분 담담겨 있었다. 아마 분명히 2년 전에 만들었던 자료도 그 안에는 들어있을 것이다. 나는 더이상 노트북과 웹을 뒤지는 걸 그만두고, 며칠 전부터 찾고 찾다가 포기해버린 그 메모리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절박했다. 만약 못 찾으면 강의를 하는 건 불가능했고, 나는 크게 망신을 당할 것이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강의 청탁을 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차근 차근 그 메모리 스틱이 있을만한 공간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 30여분 후에 드디어 찾아냈다. 며칠 전부터 적어도 10번 이상 샅샅이 뒤졌던 가방의 맨 안쪽 깊숙한 곳의 작은 포켓에서 나왔다. 내가 여기에 집어넣은 적은 없는데, 왜 그 안에 들어가 있었을까?


이제부턴 정말 손이 바빠져야 할 시간이다. 머리는 이미 빠른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존 자료를 두 번 훑어보고, 불필요하거나 상황이 바뀐 내용들을 빼고, 보완해야 할 내용들을 고치고, 추가로 넣어야 할 내용들을 만들었다. 내용을 수정하면서 머리로는 끊임없이 강의 리허설을 돌렸다. 이 부분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여기서는 이런 농담을 하고, 여기는 좀 뜸을 들이면서 반응을 살피는 것이 좋겠어. 약 1시간 반 가량 내용을 수정한 후에는 맨 앞에서부터 강의할 내용들을 아주 빠르게 머리 속으로 돌리며 오류가 없는지 점검했다. 한 두 군데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발견해 다시 고쳤다. 한 번 더 점검을 마치고는 서둘러 준비하고 회의 장소로 출발했다.


전날 밤 진통제를 먹고 한 세 시간 정도 자고 깨서 밤새 잠을 못 잔 상태라 엄청 피곤했다. 긴 하루가 될 것이 뻔했다. 오전의 회의도, 오후의 강의도 모두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일이었다. 중간의 이동시간도 식사시간도 모두 아슬아슬하게 맞춰놓아서 조금만 실수하면 큰 일이 벌어질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회의도 무사히 마쳤고, 아슬아슬하게 기차를 탔고, 강의 장소 근처에서 아주 급하지 않게, 즉 조금은 여유있게 밥도 먹은 후에 강의 장소에 도착했다. 강의도 무사히 잘 마쳤다. 질의응답까지 실제로는 4시간 반을 강의했다. 마이크를 잘 활용했고, 중간에 목소리 크기를 적절히 조절했기 때문에, 마지막 시간에 조금 목이 아프긴 했지만 끝까지 강의를 마칠 수 있었다. 


강의를 요청했던 분과 강의를 들었던 분들 대다수가 만족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강의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돌아보면서 내가 또 미친 짓을 했구나 생각했다.



잘난 척


가끔 재수없게 잘난 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나는 스스로 잘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특정한 분야에서 남들의 인정을 받는 경우가 생기다보니 나도 모르게 자만심이 생기기도 한다. 


얼마 전에 아주 중요한 심사가 있었다. 예전에는 현장에서 발표 심사를 했었지만, 올해는 코로나 상황 때문에 온라인 발표로 진행한다고 연락을 받았다. 나는 강의나 발표를 할 때 현장에서 사람들의 호응에 반응하면서 열정적으로 설명을 하는 편이다. 준비는 철저하게 하되, 실제 진행은 매우 즉흥적이다. 듣는 사람들의 반응을 바로 바로 체크하지 못하면 뭔가 힘이 빠지고, 설명도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는 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온라인 강의가 무척 힘들었고, 도저히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중요한 발표를 온라인으로 해야 한다니! 왠지 자신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 빠른 것만 좀 조심하면 된다고 격려하고 조언했지만, 나는 어쩐지 자꾸만 실수를 연발할 것 같은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발표 날 아침. 소음의 영향이 적은 회의실을 대여해 노트북을 펼쳐두고 발표 리허설을 했다. 평소라면 그냥 머리 속으로만 했을텐데, 이번에는 발음을 신경쓰면서 또박또박 말하면서 시간을 쟀다. 늘 즉흥적으로 추가 설명을 붙이는 편이라 정해진 발표 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딱 시간을 맞추기 위해 아예 대본을 작성해 두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고, 화면에 작은 아이콘처럼 심사위원들의 얼굴이 여럿 나타났다. 대체로는 모르는 분들이었지만, 몇몇 아는 얼굴도 보였다. 그 아는 얼둘들을 보고 조금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폰으로 초시계를 작동시키고 화면 한쪽 구석에 작성해놓은 대본을 띄워두고 발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조금 호흡을 느리게 가져가면서 여유를 가졌다. 발음에 신경을 많이 썼다. 중반에는 내가 너무 대본에 적힌 대로 읽으니까, 듣는 사람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대화하는 것처럼 말을 바꾸다가 갑자기 특정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잠시 위기에 빠졌지만, 곧 다른 대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넘어갔다. 마무리는 중요한 내용을 반복해서 짚어주고 강조하면서 정해진 시간을 아주 살짝 넘겨서 마쳤다. 심사위원들의 평이 전반적으로 괜찮았고, 질문도 많았다. 각각의 질문들에는 여유있게 잘 답했다.


시간이 지나서 심사 결과가 나왔다. 무척 좋은 성적으로 상을 받게 되었다. 나 개인이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하는 일터, 즉 법인이 상을 받는 것이지만, 그게 다 내가 한 일이니 내가 상을 받는 것처럼 기뻤다. 무엇보다 자신 없었던 온라인 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그 심사 결과로 상을 받는 다고 하니 그 기쁨은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심사 결과를 듣고 나서 같이 일하는 후배 활동가랑 대화하면서 내가 평소에 발표 같은 걸로 긴장하거나 떨리지 않는데, 그때는 너무 긴장하고, 너무 떨렸었다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답했다. 국장님이 그렇게 자신없어 하시는 모습은 의외였다고, 그러면서 국장님이 발표하실 때는 전혀 걱정 안 해요. 라고 말하고 웃었다. 그냥 잘 한다는 말보다 내가 맡았을 때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그래서 친한 사람들에게 마치 농담처럼 잘난 척을 좀 했다. 당연히 그들은 또 잘난 척 한다고 무척 싫어하는 척을 했다. 이 못난 인간이 이 재미없는 삶을 살면서 가끔 이렇게라도 잘난 척을 좀 해줘야 그래도 살아갈 맛이 나지 않겠나 싶다.



괜찮은 척


생각해보면 살면서 제일 많이 하는 '척'은 괜찮은 척 인것 같다. 아픈데도 괜찮은 척, 슬프지만 괜찮은 척, 힘들지만 괜찮은 척, 자신없지만 괜찮은 척. 이건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렵겠다.


왜 그런가 생각해봤더니, 남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곰곰히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냥 있는 그대로 표현하거나 드러내지 못하고 자꾸만 괜찮은 척을 해왔던 것 같다.


내가 자주 하는 척들. 미친 척, 잘난 척, 괜찮은 척 중에 가장 나쁜 것은 아마도 괜찮은 척이 아닐까 싶다. 미친 척은 내 몸과 정신 건강에는 크게 상하게 만들지만, 그만큼 집중하고 온 몸의 에너지를 쥐어 짜내기 때문에 대개는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른 피해나 손해를 만들지는 않는다. 잘난 척은 대부분 농담인 것처럼 위장하는 편이고, 대체로 남들이 인정해주는 분야에 한해서 하는 편이라 역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괜찮은 척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은데, 그 중에 잘못해서 오해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상처가 되거나 피해를 주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어떤 상황에 대해 당시에는 괜찮은 척 했지만, 나중에 그것으로 인해 다른 상황으로 이어지고 그 괜찮은 척이 그 원인이 되었음이 밝혀지면, 그때 왜 그랬냐고 추궁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사회생활도 그렇고 친한 지인들과의 인간관계도 그렇고 언제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척을 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내 경우에는 위 세 가지 경우가 가장 흔히 하는 행동인 것 같다. 사실 평소 내가 이렇구나 하고 깨닫는 것 조차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반응하거나 행동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이제 이런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할 것인지 찬찬히 생각을 해봐야겠다. 


오늘도 중요한 일정이 있는데 미친 척을 하느라 잠을 잘 못 잤다. 오후 중요한 일정을 무사히 잘 마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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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8-26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회가 된다면 감은빛님 강연을 오프라인에서 들어보고 싶네요.

붕붕툐툐 2021-08-26 13:32   좋아요 0 | URL
저도요~ 감은빛님 강연 듣고 싶어요~~

감은빛 2021-08-26 13:39   좋아요 0 | URL
오! 다락방님과 툐툐님께서 들어주신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ㅎㅎ

이 글에서 이렇게 잘난 척을 내놓았는데,
막상 강의를 들으시고 실망만 하시면 어쩌나 걱정도 되네요.

저는 강의하는 걸 좋아하고, 듣는 분들과 소통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좋게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겸손한 척! ㅎㅎ)

붕붕툐툐 2021-08-26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미친 척에서 엄청 조마조마했어요~ 찾아서 제가 다 너무 기뻤습니다~
오늘도 잘 마치실 거예요! 빠샤!!

감은빛 2021-08-26 13:40   좋아요 0 | URL
정말 못 찾았다면 어땠을까? 어휴! 상상도 하기 싫네요.
응원 고맙습니다!
툐툐님의 응원 덕분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람돌이 2021-08-2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연듣고 싶은 사람 1인 추가합니다. ㅎㅎ
저는 님의 저 척3시리즈에 예쁜척 하나 더 추가합니다. ^^

감은빛 2021-09-16 16: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돌이님.
한창 정신없이 지냈더니 답이 많이 늦었네요.

예쁜척!
저도 한 번 해보고 싶은 척인데,
제가 하면 아마 살인이 날 것 같아 참아야겠네요. ^^

희선 2021-09-01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자료를 준비한 시간이 마흔여덟 시간이나 걸렸다니, 찾아서 다행입니다 오래된 건 자신이 둔 곳을 잊어버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 둔 곳은 생각나지만 잘 둔다면서 옮긴 곳은 생각나지 않는... 힘들었다 해도 잘 하셨네요

감은빛 님 좋은 구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1-09-16 16: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희선님.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요즘 건망증이 좀 심해진 것 같아요.
자주 뭔가를 찾기에 애를 먹어요.
이것도 나이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아서 슬프네요.

어느새 9월도 절반 이상이 지나갔네요.
곧 추석이라 남은 절반도 휙 지나가버릴 것 같아요.

즐겁고 편안한 명절 보내세요! 희선님.
 

활동가 인터뷰 모음집


 













5월에 인터뷰 기사에 대한 글(https://blog.aladin.co.kr/idolovepink/12630823)을 여기 알라딘 서재에 썼고, 여러 이웃분들이 인터뷰 기사 링크를 원하셨는데, 그때의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링크를 거는 행위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때 그 인터뷰 기사는 사회복지 분야 활동가(과거에는 흔히 빈민투쟁이라 불렀던) 였던 기자가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짧게 들여다본다는 기획으로 이어오던 활동가 인터뷰 연속 기사에 포함되는 글이었다. 활동가라는 단어의 뜻과 존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그런 주제로 연속 기사를 쓸 생각을 했다니 신기한 일이다. 아마 기자 자신이 활동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기획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흔히 시민사회 진영이라고 불리는 이 운동판 안에서도 이미 유명한 사람들은 제외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묵묵히 노력하는 잘 보이지 않는 활동가들을 만나겠다는 기자의 기획의도도 참 공감이 간다. 특히 기자 본인이 몸 담았던 분야 자체가 이 운동판 안에서도 무척 마이너한 분야이고, 그런 경험과 인맥 덕분에 정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꾸준히 노력해 온 여러 활동가들의 삶을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터뷰 기사들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제목은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라고 지었던데, 글의 주제와 별로 상관이 없어 보여서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부제를 보면 확실히 이 책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써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사실 인터뷰 글은 매우 쓰기가 어렵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과 글을 옮겨야 하는 것이고, 그 안에 원하는 주제와 흥미로운 글감을 잘 녹여내야 하며, 내 주관도 살짝 그러니까 도드라지지 않지만 그래도 확실히 인지할 수 있는 정도로 넣어야 한다. 


인터뷰 글은 기본 시작부터가 힘든 작업이다. 인터뷰이에 대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먼저 정리해야 하고, 그 내용들을 잘 끌어내기 위한 질문을 잘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사전 준비를 잘 했다고 해도, 인터뷰 당일 현장의 진행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되도록 인터뷰이가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서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고, 그를 위해 적절한 대화의 스킬도 필요하다.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한 질문들을 적절한 순서로 던지고, 그 답이 원하는 방향과 흐름으로 나오는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체크해야 한다. 만일 현장에서 원하는 답이 잘 나오지 않으면 급하게 질문을 바꾸거나 방향을 선회하는 임기응변도 필요하다. 사전 준비를 아무리 잘 했어도 현장에서 순간 방심하면 결국 원하는 만큼의 정보는 얻지도 못하고 인터뷰 시간만 허비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인터뷰를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은 인터뷰 하기 전에 함께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면서 조금의 친분을 쌓고 본격 인터뷰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인터뷰가 끝나면 이제 녹취록과 메모와 기억을 바탕으로 글을 써야 하는데, 여기가 제일 난감하고 어렵다. 제일 쉬운 방법은 질문자의 질문과 답변자의 답변을 분량에 맞게 옮기는 것인데, 이 경우에도 분량에 맞게 조절하기 위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고, 불필요한 표현이나 첨언한 부분들 등을 넣고 빼는 등의 재배치가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답변자의 말투나 늬앙스를 그대로 살려야 하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이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대부분의 경우 전체 글의 구성을 먼저 그린 다음 답변한 내용들을 잘 배치하여 매끄러운 글을 다시 써야 한다. 중간중간에 답변자의 말을 그대로 옮겨서 삽입하는 것은 괜찮지만, 기본 글은 인터뷰어가 직접 써야 한다. 이 부분이 참 어렵다.


물론 이건 내 개인의 경험에 따른 평가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나는 한동안 잡지에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는데, 그 몇 달이 너무 힘들었다. 그 후로 절대 인터뷰 글은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뷰 글이 어렵다는 걸 이렇게 길게 나열하며 강조하는 이유는 이 인터뷰를 쓴 기자가 아니 이제 책을 냈으니 이 책의 저자라고 불러야겠군. 암튼 이 저자가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글을 상당히 잘 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장 내 인터뷰만 해도 그렇다. 나는 인터뷰 시간 내내 엄청나게 많은 내용들을 떠들었는데, 나중에 인터뷰를 마치고 과연 이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실은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인터뷰를 해봤지만, 나중에 기사를 보면 꼭 뭔가 사실관계가 다르거나, 미묘하게 왜곡된 경우가 많았고, 아예 내가 하지도 않았던 표현이나 내용이 들어가있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기사를 읽어보고 내가 만족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번이 거의 유일하게 만족한 경우였다. 정리한 초고를 읽으며 조금 감탄했다. 그리고 부러웠다. 내가 그렇게 어려워하는 인터뷰 글을 이 사람은 참 잘 쓰는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자로부터 책이 알라딘에 등록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책을 주문했다. 아직 책을 받기 전에 아이들에게 책 표지를 보여줬더니, 아이들은 곧바로 내 이름을 찾아냈다. 비록 저자로 이름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인터뷰이로서 올라간 것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출간된 책 표지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은 처음이다.


그 전에 공저자로 참여했던 두 권에 책에서는 책 표지에 조금은 유명한 대표저자의 이름만 넣고 나머지 다수의 저자들은 '등' 혹은 '외'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두 번의 경우 모두 여러 명의 '등' 혹은 '외' 중 하나였을 뿐, 표지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다.


공저자로 참여해 짧은 글을 실었던 두 번 모두 여기 알라딘에 책을 소개했을 때, 여러 이웃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반응을 보여주셔서 무척 기쁘고 행복했다. 덕분에 이 알라딘 서재에 정을 붙이고 아직도 이렇게 가끔 들어와 글을 쓰고 또 그리운 이웃들의 글을 읽게 되었다. 이후 언젠가 내 이름을 걸고 책을 낼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늘 이런저런 핑계로 한번도 책으로 엮을만한 글을 써보지 못했다. 기획안을 출판사에 내봤다가 서로 의견을 조정하거나, 출판사를 운영하는 선배가 먼저 기획한 내용을 검토해 본 적은 있었지만, 매번 조율하는 단계에서 더 나가지를 못했다. 여러가지 핑계를 댈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활동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 내 삶에 책을 쓸 만큼의 여유는 없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첫 책을 낸 이 책의 저자에게 축하하는 마음과 함께 살짝 질투가 나기도 한다.


이 활동가 모음집은 18명의 활동가들을 소개한다. 여러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나이도 성별도 활동경력도 활동분야도 제각각이다. 그 다양함이 참 마음에 든다. 물론 그 각각의 삶을 들여다보기에는 글이 너무 짧다는 한계도 있다. 게다가 글의 촛점은 활동가 개인의 삶에 맞춰져 있어서 관심이 가는 활동을 더 소개해주지 않는 것도 아쉽다. 다만 이 건 저자가 의도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 아쉬움은 개인적인 취향일 뿐, 글의 완성도와는 관계 없다.


이 책에서 소개한 활동가들 모두 다 훌륭한 분들이라, 여러가지 느낀 점이 많았다. 공통적으로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라 그 삶의 고단함에 대해 무척 공감이 가고, 그 현실의 무게감에 마음이 내려앉기도 한다. 그럼에도 혹은 그래서 더욱 이런 글이, 이런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잘난(돈 많은, 외모가 멋진, 큰 힘을 가진)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드러나고 더 많이 읽히고 더 많이 전해지면 좋겠다.


※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이웃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합니다. 제 이야기가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맞지만, 꼭 제 이야기를 읽어주십사 추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훌륭한 활동가들의 이야기가 훨씬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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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17 17: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꼬옥 읽어보겠습니다 감은빛님,
활동가들분이 계셔서 우리의 삶에 그나마 무지개 빛이 비쳐지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감은빛 2021-08-26 13:29   좋아요 1 | URL
아이고, 꼭 읽어보겠다고 말씀해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네, 그렇죠. 이 사회가 참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면이 많지만,
그래도 훌륭한 활동가들이 많이 계시기에 조금은 살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syo 2021-08-17 2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도 되게 이쁘다 ㅎㅎㅎㅎ 😆
어쨌든 축하합니다 감은빛 님. 축하드릴 일이 맞지요? ㅎㅎ

감은빛 2021-08-26 13:30   좋아요 1 | URL
네, 쇼님. 축하해주셔 고맙습니다!
쇼님의 서재에 통 가보질 못하고 있네요.
조만간 들러 숙제하듯 글들을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21-08-17 2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담담책방을 운영하는 목사님이 예전에 NGO 활동을 했어요. 책방지기님에게 이 책을 책방에 들여놓으라고 전하겠습니다. ^^

감은빛 2021-08-26 13:32   좋아요 1 | URL
오! 시루스님. 고맙습니다!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점점 더 다양한 분야의 NGO가 생기고 있어요.
책방지기님은 어떤 활동을 하셨었는지 궁금하네요.

바람돌이 2021-08-18 0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우 축하드립니다. 책을 쓰는것도 축하할 일이지만 이번에는 감은빛님이 책 속 주인공이신거잖아요. 축하 축하!!!

감은빛 2021-08-26 13:33   좋아요 1 | URL
네, 제 분량은 짧지만, 그래도 제가 주인공이긴 하네요.
축하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바람돌이님.

얄라알라 2021-08-18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일상에서 ˝활동가˝라는 말을 자주 쓰고, 또 ˝활동가˝라 하는 분들을 만나지만 정작 ˝활동˝하시며 그 분들이 어떤 뜻을 품고 펼치시는지 잘 모르는데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은빛님 축하드리고 좋은 책 세상에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은빛 2021-08-26 13:34   좋아요 1 | URL
북사랑님. 고맙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시는 분들 삶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이 책이 참 좋은 것 같아요.

붕붕툐툐 2021-08-1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감은빛님 표지에 이름이 실리시다니~ 넘 멋진 일입니다! 축하드려요~ 저도 꼬옥 읽어볼게용! 과연 저 18명 중에 감은빛님을 찾을 수 있을지~ 두둥!!ㅎㅎ

감은빛 2021-08-26 13:35   좋아요 1 | URL
툐툐님. 항상 고맙습니다!
툐툐님께선 제 서재 글을 여럿 읽으셨으니,
아마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음, 괜히 부끄러워지네요.

희선 2021-08-2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예전에 텔레비전 방송에서 인터뷰 했는데 그게 거의 잘렸다는 말씀을 하셨군요 그것과 이건 달라서 다행입니다 감은빛 님이 말씀하신 걸 잘 담아서 기분이 좋았겠습니다 축하합니다 ‘활동가’를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런 분이 있어서 세상이 아주 안 좋아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보이지 않는 사람도 많겠지요

언젠가 감은빛 님 이름으로도 책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1-08-26 13:36   좋아요 2 | URL
희선님. 고맙습니다!
예전에 썼던 티비 인터뷰 이야기를 기억해주셨군요.
저 역시 제 이름으로도 책이 나오기를 바라지만,
이렇게 게을러서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부지런해져야 할텐데, 쉽지 않네요.
 

에너지자립마을 첫 강의 때 폭염에 대해 특별히 길게 강의를 하고, 일주일 후에 두번째 강의를 하러 갔더니 첫 강의를 들었던 어르신 한 분이 선생님 강의를 듣고 나니 에어컨을 마음껏 켜기가 망설여진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인류가 편하게 살려고 에너지를 많이 쓰다보니 폭염이 이렇게 심해진 것인데, 이 폭염 때문에 또 에어컨을 마구 사용하면 점점 더 기후위기가 심해진다고 내가 설명하긴 했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에어컨을 켜지 않으면 이 더위를 견딜 수 없을텐데.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몇 천명씩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나온 것도 모두 열악한 주거 환경 때문이었던 것을.


그래서 질문하신 어르신을 포함해 현장 참석한 소수의 수강생과 줌으로 연결된 다수의 온라인 수강생들 모두에게 전했다. 다양한 기후 현상들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 폭염이라고. 폭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에어컨 사용은 꼭 필요하다고. 다만 전기요금을 아끼기 위해서라도 현명하게 사용하셔야 한다고. 이어서 한 20분에 걸쳐서 에어컨 사용 꿀팁을 자세히 설명했다. 선풍기나 에어서큘레이터를 적극 활용하면 좋고, 바닥에 놓고 사용하는 선풍기 보다 천장에 매다는 실링팬이나 벽걸이 선풍기를 설치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했고, 온도 설정 방법을 비롯해 여러 노하우들을 알려드렸다.


사실 가장 더운 날에 에너지를 아끼는 좋은 방법은 무더위 피난처를 만드는 것. 마을 단위 혹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가장 더운 날 저녁에 모여서 맛난 음식을 먹으며 함께 무언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각자의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냉방에 사용할 에너지를 아끼고 그 시간을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값지게 쓰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가장 무더운 날 밤에 다큐 시청회를 열어 밤새 환경 다큐들을 함께 보기도 했고, 또 다음 해에는 작은 음악회를 열어서 각자가 좋아하는 음반을 갖고 오거나 유튜브로 검색해서 음악을 소개하고 함께 듣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물론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꿈도 못 꿀 일이 되어버렸다.


그나저나 올해 여름은 나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만든다. 명색이 환경운동가로서 집에 에어컨을 들일 수는 없다는 일종의 자존심이 있기도 하고, 낡은 빌라의 집 구조상 에어컨 설치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도 있었다. 절대 돈이 없어서 설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겨우 여름에 며칠 쓰려고 그걸 설치해야 하나 싶은 마음도 있다. 암튼 아직 에어컨이 없는 이 집에서 여름을 나는 일이 정말 고역이다. 


2018년에도 무지 더웠는데, 왜 유난히 올해 더 견디기 힘들까 싶어서. 2018년은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때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만나고 늦게까지 외부에 머무는 일에 특별히 제약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낮에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에어컨이 있는 곳(주로 술집)에서 누군가와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열대야 때문에 일찍 집에 들어가면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되도록 늦은 시간까지 시원한 외부에서 시간을 보내야했다. 간혹 저녁 일정이 없는 날에는 일부러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특별히 무더웠던 2018년 여름에도 집에서 고통받았다는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확실히 코로나에 무더위가 겹쳐서 더 큰일이 된 느낌이다. 최근 4차 대유행 때문에 일부러 며칠을 재택근무를 했다. 사무실에 나가면 그래도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데, 집에서 일을 하려니 선풍기 3대를 각각 다른 방향에서 틀어놓아도 별로 시원하지가 않다. 그닥 시원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바람이라도 쐬어야 견딜 수 있으니 선풍기를 도저히 끌 수가 없었다. 밤에도 열대야라서 선풍기를 켜놓고 잠을 잤는데도 너무 더워서 땀을 흘리다 깨곤 했다. 선풍기 3대는 24시간 아니 48시간 이상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지만,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흘러서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덮어쓰고 땀을 씻어내야 했다.


우리 집은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엄청 높은 곳에 위치하고 평소에 바람도 잘 들어오는 편인데, 이번 여름에는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더운 날에는 바람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엄청 들어와서 오히려 춥다고 느낀 날도 있었는데, 올해는 그런 날이 거의 없었다.


2018년에 이어 올해 온갖 기상 이변이 속출하면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캐나다와 미국 서부는 54도에 이르는 폭염과 산불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고, 미국 동부는 폭풍과 홍수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폭염으로 인한 피해를 와중에 독일은 갑작스런 폭우로 큰 피해를 당했다. 아프리카와 중동도 폭염 피해를 입은 건 마찬가지고, 인도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과 일본은 폭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우리나라 역시 간혹 국지적인 소나기가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산사태를 비롯한 침수 피해 등을 여러번 입었다. 우리나라의 폭염은 온도만 놓고 보면 다른 나라들에 비할 비가 못 된다. 나는 이미 이렇게 죽을 것 처럼 더운데,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겨우 36도일 뿐이다. 물론 습도라는 변수가 존재하지만. 미국과 인도와 중동처럼 50도가 넘어가는 동네에서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이미 몇 해 전부터 기후위기 강의를 할 때마다 2010년대 들어서서 심해진 세계 여러 나라들의 기상 재앙 현상들을 소개하면서 특히 폭염에 대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다뤘었다. 점점 인터넷 환경이 발달하면서 이런 이상 기후 현상들에 대한 정보들도 많이 공유되고 있다. 다른 이상 기후 현상들에 비해 유독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바로 이 폭염이다. 10여년째 이어오고 있는 이 폭염으로 인한 사망 통계수치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에어컨은 이제 인권의 영역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수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에어컨과 전기요금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세상.


코로나-19 시대를 설명하는 다른 단어는 아마 온라인 시대 혹은 비대면 시대일 것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실내에 갇힌 채,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교통수단에 이용되는 1차 에너지는 확실히 줄었다. 분명 해외여행이 금지되어 항공 운행이 급격히 줄었던 것은 온실가스 저감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온라인으로 영상을 보거나 수업을 듣는다. 영화관에 가는 대신 영상 콘텐츠들(영화나 드라마 등)을 모아놓은 몇몇 업체들에 접속해 집에서 혼자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하루종일 수많은 영상을 소모하는 요즘 사람들 덕분에 구글을 비롯해 영상을 주로 제공하는 기업들의 데이터 센터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전력을 소모하고 있다.


내가 방 구석에서 뒹굴거리며 영화 한 편 보는 행위는 지구 어딘가의 데이터 센터에서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영화를 보는 행위는 곧바로 기후 위기를 악화시키는 행위가 되고, 퇴근 후 혼자 좋아하는 영화 하나씩 보고 잠드는 것에도 죄책감을 느껴야 할 상황이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구글을 비롯한 많은 글로벌 기업들의 데이터 센터는 태양광을 비롯해 100퍼센트 재생에너지로만 운영하려고 노력 중이라는 소식을 몇 해 전부터 듣긴 했다. 죄책감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내려 놓을 수 있으려나.


지금의 기후 위기는 이미 인간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티핑 포인트를 지났다는 것이다. 반면 IPCC를 비롯해 국제적으로는 1.5도 안에서 지구 평균 온도 상승을 막을 수 있다면 희망이 있다고 보는 듯 하다. 과연 인류는 다른 수많은 생물종처럼 기후 위기로 멸종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과연 이 여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단지 혼자 에너지를 아껴 쓰는 실천 외에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까? 기후 악당으로 낙인 찍힌 대한민국 정부의 헛발질 속에서 나는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 외에 무엇을 시도할 것인가? 여러 생각과 질문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모르겠다. 일단 며칠에 걸쳐 두서없이 두드린 이 글을 마무리 하고 다시 일을 해야지. 당장 뭔가 답이 안 나오고 답답하기만 하더라도 내 노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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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8-02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있고 있어도 전기세가 많이 나올까봐 에어컨을 비롯한 가전제품을 오래 켤 수 없어요. 코로나에 지치고, 더위에도 지치고.. 올해 여름도 험난하게 보낼 것으로 예상합니다.. ^^;;

감은빛 2021-08-17 17:26   좋아요 1 | URL
8월 중순이 되니 조금은 더위가 꺾이는 느낌이네요.
이제 다시 장마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고,
어제와 오늘은 난데없이 국지성 호우(열대지방에서 스콜이라고 부르는)가 짧게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네요.

재미있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시루스님처럼 ‘전기세‘ 라는 표현을 잘 쓰지요.
실은 전기를 쓰고 요금을 내는 건 세금이 아니니까 ‘전기요금‘이라고 불러야 하죠.
그런데도 대다수 국민들이 저런 표현을 한국전력이 전력의 송전과 배전을 독점하는 구조이고, 그 한전이 공기업이었다가 민영화 되었기 때문이겠죠.
다른 대부분의 국가처럼 민간 기업이 발전, 송전, 배전을 나눠서 맡고 있는 경우라면 저런 말이 아예 생기지도 않았을텐데요.

바람돌이 2021-08-02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어컨을 열심히 틀어대고 있습니다. 창을 열어도 바람이 안불어요. 선풍기는 더운 바람만.... 말씀하신대로 코로나 때문에 계속 집에만 있게 되니 더 덥네요. 하루종일 에어컨과 찬음료들로 연명...ㅠ.ㅠ 에어컨을 틀면서 항상 마음한켠 불편함과 그래도 어떡해라는 마음이 부딪히는데 어쩌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이 항상 이런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거 같아요.

감은빛 2021-08-17 17:29   좋아요 1 | URL
네, 바람돌이님. 선풍기는 정말 더운 바람만 보내더라구요.
정말 더울 때는 선풍기 3대를 돌려도 땀이 흐러더라구요.
우리나라가 이 정도인데, 40도를 넘어서 50도에 이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떨지 상상도 하기 싫네요.

이 더위에 에어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 같아요.
다만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가능하면 에너지를 아끼면서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죠.

붕붕툐툐 2021-08-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올해 에어컨 한 번도 안 틀었어요!(칭찬 포인트!)
제가 워낙 더위를 잘 안 타기도 하고, 낮에는 도서관으로 피서 다니고(이건 코로나여도 진짜 어쩔 수 읍따!), 밤엔 그나마 산동네여서 바람이 불어오더라구요. 더워서 깬 적이 딱 하루 뿐이었어요~
하지만 말씀에는 참 공감합니다. 모든 해결 키워드는 공동체 혹은 함께가 아닐까 싶어요~
저도 혼자 할 수 있는 건 한다고 하는데, 여럿이 함께 고민하면 더 좋겠지요? 오늘 이런 화두를 던져 주신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고 좋네요!

감은빛 2021-08-17 17:31   좋아요 1 | URL
와! 저는 에어컨이 없으니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에어컨이 있어도 이 더위에 한번도 사용을 안 하셨더니!
붕붕툐툐님은 위대한 선지자 혹은 선각자 이런 단어가 어울리는 분이시군요.
존경합니다! 툐툐님. ^^

카스피 2021-08-03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도 기상 이변은 계속 될텐데 과연 에어컨 없이 여름을 날수 있을지 무척 걱정이 됩니다.전 선풍기 하나로 버티고 있는데 밤에 거의 한시간 마다 꺠도 있어요ㅜ.ㅜ

감은빛 2021-08-17 17:33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카스피님.
선풍기 하나로는 힘들어요.
저는 세 개로도 부족한걸요.
올해 여름 더위는 이제 한 풀 꺾였다는데,
저는 벌써부터 내년 여름 더위가 또 걱정이네요.

희선 2021-08-14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나라는 온도가 더 많이 올라가기도 하다니... 팔월 둘째주가 지나면 큰 더위는 없다고 하지만, 아침에만 좀 시원합니다 이것도 시간이 더 가면 저녁에도 시원하겠습니다 이제는 밤에 바깥에 나가면 바람이 시원할지도 모르겠네요 제 방이 좀 더워서 여전히 덥다고 생각하네요 그래도 선풍기만 씁니다 많은 건 못하겠지만, 지구 온도 지금보다 더 올라가지 않기를 바라야겠습니다


희선

감은빛 2021-08-17 17:35   좋아요 2 | URL
네, 희선님처럼 실천해주시는 분들이 많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다만, 이건 개인의 실천이 미치는 영향 보다는 정책과 시스템의 문제라서요.
무조건 정부가 해결의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하는데,
이 나라 정부는 거꾸로 가면서 마치 노력하는 것처럼 입으로만 떠들어대니 문제입니다.